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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곧 인품…나와 그는 글로 서로를 알아보고 인정해 본문

기자 김대중에 관하여

글은 곧 인품…나와 그는 글로 서로를 알아보고 인정해

천아1234 2021. 4. 11. 12:26

사회적으로 이름이 있는 대한민국 남성 가운데 조선일보 김대중 고문 만큼 이력서가 짧은 사람이 없다. 1965년 조선일보 입사. 기자, 특파원, 편집국장, 주필을 거쳐 현재 고문. 이 한 줄이 전부다. 맛있는 음식과 술을 무척 좋아 한다는데 나는 한 번도 그와 상을 같이 한 적도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무엇인가? 글을 써 줄 수 없겠는가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적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냥 넘기기에는 너무 아쉬웠다. 이런 축하의 기회가 또 있을까 해서이다. 김대중 고문과는 대조적으로, 본의 아니게 긴 이력서를 지니게 된 연상의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딱 한 가지 있었다. 존경과 부러움이 섞인 찬사를 보내며 감사를 표시하고, 앞으로도 더 오래 오래 글을 읽을 수 있게 해 달라는 요청을 하는 일이다.
내가 김대중 고문을 알게 된 것은 순전히 신문에 글을 쓰면서였다. 그분의 경력을 보면, 내가 오랜 외국생활 끝에 귀국을 하여 고려대에 재직하며 조심스럽게 조선, 동아 등에 ‘일사일언’ ‘청론탁설’ 등 짧은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김대중은 워싱톤 특파원으로 나가 있었다. 우리가 서로의 글을 알게 된 것은 전두환 정부 시절 내가 조선일보의 컬럼니스트로 제법 자주 글을 썼고 21세기를 향한 대담 시리즈에서 교육관련 내용을 정리하고 했던 때가 아닌가 싶다.
조선일보 기자, 특파원, 편집국장, 주필, 고문…사회적으로 이름난 한국 남자 중 그처럼 이력서 짧은 이 없어
전두환 정부 시절 대한민국에서 신문 컬럼을 쓴다는 것이 어떤 일이었나? 신문사의 녹을 먹으며 신문사를 대표하여 전문가로서 글을 쓰는 일과 나처럼 초청 컬럼니스트로 자유롭게 주제를 선택하며 글을 쓴다는 것은 매우 다른 일이다.
나는 싫으면 그만 두면 되었지만 김대중은 그런 위치에 서 있지 않았다. 그는 나라 실림에서 반드시 따지고 넘어가야 할 일은 따지고 넘어가야 하는 정치 컬럼을 쓰고 있었고 나는 주로 내가 종사하고 있는 교육이나 문화 영역에서 계몽적인 주제를 선택했다. 그것은 한 나라의 정치 수준은 궁극적으로 국민의 수준에 따라 좌우된다는 평소 내 소신과도 관계되는 일이었지만 정치문제를 직접 다루면서도 해야 할 말을 바로 하기에는 당시의 분위기가 너무도 업압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입시제도 같은 문교행정이나 사회정책관련 글만 쓰려 해도 우선 자기검열부터 시작해야 했다. 이 정도 표현이면 통과하겠지 하는 계산 말이다. 그러고도 어떤 때는 한 시간 가까이 데스크와 승강이를 하며 더 이상 고치려면 차라리 글을 싣지 말라고 화를 내야 했다.
나는 이따금 외국이나 역사의 사례를 들어가며 우회적으로 정부가 하는 일을 비판하는 여유를 부릴 수도 있었지만 그것은 ‘언론은 역사의 초고’라고 믿으며 현재의 정치적 상황에 초점을 맞추지 않으면 안 되었던 김대중 같은 전문 신문인들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사치였다.
편집국장으로, 논설위원으로, 주필로 일하면서 김대중 신문인이 나 같이 밖에 있던 사람들 보다 얼마나 더 많은 재량권을 누릴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더 많은 자유를 누렸다고 믿을 수는 없다. 아마도 김대중 고문이 말하는 회사 측과 편집진 사이의 팽팽하지만 융통성 있는 균형관계의 유지가 조선일보가 국민의 사랑과 신뢰를 가장 많이 받는 신문으로 성장하고 김대중이 1994년부터 2004년 까지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으로 부상할 수 있는 저력을 쌓아 나갈 수 있던 배경이 아니었는가 생각한다.
결국 인간으로, 신문인으로서 김대중이 가진 뚝심, 때로는 심술 굳고 까다롭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질투심으로 비친 그 우직한 인품이 성공의 열쇠였다는 말이다.
‘김대중은 타고난 신문쟁이고 다른 직업은 맞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이 하고 본인도 그것을 인정하는 듯 하다. 눈치 보지 않고 글을 쓸 수 있는 직업이라서 좋았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눈치보지 않는다’는 말이 무엇인가를 새겨 들을 이야기다.
언론인이 지녀야 할 자질과 도덕적 용기를 바탕 삼아 거침없이 필봉 휘둘러
언론인에게 허용되는 자유의 한계가 무엇인가는 법으로만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같은 제도 같은 권력구조 아래서도 본인이 얼마나 탁월한 사명감과 사회의식, 식견, 글쓰는 전문가로서의 재능과 소통능력, 그리고 무엇보다도 도덕적 용기를 가졌는가에 따라 결국 그가 누릴 수 있는 자유의 폭과 깊이는 결정된다.
바로 그런 면에서 김대중은 자기가 누릴 수 있는 자유의 폭을 한껏 누리기 위해 안간 힘을 쓴 것이면서 그렇게 함으로써 부자유의 시대에도 사람들의 공감을 자아내며 없던 용기를 다시 찾을 수 있게 하는 글을 써 낼 수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어쩌다 공석에서 만나는 일 이외에 나는 신문인 김대중과 접할 일이 없었고 막연하게나마 나를 경계의 눈으로 보고 있지 않은가 하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나도 그나 마찬가지로 정당 정치와는 담을 쌓고 사는 지식인이지만 이른바 진보세력이 수세에 몰려 있었을 때에는 그들 편에 가세하는 모습도 때로는 보였고, 김영삼, 김대중 정부 때는 공직을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차츰 그는, 내가 지향하는 정치적 이상이 바로 자신과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을 자유를 바탕으로 하는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로 수호하고 키워나가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듯하며 나 자신 또한 순전히 글을 통해서만 알게 된 그에 대해 언론인으로서 흠모와 함께 인간적 신뢰가 생기는 것을 느꼈다.
그가 법대를 나온 내 동생과 친구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것 또한 봉건적 잔재를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는 우리 대한민국의 사회적 현실 속에서는 내가 그를 좀 더 편하게 대할 수 있게 된 배경이 되기도 했다. 신문에 대한 불평이 있을 때는 곧바로 그에게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글은 말 못지 않게 인품을 반영한다. 김대중이 믿을 만한 사람이고 그 심통스런 듯하고 고집불통인 모습 뒤에는 고지식한 사람의 따뜻한 인간미와 새로운 것을 언제든 받아들릴 준비가 되어있는 지식인의 열린 마음의 자세, 그리고 도덕적 양심과 용기가 숨어 있다는 내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 선 첫 8·15를 지낸 뒤 나는 그에게 항의 전화를 했다. 어쩌면 ‘보수’ 신문이라는 기관들에서 조차 해방과 건국을 기념하는 국민 최대 경축일의 의미에 대해 언급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지나칠 정도로 의식이 해이해 졌는가고.
그의 글에서 고지식한 사람의 인간미, 양심과 용기, 새것을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 읽을 수 있어
그는 잘못 되었음을 인정했다. 4.19가 1948년 제헌 헌법의 정신을 어긴 부정부패와 부정선거에 대한 항거였지 대한민국을 뒤엎고 헌법이념과 주권자를 교체하자는 혁명이 아니었으며 이승만 대통령은 4.19에 봉기한 학생들을 병원으로 방문하며 칭찬하고 지식인들의 요구에 따라 대통령 직에서 조용히 물러난 지도자였지 그들에게 맞선 독재자가 아님을 알리는 광고를 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도 친절한 안내를 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 것을 보았다.
김대중은 역시 조선일보 사원이기 전에 훌륭한 언론인이구나 하느 것을 내가 새롭게 확인한 것은 문창극 총리지명 사건 때였다. 언론인이 역사상 처음으로 총리후보로 거명되자 야당은 물론 언론이, 심지어 보수언론 조차, 환영은 고사하고 일제히 반기를 들고 나섰고 후보 지명자를 친일파로 모는 KBS의 편향된 취재 보도에 여당 일부까지 가세하는 것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문창극이라는 특정인이 총리가 되고 안 되고는 별개의 일로 국회의원들이 결정 할 문제였다. 내가 충격을 받은 것은 언론인 시절에 했던 말을 가지고 마치 총리 자격으로 이야기를 한 듯 시비를 거는데 우리 언론이 그에 대해 반기를 들기는커녕 가세를 하고 공영방송인 KBS가 특정인에 대한 마녀사냥에 앞서고 있다는 점이었다.
언론사들 간 경쟁도 한 몫을 하는구나 하는 인상을 받지 않을 수 없었던 나는 김대중 고문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론인 총리라면 문창극 대신 김대중이어야 한다는 말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도 같은 언론인이 부당하게 공격당하는 것을 보고 어찌 가만히 있는가 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들이댔다.
갑작스런 공격에 우두망찰한 듯 김 고문도 처음에는 발뺌을 했다. 자기가 시작한 일도 아니고 도울 의사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나는 말했다. 언론인으로서 하고 쓴 말을 나중에 정치인의 발언으로 몰아부치는 것이 허용된다면 누가 마음 놓고 글을 쓰고 말을 할 수 있겠으며 더구나 중앙일보 주필까지 지낸 사람이 친일파가 아니라는 것 쯤은 알지 않느냐고. 만약에 언론의 마녀사냥을 통해 문창극이라는 언론인이 후보로 청문회에 서지도 못한다면 우리나라의 언론의 자유는 끝장난다는 것을 모르는가고. 김 고문은 몇분 안에 내 말을 알아들었다.
김대중 고문 덕분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몇일 후 나는 TV조선 ‘판’에 출연하라는 요청을 받았고 문창극 후보지명자를 친일파로 몰아가는 무리들을 정신나간 사람들이라고 몰아부쳤다. 그것으로도 이미 엎지러진 물을 다시 그릇에 담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건전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자기 생각이 그르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서로에게 위안과 힘을 실어주는 계기는 되었던 듯 하다.
무식이 상식을 뒤엎는 시대에 순수학문의 길 만큼 외롭고 고달픈 정론직필 사명 수행
핀란드에 대사로 부임하면서 내가 제일 먼저 그들에게 던진 질문이 그 나라의 여론 지도자들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었다. 막스 야콤슨과 야아코 일로니에미 라는 답이 놀라울 정도로 일관성있게 돌아왔다. 야콥슨은 한때 유엔 사무총장 후보로 거론되었던 노장 정치인이자 언론인이었고 일로니에미는 여론연구소장이었다.
나토 가입문제라든가 어떤 어려운 문제가 있어도 핀란드인들은 가장 탁월한 지성인이라고 평가받는 야콥슨과 여론조사 기관장인 일로니에미의 의견부터 들어 보고 그것을 중심으로 국민 토론을 시작하지 중구난방으로 정력을 낭비하지 않았다.
김대중 고문이 1994년부터 2004년까지 줄곧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으로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으면서도 누구나 그런 사람의 의견을 한번 쯤을 들어 보고 정치논의를 시작하는 풍토가 우리나라에는 정착하지 못했음은 여간 아쉬운 일이 아니다. 모두가 언제나 그의 생각에 동의 할 수는 없고 그렇게 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왜 그가 그런 주장을 하는지 한번쯤 듣고 생각해 보는 것은 진실이 들어나는 것은 두려워하는 세력 이외는 누구에게도 해로울 것이 없는 일이다.
속속 출현하는 새 매체들의 영향에 밀려 인쇄매체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현상은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미리 편가름을 해 놓고 서로의 견해는 들어보려고도 하지 않는 것은 우리 특유의 아주 위험한 병폐가 아닌가 싶다. 특히 조선일보에 대한 젊은 세대의 배척은 세대간 갈등을 심화시키는 중요한 원인이 되고 있지 않은가 싶고 김대중 고문이 앞으로 해결해 나가야 할 중대한 문제 중 하나가 아닌가 생각한다.
노력과 성취에 비해 금전적 보상이 지극히 부족한 분야라면 나는 순수학문과 순수 예술의 영역을 꼽는다. 대중적 인기에 영합하는 대신 진실되고 아름답고 착한 것을 추구하는 일에서 치열하게 순수함을 고집하면 고집할수록 감동은 깊을 수 있지만 그 진가를 알아주는 세력의 폭은 그 만큼 좁아 질 수 있기 때문이다.
언론은 대중을 상대로 하는 매체이기 때문에 이러한 고려가 해당되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지만 사실 지금 우리나라에서처럼 무식이 상식을 뒤엎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지며 애국이 반역으로 반역이 애족으로 혼동되기도 하는 상황에서는 정론직필을 고집한다는 것은 순수학문을 고집하는 것 만큼이나 외롭고 고달프고 또한 위험하기 까지 한 작업일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김대중 고문이 2013년 경암학술상 특별상을 수상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근검절약 정신 하나로 자수성가를 한 송금조 옹(翁)이 2004년에 개인 기부로는 최다액인 1000억원을 쾌척하여 수립한 경암교육문화재단의 경암학술상은 본래 현역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 뛰어난 학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수여하는 상당한 상금이 수반되는 영예이며 심사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맡겨진다.
'기자 50년' 진기록, 그를 지켜준 신문사와 그를 미워하고 두려워하면서도 존경하고 아껴준 정치가들 있었기에 가능
하지만 김대중 고문의 경우는 평생 조선일보 독자이신 경암 자신이 아주 예외적으로 조심스럽게 직접 추천해 오신 것을 경암상 위원회가 만장 일치로 받아들여 특별상을 주기로 한 것이었다. 평생에 걸친 신문인으로서의 그의 사회적 공헌에 대해 우리 모두를 대신해 송금조 옹께서 감사를 표시하시는 셈이니 두루 여간 잘 된 일이 아니지만 김대중 고문이 혹시 괴팍을 부리며 받지 않을까 봐 내가 미리 전화로 확인을 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그러나 매우 중요하게 상기하고 싶은 것이 있다. 한 인간이 신문인으로서, 그것도 한 회사에서, 50년을 고스란히 근무하는 진기록을 세울 수 있던 것은 김대중이라는 고집불통의 인물이 있었을 뿐 아니라 좌천이든, 강제유학이든 편법을 쓰면서도 그를 믿고 지켜준 조선일보사라는 훌륭한 신문사가 있었고 김대중을 미워하고 두려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존경하고 아낄 줄도 알았던 한국의 정치인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언론의 자유에 대한 위협은 위에서도 아래에서도 올 수 있고 좌측에서도 우측에서도 올 수 있다. 하지만 언론인 김대중을 배출한 한국의 지식인들은 이제 언론의 자유가 없어서 제대로 된 발언을 할 수 없다는 변명은 할 수 없을 것이다.


◎ 이인호는?


한국의 대표적인 여성학자이며 현재 서울대 명예교수와 현재 KBS 이사장을 맡고 있다. 1995년 핀란드 대사로 부임하며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대사로 기록됐다. 한국 국제교류재단 이사장, 헌법재판소 자문위원을 맡는 등 활발한 대외 활동을 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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