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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 스리마일 원전사고의 경위와 피해

천아1234 2021. 7. 29. 12:42

※ 체르노빌 (Chernobyl / Чорнобиль) 원자력 발전소 사고

사고의 발생

 

체르노빌 원전사고는 1986년 옛 소련(현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 핵단지에서 발생한 사고로, 유일하게 원전 사고 최고 등급인 ‘대형사고’ 7급을 기록하고 있다.

 

벨로루스와의 국경에서 7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체르노빌 핵단지에는 모두 4기의 원자로가 있었다. 1977~1983년 사이에 각각 운행을 시작한 네 개의 원자로는 모두 소련이 개발한 흑연방식 원자로로, 100만kW급에 이르는 대형 규모였다.

 

사고는 발전소가 정전이 되었을 때 설계상의 비상전력공급체계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하려는 실험에서 비롯되었다. 1986년 4월 26일 새벽, 기술자들이 출력과 관련한 안전수칙을 지키지 않은 상태로 제 4호기의 작동을 멈추었고, 냉각펌프에 전달되는 전력량이 감소하면서 냉각수의 양이 줄어들었다. 이로 인해 노심이 과열되어 수증기를 급격히 증가시켰고, 실험 시작 1분 만에 첫 번째 폭발이 발생했다. 이 폭발로 원자로의 지붕이 날아가고 내부에 있던 방사능 물질들이 주위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곧이어 수소폭발 혹은 핵폭발로 추정되는 두 번째 폭발이 일어나 다량의 핵물질이 쏟아져 나왔다.

 

원자로에서 분출한 방사선 물질은 1km 상공까지 치솟았으며, 이 물질들은 북서풍 바람을 타고 벨로루스까지 날아갔고, 불타는 물질들이 원전 여기저기에 떨어져 곳곳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이에 즉시 소방대원의 진화작업이 시작되었는데, 물을 쏟아 붓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외부의 불은 끌 수 있었지만, 원자력 내부에서 불타는 흑연과 핵연료는 식힐 수 없었으며, 오히려 쏟아 부은 물이 수증기가 되면서 위로 솟구쳐 올라 더 많은 핵물질이 외부로 방출되었다.

또한 헬기들이 진화물질과 중성자 흡수물질 그리고 오염물질의 방출을 막기 위한 모래와 흙을 쏟아 부었으나, 솟구치는 고농도의 방사선 물질 때문에 작업이 제대로 수행되기 어려웠고, 모두 1800여 횟수의 헬기 비행이 기록되었다. 흑연에 붙은 불은 결국 9일 동안이나 계속되었고, 체르노빌 사고로 인해 방출된 방사선의 대부분은 이 흑연 화재 때문에 발생했다.

 

체르노빌 핵발전소 폭발은 전체 우라늄 연료의 3.5%인 약 6억 톤에 해당하는 물질을 방출시켰다고 알려져 있다(그러나 피해국가의 여러 과학자들이 이보다 3~4배 많은 65~80%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이 물질들은 요오드, 세슘, 제논, 크립톤 등으로 방사선량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핵폭탄의 200배 수준이었다.

 

방사능 누출은 최종적으로 원자로를 거대한 콘크리트로 둘러싸는 작업(석관)이 이뤄진 후에야 아주 낮은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5월에 시작된 석관 작업은 11월에야 완공되었는데 완전히 밀폐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핵물질은 계속 유출되고 있으며, 안정성에도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현재 적어도 4톤 이내의 방사성 물질이 아직 석관 내에 남아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방사능 물질의 확산과 피해

사고 발생 직후 소련은 사고 사실을 숨겼다. 그러나 스웨덴 핵발전소 직원의 의복에서 높은 수치의 방사능이 발견되면서 국제사회의 요구가 빗발치자 마지못해 사실을 시인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방사선에 오염된 대기구름이 스칸디나비아 반도, 네덜란드, 벨기에 그리고 영국을 지나버린 후였다. 그리고 오염구름은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유럽 전역을 뒤덮었다. 사고로 인한 방사선 오염도는 미국과 일본 등 북반구 전체에서 감지되었다.

 

 

 

체르노빌 핵단지에서 3km 떨어진 인구 4만 9천명의 도시 쁘리쁘야트타운은 사고 다음 날인 4월 27일 소련 정부에 의해 대피령이 내려졌고, 발전소 반경 30km 내 11만 6천명의 주민이 사고 직후에, 21만 명의 주민이 1990~1995년 사이에 추가로 이주되었다. 인접국인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에는 아직도 농업제한 구역이 있으며, 영국 중북부 지역은 지금도 양의 사육과 판매에 대한 제한조치가 계속되고 있다.

 

 

사고 당일 현장에 투입된 발전소 노동자와 소방요원들이 가장 높은 방사선 오염에 노출되었다. 31명이 현장에서 사망했는데, 1명은 폭발로 1명은 심장혈전으로 다른 1명은 화상으로 그리고 나머지 28명은 급성 방사선증상으로 사망했다. 반경 30km 지역의 오염제거를 위해 22만 6천명이 1986년부터 2년 동안 동원되었는데, 이들 역시 고농도 방사선에 피폭되었다.

 

100여명으로 구성된 국제 과학자팀의 조사 결과, UN은 체르노빌 사고의 방사선 노출로 모두 4,000명이 사망할 것이라 예측했고, 주로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서 4000건의 갑상선암이 발생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UN이 체르노빌 사고의 건강피해를 축소 보고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면서 2006년 유럽의 전문가들이 독립적인 연구결과로 토치(TORCH) 보고서가 발표된다. 토치 보고서는 체르노빌의 방사성 낙진이 사고지역으로부터 8,000km나 떨어진 일본 히로시마지역에서도 검출되었고, 3만~6만명의 초과 암사망을 예상했다. 또한 벨로루시에서만 1만 8천~6만 6천명의 갑상선암 추가 발생을 예상했다.

 

그린피스는 체르노빌 참사 20주기를 맞아 유럽 전역의 보건학 및 의학 전문가 60명이 참가한 대규모 건강피해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체르노빌 사고로 인한 방사능 오염이 70년간 지속되어 벨로루스에서만 21만 420명, 그 외 다른 나라들에서 71만 660명이 사망하여 모두 93만 80명이 사망할 것이라 예측했다. 또한 갑상선암은 2056년까지 모두 13만 7천건, 유방암 등 고형암은 12만 3천건이 발생할 것으로 내다봤다.

스리마일섬(Three Mile Island) 원전사고

1979년 3월 28일, 미국 펜실베니아 주의 스리마일 섬 원자력발전 2호에서 발생한 역사상 최초의 대형 핵발전소 사고로, 원전 사고 5등급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는 사고’로 기록되었다. 지난 3월 18일 등급이 상향조정된 후쿠시마 사고도 현재 5등급을 기록하고 있다.

 

사고는 냉각재 상실로부터 노심용융에 이른 전형적인 형태였다.

발단은 2차 냉각수의 펌프가 이상을 일으켜 정지한 데 있었다. 이로 인하여 1차 냉각수의 압력이 올라가고 원자로는 정지함과 동시에 압력제거벨브가 열려 증기를 내뿜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자동으로 닫혀졌어야 할 이 벨브가 닫히지 않는 바람에 1차 냉각재가 상실되었고 그와 함께 2차 보조급수를 하는 배관 사이의 벨브는 정상대로 닫혀 있는 바람에 2차 냉각도 정지하고 말았다.

결국 가열된 물이 수증기가 되어 외부로 유출되었고 핵 연료봉을 싸고 있던 피복이 고온에 의해 파손되면서 다량의 방사능이 누출되었다. 그리고 사건 발생 2시간 20분 만에 이상을 일으킨 원인인 압력제거벨브가 열려있던 것이 발견되어 이를 복구하고 냉각재가 흘러나가는 것을 막았다.

물은 더 이상 빠져나가지 않았지만, 노심용융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 원자로 안에 수소가 발생해 소규모적인 폭발을 일으키기 시작하였고, 곧바로 치명적인 대폭발로 이어질 위험 사태가 발생하였다. 사고 이틀 뒤에 피난 권고가 내려지는 등 공포는 계속되었고, 위기적 상황은 이후 며칠에 걸쳐 계속되었다.

다행인 것은 용융된 노심이 원자로용기를 뚫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노심이 핵분열을 시작한지 3개월 밖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핵분열 생성물질이 많이 생성되지 않아 열이 금방 감소한 것과 사고 중 간간히 냉각수가 유입되어 약간의 냉각이 이루어졌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만약 가동기간이 긴 원자로에서 이러한 사고가 발생했다면 사고 규모는 훨씬 더 컸을지도 모른다.

 

미국정부는 방출된 방사능으로 인한 인체 영향이 경미하다고 발표했으나, 환경단체에서 독자적으로 벌인 조사에 따르면 암 발생률과 백혈병의 증가, 유아 사망률 상승, 가축피해 등이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 참고자료
– 미래를 위한 기억. 체르노빌 핵사고 20주년 (환경연합 시민환경연구소. 민주노동당 2006)
– 에너지 대안을 찾아서 (이필렬 창작과비평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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