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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기자 김대중을 만든 세가지 힘...그의 필력, 회사의 배려, 독자의 관심 본문

기자 김대중에 관하여

50년 기자 김대중을 만든 세가지 힘...그의 필력, 회사의 배려, 독자의 관심

천아1234 2021. 4. 11. 11:53

김대중 조선일보 고문이 ‘기자 50’년을 기록한 것은 한국 언론사에 길이 남을 일이다. 50년이란 세월도 그렇고, 반세기 동안 줄기차게 글만 썼다는 것도 그렇고, 그런 그에게 그럴 언덕을 제공해 온 조선일보의 배려도 그렇다. 그의 글을 꾸준히 읽어주고 공감해 주고 비판해 준 독자들 또한 예사롭지 않다. 그 곁에서 그와 함께 취재하고 글 쓰고 신문을 만들어 온 언론동료들 역시 덩달아 짠한 감개를 느낄 ‘김대중 기자 50년’이다.

언론인 김대중과 그 동시대인들은 한 생애에 4~5 또는 5~6종류의 삶을 산 세대다. 보통은 한 생애에 그저 한두 종류의 시대를 살다가 간다. 그런데 이 세대는 여러 종류의 시대를 살았다. 우선 독립국도 아닌 식민지에 태어나 10살이 채 안 됐을 때 8. 15 해방을 맞았다. 이어서 6. 25 전란 후의 ‘국민소득 80달러짜리’ 빈곤의 시대를 살았다. 그러다가 민주주의 교육을 받고 “왜 이대로 하지 않느냐?”고 따져도 보다가 어느 날 아침 눈을 떠보니 5. 16 군사 쿠데타로 세상이 확 변해 있었다. 그리고 박정희 시대 18년. 바로 우리 세대의 청춘기와 맞물렸던 산업화 시대였다. 그리고 온 것이 1980년대 후반의 민주화, 90년대 초를 전후한 소련-동구권 붕괴, 2000년대의 ‘민주화 이후’와 정보화 시대였다. 그리고 우리는 ’실버‘가 되었다.

권위주의 권력의 몽둥이와 민주화 이후 권력들의 치사함에 굴하지 않아

기자 김대중은 적성(適性)에 썩 맞지 않을 성싶은 법과대학을 나와 공군장교 생활을 마치고서야 비로소 그의 최고의 적성, 언론과 만났다. 그것도 조선일보라는 최고의 적성과. 개인 김대중의 취향과 능력, 조선일보라는 터전, 그리고 격동의 시대라는 배경-이 3가지가 어우러져 언론인 김대중의, 일세를 풍미한 명(名) 논설들이 분출했다.
언론인 김대중의 논조는 한 마디로 가장 오만한, 또는 오만해질 낌새가 있는 권력에 직격탄을 쏘아대는 것이다. 권위주의 정권이든 민주화 정권이든 권력의 속성은 비슷하다. 스스로 알아서 조절능력을 발휘하지 않거나 못하는 점이다. 그래서 누군가, 특히 언론이 그걸 조절시켜야 하는데, 어느 종류의 권력이든 이걸 좋아하지 않는다. 언론이 "그건 노(no)…."라고 말하면 권위주의 권력은 '몽둥이'로 임했고, 민주화 이후 권력들은 '치사하게' 나왔다. 권위주의 권력은 그로 하여금 영국에 잠시 가 있게 한 적도 있었고, 민주화 이후 권력은 회사에 그의 목을 자르라고 압박한 적도 있었다. 모두가 그의 굴하지 않는 언론인 정신이 감내할 수밖에 없었던 고난의 길이었다.

그러나 이 고난이 있었기에 언론인 김대중과 그 동시대 언론인들은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은 ‘언론’이라는 말보다는 ‘미디어 산업’이라는 말이 더 통하는 시대라고들 한다. 그러나 김대중 기자 시절은 육필로 200자 원고지를 메울망정 '권력에 목이 잘릴 수도 있는 ‘자유언론의 전투현장이었다. 이 전투에 임해서 조선일보 논설위원실은 “어떻게 싸울 것인가?”를 두고 매일 오후 2시에 논설회의를 열었다. 신동호 주필이 주재하는 논설회의에서 김대중 위원과 필자는 격한 논쟁을 벌이곤 했다. 서로 한 치의 후퇴나 양보도 없었다. 어떤 때는 얼굴을 붉히고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점심 먹는 동안에만 해도 낄낄대고 농담을 던지고 받았는데, 그 회의에서만은 완전 칼잡이들이었다. 이게 아마도 프로의 세계였던 것 같다.

김대중 조선일보 고문이 ‘기자 50’년을 기록한 것은 한국 언론사에 길이 남을 일이다. 50년이란 세월도 그렇고, 반세기 동안 줄기차게 글만 썼다는 것도 그렇고, 그런 그에게 그럴 언덕을 제공해 온 조선일보의 배려도 그렇다. 그의 글을 꾸준히 읽어주고 공감해 주고 비판해 준 독자들 또한 예사롭지 않다. 그 곁에서 그와 함께 취재하고 글 쓰고 신문을 만들어 온 언론동료들 역시 덩달아 짠한 감개를 느낄 ‘김대중 기자 50년’이다.

언론인 김대중과 그 동시대인들은 한 생애에 4~5 또는 5~6종류의 삶을 산 세대다. 보통은 한 생애에 그저 한두 종류의 시대를 살다가 간다. 그런데 이 세대는 여러 종류의 시대를 살았다. 우선 독립국도 아닌 식민지에 태어나 10살이 채 안 됐을 때 8. 15 해방을 맞았다. 이어서 6. 25 전란 후의 ‘국민소득 80달러짜리’ 빈곤의 시대를 살았다. 그러다가 민주주의 교육을 받고 “왜 이대로 하지 않느냐?”고 따져도 보다가 어느 날 아침 눈을 떠보니 5. 16 군사 쿠데타로 세상이 확 변해 있었다. 그리고 박정희 시대 18년. 바로 우리 세대의 청춘기와 맞물렸던 산업화 시대였다. 그리고 온 것이 1980년대 후반의 민주화, 90년대 초를 전후한 소련-동구권 붕괴, 2000년대의 ‘민주화 이후’와 정보화 시대였다. 그리고 우리는 ’실버‘가 되었다.

권위주의 권력의 몽둥이와 민주화 이후 권력들의 치사함에 굴하지 않아

기자 김대중은 적성(適性)에 썩 맞지 않을 성싶은 법과대학을 나와 공군장교 생활을 마치고서야 비로소 그의 최고의 적성, 언론과 만났다. 그것도 조선일보라는 최고의 적성과. 개인 김대중의 취향과 능력, 조선일보라는 터전, 그리고 격동의 시대라는 배경-이 3가지가 어우러져 언론인 김대중의, 일세를 풍미한 명(名) 논설들이 분출했다.
언론인 김대중의 논조는 한 마디로 가장 오만한, 또는 오만해질 낌새가 있는 권력에 직격탄을 쏘아대는 것이다. 권위주의 정권이든 민주화 정권이든 권력의 속성은 비슷하다. 스스로 알아서 조절능력을 발휘하지 않거나 못하는 점이다. 그래서 누군가, 특히 언론이 그걸 조절시켜야 하는데, 어느 종류의 권력이든 이걸 좋아하지 않는다. 언론이 "그건 노(no)…."라고 말하면 권위주의 권력은 '몽둥이'로 임했고, 민주화 이후 권력들은 '치사하게' 나왔다. 권위주의 권력은 그로 하여금 영국에 잠시 가 있게 한 적도 있었고, 민주화 이후 권력은 회사에 그의 목을 자르라고 압박한 적도 있었다. 모두가 그의 굴하지 않는 언론인 정신이 감내할 수밖에 없었던 고난의 길이었다.

그러나 이 고난이 있었기에 언론인 김대중과 그 동시대 언론인들은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은 ‘언론’이라는 말보다는 ‘미디어 산업’이라는 말이 더 통하는 시대라고들 한다. 그러나 김대중 기자 시절은 육필로 200자 원고지를 메울망정 '권력에 목이 잘릴 수도 있는 ‘자유언론의 전투현장이었다. 이 전투에 임해서 조선일보 논설위원실은 “어떻게 싸울 것인가?”를 두고 매일 오후 2시에 논설회의를 열었다. 신동호 주필이 주재하는 논설회의에서 김대중 위원과 필자는 격한 논쟁을 벌이곤 했다. 서로 한 치의 후퇴나 양보도 없었다. 어떤 때는 얼굴을 붉히고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점심 먹는 동안에만 해도 낄낄대고 농담을 던지고 받았는데, 그 회의에서만은 완전 칼잡이들이었다. 이게 아마도 프로의 세계였던 것 같다.

김대중과 논설회의서 벌인 격론…남들은 "참 희한한 협업관계"라 평해

 

 

2001년 9월에 찍은 조선일보 논설위원실의 원탁회의 모습. 오른쪽 끝이 류근일 당시 논설주간이고 류 주간 왼쪽이 김대중 고문(당시 주필)이다.

후기 권위주의 시대에 ‘칼럼의 시대’가 왔다. 김대중 칼럼과 필자의 칼럼이 조선일보에 격주로 실렸다. 그때 그와 필자는 서로 데스크 노릇을 했다. 여기서도 서로 상대방의 원고에 가차없는 메스를 가했다. “여기 이 대목이 말이 되느냐?”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자신은 ‘명사’를 조심해야 하고 필자는 ‘형용사’를 조심해야 한다고. 필자는 그가 어떤 때는 용어(명사)를 부적절하게 쓴다고 지적했다. 개념을 정확하게 매겨야 한다는 지적이었다. 반면에 그는 필자가 현장감(형용사)을 잘못 짚는다고 지적했다. 실제와 표현 사이에 괴리가 있다는 지적이었다. 이를 보고 주변 사람들은 ‘참 희한한 협업관계’라고 지적했다. ‘지적 질’이야말로 조선일보 논설위원실의 ‘치열한 미덕’이었던 셈이다.

지금까지의 언론인 김대중, 그리고 오늘의 언론인 김대중이 가능했던 데는 그가 다른 인생, 다른 코스에 관심이 없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그는 다른 직업, 예컨대 정치인이나 관료를 곁눈질하지 않았다. 설령 ‘교섭’을 받은 적이 있었다 해도 그는 100% 사절했을 것이라는 쪽에 걸겠다. 그는 자신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언론인 노릇이 다른 데로 가는 징검다리인 사례가 적지 않다. 사람의 유형에 따라선 그게 오히려 자연스러운 경우도 물론 있다. 그러나 언론인 김대중은 “나는 그런 쪽이 아니다”라는 자기정체성(사주팔자?)에 시종 충실했다. 그래서 이력서상의 그의 직업은 딱 하나-‘언론인’이다. 김대중과 필자가 서로 많이 다르면서도 공통된 점이다.

워싱턴 특파원 시절 이후 늘 옷 잘입는 '굿 드레서'

그의 인간적인 면모 역시 그의 글 못지않게 필자의 시야 안에 잡히곤 했다. 그는 우선 굿 드레서다. 항상 말끔한 정장에 넥타이 차림이다. 그리고 색깔을 잘 맞춘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했다. “워싱턴 특파원 생활할 때 보니, 유명 신문사의 저명 백악관 출입기자 하나가 그렇게 모양을 잘 낼 수가 없더라…” 그는 기자는 늘 면도도 잘 안 하고 누추하다는 속설(俗說)에 완강하게 저항(?) 했다.

그는 또 식도락에도 일가견이 있다. 그가 가는 식당에 가면 맛있는 한 끼를 먹을 수 있다. “돼지고기 편육에 막국수…”라고 하기에 한 번 따라가 보았더니 콧구멍만 한 식당인데 맛이 썩 좋았다. 근래엔 서산 음식이라 해서 부르기에 여럿이 갔는데 역시 짭짤한 반찬들이 밥 도둑이었다. 같은 값이면 옷이나 음식을 골라 먹는 멋과 여유는 좋은 것 아닌가? 멋과 여유가 없는 정계를 볼 때마다 따라붙는 느낌이다.

언론인 김대중은 한 마디로 기(氣)가 센 필자다. 그의 모든 것을 이걸로 집약할 수 있다. 비판적 논설을 쓴다는 것은 결국 기 싸움의 언어적 표현이랄 수도 있다. 이 점에서 언론인 김대중은 단연 챔피언 급(級)이다. 그래서 ‘김대중 기자 50년’을 짚고 넘어가는 주변 사람으로서도 덩달아 기가 오를 수밖에 없다. 추카추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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