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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아1234 2021. 2. 21. 19:55

‘우리 모두 난민의 후예’

난민을 받아들이는 상위 10개국 중 이른바 선진국은 독일밖에 없다. 유대인 난민 문제를 풀기 위해 1938년 국제회의가 개최되었다. 미국 등 32개국이 참여했지만 자국에 할당된 수보다 더 많은 난민을 수용한 나라는 개도국인 도미니카공화국밖에 없었다.

개인적으로 나도 어릴 때 집안 어른들로부터 6·25 때 피난살이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다음달 남북한 이산가족 상봉 역시 난민 스토리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렇다, 우리 모두 난민의 후예가 아니던가.

공자, 모세, 마르크스, 달라이 라마, 프로이트, 아인슈타인, 니체, 쇼팽.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일까. 모두 난민이나 망명과 관련된 인물이라는 점이다. 난민 역사는 곧 인류 역사다. 자기 땅에서 살기 어려워 타지로 옮겨 다닌, 자의 반 타의 반 인구 이동의 역사가 호모사피엔스의 진화기 자체다. 터키 해변에 떠내려온 세 살배기 시리아 난민 어린아이 아일란 쿠르디의 사진 한 장에 많은 이들의 마음이 먹먹해진 것도 어쩌면 우리 인간의 무의식에 원형질처럼 새겨져 있는 유민(流民)의 경험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랜 역사를 지닌 난민 현상이 국제사회의 의제로 등장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사이, 민족주의의 발흥 그리고 국민국가 체제의 보편화가 진행되면서 난민이 국제적 이슈가 되었다. 지난 백년 사이 국제사회에서 난민에 관해 두 가지 경향이 나타났다. 하나는 제도화 경향. 국제연맹은 1921년 역사상 최초로 난민 최고대표실을 신설한다.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과 내전으로 약 80만에서 150만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레닌이 이들의 시민권을 박탈했으므로 수많은 무국적자들이 유럽 각지를 떠돌게 된 것이 새로운 기구 창설의 동기가 되었다. 북극 탐험으로 유명한 노르웨이의 프리드쇼프 난센이 초대 대표로 취임하여 무국적자들에게 국제 여행증명서, 이른바 ‘난센 여권’을 발급해 주었다. 45만명이 이 조처의 혜택을 받았다. 샤갈, 나보코프, 라흐마니노프, 스트라빈스키도 난센 여권을 품에 지니고 살았다. 그 뒤 여러 국제기구에서 난민을 다루다가 1951년 유엔에서 난민지위협약이 제정된 후 오늘날의 유엔 난민 최고대표실이 결성되었다.

또 하나는 ‘난민’ 개념의 확대다. 알다시피 난민협약에 나와 있는 난민 규정은 엄격하다. 자기 나라를 벗어나 있어야 하고, 박해를 받았으며, 자국으로 돌아갔을 때 박해를 받을 근거 있는 우려가 있고, 인종, 종교, 국적, 특정 사회집단 소속, 정치적 견해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조건을 충족해야만 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정치, 사회, 경제적 조건이 변하여 원래의 난민 개념은 아니지만 어쨌든 여러 이유로 삶의 터전을 (반)강제로 떠날 수밖에 없이 내몰린 사람들의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었다. 자국 내에서 내전이나 기근으로 삶의 뿌리가 뽑혀 고향을 떠나게 된 사람도 크게 늘었다. 요즘은 공식적 난민과 비공식적 난민을 뭉뚱그려 ‘강제 이재민’(Forcibly Displaced Persons)이라고 부르곤 한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이 표현을 사용하는 빈도가 높다. 최근에는 성소수자 정체성에 의한 탄압 혹은 여성 생식기 절제를 피해 타국에 비호 신청을 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유엔 추산에 따르면 2014년 말 현재 전세계적으로 약 5960만명의 이재민이 있다. 이 중 약 3분의 1이 국제 이재민(공식적 난민 포함)이고, 나머지는 국내 이재민이다.

지난 30년간 아프가니스탄에서 난민이 가장 많이 발생했지만 최근 시리아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요즘 유럽에서 시리아 난민 수용을 놓고 논란이 많지만 실제로는 국제 이재민 중 86% 이상이 개도국에 수용되어 있다. 터키, 파키스탄, 요르단, 레바논, 이란, 케냐, 차드, 중국 등이다. 이 중엔 자기들도 어려운 나라가 많다. 난민을 받아들이는 상위 10개국 중 이른바 선진국은 독일뿐이다. 선진국들의 이기적인 행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나치에 의해 추방된 유대인 난민 문제를 풀기 위해 1938년 프랑스 에비앙에서 국제회의가 열렸다. 이때 미국을 위시해 32개국이 참여했지만 자국에 할당된 수보다 더 많은 난민을 수용한 나라는 개도국인 도미니카공화국밖에 없다.

난민 문제를 해결하려면 근본적인 발생 원인을 알아야 한다. 국가간 전쟁과 내전이 가장 큰 원인을 차지한다. 국가 내부의 모순과 국제적 외부개입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군사비 지출이 높고 무기 거래가 활발할수록 난민이 늘어날 개연성이 커진다. 대인지뢰 매설 지역이 늘어나면 농경지가 줄면서 강제 이재민들이 급증한다. 아프가니스탄과 캄보디아의 지뢰를 모두 제거하면 농업생산량이 당장 두 배로 증가할 것이라는 예측치도 있다. 빈곤 문제도 난민을 발생시키는 요인이다. 토지개혁이 안 되어 소농들의 삶이 팍팍한 나라, 국제 농산물 대기업들이 토지를 대거 매입한 나라, 정치적 문제로 국제사회의 제재를 받아 식량과 의약품의 금수 조처를 당한 나라에서도 난민이 늘어난다. 인권침해가 심한 곳에서 난민이 증가하며, 정권이 바뀐 후 이전 정권 지지자들을 박해하는 나라에서도 난민이 발생하곤 한다. 민족, 종교, 정치적 이유로 소수집단을 박해하는 국가도 고위험군에 속한다. 세계 40%의 국가들이 5개 이상 민족집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들 역시 주요 난민 발생국이다. 지난달 연재한 글에서 다룬 기후변화도 국제 이재민을 양산하는 중요한 요소로 떠올랐다.

지금까지 말한 요인들이 사람을 자기 땅에서 밀어내는 힘으로 작용한다면, 인간을 다른 나라로 끌어당기는 힘도 있다. 하루하루를 간신히 살아가야 하는 나라의 사람일수록 의식주와 안전, 고용 기회, 자녀들의 교육을 제공해줄 수 있는 호조건의 나라에 마음이 끌리게 마련이다. 한국에 오는 난민과 이주노동자들을 탐탁잖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만일 우리가 난민 송출국처럼 된다면 제발 와달라고 빌어도 아무도 오지 않을 것이다. 한국이 그래도 살 만한 곳이니 우리한테까지 오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국제무역으로 먹고사는 나라가 아닌가. 굳이 인도적 이유가 아니라 개명된 자기 이익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국제적 인구 이동에 대해 전향적 태도를 보일 필요가 있다.

난민들이 겪는 구체적인 인권침해가 많지만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자신을 보호해줄 국적국, 즉 자기 권리를 보호해줄 궁극적인 의무의 주체가 사라진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인권 보호의 주체가 자국에서 타국으로 이관된다는 점이 난민 인권 문제의 핵심이다. 자신과 주권재민의 사회계약 관계가 없는 타국 정부의 온정과 호의에 자신의 삶을 맡겨야 하는 불안한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또한 난민이 되면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서 사회적 맥락이 사라져 버린다. 다양한 사회적 관계를 맺고 살아가던 어엿한 인간이 최소한의 생명 보전에 급급해야 하는 비참한 존재로 전락하기 쉽다. 유대인으로서 난민이 되어야 했던 한나 아렌트는 다음과 같은 냉소적 기록을 남겼다. “구출돼도 자존심이 상하고, 도움을 받아도 굴욕감을 느낀다.” 내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시리아는 세계에서 난민을 가장 많이 받아들이던 나라 중 하나였다. 오늘의 시리아 난민 중에는 과거에 타국 난민을 돕던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 모두는 잠재적으로 난민이 될 수 있는 존재다.

난민협약에 따르면 난민은 박해받을 가능성이 있는 자국으로 강제송환되지 않을 권리를 가진다. 극히 중요한 난민 권리다. 또한 기본적 의식주를 제공받을 권리, 최소한의 교육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비합법적으로 입국하여 비호를 신청했다 하더라도 그 사실만으로는 처벌받지 않을 권리도 있다. 여기에 더해 난민은 다른 모든 인간과 마찬가지로 보편적 인권을 누릴 자격이 있다.

따지고 보면 난민은 많은 사람의 삶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기원 1세기 어느 날 밤, 팔레스타인의 한 갓난아이가 권력자의 칼날을 피해 부모와 함께 이집트로 망명길에 올랐다. 이 아이는 장성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여우들에게도 굴이 있고 창공을 나는 새들도 둥지가 있건만 사람의 아들에게는 머리를 둘 데조차 없도다.” 예수라 불린 이 난민 출신 스승에게 신앙고백을 하는 크리스천이 오늘날 전세계에 25억명이나 있다. 작금의 난민 사태는 특히 그리스도교 신도들에게 인도적 실천을 할 수 있는 황금 같은 계기를 제공한다. 개인적으로 나도 어릴 때 집안 어른들로부터 6·25 때 피난살이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다음달 남북한 이산가족 상봉 역시 난민 스토리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렇다, 우리 모두 난민의 후예가 아니던가.

인권이라는 말의 유래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조효제의 인권 오디세이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오늘날에는 휴먼 라이츠가 ‘인간의권리’로 완전히 일반화되어 굳어졌지만 필자는 이 말을 다시 번역할 수 있으면 어떤 표현이 좋을까 자문하곤 한다. 개인적으로 ‘의권’(義權)이 비교적 그것에 가까운 번역이 아니겠는가 상상한다.

인권 오디세이, 이 여정을 인권이라는 말의 유래를 찾는 것으로 시작해 보자. 인권과 유사한 인도적 정신은 세계 여러 문명권과 종교에서 발견된다. 하지만 인간의 ‘권리’라는 개념은 서구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게 정설이다. 그런데 서양에서 처음부터 ‘휴먼 라이츠’(human rights)라고 한 건 아니고, 처음에 ‘자연권’이라 부르다 나중에는 ‘사람(남성)의 권리’라고 쓴 적도 있었다. 토머스 페인이 1791년에 내놓은 <인권>의 원제목은 <라이츠 오브 맨>이었다. 프랑스혁명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에서도 남성형 ‘사람’이 쓰였다. 중립적으로 ‘휴먼’이라는 말은 누가 맨 처음 썼을까? 여러 주장이 있지만 1849년 데이비드 소로의 <시민적 불복종>에 ‘휴먼 라이츠’가 나오는 건 확실하다. “사람을 부당하게 투옥하는 국가에서 정의로운 사람이 있을 수 있는 진정한 장소는 감옥뿐”이라는 유명한 구절 직전에 등장한다. 2차대전 뒤 유엔헌장에 드디어 ‘휴먼 라이츠’가 공식적으로 포함되었고 그것이 1948년의 세계인권선언으로 구체화되었다.

인간(휴먼)이라는 말보다 권리(라이트)라는 말은 더 복잡하다. 서양 사람에게도 라이트 개념은 어렵다. 여러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동아시아 사람에게 라이트는 더 어렵다. 번역을 통해 새로운 의미가 덧씌워진 탓이다. 영어로 라이트(right), 네덜란드어로 레흐트(regt), 독일어로 레히트(recht), 프랑스어로 드루아(droit)라는 이 말은 고대로부터 객관적으로 옳고 정의로운 어떤 상태를 뜻하는 어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옳은 질서, 곧 선이 이기고 악이 단죄되는 상태를 ‘디카이온’이라고 했다. 그러나 중세 이후 라이트의 의미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인간이 마땅히 행사하고 요구할 수 있다고 인정되는 어떤 특별한 자격이라는 주관적 의미가 추가되었던 것이다. 14세기의 오컴 혹은 17세기의 홉스·로크·흐로티위스(그로티우스)가 라이트를 그런 식으로 규정했다. 이렇게 보면 라이트가 인간 행위의 정당성과 그 한계, 그리고 제도와 정부의 구조 및 형태를 규정하는 근거가 된다. 인간을 어떻게, 어느 정도나 대우하느냐를 정하는 존재론적 기준이 된 것이다. 그런데 독일어나 프랑스어와는 달리 영어 ‘라이트’에는 ‘법’이라는 의미가 없다.

차별금지를 반대하는 이들을 역사적으로 추적해 보면 재산이 없다는 이유로, 여성이라는 이유로,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로, 식민지 주민이라는 이유로, 장애인이라는 이유 등으로 차별을 정당화하면서도 그것이 인권과 부합한다고 착각했던 허위의식과 연결된다.

‘라이트’의 뜻이 이처럼 여러 갈래지만 워낙 핵심적인 개념이었으므로 동아시아에서 서구 문물을 받아들일 때 이 말을 피해 갈 수가 없었다. 서구문화 수입에 국운을 걸었던 일본이 대표적인 경우다. 하지만 동서양 사이의 크고 작은 오해와 충돌이 끊이지 않던 상황에서 이질적인 외래 문물을 온전히 이해하고 수용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았다. 좋은 예가 있다. 1862년 요코하마의 나마무기라는 마을에서 말을 타고 지나가던 두 일행 사이에 시비가 붙어 일본인이 영국 상인을 찔러 죽인 사건이 발생했다. 제국의 기세가 등등했던 영국은 이 사건을 빌미로 일본에 공식적인 배상을 요구했고 10만파운드(현 시세로 약 1000억원 이상)라는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받아내는 것도 모자라 다음해 가고시마에 함포공격을 가하기까지 했다. 여담이지만 그로부터 몇년 뒤 미국의 링컨 대통령이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막부의 고위 인사가 “아, 또 물어줘야 하는가!”라고 장탄식을 했다는 웃지 못할 일화도 있다. 서양 사람을 해쳤다 하면 사무라이 짓이거니 하고 여기던 때였으니 말이다. 서로 생소한 문명의 만남이 얼마나 큰 장벽을 사이에 두고 이루어졌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아무튼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일본은 철저하고 광범위한 번역에 몰두했는데, 메이지 시대의 번역작업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한결같이 ‘라이트’ 단어의 번역이 특히 어려웠음을 지적한다.

그 시대에 나왔던 여러 사전을 보면 라이트가 무척 다양한 한자어로 번역되었음을 알 수 있다. 초기엔 염직(廉直) 또는 정직이라 하다, 아예 음역으로 표시하기도 했고, 그다음엔 도리·당연·면허·권 등으로 옮겼다. 그 뒤 진직(眞直)·권의(權義)·공평·공도(公道)·진실·조리(條理)·권세·통의(通義) 등 요즘엔 잘 쓰지 않는 난해한 단어들이 여럿 등장해 서로 겨루게 된다. 오늘날 널리 사용되는 권리(權利)라는 말은 1885년 처음으로 사전에 나타난다. 라이트를 덕권(德權)·천권(天權)·법권(法權)·권리 등의 의미가 섞인 복합개념으로 인식한 것이다. 같은 해 출간된 또 다른 사전에서는 권리(權理)라는 번역어가 제시되기도 했다. 결국 ‘권리’(權利) 혹은 ‘권’이 라이트의 번역어 경쟁에서 최종 승자가 되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 말 역시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원래 도덕적이고 반권력적이고 장중한 어감을 가진 ‘라이트’ 개념이 권력과 이익과 힘의 느낌을 주는 ‘권리’로 번역되면서 라이트의 본뜻이 왜곡되어 전달되었다는 이유에서다.

우리나라에서는 ‘권리’라는 번역어가 1880년대 후반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최경옥의 설명을 따르면, 처음에는 <실록>과 같은 공식문헌에서 조금씩 사용하다 1890년대 들어 일반적으로 통용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국민소학독본>에 “칭호는 각각 다르나 상대하는 권리는 차등이 없느니라”라는 표현이 나오고, <서유견문>에도 권리란 말이 등장한다. 1896년 <독립신문>에는 “님군의 권리를 빼앗는 것이요, 백성에게 권리를 주는 것이니”라는 표현도 보인다. 오늘날에는 휴먼 라이츠가 ‘인간의 권리’로 완전히 일반화되어 굳어졌지만 필자는 이 말을 다시 번역할 수 있으면 어떤 표현이 좋을까 자문하곤 한다. ‘정당하고 옳다’는 의미와 ‘마땅히 요구할 수 있는 자격’이라는 뜻이 잘 배합된 어떤 새로운 말이 없을까? 개인적으로 ‘의권’(義權)이 비교적 그것에 가까운 번역이 아니겠는가 상상한다. 이 질문은 단순히 탁상공론이 아니다. 실제로 인권을 둘러싼 여러 논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국 라이트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의 문제로 귀결되곤 하기 때문이다.

차별금지법을 둘러싼 논란을 들어보자. 차별을 금지해야 한다고 믿는 쪽에서는 그 누구도 이유 없이 차별받아선 안 되는 것이 인권의 원칙이라고 본다. 그런 입장이 정당하며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차별금지가 정당하고 옳기 때문에, 당연히 차별받는 사람들이 차별금지를 요구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반대편에 선 이들은 이유 없이 차별받아선 안 된다는 것이 정당하고 옳다는 원칙 자체를 아주 협소하게 해석한다. 물론 이들이 모든 차별을 찬성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내용적으로 차별받지 말아야 할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나 행동만이 차별금지 원칙을 적용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남한 체제를 비판한다고 의심되는 사람은 애초 차별금지 원칙을 적용받을 자격이 없으므로 그들에게 차별을 가하는 게 전혀 문제가 안 된다. 마찬가지 논리로, 동성애 지향을 가진 사람 역시 애초 차별금지 원칙을 누릴 자격이 없으므로 차별을 받는 게 오히려 당연하다. 이런 식의 선별적 가치관은 원칙적으로 차별하지 않는 것이 ‘정당하고 옳다’라는 인권의 기본 전제에 어긋나는 일이다. 차별금지를 반대하는 이들을 역사적으로 추적해 보면 재산이 없다는 이유로, 여성이라는 이유로,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로, 식민지 주민이라는 이유로, 장애인이라는 이유 등으로 차별을 정당화하면서도 그것이 인권과 부합한다고 착각했던 허위의식과 연결된다. ‘라이트’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인간 권리 운운하는 건 이처럼 위험천만한 일이다.

인권운동에서도 라이트에 내재된 두 측면이 동시에 발현되곤 한다. 첫째, ‘정당하고 옳은’ 대상이나 행위는 계속 발견·발굴되므로 인권운동은 필연적으로 확장되는 경향이 있다. 인권을 윤리적인 어떤 절실한 포부로 이해할 때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불의와 비정상과 억압을 무너뜨릴 만병통치약으로 인권을 호명하려는 열망이 끊임없이 분출되기 때문이다. 둘째, ‘마땅히 요구할 수 있는 자격’으로서의 인권에서는 입법화와 제도화를 강조하는 경향이 생긴다. 어떤 근거로 주장하는지, 그 요구를 들어줄 의무를 지닌 상대가 누구인지를 확실하게 규정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권리의 객관적 규범과 주관적 요구자격의 결합, 이 점이 인권 개념을 여타 인도적 개념들과 구분하는 핵심이다. 이러한 인권의 발전 과정을 이모저모 살피는 여행, 그것이 인권 오디세이의 올레길이 될 것이다.

시베리아의 리코프 가족에겐 인권이 있었을까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조효제의 인권 오디세이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모스크바에서 약 3400㎞나 떨어진 시베리아의 무인지대에서 인간의 흔적을 발견한다는 건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지질학자들은 나뭇가지를 얼기설기 걸쳐 놓은 오두막을 찾아냈고 그곳에 사람이 사는 것을 확인했다. 다섯 식구가 초근목피의 삶을 꾸리고 있었다.

인권을 이야기할 때 흔히 잊기 쉬운 점이 있다. 권리를 가진 사람, 곧 권리의 보유자 중심으로 인권을 이해하는 경향이 그것이다. ‘나’ 또는 ‘우리’가 이러저러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요구하는 것을 말한다. 인권은 강력한 도덕적 신념과 정의감에 기반한 개념이기에 권리 주체를 중심에 놓고 사고하는 경향은 어쩌면 당연하다 하겠다. 하지만 권리 개념의 구조적 특성을 기억한다면 권리 보유자 중심으로만 인권을 이해하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다. 필자 세대에 속한 사람들이 자라던 시절엔 정보 접근이 요즘처럼 용이하지 않았다. 청소년들에게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과 같은 독서물은 최고 수준의 지식을 제공하는 포털 사이트와 같았다. 그런 전집류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작품이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의 모험>이었다. <요크 출신 선원 로빈슨 크루소의 삶 그리고 이상하고 놀라운 모험>이라는 원제로 1719년 발표된 이 소설은 인권 공부 앞부분에 꼭 나오는 핵심 질문의 모티브가 되었다. 그 질문은 다음과 같다. 로빈슨 크루소에게 인권이 있었겠는가? 없다고 하는 게 정답이다. 벨든 필즈는 이 질문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권리를 요구하려면 그 요구를 충족시켜 줄 상대방, 곧 의무의 담지자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크루소가 인권을 상상할 수 있었겠지만 자기 권리를 요구할 수는 없었던 존재로 보아야 한다. 의무를 진 책임 있는 상대가 없으면 권리도 없다는 말이다. 이처럼 권리는 두 사람 이상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전제한다.

그렇다면 두 사람 이상의 공동체가 성립되기만 하면 무조건 인권을 논할 수 있을까? 상응하는 권리-의무라는 형식적 차원으로만 보면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 질문 역시 그리 간단하지 않다. 두 사람 이상으로 이루어진 원초적 공동체를 상상하면서 사고실험을 해 보면 어떨까 한다. 역사상 희귀한 사례가 있다. 1978년 소련에서 일어난 일이다. 지질학자들이 철광을 찾기 위해 몽골의 북서부 국경 너머 러시아 영토 내부를 답사하고 있었다. 하카스 공화국 아바칸 강 근처, 타이가 침엽수림이 끝도 없이 펼쳐진 전인미답의 고산 지대였다. 헬기로 지형을 살피던 기장의 눈에 이상한 모습이 들어왔다. 해발 2000m나 되는 첩첩산중 한가운데 사람이 일군 밭고랑이 포착된 것이다. 모스크바에서 약 3400㎞, 가장 가까운 인가로부터 250㎞나 떨어진 시베리아의 무인지대에서 인간의 흔적을 발견한다는 건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인근에 착륙한 지질학자들은 나뭇가지를 얼기설기 걸쳐 놓은 오두막을 찾아냈고 그곳에 사람이 사는 것을 확인했다. 도무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정도의 열악한 조건, 답사팀장의 표현에 따르면 “중세의 토굴과 같은 환경” 속에 다섯명의 식구가 초근목피의 삶을 꾸리고 있었다. 자작나무 이파리를 엮어서 걸친 누더기 복장, 날감자 이긴 것에 호밀과 대마씨를 섞어 만든 거친 음식, 그리고 아주 낡은 성경책 한 권, 이것이 그들 삶의 전부였다. 지질학자들과 맨 먼저 말문을 튼 사람은 카르프 리코프라는 여든에 가까운 노인 가장이었다.

답사팀이 가장 궁금해한 사항은 어째서, 그리고 얼마나 오랫동안 이 외딴곳에서 살았는가 하는 물음이었다. 원래 리코프 가족은 러시아 정교회의 고신앙파에 속한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고신앙파는 오랜 박해의 역사 속에서도 믿음을 지켜온 경건한 사람들이었다. 리코프는 18세기 초 표트르 대제가 개혁의 명분으로 기독교도의 수염을 자르게 했던 조처를 마치 어제 일처럼 이야기하며 치를 떨었다. 게다가 러시아혁명 후 볼셰비키들이 종교를 탄압한데다 스탈린 대숙청 때 리코프의 형이 죽임을 당한 사건까지 일어났다. 그는 아홉살이던 아들과 두살 난 딸아이를 데리고 아내와 함께 무작정 시베리아 숲 속으로 피신했다. 피난을 감행한 때가 1936년, 더 깊은 오지를 찾아 헤매다 결국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그 와중에 아들, 딸 하나씩을 더 낳아 기르다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떴고, 결국 아버지와 네 남매가 외롭게 살게 되었다. 답사팀이 이들을 만났을 때 막내딸의 나이가 벌써 서른다섯이었다. 지질학자들을 가장 놀라게 한 것은 리코프 가족이 시베리아로 숨어들어온 뒤 40년이 넘는 동안 자기들 외에 어떤 사람도 만난 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특히 숲 속에서 태어난 두 자녀는 평생을 사람이라곤 오직 가족들만 알고 지낸 터였다. 그래도 부모의 독실한 믿음 덕분에 아이들은 성경을 통해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다. 또한 바깥세상의 ‘도시’라는 곳에 수많은 사람이 모여 산다는 것을 ‘추상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가장을 포함해 그 누구도 제2차 세계대전 발발이나 인공위성, 텔레비전을 알지 못했다.

그 후 지질학자들은 여러 번 리코프 가족을 방문하면서 이들에게 외부 소식과 생필품을 전해 주었다. 한사코 선물을 사양하던 가족은 답사팀과 상당히 친해진 뒤에야 비로소 소금을 얻고 싶다는 요청을 했다. 카르프는 소금 없이 살았던 생활이 “고문 같았다”고 토로했다 한다. 이들은 문명세계에 나와 살기를 거부했지만 답사팀의 베이스캠프를 방문하기는 했다. 카르프는 셀로판 포장지를 “주름 잡히는 유리”라고 아주 경이롭게 여겼고, 막내아들 드미트리는 목공소에서 원목을 기계로 다듬는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리코프 가족 이야기를 성석제 작가에게 했더니 자기 고향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고 한다. 상주에 외서면 예의리라는 오지 마을이 있는데 6·25 때 하도 오래 소금장수가 오질 않아 주민들이 대처로 나가보고서야 전쟁이 지나갔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것이다!

리코프 가족의 경우 두 사람 이상의 공동체를 형성했으므로 권리-의무 관계가 설정될 수 있는 최소 요건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들에게 인권이 있었을까? 다시 말해 인간이 로빈슨 크루소와 같은 상태를 벗어나기만 하면 곧바로 인권이 확보될 수 있는 것일까?

어쨌든 리코프 가족의 경우 두 사람 이상의 공동체를 형성했으므로 권리-의무 관계가 설정될 수 있는 최소 요건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들에게 인권이 있었을까? 다시 말해 인간이 로빈슨 크루소와 같은 상태를 벗어나기만 하면 곧바로 인권이 확보될 수 있는 것일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모든 인간이 신의 피조물이고, 신 앞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논리를 받아들이면 리코프 일가에게도 인권이 있었다. 모든 인간은 신의 모상을 타고난 존재이므로 서로 간에 존중할 의무가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신성모독의 죄를 짓게 되기 때문이다. 타인을 존중할 의무는, 역으로, 모두로부터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는 뜻이다. 이런 식으로 보면 리코프 가족 모두에게 신이 부여한 의무와 권리가 평등하게 주어져 있었다. 이것이 고대로부터의 자연법 전통에서 말하는 자연권이다. 의무 수행의 결과로서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권리이긴 하나, 어쨌든 권리인 것이다.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카르프가 자기 가족에게 자연법 사상에 의한 자연권을 가르치고 그것을 실천했을까? 자연법에 따르면 사람의 인식이나 의지 여부에 상관없이 자연권은 선험적으로 존재한다. 그런데 지질학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노인은 엄격한 가장이었다. 만일 그가 자연법을 몰랐거나, 식구들에게 자연권을 장려하지 않았다면 가족 구성원들이 실제로 적극적인 권리를 누렸을 가능성은 낮았을 거라고 봐야 한다. 하지만 바로 이 점에서 자연법적 근거의 전통 자연권과, 계몽주의 이래 자연권의 수사를 받아들이면서도 세속화의 길을 걸었던 근대 인권이 갈라진다. 후자는 국가의 전횡과 폭정에 맞서 자유와 존엄을 요구했던 구체적 역사경험 속에서 싹트고 성장했다. 바로 이 때문에 근대 이후의 인권을 철저히 ‘정치적 기획’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리코프 가족 안에서 자녀들이 일종의 미니 시민혁명을 감행하지 않았다면 그들 사이에 사랑은 있었을지 몰라도 근대적 의미의 인권은 없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결론적으로, 인권은 공동체를 전제로 한다. 또한 원초적 공동체가 형성된 뒤에도 권력에 맞서 자유를 쟁취하려는 ‘인민의’ 정치적 기획이 추진되어야 인권이 존재할 수 있다.

사족. 리코프 가족이 세상에 알려진 후 1981년 큰아들과 큰딸이 연이어 신장염으로 급사했고, 둘째 아들도 폐렴으로 사망했다. 외부세계와의 접촉에 의한 감염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버지는 1988년 아흔 가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2013년 일흔을 넘긴 막내딸 아가피아는 지금도 홀로 자기 고향을 지키며 살고 있다. 요즘엔 그곳까지 사람들이 들어와 작은 마을이 생겼다고 한다.

피노체트 사건으로 본 인권의 정치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조효제의 인권 오디세이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군 장성이던 그는 쿠데타를 일으켜 자신을 고위직에 임명했던 바로 그 정부를 배신하고 무너뜨렸다. 권력을 장악한 뒤엔 무지막지한 인권 탄압을 저질렀다. 말도 안 되는 구실로 학살을 저지르고 반대파를 빨갱이로 몰아 사상 유례없는 인권 유린을 자행했다. 언론과 미디어를 완전히 통제해 자기 이야기로 뉴스를 도배했다. 대다수 국민은 그의 잔인함과 철면피성에 치를 떨었지만, 그래도 그가 경제를 살리고 좌파로부터 나라를 구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아직까지 있을 정도로 그의 공과를 둘러싼 인식의 격차는 크다. 과거 군부의 수하들은 여태까지 강철과 같은 충성심으로 똘똘 뭉쳐 조폭과 같은 단결력을 자랑한다.

독재만 한 게 아니다. 공금횡령과 수뢰에 직접 연루된 파렴치범이기도 했다. 아내와 자식들, 친인척과 부하들까지 동원해 천문학적인 비자금을 조성했다. 법망이 좁혀 들자 돈이 한 푼도 없다고 오리발을 내밀었고 심지어 치매기가 있어 조사를 받기 어렵다는 이유까지 내세웠다.

정치적으로 독재만 한 게 아니다. 국가원수로서 공금횡령과 수뢰에 직접 연루된 파렴치범이기도 했다. 아내와 자식들, 친인척과 부하들까지 동원해 천문학적인 비자금을 조성했다. 법망이 좁혀 들자 돈이 한 푼도 없다고 오리발을 내밀었고 심지어 치매기가 있어 조사를 받기 어렵다는 이유까지 내세웠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하지 않은가. 칠레의 피노체트 이야기다.(물론 전두환을 상상해도 무방하다!) 다음달 9월11일이면 피노체트가 아옌데 정부를 무너뜨렸던 쿠데타 발발 40주년이 된다.

바로 며칠 전 칠레에서 주목할 만한 소식이 들려왔다. 피노체트의 비자금 수사를 종결한다는 발표였다. 피노체트는 1973년부터 1990년 사이에 공금유용과 무기 밀수출을 통해 2600만달러나 되는 거액을 착복했다. 그 돈을 레드 폭스라는 코드명으로 125개나 되는 차명 계좌에 분산해 미국 워싱턴시에 본점이 있던 릭스은행에 예치해 두었다. 그런데 2001년 뉴욕에서 9·11 사태가 발생한 뒤 미국 안 은행들에 은닉되어 있던 외국 테러단체들의 자금을 미국 상원이 조사하던 과정에서 피노체트의 비자금이 불거져 나왔다. 이 중 800만달러가 5만달러짜리 수표 다발 형태로 칠레로 재반입된 정황까지 포착되었다.

피노체트는 2006년 말 사망하기 전까지 과거 인권탄압뿐만 아니라 은닉 재산 문제로도 계속 조사를 받고 기소를 당했지만 결국 단 한번도 유죄판결을 받지 않았다. 그의 아내 루시아 이리아르트는 탈세로 두번이나 구속되었고 다섯 자녀들도 공금횡령 등으로 조사를 받았다. 피노체트가 죽은 뒤에도 비자금 문제를 계속 캤지만 돈의 출처를 입증하기 어려워 결국 이번에 사건을 종결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가족과 부하들에 대한 수사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 한다. 피노체트는 20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정치 도살자였다. 그의 유혈통치하에서 고문이나 즉결처형, 강제실종으로 사망했다고 공식적으로 확인된 사람들만 3197명이나 된다.

피노체트는 인권의 원칙으로 보면 깊이 논의할 가치도 없는 인간이었다. 법적 정의에 따라 처벌해 버리면 간단히 정리될 사건의 책임자였다. 그러나 이렇게 확실한 인권유린과 부정부패의 당사자를 제대로 처벌하기가 왜 그렇게 어려웠던가. 인권을 둘러싼 정치 때문이었다. 아무리 절대적인 규범으로 인권 원칙이 정해져 있다 해도 그것을 실현하는 것은 결국 정치적 차원의 문제다. 피노체트 사건 역시 정치적 역학 속에서 전개되었고 그 속에서 우여곡절의 경로를 밟아야 했다.

영국 경찰은 피노체트를 즉각 체포하여 가택연금하에 두었다. 전직 국가원수가 외국 땅에서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구속된 최초의 사건이었다. 또한 반인도적 범죄가 어디에서 일어났든, 모든 나라에서 형벌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하는 ‘보편적 관할권’ 원칙이 최초로 적용된 사례이기도 했다.

1998년에 일어났던 일보다 이런 점을 더 잘 보여준 사례도 없었다. 그해 10월 피노체트는 종신 상원의원 자격으로 허리 치료를 위해 런던을 방문한다. 피노체트의 동향을 예의주시하던 유럽의 인권단체들이 피노체트의 도착 사실을 스페인의 한 판사에게 알렸다. 발타사르 가르손 판사는 피노체트 집권 때 칠레에 거주하던 스페인 시민들에게 가해진 인권유린을 놓고 피노체트를 스페인 법정에 세우기 위해 노력해 왔었다. 스페인 법원은 영국 정부에 피노체트를 스페인으로 보내 달라는 범죄인 인도요청 영장을 보냈다. 그 요청에 따라 영국 경찰은 피노체트를 즉각 체포하여 가택연금하에 두었다. 전직 국가원수가 외국 땅에서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구속된 최초의 사건이었다. 또한 반인도적 범죄가 어디에서 일어났든, 그 대상이 누구든 상관없이, 모든 나라에서 범죄자에 대해 형벌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하는 ‘보편적 관할권’ 원칙이 최초로 적용된 사례이기도 했다.

피노체트 쪽은 이 조처에 대해 영국 정부에 즉각 항의하고 범죄인 인도를 막기 위해 길고 긴 법적 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 모든 소식은 전세계적인 헤드라인 뉴스가 되었다. 이 사건이 몇 번의 반전을 거치는 동안 아주 흥미로운 현상이 나타났다. 우선 인권에 소극적이면서 사건을 정치적으로 접근했던 극우 보수세력의 움직임이 두드러졌다. 마거릿 대처 전 총리의 주도 아래 이들은 피노체트를 즉각 본국으로 보내주라는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피노체트의 아들을 영국까지 불러 대중집회를 여는가 하면, 인권단체를 좌파로 몰고 흑색선전을 벌이면서 사건을 음모론으로 몰아갔다. 부자들이 돈을 모아 피노체트의 법적 투쟁을 지원하고 호화로운 거처를 제공해 주기도 했다. 신자유주의 세력이 경제적 영역뿐만 아니라 고전적인 시민적·정치적 영역에서도 얼마나 반인권적이고 반동적인 존재인지를 여실히 입증한 것이다.

더 흥미로운 점은 친인권 진영 내에서도 의견이 양분되었다는 사실이다. 인권단체들은 당연히 피노체트가 스페인으로 인도되어 재판받고 처벌되기를 원했다. 법의 지배와 국제인권규범에 따라 처리하면 된다는 원칙적 입장을 견지했다. 그러나 민주세력 중에도 피노체트를 본국으로 보내자는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특히 칠레의 진보파에서는 피노체트의 스페인 인도를 우려하는 시각이 많았다. 이제 겨우 민주주의로 이행 중인 칠레의 내정에 결정타가 될 수 있다는 걱정에서였다. 칠레의 대통령 선거운동이 당시 진행 중이던 점도 큰 고려사항이 되었다.

2000년 초 중도좌파 연합후보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던 민주인사 리카르도 라고스가 1999년 <포린 폴리시>에 기고한 ‘피노체트 딜레마’라는 글이 특히 주목을 받았다. 그는 칠레 민주정치가 아직 피노체트의 해외 사법처리라는 사태를 견딜 수 있을 만큼 견고하지 못하다고 하면서, 이 사건을 계기로 우파 정치인들과 군부가 다시 궐기할 조짐을 보이는 것을 우려했다. 라고스는 인권의 보편적 가치에 찬성하지만 그것의 실천을 위해서 정치적 상황과 비용을 고려해야 하므로 피노체트가 칠레로 돌아와 국내 법정에서 재판을 받아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햇수로 3년을 끌었던 이 사건은 결국 2000년 3월 피노체트의 칠레 귀국으로 막을 내렸다. 건강이 나빠 법정에 설 수 없다고 했던 피노체트는 산티아고의 공군비행장에 도착하여 군 지도자들의 환영을 받자 휠체어에서 벌떡 일어나 양손을 치켜들기도 했다. 그 뒤 피노체트는 과거 인권유린 혐의로 기소, 불기소, 불기소 번복을 거치며 시들어 갔고 부정축재 혐의로도 기소되었다. 악명 높았던 중앙정보국의 운영에 궁극적 책임을 인정하느냐는 질문에 “사실이 아니라서 기억에 없다. 사실이라 해도 기억에 없다”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여기서 인권운동의 관점으로 한가지 질문을 할 수 있겠다.

피노체트가 스페인의 법정에서 단죄받지 않고 귀국할 수 있었던 것이 인권운동의 패배를 의미하는가. 단기적으로 피노체트 개인의 처벌이라는 점으로만 보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사건을 계기로 보편적 관할권 원칙이 국제적으로 인정되었고, 각국 독재자들 그리고 미국의 키신저나 럼스펠드 같은 전범 혐의자들이 체포 우려 때문에 외국여행을 극도로 조심하게 되었다. 칠레 국내에서도 과거사 문제가 다시 조명받기 시작했고 많은 군인들을 법정에 세울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칠레군 당국은 피노체트 집권 시의 인권유린 사태에 군 전체가 책임이 있었음을 공식적으로 자인하기에 이르렀다. 피노체트가 사망한 후 무덤 훼손을 우려해 매장 대신 화장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그의 유골을 칠레 내의 어떤 군 시설에도 안치할 수 없다는 결정이 내려지기도 했다. 결국 장기적으로 봤을 때 인권을 향한 진전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이처럼 인권은 정치적 과정 속에서 비틀거리며 힘겹게 조금씩 전진한다. 간혹 인권운동이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것 같아도 길게 보면 결코 헛수고한 게 아니다. 그런 점에서 인권운동가는 현시대의 비관론, 역사적으론 낙관론을 가슴에 품고 산다.

“인권의 팬더 원칙을 아십니까”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조효제의 인권 오디세이

흔히 받는 질문이 있다. 인권친화적인 조직을 운영하려면 어떻게 하는가? 요즘 인권에 대한 관심이 늘어서인지 인권을 그 운영에 반영하려는 기관이나 조직이 많아졌다. 인권을 앞장서서 실천하겠다는 자세는 바람직하고 권장할 일이다. 하지만 문제는 방법이 너무 막막하다는 데 있다. 인권이 표제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슨 권리, 무슨 권리… 식으로 나열된 인권 표제들은 인권의 종류를 파악하는 데엔 도움이 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하느냐 하는 의문에 친절한 답을 주진 못한다. 게다가 권리만 열거해 놓으면 흔히 권리와 권리가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학생인권이 중요하다고 하면 당장 교권은 어떻게 되느냐고 반박하는 게 대표적 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온 것이 ‘인권에 기반을 둔 접근방식’이다. 인권의 바탕을 이루는 원칙들을 활용해서 구체적으로 인권을 실현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하자는 취지다.

팬더 원칙을 만든 사람들은 이것에 따라 인권을 존중하는 개발을 추진하면 개발의 본디 이상에 가까운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본다. 개발 과정에만 팬더 원칙이 유용한 건 아니다. 조직을 인권에 맞게 운영하려 할 때에도 이 원칙을 활용할 수 있다.

이런 방안들 중 팬더(PANTHER) 원칙이 있다. 본디 개발론에서 나온 아이디어다. 인권에 기반을 둔 개발 프로젝트를 시행하기 위해 고안된 일곱 가지 원칙을 말한다. 경제개발뿐 아니라 인간의 잠재된 능력을 활짝 꽃피울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개발(발전)의 궁극적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팬더 원칙을 만든 사람들은 이것에 따라 인권을 존중하는 개발을 추진하면 개발의 본디 이상에 가까운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본다. 개발 과정에만 팬더 원칙이 유용한 건 아니다. 조직을 인권에 맞게 운영하려 할 때에도 이 원칙을 활용할 수 있다. 특히 학교·복지시설·병원·언론·행정기관 등 서비스를 제공하는 조직에서 팬더 원칙을 활용하면 인권에 기반을 둔 조직을 꾸리는 데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인권의 간판을 내건다고 인권을 존중하는 운영이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조직의 일상적 활동 속에 인권 정신이 반영되고 스며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체계적으로 방식을 익혀야 한다. 지금부터 팬더 원칙을 차례대로 살펴보자. 순서가 중요성을 나타내는 건 아니다.

첫째, ‘참여’(Participation)가 보장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은 자기존재를 증명하고 싶어한다. 자기 뜻이 관철되느냐 여부와 상관없이 의사표현의 자유를 누릴 수 있으면 심리적 충족감이 배가된다. 그걸 존중해 주는 것이 인권이다. 타인과 사회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를 조직운영에 반영하는 것이 참여의 원칙이다. 여기서 맥락이 중요하다. 참여 문화, 대화 환경이 만들어져야 한다. 권위적이거나 불통인 리더의 그림자가 짙게 깔린 조직에서 아무리 참여를 외쳐봐야 공염불이다. 우선 리더부터 적극적 경청을 실천하고 소통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조직 내 여러 집단의 의견이 서로 경청되고 서로 섞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조심해야 할 점이 있다. 비민주적 운영을 숨기기 위한 알리바이로 참여를 내세워선 안 된다. 그리고 조직 내 자원분배에 대한 발언권을 인정하느냐가 참여의 관건이 된다.

둘째, 조직의 ‘책무성’(Accountability)을 지키는지를 따질 수 있다. 책무성 원칙은 원래 국가가 시민들에게 정치적 책임을 지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관도 그렇게 해야 한다. 정확한 정보에 의거해 결정을 내리고, 약자와 소수자의 욕구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며,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엔 솔직히 양해를 구해야 한다. 아무리 의도가 좋더라도 무능하고 책임회피적인 조직은 책무성에서 낙제점을 받는다. 전문적인 자세로 고객의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최소한의 윤리원칙을 견지해야 한다. 서비스 사용자에게도 책무성이 요구된다. 서비스를 막무가내로 오용하지 말고, 자기 쪽에서도 지켜야 할 것은 지켜야 한다.

셋째, ‘차별 없음’(Nondiscrimination)은 인권의 고전적인 원칙에 속한다. “모든 제도는 명백히 그렇지 않다고 입증되지 않은 한 당연히 차별적일 거라고 간주해야 한다.” 조너선 만의 경고다. 차별을 당하지 않는 사람의 눈에는 차별의 현실이 쉽게 보이지 않는다. 차별당하는 사람일수록 그것을 적극적으로 드러낼 방법을 모르거나 그렇게 할 용기가 없는 경우가 많다. 불이익을 당하는 사람과 집단을 적극적으로 찾고 그들의 눈높이에서 문제를 보려는 노력을 의식적으로 기울여야 한다. 여성·장애인·외국인 등 널리 알려진 차별 대상 외에도 드러나지 않은 차별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한 집단의 차별을 해결하면 모든 사람이 이득을 본다. 장애인을 위해 전철역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면 노약자와 유모차 부모들이 함께 혜택을 누릴 수 있지 않은가.

넷째, ‘투명성’(Transparency) 원칙을 기억해야 한다. 투명성이 인권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정보의 공개와 공유 때문이다. 비대칭적 정보, 불투명한 정보는 부패의 온상이 되기 십상이다. 언론자유가 소중한 인권인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정보가 공개되어 있어도 적극적으로 서비스 사용자들에게 전달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또한 어려운 행정용어는 그 자체가 불투명한 정보다. 모든 공적 정보는 그 사회의 의무교육 이수자 정도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언어순화의 차원이 아니다. 인권존중이냐 인권유린이냐를 가르는 문제다.

다섯째, 모든 조직은 ‘인간 존엄’(Human dignity)의 원칙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리 거창한 게 아니다.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체면과 위엄을 지켜 주자는 뜻이다. 학생이 치욕적인 언사나 체벌이나 왕따로 몸과 마음이 멍들 때, 성적으로 줄을 세워 멀쩡한 아이의 자존감을 그 싹부터 잘라 버릴 때, 청소 아주머니가 창고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식사를 해야 할 때, 공중파에서 조선족의 말투를 우스개로 만들어 조롱할 때, 치매 노인이 기저귀 한 장으로 하루 종일 버텨야 할 때, 인간 존엄은 사전 속에나 존재하는 말로 추락한다. 조직의 수장은 자기 조직 내에서 인간 존엄을 해칠 수 있는 리스크 요인을 주의 깊게 관리할 줄 알아야 한다.

여섯째, ‘자력화’(Empowerment) 원칙도 인권에 기반을 둔 조직운영에 필수적이다. 인권의 목표는 인간의 핵심 이익을 보호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인간을 활짝 핀 존재로 키우는 데 있다. “나도 같은 인간이다”라고 당당히 주장할 줄 아는 사람을 만들자는 게 인권의 궁극적 목표다. 조직 입장에선 구성원들에게 어떤 종류의 권한을 우선적으로 부여해야 할지를 잘 골라야 한다. 또한 자기주장을 하지 않는 구성원 혹은 고객이 있다면 왜 그러는지 원인을 찾아봐야 한다. 서비스 제공자 입장에선 자력화된 고객이 목청을 높이는 상황이 피곤하고 귀찮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서비스 제공기관의 존립 목적임을 잊어선 안 된다. 물론 사용자가 자기 권리를 책임 있게 행사할 수 있도록 계몽하는 것도 서비스 제공자의 몫이다.

지연과 학연이 은연중에, 혹은 노골적으로 작동하는 조직은 그 자체로 인권침해 조직이다. 최근 모 권력기관의 높은 서열을 특정 지역 출신들이 싹쓸이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국가기관이 스스로 인권유린 기관임을 자인한 셈이다.

일곱째, ‘법의 지배’(Rule of law) 원칙이 있다. 마셜의 시민권 이론 중 제일 먼저 나오는 공민적 권리의 핵심 내용이다. 조직 내에서 법의 지배 원칙은 규정과 절차를 뜻한다. 모든 사람을 규정대로 평등하게 대우하는 것, 업무상 잘못이 발생했을 때 적절히 배·보상해 주는 것, 민원과 진정을 접수하고 공정하게 다룰 수 있는 부서나 절차를 완비하는 것 등이 법의 지배다. 만일 조직 내에서 법의 지배가 지켜지지 않는다면 왜 그런지 따져보는 게 중요하다. 지연과 학연이 은연중에, 혹은 노골적으로 작동하는 조직은 그 자체로 인권침해 조직이다. 최근 모 권력기관의 높은 서열을 특정 지역 출신들이 싹쓸이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국가기관이 스스로 인권유린 기관임을 자인한 셈이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이 모든 원칙들은 조직의 특성에 맞춰 비교평가가 가능한 지표로 만들 수 있다. 그것을 구상하는 과정에서부터 구성원들의 의견과 상상력을 담는다면 인권친화 조직으로 가는 첫 관문을 통과하게 된다. 그 지표에 따라 단기·중기·장기 변화를 점검할 수 있다. 팬더 원칙의 장점은 상식적인 호소력이 강하다는 것이다. 또한 간단한 지표를 통해 변화를 양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굳이 인권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도 실질적으로 조직 내의 인권을 증진시킬 수 있는 것 역시 좋은 점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조직에서 팬더 로고를 자랑스럽게 내거는 날이 우리가 바라는 인권의 미래일 것이다.

모어를 사용할 권리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조효제의 인권 오디세이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지난주, 다시 공휴일로 지정된 한글날을 보내면서 인간에게 언어와 문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해 본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한글은 한국어를 문자로 표현할 수 있도록 특별히 고안된 체계라는 점에서 일종의 맞춤형 문자다. 한국어를 모어로 쓰는 모든 사람에게 엄청난 역사적 선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자기 고유의 문자가 없어 로마자와 같은 외래 문자를 수입해 쓰는 나라들과 크게 대비되는 자랑거리다. 한글날을 한글 문자의 창제만으로 기념하는 건 좁은 소견일 것이다. 우리 언어를 함께 쓰는 모든 사람들의 사회문화적 정체성과 그 의미를 곱씹어 보는 날이 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언어 인권의 관점에서 보면 현대 한국인이 이 방면의 인권을 충분히 누리고 있는지 자신할 수 없다. 언어 인권은 국제적으로 아직 통일된 명칭도 정해지지 않은 새로운 영역의 인권이지만 먹거리 주권과 더불어 국제인권 목록에 등재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후보군에 속한다.

서울 강남에는 월 등록비가 200만원이 넘는 고액 유아영어학원이 성업중이라 한다. 소변도 못 보게 하면서 영어공부를 강요하다 보니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진단을 받아 정신과 병원에서 심리치료를 받는 아이들도 생기고 있다. 한마디로 교육을 빙자한 극심한 아동 인권 침해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 보도된 언어 인권유린 사건을 살펴보자. 서울 강남에는 월 등록비가 200만원이 넘는 고액 유아영어학원이 성업중이라 한다. 만 두살 반짜리 아이들부터 시작해서 유아들을 모아 아침 9시 반부터 오후 6시까지 하루 종일 영어 말하기와 쓰기를 가르치고 수학, 과학, 발레 등 모든 수업을 영어로만 진행한단다. 문제는 이런 교육이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이다. 소변도 못 보게 하면서 영어 공부를 강요하다 보니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진단을 받아 정신과 병원에서 심리치료를 받는 아이들도 생기고 있다. 아이들이 얼마나 심한 트라우마를 받았으면 하루에 속옷을 몇장이나 적시며 저 고생을 하고 있을까. 몇해 전에는 영어 발음을 가르친다고 아이의 혀 인대를 자르는 일까지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한마디로 교육을 빙자한 극심한 아동 인권침해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만일 수용시설 같은 데서 이런 일이 발생했더라면 크나큰 이슈가 되었을 터지만, 교육의 이름으로는 그 어떤 짓을 해도 대충 양해가 되고 넘어가는 우리 현실이 과연 정상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사회언어학에 따르면 아이들에게는 여러 언어를 습득할 수 있는 생래적 능력이 있지만, 읽고 쓰는 능력을 제대로 습득하는 데에는 모어가 제일 낫다고 한다. 또한 모든 자연언어들의 표현능력은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우월한 언어도 열등한 언어도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모어는 모국어와 다르며, 어떤 경우엔 양자가 충돌하기도 한다. 50대 중반이 넘어 한국 생활을 처음 시작했던 서경식 선생은 모어인 일본어가 아닌 모국어 조선어를 익히기 위한 단계를 설정한 적이 있다. ①장을 보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해 외출할 수 있다. ②영화나 텔레비전을 보고, 사전 없이 신문을 약 80퍼센트 정도 이해한다. ③지인들과 정치적·문화적 주제로 논의할 수 있고 거의 오해 없이 상대방의 취지를 이해하고 자기 생각을 전할 수 있다. ④원고를 그냥 읽는 형식이 아닌 강연을 1시간 정도 할 수 있다. ⑤경찰 심문에 침착·정확하게 대응하고, 법정에서 반론을 펼칠 수 있다. ⑥사전 없이 소설을 읽는다. ⑦번역자 도움 없이 에세이나 소설을 집필한다. 이것은 원어민들도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일 것 같은데,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이 모어의 근본적인 친숙함과는 비견될 수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 뜻에서 모어와 모국어가 일치하는 경우, 모어 사용은 인권의 토대인 생명권·자유권·행복추구권과 동일한 차원의 기본권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중요한 모어 사용권을 왜 최근 들어서야 기본 인권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는가. 2차대전 후 국제적으로 규범화된 인권은 크게 보아 개인의 권리를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시민정치적 권리나 경제사회적 권리나 그 바탕에는 개인의 청구권 개념이 깔려 있다. 그러다 집단의 권리, 곧 3세대 인권이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언어 권리도 ‘발견’되기 시작한 것이다. 어차피 언어는 어떤 집단에 귀속된 상태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또한 세계적 차원에서 이주와 다문화적 상황이 빚어지면서 모어를 사용하는 문제가 권력·억압·정체성 등과 긴밀하게 연결되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별로 문제되지 않던 새로운 인권침해가 생긴 것이다. 급기야 국제 펜클럽의 주도로 1996년 바르셀로나에서 사멸 위기에 놓인 소수언어와 일반적인 모어 사용권을 포함한 세계언어권리선언이 발표되었다. 이 선언은 문화와 언어의 다원주의를 일원화하려는 국가들의 경향성, 그리고 “탈규제를 진보와, 경쟁적 개인주의를 자유와 동일시하며, 심각한 경제·사회·문화·언어 불평등을 야기하는 초국적 경제주체들이 제시하는 경제성장 모델”을 언어권리 침해의 주범으로 지목한다. 특히 교육은 언어 공동체 내에서 언어적·문화적 자기표출 역량을 신장시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가 그토록 떠받드는 ‘세계무대’에서는 오히려 고유한 언어권리를 강조하고 있는데 정작 이 땅에선 모어가 아닌 외국어를 가르치려고 아이를 정신병자로 만들고 있으니 이 일을 대체 어찌해야 좋을까.

필자가 아는 한 전세계에서 모어와 관련된 날을 법정 공휴일로 기념하는 나라는 한국과 방글라데시뿐이다. 방글라데시는 아주 특이한 경우다. 1947년 파키스탄이 수립된 후에도 지리적으로 분리되어 있던 동파키스탄 벵골 지역은 고유한 언어와 문화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서파키스탄에서 쓰는 ‘우르두어 오직 우르두어’만을 파키스탄 전체의 유일한 공식언어로 인정한다는 조처가 발표되었다. 1952년의 일이었다. 동파키스탄에서는 당장 반발이 터져 나왔고 민중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경찰은 포고령 144호를 발표하고 일체의 집회를 금지했지만 2월21일 다카대학과 다카의학교의 학생들이 항의시위를 시작했다. 이에 대해 경찰은 발포로 대응했고 수십명의 사망자가 나오는 초대형 참사로 이어졌다. 이 사건을 통틀어 벵골언어운동이라고 한다. 단순한 언어 운동이 아니라 한 인민 집단 전체의 기본권과 정체성을 지키겠다는 언어 자기결정권 운동이었던 것이다. 사태의 심각성을 절감한 파키스탄 정부는 입장을 선회하여 벵골지역에는 벵골어가 공식언어임을 인정하였다. 하지만 벵골언어운동은 더 큰 정치운동과 맞물려 확대되었고 마침내 1971년 동파키스탄 독립전쟁을 통해 방글라데시가 분리 독립하기에 이르렀다. 모어 사용을 둘러싼 투쟁이 새로운 국가의 탄생으로까지 연결된 희귀한 사건이었다. 방글라데시에서는 지금도 2월21일을 국경일로 기념하고 있으며 다카의학교 근처에는 샤히드 미나르라는 14미터 높이의 거대한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진정한 다문화·다언어로서의 영어는 적극 장려해야 한다. 그러나 문화·교육·경제 헤게모니로 작동하는 영어에 대해 그것을 억압권력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더욱 열심히 따라잡아야 할 목표로, 자신의 부족함을 책망하는 선망으로 인식할 때 우리의 언어 인권은 심대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방글라데시 정부는 자기 나라의 모어 사용권 투쟁 이야기를 보편적인 인권의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움직임이 주효하여 유네스코는 매년 2월21일을 국제 모어의 날(International Mother Language Day)로 지정했고 2000년부터 해마다 이날을 세계적으로 기념하고 있다. 유네스코의 취지에 공감한 유엔총회는 2008년을 국제 언어의 해로 선포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문자해독, 인간발전, 민주주의를 연결한 개념을 발전시켜 매년 10월9일을 국제 문자의 날로 제정할 수도 있지 않을까. 좋은 의미의 국위선양은 이런 것이 아닐까. 물론 이런 가시적인 움직임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모어를 대하는 우리의 기본적인 자세다. 모든 사람이 여러 언어를 자기 뜻대로 취득할 수 있는 다원주의를 지지하면서도, 즉 언어 국수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인간 본연의 가치로서 모어 사용권의 중요성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모어가 아닌 외국어가 우리 위에 지배적 권력으로 군림하고, 더 나아가 그것이 경제사회적 불평등, 문화심리적 억압의 원천이 된다면 그것을 심각한 인권침해로 거부할 수 있는 안목과 상상력과 용기가 있어야 한다. 우리 사회의 영어 광풍은 특히 좋은 예가 된다. 진정한 다문화·다언어로서의 영어는 적극 장려해야 한다. 그러나 문화·교육·경제 헤게모니로 작동하는 영어에 대해 그것을 억압권력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더욱 열심히 따라잡아야 할 목표로, 자신의 부족함을 책망하는 선망으로 인식할 때 우리의 언어 인권은 심대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이 점에 관한 한 지식인과 교육자들의 책임이 무겁다.

한국 인권의 국제적 수준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조효제의 인권 오디세이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퀴즈 하나. 덴마크, 벨기에, 오스트리아, 싱가포르, 프랑스, 핀란드, 스페인, 이탈리아, 룩셈부르크, 영국의 공통점은? 유엔 인간개발지수에서 한국보다 순위가 낮은 나라들이라는 점. 한국이 이들을 제치고 세계 12위를 차지한 것은 놀랄 만한 결과다. 퀴즈 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자살률이 1위인 나라, 세계 150개국 중 연간 노동시간 1위에 출산율은 146위인 나라, 세계경제포럼의 세계 성 격차 보고서에서 136개국 중 111위를 차지한 나라는? 대한민국이다. 같은 나라가 이처럼 상반되는 측면을 어떻게 동시에 가질 수 있는가.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한국은 국제무역으로 세계 7위, 외환보유액 세계 7위, 세계은행이 조사한 기업환경으로 세계 7위, 법적 분쟁해결 세계 2위, 전기연결 세계 2위, 휴대폰 출하량 세계 1위, 반도체 매출액 세계 2위, 선박 수주량 세계 2위, 자동차 생산 세계 5위, 주식 거래량 세계 8위, 전자정부지수 세계 1위, 인천공항 기준 공항화물처리 세계 5위, 국제회의 개최 건수 세계 5위, 2010년 뉴스위크 조사 100개국 중 베스트 국가 15위에 교육성취 2위와 경제 역동성 3위, 그리고 경제규모 세계 15위를 자랑한다. 한국은 이제 전세계 비교보다 이른바 선진국 클럽인 오이시디 내의 비교가 더 의미있을 정도로 덩치가 커졌다. 약소국가라는 말을 매일 들어야 했고, ‘메이드 인 코리아’는 저질이라고 생각했던 세대에게 천지개벽 비슷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한국의 또다른 얼굴을 보자. 국회의원과 장차관 수로 계산한 여성의 정치권력공유 세계 86위, 여성의 경제참여도와 기회 세계 118위, 여성보건 세계 75위, 국민건강 세계 23위, 삶의 질 세계 29위가 한국이다. 또한 “도움이 필요할 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문항에 오이시디 평균이 90%인데 한국은 77%에 그친다. 외형과 내실 간의 격차가 대단히 크다.

2012년 현재 세계의 46%인 90개국이 자유국으로 분류되는데 한국도 여기에 속한다. 그러나 같은 단체에서 집계한 세계언론자유지수를 보면 한국은 인터넷 부분적 자유국, 언론 부분적 자유국으로, 196개국 중 64위에 그치고 있다.

전세계 국가들을 동일한 경제 기준으로 비교하는 것을 목표로 한 국민계정체계(SNA)는 유엔에서 개발되어 1953년부터 발표되기 시작했다. 옛 식민지역이 대거 신생 주권국가로 독립하는 와중에 유엔 가입국 수를 늘리기 위한 조처였던 측면이 있었다. 이것을 기점으로 하여 온갖 비교 지표들이 개발되었다. 이 영향을 받아 인권운동에서도 국제 비교를 위한 지표들을 만들어냈다. 프리덤하우스는 정치적 권리(자유선거, 정치적 다원주의, 정부의 기능)와 시민적 자유(의사표현과 신앙의 자유, 결사의 자유, 법의 지배, 개인 권리)를 합산해 국가의 자유도를 평가한다. 2012년 현재 세계의 46%에 해당하는 90개국이 자유국으로 분류되는데 한국도 여기에 속한다. 그러나 같은 단체에서 집계한 세계언론자유지수를 보면 한국은 인터넷 부분적 자유국, 언론 부분적 자유국으로, 세계 196개국 중 64위에 그치고 있다. <이코노미스트>가 내놓는 정치불안정지수로는 세계 165개국 중 49번째로 안정된 나라이고, 국제투명성기구의 부패지수로는 174개국 중 45위다. 사회갈등, 정치불안, 정치폭력, 흉악범죄, 살인율, 교도소 재소자, 군대 규모, 무기 수입 등으로 계산한 세계평화지수로는 162개국 중 47위 수준이다. 요약하자면 한국은 외형적 경제수준에 비해 삶의 질과 인권이 턱없이 부족한 나라다.

물론 양적인 지표로만 인간 삶을 비교하기란 어렵다. 수치로 묘사하는 사회상은 그것 자체가 인위적 구성물이어서 그런 지표가 개선된다고 해서 사회문제가 진정으로 해결될 수 있을지 확실치 않기 때문이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인간 심리도 무시할 수 없다. 한국은 스웨덴을 따르고 싶어하는데 스웨덴의 사민당 대표는 한국의 교육을 부러워한다. 한국이 배우려 하는 독일에서는 스웨덴 복지를 선망한다. 스노든이 제공한 도청 정보를 폭로한 영국 <가디언>의 편집장은 미국의 언론자유를 부러워한다. 또한 본질적 차원에서 인간의 고통은 서로 비교가 불가능하다는 점 역시 기억해야 한다. 사회의 물질적 수준이 평균적으로 올라가더라도 불평등과 차별이 존재하는 한 소외된 사람들의 사회적 고통은 훨씬 커진다. 따라서 객관적인 수치로 드러나는 큰 윤곽 못지않게 세부묘사도 중요하다. 인권이 ‘모든’ 사람을 옹호하는 사상으로 남아 있는 한, 큰 틀에서 잡히지 않는 ‘작은’ 사람들의 실상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인권을 계량적 순위로 표시하지 않는 인권단체들이 많다. 휴먼라이츠워치나 국제앰네스티가 대표적이다. 이들 엔지오는 완벽한 인권존중 사회란 이 세상에 없다는 전제 아래 각국의 고유한 문제와 결함을 찾아내 비판한다. 그렇게 해야 어느 사회에나 존재하는 잊혀진 ‘작은’ 사람들의 고통을 드러낼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른바 모범적인 선진국들도 예외가 아니다. 국제앰네스티 2013년 연례보고서를 보면 스웨덴, 노르웨이, 스위스, 덴마크 같은 나라에서조차 이주자, 난민, 망명자, 여성에 대한 폭력, 국가인권기구의 약화 등이 주요 인권문제로 지적된다. 한국 항목에서는 의사표현의 자유,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집회의 자유, 노동문제와 노동자 권리, 이주자, 사형제도 등을 중요한 인권문제로 다루고 있다. 근대 초기부터 확립되어온 고전적 인권 목록이 많다는 점에서 우리 인권이 가야 할 길이 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런 문제를 결코 인정하지 않는 가운데 경제 논리가 더욱 공격적이고 폭력적으로 인권 논리를 억누르고 있다는 점이다. 나라가 정말 가난해서 여력이 전혀 없는 상황도 아닌데 이런 식으로 나온다는 것은 인간에 대한 악의적인 모독으로밖에 볼 수 없다.

최근에 널리 알려진 각종 인권문제를 생각하면 더욱 기가 막힌다. 고객에게 억지미소를 지으라고 강요하여 직원을 정신이상으로 몰아가는 감정노동, 보조출연자들을 짐승처럼 부리고 성폭력에다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 방송계의 야만적 관행, 21세기 세계 최고 스마트폰을 생산하는 대기업의 협력업체 서비스 노동자가 “배고파 못 살았고 다들 너무 힘들어서… 전태일님처럼 그러진 못해도 전 선택했어요”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을 할 정도의 19세기적 현실을 보라. 요컨대 한국은 경제로는 ‘수’를 받으면서도 삶의 질이나 인권 현실은 우-미-양 사이를 헤매고 있는 모순적인 사회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런 문제를 결코 인정하지 않는 가운데 경제 논리가 더욱 공격적이고 폭력적으로 인권 논리를 억누르고 있다는 점이다. 나라가 정말 가난해서 여력이 전혀 없는 상황도 아닌데 이런 식으로 나온다는 것은 인간에 대한 악의적인 모독으로밖에 볼 수 없다. 이런 현상은 이명박 정부 이래 일관되게 나타났고 새 정부 들어서도 호전될 기미가 없다.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당해산심판 청구가 보여주듯 반공 매카시즘이 오히려 불사조처럼 부활하는 징조마저 보인다.

필자는 한국의 인권이 국제적으로 어느 정도 수준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곤 한다. 모든 나라 사람들이 자국의 산에 오른다고 치자. 높이 오를수록 공기가 맑아지고 산길이 더욱 평탄해진 나라들이 꽤 있었다. 산 정상 가까이에 스카이웨이를 닦은 나라도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산에 높이 오를수록 그렇게 될 것이라 믿고 지난 반세기 동안 악착같이 노력해서 이제 거의 8부 능선까지 오를 수 있었다. 그런데 공기의 질은 기대했던 것만큼 좋아지지 않았고, 산길도 그리 평탄해지지 않았다. 산길 중간중간에 깊은 웅덩이까지 패어 있어 빠져 죽는 사람이 나올 정도로 문제가 많다. 게다가 이 산 아래로 지진대가 통과하고 있어 산 전체가 요동을 칠 가능성이 높다. 이게 우리 인권의 현실이다. 여기서 등산은 발전을 상징한다. 높이 오르는 것은 경제성장이 늘어난다는 뜻이다. 공기는 삶의 질이다. 산길은 인권상황이다. 지진대는 분단과 반공주의를 가리킨다. 결론적으로 한국은 큰 그림으로 봤을 때 먹고사는 문제와 물질적 축적에서 굉장한 발전을 이뤘음을 부정할 수 없다. 과거에 비해 공권력에 의한 노골적인 인권침해가 많이 줄어든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경제수준에 비해 삶의 질은 충격적일 정도로 열악한 상태다. 인간존중 가치는 실종되었고 실질적 인권은 부분적으로만 보장되며 그나마 우려스러울 정도로 뒷걸음치고 있다. 더욱이 분단으로 인한 인권의 환경적 제약은 변할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눈부신 경제발전, 약간의 제도 개선, 팍팍한 생활상, 부분적 자유, 인권의 후퇴, 구조적 취약성, 이들의 기이하고 불안정한 조합이 우리 인권의 객관적인 모습이다.

세계인권선언은 누가 만들었나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조효제의 인권 오디세이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매년 12월10일은 인권의 날이다. 현대 인권의 분기점이 된 1948년의 세계인권선언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인권의 역사를 세계인권선언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을 정도로 본 선언의 의미는 각별하다. 지구상의 414개 언어로 번역되어 있는 세계인권선언의 성립과 해석을 둘러싸고 수많은 연구가 나와 있다. 중요한 역사적 사건에는 이른바 ‘정설’이라는 주류적 서사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세계인권선언도 예외가 아니다. 인류가 20세기 들어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과 특히 홀로코스트라는 반인도적·반문명적 참화를 거친 후 다시는 그런 전철을 밟지 않겠노라고 다짐한 역사적 서약이라는 해석이 그것이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1941년 미국 의회에서 행한 ‘4대 자유’ 연설, 그리고 같은 해에 발표된 연합국들의 대서양헌장에서도 인권이 언급되었던 선례가 거론된다. 크게 보아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해석 뒤에는 세계인권선언을 제정했던 유엔의 역할을 강조하고, 미국 등 전승국들의 헤게모니를 은연중에 받아들이는 시각이 자리 잡고 있다. 이정은의 연구에 따르면 1948년 한국에서도 세계인권선언을 만민평등의 세계헌장, 그리고 유엔의 대표처럼 생각되던 미국 문명의 산물이라는 식으로 이해했다고 한다. 그런데 정경이 있으면 외경이 있고, 모든 사건은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다수의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는 법이다. 따지고 보면 정통 서사라는 것도 결국 힘 있는 쪽의 관점에서 본 하나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균형 잡힌 시각을 위해 세계인권선언의 제정을 둘러싼 비주류적 해석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선 민간단체, 비정부기구(NGO), 그리고 개인들의 활약을 살펴보자. 흔히 국제 인권엔지오는 노예무역 반대단체들이 결성되었던 18세기 말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 후 20세기 전반쯤이면 국제 인권운동계라고 부를 만한 공론의 장이 만들어져 있었다. 국제적 인권기준을 만들자는 제안은 홀로코스트가 발생하기 전에 벌써 나왔다. 국제인권협회(FIDH)가 1920년대에 국제인권선언을 만들자고 제창했던 적이 있고, 1940년엔 소설가 H. G. 웰스가 인간권리선언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렇게 본다면 세계인권선언의 지적 뿌리는 2차 세계대전보다 더 멀리 뻗어 있다. 엔지오들은 전쟁이 끝날 무렵 유엔의 창설이 가시화되자 그 과정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해냈다. 이들은 유엔을 강대국들의 클럽으로 만들려는 패권적 움직임에 강력히 맞섰다. 비서구 국가들과 연대하여 인권과 소수민족 보호, 식민 해방을 유엔헌장 정신 속에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안전보장이사회보다 총회의 권위를 높여야 한다는 수정안을 제출하기도 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옵서버 자격으로 참여했던 마흔두 개 국제엔지오 중에는 재미 한인 동포들이 1938년 결성한 중한민중동맹단도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로서 특별히 기억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엔지오들은 공식 발언권이 없었지만 회의장 바깥에서 이른바 ‘복도 로비’를 통해 인권의 중요성을 각인시키는 데 맹활약을 했다고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강대국이 아닌 나라들의 역할도 적지 않았다. 유엔 내에 인권위원회를 만들자고 주장해서 관철시킨 것이 중소국들이었는데, 이들은 1947년부터 시작된 세계인권선언의 작성 과정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칠레·레바논·중국·이집트·인도·파나마·필리핀·우루과이 등이 대표적이었다. 특히 중소국들은 경제·사회·문화적 권리를 인권 목록에 확실히 포함시키는 성과를 올렸다. 의식주, 사회보장, 의료, 적절한 생활수준, 노동, 휴식, 교육, 문화 등이 인권에 포함됨으로써 세계인권선언이 18세기형 자연권과 확실히 다른 새로운 인권헌장이 되었던 것이다. 특히 칠레 대표 에르난 산타크루스는 사회권의 챔피언으로 지금까지 회자될 정도다. 중소국들은 여성의 권리를 격상시키는 데에도 큰 몫을 했다. 예를 들어 영어권 국가의 반대를 무릅쓰고 모든 사람(all men)이라는 남성형 표현을 ‘all human beings’라는 중성형 표현으로 바꾸는 데 앞장선 사람이 인도의 한사 메타 대표였다. 중소국들과 소련은 남아프리카의 인종차별 현실을 고발하는 데에도 열심이었다. 지난주 타계한 만델라가 생생히 목격했던 1946년의 유색 노동자 대파업 당시 백인정권이 저지른 탄압과 학살을 규탄하는 소리가 회의장을 울렸다. 또한 중소국들은 민족 자결권과 정치적 독립 역시 인권의 일부임을 확실히 부각시켰다. 식민지배를 받던 지역의 주민도 동등한 권리를 지닌 평등한 인간임을 각인시켰던 것은 이집트 대표 오마르 루트피의 공이 크다. 세계인권선언이 유엔총회를 통과하기 전인 1948년 4월, 콜롬비아의 보고타에서 남·북미 국가들이 모여 <아메리카 인간권리와 의무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의 전문에 나온 구절이 세계인권선언 1조에 거의 그대로 등장할 정도였다.

세계인권선언에 유교의 가르침이 상당히 반영된 점을 지적해야 하겠다. 흔히 위계적·봉건적·전통적 입장 때문에 유교의 세계관과 근대 개인주의적 인권 사이에는 건너지 못할 골이 깊다고 생각하기 쉽다. 이런 고정관념을 바꾼 사람이 중국 대표 장펑춘이었다.

중소국들은 세계인권선언의 초안을 토론하는 자리에서 자기들 나름의 독특한 관점들을 제시하여 호응을 받기도 했다. 필리핀과 중국이 ‘의복’을 인권 항목에 넣자고 주장했던 것이 좋은 예다. 이들이 아니었으면 의식주 중 ‘의’에 해당하는 인권이 자칫 사라질 뻔했던 것이다. 민주선거를 규정한 21조의 비밀투표 항목에 대해 아이티 대표는 문맹자가 많은 나라에서는 비밀투표가 자칫 국민의 선거참여를 제한할 수 있음을 지적하기도 했다. 아무도 미처 생각지 못했던 점이었다. 중소국들이 이렇게까지 세심한 기여를 한 덕분에 세계인권선언은 “국제규범을 작성함에 있어 비강대국들의 참여가 가장 높았던” 문헌이 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세계인권선언에 유교의 가르침이 상당히 반영된 점을 지적해야 하겠다. 흔히 위계적·봉건적·전통적 입장 때문에 유교의 세계관과 근대 개인주의적 인권 사이에는 건너지 못할 골이 깊다고 생각하기 쉽다. 이런 고정관념을 바꾼 사람이 중국 대표 장펑춘(張彭春)이었다. 톈진에서 태어난 장펑춘은 미국에 유학하여 컬럼비아대학에서 존 듀이의 지도로 교육철학 박사를 받은 후 귀국하여 난카이대학에서 교수를 지냈다. 그는 나중에 국민당 정부의 외교관으로서 유엔 대표를 지냈는데 중국 고전과 서양 학문에 두루 정통한 인물로서 세계인권선언 작성 과정에서 ‘지적 거인’의 역할을 했다.

장펑춘은 세계인권선언이 서구 중심적 틀을 벗어나 진정으로 보편적 선언이 되도록 하는 데 단단히 한몫을 했다. 그는 기독교 자연법적 인권관을 명시하자고 하던 많은 위원들의 요구를 뿌리치고 인권을 인간의 이성과 양심에 근거한 ‘인본적’ 개념으로 확정짓는 데 가장 큰 구실을 했다. 우리가 흔히 ‘천부인권’이라고 말하지만 적어도 세계인권선언의 기준으로 보면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곧, 형이상학적 존재론을 거부하고 휴머니즘으로서의 인권을 주장한 것이다. 장펑춘은 유엔 대표단들에게 인권의 바탕에는 인(仁)이 있다고 설명하여 깊은 인상을 남겼다. 사람(人)이 둘(二) 있을 때 서로 간에 취해야 할 자세가 바로 인(仁)이며 그것이 곧 인권이라는 것이다. 그는 중국에서 활동하던 서양 선교사들이 유럽으로 귀향하면서 소개했던 유교 고전들을 볼테르나 디드로 등 18세기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읽고 그것으로부터 근대 인권 사상의 일부가 도출되었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장펑춘은 동양의 과거제도가 신분이나 출신이 아니라 본인의 능력에 따라 관직에 오르도록 한 민주적 제도였다고 하여 선언의 21조에 나오는 동등한 공무담임권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기도 했다.

엔지오·중소국들·비서구권의 기여가 없었더라면 세계인권선언이 어떻게 됐을까. 아마 지금보다 훨씬 짧고, 경제·사회권은 대단히 소략하며, 식민지배를 거부하는 논리도 희박했을 것이다. 인권이 도덕적 규범으로 호명될 수 있는 절박함이나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짠함’이 크게 줄었을 가능성이 크다.

엔지오·중소국들·비서구권의 기여가 없었더라면 세계인권선언이 어떻게 됐을까. 아마 지금보다 훨씬 짧고, 경제·사회권은 대단히 소략하며, 식민지배를 인권의 이름으로 거부하는 논리도 희박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인권이 도덕적 규범으로 호명될 수 있는 절박함이나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짠함’이 크게 줄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본다면 인권에서 비주류적 시각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주류에 속한 사람은 약자, 소수자의 고통을 진정으로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것이 세계인권선언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제일 중요한 교훈이다. 인간 존엄성의 비타협적 옹호, 이 동아줄만 부여잡고 소외된 모든 사람들의 목소리에 겸손하게 귀 기울이라는 천둥 같은 메시지!

블랙박스 투표와 선거투명성 권리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조효제의 인권 오디세이

남아프리카 최초의 전국민 자유선거가 실시되었던 1994년의 대선 투표율은 95퍼센트가 넘었다. 투표자 행렬이 워낙 길어 빠르면 다섯시간, 지역에 따라선 다음날까지 줄을 서야 했다. 기다리다 못해 투표장의 담을 넘는 일까지 벌어졌다. 평생 처음 지도자를 직접 뽑을 수 있게 된 유권자들의 열망은 그만큼 간절했다. 우리는 그 심정을 너무 잘 안다. 민주화의 물줄기를 뚫었던 6월항쟁의 주요 요구사항이 직선제 개헌이었다. 개정된 헌법으로 1987년 12월16일 13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수요일이었다. 거의 90퍼센트 투표율, 국민의 열기는 대단했다. 얼마나 감격스러웠던지 한 시민은 “도장을 쥔 손이 떨려서 두 손을 모아 찍어야 했다”고 술회한다. 선거만으로 민주주의가 완성될 순 없지만 선거 없이 민주주의를 말하기는 불가능하다. 이처럼 선거와 민주주의의 관계는 상식에 속한다. 하지만 자유의지로 투표할 수 있는 선거가 인권의 중요한 일부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왜 선거가 중요한 인권에 속하는가. 자기 삶에 영향을 미치는 집단적 의사결정에 대등하게 참여할 권리를 보장해 주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전세계 헌법에서 민주 선거 원칙이 처음 등장한 것은 1848년 스위스 헌법이 그 효시라고 한다.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세계를 통틀어 선거를 통한 민주제를 채택한 나라는 극소수에 불과했고 그나마 모든 성인에게 투표권을 완전히 개방하고 1인1표 원칙을 지킨 나라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나머지는 독재제 혹은 혼합제 국가들이었다. 1900년이 되어서도 성년의 남녀 시민이 똑같이 투표권을 행사하여 정부를 선출할 수 있었던 현대식 민주국가는 뉴질랜드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아 민주주의는 극도로 인기 있는 보편적인 정치체제로 자리잡았다. 적어도 형식적으로나마 민주주의를 표방하지 않는 나라는 이제 지구상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사우디아라비아, 피지, 통가, 브루나이 정도가 예외적인 경우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를 스스로 내세우는 나라 중 실질적으로 선거민주제를 실시하는 곳이 얼마나 될까. 프리덤하우스에 따르면 2013년 현재 118개국에서 유의미한 선거를 통해 정치권력을 교체하고 있다고 한다.

2012년 12월19일 우리나라 유권자들 중 적어도 일부는 여론조작과 허위정보 심리전에 의해 눈에 안대가 덮인 상태에서 민주주의의 그림을 그리도록 조종되었다. 그리하여 주권재민 인권 원칙은 적어도 상당 부분 실종되어 버렸다. 지난 대선을 보편적 인권 원칙에 비추어 백퍼센트 진정한 선거였다고 보긴 어렵다.

인권에서 선거가 중요하게 간주되는 이유는 역사적으로 주권재민 사상 때문이다. 이것의 논리구조는 다음과 같다.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은 이성과 자율성을 지닌 소우주와 같은 존재다. 이런 소우주들이 모여 이룩한 사회공동체에서 유일 단독자 혹은 소수 엘리트들이 그 공동체의 존재론적 절대권위인 주권을 독점해서는 안 된다. 그건 원리적으로 타당하지 않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자기 권리를 ‘출자’하여 주권을 형성하고 그것을 공동으로 ‘소유’할 권리가 있다. 바로 이 점이 주권재민 또는 인민주권 원칙이 인권과 연결되는 논리다. 그런데 주권재민 인권을 구체적으로 행사하기 위해선 크게 보아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모두가 함께 참여해 직접 의사결정을 하거나, 그게 어려우면 대표를 뽑아 간접적으로 의사결정을 하게 한다. 따라서 직접(행동) 민주주의로 자기 뜻을 표출하는 것, 그리고 선거를 통한 대의제로써 주권재민을 행사하는 것, 이 둘 다 중요한 인권이다. 전자에 주목하는 사회운동형 민주파와 후자를 중시하는 제도정당형 민주파는 결국 주권재민 인권 원칙을 이루는 같은 동전의 양면이다.

알다시피 현대국가에선 대의민주제가 대세다. 때문에 선거는 주권재민을 실천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이고 민주주의의 은유처럼 되어 있다. 지난해 중앙선관위가 창설 50주년을 맞아 발표한 보도자료에 보면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란 표현이 나온다. 선거가 민주적이 되려면 인권 원칙을 따라야 한다. 유권자 한 사람이 한 표씩 행사하는 평등선거는 자율적 인간 존엄성이라는 인권 원칙을 전제로 한다. 성별·인종·재산·학력과 상관없이 모든 성인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보통선거 역시 차별을 금지하는 인권 원칙에서 도출된 것이다. 필자가 민주선거를 너무 인권 중심으로만 설명하는 것 같은가. 조금 길지만 다음 인용문을 읽어 보시라. “1. 모든 사람은 직접 참여하든, 자유롭게 선출된 대표를 통해 참여하든 간에, 자국의 정부운영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 2. 모든 사람은 자국의 공직을 맡을 동등한 권리가 있다. 3. 인민의 의지가 정부 권위의 토대를 이룬다. 인민의 의지는, 주기적으로 시행되는 진정한 선거를 통해 표출된다. 이러한 선거는 보통선거와 평등선거로 이루어지고, 비밀투표 또는 비밀투표에 해당하는 자유로운 투표절차에 따라 시행된다.” 바로 세계인권선언 21조다. 민주라는 말을 한마디도 쓰지 않았지만 민주주의 권리 조항이라 불리는 유명한 원칙이다. 여기서 볼 수 있듯 직접(행동) 민주주의, 대의민주주의, 주권재민, 일반의지의 표현, 공명선거 등이 모두 인권 원칙 그 자체인 것이다.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이 ‘진정한 선거’(genuine elections)라는 말이다. 진정한 선거란 무엇인가. 지금까지 나온 수많은 주해들의 공통분모를 찾으면 다음과 같다. 첫째, 부정행위, 청탁, 매수, 방해, 협박이 없어야 한다. 둘째, 선거 준비가 철저해야 한다. 투표용지, 투표소 위치, 장애인을 위한 편의, 투표소 수 등이 유권자의 욕구를 반영해야 한다. 셋째, 선거관리의 투명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선거인 명부 확정, 투표자 확인 및 기록, 개표의 엄정함, 전자투표 기계의 문제점 대비, 부재자 투표의 투명성 확보, 기록관리의 연속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넷째, 선거자금과 비용이 공개적이고 정확하게 회계처리되어야 한다. 다섯째, 선거운동 과정에서 역정보 혹은 허위정보 유포, 여론조작, 미디어 등을 통한 여론왜곡, 공공기관에 의한 선전·선동 행위가 없어야 한다. 이런 것들이 보장되어야 진정한 선거라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은 선거를 일컫는 용어가 있다. 이른바 ‘블랙박스 투표’다. 교묘하게 조정되고 불투명하게 진행된 흑선거를 뜻한다.

이제 대한민국의 권력은 국정원과 사이버사령부의 자판에서 나온다고 해도 할 말이 없게 됐다. 이번 일은 21세기 첨단 정보기술에 의해 고전적인 선거투명성 권리가 유린된, 전근대적이면서 동시에 탈근대적인 정치사건으로 규정할 수 있다.

일년이나 지난 시점에서까지 대선의 여파가 정리되지 않고 있는 우리 현실에 비추어 의미심장한 말이 아닐 수 없다. 베브 해리스라는 민주주의 활동가는 블랙박스 투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민주주의를 사람들이 직접 그리는 그림에 비유한다면 불투명한 선거는 사람들의 눈에 안대를 씌운 채 그림을 그리게 하는 것과 같다.” 어찌 보면 2012년 12월19일 우리나라 유권자들 중 적어도 일부는 여론조작과 허위정보 심리전에 의해 눈에 안대가 덮인 상태에서 민주주의의 그림을 그리도록 조종되었다. 그리하여 주권재민 인권 원칙은 적어도 상당 부분 실종되어 버렸다. 지난 대선을 보편적 인권 원칙에 비추어

백퍼센트 진정한 선거였다고 보긴 어렵다. 뿐만 아니라 의심스러운 뒤처리 과정 때문에 블랙박스 투표 대통령이 청와대를 차지하고 있다는 조롱이 만연해 있지 않은가.

이제 대한민국의 권력은 국정원과 사이버사령부의 자판에서 나온다고 해도 할 말이 없게 됐다. 이번 일은 21세기 첨단 정보기술에 의해 고전적인 선거 투명성 권리가 유린된, 전근대적이면서 동시에 탈근대적인 정치사건으로 규정할 수 있다. 민주주의에 관한 온갖 고급 이론들이 소개되어 있는 나라에서 민주주의의 최저 기준인 진정한 선거권 하나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 이게 우리 정치의 적나라한 자화상이 아닌지 자문해야 한다. 전근대와 탈근대가 공존하면서도 정작 근대적 ‘정상성’의 확보에선 낙제점을 받는 모순적인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인권에 있어 특히 뼈아픈 부분이다. 인권은 크게 보아 계몽주의 전통을 계승한 근대의 정치적 기획에 속하는 담론이기 때문이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것처럼 모든 방법을 동원해 철저히 진상을 밝히고 반민주 사범을 엄벌에 처하는 것이 주권재민 인권회복의 첫걸음이다. 근본적으로는 시민들의 눈이 더 밝아져야 한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외부의 선전과 조작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러나 어둠의 작전세력이 우리 눈에 안대를 씌우는 장난을 쳐도 판단이 흐려지지 않을 만큼 독립적인 시민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로버트 하인라인의 말이다. “정신이 자유로운 인간은 어떤 강압으로도 꺾지 못한다. 형틀도, 원자폭탄도, 아니 그 어떤 것으로도 자유인의 마음을 정복할 순 없다.”

북한 인권운동에 관한 단상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조효제의 인권 오디세이

전두환의 폭정이 극에 달했던 1980년대 중반, 미국의 인권단체 아시아워치위원회가 남한에 조사단을 파견한 적이 있다. 위원회는 민주화 단체와 재야인사들을 만나 생생한 증언을 청취하였다. 아시아워치는 이 조사에 근거하여 1986년 초 방대한 보고서를 펴냈다. 학생들과 민주인사들에 대한 탄압, 대학에 대한 감시와 개입, 반체제 인사들의 가혹한 형기, 노동운동의 폭력적 억압, 언론인의 추방과 재갈 물리기, 출판물 검열 등이 상세하게 열거되었다. 특히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고문 관행이 심각한 인권유린으로 지적되었다. 레이건 행정부의 대 한국 정책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었다. 남한의 민주진영으로서 크게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흥미롭게도 이 보고서 중 한 챕터가 북한 인권문제에 할애되었다. 집필자는 브루스 커밍스, 당시 워싱턴대학 교수였다. 커밍스 교수가 파악한 북한의 인권은 한마디로 짙은 안개에 뒤덮인 상태였다.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인 나라 중 하나, 언론자유나 표현의 자유가 단지 억압되는 정도가 아니라 존재하지도 않는 나라였다. 적어도 국제 사회에서 통용되는 집회 및 결사의 자유는 아예 있지도 않았다. 학생들의 자유로운 발언과 체제 비판, 독자적인 정치조직, 이런 것들을 논하기 어려운 나라였다. 애초 아시아워치는 남북한 모두에 조사단을 파견하려고 했으나 북한에는 입국조차 할 수 없었다.

북한 인권을 말하는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있다. 북한 인권 문제에는 남한과의 대비가 언제나 배경에 깔려 있다는 점, 그리고 냉전이라는 특수한 이념 대결구도 하에서 인권을 균형 있게 보기가 어려운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그 당시 남한은 형식적으론 민주체제이면서 극단적으로 인권 탄압을 하는 나라, 그러나 그나마 반민주 현실을 비판적으로 평가할 기준이 있는 나라였다. 반면 북한은 평가기준 자체가 다른 나라였다. 전자는 인권유린 리스트가 길게 나오는 나라였고, 후자는 그런 리스트를 작성하기도 어려운 나라였다. 그렇다면 남북한의 인권 우열을 가릴 수 있었을까. 반공주의자들은 바로 이런 이유를 들어 남한이 무조건 우월한 체제라고 본다. 이들은 남한 사회 내에서 반민주·반인권 상황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사치라고 판단한다. 이런 입장에 따르면 남한 국민의 기본권은 남한이 이북에 의해 적화되지 않은 ‘불성립에 따른 반사적 가치’를 뜻한다. 더 나아가, 반공주의자들은 훨씬 더 ‘행복한’ 남한 국민이 자국에 대한 비판보다 북한 주민의 인권 개선에 노력을 다해야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이 점에 동의 않는 사람은 당장 북한으로 보내자는 폭언도 서슴없이 퍼붓는다.

남한의 민주파는 본질적으로 인권 침해는 단순비교가 불가능하다고 본다. 형식적 민주체제에서의 인권침해든 전체주의 하에서의 인권유린이든 공히 투쟁의 대상인 것이지, 비교를 운운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해방 후 남한의 민간인 학살사건, 유신 암흑기, 광주항쟁을 겪은 나라에서 길고 긴 투쟁을 통해 이 정도라도 민주주의를 기반 위에 올려놓은 과정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거대한 희생 과정을 거친 뒤에야 남한이 인권보장을 위한 투쟁을 전개할 공간이 크게 확장된, 곧 반증이 가능한 열린 사회가 될 수 있었다고 평가한다. 물론 오늘날 북한은 남한과 비교가 불가능한 사회다. 건성건성 박수 치고 오만불손하게 행동했다고 총살당한 장성택을 보라. 하지만 민주파는 그런 이유만으로 북한에 대해 우리가 일방적으로 인권을 설교할 수 있는 여유로운 입장은 아니라고 볼 것이다. 인권은 스스로 실천해야 할 가치이지, 타자에게 설교할 수 있는 가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권에 관한 한 완벽한 사회체제는 이 세상에 없다. 이 밖에 북한의 인권문제 자체를 부정하는 경향을 가진 민족파도 있지만 이들의 견해는 소수가 되었다.

이러한 존재론적 대립이 북한 인권 문제를 둘러싼 남한 내 견해 차이의 근본을 이루고 있다. 인권은 절대적 가치로 주창되지만 그것을 실천할 때에는 맥락과 상황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인권을 상대를 비난하기 위한 도구로 악용하는 행태를 정상이라 생각해선 안 된다. 인권의 정치도구화는 원래 냉전의 산물이었다. 냉전 당시 동서 진영은 상대를 공격하기 위해 인권을 경쟁적으로 오용했다. 미국은 시민·정치적 권리로써 소련을, 소련은 경제·사회적 권리로써 미국을 난타했다. 이런 양분구도 때문에 국제앰네스티는 냉전 시절 양심수 명단을 발표할 때마다 자본주의, 사회주의, 비동맹 진영 사이에서 기계적 균형을 맞추어야 했다. 앰네스티는 모든 쪽에서 욕을 먹었지만 그 점을 역이용해 모든 진영의 비판들을 모아 책자를 간행하기도 했다. 두루 욕을 먹는 것 자체가 인권단체의 공정성을 입증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한반도에선 냉전이 현재진행형이다. 남한의 인권단체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냉전 당시의 국제인권운동이 잘 보여주고 있다.

인권운동은 교실에 비유할 수 있다. 학생들이 걸상에 앉아 있고, 앞쪽에는 칠판이 있다. 칠판은 인권의 수직적 차원이다. 여기엔 인권의 기본원칙들이 적혀 있다. 모든 인권이 모든 이에게 적용된다는 보편성, 인권 목록은 나눌 수 없고 크게 한 덩어리로 보아야 한다는 불가분성, 빵과 장미가 다 필요하다는 원칙, 인권 목록이 서로 기대고 있다는 상호의존성, 유엔을 포함한 국제인권 규범에 대한 동의, 인권은 인권적인 방식으로 추구해야 한다는 평화적 원칙 등이 그것이다. 걸상들은 인권의 수평적 차원이다. 각각의 걸상은 인권운동의 여러 영역을 상징한다. 여성인권, 장애인권, 노동인권, 언론인권, 집회결사인권 등등. 어떤 영역에서 활동하든 간에 인권 운동가라면 칠판에 적힌 인권의 대전제에 동의해야 한다. 예를 들어, 가정폭력 반대운동을 하더라도 국가보안법이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에 관한 유엔의 권고에 원칙적으로 동의해야 정상적 인권운동이라 할 수 있다.

북한 인권운동 걸상에 앉아 있는 단체 중 상당수가 칠판에 적힌 원칙을 외면하거나 편리할 때에만 활용한다. 이들은 엄밀하게 말해 북한인권운동이 아니라 북한 타도운동을 하는 단체들이다. 인권 교실 내에 앉아 있을 이유가 없다. 반대로 칠판의 대원칙에 동의하는 전통적 인권운동 중에는 북한 인권 걸상에 앉아 있는 단체가 드물다.

그런데 북한 인권에 관해선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북한 인권운동 걸상에 앉아 있는 단체 중 상당수가 칠판에 적힌 원칙을 외면하거나 편리할 때에만 활용한다. 이들은 엄밀하게 말해 북한 인권운동이 아니라 북한 타도운동을 하는 단체들이다. 인권 교실 내에 앉아 있을 이유가 없다. 반대로 칠판의 대원칙에 동의하는 전통적 인권운동 중에는 북한 인권 걸상에 앉아 있는 단체가 드물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바람직한 상황은 아니다. 전자에 대해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인권운동을 한다면서 왜 인권의 수직적 차원에 미온적인가. 당신 인권운동 맞나. 인권운동 하려면 똑바로 하라. 후자에 대해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왜 중요한 인권 영역을 방치하고 있는가. 당신 직무유기 아닌가. 가능한 선에서 개입하도록 노력하라. 북한이탈 주민을 위한 활동 같은 것도 있지 않은가.

인권의 정치화를 거부하되, 인권이 결국 정치적 역학 속에서 구현된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북한인권법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시리아 인권법은 만들지 않으면서 북한인권법을 제정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인권의 정치화다.

한 가지 더 있다. 인권 교실이 어떤 건물 내에 있는지도 따져봐야 한다. 튼튼한 건물 내에 위치하고 있다면 통상적인 인권운동이 가능하다. 하지만 기초가 튼튼하지 않은 건물에 교실이 들어서 있다면 어떻게 될까. 이럴 때엔 인권운동과 건물 붕괴 예방조치를 함께 취해야 한다. 인권운동이 구체적 인권침해에 대응하면서도 구조적 요인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말이다. 동북아의 지정학적 특수상황이 꼭 이런 경우다. 역내의 갈등과 불안정 요인을 감안하면서 인권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인권의 정치화를 거부하되, 인권이 결국 정치적 역학 속에서 구현된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북한 인권법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시리아 인권법은 만들지 않으면서 북한 인권법을 제정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인권의 정치화다. 굳이 만들겠다면 반북단체 지원이 아니라 북한 주민의 실질적 인권향상을 위한 법을 내놓아야 한다.

이런 점들을 고려한 통찰이 이미 나와 있다. 구조적 차원에선 백낙청의 분단체제론이 유력한 이론적 대안이 될 수 있다. 이행 차원에선 헬싱키 프로세스의 한반도 버전을 모색하는 박경서의 제안, 코리아 인권 개념을 제시한 서보혁의 제안, 진보적 북한 인권운동을 주창하는 황재옥의 제안 등을 꼽을 수 있다. 북한의 인권 문제는 이제 되돌릴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국제 인권 이슈가 되었다. 이것을 어떻게 풀어내느냐가 장기적으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좌우하는 중요 변수가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인도적 개입과 보호책임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조효제의 인권 오디세이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보호책임’이라는 개념이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시리아 내전과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인권유린 사태, 그리고 유엔 북한인권조사위 보고서에서도 ‘보호책임’이 등장했다. 보호책임은 요즘 인도적 개입이라는 말보다 더 자주 거론된다. 그 이유를 캐보면 국제정치에서 인권의 작동방식과 그것의 모순성이 드러난다.

생활고로 일가족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잠시라도 심란하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하물며 수천, 수만의 인간이 전쟁이나 내전, 학정으로 상상도 못할 인권침해를 당할 때, 그것을 목격하는 사람이 느낄 동정, 경악, 분노, 무력감은 어떠할까. 어떻게든 피해자를 돕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 가해자를 저지하고 응징하고 싶어할 것이다. 그러나 복잡한 국제정치 현실 속에서 단순명료한 해결책은 결코 쉽게 나오지 않는다. 또한 동기가 정당하다 해서 그 행동이 언제나 좋은 결과를 내는 것도 아니다. 이런 이유로 최근 들어 ‘보호책임’(Responsibility to Protect) 또는 줄여서 R2P라는 개념이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현재진행형인 시리아 내전과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인권유린 사태, 그리고 유엔 북한인권조사위 보고서에서도 ‘보호책임’이 등장했다. 보호책임은 요즘 인도적 개입이라는 말보다 더 자주 거론된다. 그 이유를 캐보면 국제정치에서 인권의 작동방식과 그것의 모순성이 드러난다.

인도적 개입이란 대규모 인권유린 사태 때에 피해자 보호를 목적으로 삼아 국제사회가 해당 국가의 동의 없이 그 관할권 안으로 군사개입을 하는 것이다. 인도적 개입은 냉전 종식 뒤 1994년 르완다 제노사이드, 1995년 보스니아 인종청소와 나토 공습, 2003년 다르푸르 내전을 겪으면서 인류 목전에서 벌어지는 무지막지한 참화를 모른 체할 수 없다는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국경없는 의사회를 창설했던 베르나르 쿠슈네르 같은 활동가들이 초기의 열렬한 주창자였다. 그런데 ‘개입’이라는 말 자체가 19세기 이래 외과적 수술을 뜻하는 의학용어로 사용되었던 선례가 있다. 또한 강대국들의 타국 내정 간섭에 면죄부를 준다는 비판도 늘 있었다. 무엇보다 인도적 개입은 주권과 인권을 제로섬 관계로 파악하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되면 ‘주권을 존중하느냐, 아니면 모든 인권침해 상황에 개입하느냐’ 하는 양자택일만 남는다.

코소보 사태를 사후 평가하는 유엔 보고서가 2000년에 나온 적이 있다. 나토의 개입이 유엔의 승인을 받지 않았다는 점에서 “불법적이지만 내용상 정당”했다는 모순적 결론이 내려졌다. 국가주권과 인권보호를 병행할 수 있는 통합논리가 절실히 필요해졌다. 마침 남수단의 프랜시스 뎅과 같은 학자들이 ‘책임으로서의 주권’이라는 신개념을 제안해 놓은 게 있었다. 국가가 자국 내에서 절대적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전통적 주권 개념이 아니라, 자국민을 보호할 주된 책임이 해당 국가에 있다는 의미로 주권을 재정의한 것이다. 그 뒤 유엔의 위임을 받아 캐나다 정부가 ‘개입과 국가주권에 관한 국제위원회’(ICISS)를 발족하여 연구에 착수했다. 2001년 <보호책임>이라는 최종 보고서가 나왔다. 오늘날 보호책임 개념의 원조에 해당하는 문헌이다. 보고서는 외부 개입자의 권리가 아닌, 내부의 잠재적 수혜자 관점에서 이 문제를 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한 인권보호의 전 과정을 책임 개념으로 일관성 있게 파악하고, 국가가 자국민 보호 책임을 다하지 못할 때에 한해 국제사회의 책임이 발동된다고 주장한다. 국제사회의 보호책임에 군사개입이 포함될 수 있지만 엄격한 조건하에서만 고려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라고 규정되었다. 인도적 개입을 원칙상 인정하면서도 인간을 보호할 책임이라는 큰 퍼즐그림의 한 조각으로서 극히 신중하게 다뤄야 한다고 본 것이다.

<보호책임>의 내용은 코피 아난의 2005년 유엔 보고서 <더 큰 자유 속에서>에 중요하게 인용되었다. 아난은 평화, 인권 그리고 발전이 서로 연결되고 서로 의존하며, 그 목표를 위해 전 인류가 서로를 보호할 책임이 있다고 지적했다. 같은 해 9월 유엔에서 역사상 최대 규모의 세계정상회의가 열렸다. 회의 말미에 채택된 <결과문서>에서 국제사회의 보호책임이 명기되었다. 하나의 개념이 국제규범으로 결정화된 역사적 순간이었다. <결과문서>에서 다룬 보호책임은 <보호책임> 보고서보다 범위가 작고 강도가 약하다. 보호책임이 적용될 수 있는 상황을 제노사이드, 전쟁범죄, 인종청소, 반인도적 범죄 등 4가지 범죄에 한정했다. 개별국가한테 일차적 보호책임이 있고 그 책임이 ‘명백히 실패’했을 때에 국제사회가 그 국가를 지원할 책임이 발생한다고 했다. 또한 이런 상황을 미연에 탐지할 조기경보 능력을 유엔이 배양해야 한다고 했다. 중대한 인권침해 사태 때 국제사회가 유엔을 통해 외교적·인도적·평화적 수단을 강구할 책임이 있는데, 평화적 수단만으로 해결이 안 될 때엔 국제사회가 “시의적절하고 단호한 방식으로, 사안별로, 유엔 안보리를 통해 집단행동에 나설 각오”를 다져야 한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세계 정상들은 “국가가 자국민의 인권을 보호할 역량을 키우도록 지원할 의지가 있고, 위기와 갈등이 발생하기 전에 문제의 소지가 있는 국가를 지원할 의지가 있다”고 다짐했다.

보호책임은 인권침해가 있을 때 외부에서 무조건 개입하도록 허용하는 면허증이 아니다. 또한 인도적 군사개입의 완곡어법 혹은 세련된 표현도 아니다. 보호책임은 책임으로서의 주권, 국가의 일차적 보호책임, 점진적 단계들로 이루어진 총체적 접근을 강조한다.

2005년의 <결과문서>는 일종의 타협이었다. 우선 수사적 차원에서 보호책임 개념을 국제규범에 준하는 위치로 승격시킨 건 분명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유엔을 통한 문제해결을 적시하고, 외부 책임보다 내부 책임에 방점을 두며, 개입할 ‘의무’보다 ‘각오’를 강조한 문헌이었다. 따라서 <결과문서>에 묘사된 보호책임에 따르면 모든 인권침해 사태에 대해 외부에서 반드시 개입할 ‘의무’가 있다기보다, 사안별로 외부에서 개입할 ‘권리’가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결과문서>를 구체화하기 위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2009년 <보호책임의 이행>이라는 보고서를 냈다. 여기서 보호책임은 세 기둥을 가진 통합체로 묘사되었다. 첫째 기둥은 해당 국가의 보호책임을 거론하면서 인권존중이 ‘책임 있는 주권’의 필수 요소라고 강조한다. 둘째 기둥은 취약 국가의 내부 역량을 구축하기 위해 국제사회가 지원할 책임이 있다고 지적한다. 이에 따르면 개도국에 대한 개발원조도 중요한 인권 보호책임에 속한다. 셋째 기둥은 시의적절하고 단호한 대응이다. 여기엔 경고, 제재, 무기유입 제한 등 강압적 조처가 포함된다. 최후의 수단으로 신속대응군의 투입도 고려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인권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보호책임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첫째, 보호책임은 앞으로 더욱 중요해질 것이므로 이를 정확히 이해하고 적절하게 다룰 수 있어야 한다. 보호책임은 인권침해가 있을 때 외부에서 무조건 개입하도록 허용하는 면허증이 아니다. 또한 인도적 군사개입의 완곡어법 혹은 세련된 표현도 아니다. 보호책임은 책임으로서의 주권, 국가의 일차적 보호책임, 점진적 단계들로 이루어진 총체적 접근을 강조한다. 보호책임을 군사개입과 동일시하는 시각은 무지한 왜곡에 불과하다. 둘째, 보호책임의 동기가 무엇이든 결국 그 실행은 지배-저항 논리의 충돌과 이해타산의 역학관계 안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인도주의와 보편성을 국가 정체성으로 내세우고 싶어하는 미국과 프랑스가 보호책임에 특히 열성적이고, 쿠바, 니카라과, 이란, 파키스탄, 수단, 베네수엘라, 알제리, 볼리비아, 북한, 리비아, 에콰도르, 시리아 같은 나라들이 그것을 특히 반대하는 현실이 이를 반영한다. 셋째, 보호책임이 실효를 거두려면 동기만큼이나 결과를 중시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인권 피해자들에게 실질적으로 득이 되는 길을 ‘사안별로’ 따져야 한다. 예를 들어 리비아는 반군의 영토 장악력이 강했고 정규군이 약했으며 인근 지역에 불안정을 초래할 위험이 비교적 적었다. 하지만 시리아는 정반대다. 따라서 리비아와 시리아는 서로 다르게 취급할 수밖에 없다. 절박한 심정, 동기론적 이상주의, 일차원적인 정의감, 그리고 단기적 개입으로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고 싶어하는 군사적 낭만주의의 유혹이 합쳐질 때 상황이 더 악화되곤 한다. 마지막으로, 보호책임의 첫째, 둘째 기둥은 국제사회가 지속적으로 이행해야 할 의무이지만, 셋째 기둥은 국제사회가 최후의 수단으로 고려해 볼 수 있는 잠재적 권리에 가깝다. 세상의 그 어떤 문제도 갑자기 생겨나지 않으며 단칼에 해결되지 않는다. 더 공정한 세계를 향해 소걸음처럼 계속 노력하면 인권은 자연스레 따라오게 되어 있다. 병원 응급실이 필요한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것이 아무리 좋다 한들 평소 꾸준히 건강을 관리하는 것과 비교할 순 없지 않은가.

권리들끼리 싸우면 누가 이기나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조효제의 인권 오디세이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얼마 전 <한겨레>에 “사생활 보호와 알 권리, 무엇이 우선일까요”라는 기사가 실렸다. 권리 간 충돌 문제를 다룬 내용이었다. 집회의 권리와 통행의 권리가 부딪친다면, 학생인권과 교권이 맞선다면, 죄수의 권리와 간수의 권리가 대립한다면, 노동자의 권리와 기업의 경영권이 갈등한다면 등등, 권리들끼리 싸우는 사례는 많다. 필자가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동전을 모았더라면 지금쯤 돼지저금통이 하나 가득 차 있었을 것이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이슈다. 권리 간 충돌 문제는 인권에서 이론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민감하고 골치 아픈 난제다.

권리간 충돌은 21세기 들어 커다란 쟁점이 되었다. 9·11 이후 핵심쟁점이 국가안보냐 개인 자유권이냐 하는 질문이었다. 일률적 잣대로 판단하기 어렵지만 이 문제를 해소할 기본원칙은 있다. ‘대다수 권리는 절대적 권리가 아니다’ ‘권리들 간에 서열을 매길 수 없다’ ‘어떤 권리를 모두 누릴 수 있는 건 아니다’ 등.

권리 간 충돌은 21세기 들어 전세계적으로도 커다란 쟁점이 되었다. 9·11 사태 이후 대테러 전쟁에서 논란이 되었던 핵심쟁점이 국가안보냐 개인 자유권이냐 하는 질문이었다. 중국의 한 자녀 정책으로 비롯된 논란 역시 비슷한 구도였다. 부부가 자녀를 가질 수 있는 재생산권과 사회 전체의 지속가능성을 우선시하는 공리주의적 요구가 대결했던 것이다. 프랑스 무슬림들의 히잡 착용 권리와 모든 공공교육 시설에서 종교적 상징물을 금지하는 정부의 입장 대립, 이 역시 권리 간 충돌 사례였다. 일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권리 간 충돌 문제에 관해선 확실한 정답이 없다가 정답이다. 사례별로 따져봐야 한다. 하지만 이상하지 않은가. 인권은 무조건 우선시되어야 할 절대적 규범이라고 배웠는데 어째서 이렇게 어중간한 답이 나온단 말인가.

우선 권리의 충돌에도 여러 유형이 있음을 지적해야 하겠다. 다른 종류의 권리들이 충돌하는 경우가 있다. 대중의 알 권리와 공인의 사생활 권리를 생각하면 된다. 동일한 권리의 행사방식과 한계설정을 놓고 갈등하는 경우도 있다. 표현의 자유가 소중하지만 일베들의 행태에 어떤 제한을 가해야 할지 고심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한 사람의 내면에서 서로 다른 권리들이 충돌하기도 한다. 내가 믿는 종교의 가르침과 시민으로서의 의식이 갈등하는 게 좋은 예다. 법적 권리와 사람들의 가치가 충돌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권리’라는 말에 여러 차원이 있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아무 데나 ‘권’자를 붙인다고 해서 무조건 인권이 되는 건 아니다. 인권의 관점에서 보자면 제일 중요한 권리는 국제적으로 공인된 인권규범에 부합하는 권리다. 국제 인권규범은 대개 국내법으로도 인정되지만 꼭 그런 건 아니다. 인권은 아니지만 법적 효력을 지닌 권리도 있다. 그다음 단계로, 중요한 이익 또는 권익이 있을 수 있다. 이 역시 현실에서나 법정에서 중요하게 취급된다. 또한 법에 명시되진 않았지만 어떤 집단에서 극히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가 있다면 그것의 문화적 영향력을 감안해 권리 비슷하게 인정해 주기도 한다.

특히 신앙이나 정체성, 섹슈얼리티와 관련된 권리는 정서적 인화성이 강해 민감한 충돌과 파열음을 일으키기 쉽다. 그렇다면 권리 간 갈등 문제를 해소할 방안이 있는가. 몇 가지 기본원칙이 있다. 첫째, 대다수 권리는 절대적 권리가 아니다. 가장 오해가 많은 부분이다. 자연법 전통의 천부인권론이 오늘날까지 큰 영향을 끼치면서 인권은 신성불가침이고 절대적이라는 믿음이 정설처럼 자리잡았다. 권리 간 충돌의 근원을 따져 보면 이런 오해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 하지만 남을 해치면서까지 내 권리를 주장할 순 없다. 표현의 자유가 아무리 중요해도 아동 음란물을 제작할 자유는 인정되지 않는다. 아무리 확실한 권리라 하더라도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일정한 한도 내에서 행사되어야 한다. 오늘날 인권이 대단히 매력적인 담론으로 떠오르면서 이런 초보적인 사실조차 헷갈리는 경우가 많아졌다. 스테판 에셀이 <분노하라>에서 명쾌하게 정의했던 유명한 구절을 기억해 보라. 세계인권선언에서 말하는 자유란 “닭장 속의 여우가 제멋대로 누리는 무제한의 자유가 아니다.”

둘째, 권리들 간에 서열을 매길 수 없다. 정책적으로 어떤 권리를 먼저 시행할 수는 있겠지만 원칙적으로 모든 인권의 가치가 중요하다. 권리들이 충돌할 때 어떤 권리를 배제할 것이 아니라 모든 권리를 반영할 수 있는 최선의 방도를 찾아야 한다. 최선이 어려우면 차선책이라도 모색해야 한다. 즉 인권에서도 균형과 타협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셋째, 어떤 것에 대한 청구권이 있다 하더라도 그 권리를 모두 누릴 수 있는 건 아니다. 예를 들어 “무엇이든 물어보세요”라고 했다 해서 다산콜센터의 상담사에게 모든 맛집 정보를 요구하거나 어떤 속옷을 입고 있느냐고 묻는 따위의 성희롱을 할 권리는 세상에 없다.

넷째, 권리들끼리 충돌할 때엔 각 권리의 범위를 정해야 하고 사안의 맥락을 살펴야 한다. 예를 들어 누구나 공개적으로 말할 자유가 있지만 어떤 맥락에서 그것이 표출되는지를 따져야 한다. 사람이 가득 찬 소방서에서 “극장이야”라고 소리치는 건 별문제가 아닐 수 있지만, 사람이 가득 찬 극장에서 “불이야”라고 소리칠 자유는 인정되지 않는다. 전혀 다른 맥락의 행동이고, 전혀 다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 사회의 법적, 문화적 규범도 중요한 판단기준이 된다. 예컨대 ‘동방예의지국’에서 자식이 부모에게 욕설을 퍼붓는 행위를 표현의 자유라는 식으로 옹호하기는 어렵다.

다섯째, 본질적 권리와 부차적 권리 사이의 무게를 달아 경중을 판단해야 한다. 이것을 핵심적 권리와 주변적 권리로 구분하기도 한다. 자기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어떤 가치에다 ‘권’자를 붙여 절대적 권리로 내세울 때 제로섬 게임 같은 갈등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하지만 모든 ‘권리’의 무게가 동일하지 않다는 점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사안별로 권리들의 무게가 다르고, 같은 권리라 해도 경우에 따라 무게가 달라진다. 서구에서 간혹 인용되는 사례가 있다. 소수자 정체성을 가진 어떤 사람이 자기 정체성과 관련된 업무로 관공서를 찾았다. 공교롭게도 종교적 이유로 그런 정체성에 반대하는 공무원이 창구를 지키고 있었다. 그 직원은 자신의 신앙 때문에 그 업무를 볼 수 없다고 하면서 다른 직원을 불러 주겠다고 했지만 차별적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고소를 당했다. 하지만 법원은 종교적 신념에 따른 업무 거부가 본질적 권리에 해당한다고 공무원의 손을 들어줬다. 비슷한 사례가 또 있었다. 특정 종교적 신념을 가진 인쇄업자가 소수자 단체에서 요청한 책자 제작을 거부했다 제소당했다. 이번에는 법원이 인쇄업자의 행동을 차별이라고 판결했다. 종교적 신념 때문이라 해도 영업 거부는 주변적 권리에 불과하다고 본 것이다.

‘잊혀질 권리’ 논란과 같이 새로운 권리 충돌 문제가 나타난다는 것은 그 사회가 정체되지 않고 진화하고 있다는 증거다. 권리 충돌이 발생할 때 되도록이면 약한 사람과 소수자의 눈높이에 인권의 눈금을 맞춘다는 원칙과 상식을 지켜야 한다. 이 점에서 법률가들의 역할이 특히 중요하다.

이처럼 권리 간 충돌 문제는 일률적인 잣대로 판단하기 어렵다. 원칙, 상식, 균형감각을 발휘해서 황금비를 찾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떤 원칙인지, 어떤 상식인지를 면밀히 따질 필요는 있다. 인권의 원래 취지가 인간의 본질적 이익을 보호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민주적 다수결 원칙으로도 인권을 침해하진 못한다. 그렇다면 권리 충돌이 발생할 때 되도록이면 약한 사람과 소수자의 눈높이에 인권의 눈금을 맞춘다는 원칙과 상식을 지켜야 한다. 이 점에서 법률가들의 역할이 특히 중요하다. 권리 간 충돌은 앞으로도 계속 발생할 문제다. 인권의 목록이 늘어나고, 신념과 이념에 근거하여 인권이 제기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권의 불확실성 때문에 권리 간 충돌이 인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지적하는 학자도 있다. 또한 권리들이 서로 충돌해 온 과정이 인권의 역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인권이 발전한다는 말은 인간사회가 진보한다는 말과 마찬가지다.

인간사회가 전진할 때 갈등과 긴장이 없을 수 없다. 권리 간 충돌은 인류 진보의 성장통인 셈이다. “권리들의 충돌은 사법부도, 입법부도 어떤 일관된 원칙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독특한 문제”라는 말이 있다. 새로운 권리 충돌 문제가 나타난다는 것은 그 사회가 정체되지 않고 진화하고 있다는 증거다. ‘잊혀질 권리’, ‘존엄하게 죽을 권리’ 혹은 ‘자기 몸에 대한 결정권’과 같은 논란을 보라. 단시간에 인권 목록에 오르는 권리 요구도 있지만 오랜 논쟁을 거쳐도 풀리지 않는 문제가 적지 않다. 권리 간 충돌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명백하다. 인권은 그 시대에 특유한 억압권력에 맞서는 투쟁 속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규정된다는 사실.

민족자결권을 다시 생각한다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조효제의 인권 오디세이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우크라이나 사태가 도무지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크림반도가 주민투표를 통해 러시아에 병합된 후에도 동부지역의 상황이 심상찮다. 심지어 우크라이나 총리는 러시아가 3차 세계대전을 획책하고 있다는 말까지 했다. 요즘 미국과 러시아 사이의 설전을 보고 있으면 냉전 때의 미소 대결이 떠오른다. 이런 와중에 나이지리아에선 영화 한편이 큰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비아프라 내전을 다룬 <절반의 황색 태양>이 당국에 의해 상영금지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얼핏 동떨어져 보이는 두 사건이지만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민족자결권의 문제가 그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인민의 자기결정권’(the right of people to self-determination)이다. 러시아 상원의장은 국제법상 크림반도 인민의 자결권을 존중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1960년대 말 비아프라의 자결권 요구를 강압적으로 눌렀던 나이지리아는 오늘까지도 그 입장을 바꿀 의사가 한 치도 없어 보인다. 21세기에도 큰 영향을 지닌 인민 자결권 원칙을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까.

자기결정권은 개인 자아의 주체적 행위를 뜻하는 철학적 개념에서 비롯되었다. 최근 들어 인민 자결권을 융통성 있게 해석하는 경향이 생겼다. 독립을 원하는 집단에 자원의 통제권을 대폭 인정해 주거나 높은 수준의 자치를 보장하는 방안이 대표적이다.

원래 자기결정권은 개인 자아의 주체적 행위를 뜻하는 철학적 개념에서 비롯되었다. 그 후 서구 제국주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반제, 반식민 투쟁을 벌이던 운동가들이 집단적 염원으로서 자기결정권을 적극적으로 주창하였다. 낭만주의, 미국과 프랑스의 혁명사상, 사회주의 등이 이런 움직임에 영감을 주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전후처리 과정에서 인민 자결권이 중요한 이슈로 떠올랐다. 베르사유 회의에 참석한 미국 대표단에 지도전문가, 민속학자, 인류학자들이 포함되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1918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유명한 14개 조항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의 인민들(10조), 발칸반도 국가들(11조), 그리고 터키 제국 내 비터키계 민족들(12조)이 “자율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자유로운 기회”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이었다.

그런데 반식민 투쟁을 하던 쪽에서는 신생독립, 즉 ‘대외적’ 자결권을 강조했던 데 반해, 윌슨의 원칙은 ‘대내적’ 자결권에 가까웠다. 이 때문에 반제 투쟁가들은 윌슨에게 일종의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인민의 자결권이 완전한 독립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일종의 자치를 의미하는지는 주권과 국제질서라는 면에서 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면서도 아직까지 속 시원히 풀리지 않은 문제로 남아 있다.

2차 세계대전 후 유엔헌장 1조와 55조에 “인민들의 동등한 권리와 자기결정 원칙을 존중”한다는 말이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하지만 1948년의 세계인권선언에서는 자결권이 언급되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온건했던 인민 자결권 요구가 봇물처럼 터져 나오기 시작한 건 1950년대 들어서였다. 탈식민화 조류를 타고 인민의 자결권을 국제인권 기준에 포함시키자는 요구가 거세졌던 것이다. 이른바 3세대 인권인 집단적 권리가 인권의 중요한 요소로 등장했다. 1960년 유엔총회 결의안 1514호는 이런 추세를 공식화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피식민지 영토가 주권국가로 독립할 수 있는 법적 근거로서 인민 자결권을 부각시켰기 때문이다.

그 당시 탈식민운동의 기세는 정말 대단했다. 비서구권이 국제무대에서 제국주의 비판과 반식민 해방 주장을 거리낌없이 설파하던 시절이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국제인권장전의 두 기둥인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그리고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이 1966년에 각각 채택되었는데 두 문헌의 1조가 똑같은 내용으로 작성되었을 정도였다. “모든 인민은 자결권을 가진다. 이 권리에 기초하여 모든 인민은 그들의 정치적 지위를 자유로이 결정하고, 또한 그들의 경제적·사회적·문화적 발전을 자유로이 추구한다.” 이 구절을 음미해 보면 피지배 인민들의 탈식민 열망을 확실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탈식민의 물결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1970년대 들어서부터 신생국의 독립을 인민 자결권으로 이해하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유엔총회 결의안의 톤도 조금 변했다. 반드시 주권국가로 독립하는 것만이 자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아닐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의 가장 큰 이유는 국제체제의 성격 자체에서 찾을 수 있다. 20세기 국제질서는 기본적으로 국가들로 이루어진 체제인데 영토주권 원칙을 무시하고 무한정 많은 숫자의 국가를 인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신생독립국을 포함한 대다수 나라들이 탈식민 운동을 열렬히 지지하면서도 기존 국가 내의 분리독립 움직임을 극력 반대하는 모순적 태도를 취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였다. 인도가 카슈미르의 독립을 허용하지 않고, 콩고가 카탕가를 철저히 탄압했던 것을 상기하면 된다. 냉전 시대 소련 역시 국제적으로 비동맹, 반제운동을 지원했지만 자국 내 소수민족 집단들의 독립은 일체 허용하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서구에 대항했던 탈식민화 운동과 직접 관련 없이 분리독립한 국가의 수는 한 손으로 꼽을 정도다. 방글라데시(1971), 에리트레아(1991), 동티모르(2002), 코소보(2008), 남수단(2011) 등에 불과하다. 이들은 모두 중앙정부에 의해 극심한 탄압을 받았던 역사가 있고, 통상적인 정치 과정으로부터 철저히 배제되었던 경험을 지니고 있는 공통점이 있다.

최근 들어 인민 자결권을 점차 융통성 있게 해석하는 경향이 생겼다. 분리독립이냐 탄압과 내전이냐 하는 단순 이분법을 넘어 새로운 형태의 자결권 아이디어가 많이 나와 실험되고 있는 중이다. 독립을 원하는 집단에 자원의 통제권을 대폭 인정해 주거나 높은 수준의 자치를 보장하는 방안이 대표적이다. 인도네시아의 아체 지역이 이런 실험의 전형을 보여준다. 아체는 20년 전만 해도 집단적 차원의 인권유린이 만연한 문제 지역이었다. 그러나 2005년 인도네시아 중앙정부와 평화협정을 체결하면서 아체는 특수한 지위를 부여받았다. 오늘날 아체는 자카르타 정부 아래에 있는 한 지방이 아니라 ‘다에라 이스티메와’라는 특별 영토로 취급된다. 지역 내에 독자적인 정당들이 있고 지역 자치정부의 수반도 주민들이 직접 선출한다. 고도의 대내적 자결권을 행사하는 사례다.

대외적 인민 자결권이 분리독립과 주권국가를 지향하는 건 사실이지만, 자기 나라 내에서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인민 자결권에는 민주주의를 실천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집단권으로서의 인민 자결권과 개인의 인권이 연결되는 지점이다.

대내적 인민 자결권이 대세이긴 하지만 주권국가로 독립을 원하는 지역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캐나다의 퀘벡 지방은 이 문제로 주민투표까지 했던 선례가 있다. 독립 여부를 놓고 올해 9월 주민투표를 실시할 예정인 영국의 스코틀랜드는 벌써부터 국제적인 관심을 끌고 있다. 아프리카의 소말리랜드, 서부 사하라, 쿠르디스탄, 그리고 팔레스타인도 마찬가지다. 이 중에서 어떤 경우가 대외적 자결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독립국가라고 인정될 것인가.

인민의 자결권을 흔히 ‘민족’ 자결권으로 칭하곤 하지만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인민이란 ‘혈통과 영토’(Blut und Boden)만을 지칭하는 개념이 아니고 어떤 귀속의식과 공동체 의식이 깔려 있는 개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대외적 인민 자결권이 분리독립과 주권국가를 지향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자기 나라 내에서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인민 자결권에는 내부적으로 민주주의를 실천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집단권으로서의 인민 자결권과 개인의 인권이 연결되는 지점이다. 더 나아가 개인들 간에 권리가 서로 존중되고 서로 제한되는 것처럼, 인민들 사이에서도 집단권리가 서로 존중되고 서로 제한되어야 한다. 국제관계에 있어서도 국가들 사이에 협력과 선린을 추구해야 제대로 된 인민 자결권이라는 뜻이다.

요컨대 인간에겐 개인적 권리도 필요하지만 종적 존재로서 집단적 차원에서 자율 결정과 통치를 할 수 있는 권리도 필요하다. 주로 개인 권리로 이해되어 온 인권은 인민 자결권 덕분에 이론적으로 크게 확장될 수 있었다. 식민지배를 겪었던 한국인에게 인민 자결권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 한반도 분단으로 인해 우리의 인민 자결권은 미완의 역사적 과제로 미뤄져 있는 상태다. 해방 후 우리 민족이 “정치적 지위를 자유로이 결정”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여전히 우리에겐 대내적 인권 민주주의와 대외적 화해·평화에 기반한 한반도형 인민 자결권 모델을 만들어야 할 의무가 있다.

재난, 인권 그리고 국가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조효제의 인권 오디세이

21세기 들어 전세계에서 발생한 선박 사고 중 세월호 침몰은 사망자와 실종자 수로 따져 열번째 안에 든 사건이었다. 그런데 다른 사고들은 대부분 자연재해로 인한 경우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예를 들어 2002년 세네갈에서 르줄라호가 침몰하여 1863명이 희생되는 초대형 참사가 발생했지만 주원인은 폭풍 때문이었다. 세월호 사건은 소위 ‘인재’로 인한 선박 침몰 중 세계 역사에 기록될 정도의 대형 사고다. 거의 완전히 예방 가능한 일이었기에 비통과 분노가 이토록 큰 것이며, 사고의 성격이 어처구니없을 만큼 초보적이어서 허탈과 절망이 이렇게 깊은 것이다.

현대인이 경험하는 재난을 예전처럼 천재와 인재로 명백히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소행성의 충돌과 같이 문자 그대로의 천재가 아닌 한 오늘날 완전한 의미에서의 천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재해라 해도 인적 요인이 섞여 있기 마련이다. 특히 지구온난화가 인간 생산활동의 결과라고 할 때 이제 천재냐 인재냐를 따지는 것은 별 의미가 없어졌다. 유엔의 재난경감국제전략에 따르면 재난(disaster)이란 위해와 취약성이 합쳐진 것이다. ‘위해’(hazards)란 인명을 살상하거나 생계와 재산에 피해를 초래하고 사회·경제적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위험한 현상 또는 조건을 말한다. 토네이도 엄습, 화학물질 유출, 지하철 고장 등 수많은 사건들을 들 수 있겠다.

세월호 사건은 시스템의 취약성이 위해를 발생시킴과 동시에 그 결과를 증폭시켰으므로 이중적 인재의 성격을 띠고 있다. 취약성을 높였던 모든 주체들에게 재난 리스크를 증가시킨 책임이 있다. 만일 선장에게 ‘살인’ 혐의를 씌운다면 선박회사나 관피아나 해경이나 청와대나 대통령도 ‘살인’의 인과고리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런데 위해가 발생했다고 해서 모든 이에게 동일한 재난이 초래되는 것은 아니다. 위해가 발생한 대상의 취약성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취약성’(vulnerability)이란, 물리적·사회적·환경적·경제적 요인 때문에 어떤 집단이나 시스템이 위해 요인 앞에서 피해를 당하기 쉽게 되어 있는 상태 혹은 정황을 뜻한다. 똑같이 쓰나미가 덮쳐도 관광지 난개발로 맹그로브 생태계가 취약해진 연안지역 주민들이 특히 심한 피해를 입는다. 똑같이 기후변화에 의한 자연재해를 당해도 가난하고 취약한 남반구 주민들이 전체 피해의 93%를 차지한다. 과적과 관리부실, 안전수칙 미적용, 선원들의 임무 방기, 관리감독 체계의 민관결탁과 부패, 지휘계통의 난맥상, 구조 당국의 무능, 재난 관리 대비의 결여, 정부 꼭짓점인 청와대의 무능과 무책임이라는 ‘취약성’이 합해져 세월호 침몰이라는 ‘위해’가 초대형 ‘재난’으로 이어졌다. 열거한 요인들이 정상으로 작동했더라면 침몰이라는 위해가 거대한 재난이라는 결과를 초래하진 않았을 것이다. 특히 이번 사건은 시스템의 취약성이 위해를 발생시킴과 동시에 그 결과를 증폭시켰으므로 이중적 인재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이처럼 위해와 취약성이 양쪽에서 협공한 충격의 결과로서 재난이 ‘우지끈’하게 초래된다는 설명을 ‘재난 크런치 모델’이라 한다. 이때 인과관계 사슬에서 취약성을 높였던 모든 주체들에게 재난 리스크를 증가시킨 책임이 있다. 법적으로 직접 책임자를 가릴 수 있을진 몰라도, 재난 리스크의 누적과 방치라는 점에서는 직접 책임자나 간접 책임자나 오십보백보에 불과하다. 만일 선장에게 ‘살인’ 혐의를 씌운다면 선박회사나 관피아나 해경이나 청와대나 대통령도 ‘살인’의 인과고리에서 자유롭지 않다. 인권의 관점에서 보자면 ‘취약성’을 악화시켜 재난 리스크를 높인 당사자들은 모두 인권 유린의 가해자이자 방조자이다. 이것은 눈물을 흘리든 해경을 해체하든 달라질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체르노빌, 카트리나, 멕시코만 원유 유출, 후쿠시마 등을 거친 뒤 요즘 자주 거론되는 인권이 ‘재난의 경감 및 구호를 받을 권리’다. 재난 보호권이라고도 하는 새로운 인권이다. 재난 예방과 재난에 노출될 리스크를 줄여 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뜻한다. 솔직히 말해 위해 요인을 완전히 통제하는 건 불가능하다. 근대성의 성격 자체가 그렇다. 따라서 취약성 요인을 가능한 한 줄이는 것이 재난 보호권의 핵심이다. 이것은 인간의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세월호 사건을 복기해 보면 정반대였음이 드러난다. 이명박 정부 때부터 재난 취약성을 높이는 정책을 취한데다 현 정부는 재난 발생 이후의 대처에서도 낙제점에 가까운 취약성을 드러냈다. 이명박근혜 정부가 합작하여 돈 논리에 의해 재난 리스크를 한껏 불려 놓아 인권 유린의 적폐가 커진 셈이다. 재난 전문가들은 재난 발생 후의 손실 비용이 재난에 대비한 투자 비용의 약 7배 정도 된다고 한다. 모든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기 좋아하는 신자유주의자들이 세월호 사건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릴지 궁금하다.

이번 사건 후 대중들이 대한민국 헌법 10조를 인용하는 빈도가 높아졌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세계인권선언 3조는 더욱 직설적이다. “모든 사람은 생명, 자유, 인신의 안전을 누릴 권리가 있다.” 원래 ‘인신의 안전’(security of person)은 자의적인 국가권력으로부터 내 한 몸 지킬 자유를 의미했지만 오늘날에는 재난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로 확대되었다. 이것을 위해 국가는 인권을 존중하고 보호하며, 그것을 촉진하고 충족할 의무를 져야 한다. 이게 사회계약적 인권의 핵심이다. 세월호의 침몰을 지켜보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도대체 국가가 어디 있느냐고 고통스럽게 자문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반응이었다.

국가가 시민의 생명, 자유, 인신안전을 위해 제대로 일하고 있는지 감시하는 인권의 ‘기’가 팽팽히 살아있을 때에 재난 리스크가 줄어든다. 진정으로 국민의 인권을 존중하는 재난 대책이라면 사람들의 권한과 발언권을 북돋아 주고 인권이라는 ‘심장’을 지닌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어야 한다.

그렇다면 재난 리스크를 줄여 인권을 보호할 수 있는 구체적 방법이 무엇인가. 재난 리스크의 경감에는 크게 보아 두 가지 접근이 있다. 첫째, 국가의 법령을 강화하고 제도를 정비하며 재난예방 조치 시스템을 구축하는, 공급 측 조치가 있다. 하향식 국가계획 방식을 일컫는다. 둘째, 시민사회단체를 비롯한 민간의 모든 행위자들이 재난 리스크에 대처할 수 있는 역량을 강화하도록 돕는 방법이 있다. 이것은 수요 측 조치로서 재난의 결과에 대해 시민사회가 국가에 책임을 묻는 인권의식을 키우도록 장려하는 것이다. 상향식 자력화 방식이라 한다. 상향식, 하향식 방식이 결합해야 거버넌스가 이루어질 수 있다. 전자의 전통적 방식은 후자의 새로운 방식으로 보완되어야 한다. 국가가 시민의 생명, 자유, 인신안전을 위해 제대로 일하고 있는지 감시하는 인권의 ‘기’가 팽팽히 살아있을 때에 재난 리스크가 줄어든다. 노동자들이 위험작업중지권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하는 것도 같은 이치다. 바로 이 때문에 세계인권선언에서 사회의 모든 개인과 모든 조직이 인간의 권리와 자유가 존중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던 것이다.

최근 대통령이 내놓은 조치를 보면 첫째 방안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징벌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국가통제의 느낌이 강하다. “가만히 있으라”고 해놓고 학생들을 죽이더니, 또 국민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하면서 국가개조라는 어마어마한 테제를 강요하는 식이다. 재난 전문가 어번 존슨은 시민들이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는 권한을 촉진하지 않는 재난 대책은 바람직하지도 가능하지도 않다고 지적한다. 진정으로 국민의 인권을 존중하는 재난 대책이라면 사람들의 권한과 발언권을 북돋아 주고 인권이라는 ‘심장’을 지닌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어야 한다. 또한 다른 모든 인권과 마찬가지로 재난으로부터 보호될 권리 역시 합의에 근거해야 하며, 하향식으로 강요되어선 안 된다. 왜 우리는 뼈아픈 고통을 겪은 후에도 인권 존중의 교훈을 배우지 못하는 것일까.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존 로크는 <통치론>에서 최고집행권자가 자기 임무를 게을리해 법 규정이 유명무실해지면 결과적으로 정부가 해체될 수 있다고 말한다. “법률이라는 것은 그 자체를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 집행에 의해서 사회의 유대를 강화하고, 정치체의 모든 부분에 제각기 적절한 위치와 기능을 부여하기 위한 것”이므로 법률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정부의 존재 목적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실패하여 세월호 참사를 빚었던 한국 정부가 대책이라고 제시한 것이 고작 원래의 실패를 되풀이하겠다는 내용이라니. 어찌해야 재난으로부터 인권이 보호될 수 있을 것인가.

전쟁과 평화 그리고 평화권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조효제의 인권 오디세이

오늘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날이다. 1950년 6월25일 일요일 새벽의 포성은 한반도의 운명을 완전히 바꿨다. 전쟁은 생명과 삶의 터전을 파괴한다. 인간의 이성과 심성도 비틀어 버린다. 우리가 아직도 한국전쟁의 후유증이라 할 반이성적 선동과 사회분열을 경험하고 있는 것을 보라. 한국전쟁을 다룬 김동춘의 <전쟁과 사회>는 국가주의를 넘어 평화와 인권의 보편적 지평에서 6·25를 재조명하자고 호소하는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이번주엔 전쟁과 직접 관련된 날이 또 있다. 100년 전 1914년 6월28일, 화창한 일요일 오전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살해되었다. 그것으로 촉발된 제1차 세계대전은 인류가 경험한 최악의 총체전이었다. 연합군과 동맹군 양쪽 전사자와 실종자가 도합 1767만명, 부상자까지 합치면 무려 3889만명이 피해를 입었다. 참전자 중 절반 이상이 죽거나 다친 전쟁이었다. 민간의 ‘부수적 피해’ 역시 역사상 전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참혹했다.

전쟁은 근본적 차원에서 인간의 생명, 안전, 행복을 박탈한다. 그렇다면 상식적으로 보아 전쟁의 참화로부터 보호받을 권리가 인권의 맨 앞자리에 오는 게 당연하다. 평화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 즉 평화권은 이렇듯 우리에게 직관적으로 설득력을 가진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인권 담론에서 평화권은 아직 확립된 권리라 말하기 어렵다. 평화권을 전면에 내걸고 만들어진 국제조약을 찾기도 어렵다. 이 점은 인권과 평화의 상관성을 이해하고 희구하는 많은 사람들을 당혹하게 한다. 왜 그럴까.

평화권은 역사를 통해 세 갈래의 흐름을 타고 만들어져 왔다. 첫째 흐름은 전쟁에 질서와 규칙을 부과하려는 움직임이다. 스위스 시민 앙리 뒤낭이 <솔페리노의 회상>에서 전시의 부상병을 치료하고, 구호차량과 병원을 공격하지 말고, 포로를 인도적으로 대우해 주며, 민간인을 보호하자는 원칙을 주장하였다. 그 결과 1864년 8월22일에 체결된 제1차 제네바협약이 올해로 150주년을 맞는다. 국제인도법 체계는 무력충돌 상황에서도 결코 유보되거나 제한될 수 없는 인간의 기본권을 규정한다. 국제인도법, 인권법, 난민법은 별개의 영역에서 작동하지만 상호보완적으로 간주된다. 제네바 출신인 루소가 쓴 <사회계약론>에 전시 인도주의 원칙이 이미 나와 있다. “전쟁은 보통사람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국가 간의 관계다. 교전 당사자들은 국가의 대리인으로서 어쩌다 보니 서로 적이 된 처지다. 따라서 아군은 무기를 든 적군만을 죽일 권리가 있다. 적군이라 하더라도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면 그를 죽일 권리가 사라진다. 더 이상 적국의 대리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제인도법은 전쟁을 국가 간의 공식 영역에 한정하고 일반시민을 그로부터 분리시켰다. 국가들 사이의 ‘군사화된 분규’인 전쟁을 인도적으로 교화하고 순치하겠다는 목표를 가지지만 전쟁 자체는 국가의 궁극적 권한에 속한다고 본다.

평화권의 둘째 흐름은 기존의 인권으로써 평화를 해석한다. 이때 인권은 평화를 위한 수단이 된다. 인권을 보장하고 실천하면 전쟁 발발 가능성이 줄기 때문에 집합적 수준에서 인간 존엄성이 보장된다고 믿는다. 유엔 헌장 55조에 이미 이런 관점이 나와 있다. 인종, 성, 언어, 종교로 차별하지 않고 모든 사람의 인권과 기본 자유를 보편적으로 존중하면 국제 평화와 친선에 필요한 안정과 안녕의 조건이 조성될 수 있다고 했던 것이다. 이런 입장을 계승한 세계인권선언에서도 인권을 보장하면 국내 평화와 개인의 인간존엄, 국제 평화와 집합적 인간존엄이 실현된다고 보았다. 즉 인권은 평화를 위한 보험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인과경로로 인권이 평화를 가져다준다는 말인가. 제일 유명한 설명이 이른바 ‘민주적 평화이론’이다. 시민적·정치적 권리가 보장되는 민주국가들 사이에선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가설이다. 민주국과 독재국 사이의 전쟁에선 이 이론이 성립되지 않는다.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냉전 종식까지 장기적 분석을 해 보면 이 가설이 큰 틀에서 입증된다. 민주적 평화이론의 아버지는 칸트라 할 수 있다. 그는 공화주의 국가들 간의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상했다. <영구평화론>이 나온 18세기 말의 공화주의는 오늘의 민주주의에 가까운 사상이었다. 이런 사유가 20세기 초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게 이어졌다. 그 후 사회주의 사상가이자 공상과학 소설가였던 H. G. 웰스의 영향을 받은 루스벨트 대통령은 독일과 일본이 1930년대 이후 민주주의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에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세력이 되었다고 확신했다.

민주주의 체제의 시민들은 문화적, 사상적인 측면 때문에 무력을 동원하는 분쟁을 경원시한다. 또한 함부로 전쟁을 일으킨 지도자는 선거에서 축출될 수 있는 제도가 존재한다. 평소 민주적 의사결정 훈련을 한 것이 국제관계에 적용되는 점도 있다. 또한 무역과 통상이 활발해져 경제가 서로 연결·통합되면 국가간 무력충돌이 줄어든다는 가설도 있다. 전쟁보다 장사가 물질적 이익을 증대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재산권의 보장이 평화로 이어진다는 자본주의형 평화론이다. 한 가지 더 있다. 국가들이 국제기구의 구성원으로 참여하는 비중이 늘어나면 그 역시 평화를 확대한다는 주장도 있다. 지금까지 설명한 둘째 흐름은 전쟁의 부재를 평화로 해석하는 소극적 평화론이며, 민주자본주의 체제를 뒷받침하는 자유주의적 평화론으로 귀결된다. 이런 입장에 따르면 민주·인권이 경험적으로 전쟁을 줄인다고 하면서도 전쟁 그 자체를 원칙적으로 반대하진 않는다. 요컨대 시민적·정치적 인권과 재산권을 보장하는 자유민주주의가 세계 평화에 이롭다는 주장이다. 이런 시각에서는 인권과 평화의 상관관계를 인정하고 그것을 증진하려 노력하지만 ‘평화권’이라는 용어를 잘 사용하지는 않는다.

최근 ‘평화권’이 하나의 독자적 개념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평화권은 단순히 전쟁의 부재만을 원하지 않고 적극적 평화를 원한다. 그것을 위해 무력의 위협이나 사용 금지,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 인정, 평화를 위한 시위권리 보장, 군의 책무성 강화, 희생자들의 권리를 요구한다.

평화권의 셋째 흐름이 등장하고서야 비로소 ‘평화권’이 하나의 독자적 개념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비교적 최근의 경향이다. 초기엔 ‘인민들의 평화에 대한 권리’라고 불렀지만 요즘엔 그냥 ‘평화권’이라 칭하며, 개인과 집단이 평화를 추구할 수 있는 권리로 해석한다. 평화권은 단순히 전쟁의 부재만을 원하지 않고 적극적 평화를 원한다. 그것을 위해 무력의 위협이나 사용 금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인정, 평화를 위한 시위권리 보장, 군의 책무성 강화, 발전권, 안전하고 쾌적한 환경권, 희생자들의 권리를 요구한다. 국가의 무기거래를 엄격하고 투명하게 통제하고, 민간 보안업체에 대한 하청을 근절하며, 억압적 식민지배나 외세의 점령 그리고 독재에 저항하고 반대할 권리를 요구한다.

평화권을 이런 방식으로 규정하면 인권을 실행한 결과로서 평화가 온다기보다, 개인과 집단이 평화를 목적으로 요구할 수 있다는 적극적 평화론이 가능해진다. 인간 안보와 인권이 만나고, 인권운동과 평화운동이 수렴하며, 평화적 방식에 의한 인권보호와 인권적 방식에 의한 평화보장이 교차한다.

평화권을 이런 방식으로 규정하면 인권을 실행한 결과로서 평화가 온다기보다, 개인과 집단이 평화를 목적으로 요구할 수 있다는 적극적 평화론이 가능해진다. 인간 안보와 인권이 만나고, 인권운동과 평화운동이 수렴하며, 평화적 방식에 의한 인권보호와 인권적 방식에 의한 평화보장이 교차한다. 무엇보다 인권침해의 구조적 원인으로 작동하는 갈등의 뿌리를 직시할 수 있게 된다. 현재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평화권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예상할 수 있듯이 논란과 찬반이 뜨겁다. 평화권을 하나의 독립적인 인권으로 인정하게 되면 인권의 이름으로 국가 체제를 직접 통제하는 효과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국가가 내부적으로 폭력을 독점하고 외부적으로 전쟁을 개시할 수 있는 권한을 보유하는 한 평화를 인권으로 요구하는 목소리는 국가주의의 칼날 아래 놓일 수밖에 없다. 바꿔 말해 국가주의의 규정력이 지금까지 평화권을 정식 인권의 지위에 오르지 못하게 막아왔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의식있는 선각자들은 이 점을 명확히 인식해 왔다. 반세기도 전인 1960년 대법원 판사였던 김홍섭은 자신의 일기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내가 가장 증오하는 것은 국가주의입니다. 인류보다 자기 주권을 더 생각하는 국가주의는 모두가 인간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잊고 있는 고로 악입니다.” 깊이 음미할 만한 통찰이 아닐 수 없다. 마침 이경주의 <평화권의 이해>가 최근에 나왔다. 일독을 권한다.

인권으로 읽는 ‘21세기의 자본’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조효제의 인권 오디세이

사회과학의 존립 목적이 무엇인가. 세상의 숨은 구조와 작동 방식을 분석하고 그것의 문제점을 파헤치며 어떤 가치관에 근거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던가. 그것을 위해 학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설득력 있는 설명과 대안을 제시하고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흔드는 논쟁을 주도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토마 피케티가 내놓은 <21세기의 자본>은 전세계 사회과학계에 적시타를 때린 히트작으로 많은 이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의 역사적 심층구조와 작동 방식을 분석하고, 부가 소수에게 집중되어 세습되는 문제를 파헤치며, 불평등의 심화가 정치적 파탄으로 이어져선 안 된다는 가치관에 근거하여 최상위 부유층에 글로벌 누진세를 매기자는 대안을 제시한다. 오랜만에 사회과학 논쟁의 야전교범 같은 책이 등장한 셈이다.

“공동선에 입각한 경우에만 사회적 구분이 허용될 수 있다.” 피케티 책에 반복되는 문구다. 이 문장은 프랑스혁명이 시작된 뒤 1789년 8월26일 발표된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1조에 나온다. 그렇다면 인권의 렌즈로도 ‘21세기의 자본’을 독해할 수 있지 않을까.

<21세기의 자본>은 흥미로운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정한 규범적 서사의 틀 속에 경제사적인 실증연구와 주장을 채워놓았다. 경제학적 내용을 평가하는 건 필자의 능력 밖이므로 규범적 서사 부분만 이야기하려 한다. 피케티는 변죽을 울리는 완곡어법과는 거리가 멀다. 서론장의 맨 처음 인용된 제사에서부터 규범적 서사를 제시한 뒤 그것을 수차례 반복하고 변주한다. “공동선에 입각한 경우에만 사회적 구분이 허용될 수 있다.”

이 문장은 프랑스혁명이 시작된 뒤 1789년 8월26일에 발표된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1조에 나온다. 선언의 원문에 ‘l’utilit<00E9> commune’으로 되어 있는 말을 피케티 책을 영역한 아서 골드해머가 ‘공동의 효용’(common utility)으로 옮겼다. 하지만 프랑스 헌법재판소의 공식 영역본은 이 말을 ‘공동선’(common good)으로 표현한다. 피케티가 프랑스혁명 인권선언을 화두로 제시했으니 경제학 렌즈만이 아니라 인권의 렌즈로도 <21세기의 자본>을 독해할 수 있어야 그의 메시지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피케티는 프랑스혁명이 부르주아 혁명으로는 최고봉의 경지를 보여주었다고 평가한다. 제도적 특권을 폐지하고 평등한 권리와 기회에 기반한 정치·사회 질서를 주창했다는 의미에서다. 그러나 평등한 권리와 기회균등이 선언되었다고 해서 부의 평등한 분포가 보장된 것은 아니다. 시장에서의 평등한 권리는 오히려 총체적인 평등권을 보장하지 못한다. 19세기의 정치제도는 인간의 총체적 권리가 아닌 재산권만 확실히 보장하는 식으로 왜곡되어 진화했다. 부르주아 혁명의 한계였다.

그런데 피케티는 불평등 자체는 자유의 필연적인 결과라고 본다. 하지만 불평등이 존재하더라도 그것은 법의 지배를 통한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정의원칙에 의해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부유층은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끊임없이 새롭고 정교한 법적 장치를 고안한다. 신탁기금이나 재단을 통해 교묘하게 부를 세습시킨다. 이렇게 되면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미래세대의 평등권은 원천적으로 제한된다. 이런 식의 불평등은 불공정하고 불의한 것이다.

프랑스혁명 인권선언의 1조는 두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모든 사람은 출생과 더불어 그리고 평생토록 평등한 권리를 누린다”가 먼저 나온 뒤 “공동선에 입각한 경우에만 사회적 구분이 허용될 수 있다”가 이어진다. 그러니 1조는 만인의 평등권이라는 이상과 사회불평등의 현실이 공존하는 모순을 인정하면서, 그 모순을 해소할 방안을 찾는 조항이다. 증명의무를 불평등에 두고, 정히 불평등하려면 공동선에 입각했다는 점을 입증하라고 요구한다.

프랑스혁명 당시만 해도 구체제의 특권이야말로 공동선에 반하는 불평등의 극치로 여겨졌다. 그러나 오늘 현실에선 사회불평등이 공동선의 주적이 되었다. 따라서 가장 소외된 약자집단한테 도움이 될 때에만 그런 불평등을 인정할 수 있다. 피케티도 인정하는 바지만 이런 관점에서 보면 존 롤스, 아마르티아 센, 그리고 피케티는 모두 프랑스혁명 인권선언의 지성적 계승자들이다.

피케티는 21세기형 사회국가는 이런 식의 모순을 공정하게 다룰 수 있는 정치제도를 상상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본다. 현대에 적합한 재분배 방식은 인간의 권리확보 논리, 그리고 몇몇 핵심적 재화에 대한 평등한 접근성 원칙 위에 구축되어 있다. 20세기 사회국가에서 교육, 의료 등 핵심적 재화에 대한 평등한 접근성이 확보되었다면, 21세기에는 은퇴 후 삶을 통합적으로 보장하는 것이 핵심과제로 떠올랐다. 그것을 위해 민주적 토의와 정치적 대결을 통해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 요컨대 ‘공정한 불평등’ 조건을 창출함으로써 만인의 평등한 인권이라는 이상을 실현하자는 말이다.

피케티가 경제학자로서 이런 주장을 내놓은 점이 참신하다면, 사회학에서는 진작부터 이 방면의 연구가 축적되어 왔다. 랜드먼과 라리자가 2009년에 발표한 ‘불평등과 인권’이라는 논문을 보자. 이들은 1980년부터 2004년 사이 세계 162개국을 대상으로 시계열 분석을 시도했다. 불평등이 심할수록 시민적·정치적 권리의 침해가 높다는 점이 통계적으로 밝혀졌다. 특히 소득불평등이 인권에 크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독립변수임이 확인되었다.

불평등 외의 추가변수도 발견되었다. 민주주의의 수준이 높으면 인권보호가 더 잘되었다. 시민의 불만을 처리하고 자원 편중에 항의할 수 있는 제도적 채널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경제발전 수준이 높을수록 인권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점도 나타났다. 그런데 민주주의 수준이 비슷한 국가들이라도 불평등이 심하면 인권침해 문제가 많았다.

여기서 민주정치, 경제, 인권 간 일반적인 등식이 도출된다. 민주주의를 해야 인권이 좋아지고 민주주의가 후퇴하면 인권도 후퇴한다. 경제가 발전해야 인권이 좋아지고 경제가 나빠지면 인권도 나빠진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행하거나 경제가 발전해도 불평등이 심해지면 인권은 추락한다. 사회적 응집력이 떨어지면서 온갖 사회문제가 창궐하고 그것을 공권력으로 통제하려 들 때 더 큰 문제가 발생하는 악순환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고로 정치적 포용성이 높은 민주제도만으로는 인권보장이 안 된다. 경제적 포용성이 높은 경제제도가 뒷받침되어야 인권이 꽃피울 수 있다. 민주주의건 경제발전이건 자원재분배와 소득불평등 해소가 동반되어야 인권이 실제로 보장될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이 최근 논의되기 시작한 소득주도 성장론과 어떻게 연결될지 궁금하다.

랜드먼과 라리자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경제성장 노력은 발전의 질에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경제성장의 과실이 축적됨과 함께 국가의 부가 분배되어야 인권이 보장된다. 정부는 최악의 빈곤과 사회적 배제를 완화하기 위해 누진세 등을 통해 소득불평등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들의 결론과 피케티의 주장이 어쩌면 이렇게도 비슷하게 나오는 것일까. 인간의 존엄성을 중심에 놓고 모든 점을 고민하고 사고하면 경제학이든 사회학이든 어떤 동일지점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 아닐까.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하면 주류 경제학을 신봉하는 사람들의 반응이 어떨지 벌써부터 짐작이 간다. 잘해야 정중한 무관심일 것이고, 심하면 노골적으로 무시할 가능성이 크다.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라고 힐난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세상 이치가 흔히 그러하듯, 아주 근본적인 차원에서 출발점이 다를 경우, 다시 말해 가치관이 전혀 다를 때엔 문제의 인식부터 해법에 이르기까지 무엇 하나 합의가 쉽지 않다.

세계은행이 재작년 펴낸 ‘인권과 경제학’ 보고서를 보면, 경제학은 총합적이고 평균적인 결과가 아니라, 인간 개별적이고 주변분포의 결과를 고려한 가치판단을 받아들여야 한다. 경제를 보는 시각에 근본적 변화가 오기 시작한 증거로 볼 수 있을 것인가.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바로 이 때문에 인권원칙과 주류 경제학이 만나야 하고, 둘이 서로 상호보완 관계를 이뤄야 한다는 관점이 등장하고 있다. 세계은행에서 2012년에 펴낸 ‘인권과 경제학’이라는 보고서가 대표적이다. 이에 따르면 경제학은 총합적이고 평균적인 결과가 아니라, 인간 개별적이고 주변분포의 결과를 고려한 가치판단을 받아들여야 한다. 인권적 접근이 경제성장의 질을 높이고 빈곤 감소에 효과적 도구가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자는 주장도 나온다. 경제를 바라보는 시각에 근본적인 변화가 오기 시작한 증거로 볼 수 있을 것인가. 피케티의 <21세기의 자본> 덕분에 ‘인권 경제학’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상상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범죄와 형벌은 인권의 시금석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조효제의 인권 오디세이

영국 식민지였던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에서 일어난 일이다. 본국 정부의 과세 정책에 분노한 시민들이 소요사태를 일으킨 와중에 영국군이 명령 없이 발포하여 민간인 5명이 죽고 여러 사람이 중상을 입었다. 1770년의 보스턴 학살 사건이다. 여러 군인들이 재판정에 섰다. 사건의 성격상 아무도 이들을 변호하려 하지 않았는데 존 애덤스라는 젊은 변호사가 나섰다. 영국에 비판적이던 식민지의 전도유망한 법률가. 나중에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미국의 2대 대통령이 되었던 인물이다. 배신자로 찍힐 수 있는 부담은 물론이고, 자신의 평판과 가족의 생계가 위험에 빠질 수도 있는 커다란 도박이었다.

학살 현장에서 과연 누가 ‘발포’라고 소리쳤는지, 그리고 사건 발생 전 성난 군중이 병사들을 먼저 도발하여 분위기를 폭발적으로 몰고 갔었는지가 심리의 핵심이었다. 애덤스는 배심원 앞에서 자기 일기장에 적어 두었던 글귀를 소리 높여 낭독했다. “만일 인간의 권리와 만고불변의 진리를 변호함으로써 독재 혹은 무지의 희생자를 죽음의 고통으로부터 구해낼 수 있다면, 그 때문에 내가 설령 전 인류의 경멸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 무고한 사람의 감사와 안도의 눈물만으로 나는 충분히 위로받았다 할 것이다.” 결국 병사 일곱이 석방되고 나머지 둘은 사형이 아닌 감형 선고를 받는 것으로 재판이 종결되었다. 애덤스의 투철한 직업정신과 능력이 대중에게 각인된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 때문에 새삼 주목받은 사람이 있었다. 애덤스가 일기장에 적었던 글귀를 원래 집필했던 저자, 체사레 베카리아였다.

베카리아의 <범죄와 형벌>은 1764년 밀라노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은 전근대적인 범죄관과 형벌체계의 거대하고 어둡고 잔혹한 괴수와 맞서 싸운 이성의 상징이었다. 도덕적·종교적인 ‘죄’와 세속적인 ‘범죄’를 구분하고, 형벌의 목적을 새롭게 설정한 명저다.

베카리아의 <범죄와 형벌>은 1764년 밀라노에서 출간되었다. <범죄와 형벌> 덕분에 근대 범죄학과 형사정책이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프랑스 사상가 볼테르는 이 책을 ‘인류의 강령’이라 격찬하고 계몽주의 전 시대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저서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범죄와 형벌>은 전근대적인 범죄관과 형벌체계의 거대하고 어둡고 잔혹한 괴수와 맞서 싸운 이성의 상징이었다. 도덕적·종교적인 ‘죄’와 세속적인 ‘범죄’를 구분하고, 형벌의 목적을 완전히 새롭게 설정한 명저다. 억측과 예단과 종교적 편견으로 생사람을 잡던 야만적 행형제도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역사적 사건이었다.

범죄자에게 왜 벌을 주는가. ‘죗값을 치르게 하기 위해서’가 제일 쉬운 대답일 것이다. 그러나 베카리아는 전혀 다르게 생각한다. 범죄자 개인에 대한 복수가 형벌의 목적이 될 순 없다. 범죄 행위로 인해 손상된 사회 전체의 선익을 회복하는 게 일차 목적이다. 따라서 형벌을 가할 권리는 최대다수에게 최대이익을 안겨주기 위한 권력 행사여야 한다. 흔히 벤담의 공리주의 테제로 알려졌지만 사실 이것은 베카리아가 만든 말이다. 또한 형벌의 목적은 타인의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서다. 여기서 범죄 억지 효과라는 개념이 나온다. 과거엔 죄와 벌을 개인의 문제로 다뤘지만, 베카리아 이후엔 죄와 벌이 사회문제로 전환된 것이다.

이런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베카리아는 고문과 사형의 폐지를 주장한다. 고문은 “진실의 수치스러운 발견 방법”이고 “낡아빠진 야만적인 시대의 법적 잔존물”에 불과하다. 고통의 감각이 고문당하는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지배하게 되면 잠시라도 그 고통을 면할 선택 외에 그 어떤 자유선택도 존재하지 않는다. 고문을 통한 자백으로 진실을 밝히는 건 불가능하고 불필요하고 부당하다. 사형도 마찬가지다. 범죄자를 처형한다고 사회 전체의 선익에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중범죄의 예방 효과도 입증되지 않았다. 사람들의 복수심만 부추길 뿐 무엇 하나 해결하지 못하는 극형을 왜 시행하는가. 아무 실익이 없는 고통 주기에 불과하다.

여기서 계몽주의자 베카리아의 진정한 면모가 드러난다. 감정이 아닌 개명된 이익을 사회 전체 차원에서 추구하자는 것이다. 그랬을 때 개인에게 고통을 가하는 엄한 처벌이 아닌 다른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공리주의적 동기로 인도주의적 효과가 발생하는 형벌관인 셈이다. 따라서 정의는 형벌에 있어 절대적 기준이 되지 못한다. 인간 사회의 유대를 보전하기 위해 필요한 수준을 넘어선 어떤 형벌도 그 본질상 부정의하기 때문이다. “공공복리를 열망하거나 공공복리를 우려한답시고 범죄를 저지른 시민들에 대해 법률로 이미 정해진 형벌보다 더한 처벌을 해선 안 된다.” 사회악의 리스트를 미리 정해 놓고 중벌로써 그것을 해결하자는 주장,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 아닌가. 응보적 정의관과 공리적 형벌관이 논쟁적으로 충돌하는 지점이다.

또 다른 쟁점도 있다. 베카리아는 형벌의 가혹성보다 확실성이 범죄 예방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이성적 판단을 하는 잠재적 범죄자라면 엄한 형벌 때문이 아니라, 확실히 처벌받을 확률적 가능성이 높을 때에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베카리아의 비판자들은 모든 범죄자가 계산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또한 범죄를 저지르면 확실히 처벌될 것이라는 인식을 사람들에게 심어준다면 미셸 푸코가 우려한 자기감시의 내면화가 이루어진 사회일 수도 있다. 이런 논점들 때문에 학생들과 토론하기에 베카리아처럼 좋은 교재도 드물다.

한인섭의 유려한 번역으로 이미 우리에게 소개되어 있는 <범죄와 형벌>이 작금의 우리 사회에 던지는 의미는 결코 적지 않다. 우선 기본적인 근대 형벌관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경종을 울린다. 형벌은 어떤 경우에도 범죄자 개인에 대한 폭력행위가 되어선 안 된다, 사법정의는 공개적이고 신속하며 처벌은 꼭 필요한 정도만 최소한 행해져야 한다, 범죄와 형벌은 비례적이어야 한다, 범죄는 미리 법률로 정해져 있어야 한다. 이런 원칙이 우리 사회의 기준이 되어 있는지 자문해봐야 할 것이다. 정치로 풀어야 할 것을 사법에 의존하고, 법원칙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를 정치로 농단하는 일이 없다고 할 수 있는가.

베카리아의 공리주의는 보편적 공리주의다. 예를 들어 ‘귀족에 대한 처벌’이라는 장을 보자. 어느 사회나 권력자나 부자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어떤 사회적 지위라 하더라도 “법에 의거한 인간의 원초적 평등을 먼저 상정”해야 한다. 법은 모든 인간에게 똑같이 자신에게 복종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또한 범죄자의 신분이 높을수록 범죄의 공적 피해가 커지므로 특권층의 처벌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것을 위해 “형벌을 회피할 수 있는 모든 길을 차단함으로써 권력자가 법을 존중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 대목에서 유전무죄를 떠올리지 않기는 힘들다.

법의 보편적 적용을 방해하는 ‘성역’이라는 개념 자체를 베카리아는 신랄하게 성토한다. 한 국가 영토 내에서 법으로부터 자유로운 그 어떤 장소도 없어야 하며, “그림자가 몸체를 따르듯이, 법의 힘은 모든 사람을 따라다녀야 한다”. 만일 법적용이 미치지 않는 성역을 인정하게 되면 국가 내에 소주권 국가를 창설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법률이 그 권위를 갖추지 못하는 곳에 사회 전체의 정신과 대립되는 정신이 생겨날 수 있다.” 성역이 있으면 민주주의가 아니라는 말이다. 베카리아는 인류 역사에서 이런 성역 때문에 대혁명이 터져 나왔다고 경고한다. 오늘의 한국인에게 이런 통찰은 세월호 사건을 떠올릴 수밖에 없게 한다.

한번 더 강조하지만 베카리아는 규범적인 입장에서 남다른 정의감을 주창한 것이 아니다. 이성을 활용하여 냉정하게 죄와 벌의 문제를 고찰하자는 입장이다. 흔히 한국 사회에서 진보와 보수를 가르곤 하지만, 사실은 아직도 계몽과 몽매의 차원에서 한 발짝도 못 나간 문제들이 많다. 인권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런 점에서 베카리아의 <범죄와 형벌>은 근대 인권의 기준점을 제시한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정상’ 정치행위에 관한 통찰을 마키아벨리가 제시했다면, ‘일탈’ 사회행위에 관한 대응은 베카리아의 공로다. 하지만 올해 <범죄와 형벌>출간 250주년에 관한 이야기는 잘 들리지 않는다. 우리 사회를 격변시키는 움직임 한복판에 범죄와 형벌의 문제가 자리잡고 있는데도 말이다.

공교롭게도 근대의 사상은 두 이탈리아 이론가에게 크게 빚지고 있다. ‘정상’ 정치행위에 관한 통찰을 마키아벨리가 제시했다면, ‘일탈’ 사회행위에 관한 대응은 베카리아의 공로다. 작년에 <군주론> 출간 500주년을 기념하는 움직임이 많았다. 그러나 올해 <범죄와 형벌> 출간 250주년에 관한 이야기는 잘 들리지 않는다. 우리 사회를 격변시키는 일련의 움직임 한복판에 범죄와 형벌의 문제가 자리잡고 있는데도 말이다.

인권이 국력이다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조효제의 인권 오디세이

코스타리카 외교가 주는 시사점이 적지 않다. 이들은 국내에서 인권을 지향하면서 대외적으로도 그것을 추구한다. 지난 5월 국제 동성애 혐오 반대의 날을 맞아 대통령궁에서 국기와 무지개 색깔의 게이 깃발을 함께 게양할 정도였다. 그것도 아메리카 대륙 전체에 메시지를 던지려는 의도에서였다.

한 나라의 힘, 즉 국력을 어떻게 평가할까. 흔히 인구, 국토 면적, 경제 수준, 군사력, 과학기술 발전, 환경관리 능력 등을 꼽는다. 정량적 지표로 나타낼 수 있는 것들이다. 이 중에서 경제력, 군사력과 같은 ‘하드파워’는 강대국 중심의 힘의 논리에 가까운 기준이다. 이른바 현실주의 이론으로 국제정치를 분석할 때 적합하다. 잘 알려진 일화가 있다. 스탈린의 통역관으로 일했던 발렌틴 베레시코프의 회고다.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영국의 처칠과 소련의 스탈린이 만났다. 처칠이 설교를 시작했다. 전쟁에서 이기고 나면 연합국인 미, 영, 소가 세계를 좌우하게 될 터인데, 그러려면 민주국가라는 점을 보일 필요가 있고 특히 이웃나라와 잘 지낸다는 인상을 줄 필요가 있다. 따라서 소련은 폴란드한테 잘해줘야 한다. 폴란드는 가톨릭 국가이니 그래야 바티칸 교황청과도 우호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스탈린이 처칠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로마 교황은 휘하에 몇개 사단이 있는가.” 고매한 천상의 논리를 설파하던 처칠을 스탈린이 지상으로 끌어내린 순간이었다. 스탈린의 국제관계 인식이 바로 전형적인 현실주의라 할 수 있다. 표현을 이렇게 직설적으로 하지 않더라도 국제정치를 치열한 국익 추구의 장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학계도 그렇지만 외교 현장에선 더욱 그러하다.

그렇다면 선린우호니 세계평화니 하는 이상을 국제정치에서 실제로 추구하는 나라가 있기나 한 것인가. 이 질문에 가장 근접한 나라로 코스타리카를 꼽아도 크게 틀리지 않을 성싶다. 필자는 현재 코스타리카에 와서 가르치고 있다. 남북 아메리카의 정 중간에 있는 코스타리카는 전통적인 기준으로 보아 국력이 큰 나라가 결코 아니다. 인구 470만에 우리나라 경상도와 전라도를 합한 사이즈의 소국. 국내총생산(GDP)은 530억달러로 세계 81위,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1만달러가 조금 넘는 세계 68위 수준에 머물러 있다. 군사력으로 치면 군대를 아예 없앤 나라이니 그 점은 언급할 수조차 없다.(군대 폐지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한번 따로 쓸 생각이다.)

이처럼 코스타리카는 통상적인 평가로 따져 크게 내세울 게 없는 곳이다. 여기 사람들이 스스로를 ‘티코’라 부르듯 겉으로만 보면 아담하고 평범한 개발도상국이다. 그런데 국제정치에서 코스타리카의 영향력을 따지면 이야기가 전혀 달라진다. 단순히 존재감이 있는 정도가 아니다. 독특한 컬러의 존재감으로 자기 입지를 확실히 굳힌 남다른 국가다.

우선 코스타리카에는 남북 아메리카 전체를 관할하는 미주인권협정에 따른 국제기구인 미주인권재판소가 있다. 1979년 설립될 때 미국과 캐나다가 서로 유치하려 했지만 결국 코스타리카로 낙착되었다. 또 이곳엔 유엔평화대학이 있다. 유엔 총회에서 조약기구로 설립한 독특한 교육기관이다. 코스타리카는 외교 수완과 주도력도 뛰어나다. 유엔 인권최고대표실을 창설하는 데 큰 공을 세웠던 기록이 있다. 작년 유엔 총회에서 채택되었고 우리나라도 서명한 무기거래조약, 이것도 코스타리카가 큰 역할을 했다. 재래식 무기의 불법적이고 무분별한 이전을 규율하는 조약인데 비준국가 수가 늘고 있어 머잖아 발효될 것이 확실하다.

중남미의 역내 외교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곤 한다. 중미를 휩쓸던 내전과 분쟁을 종식한 에스키풀라스 평화협정은 코스타리카의 중재가 없었더라면 어려웠을 것이다. 평화체제를 구축하고 엘살바도르와 니카라과의 자유선거도 지원했다. 오스카르 아리아스 전 대통령은 그 공으로 1987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코스타리카는 또한 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해 국가들의 연합체인 리우그룹에서 자타가 인정하는 대변국 역할을 맡고 있다. 이달 초 집속탄금지 조약에 벨리즈가 비준함으로써 중미는 세계 최초로 집속탄을 전면금지한 지역이 되었다. 이 조약 역시 코스타리카가 열심히 중재해 성사시켰다. 프린스턴대학의 연구에 따르면 물질적 국력보다 외교적 국력이 훨씬 큰 나라가 코스타리카다.

코스타리카의 인권·평화 외교는 기존의 국제관계 이론으로 설명이 잘 안된다. 국제관계를 무정부 상태로 보고 생존을 위한 무한경쟁 논리로 설명하는 현실주의 이론은 말할 필요도 없다. 자유주의 제도 이론도 딱 들어맞진 않는다. 이 이론에선 작은 나라들이 국제질서의 틀 안에서 주권을 인정받고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수용되기를 원한다고 설명한다. 또한 국제법과 제도의 보호 아래 모여 있는 다소 수동적인 국가들의 이미지가 있다. 그러나 코스타리카는 국제적 제도들을 적극 활용하고 국제정치에 크게 공헌하고 있다. 그것도 인권, 민주주의, 평화라는 브랜드를 통해서 말이다.

이 때문에 권력의 개념 자체를 다르게 설정해야 한다는 학자도 있다. 코스타리카는 국가가 보유한 양적 개념으로서의 국력이 아니라, 실제로 행사하는 질적 개념으로서의 국력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것이다. 질적 개념으로서의 국력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 크게 보아 두 요소가 있다. 첫째, 정치적·행정적 역량이다. 외교기술, 특정 영역의 지식과 축적된 경험, 그리고 이니셔티브를 취할 줄 아는 적극성이 그것이다. 둘째, 이미지와 평판이다. 이른바 능동적 규범 행위자로서의 정체성과 국제 문제에서 중립을 지키는 스탠스를 말한다. 여기에 리더십, 동맹형성 능력, 우선순위 설정 능력이 추가되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이 작은 나라가 이런 큰 역량을 발휘하고 있는 것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코스타리카는 소국의 현실을 핸디캡이 아니라 자산으로 승화시킨 희귀한 케이스다. 이 나라의 인권외교를 비유하자면 이렇다. ‘공자님 말씀’이 듣기엔 그럴듯해도 현실에서 그것이 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런데 공자님 말씀을 곧이곧대로 행하는 사람이 동네에 산다면 어떻게 될까. 고지식하다고 비웃을 순 있어도 그의 행동을 나무라진 못할 것이다. 옳게 살지 말라고 할 순 없는 노릇이니까. 게다가 그런 사람을 해코지하기도 어렵다. 더 나아가 그런 사람의 공자님 말씀에 대놓고 반대하긴 더 어렵다. 어쨌든 맞는 말이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서 간혹 그가 말하는 것에 동의하는 척이라도 해야 하고, 하도 졸라대니 귀찮아서라도 그가 하자는 대로 시늉을 내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시늉’들이 모이면 신기하게도 그게 힘을 발휘할 때가 온다. 자꾸 시늉을 하다 보면 구체적 결과가 나오기도 하고, 자신이 한 시늉 때문에 약속을 지켜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이것이 국제관계의 구성주의 이론에서 말하는 ‘규범의 구속력’이고 ‘인권규범의 연쇄증폭’이다. 공자님 말씀을 계속 실천해온 ‘착한 얼간이’ 코스타리카의 인권외교를 설명할 수 있는 유력한 이론인 것이다.

우리가 자랑하는 하드파워에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소프트파워가 결합하면 정말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나라가 될 수 있다. 국내에서 인권을 수준 높게 실천하고 그것을 외교력으로 활용하면 된다. 멀리서 건배를 제안하고 싶다. 인권이 국력인 대한민국을, 위하여!

그런데 모든 외교는 내치에서 시작되는 법이다. 아무리 대외적 영향력을 높이려 해도 국내에서 인권을 안 지키면 국제적으로 망신만 당할 뿐이다. 미국 국무부에서 아무리 인권외교를 편들 퍼거슨 인종갈등 사건 같은 것이 한번 터지면 체면에 먹칠을 할 수밖에 없다. 얼마 전 이곳의 한 공공장소에 설치된 대형 텔레비전에서 한국의 군 인권 문제를 다룬 보도가 흘러나왔다. 뉴스를 시청하는 사람들을 옆에서 바라보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 전세계가 유리어항처럼 투명해진 시대에 살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 점에서 코스타리카의 외교가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이 적지 않다. 이들은 국내에서 인권을 지향하면서 대외적으로도 그것을 추구한다. 이 나라가 결코 완벽하지 않고 문제도 많지만 그래도 큰 틀에서는 인권국가의 정체성이 뚜렷하다. 지난 5월 국제 동성애 혐오 반대의 날을 맞아 대통령궁에서 국기와 무지개 색깔의 게이 깃발을 함께 게양할 정도였다. 그것도 아메리카 대륙 전체에 메시지를 던지려는 의도에서였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산호세 시내에서 현대기아차를 자주 본다. 삼성 휴대전화를 들고 다니는 사람은 일일이 셀 수도 없다. 이렇듯 우리가 자랑하는 하드파워에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소프트파워가 결합하면 정말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나라가 될 수 있다. 국내에서 인권을 수준 높게 실천하고 그것을 외교력으로 활용하면 된다. 멀리서 건배를 제안하고 싶다. 인권이 국력인 대한민국을, 위하여!

바나나 총파업과 신성동맹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조효제의 인권 오디세이

1934년 바나나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벌였다. 중남미 바나나 산업을 독점했던 미국계 다국적기업을 상대로 한 대투쟁이었다. 파업 뒤 코스타리카 정부는 농업노동자 최저임금제를 도입했으며, 미국의 뉴딜정책을 본떠 공공근로를 대폭 늘렸다.

1940년 새 대선이 실시되었다. 개혁의 지속 또는 중단을 결정할 선거였다. 이 무대에 세 사람이 등장한다. 첫째는 여당의 칼데론 과르디아 대통령 후보. 개혁 의지가 있던 보수 포퓰리스트. 둘째는 젊은 변호사 마누엘 모라. 투철한 마르크스주의자. 셋째는 빅토르 사나브리아. 훗날 산호세 교구의 대주교.

중남미에 온 지 몇달밖에 안 되었는데 평생 먹을 바나나를 다 먹은 것 같다. 바나나 공화국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코스타리카 경제에서 농산물이 차지하는 비중이 6.5%인데 이것을 바나나와 커피가 양분하고 있다. 프리미엄급 수출용 바나나 1㎏에 우리 돈으로 1300원이 채 안 되니 모든 사람이 부담 없이 즐긴다. 하지만 바나나가 싸다는 말은 노동자의 인건비가 낮다는 뜻이다. 열악한 노동조건에, 최저임금보다 약간 더 높은 임금을 받을 뿐이다. 이들은 사설 하청업체에 속해 있어 불안정 고용을 감내해야 한다. 또한 바나나는 제초제, 살균제, 살충제를 많이 투입하는 작물이다. 네가몬이라는 살충제에 노출되어 불임, 암, 유산, 유전적 기형을 겪었던 1만2000명의 노동자들에게 정부가 배상을 해주라는 대법원 판결이 최근 나오기도 했다. 현재 농업노동자 문제는 이곳의 주요 노동 현안이다. 그런데 역사 속에서 바나나 노동자들이 국가를 크게 변화시킨 사건이 있었다.

지금부터 꼭 80년 전인 1934년 가을의 일이다. 바나나 노동자들이 전국적인 총파업을 벌였다. 역사상 최대 규모의 총파업, 중남미의 바나나 산업을 독점했던 미국계 다국적기업 유나이티드 푸르트사를 상대로 한 노동 대투쟁이었다. 노동자들은 6시간 교대근무, 쿠폰이 아닌 현금으로 임금 지급, 산재 인정 등을 요구했다. 유나이티드는 정부와 결탁하여 노동자들을 분열, 회유, 협박했고 결국 총파업은 중단되었다. 하지만 파업은 국민들에게 장기적으로 큰 유산을 남겼다. 파업의 선두에 섰던 카를로스 파야스는 <마미타 유나이>라는 노동 소설을 써서 ‘40년대 문학세대’를 주도하기도 했다.

총파업이 왜 발생했었는가. 바나나는 원래 소농들이 소량으로 재배하던 작물이었다. 그런데 1872년 대규모 플랜테이션에서 단일작물 재배가 시작되었고 곧 해외수출이 이루어졌다. 산업발전이 낙후되어 있어 노동조직은 변변치 않았고 주로 수공업 장인들과 농업노동자들의 노동운동만 있었다. 1929년의 세계 대공황은 이 나라 경제에 직격탄을 안겼다. 3년 사이 수출은 절반 이하, 수입은 4분의 1 수준으로 급감했고 금융은 몰락했으며 도시 중산층과 농업노동자들은 빈곤의 늪에 빠졌다. 1933년 수도 산호세에서 일어난 실업자들의 시위가 유혈사태로 이어졌고 그 이듬해 바나나 총파업이 일어났던 것이다.

일단 파업은 끝났지만 노동자들의 요구를 무턱대고 막을 순 없었다. 정부는 커피 가격을 안정시키기 위한 기구를 신설하고, 1935년에는 농업노동자 최저임금제를 도입했으며, 미국의 뉴딜정책을 본떠 공공근로를 대폭 늘렸다. 이 때문에 레온 코르테스 대통령은 ‘시멘트와 강철 정부’라는 별명을 얻었다. 대공황을 계기로 국가의 경제 개입이 늘어났지만 그런 조류가 갑자기 등장한 건 아니다. 19세기 말부터 정부 주도의 사회정책 흐름과 1920년대 기독사회주의 운동의 경험이 있었다.

또한 중남미 대륙 중 예외적으로 급진좌파 정당이 허용되었고 이들이 소수이긴 하나 선거 때마다 의회에 진출하여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했다. 이처럼 작더라도 확실하게 노동자 편에 선 정당이 의회에 들어가는 게 중요하다. 코스타리카는 대공황 시대에도 개도국 중 민주주의를 계속 유지한 드문 사례에 속한다. 또한 좌파의 약진에 자극받은 우파가 가톨릭교회의 지원을 받아 국민공화당을 창당해서 극좌파 세력과 개혁 경쟁을 벌인 점도 특이했다.

1940년에 새로운 대선이 실시되었다. 개혁의 지속 또는 중단을 결정할 중대한 선거였다. 이 무대에 세 사람이 등장한다. 첫째, 여당의 칼데론 과르디아 대통령 후보. 개혁 의지가 있던 보수 포퓰리스트. 집권을 위해서라면 막후거래도 서슴지 않고, 누구와도 손을 잡을 수 있는 노회한 정치인. 둘째, 젊은 변호사 마누엘 모라. 투철한 마르크스주의자. 1931년 노동자농민당의 창설을 주도. 노동운동 원칙과 정치적 수완을 겸비한 전략가로서 타이밍과 과단성을 갖춘 인물. 셋째, 빅토르 사나브리아. 훗날 산호세 교구의 대주교. 원래 정치색이 옅고 가톨릭교회의 입지에만 관심이 있던 전형적인 고위 성직자. 그러나 19세기 말 레오13세 교황이 발표한 회칙 ‘새로운 사태’라는 노동헌장이 중요한 사회교리로 등장한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고 그것에 코드를 맞출 줄 알았던 감각의 소유자. 자신의 성향과 관계없이 교회의 가르침에 충실하여 노동운동을 지지했던 인물.

칼데론이 먼저 패를 꺼냈다. 두 건의 거래를 물밑에서 성사시켰다. 대통령 코르테스에게 이번에 자신을 밀어주면 4년 뒤 그를 다시 밀겠다는 언약을 한다. 또한 사나브리아 주교에겐 교회의 지원을 호소한다. 국민 대다수가 가톨릭 신자인 나라에서 교회의 지지는 절대적인 효과가 있다. 사나브리아는 지원의 대가로 반성직주의 법률의 개정을 요구했다. 학교에서 종교 교육 실시, 수도원 신설 허용 등 교회에 꼭 필요한 사항이었다. 라틴아메리카에는 가톨릭이 대세지만 정교분리 이념 때문에 교회의 영향력을 통제하려 한 나라가 많았다. 그레이엄 그린의 <권능과 영광>에도 이런 상황이 잘 그려져 있다. 밀약을 성사시킨 칼데론은 좌파정당의 공약 중 비교적 온건한 것들을 자기 공약에 대거 포함시켰다. 보수가 진보 노선을 귀신같이 선점한 것이다. 결과는 80%를 득표한 칼데론의 압승이었다.

대통령 자리에 오른 칼데론은 약속대로 코스타리카대학 설립, 사회보장법 제정, 사회부조 원칙을 담은 헌법 개정 등 개혁 조치를 밀고 나갔다. 그 결과 대농장주와 엘리트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다. 이들은 전임 대통령과 손잡고 칼데론 정권을 흠집 내는 데 전력을 다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코르테스 일파는 대통령과 결별하는 분당을 감행했고 칼데론은 지지세력의 대거 이탈로 일생일대의 정치적 위기를 맞는다.

여권의 분열로 정정이 불안해지자 모라가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보수개혁 정권의 약화를 방치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헌정 중단에 일조하느냐, 아니면 이 틈을 타 개혁을 심화하느냐를 놓고 당내에서 치열한 논쟁이 오갔다. 모라가 내부 비판을 무릅쓰고 개혁을 지지하는 쪽으로 결단을 내렸다. 그러나 급진 좌파에 대한 의구심이 널리 퍼져 있는 상황에서 실천이 쉽지 않았다. 이때 사나브리아 대주교가 교회 내의 극심한 반대를 뿌리치고 양측 사이 중재에 나섰다. 당시 코스타리카 주재 미국대사 핼릿 존슨의 회고다. “대주교는 모라가 똑똑하고 신실하며 진정으로 빈곤층을 염려하는 정치인이라고 했다. 모라와 그 추종자들이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건 사실이지만 외부세력과 결탁한 것 같지는 않다고 안심시켜 주었다.”

양측의 공조로 1943년 종합적인 노동법이 제정되었고, 사회보장부가 신설되어 라틴아메리카 최초로 전국민 의료보험이 실시되었다. 이때 삼자가 함께 찍은 사진이 남아 있다. 옅은 미소의 깡마른 공산당수, 작고 온화한 인상의 대주교, 근엄한 표정의 대통령. 모라 당수는 훗날 의회에서 ‘조국의 영웅’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국립병원 본관 앞에는 칼데론의 흉상과 어록, 사회보장의 상징물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사나브리아 대주교는 종교를 떠나 지금껏 국민의 큰 어른으로 추앙된다. 사회적 대타협의 효과는 1970년대 말까지 지속되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타협이 가능했던가. 우선 절박했던 시대 상황이 있었다. 또한 협상을 통해 결과를 꼭 도출하겠다는 민주적 유연성이 정치문화로 깔려 있었다. 대농장주와 자본가들의 결속이 약했던 점도 한몫했다. 2차대전 중 미국과 소련이 연합하고 있던 배경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주제로 <신성동맹>이라는 책을 쓴 유진 밀러는 세 사람이 각각 자기 진영 내 반대세력을 설득할 수 있는 정치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지적한다. 여기 사람들 말대로 “오직 코스타리카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을까.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코스타리카의 노동조건은 나중에 신자유주의의 공세로 다시 악화되긴 했지만 대타협의 의미는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역사학자 이달리아 히메네스는 코스타리카 국민의 인권의식이 바나나 총파업과 삼자 동맹의 경험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고 지적한다. 세계 노동권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정치적 교훈이다.

두 운하 이야기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조효제의 인권 오디세이

파나마 북쪽 니카라과도 대운하를 건설하려 한다. 왕년의 반미 혁명가 오르테가 대통령이 중국계 회사에 운하건설 대가로 국토 사용권을 50년 동안 주었다. 제대로 된 논의도 없었다. 첫 삽을 뜨기도 전에 토지수용 대상 지역 농민들이 반발하기 시작했다.

한편으로 주권 회복, 다른 한편으로 빈곤문제 해결의 상징인 두 운하. 우리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 형태를 달리하면서도 보편적으로 발현되는 억압권력의 실체에 주목해야 한다. 억압권력은 때론 주권 침해로, 때론 불평등으로, 때론 약자 탄압으로, 때론 환경 파괴로 나타난다.

두개의 운하가 있다. 하나는 현존하는 운하, 또 하나는 만들어질 운하다. 하나는 올해 100년 되었고, 또 하나는 올해부터 파기 시작한다. 하나는 달러를 공식 통화로 사용할 만큼 미국과 가까운 나라, 또 하나는 미국과 사이가 안 좋은 나라에서 만든다. 하나는 중국 노동자들이 닦은 철도를 이용해 건설했고, 또 하나는 중국의 자금으로 건설한다. 둘을 묶는 공통분모는 국가 발전 명분으로 모순적인 현실이 발생했다는 점이다. 전자는 파나마운하, 후자는 니카라과운하다.

파나마는 요즘 잘 풀리는 나라로 꼽힌다. 파나마시티는 여느 중남미 도시와 많이 다르다. 눈부신 마천루들이 뉴욕의 맨해튼이나 중국의 상하이를 연상케 한다. 부지기수의 호텔과 카지노들, 그리고 초대형 쇼핑센터들이 즐비하다. 운하 덕이 크다.

파나마는 원래 콜롬비아에 속했다가 20세기 초에 미국의 지원하에 독립했다. 미국은 운하를 건설하기 위해 파나마의 토지사용권을 사들였다. 십년 공사 끝에 1914년 8월15일 마침내 운하가 완공되었다. 대서양과 태평양이 한 물길로 만난 것이다. 파나마운하로 세계 무역이 크게 변했다. 매년 전세계 교역량의 6%, 물동량 4억t이 운하를 통과한다. 미국으로부터 운하를 반환받은 뒤 파나마가 벌어들이는 사용료가 연간 25억달러에 이른다. 국가의 젖줄이다.

파나마운하는 처음부터 말썽이 많았다. 미국의 통제권을 인정한 1903년의 조약은 문제투성이였다. 운하를 건설하면서 인종차별까지 발생했다. 같은 일을 해도 미국과 북유럽 출신들은 ‘골드’반으로 분류되어 달러로, 서인도의 유색인종과 남유럽 출신은 ‘실버’반에 속해 페소화로 임금을 받았다. 또한 파나마운하지대의 문제가 있었다.

파나마운하지대란 운하를 중심으로 양쪽 8㎞까지 땅을 미국이 직접 점거, 사용, 통제한 지역을 말한다. 파나마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광대한 국토, 서울의 2배 이상 되는 땅이 사실상 미국 영토였다. 1904년부터 1979년까지 미연방 정부가 파견한 총독 23명이 파나마운하회사 사장을 겸하면서 이 지대를 다스렸다. 행정조직, 법원, 경찰, 방송국, 우체국, 전용 마트, 극장, 학교, 거주타운이 있었고 미국인 4만5000명이 살았다. 자체 우표와 기, 게다가 미군 보병 여단까지 주둔했다. 운하지대에서 태어나면 미국 시민권이 주어졌다. 파나마 국민들은 평상시 운하지대 출입은 가능했으나 상점과 편의시설은 이용할 수 없었다. 운하지대 인근에서 파나마 국기를 내걸 수도 없었다. 파나마인들의 불만이 높았다.

이런 분위기를 감지한 케네디 대통령이 운하지대에서 두 나라 국기를 함께 게양하게 했지만 미처 시행을 못 한 채 암살당했다. 그 뒤 총독이 고육책을 냈다. 양국 국기를 모두 게양하지 말자고 한 것이다. 그러자 이번엔 운하지대 미국인들이 들고일어났다. 파나마의 눈치 때문에 미국의 주권을 양보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이들은 운하지대 내 발보아고등학교에 몰려가 성조기를 게양했다. 반세기 전인 1964년 1월9일에 일어난 일이다.

이 소식을 들은 파나마 학생 수백명이 학교로 달려가 자기들도 파나마 국기를 게양하겠다고 요구했다. 학생들이 들고 간 깃발은 오래전부터 중요 행사에서 사용하던 것이었다. 밀고 당기는 충돌이 벌어졌고 그 와중에 파나마 국기가 찢겨 나갔다. 소요가 계속되자 미국 경찰이 최루탄을 쐈고 학생들은 평소 ‘수치의 벽’이라 부르던 경계담장을 무너뜨렸다. 경찰이 급기야 발포를 했다.

소요사태는 이틀간 계속되었다. 시위대는 미국계 시설을 파괴했다. 팬암 항공사 건물이 전소되었고, 끝내 미군이 출동하여 유혈진압에 나섰다. 결과는 참담했다. 파나마 쪽 21명, 미국 쪽 4명, 도합 25명이 사망하고 수백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제2의 쿠바사태를 염려한 미대사관은 주요 문서를 소각하고 철수에 대비할 정도였다. 미 언론에는 공산당의 사주를 의심하는 논조도 등장했지만 사실무근인 오보였다.

최초 사망자는 아스카니오 아로세메나라는 스무살의 학생이었다. 친구들이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와 치료를 돕다 총에 맞은 것이다. 생후 6개월짜리 여자아이가 최루탄에 질식사하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파나마의 현대사가 완전히 달라졌다. 파나마는 한때 미국과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이집트의 나세르는 수에즈운하처럼 파나마운하도 당장 국유화하라고 촉구했다. 파나마에선 매년 1월9일을 ‘순교자의 날’이라는 국경일로 지낸다. 사건 현장으로 가는 길은 아스카니오 아로세메나 대로가 되었고, 학교는 파나마운하청 직원들을 교육하는 아스카니오 아로세메나 연수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필자가 파나마에 도착해 제일 먼저 찾은 곳이 연수원이었다. 현관 입구에 열사들 이름이 새겨진 21개 기둥이 둥글게 모인 노천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중간에 놓인 향로에서 고인들의 명복을 비는 불길이 하늘을 향해 피어오르고 있었다. 파나마운하를 통과하는 모든 배는 파나마운하청 소속의 선장에게 선박 지휘권을 넘기게 되어 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파나마운하에서만 실시하는 제도라 한다. 순교자들을 기념하는 학교에서 교육받는 선장들의 자세가 어떨까 상상해 보았다. 카스코에 있는 역사박물관에선 입구에서부터 이 사건을 중요한 주제로 다루고 있었다.

충돌사건을 계기로 미국의 파나마 정책은 급선회할 수밖에 없었다. 카터 행정부는 1979년에 운하지대 통제권을 포기했고, 1999년까지 미국과 파나마가 운하를 공동관리하다 2000년부터 파나마가 단독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반환 조건을 명시한 조약에 따르면 파나마운하는 지금도 형식적으론 중립지대이고, 미국의 사용권이 위협받을 때엔 군사력을 사용할 수 있도록 되어 있어 매년 군사훈련이 실시된다.

운하를 돌려받고 파나마의 경기가 좋아진 건 사실이다. 그러나 심각한 빈부격차로 전 국민의 40%가 빈곤층인 어두운 현실이 존재한다. ‘로스라비블랑코스’라 불리는 태평양 쪽 파나마시티의 백인 엘리트들은 흥청거리지만, 대서양 쪽 입구의 콜론시는 불과 80㎞ 떨어진 곳이라 믿기 어려울 만큼 높은 실업률, 범죄율, 슬럼화로 신음 중이다. 그리고 만명에 달하는 운하청 직원들에게 파업권리가 없는 문제가 계속 노동 현안으로 제기되어 있다. 파나마운하 개통 100주년의 모습은 이렇게 극과 극으로 나타난다.

파나마보다 북쪽에 있는 니카라과도 대운하를 건설하려 한다. 파나마운하보다 운항거리가 훨씬 짧아진다는 점을 노린 것이다. 부패 혐의를 받는 왕년의 반미 혁명가 다니엘 오르테가 대통령이 중국계 회사 홍콩니카라과운하개발투자공사(HKND)에 운하건설 대가로 국토 사용권을 50년 동안 넘겨주었다. 국민들과 제대로 된 논의도 없었다. 올해 말부터 500억달러짜리 공사가 시작된다. 하지만 첫 삽을 뜨기도 전에 토지수용 대상 지역의 농민들이 반발하기 시작했다. 적어도 3만명이 강제이주될 예정이다. 농민 수천명이 “노 치노스”(중국인 물러가라), “운하 필요 없다, 그냥 농사짓고 살게 해 달라”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수심 가득한 시골 할머니가 울먹이며 부르짖는 모습이 밀양 할머니의 얼굴과 겹쳐 보인다.

현재 이 건은 미주인권위원회에 제소되어 있다. 오르테가 대통령은 인구 600만명 중 절반이 빈곤층인 니카라과를 먹여 살릴 유일한 방법은 대운하밖에 없다고 말한다. 중미 최대의 니카라과 담수호가 오염될 가능성 때문에 환경 재앙을 우려하는 소리도 높다. 특히 이웃인 코스타리카는 자국 생태계가 받을 영향을 대단히 걱정하고 있다.

한편으로 주권 회복, 다른 한편으로 빈곤문제 해결의 상징인 두 운하, 그러나 보다시피 문제가 적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시간과 장소에 따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라 형태를 달리하면서도 보편적으로 발현되는 억압권력의 실체에 주목해야 한다. 그런 억압권력은 때론 주권 침해로, 때론 불평등으로, 때론 약자 탄압으로, 때론 환경 파괴로 나타난다. 이 모두에 맞서면서도 새로운 형태의 억압권력이 출현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한 단계의 문제가 해결되면 또 다른 단계의 문제가 어느새 우리 곁에 와 있기 때문이다. 모순적인 인권의 교훈, 두 운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군대 없는 나라, 가능한 현실인가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조효제의 인권 오디세이

코스타리카의 군대 폐지는 군과 관련된 모든 활동의 종언을 뜻한다. 방위·군수 산업, 군산 연구개발, 무기체계의 끊임없는 업그레이드와 투자, 국민동원 시스템이 사라진 것이다. 안보와 평화를 탈군사화와 중립화라는 개념적 지렛대와 연결시켜 놓았다.

우리에게 특수한 역사적 배경이 있는 건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차이가 대안적 안보 개념의 상상을 원천적으로 방해할 정도는 아니다. 군에 의존한 안보를 줄이면서 인권·평화의 소프트파워와 외교력으로 그것을 대체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그 나라엔 군대가 없다던데.” 필자가 코스타리카에 간다고 했을 때 많은 분들의 반응이었다. <군대를 버린 나라>라는 책도 있다. 일본에는 평화헌법이 있지만 사실상의 군대가 존재한다. 영세중립국인 스위스도 국민개병제를 실시한다. 그런데 정말 군대 없는 나라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국방은 어떻게 하는가. 솔직한 현실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12월1일 코스타리카에선 솔리스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군대 폐지의 날’ 행사가 열렸다. 올해로 66년째였다. 1948년 12월1일, 호세 피게레스 대통령이 수도 산호세의 군사령부 벨라비스타 요새의 벽면을 망치로 부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현재 국립박물관이 된 그 자리엔 기념 동판이 붙어 있다. 전국 병영은 학교로 전환되었다. 이듬해 채택된 제2공화국 신헌법 12조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항구적 제도로서의 군대를 폐지한다.” 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1948년 대통령 선거는 여론이 극도로 분열된 상황에서 실시되었다. 집권 국민공화당의 칼데론 후보와 야당 국민통합당의 울라테 후보가 맞붙은 선거는 부정 혐의로 얼룩졌고 선관위는 울라테의 승리를 선포했다. 하지만 여당이 불복하여 의회를 소집하고 재선거를 결의한다. 정국은 혼란에 빠졌다. 이 와중에 대농장주 출신 호세 피게레스가 등장한다. 기존 정권을 비판한 뒤 멕시코 망명길에 올랐다 돌아와 민병대를 조직하여 권토중래를 노리고 있던 인물이었다. 피게레스는 혼란에 빠진 조국을 구한다는 명분으로 정부군과 맞서기 시작했다. 1948년 3월12일부터 5주간 벌어진 내전은 약 2000에서 4000명의 사망자를 내고 피게레스의 승리로 끝났다.

임시정부 수반으로 취임한 피게레스는 일련의 개혁조치를 단행한다. 5만콜론 이상의 자본에 일률적으로 10% 세금을 부과하고 은행을 국유화했다. 국영 전력회사를 설립하고, 바나나와 커피를 독점하던 미국계 다국적기업에 중과세를 매겼다. 여기에 더해 군대 폐지라는 화룡점정을 찍은 뒤 피게레스는 원래 공약대로 단기 집권을 끝내고 울라테에게 정권을 이양한 뒤 퇴진했다.

피게레스가 왜 군대를 폐지했을까. 이 방면의 전문가인 역사학자 메르세데스 무뇨스 교수에게 물었다. 그는 원래 특별히 진보적인 성향이 아니었지만 ‘반공 사회주의’라 할 만한 독특한 노선을 취한 인물이었다. 우선, 내전으로 집권한 자신에게 역쿠데타가 발생할까 봐 선제적으로 군을 없앴다고 한다. 이미 1947년에 아메리카 대륙의 집단자위권을 설정한 리우조약(TIAR)에 가입해 있었으므로 해외망명을 떠난 정적들이 공격해 올 경우 국제적 지원을 받겠다는 계산이 작용했다. 망명한 칼데론 일파를 용공이라고 공격함으로써 미국이 이들에게 군사지원을 할 가능성을 차단하고 미국으로부터 경제지원을 받겠다는 속셈도 있었다. 군대를 폐지함으로써 정권의 자신감과 안정을 과시하려 한 측면도 있다. 소국인 코스타리카한텐 군대 폐지가 오히려 합리적인 선택이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그 당시 코스타리카가 인구 60만명에 군병력 약 300명의 미니 국가였으므로 이런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군을 폐지한 데에는 그 전의 역사가 있다. 코스타리카는 19세기 전반에 스페인, 멕시코, 그리고 과테말라 주도의 중미연방으로부터 각각 독립을 했었다. 그때 군대가 일정한 구실을 했다. 그러나 그 뒤엔 장기적 충돌이나 내전을 겪지 않았다. 기껏 타운들 사이의 갈등이 있었을 뿐이다. 또한 여유 있는 독립 자영농들의 존재로 중앙집권 관료제와 상비군의 발전이 뒤졌다. 게다가 20세기 초 티노코 군부독재에 대한 국민의 반감이 심했고 1921년 파나마전쟁에서 패배한 뒤 군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졌다. 군대를 없애도 그것에 반발할 기득권 세력이 미미했던 것이다. 최근엔 여성주의의 영향을 강조하는 연구도 나온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전반에 걸쳐 자유주의 개혁정책으로 공립학교가 대폭 확대되면서 교육자 대다수를 차지했던 여교사들이 평화, 공존, 애국심의 기풍을 학생들에게 심었다는 것이다.

군대 폐지에 대한 반론도 적지 않다. 냉혹한 국제정세 속에서 이상주의적이고 유치한 발상이라는 지적이다. 외국과의 물리적 충돌로부터 국가를 어떻게 지키겠다는 건지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다. 실제로 북쪽 니카라과와의 국경선인 산후안 강 수로 문제로 양국 간 긴장이 고조되었던 적도 있다. 전쟁까지는 아니더라도 테러공격에는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 군대 폐지는 전략적 가치가 낮은 소국에서만 가능한 옵션이지 생존경쟁에 노출된 나라에서는 불가능한 선택이 아닐까. 또한 최근에 콜롬비아로부터 유입되는 마약을 소탕하기 위해 미국이 이 나라 영토에 병력을 파견한 문제가 국내 정치에서 큰 논란이 되었다. 볼리비아의 모랄레스 대통령이 코스타리카는 미국의 보호막 뒤에 숨은 덕분에 군대 없이 살 수 있게 된 나라라고 비꼰 적도 있다.

코스타리카에 군대는 없지만 경찰은 있다. 2012년 범죄통계를 보면 절도가 흔하고 전국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은 394건이었다. 경찰은 연 1억달러 정도의 예산으로 인력 1만4000명과 차량 280대를 운영한다. 경찰관의 이직률이 높고 장비가 부족하여 경찰용 특별세를 신설하려고 검토 중이다. 무장경찰도 있으며 헬기 2대를 포함하여 비행기 11대와 약간의 해안경비정을 보유하고 있다. 이들이 기관총, 장갑차, 수류탄 투척기, 야간투시경 등을 갖추고 국경 순찰과 수비를 맡는다. 최근 에볼라 사태로 국경지대 경비가 더 강화됐다고 한다. 대통령 직속의 정보기관 산하에 소규모 특수개입팀도 편성되어 있다. 마약 관련 범죄가 심각해지면서 경찰의 무장과 과잉대응, 그리고 미군에 의한 위탁교육 때문에 인권단체의 우려가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치안유지용 공권력과 전쟁용 군대는 엄연히 구분되는 조직임을 기억해야 한다.

군대 폐지가 인권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군대 폐지는 겉으로 드러나는 상비군만 없앤 것이 아니라 군과 관련된 모든 활동의 종언을 뜻한다. 방위·군수 산업, 군산 연구개발, 무기체계의 끊임없는 업그레이드와 투자, 국민동원 시스템이 사라진 것이다. 따라서 군사적 수단이 아닌 비군사적 방식의 안보 개념을 상상하고 실천해야 한다. 군대가 없으므로 안보와 평화를 탈군사화와 중립화라는 개념적 지렛대와 연결시켜 놓았다. 이것을 통해 도덕적 우위의 이미지를 창출하고 의식적이고 적극적인 외교 노력으로 그것을 뒷받침한다.

이른바 ‘평화배당금’ 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 군비를 교육, 보건의료, 환경, 문화에 투자할 수 있으므로 인간개발지수가 올라간다. 코스타리카 노동자들의 숙련도와 생산성이 라틴아메리카 최고 수준인 것도 이와 연관이 있다. 요즘 새롭게 각광받는 행복지수에서도 상위를 점한다. 국민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인권과 평화를 강조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 형성된 것이다.

통제와 처벌에 대한 태도도 남다르다. 경찰 총수인 공안부 장관의 말이다. “중환자를 병원까지 이송하는 것이 적십자의 임무라면, 용의자를 법원까지 호송하는 것이 경찰의 임무다.” 코스타리카 거주 외국 은퇴생활자들 토론방에 어느 할머니가 올린 글이다. “미국에는 전쟁, 승리, 패배의 담론이 일상 은유에까지 스며들어 있는데 이곳엔 그런 것이 없다.” 오해 없기 바란다. 이 나라 인권 상황이 완벽하다는 말이 절대 아니다. 높은 범죄율과 불법체류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인권유린 등은 이 나라가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그럼에도 코스타리카 모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다. 이 나라가 군대를 폐지했던 그날, 남한에서는 국가보안법이 제정되었다. 그만큼 차이가 있다. 우리에게 특수한 역사적 배경이 있는 건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차이가 대안적 안보 개념의 상상을 원천적으로 방해할 정도는 아니다. 군에 의존한 안보를 줄이면서 인권·평화의 소프트파워와 외교력으로 그것을 대체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이 있지 않은가.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우리나라엔 사람밖에 없다고. 우리 시민들의 우수한 머리와 선의지로 창조적 평화를 모색할 순 없을까.

민초의 노래 인권의 멜로디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조효제의 인권 오디세이

오늘날 누에바 칸시온은 저항과 사회정의를 노래한 운동가요의 범주를 넘어 확대된 장르로 발전해 있다. 랩이나 힙합과도 결합했고, 대중의 일상 정서와 삶을 표현한다. 중남미에서 누에바 칸시온은 저항과 서정의 전통이 담긴 중요한 역사적 유산으로 존중받는다.

누에바 칸시온의 진화를 보면 문화든 노래든 인권이든 결국 보통사람들의 삶, 그 한복판에서 함께 기뻐하고 슬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혁명의 노래로만 일관했다면 오래전에 역사의 유물로 전락했을지 모른다.

길을 걷다 보면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라틴음악이 들리곤 한다. 그 순간 아, 정말 중남미에 와 있구나 하는 느낌이 든다. 한국에선 인터넷 사이트를 일일이 찾아 들어야 했지만 이곳에선 그냥 라디오를 틀기만 하면 하루 종일 라틴음악이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탱고, 살사, 보사노바는 기본이고 마리아치, 바차타, 반다, 쿰비아, 메렝게, 란체라 등 이곳 과일 종류만큼이나 다양한 음악들이 귀를 즐겁게 한다. 알다시피 라틴음악은 유럽, 아메리카, 아프리카, 카리브의 정서가 독특하게 버무려진 진정한 세계음악의 성격을 띠고 있지 않은가.

생각난 김에 중남미 여러 나라 방송국들의 프로그램을 찾아보다 약간 놀랐다. 누에바 칸시온이 아직도 건재하기 때문이었다. 독립 프로그램으로 편성해 놓은 곳도 있고, 포크뮤직으로 분류해 놓은 곳도 있지만 어쨌든 나름의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이 방면 지식이 얕은 탓에 누에바 칸시온을 남미판 운동가요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오늘날 누에바 칸시온은 저항과 사회정의를 노래한 운동가요의 범주를 훨씬 넘어 확대된 장르로 발전해 있다. 형식상으로 보면 발라드나 서정시풍을 넘어 랩이나 힙합하고도 결합했고, 내용적으로는 대중의 일상 정서와 삶을 표현하는 차원으로 발전했다.

예를 들어, 작년 브라질월드컵 때 8강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했던 코스타리카 축구팀을 위한 응원곡도 누에바 칸시온으로 만들어졌다. 국가대표팀 별명인 ‘라 셀레’를 따서 ‘여기 셀레가 있다’는 곡이었다. 알레한드로 아를레이라는 언론인이 아마추어 수준으로 작사한 곡인데 대표팀이 의외로 선전하면서 폭발적인 국민가요로 떠올랐다. “여기 셀레가 있네, 셀레만 있으면 가슴이 터질 듯/ 여기 셀레가 있네, 우린 무조건 셀레의 서포터스/ 우릴 꿈꾸고 노래하고 웃고 탄식하게 하는 건 오직 셀레뿐/ 코스타리카 만세, 셀레여 세계를 휩쓸어라….”

누에바 칸시온을 잘 모를 수도 있는 요즘 세대를 위해 약간 설명을 하자면 이렇다. 우선 누에바 칸시온은 스페인 말로 ‘새로운 노래’라는 뜻이다. 20세기 후반 칠레를 위시한 라틴아메리카 각국에서 혁명의 불길을 태우는 음악으로 유명해졌다. 부르는 명칭도 나라마다 약간씩 차이가 난다. 칠레에선 라 누에바 칸시온으로 처음 알려졌지만 1973년 피노체트의 쿠데타 뒤 강한 탄압을 받으면서 엘 누에보 칸토라고 불렸다. 아르헨티나에선 누에보 칸시오네로, 쿠바에선 누에바 트로바, 스페인에선 노바 칸소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누에바 칸시온 하면 다 통하는데, 단순히 음악 장르를 가리키는 데 그치지 않고 뚜렷한 목표를 지닌 ‘새노래 운동’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비올레타 파라, 메르세데스 소사, 빅토르 하라, 인티일리마니 같은 전설적인 가객들이 다 이런 지향을 공유하고 있었다.

누에바 칸시온이 등장했던 배경이 무엇인가. 독재정권에 저항하여 인권을 외쳤던 것 뒤에는 더 깊은 역사적 맥락이 있었다. 문화제국주의의 문제를 예리하게 비판하는 의식이 오랫동안 라틴아메리카 사람들 사이에 존재했다. 토착음악 전통이 외래음악, 상업적 음악에 의해 위협받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도 있었다. 대중음악을 민중의 관점에서 재정의하고 다시 부흥하자는 결기도 만만치 않았다. 인권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움직임을 통틀어 ‘음악의 자기결정권’ 운동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깨어 있는 의식을 강조한 음악답게 현대식 가사를 쓰면서도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곡조와 토착 악기들을 연주에 대거 등장시킨 점도 특이하다. 더 나아가 전통 포크음악의 선율을 한 단계 승화시킨 것도 누에바 칸시온의 공헌이었다. 이들은 인권, 정의, 민주주의, 평화, 저항, 혁명, 전통문화와 같은 주제를 즐겨 다뤘다. 이 때문에 누에바 칸시온을 단순히 운동가요로 도식화하는 오해가 생겼다. 하지만 사회·정치적 메시지가 없거나 적은 곡들도 많았다. 독재정권의 검열을 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은유적 표현을 많이 활용했던 점도 한몫했다. 굳이 표현하자면 참여음악과 순수음악이 함께했던 ‘참순음악’이었다고나 할까.

외견상 서정적이지만 의미상 강한 연대의 정신을 전달하는 방식이 누에바 칸시온의 국제화를 도운 측면이 있다. 예컨대 2004~2005년 우크라이나의 오렌지혁명 당시 키예프 시민들은 민주화를 요구하면서 비올레타 파라의 ‘삶에 감사해’를 목이 터져라 불렀다. “삶에 감사해, 내게 너무 많은 걸 준 그 삶에/ 삶은 샛별 같은 눈동자를 주었지/ 빛과 어둠을 구분할 수 있는/ 저 창공 위엔 무수한 성좌들/ 인파의 물결 속엔 사랑하는 임의 모습…”

오늘날 라틴아메리카에서 누에바 칸시온은 거의 문화재 비슷한 대접을 받는다. 저항과 서정의 전통이 담긴 중요한 역사적 유산으로 인정하고 존중한다. 민간 차원에서 누에바 칸시온이 계속 진화하고 발전 중인 장르라는 점이 그것을 증명한다. 공식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코스타리카 국립도서관의 누리집에 들어가 음악 분야를 찾아보면 누에바 칸시온 항목을 따로 분류하여 대표적인 곡들의 음원 파일을 띄워 놓았다. 이런 식의 공공 서비스가 대중의 인문교양과 시민교육 창달에 얼마나 큰 역할을 하겠는가.

직접 관련은 없지만 노래 이야기가 나온 김에 ‘님을 위한 행진곡’을 생각해 본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이 정도면 정말 세계적 수준의 민중가요이자 연대의 음악인데 이런 자랑거리를 두고 논란이 벌어진 상황 자체가 안타깝다. 혹시 공식석상에서 부르기엔 너무 과격하고 품위가 떨어진다고 생각하는지. 그렇다면 다음 가사는 어떤가. “가자 조국의 자식들아, 영광의 날이 밝았다!/ 우리 적 폭군의 피묻은 깃발이 날린다…/ 그들이 우리 코앞에 닥쳤다, 우리 처자식의 목을 따러 온다…/ 대오를 지어 나아가자 전진하자/ 저들의 더러운 피로 우리 밭고랑을 적시자!” 너무 섬뜩한가. 다름 아닌 ‘라 마르세예즈’, 프랑스의 국가다. 그렇다고 이 나라의 품위가 떨어지는가. 자유, 평등, 연대의 존중과 역사의식이 프랑스의 국격을 세계사적 차원으로 드높인 게 아니던가.

코스타리카 출신의 작가, 문화운동가 겸 가수였던 에밀리아 프리에토가 누에바 칸시온의 초기 형태를 다듬었던 사람이었음을 이곳에 와서 알게 되었다. 그녀는 1929년 대공황이 났을 때 문화가 민중의 현실을 가감 없이 반영하고 변화시키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며 그것을 평생 실천했다. 그녀가 남긴 명언이 있다. “비정치적이라는 건 태어나지 않았다는 말이고 죽었다는 말이고 미쳤다는 말이다!” 이 웅변을 새기노라면 “고통 앞에 중립을 지킬 순 없다”고 하신 어느 분의 목소리가 다시 우리 곁을 울리는 듯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출을 기뻐한 아르헨티나 음악가 호르헤 헤안데트가 교황을 기리는 누에바 칸시온을 만들기도 했다. 이름하여 ‘프란치스코의 노래’. 가사가 음미할 만하다. “겸손하고 어진 사람/ 예수회 신부, 정의롭고 청빈한 이/ 광야의 예수 같은 끈기와 성정/ 우리 형제 라틴아메리카인…/ 프란치스코, 촌동네 교황/ 노동자와 함께 울고 함께 싸우는/ 그 이름 프란치스코, 촌동네 교황/ 하늘같이 끝없는 양떼들의 목자…/ 소박한 행보에 강철 같은 신앙/ 가난한 자에게서 길을 구한다네/ 탱고와 축구 광팬/ 산로렌소 팀을 응원한다지/ 하지만 이제 바티칸에/ 베드로의 자리에 가게 됐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누에바 칸시온의 진화를 보면 문화든 노래든 인권이든 결국 보통사람들의 삶, 그 한복판에서 함께 기뻐하고 슬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누에바 칸시온이 혁명의 노래로만 일관했다면 오래전에 역사의 유물로 전락했을지 모른다. 저항이 필요한 자리, 연대가 필요한 자리, 사랑이 필요한 자리, 열광이 필요한 자리를 가리지 않고 함께했기에 오늘까지 뿌리를 이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 점에서 누에바 칸시온은 민초들과 함께 끊임없이 다시 태어나는, 영원히 새로워지는 노래다.

마그나카르타 800년의 무게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조효제의 인권 오디세이

마그나카르타 제정 800년이 되었다. 근대적 의미에서의 인권은 대헌장을 빼고 이야기하기 어렵다. 자유를 위한 투쟁에서 영감의 원천이 되었으니 말이다. 권리와 정의는 양도, 거부, 또는 지연될 수 없다고 선언함으로써 인권의 양도불가 원칙이 마련되었다.

인권이 진보한 것 같지만 권력의 지배욕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권력은 중력처럼 언제나, 영원히 인간을 억누른다. 한순간도 방심하지 말고 권력의 전횡을 감시하라는 명령이 마그나카르타의 진정한 교훈일 것이다.

마그나카르타(Magna Carta)가 제정된 지 800년이 되었다. 인권의 기원을 어디에서 잡느냐가 항상 논쟁거리이지만 적어도 근대적 의미에서의 인권은 대헌장을 빼고 이야기하기 어렵다. 자유를 위한 투쟁에서 영감의 원천이 되었으니 말이다. 올해 영국에선 크라우드소싱으로 성문헌법을 제정하기 위해 학계와 시민들의 캠페인이 시작되었고, <비비시>(BBC)는 의회와 공동기획으로 민주주의 시리즈를 내보내고 있다.

1776년 미국의 독립선언문은 영국의 조지 3세가 얼마나 식민지 주민들을 괴롭혔는지 그 죄상을 상세히 열거한다. 마그나카르타의 문제의식과 일맥상통한다. 또한 1789년 프랑스혁명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에서도 대헌장의 역사적 울림이 뚜렷이 남아 있다. 유엔이 그 정관을 ‘유엔헌장’이라고 부른 것도 마그나카르타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세계인권선언이 발표되었을 때 엘리너 루스벨트가 ‘인류의 대헌장’이라고 불렀던 건 유명한 일화다.

대헌장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1215년 6월15일 영국의 존 왕과 그의 신하인 영주들 수십명이 모였다. 왕과 신하들 사이에 흔치 않은 담판을 짓는 자리였다. 회동 장소는 런던에서 서쪽으로 약 80리 떨어진 서리주 근방 템스 강변의 초원. 이 부근 목초지의 지명이 러니미드. 사적지로 지정되어 현재 일반 대중이 자유롭게 방문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아담한 기념관이 세워져 있는 이 조용하고 목가적인 풀밭에서 이토록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봉건시대엔 국토 전체가 국왕의 소유였다. ‘배런’이라 불리던 영주들은 자기 땅에선 작은 왕처럼 행세했지만 따지고 보면 그들 역시 국왕의 토지를 하사받아 사용하던 임차인이었다. 영주는 그 땅을 아랫사람들에게 다시 세주었으므로 봉건제는 여러 단계의 임대차 관계로 엮인 복잡한 먹이사슬 같은 제도였다. 영주는 두목 임차인이고 가장 낮은 단계의 농노는 졸병 임차인이었다고 보면 된다. 이렇게 물고 물리는 관계 속에서 서로 간에 권리와 의무가 정해져 있어 일종의 관습적 봉건질서가 확립되어 있었다.

그런데 옛 군주들이 흔히 그러했듯 존 왕은 고집불통에다 독선적인 인물이었다. 좌충우돌하면서 매사를 자기 마음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프랑스와 늘 싸웠고, 교황과 다투다 파문된 적도 있고, 전쟁에 드는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영주들을 엄청나게 쥐어짰다. 참다못한 영주들이 반란을 일으킬 지경에 이르렀다. 떼를 지어 몰려가 런던타워를 점거하고 국왕에게 관습을 지키라고 요구하는 집단행동에 나섰다. 이에 존 왕이 마지못해 협상에 임했던 것이다.

몇가지 사실관계부터 정리하자. 1215년 6월15일에 존 왕이 합의문에 실제 서명한 것은 아니다. 존 왕이 글을 쓸 줄 알았는지조차 불분명하다. 며칠 동안 영주 쪽의 협박과 종용 끝에 국왕의 윤허가 6월15일에 떨어진 것에 불과하다. 겨우 분이 풀린 영주들이 국왕에게 충성 서약을 갱신한 뒤 필사 전문가들이 합의 내용을 라틴어로 양피지에 써서 양초로 봉인한 것이다.

1부만 작성된 것도 아니었다. 전국적으로 배포될 문서여서 수십부를 일일이 필사해서 했다. 따라서 이 사본들 모두가 ‘원본’에 해당된다. 현재 4부가 남아 있다. 양가죽을 석회수에 오래 담근 다음 꺼내어 팽팽하게 당긴 상태에서 말린 뒤 반달형 칼로 표면을 긁어내고 깃털 펜으로 글씨를 썼다. 양피지가 엄청나게 비쌌던 탓에 필경사들은 되도록 잔글씨로, 행을 띄우지 않고 빽빽하게, 그것도 약자를 많이 쓰면서 기록을 해야 했다. 1조니 2조니 하는 구분은 후대에 영어로 번역하면서 붙인 것이다.

처음부터 대헌장이라 부른 것도 아니었다. 애초엔 자유헌장이라 했는데 나중에 국왕의 산림 관련 조항이 별도의 헌장으로 떨어져 나간 뒤부터 나머지 부분을 대헌장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대헌장의 반포로 문제가 다 해결된 것도 아니었다. 존 왕은 헌장을 준수할 의사가 처음부터 없었으므로 선포 직후 그것을 무력화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여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의 무효선언까지 받아 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영주들이 이듬해 다시 항의를 시작했고 왕이 1216년 말에 사망하고서야 사태가 겨우 진정될 수 있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대헌장의 구체적 내용이 무엇인가. 우선 총 63조로 이루어진 대헌장은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권리원칙을 담은 문헌이 아니다. 불만 가득한 영주들을 달래기 위해 왕의 잘못을 시정하겠다는 구체적인 약속이행 각서였다. 따라서 전통과 관습을 충실히 지키겠다는 과거지향적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이 중 인권 발전 역사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조항은 모두 다섯개다.

1조는 영국(잉글랜드) 교회의 자유와 권리를 규정했다. 영국과 로마 가톨릭교회 간의 해묵은 애증관계를 읽을 수 있다. 13조는 런던을 비롯한 모든 시, 군, 구의 자유 특히 교역의 자유를 재확인했다. 서양의 지방분권 전통이 원래 경제활동의 자유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인권의 측면에선 39조와 40조가 특히 중요하다. 39조는 법에 의하지 않고 자유민을 함부로 체포하거나 구금하지 못하고, 그의 권리나 소유물을 박탈하지 못하며, 범죄자 취급하거나 추방하지 못한다고 되어 있다. 이 조항으로부터 훗날 인신보호 규정이 도출되었다. 또한 피고는 ‘동등한 자유민들의 정당한 판단’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함으로써 시민배심원단에 의한 재판, 즉 민주적 사법집행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옳고 그름을 시민들이 판단해야 한다는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그리고 ‘나라의 법’을 지켜야 한다고 함으로써 적법절차의 준수 원칙이 비롯되었다. 국왕이라도 법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역사가 사이먼 샤마는 이 조항 덕분에 민주주의가 시작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권력의 자의적 지배는 종언을 고했다고 평가한다. ‘자유민은 그 누구도…’라고 한 부분은 훗날 ‘그 누구도 이러저러한 이유로…’라는 반차별 원칙으로 발전했다. 프랑스혁명 인권선언의 7조가 대헌장의 39조를 거의 그대로 반복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40조는 권리와 정의는 양도, 거부, 또는 지연될 수 없다고 선언함으로써 인권의 양도불가 원칙이 마련되었다. 마지막으로 61조는 영주들 중에서 25인의 대표를 뽑아 국왕이 헌장을 제대로 지키는지 감시하도록 하고, 만일 헌장을 어길 경우 국왕의 부동산과 동산을 몰수할 수 있도록 했다.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던 시절에 국왕에게 이런 엄격한 재갈을 씌워놓았으니 대헌장이 얼마나 혁명적인 인권문헌인지 이해가 될 것이다.

대헌장은 이처럼 파격적이었지만 문제가 없지 않았다. 영주, 기사, 자유민 등 전체 인구의 10퍼센트에게만 적용된 문헌이었기 때문이다. 나머지 90퍼센트의 농노들에게는 벌금형 제한, 자의적 재산몰수 금지, 강제노역 금지와 같은 극히 일부 권리만 인정되었다. 1689년 명예혁명 때 권리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고 바뀌긴 했지만 이때에도 여성은 제외되었음을 기억하자.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근본적 차원에서 절대 권력은 인정될 수 없다는 원칙 때문에 마그나카르타의 정신은 역사 속에서 계속 이어져 왔다. 역설적인 측면도 있다. 영국인들에게 대헌장의 원칙은 상식처럼 문화 속에 각인된 탓에 성문헌법이 만들어지지 않은 이유가 되었다. 그리고 대헌장의 원래 목적은 불만이 내전으로 터져 나오지 않도록 막기 위한 대증요법이었다. 봉건제의 전통을 수호하려는 것이 영주들의 주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 후대에 와서 인권의 원칙으로 격상되었다. 수구적 동기가 혁신적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대헌장이 나온 뒤 인류는 거의 천년 가까이 자유를 위해 투쟁해 왔고 그 투쟁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 크게 보면 인권이 진보한 것 같지만 권력의 지배욕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9·11 같은 사건이 발생하거나 인권과 거리를 둔 정권이 집권하는 순간, 사람들의 자유는 곧바로 후퇴하기 시작한다. 권력은 중력처럼 언제나, 영원히 인간을 억누른다. 한순간도 방심하지 말고 권력의 전횡을 감시하라는 명령이 마그나카르타의 진정한 교훈일 것이다.

표현의 자유와 표현의 한계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조효제의 인권 오디세이

표현의 자유는 어느 선에서 제한되어야 하는가. 표현의 자유가 민주주의를 위한 백신주사의 항체라는 기본을 기억해야 한다. 그 바탕 위에서,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거나 해를 끼치면서까지 표현의 자유를 행사하면 안 된다는 원칙을 지켜야 한다

표현의 자유는 민주체제에서 100% 보장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그 실천은 시민들의 건전한 양식으로 조절되는 게 좋다. 그래도 논란이 되는 10%는 여론과 논쟁의 용광로에서 부딪쳐야 한다. 이 논쟁의 수준이 높을수록 민주주의의 자양분이 된다

지난 1월 프랑스에서 일어난 샤를리 에브도 사건으로 표현의 자유가 큰 이슈로 떠올랐다. 그 후에도 한국에서 일베, 대북 삐라, 국제영화제, 대통령 비판 전단 등의 논쟁이 끊이지 않는다. 표현의 자유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문제가 되는가. 표현의 자유는 사상의 자유, 말할 자유,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 예술의 자유를 모두 연결하는 넓은 권리다. 누구라도 마음속에선 자유로울 수 있다. 독재자 앞에서도 생각은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생각의 자유가 사회공동체 내에서 의미를 가지려면 그것이 말이나 행동으로 표출될 수 있어야 한다. 그것들 전체를 아우르는 것이 표현의 자유이다. 이처럼 중요한 표현의 자유를 인권의 관점에서 정리해 보자.

표현의 자유가 늘 논란이 되는 이유는 그것이 인권 중에서도 특이한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표현의 자유는 이중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형식적·절차적 차원과 내용에 대한 평가의 차원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구분된다. 고전적인 표현의 자유에서는 이 둘을 엄격하게 구분한다. 어떤 표현의 내용에 대한 가치판단은 얼마든지 다르게 내릴 수 있지만, 그것과 무관하게, 형식적 차원의 자유는 옹호하자는 것이다. 흔히 인용되는 볼테르의 말은 정확히 이 지점을 겨냥한다. 이런 특성이 표현의 자유와 여타 인권들을 가르는 중요한 차이점이다. 예를 들어, 내용상으로나 형식상으로나 반대 논리가 일치하는 노예 문제와, 표현의 자유는 다른 구조를 지녔다.

또한 표현의 자유는 평상시에는 별로 거론되지 않다가 논란의 여지가 있는 말과 행동이 나왔을 때에 갑자기 주목받는 경향이 있다. 이것을 뒤집으면, 표현의 자유는 애당초 현상유지나 사회통념에 도전하는 ‘튀는’ 언어와 행동을 보호하기 위해 생겼다는 뜻이다. 일상적이고 순응적이고 무난한 행동거지는 표현의 자유가 있든 없든 별문제 없이 넘어갈 터이니 말이다. 따라서 비판적이고 파격적이고 도발적이고 과격하다는 이유로 표현 자유를 제한하자는 주장은 모순어법에 빠지기 쉽다. 그렇다고 표현의 자유를 무제한 보장할 수도 없다.

자유로운 표현을 할 수 있다는 것과, 하면 할수록 좋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예를 들어, 고문받지 않을 권리의 경우, 고문을 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좋다. 하지만 표현의 자유는 표현 자유를 ‘허용’하자는 것이지, 모든 표현의 자유를 무조건 ‘권장’한다는 말이 아니다. 후자의 입장을 취하는 자유지상주의자들도 있다. 이들은 타인을 불쾌하게 할 자유, 심지어 타인으로부터 불쾌함을 당할 자유(freedom to be offended)까지 요구한다. 하지만 이런 입장이 바람직한지 혹은 가능한지를 따져 봐야 한다. 예컨대, 테러 후 복간된 샤를리 잡지의 표지에 피 흘리고 죽은 동료들을 풍자하는 그림을 실을 수 있었을까. 아무리 샤를리의 기자들이라도 차마 그렇게까지는 못했을 것이다. 표현의 자유가 있다고 해서 갈 데까지 가는 것이 다 좋은 건 아니고, 그렇게 하기도 어렵다.

표현의 자유가 극히 소중한 권리이긴 하나 몇가지 조심해야 할 점이 있다. 첫째, 표현의 자유는 외견상 ‘보편적’ 권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특정한 맥락과 배경에 많이 의존한다. 예를 들어 프랑스인들은 수백년 동안 표현의 자유를 당연시하는 독특한 전통을 발전시켰다. 짓궂고 당돌하고 신성모독적인 조롱, 즉 ‘구아유’(gouaille)를 잘 받아넘겨야 세련된 사람처럼 취급된다. 하지만 자기들끼리 통하는 전통이 다른 문화권의 역사적 경험과 감성에까지 통한다는 보장은 없다. 빈부격차가 심하거나 사회통합에 문제가 있거나 차별받는 소수집단이 존재하는 곳에선 표현의 자유가 심각한 역효과를 낼 수 있다. 동서독 통합 후 동독인들을 촌뜨기처럼 우스개로 삼은 코미디 프로가 나오곤 했다. 이런 식의 표현 자유가 당사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둘째, 표현의 자유 논리에는 자체모순이 있다. 내용과 상관없이 사람들의 주장을 보호한다고 할 때, 표현의 자유 원칙을 반대하는 주장까지 보호해 주어야 하는가. 네오나치처럼 표현의 자유를 내세워 증오를 퍼붓는 집단에 어떻게 대처해야 옳은가. 이것은 자유주의의 전형적인 딜레마이다. 이 때문에 표현의 자유는 철저하게 일관성을 지키기 어렵고, 이중적이라거나 위선적이라는 비판 앞에 취약하다.

셋째, 내용상의 가치판단과 형식상의 자유보장을 완전히 분리하기 어렵다. 볼테르를 온전히 따르려면 일베들의 행동이 아무리 못마땅해도 내 목숨까지 걸고 보호해 주어야 옳다. 그런데 성인군자가 아닌 이상 그걸 실천하기는 솔직히 어렵지 않겠는가. 아마 이때 보통 시민이 할 수 있는 최대치는 함부로 법적 처벌의 칼을 휘두르지는 말자고 하는 정도일 것이다. 또한 표현 자유에 관한 한, 진보-보수의 진영 논리로 접근할 때 양쪽 모두 자가당착에 빠지기 쉽다. 표현의 자유는 이념적 가치판단을 적용하기에 적합한 개념이 아니다. 어떤 언행의 내용적 가치는 그것이 인간의 일반적 자유, 공익, 민주주의 원칙, 헌법 가치, 예술의 내적 요구에 부합하느냐, 아니면 무모하고 우둔하고 사려가 부족한 아집이냐의 기준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물론 조롱과 풍자를 포함한 표현의 자유를 최대한 누려야 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다. 가장 큰 이유는 권력 없는 사람들이 권력에 대항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무기이기 때문이다. 또한 권리가 아무리 주어져도 그것을 사용하지 않으면 녹슬기 쉽다. 표현의 자유는 꾸준히 사용해야 하고 사람들이 그것에 익숙해져야 한다. 표현의 자유가 갈등을 일으키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평화를 보장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갈등이 있을 때 상대의 신체에 직접 해를 입히지 않고, 말과 비폭력 행동으로만 비판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의 전통을 따르는 것이다.

표현의 자유를 포함한 모든 인권은 ‘좋은 삶’을 누리기 위해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두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그런 취지에서 생긴 인권이 분란의 원천이 되는 상황은 역설적이다. 그렇다면 표현의 자유가 어느 선에서 제한되어야 하는가. 우선 표현의 자유가 민주주의를 위한 백신주사의 항체-그 자체로선 좀 심하다 싶어도 결국 건강을 돕는-라는 기본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그 바탕 위에서,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거나 해를 끼치면서까지 표현의 자유를 행사하면 안 된다는 원칙을 지켜야 한다. 세계인권선언의 마지막 조항은 어떤 국가, 집단, 개인도 타인의 권리와 자유를 파괴할 권리가 없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이럴 때에도 시민의 공적 이성으로 통제를 할 수 있으면 제일 낫다. 강제조치는 말 그대로 최후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

지식인, 여론주도층, 언론이라면, 아니 그 누구라도, 표현 자유의 논쟁에 뛰어들 때엔 첫마디, 첫 줄에서부터 밝혀야 할 점이 있다. 자신의 비판이 어떤 사안의 내용에 대한 규범적 비판인 것인지, 아니면 규범적 비판에 더해 제도적 금지, 검열, 법적 제재와 처벌까지 하자는 주장인지를 정직하게 선언해야 한다. 이 둘을 두리뭉실하게 얼버무리면서 온갖 교묘한 언설로 비난을 퍼부은 다음, 사법당국의 결정을 기다려 보자고 뒤에 숨는 것은 지적 비겁함이자 정치적 교활함의 극치라 할 만하다. 헌법상의 자유 민주주의자를 판별할 때에도 이 질문을 리트머스 테스트처럼 활용하면 좋겠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비유로써 결론을 내리자. 표현의 자유는 민주체제에서 100퍼센트 보장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그것의 실천은 시민들의 건전한 양식으로 조절되는 것이 좋다. 그래도 논란이 되는 10퍼센트는 여론과 논쟁의 용광로에서 치열하게 부딪쳐야 한다. 이 논쟁의 수준이 높을수록 민주주의의 자양분이 된다. 그래도 안 되면 그중 1퍼센트 정도가 법정으로까지 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0.1퍼센트 미만이 사법 심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이 순서가 바뀌면 표현의 자유와 민주주의가 모두 위협받는다. 결국 문제는 사람이다. 표현의 자유를 전적으로 옹호하면서도 자기절제가 가능한, 수준 높은 시민들이 있어야 표현의 자유가 바벨탑의 비극으로 전락하지 않을 수 있다.

마이클 브라운 사건과 구조적 인권침해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조효제의 인권 오디세이

퍼거슨시 경찰을 조사한 보고서 백미는 3절 ‘세수 확보에 초점을 둔 법집행’에서 찾을 수 있다. 시가 경찰과 법원에 압력을 가하여 세금 수입을 중시하는 치안정책에 매진했다는 것이다. 시로부터 협조요청을 받은 경찰과 법원은 만만한 흑인 시민들을 쥐어짰다. 한번 걸리면 보통 3건 이상 고지서가 발부되었다

보행규칙 위반 302달러, 가두 소란 427달러, 체포 비협조 777달러, 가옥주변 잡초 제거 불량 531달러, 명령 불응 792달러, 법규준수 불이행 527달러 등, 흑인들을 시 예산 확보의 호구로 취급했다. 교통신호 위반으로 한번만 걸려도 빈곤층이나 차상위계층은 거의 파산상태에 빠질 정도로 혹독한 벌을 받았다

지난달 오바마 대통령이 “셀마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선언했다. 흑인 참정권운동의 이정표가 된 셀마 행진 5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그의 메시지는 미국에서 인종차별 현실이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나는 이런 해석이 부분적으로만 맞다고 생각한다. 가야 할 길이 멀 뿐만 아니라, 반세기 전에 비해 그 길이 더 복잡해지고 더 험해지고 더 교묘해졌다. 인간의 도덕성은 한길로 진보하지 않고 각 시대마다 새롭게 규정되어야 한다는 존 그레이의 통찰이 새삼 와 닿는다.

오바마의 연설 며칠 전에 미 연방 법무부가 보고서 2편을 동시에 펴냈다. 알다시피 작년 미주리주 퍼거슨시에서 대런 윌슨이라는 백인 경찰이 마이클 브라운이라는 18살 흑인 청소년을 사살한 사건에 관한 것이었다. 첫 보고서는 이 사건을 시민권 관련 연방 형법으로 기소할 수 있느냐를 다루었다. 기소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미국에서 연방법으로 기소하기 위해선 충족되어야 할 필요조건들이 있다. 잠재적 피고가 연방 범죄를 저질렀는가. 연방 범죄 목록에는 부주의과실과 과실치사가 포함되지 않는다. 또한 혐의가 합리적 의심의 여지없이 증명 가능한가. 즉 재판에서 승소할 가능성이 높은가. 이런 필요조건들에 부합되지 않아 결국 사건을 기소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다. 어느 정도 예상되었던 내용이다.

그런데 퍼거슨시 경찰을 조사한 둘째 보고서가 더욱 주목을 끈다. 사건의 배경과 원인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1960년대에 인종차별 상황을 다루었던 때보다 더 신랄하게 미국 사회의 치부를 드러낸 공식 문헌이다. 보고서는 퍼거슨시의 경찰이 불합리한 수색·체포·압수를 금지한 연방헌법 수정조항 4조, 종교·언론·출판·집회 자유를 규정한 1조, 불합리한 강제력 사용을 금지한 4조를 위반했다고 지적한다. 윌슨의 총격이 일회성 사건이 아니라 흑인들에 대한 차별에 일정한 ‘유형이나 관행’이 있었다고 지적한다. 명백한 인종적 편견이 법집행 공직자들 사이에 팽배해 있었던 사실도 확인되었다. 흑인들의 인구 비율보다 처벌 비율이 월등하게 높았고, 경찰들은 근무시간에 공식메일로 ‘비인간적이고 용납할 수 없는 인종적 편견’을 거리낌없이 주고받았다. 오바마를 침팬지라 부른 경관도 있었다. 백인들은 적당히 봐 주면서 흑인들에게는 가차없이 법을 집행했다. 지방법원도 경찰과 오십보백보였다. 이 모든 것이 흑인들에 대해 ‘의도적 차별’이 있었다는 점을 입증한다.

둘째 보고서의 백미는 3절 ‘세수 확보에 초점을 둔 법집행’에서 찾을 수 있다. 시당국이 경찰과 법원에 압력을 가하여 공공의 안전보다 세금 수입을 중시하는 치안정책에 매진했다는 것이다. 참고로 미국의 지방경찰과 지방법원(즉결재판소 포함)의 임명과 발령은 해당지역 소관이다. 시의 회계책임자가 법원 판사에게 보낸 공문이 공개되었다. “올해 내 벌금고지서 발부율이 급증하지 않으면 내년의 범칙금 징수율에 문제가 생길 것임. 판매세 징수 부진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세수 부족은 심각한 문제임.” 시에서 법원장에게 경찰로 하여금 벌금 부과를 10% 이상 높이도록 독려해 달라는 협조공문을 보낸 것도 확인되었다.

시로부터 협조요청을 받은 경찰과 법원은 이에 적극 호응하여 만만한 흑인 시민들을 인정사정없이 쥐어짰다. 경찰 눈에 띄기만 하면 어떻게든 꼬투리를 달아 벌금을 매겼다. 한번 걸리면 보통 3건 이상 고지서가 발부되었다. 보행규칙 위반 302달러, 가두 소란 427달러, 체포 비협조 777달러, 가옥주변 잡초 제거 불량 531달러, 명령 불응 792달러, 법규준수 불이행 527달러 등, 흑인들을 시 예산 확보의 호구로 취급했다. 사정사정해서 벌금을 분할 납부하게 되어도 납기일을 하루라도 넘기거나 납부금액이 조금만 부족하면 법정출두 거부로 간주하여 체포영장을 발부하였다. 교통신호 위반으로 한번만 걸려도 빈곤층이나 차상위계층은 거의 파산상태에 빠질 정도로 혹독한 벌을 받았다. 대명천지의 소위 문명사회에서 어찌 이런 가렴주구가 있을 수 있는가.

한 흑인 여성의 경우를 보자. 뒤에서 오는 경찰차가 지나가기 쉽도록 차를 길가로 붙였는데 그것을 빌미로 교통방해, 신호위반, 안전벨트 미착용으로 삼중 딱지를 뗀 사건이었다. 법원에 진정을 내자 이번에는 운전면허 정지처분이 떨어졌다. 미국에서 운전면허가 없으면 직장을 잃을 가능성이 커지고, 홀몸으로 키우는 아이들의 보육도 불가능해진다. 인종차별에다 젠더와 빈곤의 차원이 더해져 아주 복잡한 차별 상황이 조성된 것이다. 이런 예들을 나열한 후 보고서는 다음과 같은 권고를 제시한다. 시의 세금 수입에만 치중하지 말고 공공안전을 우선시하는 법집행, 경찰인력의 훈련과 감독, 인종 편견을 줄일 정책, 벌금 부과를 위한 체포영장 남발 관행 개선 등이다.

법무부는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이례적으로 에릭 홀더 검찰총장의 논평을 덧붙인 보도자료를 내놓았다. 그는 퍼거슨시의 법집행에 결정적 하자가 있었음이 밝혀진 만큼 “시의 지도자들이 온전하고 구조적인 시정행동을 취할 때가 됐다”고 강조한다. ‘구조적 시정행동’이라는 표현이 주는 울림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 말에도 어폐가 있다. 구조적 해결을 하려면 구조적 문제가 무엇인지 먼저 규명해야 한다. 퍼거슨시가 세수를 올리기 위해 흑인들에게 범칙금을 남발한 것을 밝힌 것까지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왜 퍼거슨시가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법무부의 보고서는 이 지점에서 결정적 한계를 보인다. 문제의 근본원인을 간과한 것이다.

퍼거슨시의 2010년 예산은 1100만달러였고 그중 12%가 범칙금으로 충당되었다. 2015년 예산은 1330만달러인데 범칙금 목표액이 24%로 뛰었다. 그 이유는 미주리 주정부가 산하 지자체에 제공하는 지원금이 그동안 계속 줄었기 때문이다. 전국 지자체가 각 주정부로부터 받는 지원금이 예산의 평균 19%인데 퍼거슨시는 7%에 불과하다. 미주리주의 다른 지자체도 어려운 곳이 많다. 예를 들어 윈저시 공무원들은 시청사 화장실의 휴지를 자비로 구입해야 한다. 사정이 이러해도 주지사 제이 닉슨은 예산 삭감에 누구보다 열심이었다. 작년에는 주 예산을 4억달러나 삭감했었다. 세인트루이스시와 캔자스시의 공립학교 통학버스 의무제공 제도도 없애 버렸다. 게다가 그런 것들을 자신의 실적이라고 내세웠던 인물이다.

그렇다면 유독 미주리주만이 문제인가. 그렇지도 않다. 전국 1만9000여 지자체들의 협의체인 전국도시연맹(NLC)에 따르면 2008년에서 2013년 사이 지자체 공무원들이 50만명 이상 감원되었다. 2013년에는 주정부에 대한 연방정부의 교부금이 550억달러나 삭감되었다. 절반 가까운 지자체들이 예산 부족을 메꾸기 위해 행정 수수료를 인상해야 했다. 결국 문제의 근원을 따져 들어가 보면 신자유주의적 공공부문 축소와 경기침체가 맞물리면서 가장 약한 고리에 있는 빈곤층, 유색인종, 여성, 아동, 이민자에게 고통이 몽땅 전가된 것이다. 퍼거슨시 사건을 단순히 인종갈등이나 경찰폭력으로만 해석할 수 없는 이유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최근 세계 인권학계에 조용하지만 중요한 변화가 일고 있다. 인권을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침해의 문제로만 보지 말고 인권을 달성할 수 있는 근본조건, 인권이 침해되는 근본원인을 찾자는 움직임이 그것이다. 이것을 인권의 근본원인 접근법이라 한다. 인권을 구조적으로 봐야 한다는 말이다. 마이클 브라운의 피살과 폭동사태로만 사건을 보면 직접적 인권침해만 다루는 것이다. 이때 법적용이 중요한 도구가 된다. 하지만 예산 삭감, 공공성 악화, 그것에 편승하는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을 보는 눈이 생기면 인권침해의 근본원인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렇게 되면 정치적·사회적 개입과 정책이 중요해진다. 역사학자 새뮤얼 모인은 ‘이목을 끄는’(spectacular) 불의로부터 ‘구조적’(structural) 불의로 인권운동의 관심이 전환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나는 구조적 인권침해를 읽을 수 있는 문해 능력의 배양이 21세기 인권교육과 인권운동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과거를 기억하는 방법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독일 전역에 나치 정권의 인권침해와 홀로코스트 관련 기념물, 기념관, 추모시설이 산재해 있다. 베를린과 그 주변 브란덴부르크주에만 스무군데가 넘는다. 그 숫자는 계속 늘어나는 추세다.

독일의 외교에서 중요한 부분인 인권정책이 과거사 의무에서 비롯되었는가라는 질문을 한 외무부 관리에게 던졌다. 그 점이 계기가 되었을 수는 있지만 인권의 본유적 가치를 지향하려는 의식이 더 중요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다음달 초면 유럽에서 2차대전 종전 70주년이 된다. 최근 독일 베를린 교외의 카를스호르스트에 다녀왔다. 1945년 5월8일 소련을 위시한 연합군 대표들이 독일군으로부터 무조건 항복 서명을 받은 곳이다. 독일 입장에서 보면 치욕적인 장소일 텐데 독·러 기념관으로 만들어 놓았다. 평일인데도 관람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요즘 독일에서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회계병이었던 오스카어 그뢰닝의 재판이 열리고 있다. 아흔이 넘은 전 나치대원을 법정에 세워 책임을 묻는 광경을 보면서 독일인들이 역사를 어떻게 다루는지 새삼 생각하게 된다.

독일 전역에 나치 정권의 인권침해와 홀로코스트 관련한 기념물, 기념관, 추모시설, 자료관이 산재해 있다. 제3제국의 수도였던 베를린과 그 주변 브란덴부르크주에만 스무군데가 넘는다. 그 숫자가 계속 늘어나는 추세다. 이만하면 됐다 싶은 마음이 들 만도 한데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새로운 역사 편찬 관점이 대두되면 그에 맞춰 새로운 방식으로 추모를 시도하기 때문이다. 유럽연합 차원에서도 역사적 장소들을 유지하도록 지원을 한다. 나치 시대의 시설을 사용하던 러시아군이 통독 후 물러가면서 그 공간을 역사 기념 장소로 탈바꿈시킨 경우도 많다. 이곳에 있으면서 틈이 날 때마다 이런 장소들을 방문하고 있는데 어딜 가나 견학 온 학생들이 없는 곳이 없다. 프랑스나 영국에서 수학여행 온 학생들도 보인다. 견학 전에 준비를 많이 해 온 것 같다. 나치의 선전상 괴벨스가 언제 어떤 지침을 내렸고 그것이 어떤 효과를 가져왔는지를 교사가 물으면 학생들이 손을 들고 대답할 정도다.

이런 장소들의 목적은 첫째 역사교육, 둘째 정치교육이다. 아마 시민 정치교육의 일환이라는 뜻인 것 같다. 가해자와 피해자에 대해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해야 함을 늘 강조한다. 예를 들어 보자. 1942년 1월 이른바 유대인 최종 해결책을 위한 회의가 열렸던 반제 호숫가의 기념관에는 연중 내내 교육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흥미롭게도 학생들만이 아니라 각종 직업군에 속한 사회인들을 위한 프로그램도 있다. 회사의 신입사원 교육, 보수교육, 각종 직업학교의 도제 교육의 일환으로 반제 호수 기념관을 찾는 것이다. 왜 그럴까. 나치 정권의 산업정책과 전쟁 수행에는 기업들이 광범위하게 호응했다. 군수, 화학, 약품, 제철, 철도, 자동차, 건축 등 수많은 산업부문에서 나치가 동원해준 강제노동자들을 저임으로 부려먹고, 정부 사업을 수주하여 엄청난 이득을 올렸다. 이런 식으로 사기업들이 독재정권에 부역한 것이 어떤 재앙적 결과를 초래했는지를 오늘의 직장인들, 사원들, 기술자들, 산업 역군들에게 가르치고 스스로 판단하게끔 한다. 이 모든 활동의 궁극적 목표는 타자와 공존하는 민주 사회를 함양하는 데 있다.

과거에는 강제수용소나 나치 정권의 주요 시설들, 다시 말해 가해와 범죄의 현장을 보존하는 데에 주로 노력을 기울였다. 역사적 장소를 훼손하지 않고 대중들에게 개방한다는 취지가 강했다. 오래전 다하우 수용소를 방문했을 때에도 그런 느낌을 받았었다. 물론 이런 점은 지금도 기본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새로운 역사 현장을 발굴하고 전시공간을 마련하여 대중을 맞는다. 예를 들어, 종전 직전 게슈타포가 수만명의 수인들을 죽음의 행진으로 내몰았던 벨로 숲에는 야외 기념공간이 새롭게 들어섰다.

그러나 역사 현장의 보존을 넘어 희생자들의 추모를 전면에 내건 기념물, 기념관이 늘어나는 추세를 읽을 수 있다. 암스테르담에 있는 안네 프랑크 하우스의 자매 시설이 여기에 있을 정도다. 베를린 시내 한복판에 지난 10년 사이 나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상징들이 여럿 생겼다. 2005년 브란덴부르크문 지척에 건립된 거대한 규모의 유럽 유대인 희생자 추모관이 대표적이다. 2008년에는 나치의 박해를 받았던 동성애자들을 추모하는 조형물이 만들어졌다. 그 뒤를 이어 2012년에는 신티-로마 집시들의 추모 정원이 조성되었다. 연방의회 의사당 건물이 수면에 비치도록 연못 형태로 꾸며진 아름답고 고요한 공간이다. 작년 말에는 나치 정권이 집권 후 제일 먼저 노약자들에게 강제 안락사를 시행했던 T4 프로그램의 30만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기념물이 들어섰다. 시내 중심지의 반경 1㎞ 이내에 이런 기념물들이 모여 있으니 과거사 추모가 곧 시민들 일상의 일부가 되어 있는 셈이다.

희생자들의 추모와 함께 새롭게 조명되는 분야가 있다. 나치 정권에 저항했던 사람들을 기억하는 움직임이다. 히틀러에 열광하고 나치즘에 지지를 보내고 유대인들의 박해를 암묵적으로 또 명시적으로 도왔던 수많은 독일 국민들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히틀러를 제지하려 했던 소수의 몸부림도 있었다. 영화 <발퀴레>(국내 개봉명은 <작전명 발키리>)의 소재가 되었던 히틀러 암살 시도가 일어났던 육군총사령부 건물은 현재 독일저항기념센터가 되었다. 거리 이름도 슈타우펜베르크가로 개명되었다. 꼭 방문해 볼 만한 곳이다. 저항자들의 이야기를 범주별로 분류해 보여준다. 노동조합원, 공산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 민주주의자들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개신교와 가톨릭 종교인들 중에도 소수의 저항자들이 있었다. 평화주의자, 반전주의자, 새로운 독일 사회를 꿈꾸는 사람들의 토론 모임 등 다양한 저항의 움직임도 묘사되어 있다. 아무 조직적 연계 없이 개인 차원에서 저항했던 사람도 있었다. 혼자서 히틀러 암살을 계획했던 게오르크 엘저 같은 이가 좋은 예다. 최근 올리버 히르슈비겔 감독의 영화 <엘저>가 개봉되어 대중의 관심이 이 주제에 쏠려 있는 상태다. 그러나 이런 조류에 대해 찬사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극히 일부의 움직임을 과대 포장하여 독일 국민 전체의 죄의식을 결과적으로 약화시킨다는 비판이 있다. 또한 저항자들이 히틀러에 반대하긴 했어도 당시 널리 유포되어 있던 반유대주의 성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않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런 점들을 잘 감안하면서 저항자들의 활동을 널리 알리는 것은 그 나름의 교육적 의미와 효과가 있을 것이다.

나치 정권을 비판하고 그것에 저항한 것과 별개로 유대인을 도왔던 보통사람들을 ‘침묵의 영웅’이라 부르기도 한다. 옛 동베를린 지역의 로젠탈러가에 침묵의 영웅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평범한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유대인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탈출 경로를 안내하고, 아이들을 맡아 길렀던 사실은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을 준다. 기념관 옆에는 오토 바이트 시각장애인 작업장이 있다. 이곳에도 흥미로운 사연이 있다. 오토 바이트는 시각장애가 있던 아나키스트 평화주의자로서 솔과 빗을 제작하는 공장을 운영하였다. 나치 집권 후 바이트는 시각장애, 청각장애가 있는 유대인들을 종업원으로 고용하여 이들이 강제추방되지 않도록 보호하고 돌보았다. 쉰들러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기념관의 설명문은 아무리 혹독한 독재치하라 해도 얼마간 운신의 여지가 있고 그것을 침묵의 영웅들이 활용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유대인들이 나치의 박해를 고분고분하게 받아들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서사도 하나의 뚜렷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나치의 반소련 선전물을 폭파했던 헤르베르트 바움 그룹의 활동이 하나의 사례이다. 반드시 전면적 투쟁이 아니라도 유대인 멸절을 추구했던 나치에 맞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쳤던 노력 자체가 소중한 저항이었다는 입장도 있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그렇다면 독일 사회가 과거사를 늘 회고하고 반추하는 회로에서만 작동하고 있는가. 그것은 아닌 것 같다. 한 외무부 관리에게 독일의 외교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인권정책이 독일의 과거사 의무에서 비롯되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 보았다. 그 점이 하나의 계기가 되었을 수는 있지만 인권의 본유적 가치를 지향하려는 의식이 더 중요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그 말을 이렇게 해석하고 싶다. 고통스럽더라도 역사의 진실을 성실히 대면하면서 그것의 현재적 의미를 정직하게 계속 토론하다 보면 자기합리화나 죄책감이나 가해-피해의 정서적 긴장을 넘어선 어떤 보편적 해원의 경지가 올 수 있고, 그런 기반이 마련되면 국가든 집단이든 정상적인 미래로 나아가는 길이 열린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매매와 자유의 의미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요즘 인도적 지원이 많이 변하고 있다. 위기 상황 초기부터 인권침해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느슨해진 사회 지지망을 틈타 인간 하이에나들이 모여들지 않도록 경계하는 일이 인도적 지원 업무의 핵심이 된 것이다

인신매매는 특히 성매매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나타난다. 자발적 성매매를 합법화한 나라에서 예상 밖으로 인신매매와 비자발적 성매매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는 실증연구가 있다. 인권 논쟁에서 자유라는 말을 조심스럽게 써야 하는 이유를 말해 준다

지난달과 이번달 네팔에서 연거푸 발생한 지진의 결과에 우리는 놀라움과 연민을 감출 수 없다. 어렵고 가난한 나라에서 왜 이렇게 힘든 일이 계속 일어나는가.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악랄한 인권문제까지 발생하고 있다. 지진 이후 인신매매가 심해진 것이다. 재난을 당한 지역의 여성과 아동들이 카트만두나 해외로 대거 팔려나가고 있다. 네팔 국내 그리고 국제 인권단체들은 상황이 아주 심각하다고 입을 모은다. 재해 한복판에서 왜 이런 인권침해까지 일어나는 것일까.

네팔의 인신매매는 지진 후 갑자기 생긴 문제가 아니다. 오래전부터 매년 만명 이상의 네팔 여성들이 도시나 해외로 팔려나가고 있었다. 동남아 각국으로, 심지어 한국에까지 온다고 한다. 특히 인도는 이런 여성들을 집결시켜 성매매를 산업화하는 중심지 역할을 해 왔다. 그러던 중 재난이 덮쳤고 그 혼란을 틈타 여성과 어린이를 상대로 인간 사냥이 기승을 부리게 된 것이다. 집을 잃고 가족도 흩어진 막막한 상태에서 사람 좋아 보이는 아저씨가 숙식과 일자리를 제공해 주겠다고 할 때 솔깃해하지 않을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게다가 그 아저씨를 잘 안다고 말 보증 서는 동네 사람이 있다면 그 후 벌어질 일은 불문가지이다.

명목상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다는 이들이 나쁜 가해자가 되곤 한다. 예를 들어, 1990년대 보스니아 전쟁 당시 유엔 평화유지군이 현지 여성들을 상대로 대규모 성매매를 했다가 큰 물의를 빚은 적이 있다. 아이티에서 지진이 난 후 해외로 입양된 고아들 중 상당수가 업자들에 의해 팔려나간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최근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서 프랑스 평화유지군이 돈과 음식을 미끼로 남자아이들을 성추행하고 유엔에서는 그 사건을 쉬쉬하다 오히려 국제적 문제로 비화한 적도 있었다.

이런 사정 때문에 요즘 인도적 지원이 많이 변하고 있다. 자연재해나 내전이 발생해 긴급하게 도움을 제공할 때에 단순히 물자지원이나 피해복구만이 전부가 아니게 되었다. 위기 상황 초기부터 인권침해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느슨해진 사회 지지망을 틈타 인간 하이에나들이 모여들지 않도록 경계하는 일이 인도적 지원 업무의 핵심이 된 것이다. 인도주의 활동과 인권보호 활동이 수렴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현재 노예제도를 공식적으로 유지하는 나라는 지구상 한 군데도 없다. 그러나 세계인권선언에서 금지한 ‘노예 또는 타인에게 예속된 상태’를 초래하는 인신매매는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유엔은 세계적으로 약 250만명의 인신매매 피해자가 있다고 추산한다. 인신매매 관련 문헌을 찾아보면 ‘근본 원인’을 찾는 연구가 많다. 인신매매가 인권침해인 건 분명한데 그 원인이 하도 복잡 다양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인신매매를 현대판 노예제도라 부르곤 하지만 그것은 인신매매를 묘사하는 하나의 표현일 따름이다.

인신매매는 고용, 이주, 밀수, 마약거래, 성매매, 섹슈얼리티와 자율성 등 여러 차원의 문제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인신매매를 활성화하는 요인도 여럿 된다. 계급, 계층, 차별, 빈곤, 도시화, 생활수준 개선욕구, 남성의 여성 지배 등 다양한 요인이 섞여 나타난다. 인신매매가 한쪽 극단으로는 과거 아프리카 노예처럼 노골적인 지배, 굴종, 소유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쪽 극단에는 느슨한 형태의 외견상 자유계약 관계 비슷한 형태도 있다. 인신매매를 당한 사람이 스스로를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고생하는 ‘사장님’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품기도 한다. 인신매매를 하는 측에서도 은혜를 베푼다는 자기정당화나 자기기만에 빠진 경우도 적지 않다. 이처럼 깊은 차원에서 지배와 종속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최근 세계 인권학계에 <인신매매저널>이라는 국제학술지가 창간되었다. 인신매매의 예방, 처벌, 정책을 연구하고 인신매매 관련 국제 정치경제를 연구할 목적이다. 인신매매에 있어 이른바 ‘4R’이라고 불리는 문제들-저항(Resistance), 구조(Rescue), 사회복귀(Rehabilitation), 재통합(Reintegration)-을 다룰 예정으로 있다.

인신매매는 특히 성매매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나타난다. 유엔 마약범죄사무소의 2009년 연구에 따르면 인신매매 피해자 중 성인 여성이 66%, 여자 아동이 13%, 남자 아동이 12%, 성인 남성이 12%이다. 인신매매의 목적이 무엇인가. 노동 착취도 있지만 인신매매의 79%가 성적 착취를 목적으로 하며 이것은 전세계적으로 보편적인 현상이다. 결국 오늘날 인신매매는 성매매용으로 인간을 거래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거 노예제와 현대 인신매매의 결정적 차이점이 여기에 있다.

말이 나온 김에 성매매를 둘러싼 논점을 짚어보자. 성매매 논쟁엔 크게 보아 두 가지 축이 있다. 첫째 축은 자유-강제로 나뉜다. 즉 자발적 성매매와 비자발적(강제적) 성매매의 문제이다. 인신매매에 의한 성매매는 비자발적 성매매에 해당된다. 인신매매와 비자발적 성매매는 국제법상으로 그리고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서 중대한 인권침해로 간주되고 있다. 특히 어린이·청소년의 인신매매와 비자발적 성매매는 무조건 처벌 대상이라 보면 된다. 국제노동기구는 이것을 최악의 아동노동으로 규정한다. 그렇다면 이른바 ‘자발적’ 성매매는 어떻게 할 것인가. 자유의지와 자유선택을 강조하는 측에서는 자발적 성매매를 정당한 성노동으로 인정하자고 주장한다. 성매매를 정상적 산업으로, 성매매 종사자를 정상적 노동자로 보자는 말이다. 성노동자를 피해자로 보는 시각 자체를 거부한다. 이렇게 되면 성노동자는 보통의 직업인이 되며 노동정책의 규제와 보호를 받으며 존립한다. 뉴질랜드, 독일, 네덜란드가 이런 길을 택한 나라들이다.

이에 반대하는 측에서는 자발적 선택이라는 개념을 상대화해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엔의 ‘인신매매금지협정’은 합의를 했더라도 성매매 착취는 인권침해라고 했고, 특히 여성·아동의 인신매매를 금지한 유엔의 ‘팔레르모 의정서’에서는 위협이나 강제력을 써서 착취해야만 인신매매가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고 규정한다. 성차별이나 빈곤 등 기존의 약점을 이용하는 것만으로도 인신매매가 성립된다고 본다. 대다수 성매매 뒤에는 빈곤, 교육, 고용, 제도화된 젠더 불평등 등의 구조적 문제가 있다. 또한 ‘진정한’ 자발적 성노동이라 하더라도 장기적으로 정신적, 심리적, 육체적인 트라우마를 초래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성매매를 정상적 노동으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 자발적 성매매 반대론자들은 흔히 성매매 제도 폐지론에 가깝다.

둘째 축은 성매매의 범죄성과 처벌을 둘러싼 논쟁이다. 위에서 봤듯이 인신매매와 비자발적 성매매는 어차피 중요 인권침해이고 범죄이므로 논의할 필요도 없다. 성매매가 합법적인 나라에서도 인신매매와 비자발적 성매매는 불법이고 범죄이다. 여기서 쟁점은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성매매 관련자들을 어느 선까지 처벌할 것인가이다. 성을 사고, 팔고, 중개하는 사람들 모두가 처벌 대상인 나라도 있다. 그러나 스웨덴, 노르웨이, 아이슬란드와 같은 곳에서는 성매매를 불법화했으면서도 성을 사는 사람과 중개하는 제삼자(포주)는 처벌하되, 성을 직접 파는 사람은 처벌하지 않는다는 이른바 성매매 종사자의 탈범죄화 정책을 시행한다. 공식적으로는 성매매가 불법이지만 성매매에 종사하고자 하는 사람의 현실과 사정을 감안한 일종의 완충지대를 둔 것이다. 성매매를 법적으로 금하되 개인의 자유의지를 존중하고 성매매가 지하로 음성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일종의 틈새를 둔 실용주의적, 인도적 정책이라 할 수 있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이처럼 인신매매와 성매매에 관한 논쟁은 복잡한 가치론적 성격을 띠고 있다. 자유의 본질을 둘러싼 철학적 논쟁이기도 하다. 한 가지 기억할 점이 있다. 자발적 성매매를 합법화한 나라에서 예상 밖으로 인신매매와 비자발적 성매매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는 실증연구가 나와 있다. 현실이 논리적으로만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인권 논쟁에서 자유라는 말을 조심스럽게 써야 하는 이유를 말해 주는 증거다.

독일 사회의 인권 담론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조효제의 인권 오디세이

제도와 인권보호 측면에서 독일이 모범적인 나라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난민과 망명신청자에 대한 차별과 증오범죄가 상상했던 것보다 심각한 상황이었다. 경찰과 법집행 공무원에 의한 인권침해 사례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인권이 진보의제임은 분명하지만 존재론적 출발점은 특정 이념이 아닌 ‘보편적’ 인간 존중 사상이다. 독일의 인권운동은 진보-보수를 가로지르는 인권의 합의 영역을 넓히기 위해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 와중에 발생하는 긴장은 인권운동이 감당해야 할 숙명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최근 한국에서 독일에 대한 관심이 높다. 많은 사람이 독일의 통일 경험, 정치적 안정과 타협문화, 사회적 시장경제, 노사 공동결정 제도 등 이른바 ‘독일 모델’이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줄 것인지 궁금해한다. 노동계, 정치인, 정책전문가, 지식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관찰의 결과도 많이 나왔다. 하지만 독일 인권에 관한 견문 기록은 거의 없다. 한국 법체계에 큰 영향을 끼쳤고, 유럽 지역 인권 제도에서 핵심 역할을 하며, 올해부터 유엔인권이사회의 의장국을 맡을 정도의 나라이니 인권에 관해서도 참고할 만한 점이 적지 않을 것이다.

독일의 인권 현황, 특히 인권을 둘러싼 담론의 특징을 조사할 방법을 찾았는데 고맙게도 독일의 한 재단이 현지를 몇달 방문하여 관계자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주선해 주었다. 주한 독일대사관에 인터뷰 관련한 도움을 청했더니 필요한 사람들을 신속하게 연결해주었다. 방대한 관료조직을 보유한 나라의 효율적인 행정이 인상적이었다. 출국 전 재단의 한국 사무소 소장을 만났는데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현재 한국에서 독일 배우기가 유행처럼 되어 있는데 제발 독일 사회를 과도하게 이상화하여 소개하지 않으면 좋겠다고 신신당부를 한다. 피상적이고,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묘사는 서로 간에 도움이 되지 않고, 그런 식으로 소개된 정책은 한국에 거의 소용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은연중 독일을 칭찬할 준비가 되어 있던(!) 필자로선 뜨끔한 지적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백번 맞는 말이다. 공정한 관찰과 건설적인 비판이 가장 우호적인 평가이지 않겠는가. 아래 내용은 이런 점을 고려한 소략한 방문기이다.

우선 제도와 인권보호의 측면에서 독일이 모범적인 나라임은 분명하다. 1949년 제정된 기본법(헌법) 1조는 인간의 존엄성이 불가침이며, 훼손할 수도 양도할 수도 없는 인권이 모든 공동체의 기초라고 규정한다. 이런 원칙은 영구불변이고 절대 바꿀 수 없다는 이른바 ‘영구조항’까지 마련해 놓았다.

연방헌법재판소가 기본법의 수호자로 신뢰를 받고, 주와 연방 차원의 모든 법규가 기본법의 정신과 조응하게끔 기대된다. 유럽인권협약에 따라 국민 누구나 자기 권리가 침해되었을 때 유럽인권재판소에 제소할 수 있다. 대다수 법조인은 국내법만이 아니라 유럽인권법에도 훤하다. 유엔의 인권레짐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주요 국제인권조약에 거의 모두 가입·비준하였고 (이주노동자협약 제외), 국내법체계가 국제법체계와 ‘우호적 관계’를 이뤄야 한다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나와 있다.

입법부도 인권에 열성이다. 연방의회에 인권 및 인도적 지원 상임위원회가 있고, 의회 소속 군무담당관이 군 활동의 모든 측면에서 인권이 지켜지고 ‘제복 입은 시민들’의 진정권이 보장되도록 감시한다. 행정부도 인권 활동에 적극적이다. 외무부의 인권 및 인도적 지원실에서 인권외교 정책을 총괄하며, 개도국 지원을 포함한 모든 대외활동에서 인권이 반영되도록 모니터한다. 경제발전노동부는 노동권과 기업의 사회책임경영을 적극 추진한다. 연방 차원의 반차별기구, 그리고 다민족·다문화 상황에 대응해 만들어진 ‘통합을 위한 국가계획’도 가시적인 성과를 내고 있다. 본에 있는 연방정치교육원에서는 ‘강한 민주주의’를 위한 시민교육에서 인권을 핵심 가치로 강조한다. 시민사회에서 교회와 노동조합의 인권 활동이 두드러져 보였다. 50여개 이상 되는 인권단체들 사이에 정보를 교류하고 연대활동을 조율하는 ‘인권 포럼’이 인권운동의 허브 구실을 한다.

하지만 독일에 인권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난민과 망명신청자 관련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중동과 아프리카 등지의 분쟁을 피해 온 사람들을 작년 한해에만 20만명 이상 받았고 현재 40만명이 대기 중이다. 유럽 최대 규모이다. 망명 인정 규모, 국내 지역별 배정, 고용과 국내이동과 사회보장 관련한 대우 수준, 본국으로의 송환에 따른 박해 가능성 등의 문제가 난제로 대두되어 있다. 그런데 난민과 망명신청자에 대한 차별과 증오범죄가 상상했던 것보다 심각한 상황이었다. 난민보호소나 망명자 수용소에 몰려가 시위를 벌이는 것은 보통이고 욕설, 희롱, 폭력, 투척을 저지른다. 이런 분위기에 위축된 난민들은 사회적으로 격리된 상태에서 살고 있는 경우가 많다. 2014년에만 전국적으로 이런 사건이 150여건이나 발생했다. 최근에는 방화사건이 늘어나는 추세이다. 이런 짓을 극우파들이 주동하는데 이것을 정치적 성격의 사건으로 보고 그에 맞춰 법집행 및 사법조치를 해야 할 것인가가 주요 쟁점이 되어 있다. 극우파와 정보기관의 뒷거래를 시사하는 사례도 있다.

법의 지배와 인권 원칙이 확립되었다는 나라에서 발생하는 경찰과 법집행 공무원에 의한 인권침해 사례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구금자와 망명신청자에 대한 경찰의 가혹행위가 큰 사회문제로 비화하여 국가 차원의 고문방지 기구가 만들어졌지만 구체적인 행정지원의 미비로 제대로 가동되지 않고 있었다. 시위대에 대한 경찰의 과잉대응, 사설보안업체에 의한 구금자 가혹행위, 대규모 무차별 도·감청, 인권침해 국가에 대한 감시장비 수출, 트랜스젠더 시민의 프라이버시 등도 인권 현안으로 제기되어 있다. 미국이 주도했던 대테러 전쟁 와중에서 테러 용의자를 해외에서 불법구금, 심문했던 것에 독일 정보기관이 공조했다는 혐의도 실체가 있어 보였다.

내가 인상 깊게 여긴 관찰 중 몇가지만 소개한다. 첫째, 난민과 망명자 문제의 뿌리. 내국인들 사이에선 인권 원칙이 자리 잡았지만 외부인의 유입 앞에서 편견과 차별, 인종주의적 경향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인권은 모든 인간, 즉 국적을 뛰어넘어 적용될 때에 진정한 가치가 드러난다. 이런 점에서 독일은 국내 ‘시민권’ 달성의 정치에서는 성공한 사례이지만 보편 ‘인권’의 정치에서는 여전히 미흡한 면을 드러낸다.

둘째, 특히 구동독 지역에서 이런 문제가 심각한 이유가 무엇인가. 통일 독일 직후인 1992년부터 이미 구동독 지역에서 반이주민 시위·폭동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경제상황과 실업으로 인한 고통, 출구 없는 현실의 무력감, 희생양을 통해 불만을 표출하고픈 유혹, 외부인과 외부문화에 대한 막연한 불안, 그리고 구체제하에서 사회적 갈등을 민주적으로 표출하고 해결하는 훈련을 못해봤던 일상정치적 경험의 부재가 중요한 요인으로 지적된다. 이 점은 내게 많은 생각거리를 주었다.

셋째, 독일에서 인권은 주로 법적 권리와 법적 자격으로 이해되고 있다. 인권에서 법적 권리는 물론 대단히 중요하다. 법으로 뒷받침되지 않는 권리는 미사여구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인권에는 도덕적·규범적 포부의 차원도 있다. 성문화되지 않았더라도 인간의 내재적 가치에 근거하여 인권을 요구할 수 있고, 그런 인권도 존중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필자가 만난 대다수 독일인들은 인권을 법적 권리 중심으로 파악했다. 독일어의 개념적 특징일 수도 있고, 국가를 정점으로 한 체계적 공식화를 중시하는 성향 때문일 수도 있겠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넷째, 정치적 입장에 따라 인권을 대하는 대중의 태도가 뚜렷이 구분되었다. 보수 성향 시민과 보수정당 계열 정치인은 인권을 법의 지배, 공공질서, 치안과 연결시키며, 국내 인권 문제보다 해외 독재국가의 인권 문제에 주로 관심을 기울인다. 진보 성향 시민과 진보정당 계열(사민당, 녹색당, 좌파당) 정치인은 국내·국외 인권에 모두 적극적이고, 인권의 의제 확장에 찬성하는 경향이 있다. 바로 여기에 독일 인권운동의 딜레마가 있었다. 인권에 적극적인 진보세력을 든든한 우군으로 간주하면서도, 인권을 진보만의 배타적 담론으로 규정해서는 곤란하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인권이 현실적·결과적으로 진보 의제가 분명하지만 그것의 존재론적 출발점은 특정 이념이 아닌 이른바 ‘보편적’ 인간 존중 사상이기 때문이다. 독일의 인권운동은 진보-보수를 가로지르는 인권의 합의 영역을 넓히기 위해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 와중에 발생하는 긴장은 인권운동이 감당해야 할 숙명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국가인권위원장이라는 자리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조효제의 인권 오디세이

파리원칙은 인권위 구성에서 다원성을 특히 강조한다.인권엔지오, 노동조합, 인권을 염려하는 사회·직능단체, 철학과 종교의 흐름, 대학 및 전문가 등 제 세력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못박는다.우리는 어떤가. 상임위원과 비상임위원 11명 중 8명이 법률가·법학자다.

국가인권위는 고관 자리를 채우기 위해 만든 조직이 아니다. 민주화와 인권운동의 피와 희생으로 일궈낸 숙연한 결실이다.고통 앞에 중립 없다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을 책상 앞에 적어 놓고 매일 다짐해야 한다.

차기 국가인권위원장이 발표되었다. 시민사회에서 다음 위원장으로 어떤 사람을 어떻게 뽑으면 좋을지 논의중인데 대통령이 선출지명권을 휘둘러 위원장을 임명해버린 것이다. 내가 아는 한 인권 공동체와 아무런 상의가 없었다. 인권위원장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 자리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국가인권위는 세계 약 120여개 국가에서 운용하고 있는 제도다. 명칭도 다양하다. 국가인권위원회라는 이름을 가장 많이 쓰지만 다른 호칭도 흔하다. 역할도 나라마다 다르다. 법에 규정된 인권 사항의 침해 여부를 판정하는 역할, 행정부에 의한 권리침해 감시와 조사, 인권정책 개발, 국제법의 국내 적용, 인권교육, 대중계몽 등 여러 가지다.

유엔이 창설된 후 경제사회이사회는 1946년 각국에 인권 자료센터나 위원회를 만들 방안을 검토했다. 세계인권선언이 나오기 전의 일이다. 유엔인권위원회는 1978년 국가인권위원회의 구조와 기능에 관한 지침 초안을 마련해 각국 정부에 회람시켰다. 드디어 1991년 프랑스 파리에서 국제 워크숍이 열렸고, 여기에서 합의된 내용을 파리원칙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1993년 유엔총회가 파리원칙을 결의안으로 채택함으로써 이 원칙이 국가인권위원회 제도에 관한 유엔의 공식 입장이 되었다. 이 때문에 파리원칙은 전세계 국가인권기구를 판정하는 기준으로 간주된다. 같은 해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세계인권회의는 국가인권기구가 인권을 증진·보호함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선언했다.

여기서 볼 수 있듯 국가인권기구는 유엔 차원의 인권위원회를 각국에 설립한다는 취지에서 비롯되었다. 비유하자면 유엔의 인권 손오공을 세계 각국의 손오공으로 퍼뜨린 것이다. 따라서 국가인권기구의 ‘국가’(National)란, 국가(The State)라는 의미보다, 세계 각국에 퍼져 있는 보편적 인권기구, 즉 ‘각국별 국민인권기구’로 해석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관료적이고 권위적인 느낌이 드는 ‘국가’라는 뜻으로 이해한다. 바로 이 지점에 국가인권기구의 모순과 긴장이 있다.

파리원칙에 따르면 국가인권기구는 국가조직의 일부로서 국가 예산과 행정체계에 속하면서도 독립성을 지키도록 되어 있다. 국가, 시민사회, 시장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진 위치에 있어야 한다. 이와 동시에 국가와 시민사회를 잇는 가교 구실을 하도록 기대된다. 솔직히 이런 원칙은 이해하기 어렵고, 실행하기도 어렵다. 우리나라에서도 국가인권위를 민간 독립법인으로 만들자는 안이 나왔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실질적으로 법무부의 감독을 받게 된다는 우려 때문에 현재의 형태로 귀결되었다. 하지만 법무부의 통제에서 벗어났을진 몰라도 청와대의 입김에서 전혀 자유롭지 않으니 결과적으로 더 높은 차원의 통제를 받게 된 것이다.

원론적 질문을 던져보자. 국가인권위원회가 시민들 인권 향상에 얼마나 큰 기여를 할 수 있을까. 나는 인권위가 우리나라 인권 향상에 가장 큰 역할을 해주면 좋겠고, 또 그렇게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인권위가 만들어질 때 설립준비기획단이라는 기구의 말석에 참여했던 인연도 있어서 인권위에 개인적으로 애정이 적지 않다. 유능하고 헌신적인 직원들에 대해 좋은 인상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잠시 악마의 변호인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싶다. 설령 인권에 우호적인 정부가 있다 하더라도 국가인권위가 객관적으로 인권 향상에 어느 정도나 역할을 할 수 있는가.

욕먹을 각오를 하고 말한다. 최선의 상황에서도 10% 정도 되면 다행이다. 야박한 평가가 아니다. 지난 삼십년간 세계 학계에서 인권 향상을 위한 근본조건에 관한 실증적 연구가 많이 축적되어 왔다. 이런 연구들에 따르면 평화로운 국제질서와 같은 구조적 조건이 인권에 극히 중요한 구실을 한다. 국내 차원에서는 민주주의의 질과 수준, 헌정주의, 법의 지배, 공정하고 독립된 사법부, 민주주의 규범을 내면화한 시민들, 불평등이 적은 경제발전과 광범위한 복지 등이 인권을 발전시킬 수 있는 핵심 조건들이다. 여기에 더해 인권에 적극적인 정부나 지자체의 의지가 있으면 금상첨화다.

이러한 근본조건들이 90%를 차지하는 바탕 위에서 인권위원회가 나머지 10% 역할을 잘 해내면 인권이 향상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각종 사회문제를 인권으로 개념화하고, 법적 기본권 바깥의 도덕적 자연권 영역을 인권정책으로 보호하며, 시민들의 인권의식을 고취하는 역할이 그것이다. 요컨대 우리 사회의 여러 모순을 인권의 이름으로 형상화하는 데 있어 인권위가 구심체 역할을 해야 한다. 반대로 극단적인 가정을 해보자. 전쟁이 나고, 민주주의가 엉망이고, 헌법과 법의 지배는 증발하고, 사법부는 권력의 시녀가 되고, 이기적 시민들만 있고, 불평등과 빈곤에 복지는 최악인 상태인데 국가인권위원회만 아주 훌륭하다고 치자. 이때 시민들의 인권이 보장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실증적 비중이 이 정도라면 왜 시민사회에서 굳이 인권위원장 선출에 큰 관심을 갖는가. 국가인권위원회 제도에 도구적 기능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인권위의 숨은 기능, 즉 표출적 기능을 봐야 한다. 표출적 기능이란 제도의 명목상 기능과는 다른 차원에서 그 제도가 표방하는 규범이 수행하는 기능을 뜻한다. 국가인권위원회는 대한민국이 스스로 인권 가치와 동일시한다고 선언하는 징표 조직이다. 우리나라의 정체성이 독재나 권위주의를 거부하는 민주공동체임을 대내외적으로 상징하는 제도인 것이다. 표출적 기능으로 이해하면 인권위원회가 인권 향상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90% 이상이다. 인권위원장은 그 90%의 아이콘이다.

파리원칙은 인권위원회의 구성에서 다원성을 특히 강조한다. 인권엔지오, 노동조합, 인권을 염려하는 사회·직능단체, 철학과 종교의 흐름, 대학 및 전문가, 의회 등을 대표하거나 그들과 협력할 수 있는 제 세력이 인권위원회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못박는다. 우리는 어떤가. 2001년부터 이번까지 총 6명의 국가인권위원장이 임명되었다. 모두 남성이고, 전원 법률가나 법학자 출신이다. 한 사람만 빼고 서울대 법대 출신인 점도 동일하다. 선임 때의 평균 연령은 61.8살이었다. 이번 임명으로 상임위원과 비상임위원 총 11명 중 8명이 법률가·법학자로 채워지게 되었다. 다원성과 거리가 멀다. 인권위가 유사 법률기관 비슷하게 화석화될 위험을 지닌 구성이다. 이미 그렇게 되어 있다. 인권위의 권고문과 일반 법원의 판결문을 대조해 보라. 사용하는 용어, 법리적 전개 방식, 작성 형식, 어투 등을 분석해 보라. 작가 줄리언 반스의 말이다. “법률가와 이야기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법률용어를 쓰고 있다.” 살아 숨쉬어야 할 인권의 표출성이 법적 다툼의 문제로 기능화되어 버리면 인권위원회의 장기적 위상에도 악영향이 온다. 사법부의 을지로 출장소와 무엇이 다른가.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재차 강조하지만 인권은 그것의 도구적 기능과는 별도로, 사회적 고통을 인간 존엄성의 문제로 프레임 지을 수 있는 표출적 기능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장관급이니 차관급이니 하는 직위의식부터 지워야 한다. 국가인권위는 고관 자리를 채우기 위해 만든 조직이 아니다. 민주화와 인권운동의 피와 희생으로 일궈낸 숙연한 결실이다. 스웨덴 옴부즈맨실을 방문한 적이 있다. 네 명의 대법원 판사급 옴부즈맨과 직원 70여명의 조직에 관용차가 한 대도 없었다. 옴부즈맨이 자전거로 출퇴근하고, 차관급이 직접 커피를 타 오는 것을 내 눈으로 봤다. 소외된 사람들과 기꺼이 만나고, 시민사회의 신뢰를 받으며, 첨예한 인권이슈가 생기면 집회장에 나와 경청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의 인격들이 인권위를 채워야 한다. 일단 인권위에 들어오면 의식적으로 인권운동가의 정체성을 가지는 게 정석이다. 판관의 공정함보다 약자를 위한 편견이 요구되는 자리다. 고통 앞에 중립 없다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을 책상 앞에 적어 놓고 매일 다짐해야 한다. 법률 엘리트들, 정치적 편향이 심한 일부 인사들, 다원적 대표성을 결여한 인권위원장이 이런 행보를 보일 수 있을까. 큰 기대는 없지만 상상마저 하지 않기는 싫다.

‘기후변화, 절체절명의 인권문제’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조효제의 인권 오디세이

나는 기후변화가 21세기 인권침해의 주범 중 주범이라고 확신한다. 기후변화가 인류의 인권을 파괴할 규모와, 우리가 흔히 인권 운운하는 문제들의 규모를 비교해 보라. 침몰하는 타이타닉호에서 상차림을 걱정하는 격이다.

화석연료에 근거한 경제성장 패러다임에 찬성하는 사람을 좌우파를 막론하고 채굴론자라고 부른다. ‘채굴 대 반채굴’ 논쟁은 21세기 경제·정치·사회의 최대 이슈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인권운동은 어느 편에 서야 할까.

정확히 100일 뒤인 11월 말 프랑스 파리의 중심가에서 북동쪽으로 약 10킬로미터 떨어진 교외의 르부르제에 전세계의 이목이 쏠릴 것이다.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가 열리기 때문이다. 모든 나라의 정부 수반과 대표들, 반기문 유엔사무총장 그리고 프란치스코 교황까지 한자리에 모여 인류의 미래에 관해 엄숙한 논의를 벌일 예정이다. 파리총회는 사상 최초로 법적으로 구속력이 있는 보편적 기후변화 조처에 합의하려 한다. 인류의 미래를 지킬 수 있는 거의 마지막 기회라는 절박함이 팽배하다. 산업화 이전 수준에 비해 지구 온도 상승을 섭씨 2도 이내로 제한하려는 목표가 이미 비관적으로 되었고, 섭씨 4도 상승을 기정사실로 간주하면서 ‘적응’을 논하는 소리가 나오고 있는 미친 시대가 아닌가.

나는 환경 전문가가 아니지만 기후변화가 21세기 인권침해의 주범 중 주범이라고 확신한다. 기후변화의 결과도 결과이지만 강 건너 불구경하는 듯한 사람들의 태도는 그것 자체가 하나의 수수께끼이다. 기후변화가 인류의 인권을 파괴할 규모와, 우리가 흔히 인권 운운하는 눈앞의 문제들의 규모를 비교해 보라. 침몰하는 타이타닉호에서 테이블 상차림을 걱정하는 격이다. 인간의 지각능력은 문제의 규모를 비례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만큼 진화하지 못했다. 문제의 크기만이 아니다. 시간의 축이 조금만 길어져도 그 시급성을 인지하지 못한다. 기후가 정상 범위 내의 변화치를 완전히 벗어나 새로운 차원으로 옮겨가는 현상을 기후이탈이라 한다. 현재 비율대로 탄소 배출을 한다고 가정했을 때 가장 이른 예측치에 따르면 2033년부터 기후이탈이 시작된다. 올해 대학교에 입학한 새내기들이 마흔살이 되기 전이다. ‘문명사회의 특징과 부합되지 않는 세상’이 올 거라는 말도 나온다. 묵시록이 따로 없다.

환태평양의 섬나라들은 이미 이주를 시작했고, 개도국과 연안지역 주민들의 생계는 기후변화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 인구 2만1천명의 팔라우는 해수면 상승으로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 놓였다. 이들은 국제사법재판소에 국제법상 유권해석을 요청하는 이메일을 보내놓은 상태이다. 산업화된 선진국가들이 초래한 기후변화가 개도국 주민들의 인권을 유린했으므로 이는 일종의 내정간섭이며, 주권국가 원칙을 규정한 베스트팔렌 체제를 위반한 것이라는 논리이다. 어쩌면 기후변화협약에 의무조항이 신설되기 전에 기존의 국제법으로 선진국들이 제소당하는 사례가 나올 가능성이 있다.

기후변화의 효과가 한국에서 더욱 심각할 것이라는 연구도 있다. 국립환경과학원과 기상청이 발표한 ‘한국 기후변화 평가보고서 2014’를 보면 한반도 주변 해양의 온도 및 해수면 상승은 전지구적 평균에 비교해 약 2~3배 더 높을 것이라 한다. 폭염에 의한 서울 지역의 사망자를 예측하면 현재 수준은 인구 10만명당 0.7명 수준인데, 20년 뒤부터는 1.5명 사망 수준으로 2배 이상 증가할 것이라 한다. 부산지역의 경우 해수면이 1미터 상승할 경우 연간 약 4천억원의 경제적 손실이 발생할 것으로 추정된다. 그림 같은 해운대가 어떻게 변할지 한번 상상해 보라.

기후변화가 인권을 침해하는 범주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인간의 생명권을 침해한다. 생명권은 인권을 거론할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인 차원의 권리가 아니던가. 둘째, 건강권을 침해한다. 기후변화는 각종 전염병과 풍토병의 유형을 바꾸고 악화시킨다. 이상고온, 물 부족, 사막화, 산성화는 인간 심신의 평형을 교란한다. 셋째, 생계권을 침해한다. 식량안보가 위협받고, 농지가 유실되며, 흉작과 기근이 만연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자기결정권 침해, 생활수준 저하, 주거환경 악화, 문화의 질 하락, 재산권 침해, 교육환경 황폐화 등의 부정적인 영향도 확인된다. 기온이 상승하면 폭력과 갈등이 증가한다는 연구도 있다. 살인, 강간, 가정폭력과 같은 개인적 폭력, 그리고 집단간 폭력 및 정치적 불안정, 더 나아가, 사회제도 붕괴와 같은 재앙적인 결과가 발생한다. 우리가 무심코 에어컨과 자동차를 사용할 때 세계 어딘가에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씨앗을 뿌리고 있는 것이다.

전세계 인권운동은 최근 들어서야 기후변화를 가장 심각한 구조적 폭력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2007년 11월 몰디브제도의 수도 말레에서 인권운동가들이 발표한 ‘말레선언’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말레선언은 환경이 인류 문명의 인프라이고, 기후변화는 인류 공동체와 환경에 대한 즉각적·근본적·광범위한 위협이며, 모든 사람은 인간사회를 유지할 수 있는 환경에 대한 기본권이 있고, 기후변화는 인권의 온전한 향유에 대해 명백하고 즉각적인 함의를 지니며, 유엔의 인권 기구들이 기후변화가 인권에 주는 함의를 한시바삐 조사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기후변화의 구조적 폭력과 인권침해 사이에 이토록 명백한 연결고리가 있음에도 왜 지금까지 이것을 인권문제로 다루는 시각이 적었는가. 복잡한 이유가 있다. 우선, 기후변화가 주로 과학계에서 논의가 시작되어 그것의 생태적·환경적·경제적인 측면만 강조되는 경로의존성의 문제가 발생했다. 또한 기후변화 협상이 주로 합의에 근거한 복지적 해법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인권은 정의의 관점에서 해법을 추구하는 차이가 있다. 그리고 인권운동은 이미 발생한 구체적인 사실이 아닌, 가상의 시나리오로 프레임이 된 쟁점을 다루기 어렵다. 설령 기후변화의 인권침해를 다룬다 해도 그것을 주로 경제적·사회적인 권리로만 파악했으므로 전통 인권담론에서 그것을 제대로 이행할 방법을 찾기 힘들었다.

지구적으로 야기된 나라 바깥의 문제에 대해 법적 소재를 따지기 어려운 점도 한몫을 했으며, 피해에 대해 자국 내에서 법적·정치적 책임 소재를 묻기도 어렵다. 게다가 개도국의 경우, 기후변화에 따른 자연재해가 발생했을 때 인권법과 인권규범보다 인도적 구호와 지원을 시급한 조치로 인식하곤 한다. 법논리에 경도되어 있는 인권이 형식적·법적 정의에 주로 관심이 있다면, 인도적 행동주의에서는 실질적·정책적 정의를 추구하는 차이가 있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지금까지의 인권담론은 인권침해를 야기하는 뚜렷한 행위주체와 뚜렷한 피해주체가 설정되는 관계만을 인권문제로 파악했으므로, 모든 사람이 개입되는 시스템적인 인권문제, 구조화된 인권문제를 인권의제로 여기지 않았다.

정직하게 문제의 핵심을 따져 보자. 기후변화의 근본원인이 화석연료 사용과 온실가스라는 상식을 인정한다면, 화석연료 사용 자체를 정식 인권의제로 다루어야 하지 않을까. 전세계 석유 및 가스 회사들과 자원 보유국들이 이미 확보하여 채굴 계획을 완료해 놓은 화석연료의 탄소 총량이 2795기가톤이다. 외부의 개입이나 저지가 없는 한 이들 전체량이 확실히 개발되어 대기에 뿜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세계 환경운동과 사회운동에서는 화석연료의 채굴을 저지하려는 캠페인을 시작했다. 화석연료에 근거한 경제성장 패러다임에 찬성하는 사람을 좌우파를 막론하고 채굴론자라고 부른다. ‘채굴 대 반채굴’ 논쟁은 21세기 경제·정치·사회의 최대 이슈가 될 가능성이 높고, 인류의 생존과 멸망을 가르는 새로운 진보-보수의 전선이 될 것이다. 이 싸움에서 인권운동이 어느 편에 서야 할까.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스티븐 험프리스는 인권운동이 다음과 같은 활동을 당장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재 땅속에 매장되어 있는 원유 중 적어도 80퍼센트 이상을 채굴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 구체적이고 과단성 있는 조처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원유채굴의 금지, 단계적 폐지, 원유시추 일시 중지, 과잉생산에 대한 벌금, 그리고 불법화를 단행해야 한다… 세상에 이런 아이러니가 어디에 있는가. 기후변화와 같이 특별하고 실존적인 위협, 전지구적 차원의 위협이 인권의 달성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는데도 인권법, 인권 변호사, 전체 인권운동은 묵묵부답에 가깝고, 실제로 할 수 있는 일도 거의 없으니 말이다. 내 생각이 틀렸기를 바란다.” 이런 현실이 인권에 주는 끔찍한 함의를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불면의 밤을 뒤척여야 정상이 아닐까 한다.

유엔 인권 70년의 빛과 그늘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조효제의 인권 오디세이

1945년의 유엔헌장은 인권이라는 용어를 본격적으로 사용한 최초의 국제조약이었다. 이번달 24일이면 유엔 창설 70주년을 맞는다. 현대 인권이 어떻게 진화했는지, 어떤 성과와 한계가 있는지를 알고 싶으면 유엔 역사를 돌아보는 게 제일 빠르다.

그러나 성공담은 전체 그림의 절반에 불과하다. 유엔 덕분에 인권 유린의 주범인 전쟁과 내전이 줄었다고 자신 있게 말하기 어렵다. 유엔을 통한 인권 달성의 꿈은 여전히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

“국제연합 따위는 없다. 유엔본부 열개 층이 없어진들 눈곱만큼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존 볼턴의 말이다. “운명공동체인 인류가 오늘의 난국을 헤쳐가려면 유엔을 통해 단결하는 길밖에 없다.” 코피 아난의 말이다. 어느 쪽이 옳은가. 이번달 24일이면 유엔 창설 70주년을 맞는다. 현대 인권이 어떻게 진화했는지, 어떤 성과와 한계가 있는지를 알고 싶으면 유엔 역사를 돌아보는 게 제일 빠르다. 인권에 관해 2차대전 뒤 형성된 거대한 전지구적 지식-실행 체계의 큰 부분이 유엔의 지붕 아래에서 만들어졌다. 유엔의 모든 문헌 중 가장 유명한 세계인권선언으로부터 국제인권법 체계, 인권 기준 설정과 프로그램 등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려울 정도다.

1945년의 유엔헌장은 인권이라는 용어를 본격적으로 사용한 최초의 국제조약이었다. 전문 첫 단락에서부터 “기본적 인권, 인간의 존엄 및 가치, 남녀 및 대소 각국의 평등권에 대한 신념”이라고 선언하면서, 헌장 전체를 통틀어 인권을 일곱번이나 반복한다. 헌장을 만든 사람들이 특별히 인권친화적이던 것은 아니다. 샌프란시스코회의에 참석한 미국 대표단의 버지니아 길더슬리브라는 여성 위원이 강하게 주장하여 관철한 것이다. 그런데 인권이 이렇게 중요하게 취급되자 각국 정부가 심하게 반발하면서 ‘인권 대 주권’ 논쟁이 벌어졌다. 헌장 2조 7항에 내정불간섭 원칙을 넣기로 하여 겨우 봉합되었다. “이 헌장의 어떠한 규정도 본질상 어떤 국가의 국내 관할권 내의 사항에 간섭할 권한을 국제연합에 부여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모순된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하지만 지난 70년간 이 조항만큼 ‘상징적’으로 무효화돼온 조항도 드물다. 현재 국제인권조약 중 이주노동자협약을 제외하고 여타 주요 조약들에 가입해 비준한 나라들이 거의 90퍼센트에 이른다. 각 조약의 이행감시위원회는 가맹국 정부가 의무적으로 제출한 보고서를 심의한다. 개인청원 제도를 둔 조약일 경우 시민이 자국 정부를 유엔에 제소할 수 있다. 유엔인권이사회는 모든 나라를 대상으로 정례 인권검토를 실시한다. 특별보고관이 현지조사를 벌일 수 있고, 유엔총회가 직접 인권문제를 감독하거나 결의안과 보고서를 채택한다. 심각한 상황에서는 안보리의 개입과 제재도 가능하다. 겉으로만 보면 이제 193개 유엔 회원국이 릴리퍼트 소인국에서 온몸이 묶인 걸리버 같은 신세가 된 듯하다. 여성 권리와 젠더 평등이 이 정도나마 진전한 것은 유엔의 공이 크다. 종전 뒤 신생국들의 자결권 확보 과정에서도 유엔은 큰 기여를 했다. 처음 51개국으로 시작하여 거의 네배 가까이 회원국이 늘어난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그러나 성공담은 전체 그림의 절반에 불과하다. 유엔 덕분에 인권 유린의 주범인 전쟁과 내전이 줄었다고 자신 있게 말하기 어렵다. 유엔 창설 이래 전세계에서 크고 작은 전쟁이 250개쯤 발생해 5천만명 이상이 죽었다. 냉전 당시 유엔의 중요 행위자이던 미국과 소련이 후원한 지역적 무력갈등이 얼마나 많았는가. 헌장의 주요 목표인 집단안보 체제는 아직도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콩고, 캄보디아, 옛 유고, 르완다, 리비아, 시리아에서 벌어진 제노사이드와 대량학살에서 유엔은 대체로 무기력했다. 국제형사재판소에 큰 기대를 건 사람들에게 아직까지 무릎을 치게 만드는 성과가 나오지 않았다.

오늘날 인권 보호의 백미로 꼽히는 국제인권법 시스템은 어떤가. 과거 국제인권운동은 각국이 국제인권조약에 가입할수록, 그리고 국가들을 국제법 메커니즘 속에 묶어둘수록 인권이 더 잘 개선될 것이라고 가정했다. 인권운동에서 국제인권조약 비준 캠페인은 핵심적인 활동이었다. 그러나 국제인권법이 구체적으로 얼마나 인권을 개선했는지를 놓고 격론이 벌어지고 있다. 인권조약 가입과 실질적 준수 사이에 상관관계 혹은 인과관계가 성립하는지에 관해 방대한 실증적 연구가 축적되었다. ‘없는 것보다는 낫지만, 기대한 바에는 못 미친다’는 잠정적 결론이 내려져 있다. 역설적이긴 하나 국제인권법이 발전할수록 인권 개선의 구체적인 효과보다 인권의 규범적인 영향이 더 커지는 것 같다. 인권문제를 법과 제도로 해결하려는 노력도 계속해야겠지만, 그에 앞서 인권의 바탕을 이루는 정치, 경제, 이념, 사회구조, 대중심리, 국제관계, 민주주의 수준 등의 ‘펀더멘털’이 훨씬 중요하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전통적으로 인권 사안은 총회와 경제사회이사회의 소관으로 여겨졌다. 과거 유엔인권위원회는 경제사회이사회에 속해 있었고, 현재 유엔인권이사회는 총회 직속으로 되어 있다. 인권최고대표는 사무총장에게 보고하는 자리다. 그러나 냉전 종식 후 인권, 안전 보장 및 평화 구축의 문제가 서로 톱니바퀴처럼 물려 있음이 드러나면서 안전보장이사회가 인권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특히 제노사이드, 내전, 학살 같은 사건은 안보리의 결정으로 기본 뼈대가 정해지기 마련이다. 유감스럽게도 안보리 상임이사국들이 대규모 인권침해 사태 때 강대국으로서 리더십을 제대로 발휘한 경우가 드물다. 전세계 인구의 23퍼센트도 안 되는 5개국이 정략적 이유로 거부권을 휘두르며 인류 평화를 좌우하는 희비극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작금의 시리아 사태도 이런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안보리 개혁은 인권에서도 아주 중요한 문제가 되어 있다.

한국이 1991년에야 유엔에 가입한 것이 우리 사회의 국제관과 인권담론에 미친 영향이 적지 않다. 지난 70년간 신생 개도국들을 포함한 국제사회가 유엔 내에서 보편 인권을 확장해온 과정에 뒤늦게 참여한 까닭에 우리의 국제인권 인식은 얕고 옅다. 예를 들어, 1976년 국제인권규약이 발효되었을 때 유엔 가입 국가가 147개였다. 규약 1조를 보라. “모든 인민은 자결권을 가진다. 이 권리에 기초하여 모든 인민은 그들의 정치적 지위를 자유로이 결정하고, 또한 그들의 경제적, 사회적 및 문화적 발전을 자유로이 추구한다.” 거의 모든 나라가 탈식민적이고 수평적인 유엔식 인권담론을 상식으로 수용하고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생경한 해외 뉴스로만 전해 들었다. 분단 문제를 고민하면서도 그것을 한반도의 특수 상황이나 미-소 대결의 지정학적 차원에서 파악했지, 국제사회의 전반적 인권 흐름의 차원에서 논의할 기회를 거의 갖지 못한 것이다. 한국인들이 미국 중심의 세계관과 국제감각을 갖게 된 것, 그리고 한반도의 표준시와 세계사의 표준시가 크게 어긋나게 된 이유가 여럿 있겠지만, 유엔 인권 경험이 일천하다는 것도 하나의 원인이 아닐까 한다.

유엔과 인권을 논할 때 자주 등장하는 이슈가 있다. 유엔의 인권담론이 일반 대중과 동떨어진 전문가들의 전유물이 되었다는 비판이다. 이것은 모든 전문 지식체계에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비판이긴 하나, 인권처럼 개개인의 실존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경우엔 치명적인 결함이 될 수 있다. “유엔 창설 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인권은 유엔 안에서 자기만의 갇힌 세계를 구축한 것처럼 보인다. 인권은 자체적인 기준, 제도, 메커니즘을 갖춘 시스템, 전세계 모든 인간의 일상적 삶과 내재적으로 연결되지 못한 자기만의 시스템이 되어버렸다.” 네덜란드의 국제법학자 하이 포르트만의 솔직한 고백이다. 인권의 전문적 체계와 언어, 그리고 풀뿌리 현장의 대중을 연결할 수 있는 어떤 문화적·운동적 매개가 절실하게 요구된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콩고 내전을 해결하려다 비행기 사고로 타계한 유엔 초대 사무총장 다그 함마르셸드가 한 말이 있다. “유엔은 인류를 천국에 데려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옥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유엔이 탄생할 무렵 지구 성층권에는 두달 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핵폭탄의 방사능 낙진이 여전히 떠돌고 있었다. 그 뒤 지금까지 3차대전이 일어나지 않았고 핵전쟁도 없었다는 점으로만 본다면 인류가 지옥에 빠진 것 같진 같다. 그러나 유엔을 통한 인권 달성의 꿈은 여전히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 외견상 근사한 국제적 얼개의 내용을 채우는 일,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우리 힘으로 이룰 수밖에 없다.

인권 인문학 소묘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조효제의 인권 오디세이

인권은 시대마다 인간의 평등한 가치와 존엄이라는 출발점으로 돌아가 본질적인 논쟁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인문학적 사유, 비판정신, 상상력의 도움이 절실하다. 인권에서의 ‘인간’이 법적 인격(person)이 아닌 휴머니즘 전통의 인간(human)으로 표현된 점도 곱씹어봐야 한다.

인권이라는 주제를 놓고 다양한 인문학적, 사회과학적 접근이 가능하다. 인권은 철학으로, 역사학으로, 예술적 감성의 문제로, 정치학으로, 경제학으로, 사회학이나 인류학으로 접근할 수 있다. 인문학적 접근이 인권을 풍요롭게 하는 것만큼이나 인권이 인문학의 어떤 측면에 빛을 밝혀 줄 수도 있다.

요즘 인권 인문학이라는 말이 자주 들린다. <인문학이 인권에 답하다>(박경서 외)라는 책까지 나왔다. 인권 관련 모임이나 강연회 같은 데서 인문학과 인권을 조합한 주제를 내거는 경우가 종종 보인다. 인권을 인문학으로 접근하려는 움직임이 대학 커리큘럼에 반영되면서 상당수 대학에서 이미 넓은 뜻의 인문학 관련 과목으로서 인권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외국에서도 이런 움직임이 있다. 예를 들어, 오스트레일리아의 모내시대학에는 인문학에 바탕을 두고 인권을 주전공 혹은 부전공으로 공부할 수 있는 제도가 있다. ‘인권학 학사’라 하면 얼핏 낯설게 들리겠지만 잘 생각해보면 상당히 흥미로운 시도다. 인권만큼 인문학 그리고 사회과학의 학제 간 연구에 적합한 분야도 없기 때문이다.

인권에서 인문학적 접근이 필요한 이유는 인권이 무척 불확정적이고 맥락의존적인 주제이기 때문이다. 아마 나를 포함한 대다수 인권론자들은 간단명료한 정의관으로 선악이 확실히 구분되는 세상을 원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기대와는 달리 현실은 복잡하고 역설적이며 골대가 계속 움직이는, 부조리한 축구경기와도 같다. 아무리 엄밀한 용어로 못박아둔 인권조항이라 해도 시대와 환경이 바뀌고 사람들의 인식이 변하면 얼마든지 새로운 해석과 주장과 왜곡이 등장하곤 한다. 세계인권선언의 앞쪽에 나오는 노예 조항을 보라. “어느 누구도 노예가 되거나 타인에게 예속된 상태에 놓여서는 안 된다. 노예제도와 노예 매매는 어떤 형태로든 일절 금지된다.” 문자적으로 이보다 더 명명백백한 규정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21세기 들어 인간을 상품화하거나 사회적·심리적으로 속박하는 것을 인권침해가 아니라고 강변하고, 더 나아가 자발적으로 예속을 선택할 ‘자유’를 생계권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일까지 나타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세계인권선언의 조항을 아무리 외쳐본들 자칫 꼰대 취급을 받기 십상이다. 이 때문에 인권은 시대마다 인간의 평등한 가치와 존엄이라는 출발점으로 돌아가 본질적인 논쟁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인문학적 사유, 비판정신, 상상력의 도움이 절실하다. 인권에서의 ‘인간’이 법적 인격(person)이 아닌 휴머니즘 전통의 인간(human)으로 표현되어 있는 점도 곱씹어봐야 한다.

인권이라는 주제를 놓고 얼마나 다양한 인문학 그리고 사회과학적 접근이 가능한지 짚어보자. 우선 인권은 철학으로 접근할 수 있다. 인간의 가치기준을 어디에 둘 것인가, 인간 존엄성의 도덕적·윤리적 기초가 무엇인가. 이런 질문에 철학만큼 잘 답할 수 있는 사유체계도 없다. 인권은 역사학으로 접근할 수 있다. 근대 시민권이 어떻게 형성되었나, 헌법의 기본권이 어떻게 유린되었나, 시민들의 자유는 어떻게 쟁취되었나, 인권을 억눌렀던 독재시대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런 질문 없이 몰역사적이고 정태적이고 이론적으로만 인권을 배울 순 없다. 인권은 예술적 감성의 문제로 접근할 수 있다. 서경식의 말을 들어보자. “국가권력은 (가부장제나 상업주의 권력까지도) 사람들의 감성 밑바닥까지 침투해 통제하려고 하는 법이다. 바로 그 때문에 개개인의 존엄이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감성의 차원에서 권력으로부터 독립할 필요가 있다.” 인권은 정치학으로 접근할 수 있다. 기본권으로 보장된 인권은 결국 정치인들이 입법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기 때문에, 그리고 기본권으로 보장된 인권조차 정치적 의지나 대중의 지지가 없으면 휴지 조각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인권은 경제학으로 접근할 수 있다. 경제·사회적 권리를 위한 부의 재분배를 경제학에서는 어떻게 보는가, 재산권을 기초로 형성된 자본주의 원칙과 사회권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할 수 있는가. 토마 피케티는 프랑스혁명의 인권선언 정신을 불평등 연구의 중심축으로 삼고 있다. 인권은 사회학이나 인류학으로 접근할 수 있다. 왜 인권침해가 무작위로 발생하지 않고 특정 계급과 특정 계층에서 더 많이 발생하는가, 친족관계로 얽힌 전통사회에서 발생한 집단학살의 문제를 이념적 잣대로만 판단할 수 있는가. 이런 문제를 국가의 실정법으로만 해결하려는 태도는 극히 부분적인 접근에 불과하다.

인권의 창을 활짝 열고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새바람을 들어오게 하는 것은 인권의 존재론적이고 해석학적인 이해에 큰 도움이 되지만, 넘어야 할 도전도 적지 않다. 인권을 인본주의 관점에서 본다고 할 때 아주 깊은 차원에서 인간 실존과 고통의 다의성, 복합성, 불확정성, 그리고 역설을 이야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권침해를 최전선에서 방어하고 있는 인권운동가들에게 이런 식의 접근은 한가로운 음풍농월처럼 들릴 소지가 적지 않다. 지금 여기에서의 현실은 한없이 무자비하고 역겹도록 불합리하며 분초를 다투는 시급함 그 자체인데 어찌 다의성이니 복합성이니 하는 사변적 유희를 즐길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우려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인본주의의 비판적 상상력을 극대화하여 인권적 정의를 위한 우군으로 삼는 데 있다.

미국 연방대법원이 1984년에 다룬 사건이 있다. 문서위조, 은행강도 등으로 실형을 살던 파머라는 수감자가 감방을 강압적으로 압수수색한 교도관 허드슨에게 제기한 소송이었다. 파머는 수색이 자신에게 굴욕감과 고통을 안겨주기 위해 실시되었으므로 부당한 수색·체포를 금하는 연방헌법 수정조항 4조, 적법절차를 규정한 14조를 위배했다고 주장했다. 대다수 판사들이 파머의 주장을 기각했지만 존 폴 스티븐스 대법관은 반대의견을 냈다. 그는 편지나 사진과 같이 사소해 보이는 개인 물품이 “한 죄수의 인간 존엄성과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위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상상함으로써 파머의 독자성과 개별성”을 인정했다. 스티븐스 판사는 “죄수와 다른 시민들의 차이를 인지하면서도 동시에 그 둘을 잇는 공통된 인간의 관심, 이를테면 가족, 집에 대한 추억, 자기 개선 등에 대한 염려 등을 인식하는 방식으로 그의 권리를 포용”했다고 한다. 마사 누스바움은 <시적 정의>(박용준 옮김)에서 이 에피소드를 소개하면서 스티븐스 판사가 헌법 해석만이 아니라 문학적인 ‘분별 있는 관찰자’적 시각으로 법리를 전개할 줄 알았다고 높이 평가한다. 인본주의의 비판적 상상력과 인권존중이 조화를 이룰 수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할 만하다.

인문학적 접근이 인권을 풍요롭게 하는 것만큼이나 인권이 인문학의 어떤 측면에 빛을 밝혀줄 수도 있다. 인권 사례는 통상적 인문학에서 찾을 수 없는 현실의 화급성과 즉각성을 증언할 수 있는 통로를 제공한다. 인권의 맥락에서 철학, 종교, 역사, 예술을 논할 때 인문학은 실제 정치, 사회, 도덕상의 예민한 쟁점을 다룰 수 있는 살아 숨쉬는 인문학으로 승화될 수 있다. 또한 인권의 도움을 받으면 존엄이니 가치니 정의니 하는 추상적 쟁점에 부합되는 형상화된 실체를 보여주거나 서사적 예화를 제시할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재구성된 인문학은 현실 삶의 고통과 모순과 복합성에 눈을 뜨게 해주고, 불명확한 사회 상황을 나름대로 평가하고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용기 있는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인권 인문학은 우미한 교양으로서의 인문학만이 아니라, 현실 삶을 인문학적 관점에서 준비시키는 실전 인생론이 될 수도 있다. 특히 인권 인문학을 통해 인간을 이해하게 된 학생이라면 법, 의료, 저널리즘, 문예창작, 국제관계, 정치, 국제이해교육, 사회복지, 기업사회공헌, 국제개발 등의 영역에서 독특한 시각을 갖춘 인재로 성장할 잠재력을 갖춘 셈이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이런 통찰은 모든 인권 지지자들에게 적용될 수 있다. 이성적으로 인권의 논리를 추구하기 위해서라도 공상과 공감, 휴머니티를 위한 능력을 갖추는 게 좋다. 그런 능력이 없으면 “정의를 통해 말할 수 있기를 추구했던 ‘오랫동안 말이 없던’ 목소리들은 침묵 속에 갇힐 것이며, 민주적 심판의 ‘태양’은 그만큼 장막에 가려질 것”이라고 누스바움은 경고한다. 인권은 시적 정의의 세례를 받을 필요가 있고, 인문학은 고통 앞에 중립적이지 않은 인권의 정신을 타투처럼 새겨야 한다.

이심전심과 인권유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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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조효제의 인권 오디세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궁극적 책임이 일본 ‘국가’가 아니라 ‘업자’들에게 있다는 전제는 한마디로 철없는 시각이다. 기본에 속한 문제가 왜 계속 논란이 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인권유린이 발생하는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위임과 책임회피’설은 아주 오랜 역사를 지닌 학설이다.

국가의 인권탄압을 연구할 때 흔히 국가를 최종 의사결정자이자 실행자로 상정하곤 한다. 그러나 국가는 심대한 인권유린을 저지를 때 스스로 궁극적인 행위주체가 아닌 것처럼 변신하는 경우가 있다. 국정원의 ‘꼬리 자르기’가 좋은 보기다.

최근 <제국의 위안부>라는 책을 둘러싸고 논란이 가중되고 있다.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당한 저자에 대해 검찰이 불구속 기소를 했다. 한·일 양국에서 다양한 대응이 나왔다. 한국 쪽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다. 양쪽 다 학문과 표현의 자유를 법으로 다스리는 것에 반대한다. 타당한 입장이다. 한쪽에서는 내용상 동의 못할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학문과 표현의 자유가 원론적으로 중요하다는 데 방점을 두는 것 같다. 다른 쪽에서는 이 논쟁이 형식적 자유의 옹호에만 그쳐서는 안 된다고 본다. 사안이 너무 무겁고 그 함의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읽어보지 못했지만 이 책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궁극적 책임이 일본 ‘국가’가 아니라 ‘업자’들에게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고 한다. 한마디로 철없는 시각이다. 기본에 속한 문제가 왜 계속 논란이 되는지, 인권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이해하기 어렵다. 인권유린이 발생하는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이론 중 ‘위임과 책임회피’설이 있다. 아주 오랜 역사를 지닌 학설이다.

잉글랜드에서 1170년에 있었던 사건이다. 헨리 2세 국왕은 자신의 즉위를 도왔던 성직자들을 파문한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베킷에게 엄청난 적개심을 품었다. 왕은 신하들 앞에서 펄펄 뛰며 소리친다. 여러 버전이 있지만 다음이 제일 유력하다. “일개 미천한 성직자로부터 주군이 능멸당하도록 내버려둔 형편없는 태만자들과 반역자들을 왕실이 키운 꼴이로다!” 이 말을 거사 명령으로 알아들은 기사 네 명이 캔터베리 대성당으로 쳐들어가 제대 앞에서 대주교를 살해하기에 이르렀다. 두개골을 부술 정도로 유혈이 낭자한, 백주의 테러였다. 이 소식을 접한 헨리 2세의 반응이 흥미롭다. 그는 “오호통재라…”며 탄식하고 자신의 발언이 ‘뜻하지 않게’ 대주교의 피살로 이어졌다고 자책한다. 보속의 표시로 거적을 뒤집어쓰고 머리에 재를 얹고 사흘간 식음을 전폐했다. 사건 주범들이 교황으로부터 처벌받는 것에도 동의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역사가들은 헨리 2세의 진의에 회의적인 시선을 보낸다. 자신은 화만 냈는데 아랫사람들이 ‘오버’해서 저지른 잘못이므로, 슬프긴 하나 전혀 의도되지 않은 결과였다고 하는 건 가소로운 책임회피에 가깝다고 보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실을 논할 때 문제의 핵심을 부분적 ‘팩트’로 비틀어버리는 시도가 자주 있었다. 아프리카인들을 끌고 갔던 대서양 노예무역에서 현지 부족장들과 중개상들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고, 그러므로 백인 무역상들만 전적으로 비판할 순 없다고, 그러므로 노예무역의 책임은 백인과 아프리카인들이 나눠 져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보라. 나무를 정밀묘사함으로써 숲의 전체 모습을 바꿔치기하는 교묘한 조작이다. 20세기로 와 보자. 홀로코스트 부인자들은 흔히 히틀러가 직접 서명한 명령문서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홀로코스트가 나치의 청사진에 의한 행위가 아니었고, 상황에 따른 임기응변식 대응에 불과했고, 히틀러에게 직접 책임을 물을 수 없고, 그러므로 홀로코스트는 비극이긴 하나 의도적으로 자행된 반인도적 범죄로 볼 순 없다고 말한다. 이런 궤변들에 대해 역사학이 마련해 둔 격언이 있다. “증거의 부재는 부재의 증거가 아니다.”

국가의 인권탄압을 연구할 때 흔히 국가를 최종 의사결정자이자 실행자로 상정하곤 한다. 그러나 국가는 심대한 인권유린을 저지를 때 스스로 궁극적인 행위주체가 아닌 것처럼 변신하는 경우가 있다. 1982년부터 2007년 사이 전세계적으로 관변 비공식 민병대에 의한 인권유린을 조사한 연구가 있다. 국가가 비공식 민병대에 인권유린을 ‘위임’하는 정황을 파헤친 것이다. 정치·행정·경영 등에서 과업을 위임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상관이 과업에 대한 구체적 지식이 없거나, 시간과 여력이 없을 때 그 시행을 부하에게 맡기는 행위다. 그런데 과업을 위임할 때 나타나는 문제가 있다. 첫째는 정보의 비대칭성. 부하가 특정 과업과 관련해 상관이 알지 못하는 구체적이고 상세한 정보를 가지고 있을 때 정보의 비대칭 현상이 일어나 상관이 업무 내용을 완전히 파악하기 어렵게 된다. 둘째, 상관과 부하의 목표의 상이성. 과업을 위임받은 부하가 상관의 원래 뜻과는 다른 목표를 가질 때 나타나는 문제다. 따라서 전통적 위임이론에서는 과업을 부하에게 위임할 때 상관이 부하를 신뢰할 수 없거나, 통제하기 어려운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그러나 인권유린에 있어선 과업위임의 문제점이 180도 뒤집어진다. 비공식 민병대에 인권유린이라는 과업을 위임할 경우, 과업위임의 결함이 오히려 장점이 되어 버린다. “지시자는 악명 높은 폭력배를 의도적으로 끌어들인 후, 그들에 대한 통제권을 잃는 것이 아니라 고의적으로 통제권을 포기해 버린다. (…) 그리고 지시자는 이행자의 은밀한 행동으로부터 전략적 이득을 취하면서도 그들과 거리를 둘 수 있다.” 이것을 인권학에서는 지시자-이행자의 문제라고 한다.

인권유린의 과업위임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짚어보자. 우선, 모호하지만 함축성과 방향성이 있는 지시. 흔히 우국지정과 현 상황의 개탄으로 이루어진다. “저자들이 참으로 문제야. 이대로 가면 우리 민족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 참으로 걱정이로다.” 또한 지시를 내리는 측의 구체적 과업 내용에 대한 의도적 불인지와 무지. 이때 정보의 비대칭성이 편리한 자산으로 둔갑한다. “알고 싶지 않고 알 필요도 없으니 마음대로 하라. 보고도 하지 마라.” 이행자 입장에서 지시 내용의 편의적인 해석. “분명 제거하라는 말씀이시군.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우리 마음대로 하면 되겠네.” 어쨌든 확실한 결과의 도출. 공식 지휘체계에 따르지 않은 인권유린 위임일수록 자의적이고 무제한적이고 최소한의 절차도 갖추지 않은 참혹한 결과를 낳기 쉽다.

위임된 인권유린은 공식 채널에서도 나타나곤 한다. 어쨌든 위임된 인권유린이 발생하면 지시자는 반대파를 탄압할 수 있으므로 권력을 유지할 수 있고, 권력에 따르는 모든 혜택을 누리면서도 그러한 폭력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 국내·국제적 비난과 제재를 피할 수도 있다. 인권유린을 직접 자행하는 국가로 낙인찍히는 것보다 차라리 무능한 국가로 눈총받는 편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야 나중에 책임을 추궁당할 때 ‘금시초문’이라고 발뺌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그럴듯한 부인 가능성(plausible deniability)은 부하나 비공식 주체에 의한 인권유린에 대해 지시자가 책임을 부정할 수 있는 핵심적 기제가 된다. 국정원의 ‘꼬리 자르기’가 좋은 보기다.

인권유린의 과업위임은 우리에게 여러 함의를 제공한다. 첫째, ‘의도성’의 신화. 인권유린에 의도성이 있었는가를 따지는 것 자체가 무망하다. 뚜렷한 규범적 기준이나 의지가 애초 없었을 경우, 본인이 인권탄압의 팩트에 대해 전혀 다르게 인식하곤 한다. 가치관에 따라 사실 자체가 다르게 구성되기 쉽다는 말이다. 둘째, ‘부인’하는 기제가 매우 중층적이다. 최근 중요해지고 있는 인권의 사회심리적 연구에 따르면, 부인은 사건 후에 그것을 부정하는 거짓말만이 아니다. 인권유린자는 사건을 저지르기 전부터 그 의미를 스스로 비틀고 부인해 놓고 행동에 착수하기 쉽다. 이때 사후 부인은 사전 부인의 자연스럽고 논리적인 귀결이 된다. 셋째, 비가시적인 사실이 오히려 더 중요할 때가 많다. 상식, 직관, 양지(良知)로 파악할 수 있는 통찰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사회일수록 문명의 외양을 띤 비문명 사회에 불과하다. 넷째, 과업이 위임되어 발생한 인권유린을 철저히 법적·기술적으로만 접근할 때 역설적으로 인권유린의 궁극적 책임자에게 면죄부를 줄 가능성이 커진다. 법률적으로 책임 소재를 밝히지 못하게 할 목적으로 애초 고안된 장치이기 때문이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결론을 내자. 인권은 사실관계를 넘어선 어떤 전일적 조건의 충족을 요한다. 역사의식의 공유, 교육, 정치력, 시민사회의 압력이 정답에 가깝다.

지속가능발전과 인권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조효제의 인권 오디세이

새천년개발목표는 유엔의 야심찬 기획이었고 일정 부분 성과가 없지 않았지만 근본적인 한계를 지녔다. 가장 결정적인 결함은 인권의 관점이 크게 미흡했다는 데 있었다. 민주주의, 참여, 인권을 뒷전으로 물린 채, 위에서 아래로 주어지는 모델로서의 발전 목표를 답습했던 것이다.

지속가능발전목표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우선 인간과 지구와 생태가 다 같은 운명공동체임을 인정해야 한다. 또한 물질적 조건의 확보, 발전, 그리고 인권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더 나아가, 지속가능발전은 우리 시대의 정언명령으로 새겨야 한다.

새해 벽두에 지난가을 유엔정상회의에서 채택되었던 <우리 세계의 전환>을 읽었다. 아마 ‘지속가능발전을 위한 2030 의제’라는 부제로 더 잘 알려진 문서일 것이다. 왜 하필 이런 글을 골랐던가. 올해 1월1일부터 향후 15년간 인류가 나아갈 목표를 제시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아직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지만 세계적으로는 이미 2030년을 향한 대장정이 시작되었다. 되도록 많은 사람이 이것을 읽고 새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국제협력단(코이카)이나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번역하여 널리 보급하면 어떨까 싶다. 작년 발표된 프란치스코 교종의 환경회칙 <찬미 받으소서>는 이미 번역이 나왔다. 이 둘을 읽고 토론하는 독서모임이 전국 방방곡곡에 퍼지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한 가지 단언할 수 있다. 앞으로 거시 경제정책이든, 학교와 대학의 커리큘럼이든, 국제연대나 국제활동이든 간에 지속가능발전이라는 화두를 빼고 유의미한 내용을 채우기가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 나는 당장 봄 학기부터 수업에서 이 문헌을 가르칠 예정이다.

인류가 구체적으로 경험한 근대성의 표상은 개발 또는 발전이다. 필립 맥마이클이<거대한 역설>에서 지적했듯 개발의 역사는 식민지배와 수탈로 시작되어 제3세계 신생국들의 정책으로 추진되다가, 지구화 프로젝트로 변질된 후, 최근 들어 지속가능 시대로까지 변천해왔다. 따라서 <찬미 받으소서>와 <우리 세계의 전환>은 인류가 지속가능한 발전을 추구할 수밖에 없고, 또 그렇게 해야만 하는 목전의 현실인식과 규범적 당위를 동시에 보여준다. 지속불가능한 생산과 소비체계, 화석연료, 성장 만능의 경제관념은 이제 패러다임적으로 퇴출 0순위에 속한 썩은 동아줄이다. 우리가 때를 놓치지 않고 새 동아줄로 갈아탈 수 있을까. 거대한 배의 방향을 돌리려면 엄청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기존의 발전 모델을 바꾸려면 익숙한 시스템, 달콤한 습관, 관성적 경로 의존, 기성체제의 인지적 세계관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한 정치적·개인적 결단, 예컨대 혹성탈출과 같은 강력한 의지가 있어야 한다.

지속가능발전목표(SDG)는 21세기 초부터 작년 말까지 진행되었던 새천년개발목표(MDG)의 후속탄이다. 새천년개발목표는 유엔의 야심찬 기획이었고 일정 부분 성과가 없지 않았지만 근본적인 한계를 지녔다. 기초욕구라는 개념에 입각하여 8개 영역에서 일반목표를 설정했지만 이 목표들이 서로 내적 연관성을 갖지 못한 채 제각기 나열식으로 추진되었다. 그리고 각 영역에서 최소한의 정량적 목표치를 설정했지만 결과적으로 그 목표가 달성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또한 최저선을 끌어올리겠다는 목표였으므로 주로 개발도상국에만 해당되는 것이었다. 왜 우리나라에서 새천년개발목표가 겉핥기로만 소개되었는지 짐작이 가는 부분이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결함은 인권의 관점이 크게 미흡했다는 데 있었다. 민주주의, 참여, 인권을 뒷전으로 물린 채, 위에서 아래로 주어지는 모델로서의 발전 목표를 답습했던 것이다. 국제개발 현장에서 흔히 일어나는 문제이지만, 주민 스스로의 참여와 결정에 기반을 둔 민주적 발전 모델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번에 나온 지속가능발전목표는 만족할 수준은 아니지만 새천년개발목표의 한계를 넘어서려 한 흔적이 많이 보인다. 우선 유엔 스스로가 인정하듯 준비 과정에서 유엔 역사상 가장 광범위하고 철저한 협의와 공론화 과정을 거쳤다. 전세계 시민사회의 목소리가 이처럼 많이 담긴 문헌도 잘 없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특징을 가졌는지 정리해보자. 첫째, 지속가능발전목표는 개도국만이 아니라 전세계 모든 국가가 추구해야 할 목표를 제시한다. 이른바 보편적 접근인 것이다. 그것을 위해 17개 목표와 169개 대상영역을 제시한다. 17개 목표는 빈곤 퇴치, 기근 추방, 건강과 웰빙, 양질의 교육, 젠더 평등, 깨끗한 물과 위생시설, 저렴·청정 에너지, 양호한 일자리, 산업 혁신과 인프라, 불평등 완화, 지속가능 도시, 책임 있는 소비와 생산, 기후변화 행동, 해양수산 자원 보존, 지표면 보존과 생물 다양성, 공정하고 평화롭고 포용적인 사회, 목표 이행을 위한 전지구적 동반자 관계 등이다. 이 목표들은 우리나라에도 해당되고, 반드시 달성해야 할 의제다.

둘째, 지속가능발전목표는 전통적 개발 패러다임을 넘어 변혁적 관점을 강조한다. 이 목록들이 단순히 경제발전을 통한 물질적 개선을 넘어 ‘5-P’에 바탕을 둔 근본적 의제라는 것이다. 사람(people), 지구(planet), 번영(prosperity), 평화(peace), 동반자관계(partnership)를 전일적으로 추구하며, 기존의 시스템을 넘어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비전이다. 셋째, 인권의 총체성을 강조하는 목표다. 이 점이 지속가능발전목표를 인권친화적 문헌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전문에서부터 “모든 사람의 인권을 실현”해야 한다고 전제하고, 세계인권선언과 국제인권조약의 중요성을 여러 차례 강조한다. 비전을 다룬 8조는 “인권과 인간존엄, 법의 지배, 정의, 평등과 불차별을 보편적으로 존중하는 세상을 꿈꾼다”고 담대하게 선언한다. 17대 목표 중 결론에 해당하는 16대 목표를 보자. “지속가능발전은 평화와 안보 없이 실현될 수 없으며, 지속가능발전이 없을 때 평화와 안보는 위험에 처한다. 새로운 발전의제는 정의에 대한 평등한 접근성을 제공하고, 인권(발전권 포함) 존중에 기반을 둔 평화롭고 공정하고 포용적인 사회를 건설해야 할 필요성을 인정한다.”

넷째, 지속가능발전을 위해 평등과 반차별이 모든 발전의 핵심에 자리잡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모든 나라가 “인종, 피부색, 성, 언어, 종교, 정치적 혹은 여타 견해, 민족 혹은 사회적 출신 배경, 재산, 출생, 장애 또는 여타 조건에 따른 그 어떤 구분도 없이” 모든 사람의 모든 인권을 존중하고 보호하고 증진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못박는다. 이제 차별 금지는 인권뿐만 아니라 발전의 영역에서도 절대적인 가치로 인정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발전과 환경문제 해결을 위한 재원 마련에 있어서 개도국들의 형편을 고려한 “공통의 그러나 차별화된 책임”(CBDR) 원칙이 적시되었다. 잘사는 나라에 더 큰 부담 의무를 지운 것이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지속가능발전목표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우선 인간과 지구와 생태가 다 같은 운명공동체임을 인정해야 한다. 또한 물질적 조건의 확보, 발전, 그리고 인권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그동안 국제개발협력이나 인도적 지원 활동 분야에서 인권이나 민주주의의 개념을 은연중 꺼리는 경향이 있었다. 경제개발을 정치에서 분리시킬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는 식의 탈정치적 관점이 성행했다. 이는 발전에 대해 정확한 인식이 아니고, 국제적 기준에도 부합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지속가능발전은 21세기 전세계 모든 나라에서 실천해야 하는, 우리 시대의 정언명령으로 새겨야 한다. 최근 영국의 경제사학자 로버트 스키델스키 교수가 방한한 자리에서 이원재 희망제작소 소장이 질문을 던졌다. “한국 경제는 언제까지 성장해야 충분한가.” 다음과 같은 답이 돌아왔다. “그것은 무엇을 위한 충분함인가에 달려 있다. 성장이 과연 그 공동체의 필요성을 해결하는가를 물어야 한다. 먼저 그 공동체가 원하는 필요가 어떤 것인지를 스스로 찾아야 한다.” 이 소장은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정리한다. “경제성장 자체가 절대적인 목표가 될 수 없으며, 무엇을 위한 성장인지를 한국 사회 구성원들이 성찰하고 토론해야 한다.” 지속가능발전목표는 우리 사회가 그러한 성찰과 토론을 벌일 수 있는 지성적, 실천적 프레임을 제시하고 있다.

유토피아의 중간결산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조효제의 인권 오디세이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헬조선에서 흙수저를 한탄해야 하는 우리들에게 솔깃하지 않을 수 없는 땅이다. 그러나 이토록 풍족하고 여유 있어 보이는 사회의 이면에는 인권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아니 인권과 정반대되는 현실이 병존한다.

유토피아의 ‘해외원조’ 정책은 21세기에 전 지구적 차원의 집단적 이성을 실천하는 데 필요한 영감을 준다. 환경이나 발전은 3세대 인권에 속하지 않는가. 지난 500년간 긴장 관계를 유지해온 유토피아 사상과 인권이 21세기 들어 화해의 전기를 마련한 것 같다.

서양 고전 목록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가 나온 지 꼭 500년이 되었다. 최근 여러 매체에서 <유토피아>를 언급하기 시작했고 올 한해 세계 각지에서 학술대회와 포럼이 열릴 예정이다. 책 제목인 고유명사 ‘유토피아’는 이상향을 가리키는 일반명사가 되었다. 이참에 인권과 유토피아 간의 관계를 짚어보면 좋을 것 같다. 중요한 주제인데 의외로 연구가 드물다. 우선 <유토피아>에 나오는 인권 현실을 정리해 보자. 모어가 묘사한 이 신기한 나라는 오늘날 인권 기준으로 평가하더라도 괜찮아 보이는 구석이 적지 않다.

유토피아에 사는 사람들은 완전고용 상태에서 하루 6시간만 일하면 된다. 그러고도 물자가 남아돈다. 학자에겐 일반노동이 면제되지만 연구노동에 전념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사람들 사이에 출생 신분이나 가문에 따른 차별적 지위 관념이 거의 없다. 헬조선에서 흙수저를 한탄해야 하는 우리들에게 솔깃하지 않을 수 없는 땅이다. 모든 이에게 고른 수준의 의식주가 보장되고 평등한 무상의료가 제공된다. 한마디로 생계에 대한 근심걱정을 잊고 살 수 있는 나라다. 어린이들의 양육과 보육까지 사회가 책임져주니 대한민국보다 선진적인 누리과정을 가졌다. 노인을 공경하는 풍토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깍듯한 것도 이곳의 특징이다. 종교의 자유, 선교의 자유 등 수준 높은 관용의 신앙관이 통용된다. 사람들은 합리적이어서 일종의 자연법적 사고가 사회 전체의 통념처럼 되어 있다. 이웃나라와 달리 동물을 잡아 제사에 바치지 않으니 동물 복지도 실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모어로 모든 분야의 학문 활동이 가능하니 이 또한 여러모로 부러운 지적·문화적 환경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이토록 풍족하고 여유 있어 보이는 사회의 이면에는 인권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아니 인권과 정반대되는 현실이 병존하고 있어 긍정적인 관찰자를 당황하게 만든다. 사람들 사이의 상하관계가 확실하고 권위주의적 사회 분위기가 짙게 깔려 있다. 아내는 남편에게, 아이는 부모에게, 연소자는 연장자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 심지어 아내는 남편에게 매달 자기 죄를 고백하게 되어 있다. 거주와 이동의 자유도 엄격히 제한된다. 허가증 없이 여행하다 적발되면 중벌을 받는다. 사유재산은 일절 허용되지 않으며 모든 물품과 주택을 공유한다. 개인의 프라이버시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선술집도 없고,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숨을 곳도 없으며, 남녀 간에 밀회할 장소는 더더욱 없다.

성에 대해 이상할 정도로 결벽증적인 규율을 강요한다. 혼전 섹스를 하다 적발되면 평생 독신의 처벌을 받는다. 간통하다 잡히면 패가망신을 각오해야 하고, 두 번째 걸리면 바로 사형이다! 노예제가 있는 것도 유토피아의 치명적인 반인권 현실이다. 전쟁포로와 국내 범죄자는 노예나 백정이 되어 인간 이하의 지위로 강등된다. 노예들이 봉기를 일으키면 무조건 사형에 처한다. 만일 외국에 농사짓지 않고 내버려둔 유휴지가 있으면 전쟁을 선포해서 그 땅을 차지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 전형적인 제국주의의 침략 논리다. 사법체계가 극히 미약하며 범죄 형량이 정해져 있지 않다. 법률가도 따로 없다. 한마디로, 법적 주장을 할 수 있는 권리의 체계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대조되는 이 두 현실은 우리에게 골치 아픈 해석의 문제를 제기한다. 앞에서 봤던 목가적이고 유족한 삶과, 뒤에서 본 억압적인 통제가 어떻게 같은 사회 내에 공존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유토피아>를 필두로 일련의 유토피아 사상들이 출현했던 시대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 중세 봉건시대는 한마디로 총체적인 신분사회였다. 종교, 정치, 경제, 문화, 법, 가문 등이 큰 덩어리처럼 얽힌 상태에서 피라미드식 서열구조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런 전근대 체제를 허물기 위해 두 가지 조류가 발생했다. 하나는 자연권 사상에 근거하여 개인의 이성과 자율성을 강조하는 흐름이었다. 모든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독자적인 소우주를 이루고, 이 개인들은 어떤 이유로도 침해받지 않는 주관적 기본권을 가진 실체로 인정되었다. 이런 개인들은 각자 자기 삶의 자율성과 권리를 지키기 위해 서로 합의하에 국가공동체를 구성하게 된다. 즉, 개인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방편으로 국가를 수립하는 것이다. 이것이 근대적 계약론의 핵심이다.

근대적 계약론에서 개인은 수단이 아닌 목적 그 자체로 격상된다. 국가와 정치의 목적 달성도 일단 개인 권리가 존중되는 바탕 위에서만 논할 수 있다. 여기서 모든 개인은 서로 평등한 상태에서 자기만의 고유한 이성적 판단을 한다. 그러므로 정치에서 고정되고 선험적인 정답을 가정할 수 없다. 그 누구도 사회의 선익에 대해 최종적 해답을 주장할 수 없다. 따라서 다양한 이성적 판단들이 서로 경쟁하면서 잠정적 진리를 찾아갈 수밖에 없다. 미리 정해진 답이 없는 상태에서 경쟁하게 되면 누가 더 나은 논증과 더 나은 설득을 제시하느냐 하는 것만이 궁극적인 판단기준이 된다. 이것이 인권에 기반을 둔 주권재민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이다. 이에 따르다 보면 결과적으로 유토피아 사회와 비슷한 정책이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미리 설계되어 있는 청사진으로서의 유토피아를 상정하진 않는다. 그렇게 접근하면 선후가 뒤바뀐 것이다.

전근대 체제를 해체하기 위한 두 번째 조류는 유토피아 사상이었다. 유토피아 사상이 인권과 같은 점은 세속적 이성의 보편타당성을 인정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유토피아 사상은 개인화된 계약론적 사고를 거부한다. 전근대를 벗어난 세속적 정신을 추구하되, 정치체 전체의 집합적 이성을 통해 집단 차원에서 공생하는 것이 최선의 사회적 이상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유토피아에서는 개인 차원의 이성적 판단을 놓고 서로 경쟁하지 않는다. 전체 사회를 위한 최선의 복리가 선험적으로 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욕구와 전 사회의 욕구가 동일하다고 가정하기 때문에 개인 권리, 개인 욕구, 개별 이익은 부차적인 것이며, 언젠가 극복되고 소멸되어야 할 어떤 것이다. 유토피아에서 프라이버시가 무시되는 이유도 이처럼 개별성에 큰 의미를 두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개인 이익이 크게 문제 되지 않으므로 개인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기 위해 복잡한 법체계를 굳이 고안할 필요가 없다.

집단적 이성에 반하는 개인 행위는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거부된다. 따라서 개인의 개별성과 자율성은 그가 집단적 이성에 승복하는 한도 내에서만 존중된다. 시민적 자유가 사라진 곳에는 비판적 사유의 샘물이 말라버린다. 이런 풍토에서 소수에 의한 새로운 통찰이나 번득이는 혁신 아이디어가 나올 수 없다. 그리고 유토피아적 사회에서는 개별적 욕구를 감안하지 않고 집단 차원의 진리만 강조하므로 체제 붕괴 리스크가 커진다. 국가와 일반 시민들 사이의 진정한 결속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극적으로 나타난 경우가 사회주의권의 몰락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그런데 최근 들어 또 다른 국면이 등장했다. 리처드 사게는 개별 인권의 보호와 민주주의의 실천만으로 풀 수 없는 구조적 차원의 문제가 발생했다고 지적한다. 전 지구적 불평등과 생태계 악화가 그것이다. 개인 이익에만 맡겼을 때 인류의 공공재인 환경이 더 나빠질 가능성이 높고, 선진국 시민들의 민주적 결정에만 의존할 때 남반구 발전 문제가 유야무야될 소지가 크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유토피아>에서는 2년간 비축분을 제외한 잉여물자를 외국에 수출하는데 그중 7분의 1을 수입국의 빈민들에게 무상으로 배분한다. 유토피아의 ‘해외원조’ 정책은 21세기에 전 지구적 차원의 집단적 이성을 실천하는 데 필요한 영감을 준다. 잘 알다시피 환경이나 발전은 3세대 인권에 속하지 않는가. 지난 500년간 긴장 관계를 유지해온 유토피아 사상과 인권이 21세기 들어 화해의 전기를 마련한 것 같다. 유토피아의 꿈이 돌고 돌아 드디어 인권과 가까워졌다고나 할까.

고독이라는 이름의 고문

조효제의 인권 오디세이

고독 자체가 고문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때 ‘고문’은 단순한 은유가 아니다. 인간은 사회로부터 분리되면 더 이상 인간이 아니게 된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은 생물학적 차원에서도 그러하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마땅하다.

일자리를 잃어, 노숙인으로 전락하여, 쪽방에 거주하게 되어, 독거노인의 처지에 빠져, 경쟁사회로부터 배제된 은둔형 외톨이가 되어, 불평등에다 흙수저로서 자포자기하여 사실상 분리되고 배제된 사람들 역시 ‘사회적 고문’을 받고 있다.

최근 인권과 관련해 주목할 만한 소식이 있었다. 미국 루이지애나주에서 거의 일흔에 가까운 흑인 재소자가 석방되었다. 강도죄로 형을 살다 교도소 간수를 죽였다는 이유로 추가 종신형을 받아 복역하던 앨버트 우드폭스라는 사람이다. 무려 43년 동안 운동시간을 제외하고 하루 23시간을 독방에 갇혀 지냈던 우드폭스는 흑인해방 단체인 블랙팬서에 가담한 탓에 살인 누명을 썼다고 주장해왔다. 그는 여생을 독방 구금 반대운동에 바치겠다고 다짐한다. 어떻게 그 긴 세월을 버텼을까. 살아남기로 맹세하고 신문, 잡지를 통해 바깥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매일 공부하면서 악착같이 정신줄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사회에서 범죄를 저지르면 사법 처벌을 받아 옥에 갇힌다. 교도소 안에서 규정을 위반하면 징벌을 받는다. 징벌은 사법상 처벌이 아니고 행정상 불이익 처분이다. 징벌 중 제일 심한 벌인 독방 구금을 금치(禁置) 처분이라 한다. 문제는 금치 처분이 심각한 인권 유린이라는 점이다. 그런데도 금치가 공론화되지 않는 이유는 이들이 범죄자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에겐 일반인이나 교정 담당자나 흔히 부정적인 태도를 취한다. ‘죄짓고 갇혀 있는 주제에 또 사고를 치면 독방에 갇히는 게 당연하다.’ 과연 그럴까. 한 사회 내에서 가장 경멸받고 망각된 사람의 문제를 인권 문제로 볼 줄 아느냐 여부가 당신의 인권 감수성을 측정하는 바로미터가 된다.

인간을 일반 사회로부터 분리하여 옥살이 시키는 것을 1차 격리라 한다면, 교도소 내에서 다른 수감자들과 분리하여 독방에 가두는 것은 2차 격리라 할 수 있다. 2차 격리자는 감옥 안의 감옥 생활, 정말 세상에서 완전히 소외된 사람이다. 학계에서는 1950년대부터 이런 이들에게 나타나는 변화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캐나다의 맥길대학에서 자원 학생들을 대상으로 독방 구금으로 비롯되는 변화를 측정한 적이 있었다. 원래 6주 예정으로 시작한 실험이었지만 며칠 만에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피실험자들의 정신상태가 급격히 나빠졌기 때문이다.

비슷한 시기에 미국 위스콘신대학의 심리학자 해리 할로가 실험용 붉은털원숭이에게서 이상한 현상을 발견했다. 그는 인도에서 수입하던 원숭이 가격이 올라 실험실 내에서 직접 원숭이를 키우기로 하고, 위생과 영양이 완벽하게 제공되는 공간에다 새끼 원숭이를 한 마리씩 넣어 길렀다. 이들의 신체적 발육상태는 수입한 원숭이보다 월등하게 좋았다. 그러나 격리된 채 자란 원숭이들은 하루 종일 멍하게 우리 속을 맴돌며 이상하게 행동했고 자기 몸에 상처를 내기 일쑤였다. 특히 나중에 다른 원숭이들과 섞어 놓아도 함께 어울릴 줄 모르는 외톨이가 되곤 했으며 사망률도 아주 높았다. 할로는 영장류가 오랜 기간 격리되면 사회성을 영구히 상실하게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후 중동과 같은 분쟁지역에서 인질로 잡혀 몇 년씩 고립된 상태에서 갇혀 있었거나, 전쟁포로로서 독방 구금을 당했던 병사들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말로 표현 못할 가혹행위를 당한 사람이 많았지만 이들은 하나같이 육체적 고통만큼이나 독방에서의 고립이 힘들었다고 증언했다. 독방에 감금되었던 사람들은 환청, 환시, 공황장애, 폐소공포, 인지혼란, 망상, 기억상실, 무기력, 우울, 신경과민, 자해, 만성피로, 집중 장애, 맹목적 적개심을 겪었다. 자살률도 높았다. 장기 독방 구금자들은 태아와 같은 자세로 웅크린 채 하루 종일 비몽사몽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이런 증상은 전문 의학자들뿐만 아니라 수인을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는 교도관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심리적·정신적 장애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오랜 독방 구금자들은 심한 뇌진탕을 당한 환자와 비슷한 수준으로 뇌파 기능이 저하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독방 구금이 몸과 마음을 함께 파괴한다는 사실이 입증된 것이다. 고독 자체가 고문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때 ‘고문’은 단순한 은유가 아니다. 인간은 사회로부터 분리되면 더 이상 인간이 아니게 된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은 생물학적 차원에서도 그러하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마땅하다.

고명섭이 집필하는 <이희호 평전>에 이런 일화가 나온다. 신군부에 의해 청주교도소에 갇힌 김대중은 완전한 격리 상태로 수감되어 있었다. 1981년 2월 김대중은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여기 온 지 불과 20일이고 가족 면회한 지 10일인데 이 모든 것이 반년이나 된 것 같습니다. 그토록 세월이 지루하고 고독이 무섭다는 것을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체험으로 느끼게 됩니다.” 그해 11월 가족을 면회하는 자리에서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다. “잠을 자다가도 숨이 턱 막히면 발광할 지경이 되어서 일어나 기도함으로써 극복했습니다.” ‘발광’, 나는 이 이상으로 독방 구금을 전율할 만큼 정확히 묘사한 표현을 알지 못한다. 민주화 이후에도 교도소 상태는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었다. 조영래 변호사의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를 보면 1989년 원주교도소에 갇힌 대학생들이 서적 불허 조치에 항의하자 다섯 시간 동안 재갈을 물리고 두 달간 징벌방에 가두는가 하면 면회, 서신, 운동 등을 일체 금지시켰다고 한다.

현재 형집행법에는 금치 기간을 30일 이내로 하고, 징벌위원회에 외부위원을 3인 이상 포함시키며, 규율위반에 대해 징벌 종류를 다양화하여 총 14가지 징벌을 내릴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교도소 내에서 징벌은 금치 처분이 주를 이룬다. 김옥기·송문호는 2014년 발표한 논문에서 현행 징벌제도가 금치에 편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밝혔다. 2008~2012년 사이의 법무부 자료에 따르면 교도소 수용 인원 중 약 30퍼센트가 징벌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징벌 중 금치 처분이 압도적 비율을 차지했다. 2012년의 경우 전체 징벌 1만3702건 중 90퍼센트가 금치 처분이었다. 지시 불이행, 수용자 폭행, 생활방해 등 징벌 사유에 걸리면 거의 무조건 징벌 독방에 구금되었던 것이다.

위의 연구에는 한 교도소에서 5주간 금치 일변도가 아닌 징벌의 다양화를 시도했던 실험이 소개되어 있다. 가장 빈번한 징벌 사유인 입실 거부의 경우, 금치 처분이 아닌 텔레비전 시청 금지, 작업장려금 삭감, 접견 제한 등의 징벌도 효과가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왜 교정시설에선 금치 처분에만 매달리는 것일까. 현장 관계자들이나 징벌위원들이 천편일률 관행적으로 금치 처분만을 징벌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외부로부터의 상시적 통제장치가 필요하다. 조직 내 부적응을 이유로 금치를 시행하면 오히려 더욱 심각한 조직 부적응자를 양산하게 되므로 금치 처분은 어처구니없이 역설적인 처벌인 셈이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개입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2011년 유엔 고문 특별보고관인 후안 멘데스는 하루 22시간 이상 홀로 가둬 두는 독방 구금이 범죄자의 교정에 반하는 고문 또는 가혹행위라는 보고서를 제출한 바 있다. 사회적 격리가 ‘불가역적 정신장애’를 초래하므로 15일 이상의 금치 처분, 특히 미성년자와 정신질환자의 금치를 무조건 폐지해야 한다고 유엔 총회에 보고했던 것이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올해 초 행정명령을 발동해 전국의 모든 연방 교정시설에서 미성년자의 금치 처분을 금지시켰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여기에 더해 사회학적 상상력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교도소 내의 독방 구금이 인권 유린이라면, 일반 사회 내에서 강요된 고립은 어떻게 봐야 할까. 일자리를 잃어, 노숙인으로 전락하여, 쪽방에 거주하게 되어, 독거노인의 처지에 빠져, 경쟁사회로부터 배제된 은둔형 외톨이가 되어, 불평등에다 흙수저로서 자포자기하여 사실상 분리되고 배제된 사람들 역시 ‘사회적 고문’을 받고 있다고 해석해야 하지 않을까. 인간으로부터 사회적 탯줄을 제거하면 그에겐 고통을 느끼는 육신만 남게 된다. 모든 인간은 고문 없는 세상에서 살 권리가 있다.

인권의 잃어버린 고리를 찾아서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조효제의 인권 오디세이

유엔을 비롯한 현대인권의 설계자들은 깊은 차원에서 인권을 달성할 수 있는 거시적 근본조건에 대해서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냉전과 지정학적 경쟁, 인권의 정치도구화 때문에 거의 완전히 잊혀졌다. 인권유린의 근본원인까지 파헤쳐 해결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어졌다.

세상이야 어떻게 되든 내 개인권리만 찾으면 된다고 생각하면 나무만 보고 숲을 못 보는 것이다. 반대로, 사회를 바꾸려는 거대한 행진 앞에서 개개인의 사소한 권리는 뒤로 좀 밀려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면 숲만 볼 줄 알지 나무의 문제를 못 본 것이다.

작년 이맘때 파키스탄의 카라치에 있는 ‘2층’이라는 카페에서 공개토론 모임이 열렸다. 사회적 기업으로 운영되던 ‘2층’은 문화공연 공간이자 시민운동의 보금자리 같은 곳이었다. 그날 모인 참석자들은 파키스탄의 분리주의 세력과 보안군이 충돌하고 있는 발로치스탄주에서 일어나는 주민 실종 사태에 관한 증언을 듣고 인권 보호 방안을 논의했다. 밤 9시쯤 행사가 끝난 후 카페 운영자 사빈 마흐무드는 자기 차를 몰고 귀갓길에 올랐다. 출발한 지 몇 분이 채 안 되어 교차로에서 신호대기 중이던 사빈은 오토바이를 탄 괴한이 쏜 총탄을 맞고 현장에서 절명했다. 마흔살의 열정적인 여성 인권운동가가 허망하게 목숨을 잃은 것이다.

멀티미디어 회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사빈은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억압받는 나라에서 ‘2층’ 카페를 통해 젊은이들에게 오아시스의 장을 마련해 주었다. 카페 운영만이 아니라 인권 캠페인과 사회운동에 빠짐없이 참여하고 온라인에서 자유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데 힘썼던 사람이었다. 사빈의 죽음은 오늘날 이슬람권의 인권 현주소를 잘 보여준다. 용의자를 잡고 보니 명문대를 나온 젊은 이슬람주의자였다. 그는 사빈이 밸런타인데이를 공공연하게 축하하고, 테러를 지지하는 이슬람 성직자를 규탄하는 집회에 참석하는 등 이슬람 정신에 어긋나는 짓을 저질러 범행을 결심했다고 진술했다. 파키스탄 사회가 이슬람 원리로 똘똘 뭉쳐야 하는데 감히 개방성과 다원주의를 설파한 게 괘씸해서 죽였다고 당당히 고백했다고 한다. 배후가 누구인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카라치는 파키스탄에서 가장 큰 도시인데 매년 수백건의 표적암살 사건이 발생하고 있다. 정치적 반대자가 아니라 인권운동가에 대해서까지 극단적인 인권침해가 발생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충격적이다. 하지만 해결 방법을 생각해보면 간단치가 않다. 진상을 규명하고 배후를 파헤치고 범인을 처벌하고 유가족에게 배·보상을 하고 유사범죄가 재발하지 않도록 제도적 조처를 취할 수 있으면 아마 최선의 해법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정도의 통상적 해법도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이런 해법에는 결정적 한계가 있다. 사건의 근본원인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빠져 있다. 카라치 지역 정당들의 혈투, 그 배후에 깔린 토지와 권력 쟁탈전,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사이에서 벌어지는 분권화를 둘러싼 갈등 등이 원인으로 제시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해석만으로 사빈의 암살 원인을 다 알 순 없다. 더 깊은 차원의 이유를 찾아야 한다. 파키스탄을 비롯해 이슬람권에서 커지고 있는 이슬람 근본주의가 21세기의 세속주의, 정교분리 원칙과 충돌하는 경계면에서 발생한 사건이 아닐까. 더 거슬러 올라가보면 이슬람 근본주의를 오늘날 이렇게까지 키운 것은 중동의 지정학적 요인과 서구의 지배전략에도 책임의 일단이 있지 않을까.

사빈의 암살을 암살자의 범행으로만 본다면 직접적 가해 위주의 인과관계로 사건을 파악하는 것이고, 근본원인까지 감안한다면 설명 위주의 인과관계로 사건을 파악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절대다수의 인권침해는 전자에 의해서만 설명된다. 그 어떤 인권유린 사건도 근본 원인까지 속속들이 파헤쳐 끝장을 보는 식으로 해결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바로 이런 것이 ‘인권의 잃어버린 고리’이다. 눈앞에 생생하게 보이는 물리적 인권침해에 대해서는 치를 떨지만, 그런 침해를 일으키는 구조적 원인에 대해서는 알기도 어렵고, 알고 싶지도 않고, 안다고 해도 뾰족한 해결책이 없어 보인다. 이 문제는 인권 연구에서 오랫동안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왜 미시적이고 가시적인 인권침해에만 집중하고, 거시적이고 구조적인 인권침해엔 무심한가.

인권에 접근하는 가장 흔한 방법이 바로 눈에 보이는 폭력과 차별과 불의에 맞서는 것이다. 이것을 ‘인권문제 해결 패러다임’으로 부를 수 있다. 주로 법과 제도를 통해 인권침해를 시정하는 방식이다. 오늘날 인권 담론의 9할 이상이 인권문제 해결 패러다임에 속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원래 이렇지는 않았다. 현대 인권 담론이 만들어진 1945년부터 약 20년간의 문제의식은 오늘날과 많이 달랐다. 유엔을 비롯한 현대 인권의 설계자들은 깊은 차원에서 인권을 달성할 수 있는 거시적 근본조건에 대해서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1945년 제정된 유엔헌장의 전문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국제연합의 인민들은 우리 일생에 두 번이나 말할 수 없는 슬픔을 인류에 가져온 전쟁의 불행에서 다음 세대를 구하고, 기본적 인권, 인간의 존엄 및 가치, 남녀 및 대소 각국의 평등권에 대한 신념을 재확인하며, 정의와 조약 및 기타 국제법의 연원으로부터 발생하는 의무에 대한 존중이 계속 유지될 수 있는 조건들을 확립함으로써, 더 많은 자유 속에서 사회적 진보와 생활수준의 향상을 촉진할 것을 결의하였다.” 즉 유엔의 목적인 안보(평화), 인권 및 발전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정의와 국제법을 피상적으로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존중될 수 있는 심층 조건들을 확립하겠다고 한 것이다.

1966년에 나온 A, B 국제인권규약의 전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공통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세계인권선언에 따라 공포와 결핍으로부터의 자유를 향유할 수 있는 자유인의 이상은 모든 사람이 자신의 시민적, 정치적 권리뿐만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 및 문화적 권리를 향유할 수 있는 조건들이 형성되는 경우에만 달성될 수 있음을 인정하며….” 또한 1948년의 세계인권선언은 권리 보장의 전제조건을 다룬 28조에서 “모든 사람은 이 선언에 나와 있는 권리들과 자유가 온전히 실현될 수 있는 사회적·국제적 질서 내에서 살아갈 자격이 있다”고 선포했다. 즉 인권 달성을 위해서는 개별권리가 보장되어야 하지만 그 개별권리들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법제도의 수립만으로는 미흡하고, 보다 깊은 차원에서 권리의 향유를 가능하게 하는 심층적 조건과 사회적·국제적 질서가 갖춰져야 한다는 점을 공식적으로 강조한 것이다. 이런 접근방식을 뭉뚱그려 ‘인권조건 형성 패러다임’이라고 불러보자.

그러나 현대 인권 담론의 발생 초기에 이렇게 강조되었던 ‘인권조건 형성 패러다임’은 냉전과 지정학적 경쟁, 인권의 정치도구화 때문에 지난 반세기 동안 거의 완전히 잊혔다. 그와 함께 국제인권 조약체계가 인권 담론에서 정전적(正典的) 방법론의 지위를 획득했다. 또한 근본 차원에서 인권 달성을 방해하는 거대 권력의 존재도 문제가 되었다. “권리의 향유를 가로막는 수많은 문화적·정치적·경제적 장벽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장벽은 권리를 차단하는 권력이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뜻한다.” 브룩 애컬리의 말이다. 인권조건 형성 패러다임을 제대로 실천하려면 현존하는 사회적·국제적 질서에서 패권을 차지한 자본주의와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에 근본적 차원의 문제제기를 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패러다임에 의한 인권 달성은 이상적이긴 하나 실천 불가능한 방법론으로 치부되었던 것이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그러나 핵심은 이것이다. 인권을 달성하려면 인권문제 해결과 인권조건 형성이 같은 방향으로 정렬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개별 인권침해 사건을 해결하는 노력과, 민주적이고 정의롭고 공평한 세상을 만드는 노력이 함께 손을 잡고 연대해야 한다는 뜻이다. 세상이야 어떻게 되든 내 개인권리만 찾으면 된다고 생각하면 나무만 보고 숲을 못 보는 것이다. 반대로, 사회를 바꾸려는 거대한 행진 앞에서 개개인의 사소한 권리는 뒤로 좀 밀려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면 숲만 볼 줄 알지 나무의 문제를 못 본 것이다. 오랫동안 인권 담론에서는 거시적 조건이나 사회과학적 통찰을 접어두고 개별 권리침해의 사실관계 조사와 법적 해결에만 치중하는 경향이 있었다. 인권의 잃어버린 고리를 재발견하는 일이 21세기 인권운동의 가장 중요한 숙제가 되었다. 나무도 살리고 숲도 함께 가꿔야 한다. 눈을 들어 넓고 멀리 봐야 한다.

인권교육, 쉬운 듯 어려운 듯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조효제의 인권 오디세이

인권교육 개념은 70년 전에 나왔지만, 알파고 시대를 맞은 21세기를 예견한 듯하다. 교사와 교육전문직을 상대로 미래사회 학생들에게 필요한 주요 능력을 물었더니 공감능력이 압도적 1위였고 도덕성과 의사소통 능력이 그 뒤를 이었다. 인공지능 시대가 될수록 인권교육이 중요해진다는 뜻이다.

인권보호 의무가 있는 기관, 특히 군, 경찰, 검찰, 국정원에 대한 인권교육이 반드시 필요하다. 또한 탈북자, 이주노동자, 성 소수자처럼 인권이 갈급하나 문을 두드릴 용기가 없거나 처지가 안 되는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찾아가 현 법제도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전수해야 한다.

오래전 일이다. 어느 기관에 인권교육을 갔는데 ‘인권의식 함양을 위한 정신교육’이라는 플래카드가 붙어 있어 놀랐던 적이 있다. 인권을 정신교육으로 하다니. 요즘은 사정이 달라졌다. 학교나 대학에서 인권교육이 늘었고 학교 바깥의 교육도 활발해졌다. 인권단체, 시민단체, 교육단체, 지자체, 경찰, 복지기관, 기업 등에서 여러 형태로 인권교육을 하며, 계속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무엇을 교육할지,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에 관한 합의가 아직도 부족하다.

원래 ‘인권교육’은 ‘교육인권’과 짝을 이룬다. 교육인권을 규정한 세계인권선언 26조는 교육의 목적이 인권이라고 못박는다. “교육은 인격을 온전하게 발달시키고 인권과 기본적 자유를 더욱 존중할 수 있도록 그 방향을 맞추어야 한다.” 선언의 전문에서는 사람들이 인권을 이해해야만 인권이 달성될 수 있다고 함으로써 인권교육이 곧 인권의 길이라고 가르친다. 즉, 교육 자체가 인권교육이 되어야 하고, 인권교육을 해야 인권이 보장된다는 말이다.

인권교육 개념은 70년 전에 나왔지만, 알파고 시대를 맞은 21세기를 예견한 듯하다. 문유석 판사에 따르면 미래교육의 핵심은 시민사회 구성원으로서 어떤 권리와 의무가 있는지를 알려주고 행동하도록 하는 고전적 시민교육에 있다. 교사와 교육전문직 2229명을 상대로 미래사회 학생들에게 필요한 주요 능력을 물어봤더니 공감 능력이 압도적 1위였고 도덕성과 의사소통 능력이 그 뒤를 이었다고 한다. 이게 무엇을 의미할까. 인공지능 시대가 될수록 인권교육이 중요해진다는 뜻이다.

인권교육의 첫걸음은 대상을 잘 가리는 데에 있다. 인권교육은 확정된 법규집 같은 게 아니다. 어린이와 대학생, 학생과 교사, 일반교사와 학교 관리자, 복지시설 이용자와 운영자, 일반시민과 공무원, 다수자와 소수자에 따라 내용과 접근이 달라진다. 경우에 따라선 ‘인권’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도 인권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다.

학습자의 구분만큼이나 교육 목적도 다양하다. 제일 쉽게 상상할 수 있는 목적은 인권을 하나의 주제로 다뤄 그것의 개념, 역사, 권리의 종류, 헌법과 국제기준, 주요 쟁점을 가르치는 것이다. 요컨대 ‘인권이란 무엇인가’를 배우는 과정이다. 이는 주로 대학이나 전문 연수 과정에서 인권을 다루는 인지적 교육방식이다.

인권 침해의 해결책을 가르치는 도구적 교육방식도 있다. 법과 제도에 대한 지식과 그 활용법, 정책결정 과정, 의제화를 위한 주창 능력을 가르친다. 인권을 박탈당한 사람이나 약자 집단이 권리의 호신술을 익혀 유단자가 되어 직접 후배들을 가르칠 수도 있다. 이것을 당사자에 의한 인권교육 모델이라 한다.

편견과 차별적 태도를 바꾸고, 반인권적 행동양식을 변화시키기 위한 개입형 교육도 있다. 경찰이나 공무원들에게 실시하는 인권교육이 주로 이런 방식을 취한다. 흔히 태도와 행동 변화를 목적으로 하는 교육이 제일 어렵다고 한다. 구성원들에게 인권교육을 실시하는 공조직이 늘면서 양적으로 커지고 있는 분야다.

마지막으로 철학적이고 비판적인 접근도 있다. 인권적 가치관을 정립하고, 권리와 자유를 가로막는 장벽을 발견하며, 자신의 욕구를 규정하고 그것을 달성할 수 있는 능력을 고양하도록 이끄는 성찰적 참여형 교육방식이 그것이다. 넓은 의미에서 민주 시민교육과 일맥상통한다. 나는 우리 사회가 시민교육, 평생교육의 일환으로 인권을 학습해야 할 절실한 필요가 있는 공동체라고 믿는다.

인권교육을 국가 차원에서 실시하는 나라로 필리핀이 꼽힌다. 시민들이 피플파워로 독재자 마르코스를 쫓아낸 후 1987년에 새로 만든 헌법 14조 3항에 인권교육이 명시됐다. “모든 교육기관은 헌법을 가르쳐야 하고… 인류애와 인권 존중을 함양해야 한다.” 이에 따라 군과 경찰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인권교육을 실시하여 국제적 주목을 받았다. 교육 담당자들은 그 경험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공무원이나 여타 공조직에도 적용될 만한 교훈이다.

첫째, “구어체로 교육하라”. 일상용어를 쓰고 전문 법률용어를 되도록 피하라. 문화와 사회적 맥락을 잘 살펴 설명하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이들에게 국제인권법의 이러저러한 전문적 규정을 들이대면 하품 나는 먼 나라 이야기로밖에 들리지 않게 된다.

둘째, “인권이 학습자 스스로의 것이 되게끔 하라.” 인권규범을 소개한 후 그것을 학습자의 상황에 맞춰 해석하고 적용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 인권이 완전히 새롭고 골치 아픈 뭔가가 아니라 자기 직업윤리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고, 의지만 있으면 자신의 일상 업무에서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개념이라고 안내해야 한다.

셋째, “인권이 개인의 삶과 연결되도록 하라.” 당신들은 잠재적 인권 침해 집단이니 조심해야 한다는 식으로 접근하면 오히려 거부감과 방어심리만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인권이 학습자 자신의 인간적 욕구와 인격에 도움이 되고, 가족과 자녀의 삶에도 긍정적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내 경험에 비추어보면 인권을 실천하도록 교육받는 대상일수록 오히려 스스로 피해의식을 가진 경우가 많았다. “우리 인권은 어떻게 됩니까”라고 되묻는 공무원, 사회복지사, 경찰을 만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이런 질문을 진지하게 경청하고 그것에 인간적인 이해를 표하는 것이 효과적 인권교육의 첫 단추가 된다. 교육자의 자세에서부터 인권의 정신이 드러나야 하는 법이다. 교육자와 학습자 사이에 신뢰의 창이 열리면 그 교육은 이미 성공을 향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인권교육은 사실과 지식 전달 이상의 어떤 교감을 필요로 한다.

넷째, “적절한 유인을 제공하라.” 인권과 같이 고귀한 가치를 가르친다고 해서 참여자에게 당근을 주지 않을 이유가 없다. 교육 불참에 대한 불이익보다, 교육 이수에 대해 인센티브를 주는 편이 효과적이다. 직원들이 인권교육을 받은 후 자발적으로 감상문을 제출하고 조직의 장이 직접 상을 주면서 그런 글을 홍보한다면 인권교육의 취지가 살아날 수 있다.

인권교육의 방법과 효과를 놓고 여러 의견이 있긴 하나, 인권을 교육의 장에서 한번이라도 다뤘을 때의 긍정적 효과는 부정적 효과를 압도한다. 몇 시간 교육만으로 인권 가치를 내면화할 것으로 기대하긴 어렵지만, 적어도 인권이 꼭 필요한 규범이고 그것을 어기면 나를 포함한 모두가 큰 상처를 입는다는 정도의 계몽 효과는 분명 거둘 수 있다. 생각지도 못했던 점을 처음 접하는 지적 충격만으로도 인권교육의 가치가 존재한다. 일 년에 한 번, 두세 시간 정도만 실시한다 해도 인지적, 행동변화적, 도구적 교육방식을 잘 배합하면 상당히 괜찮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본다.

한국은 인권교육에 양호한 환경과 불리한 환경을 모두 가진 사회다. 공사 영역에서 인권에 대한 관심이 높은 것은 우호적인 환경에 속한다. 그러나 교육수준과 인권에 대한 지지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는 국제적 추세와는 달리, 한국은 이 둘 사이가 오히려 벌어지는 예외적인 나라다. 또한 진보-보수로 분열된 이념 지형 때문에 인권조차 특정 진영의 전유물처럼 인식되는 상황은 인권교육에 불리한 조건이 되고 있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그럼에도 인권교육은 반드시 필요하고 더욱 확대되어야 한다. 인권 침해가 발생한 후 외양간을 고치는 것보다 교육을 통한 사전개입이 장기적 결과로 보나, 경제사회적 비용 면에서나 월등히 낫다. 백 가지 인권정책보다 인권친화적 시민이 많아지는 것이 궁극적으로 훨씬 더 바람직하다. 두 가지를 제안한다. 인권보호 의무가 있는 기관, 특히 군, 경찰, 검찰, 국정원에 대한 교육이 반드시 필요하다. 또한 권리란 말을 입에 올리기 쉽지 않은 사람들에게 현 법제도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전수해야 한다. 탈북자, 이주노동자, 성 소수자… 인권이 갈급하나 문을 두드릴 용기가 없거나 처지가 안 되는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찾아가는 인권교육이 되어야 한다.

차별의 종착점이 증오범죄다

조효제의 인권 오디세이

1980년대 미국에서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죽인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다. ‘증오범죄’(hate crime)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져 범죄 동기 분류표에 이 말이 포함되었다. 한국에서도 강남역 사건 이후 증오범죄가 중요한 사회문제로 떠오를 조짐이 보인다.

증오범죄는 인간의 차별과 배제를 금하는 인권의 근본원칙에 대한 도전이다. 차별과 증오범죄는 연속선상에 위치한 유사한 성격의 두 얼굴이다. 증오범죄의 슬로모션이 일상적 차별이라면, 일상적 차별에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힌 것이 증오범죄라 할 수 있다.

*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최근 전세계에서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을 보자. 5월17일, 서울 강남역 부근에서 20대 여성이 한 남자에게 죽음을 당했다. 6월12일, 미국 플로리다주의 나이트클럽에서 고객 49명이 오마르 마틴이라는 무슬림에게 피살되었다. 6월17일, 영국 노동당의 조 콕스 의원이 극우 정치 성향의 토머스 메어에게 살해되었다. 6월22일, 파키스탄의 카라치에서 전통음악 카왈리의 가수왕 암자드 사브리가 총에 맞아 숨졌다. 세속 음악과 예술을 금기시하는 탈레반의 소행이었다.

이들 사건은 이욕, 사행심, 보복, 가정불화, 호기심, 유혹, 우발성, 현실불만, 부주의 등 경찰에서 말하는 통상적 범행 동기가 아닌 범죄라는 점에서 서로 비슷하다. 추측이긴 하나, 여성, 성소수자, 이민자, 세속적 규범과 가치에 대한 적대가 깔려 있는 사건들이라 생각된다. 1980년대 미국에서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죽인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다. 언론과 정치인들이 ‘증오범죄’(hate crime)라는 신조어를 만들었고 연방수사국(FBI)과 법집행기관에서 범죄 동기 분류표에다 이 말을 포함시켰다. 강남역 사건 이후 우리 언론에도 증오범죄, 혐오범죄, 증오테러 등의 표현이 많이 등장했다. 앞으로 증오범죄가 중요한 사회문제로 떠오를 조짐이 보인다. 다음은 증오범죄에 관한 9문 9답이다.

1. 증오범죄는 개인들 간 문제인가?

증오범죄는 세 축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해자는 개인으로부터 국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피해자도 마찬가지다. 범죄행위의 범위 역시 단순 차별로부터 민족 멸절에 이르기까지 그 폭이 매우 넓다. 어떤 사람이 한 게이에게 주먹질을 한 것도 증오범죄이고 나치독일이 유대인 집단을 대량 학살한 것도 증오범죄다.

2. 무엇이 증오범죄이고 무엇이 아닌가?

증오범죄는 “인종, 피부색, 종교, 젠더, 성적 지향, 젠더 정체성, 장애 등의 근거로 형성된 적대 혹은 편견이 동기가 된 범죄”라고 정의된다. 그러나 증오범죄는 오해되기 쉽다. 모든 증오가 범죄로 연결되진 않으며, 혐오가 얽힌 범죄라 해서 모두 증오범죄는 아니다. 직장에서 자신을 오랫동안 괴롭힌 동료를 증오하여 범행을 저질렀다 해도 그것을 증오범죄로 볼 순 없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구체적인 증오를 품었는지의 여부도 일차적인 고려 대상이 아니다. 피해자 개인은 증오하지 않지만 그가 속한 집단을 싫어하므로 그를 죽일 수 있는 것이 증오범죄이기 때문이다.

3. 증오범죄의 핵심요소가 무엇인가?

증오범죄의 핵심은 피해자가 속해 있다고 생각되는 집단의 성격에 대한 ‘미움과 혐오’(아니무스)에 있다. 그런데 피해자의 집단귀속성, 즉 인종이나 성별, 성정체성 등은 어떤 본질을 가진 객관적 실체가 아니다. 역사적으로 그렇게 분류되고 사회적으로 그렇게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겉으로 드러나는 인간의 어떤 측면을 절대적 기준처럼 취급하여 그런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이 어떤 고정된 특성을 가졌다고 단정한 후 그들에 대한 증오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또한 증오범죄는 힘센 집단과 약한 집단 사이의 권력관계를 반영한다. 바버라 페리가 이를 잘 지적했다. “증오범죄는 오명이 부여되고 주변화된 집단에 가해지는 폭력과 위협이며, 주어진 사회질서의 위계구조가 불안정해질 때 그것을 바로잡으려는 의도를 가진 권력과 억압의 메커니즘이다. 증오범죄는 실제로건 상상으로건 가해집단의 흔들리는 헤게모니와, 피해집단에 어울린다고 생각되는 종속적 정체성을 동시에 재창조하려는 시도이자, 자아와 타자 간의 ‘적절한’ 상대적 지위를 재설정하여 양자를 확실히 구분하려는 수단인 셈이다.”

4. 증오범죄의 목적이 무엇인가?

피해자에게 고통을 가하는 것만이 증오범죄의 목적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어떤 주장을 퍼뜨리는 것도 목적이 된다. 그런 뜻에서 증오범죄는 ‘메시지 범죄’이기도 하다. 나는 증오범죄가 발신하는 메시지의 수신자를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이주노동자에 대한 증오범죄 메시지의 ‘직접 수신자’는 개별 피해자다. 전체 이주노동자들은 ‘연계 수신자’가 된다. ‘이 나라에 남아 있으면 너희들도 언젠가는 당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받는다. ‘간접 수신자’는 일반대중이나 정부를 말한다. 이주노동자 수용정책을 실시하면 이런 범죄를 계속 일으킬 것이라는 경고를 받게 된다.

5. 누가 증오범죄를 저지르나?

개별 증오자가 아닌 증오집단에 속한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현재 미국 전역에 892개 증오집단이 있다고 하나 이들은 전체 인구의 0.01퍼센트도 안 된다. 그러나 인터넷과 전자 미디어 덕분에 이런 미꾸라지들이 전체 공론의 장을 흐려놓을 수 있는 것이다. 보스턴에서 발생한 169건의 증오범죄를 조사하여 가해자들의 동기를 밝힌 연구가 있었다. 첫째, 증오범죄의 3분의 2가 청소년들의 열광심리와 폭언과 폭행 등 단순 난동에 의한 것이었다. 둘째, 방어적 증오범죄가 그 뒤를 이었다. 가해자는 피해자들 때문에 자신의 정체성, 영역, 지위, 생계, 존재기반이 위협받는다고 인식하고, 자신에게 방어할 권리가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따라서 자신이 행하는 폭력이 공격이 아니라 정당방위라고 믿는 경향이 있었다. 셋째, 보복적 증오범죄는 ‘우리가 당했으니 너희도 당해야 마땅하다’는 식의 대응을 말한다. 9·11 이후 아랍계 주민에 대한 공격이 이에 해당하는데 전체 범죄의 10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사명감에 의한 증오범죄가 있다. 도덕적 대의명분을 확신하는 이데올로기형 증오범죄인데 흔히 극우파들의 조직적 활동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에 의한 증오범죄는 1퍼센트 미만에 불과했다.

6. 증오범죄의 원인이 무엇인가?

가해자는 피해자에 대해 실제적·가상적인 위협을 느낀다. 피해자들 때문에 자기 삶의 기회, 삶의 방식, 사회경제적 지위, 신념체계 등이 무너질지 모른다는 주관적 불안이 증오범죄의 배경 원인을 이룬다. 또한 정치·경제·인구학적인 변동이 주류사회 구성원들에게 불확실성을 초래할 때 이런 문제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되는 집단을 공격할 동기가 생긴다. 주류문화와 비주류 하위문화가 서로 많이 다를 때 후자가 전자를 오염시키고 타락시킨다는 우려가 커진다. 여기에 더해 범죄를 촉발할 수 있는 매개적 사건이 있으면 심각한 증오범죄가 발생하곤 한다.

7. 증오범죄는 피해자에게 어떤 결과를 낳는가?

증오범죄는 일반범죄보다 훨씬 심각하고 장기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피해자가 속한 집단 전체에도 심각한 악영향을 끼친다. 이를테면 부잣집만 골라 턴 강도 소식을 접한 부자들보다, 어떤 성소수자가 당한 피해 소식을 접한 성소수자들이 느끼는 공포가 훨씬 더 크다. 피해집단 구성원들의 주관적 경험과 위험의 예감을 과소평가해선 안 된다. 그것 자체가 현실의 생생한 반영이기 때문이다.

8. 증오범죄가 인권에서 왜 중요한가?

증오범죄는 인간의 차별과 배제를 금하는 인권의 근본원칙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이다. 차별과 증오범죄는 연속선상에 위치한 유사한 성격의 두 얼굴이다. 증오범죄의 슬로모션이 일상적 차별이라면, 일상적 차별에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힌 것이 증오범죄라 할 수 있다.

9. 증오범죄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형사정책, 일반 사회정책, 사상적 대응이 모두 필요하다. 잠재적 피해 집단에 대한 예방적인 보호 조처 그리고 가해자의 가중처벌도 모색해야 한다. 증오범죄 방지법을 별도로 제정할 수도 있고, 증오범죄 예방까지 염두에 둔 포괄적 차별금지법도 생각해볼 수 있다. 특히 한국에서는 여성주의 범죄학의 시각이 대폭 도입되어야 할 것이다. 불평등을 줄이고 사회적 절망의 늪을 비우는 일도 중요하다. 장기적으로 인권교육과 세계시민의식 훈련이 근본대책이 될 수 있다. 끝으로, 증오범죄에 대해 예민한 경계심을 유지하되 자기충족적 예언이 현실화할 위험도 피해야 한다. 충격적으로 보이는 범죄가 발생하더라도 도덕적 공황에 빠지지 않는 사회과학적 균형 감각이 필요한 까닭이 바로 이것이다.

올림픽, 스포츠, 인권

조효제의 인권 오디세이

스포츠에 있어 무엇이 선진적이고 21세기적인 태도인가. 인권의 시선으로 스포츠를 볼 줄 아는 안목을 키우는 것이다. 스포츠 인권은 인권 분야의 새로운 의제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단언컨대 앞으로 스포츠 인권에 관한 연구와 정책 수요가 크게 늘어날 것이다.

올림픽헌장은 스포츠가 “우애와 연대와 페어플레이 정신에 기반한 상호이해”를 돕는다고 강조한다. 진정한 스포츠 정신을 익힌 사회에서 감히 민중 개돼지론이 나올 수 있을 것인가. 사회체육이 보편화된 나라에서 부패한 검사들이 국정을 농단할 수 있을 것인가.

*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서울 만리동의 옛 양정고보 자리에 손기정 기념관이 있다. 내부를 둘러보노라면 전시물 한 점이 유독 눈길을 끈다. 손기정이 1936년 8월9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우승하고 이틀 뒤 한국의 지인에게 보낸 엽서다. 더 이상 간단할 수 없을 만큼 짧은 문안이 가슴을 친다. “슬푸다!!?” 세 글자와 세 부호로 이루어진 이 전언은 식민지 주민의 복잡한 감정이 응축된 우리 민족의 모스 신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이것을 나라 잃은 슬픔이라고 풀이한다. 인권 개념으로 본다면 인민의 자기결정권을 빼앗긴 울분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2016년은 베를린 올림픽 80주년이자 리우 올림픽이 열리는 해이기도 하다. 8월 한 달 내내 세계인의 이목이 브라질에 쏠릴 것이다. 그러나 올림픽 경기에 출전한 선수들에게 열광하면서 스스로는 구경꾼의 위치에 자족하고, 언론이 전해주는 메달 집계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구태의연한 습관을 이제 바꿀 때가 되었다. 이런 식의 피동형 스포츠 관람은 한 세대 전에나 통하던, 그 당시에도 이미 비판의 소리가 높던, 문제적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스포츠에 있어 무엇이 선진적이고 21세기적인 태도인가. 인권의 시선으로 스포츠를 볼 줄 아는 안목을 키우는 것이다. 우리에겐 다소 생소하지만 스포츠 인권은 인권 분야의 새로운 의제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스포츠의 지구화와 글로벌 매스컴 혁명이 맞물리면서 스포츠는 이제 인류의 의식을 하나로 묶고 상상력을 무한히 자극하는 인지적 초점이 되었다. 정치판 돌아가는 것에는 신물을 내면서도 운동경기 판세에는 귀를 기울이는 게 보통 사람들의 감성이 아닌가. 그만큼 스포츠는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사회변화에 거대한 영향을 끼친다. 엘리트 스포츠건 풀뿌리 차원의 체육이건 마찬가지다. 단언컨대 앞으로 스포츠 인권에 관한 연구와 정책 수요가 크게 늘어날 것이다. 10년 뒤를 생각하는 대학원생이라면 지금 당장 스포츠 인권 논문을 쓰라고 권하고 싶다.

스포츠 인권이 정확히 무엇이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문제를 놓고 전문가, 교육자, 연구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스포츠 평화포럼’이라는 모임이 있다. 스포츠 분야에서 인권을 어쩌면 이렇게 깊이 논의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진지한 공부 자리다. 이곳에 한번 참석하여 스포츠 인권에 대해 귀동냥을 할 기회를 가졌다. 여기서 얻은 통찰을 내 나름대로 정리해 보자면, 스포츠 인권을 세 가지 범주-서로 연결되지만 구분되는-로 나눌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첫째, “스포츠 활동에서 인권을 보장한다.” 아마 제일 많이 알려진 부분일 것이다. 운동선수들을 상 따오는 머슴처럼 취급하고, 그들의 인격과 인권을 다반사로 짓밟으며, 경기력 향상과 국위선양의 미명하에 그런 행태를 버젓이 자행·방조·묵인하는 국가, 체육단체, 스포츠지도자, 기업들을 보라. 메달지상주의, 경쟁지상주의, 체육상업주의가 스포츠를 뿌리에서부터 왜곡해 놓은 결과다. 이런 것이야말로 ‘비정상의 정상화’가 필요한 분야가 아닐까. 그러나 현 정부가 내놓은 정상화 추진 과제 중 스포츠 부문을 보면 고작 ‘체육단체의 불공정·불투명성 개선’이니 ‘연예인·스포츠 선수의 병역 면탈행위 근절’이니 하는 피상적 사안들만 나열되어 있다. 권력의 인권의식을 보여주는 바로미터다.

게다가 주요 스포츠 행사에서 발생하는 인권침해도 있다. 특히 초대형 체육행사(메가 스포팅 이벤트, MSE)로 인해 국제적인 논쟁이 벌어졌다. 올림픽이나 월드컵 같은 거대 행사의 선정, 유치, 건설, 입찰, 주관, 진행 등 전 과정이 문제가 되었다. 경기장 건설 노동자의 착취로부터 비판세력과 약자집단의 탄압·제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인권문제가 발생한다. 초대형 체육행사의 인권 실적을 수우미양가로 나눠 보면 학생 시위대 수백명이 학살된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이나 군부의 ‘더러운 전쟁’을 도와준 꼴이 된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은 ‘가’에 속한다. 2022년 카타르 월드컵은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노예적인 착취 상황 때문에 벌써부터 ‘피의 월드컵’을 우려하는 말이 나온다.

2012년 런던 올림픽은 ‘수’에 가깝다고 평가된다. 인간, 자연, 도시의 지속가능성을 중시하고, 독립적인 인권감시기구의 외부평가를 자발적으로 수용했다. 모든 공사의 발주·공급·하청 사슬에 사회적 책임성 개념을 적용한 덕에 건설 과정에서 단 한 건의 산재 사망도 발생하지 않은 사상 첫 올림픽 대회가 되었다. 문제는 런던의 성공 사례가 한번으로 그칠 가능성이 높다는 데 있다. 국제앰네스티는 주요 스포츠 행사에서의 인권 존중을 위한 권고문을 발표하여 조직단체, 주최국가, 수주기업이 모두 인권침해 리스크 감소를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둘째, “스포츠 자체가 인권이다.” 올림픽헌장은 몸과 의지와 마음을 균형 잡힌 전일성 속에서 고양하고 합일시키려는 삶의 철학이 올림픽이념(올림피즘)이라고 정의한다. 나아가 스포츠와 문화와 교육을 배합하여 “노력에 따른 기쁨, 모범사례가 주는 교육적 가치, 사회적 책임성, 그리고 보편적 기본윤리 원칙의 존중에 기반을 둔 삶의 양식을 창조하는 것”이 올림피즘의 목적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보면 인권의 목적인 ‘인간의 활짝 꽃피움’을 위해서는 체육이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된다. 바로 이 때문에 올림픽헌장은 기본원칙 4항에서 “스포츠 활동이 곧 인권”이라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스포츠가 인권이라는 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면 대한체육회는 스포츠 인권의 수호자 역할을 자임해야 마땅하다. 또한 입시를 핑계로 체육시간을 없애는 그릇된 교육관을 가진 학교와 교장은 학생 인권유린이라고 지탄받아 마땅하다.

셋째, “스포츠를 통해 인권을 증진한다.” 지난달 제네바의 유엔인권이사회에서 스포츠 인권과 관련된 국제회의가 열렸다. 인권이사회의 의장 최경림 대사가 주관한 이 모임은 스포츠와 올림픽의 정신을 활용하여 장애인, 여성, 어린이를 비롯한 모든 사람의 인권을 보장하고, 인권에 대한 보편적 존중을 증진할 수 있는 방안을 논의했다. 실제로 인권이사회는 최근 몇 년 사이 스포츠 인권 관련 결의안을 5번이나 채택할 정도로 스포츠를 통한 인권 증진에 관심이 많다. 스포츠가 국가들과 국민들 사이의 관용과 이해를 높일 수 있는 분위기 조성에 큰 도움이 된다는 인식인 것이다.

인권이사회의 결의안 이전에도 이미 유엔총회에서 교육, 발전, 평화, 국제협력, 연대, 공평, 사회적 포용, 보건을 증진하기 위해서 스포츠를 활용하는 것이 대단히 유용하다는 결론을 수차례 내놓았었다. 최근 나는 개도국 개발협력 현장에 나가 있는 제자를 만나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이 방면에 진출하고 싶은 한국의 젊은이들이 어떤 전문성을 가지면 좋겠는가 하고 물었다. 제자는 컴퓨터에서 한국어 교습까지 모든 기술과 전문성을 환영한다고 하면서, 체육을 가르칠 수 있는 교육능력도 개도국 발전에 꼭 필요한 전문성이라고 덧붙이는 게 아닌가.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국제 관계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에서도 스포츠가 인권 향상에 기여할 수 있는 역할이 크다. 올림픽헌장은 스포츠가 사람들 사이의 “우애와 연대와 페어플레이 정신에 기반한 상호이해”를 돕는다고 강조한다. 진정한 스포츠 정신을 익힌 사회에서 감히 민중 개돼지론이 나올 수 있을 것인가. 제대로 된 사회체육이 보편화된 나라에서 부패한 검사들이 국정을 농단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고 보니 스포츠에선 차별을 반대하는 정신도 일찌감치 상식으로 되어 있다. 올림픽헌장 기본원칙 6항에 이미 나와 있지 않은가. “인종, 피부색, 성별, 성적 지향, 언어, 종교, 정치적 또는 기타 견해, 민족 또는 사회적 출신, 재산, 출생 또는 여타 신분 등 어떤 종류의 차별도 없이 올림픽헌장에 명시된 권리와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 인권이 존중되는 세상을 원하는가. 더도 덜도 말고 스포츠 정신대로만 하면 된다.

녹색도시가 인권이다

조효제의 인권 오디세이

국립재난안전연구원은 2020년 여름 한 달간 폭염이 계속될 경우 4주째엔 1만명 이상이 죽음을 맞는다는 시나리오를 내놨다. 그중 절대다수가 환경·에너지 빈곤층에 집중될 것이다. 이런 사태는 기후변화에 따른 도시 학살이라고 부르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물질적 결핍만이 아니라 ‘자연녹지 결핍’ 역시 반인권적 환경이라는 사실이 이제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도시 녹지공간은 단기적으론 기후변화 적응에, 장기적으론 기후변화 완화에 상당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우리는 수풀 우거진 청산 도시에서 살 권리가 있다.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8월 한 달 동안 ‘너무 더워 못 살겠다’는 말을 골백번도 더 한 것 같다. 이제 처서도 지났으니 조금 여유를 갖고 폭염의 사회적 의미를 짚어보자. 우리에겐 두 가지 상수가 존재한다. 하나는, 기후변화가 지속되는 한 앞으로도 극단적으로 덥고 춥고 변덕스런 날씨가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 기온의 신기록 행진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또 하나는, 한국에 사는 대다수 사람들은 미래에도 도시에서 거주할 것이라는 점. 국토교통부 자료를 보면 2014년 현재 용도지역 기준으로 도시 거주 인구 비율이 91.66퍼센트, 즉 4700만명 이상이 도시에서 살고 있다. 이 비율이 낮아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도시화는 수은주를 높인다. 덥다고 에어컨을 틀수록 도시는 더 뜨거워진다. 전기를 쓸수록 발전을 더 해야 한다. 발전을 더 할수록 기후변화는 심해진다. 이런 악순환이 돌고 돈다. 요컨대 기후변화와 도시화가 지속되는 한 우리는 올여름보다 더한 ‘지옥’을 매년 겪을 게 분명하다. 이렇게 본다면 전기요금 누진제 논의는 부차적인 쟁점에 불과하다. 근본 원인은 외면하면서 대증요법에 몰두하는 단견이고 미봉책이다.

아무리 기후변화가 심해져도 모든 사람이 똑같이 고생하는 건 아니다. 계층적으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제일 큰 피해를 본다. 지리적으론 저지대, 상습침수지역, 해수면 인근 지역 주민들이 제일 큰 타격을 받는다. 기후변화행동연구소에 따르면 독거노인들이 사는 쪽방촌의 평균온도가 33~34도, 심하면 38도를 넘긴다고 한다. 국립재난안전연구원은 2020년 여름 한 달간 폭염이 계속될 경우 4주째엔 1만명 이상이 죽음을 맞는다는 시나리오를 내놓았다. 이때 도시지역에서만 9166명의 사망자가 나오고 그중 절대다수가 환경·에너지 빈곤층에 집중될 것이라는 계산이 당장 나온다.

이런 사태는 기후변화에 따른 도시 학살이라고 부르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현대 한국인들의 인권 문제 중 아주 큰 부분이 도시 인권 분야에서 일어난다. 따라서 도시 인권 정책에서 도시계획, 도시 디자인, 도시 생태계 구축이 아주 중요하다. 그렇다면 기후변화에 따른 인권침해를 줄이기 위해 도시가 취할 수 있는 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단순해 보이지만 효과적인 방책이 있다. 나무 심기, 즉 녹색 청산(靑山) 도시를 만드는 것이다. 이건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2014년에 만들었던 서울시민 인권헌장 31조를 보라. “서울 시민은 보다 쾌적한 환경에서 살 권리가 있다. 서울시는 적절한 녹지와 공원을 조성하여 시민들이 쾌적한 자연환경을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한다.” 세계 인권도시의 모범으로 꼽히는 캐나다 몬트리올 인권헌장에도 비슷한 조항이 나온다. 최근의 연구를 보면 ‘적절한 녹지’는 단순히 쾌적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한다. 도시 녹지는 두 가지 보너스, 그리고 기후변화에 대처할 수단을 제공한다. 보너스부터 살펴보자.

첫째, 나무는 건강권을 증진한다. 1984년 <사이언스>에 발표된 로저 울리크의 고전적 연구가 있다. 담낭절제수술을 받은 환자들에게 녹음 울창한 풍경이 보이는 병실을 배정해주면 회복 시간이 단축되고, 수술 후 합병증도 적었다. 그 후 여러 다른 연구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오면서 수목이 인간의 신체적·정신적 손상을 복구해준다는 ‘회복적 환경’ 개념이 자리를 잡았다. 나무가 도시인의 일상생활에서 발생하는 정신적·심리적 스트레스에 대한 개인의 적응적 자원을 재생해준다는 것이다.

푸른 수풀이 사람의 스트레스와 불안, 우울을 줄이고, 혈압과 심박동을 낮추며, 근육 긴장도를 풀어주는데다 내분비계와 면역계를 활성화한다는 연구도 나와 있다. 심지어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의 억제에도 녹색 자연이 도움을 준다고 한다. 이런 효과는 잿빛 콘크리트 생활조건에서 나타나는 것과 정반대 현상이다. 최근 연구에선 도시 녹지 공간이 10퍼센트 늘어나면 평균수명 5년에 해당하는 건강증진 효과가 발생한다고 한다. 서울 시내 가로수를 열 그루당 한 그루씩만 더 심어도 누적 수명 5천만년이 증가한다는 뜻이다.

둘째, 녹지는 도시 거주민의 공감 능력을 배가하며, 인간들 사이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더 큰 세상 간의 연결성을 증대한다. 2001년 미국 일리노이대학의 프랜시스 쿠오는 녹지가 있는 도시 빈민지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 주민들이 빈곤 문제에 대처하는 차이점을 조사했다. 나무가 적은 지역에 사는 사람일수록 과단성 있는 행동을 취하지 못하고, 자신의 상황을 해결 불가능하다고 지레 위축되는 경향이 있었다. 즉, 녹지의 유무가 인생 역경의 대응력에 있어 큰 차이를 발생시켰다.

미국 시카고의 영세민 임대주택 단지 중 나무가 많은 곳의 주민들은 지인의 숫자, 이웃과의 유대와 일체감, 사회적 지지망 등에서 높은 수치가 나왔다. 지역사회 소속감이 늘고, 범죄율이 떨어지며, 폭력 빈도가 낮아지고, 가정폭력 비율이 줄어드는 현상도 관찰되었다. 이런 사실을 뇌신경 과학자들이 놓칠 리 없다. 자기공명영상(MRI)을 찍어보니 녹색 자연림을 응시하는 피실험자의 뇌에서 공감과 타인에 대한 사랑을 관장하는 부분이 활성화된 반면, 회색 도심의 콘크리트 건물만 바라본 사람의 뇌에선 두려움과 불안을 지배하는 부분의 활성도가 높아졌다고 한다. 물질적 결핍만이 아니라 ‘자연녹지 결핍’ 역시 반인권적 환경이라는 사실이 이제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뿐만 아니다. 녹지 공간은 공공성의 형성에도 도움을 준다. 미국에서 20세기 초 그린벨트 운동이 벌어진 이래, 대중 공원이 많은 도시일수록 시민들의 공공성에 대한 암묵적 합의 수준이 높다는 점을 정치학자들이 발견했다.

도시 녹화에 따른 두 가지 보너스만 해도 대단한 혜택인데, 본격적인 선물, 즉 기후변화에의 대응력을 높이는 점은 근본적 차원의 혜택이 아닐 수 없다. 학계에서는 일단 어떤 지역이 행정구역상 도시로 분류되는 순간 그곳의 생태학적 영향력을 제로로 가정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2011년 <응용생태학저널>에 실린 연구를 보면 인구 30만명이 사는 영국 레스터시의 개인주택 정원, 공적 공간, 도로변, 용도폐기된 산업단지 등에서 자라는 나무들의 탄소 흡수량이 무려 23만1천톤으로 조사되었다. 독일의 라이프치히시에서 행해진 탄소 발자국 연구는 도시 녹지 1헥타르당 28톤에서 218톤에 이르는 탄소가 흡수된 것으로 추산했다. 이런 효과를 전세계 차원으로 확장해본다면 도시 녹지공간이 단기적으론 기후변화 적응에, 장기적으론 기후변화 완화에 상당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어차피 인류가 앞으로도 계속 도시에서 살 운명이라면 도시를 ‘재자연화’하는 것에 우리의 미래를 걸어야 한다. 한국에서도 나무를 심어 도시 온도를 낮춘 사례가 여럿 있었다. 나무 심기가 주는 복합적인 혜택을 고려하면 도시 녹화만큼 가성비 높은 정책도 없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물론 나무심기가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자칫 보여주기식 행정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또한 이미 푸른 부자 지역을 더 푸르게 하고, 나무가 꼭 필요한 빈곤 지역은 상대적으로 간과하는 전형적인 불공정 조치-줄리언 튜더 하트가 말한 ‘정책의 반비례 법칙’-로 귀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녹지 확충은 도시인권 문제가 발생하는 구조적 조건을 고려한 해결 방식을 지향하는 의제이며, 정치적 논란이 비교적 크지 않은 이슈이기도 하다. 동네마다, 골목 구석마다 나무를 한 그루라도 더 심어 녹색 띠(green belt)가 아니라 녹색 점(green pixels)으로써 인권도시를 구현하려는 방안이다. 전국의 도시 지자체장들이 임기 중 녹지를 최소 10퍼센트 확충하겠다는 ‘청산 인권도시’ 프로젝트에 서약하고, 약속을 지킨 지자체에 청산 도시 로고와 기후변화 대처 모범상을 주면 어떨까. 도시 녹화는 사람도 살리고 도시도 살리고 지구도 살리는 실천이다. 우리는 수풀 우거진 청산 도시에서 살 권리가 있다.

국제인권법의 탄생

조효제의 인권 오디세이

국제인권법의 발전사를 짚어보면 현대 인권담론의 특징과 한계가 드러난다. 유엔헌장 제정 과정에서 인권은 뜨거운 감자와 같았다. 미국, 소련, 중국, 영국은 소극적이었고, 남미, 인도의 대표, 엔지오들은 헌장에 권리장전을 넣자고 주장했다.

국제인권법은 ‘법’이 될 수도 있고, 강대국들의 화투장이 될 수도 있다. 오늘날 국제인권법은 ‘법’ 외의 다른 역할도 많이 수행한다. 지방자치 현장에서, 교육 현장에서, 노동 현장에서 국제인권법을 창의적으로 번안하여 다양하게 활용하고 있다.

지난 1월 방한했던 유엔 인권 특별보고관 마이나 키아이는 한국에서 평화적 집회와 결사의 자유가 지난 수년 동안 계속 후퇴했다고 지적했다. 경찰은 의견 차이가 있다고 하면서도 유엔 기준에 맞추겠다고 했다. 백남기 농민에게 공식사과도 하지 않은 경찰이 왜 유엔 기준에 대해선 립서비스라도 했을까. 유엔 기준이란 유엔에서 만들어진 국제인권법 그리고 국제관습규범을 합한 인권준칙 전체를 가리킨다. 오늘날 국제인권법은 전세계에서 인권담론의 교과서로 간주된다. 국제인권법의 원조인 국제인권규약이 제정된 지 올해로 꼭 50년이 된다.

국제인권법의 발전사를 분석하면 현대 인권담론의 특징과 한계가 드러난다. 2차대전이 끝날 무렵 유엔헌장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인권은 뜨거운 감자와 같았다. 미국, 소련, 중국, 영국은 인권을 언급하는 데 소극적이었고, 남미 국가들, 서구의 몇 나라, 인도의 대표, 그리고 엔지오들은 헌장에 권리장전을 넣자고 주장했다. 결국 헌장에 인권이란 말을 넣었지만 일반적인 의미로만 사용되었다.

유엔총회는 1946년 6월 경제사회이사회 내에 유엔인권위원회를 설치하기로 결정한다. 인권위원회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국제인권장전을 만드는 일이었다. 여기서 또 의견이 갈렸다. 미국, 소련, 중국, 유고슬라비아는 구속력 없는 선언을 선호한 반면, 오스트레일리아, 인도, 영국은 구속력 있는 협정을 원했다. 결국 먼저 선언을 끝낸 후 이어서 협정을 제정하자는 칠레, 이집트, 프랑스, 우루과이의 중재가 성공했다. 1948년 12월10일 세계인권선언이 채택된 바로 그날 유엔총회는 인권위원회가 즉시 구속력 있는 인권법을 만들라고 촉구했다. 유엔총회는 1950년에 시민적·정치적 권리와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가 서로 연결되고 서로 의존한다는 결의안 421호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런데 국제인권법에서 두 종류의 인권을 분리해야 한다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냉전의 이념대결에다 한국전쟁까지 겹쳐져 그런 주장이 힘을 얻었다. 두 권리들의 성격이 다르므로 접근 방식도 달라야 한다는 현실적 고려도 작용했다. 당시만 해도 시민적·정치적 권리는 국가의 개입 자제와 사법부의 결정으로 보장될 수 있는 소극적 인권이고, 경제적·사회적 권리는 국가의 개입과 정책적 판단으로 보장될 수 있는 적극적 인권이라는 식의 단순논리가 통용되었다. 유엔총회는 1952년 규약을 둘로 나눈다는 결의안 543호를 내놓았다. 이렇게 분리된 규약의 초안이 1954년 발표되었지만 그것을 심의하는 데 또 기나긴 시간이 걸려 유엔은 1966년에야 비로소 두 규약을 채택할 수 있었다. 그 후 각 규약당 35개국의 비준서가 기탁되는 데 또 십 년이 흘러 두 규약은 1976년에야 정식으로 발효되었다. 그해 유엔은 사상 최초로 다자간 조약에 의해 만들어진 인권법이라고 대대적인 홍보를 했다.

국제인권규약의 중요 쟁점들을 보자. 첫째, 두 규약의 1조는 공통적으로 “모든 인민의 자결권”을 다룬다. 세계 모든 인민이 정치적 지위를 자유로이 결정할 권리가 있고, 그것에 기반하여 “경제·사회·문화적 발전을 자유로이 추구한다”는 내용이다. 이 조항은 규약 제정 당시 탈식민주의적 시대정신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초국적 자본이 국가의 경제발전과 사회·문화정책을 좌우하는 21세기의 눈으로 보면 경제지구화는 그 자체로서 반인권적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둘째, 자유권규약의 ‘이탈 금지’ 조항은 국민의 생명을 위협하는 공공의 비상사태가 오더라도 절대 침해될 수 없는 권리들을 열거한다. 생명권, 고문이나 노예제도 금지, 법인격 인정, 사상·양심·종교의 자유, 소급처벌 금지 등이 그것이다. 또한 국가가 시민의 생명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한 6조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자유권위원회는 국가가 핵전쟁과 제노사이드 등 대규모 폭력사태로부터 시민의 생명을 지켜줄 의무가 있다고 이 조항을 해석한다. 세계인권선언 17조의 재산 소유권은 자유권규약에서 제외되었다.

셋째, 사회권규약은 특정한 경제체제를 전제하지 않는다. 시장경제, 국가통제경제, 자본주의, 사회주의를 불문하고 인간의 본질적인 욕구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규약에서 인정된 권리들의 완전한 실현을 ‘점진적으로’ 달성하기 위하여”라는 2조의 해석 문제가 있다. 경제·사회적 권리를 일거에 달성하긴 어려우므로 형편을 봐 가며 조금씩 늘리자는 식의 뉘앙스가 풍기는 번역이 나와 있다. 이렇게 되면 반복지 정책에 면죄부를 주는 셈이다. 외교부의 공식 번역본도 이런 잘못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권위원회의 유권해석에 따르면 ‘progressively’라는 말에는 국가가 국민의 최소한의 기본욕구를 충족시켜야 하고, 그런 조처가 후퇴해서는 안 되며,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즉, ‘전향적·지속적으로’가 정확한 해석인 것이다.

세계인권선언과 국제인권규약 2개(그리고 선택의정서)를 합친 3대 문헌을 ‘국제인권장전’이라고 부른다. 데이비드 와이스브로트는 국제인권장전이 “유엔 가입 국가가 반드시 준수해야 할, 인권 의무에 대한 가장 권위있고 포괄적인 문헌”이라고 강조한다. 음악에 비유하자면 유엔헌장은 공연장, 세계인권선언은 작곡가, 국제인권규약은 연주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국제인권규약이 어떤 의의를 지니는가. 첫째, 과거의 국제법이 국가의, 국가에 의한, 국가를 위한, 국가 사이의 약속이었다면, 국제인권규약은 각국의 민초들이 자신의 국가와 국제사회에 대해 자기 권리를 요구할 수 있도록 보장한 파격적인 국제법이다. 전통적인 시각에서 보면 말 그대로 ‘국가가 뒤집힐’ 정도의 사건인 셈이다. 둘째, 인권을 국제 차원에서 제도화했다. 국제인권규약 이전에는 인권운동이 천부인권이나 세계인권선언의 도덕적 호소력에 의존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인권규약이 나옴으로써 국가를 상대로 법적 책무를 공식적으로 요구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셋째, 국제인권규약은 국제인권법 체제의 모태이자 그 후 여러 국제인권법들의 모델이 되었다. 예를 들어, 여성차별철폐협약(1979), 고문방지협약(1984), 아동권리협약(1989), 이주노동자권리협약(1990), 장애인권리협약(2006), 강제실종협약(2006)은 거의 모두 국제인권규약의 형식과 이행 방식을 따르고 있다.

국제인권규약이 나온 뒤 국제인권법 체제에 대한 기대가 높아졌다. 1970년대와 80년대의 국제인권운동에서는 국제인권법 비준 운동이 아주 중요한 활동이었다. 현재 세계에서 168개국이 자유권규약에, 164개국이 사회권규약에 가입해 있다. 한국은 1990년에 두 규약을 비준했다. 미국은 1992년에야 자유권규약을 비준했고, 사회권규약은 서명만 해놓은 상태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하지만 오늘날 국제인권법이 실질적인 인권보장에 얼마나 효과가 있는가 하는 실효성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와 더불어 국제인권‘법’을 국내법처럼 이해하거나 그렇게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도 많다. 국제인권법은 외견상 법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중앙권력이 부재한 국제관계의 맥락 속에서 작동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기 때문이다. 인권이 인간 존엄성의 보장이라고 하는 어마어마한 규범성을 내세우지만, 국제인권법의 실제 구속력은 느슨하기 짝이 없다.

요컨대, 절대적 규범성과 미약한 구속력의 모순적 동거가 국제인권법의 특징인 것이다. 이 때문에 인권에 큰 기대를 거는 사람일수록 인권이 국제 차원에서 실제로 작동하는 모습에 실망하기 쉽다. 국제법학자 에릭 포즈너는 국제인권법은 법이라기보다 특수한 형태의 정치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우리가 활용하기 나름으로 국제인권법은 ‘법’이 될 수도 있고, 강대국들의 화투장이 될 수도 있다. 오늘날 국제인권법은 ‘법’ 외의 다른 역할도 많이 수행한다. 지방자치 현장에서, 교육 현장에서, 노동 현장에서 국제인권법을 창의적으로 번안하여 다양하게 활용하고 있다. 반세기 전에 뿌려진 씨앗이 예상치 못한 곳에서 열매를 맺고 있는 것이다.

반인권 압력단체의 흥망

최근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차별금지 반대운동, 다시 말해 차별찬성 운동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국회의원들이 발의한 법안은 번번이 무산되고, 지자체의 인권조례 제정 움직임도 융단폭격을 맞곤 한다. 이른바 ‘애국’을 내세우는 단체, 일부 학부모 모임, 극보수적 종교단체의 활동 때문이다.

신심 깊은 종교인이라 해서 무조건 차별에 찬성하지는 않는다. 교리상의 믿음과 세속사회에서의 민주적 원리를 분별하고, 신앙과 공적 이성 간의 긴장을 성숙하게 다룰 줄 아는 종교인들의 여러 입장들을 인권의 길로 모을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면 좋겠다. “함께 살아가야 할 사람들끼리 인간의 존엄성과 사랑을 지키는 일”, 이것이야말로 종교 본연의 몫이지 않겠는가.

인권에 관심 있는 독자들은 이년 전 늦가을 서울시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잘 기억하실 것이다. 그 과정을 기록한 백서 <서울시민 인권헌장>(문경란·홍성수 편)을 다시 읽어 봐도 우리가 과연 법치국가인지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공청회 자리는 동성애 반대단체의 ‘조직적 참여와 방해’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시민위원회는 차별금지의 인권원칙을 지켜냈지만 헌장은 끝내 공식적으로 선포되지 못했다.

최근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차별금지 반대운동, 다시 말해 차별찬성 운동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국회의원들이 발의한 법안은 번번이 무산되고, 지자체의 인권조례 제정 움직임도 융단폭격을 맞곤 한다. 이른바 ‘애국’을 내세우는 단체, 일부 학부모 모임, 극보수적 종교단체의 활동 때문이다. 반인권 압력단체가 공적 의사결정을 무력하게 만드는 현상을 정밀하게 분석하고, 대응 방안을 깊이 고민해야 할 필요가 커졌다. 그런 점에서 미국의 총기 규제를 둘러싼 경험은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를 준다.

알다시피 미국의 총기 피해 규모는 막대하다. 2013년에 총기에 의한 타살과 자살로 총 3만3636명이 사망했다. 1968년부터 2011년까지 약 140만명이 총 때문에 죽었다. 2차대전 이후 전사한 미군의 합계가 40만명 미만임을 생각하면 실로 가공할 수준이다. 현재 약 3억 정의 총기가 일반 시민의 수중에 있다고 한다. 인구 100명당 88정의 분포, 단연 세계 최고 수준이다. 총기 사고가 터질 때마다 규탄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오바마 대통령은 14번이나 이 문제에 대해 발언을 했고 눈물을 흘리면서 호소도 했다. 연방 차원에서 반자동식 총기를 포함한 공격살상용 무기를 금지시킨 법이 1994년 만들어지긴 했다. 그러나 10년 후 법을 연장해야 한다는 일몰조항 탓에 2004년에 자동폐기되고 말았다. 테러 용의자의 총기 구입 금지, 그리고 총기 구입 때 개인경력을 의무적으로 조사하게 하는 법도 막혔다. 총기를 전면 금지하자는 것도 아니고, 상식적 차원에서 규제하겠다는 것조차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흔히 미국의 독특한 ‘총기 문화’를 거론하곤 한다. 개인주의와 서부 개척사, 카우보이 신화 등이 미국인의 심성 깊이 자리 잡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19세기 중반부터 주로 농촌에서 총포를 판매하기 시작했는데 초기에는 쟁기와 같은 농기구처럼 취급되었다고 한다. 그 후 외국으로 무기를 수출하다가 내수시장을 개척할 방편으로 총기를 도시 소비자들의 기호품, 선망의 사치품으로 브랜드화했다는 것이다. 실생활 도구재가 문화적 소비재로 전환되었으니, 문화가 총기산업을 낳은 게 아니라 총기산업이 문화를 연출한 셈이다.

총기 보유를 미국민의 권리로 인정한 연방헌법 수정조항 2조가 총기에 대한 규제를 반대하는 근거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이 조항을 자세히 보라. “기강이 확립된 주병군(州兵軍)은 자유주의 안전 보장에 필수적이므로, 인민의 무기 소지·휴대 권리가 침해될 수 없다.” 즉, 정치공동체의 집단 안보를 위한 자위책으로서의 무장권에 가깝다. 주 차원에서는 개인의 총기 획득, 판매, 소지, 운송, 사용을 규제한 곳이 많다. 이런 규제 조치에 대해 위헌소송이 수백 건이나 있었지만 대법원은 그때마다 합헌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총기 보유가 헌법적 권리이긴 하나 그것이 적절한 총기 규제와 상충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문화도 헌법도 총기 문제의 근본 원인이 아니라면 무엇이 문제인가. 바로 전미총기협회(NRA)라는 단체다. 원래 전미총기협회는 1871년 스포츠클럽으로 시작되었다. 사냥 훈련, 사격술 교습, 총기 안전교육, 자연보호 활동을 하던 비교적 ‘건전한’ 동호인 모임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 지도부가 총기규제를 완고하게 반대하는 극단 노선을 취하면서 총기 관련 입법저지 로비단체의 정체성을 갖기 시작하여 현재 회원수 약 500만명에 연 예산 3억달러를 쓰는 초대형 압력단체가 되었다. 미국의 선출직 공직자들 전원을 총기에 대한 입장, 이 한 가지 기준만으로 평가하여 낙선운동을 벌인다. 현재 이 단체의 지도부는 극우파 및 총기제조업체들과 끈끈하게 유착되어 있다. 극렬 압력단체의 ‘조직적인 참여와 반대’, 이것이 정치인들이 총기규제를 강화하지 못하게 하는 근본 원인인 것이다.

미국에서 압력단체의 원조는 주점반대연맹(ASL)이다. 연맹을 이끌었던 웨인 휠러라는 변호사는 ‘압력단체’라는 용어를 만든 장본인이다. 알코올 반대, 이것 하나만 파고들어 헌법 수정조항 18조를 통과시키고 금주령 시대를 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술을 반대하기만 하면 종교인에서 케이케이케이(KKK)까지, 누구하고라도 손을 잡았다. 1903년 오하이오주 의원들 70명을 알코올 동조자로 몰아 전원 낙선시키고, 주지사 마이런 헤릭까지 찍어내기에 이르렀다. 미국 정가에선 “자칫하면 헤릭 꼴 난다”는 말이 유행어가 되었다. 바로 여기에 압력단체와 이익단체의 딜레마가 있다. 민주주의의 통상적 일부이긴 하나 다수 대중의 뜻을 왜곡시킬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전미총기협회를 규제할 수 있는 온갖 아이디어들이 나와 있다. 이 중 피터 드라이어 교수의 제안이 눈에 띈다. 첫째, 촛불집회, 기도모임, 탄원과 진정 등 전통적인 방식을 계속 활용한다. 당장 효과가 없어도 꾸준히 대중여론을 환기하는 것이 차별 반대의 기반을 조성하는 길이다. 둘째, 아주 중요한 국면에서는 시민적 불복종과 직접행동에 나설 수도 있다. 그리고 총기제조업체들에 대해 투자회수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대학, 종교기관, 연기금 등에서 실제로 투자를 철회하는 움직임이 나오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총기 소유자와 규제 반대론자를 구분해야 한다는 주장이 흥미롭다. 총을 갖고 있다고 해서 모두가 생각이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전체 총기 소유자 중 전미총기협회 회원은 5퍼센트 미만에 불과하다. 작년 말 나온 여론조사 하나가 눈길을 끈다. 전국의 총기 보유자 중 83퍼센트가 총기 구입 전 개인경력 조사에 찬성했다. 민주당, 공화당 지지자들 사이의 차이도 크지 않았다. 협회 내에서도 지도부의 강경노선에 반대하는 회원이 72퍼센트나 되었다. 협회의 원래 설립 취지와 동떨어진 극단적 활동에 실망하여 탈퇴하는 회원도 나오고 있다.

이런 식으로 따져보면 놀라운 결과를 확인할 수 있다. 모든 형태의 총기규제를 반대하는 골수 총잡이들은 전미총기협회 회원 중 4분의 1, 전체 총기 보유자 중 0.8퍼센트, 전체 국민 중 0.2퍼센트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미국민 500명당 1인밖에 안 되는 극소수가 499명을 인질로 삼아 민주주의를 흔들고 있다. 요즘 ‘책임 있는 총기 보유자 운동’이 벌어지기 시작한 점을 눈여겨볼 만하다.

미국의 경험으로부터 우리가 참고할 점이 무엇인가. 우선 긴 시간이 걸릴 것임을 각오해야 한다. 또한 철통같아 보이는 압력단체도 시대상황의 산물이므로 시대가 바뀌면 얼마든지 사라질 수 있다. 주점반대연맹이 좋은 예이다. 금주령으로 인해 마피아가 발호하는 등 역효과가 났고, 대공황 이후 세수가 감소한 탓에 주류세가 필요해지자 주점반대연맹은 일거에 힘을 잃었다. 두고 보라. 악착같은 전미총기협회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한국에서 반인권, 차별의 흐름이 사회의 보수화와 맞물려 있는 점을 생각한다면 개별적인 차별 문제를 넘어 전 사회의 에토스를 변화시킬 정치적·문화적 계기를 모색해야 한다. 차별 반대의 지지 기반을 다각도로 넓힐 노력도 필요하다. 신심 깊은 종교인이라 해서 무조건 차별에 찬성하지는 않는다. 교리상의 믿음과 세속사회에서의 민주적 원리를 분별하고, 신앙과 공적 이성 간의 긴장을 성숙하게 다룰 줄 아는 종교인들의 여러 입장들을 인권의 길로 모을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면 좋겠다. 어느 활동가의 지적처럼 “함께 살아가야 할 사람들끼리 인간의 존엄성과 사랑을 지키는 일”, 이것이야말로 종교 본연의 몫이지 않겠는가.

어느 작가의 특별한 인권선언

우리는 지금 인간의 정신력을 시험하는 격랑의 시대를 건너고 있다. 대통령의 범죄적 헌정유린으로 백척간두에 선 한국 민주주의, 세계적 재앙으로 전락한 미국의 선거정치, 기후협정의 붕괴 가능성이 현실화된 지구 혹성. 어디를 둘러봐도 불안정과 불확실이 짙은 농무처럼 앞을 가로막는다.

사람은 사회에 쓸모가 있고, 세상사에 관심을 가진 시민이 되기 위해 충분한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 사람이 자신의 재능을 계발하여 인류에 봉사할 수 있도록 기회균등의 특별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사람은 일반적 지식의 전 분야에서 용이하게 정보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하며, 토론과 결사와 신앙의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우리는 지금 인간의 정신력을 시험하는 격랑의 시대를 건너고 있다. 대통령의 범죄적 헌정유린으로 백척간두에 선 한국 민주주의, 세계적 재앙으로 전락한 미국의 선거정치, 기후협정의 붕괴 가능성이 현실화된 지구 혹성. 어디를 둘러봐도 불안정과 불확실이 짙은 농무처럼 앞을 가로막는다. 그러나 칠흑 속에서도 등불을 찾을 수 있고 찾아야 하는 법. 역사에서 비근한 사례를 하나 들어 보자. 파시즘이 파죽지세로 세계 지배의 불구덩이를 넓혀가던 때의 이야기다. 그 풍전등화와 같던 순간에도 새 시대를 위한 비전에 몰두한 사람이 있었다. <타임머신>, <투명인간>, <우주전쟁>을 쓴 소설가이자, 탱크, 대중감시, 세균전, 라디오, 텔레비전, 원폭, 지구 온난화를 예측한 미래 연구가 허버트 조지 웰스였다.

우리에겐 과학소설가로 많이 알려진 까닭에 웰스를 주류 문학에서 다소 비켜나 있는 존재로 보기 쉽다. 그건 오해다. 당대에 조지프 콘래드나 조지 버나드 쇼와 어깨를 나란히 하던 문호였고, 보르헤스는 웰스의 작품을 “인류 전체의 우화로 기억될 것”이라고까지 했다. 영국 펜(PEN) 클럽이 매년 웰스 기념강연을 개최할 정도로 영문학에서 비중이 큰 인물이다. 웰스는 문명비평가로도 이름이 높았다. 특히 현대 인권에서 그가 남긴 족적은 세계사적인 의미가 있다.

웰스는 전쟁의 목적이 파시즘과 나치즘을 물리치고 인권을 보장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런 신념으로 그는 1940년 <인간의 권리>(나중에 <새로운 세계질서>로 재간행)라는 소책자를 냈다. 일흔이 넘은 노대가가 “인간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재건”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쓴 정치평론서였다. 그는 주권재민 원칙으로 통제되지 않은 정부는 “조직범죄 비슷하게” 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인권을 지키든지 아니면 꺼지든지” 둘 중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 책 10장에 ‘인간의 권리선언’이 나온다.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웰스가 보내준 저서를 읽고 영감을 얻어 1941년 의회에서 ‘네 가지 자유’라는 유명한 연설을 했다. 웰스가 타계하고 2년 뒤 유엔에서 ‘세계인권선언’이 제정된다.

역사를 통틀어 수많은 권리선언이 나왔지만 문필가가 개인적으로 발표한 인권선언, 게다가 사회권·발전권·교육권으로 시작되는 선언은 거의 전례가 없다. 간결하지만 강렬하고 실험적이며 논쟁적인 문헌이다. 사료로서의 가치를 고려해 번역하여 선보인다. 아마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글이 아닐까 한다. 12월10일 인권의 날을 맞아 직장이나 평생학습 모임에서 각자가 인권선언을 작성해 발표하는 시간을 가지면 어떨까.

1. 모든 사람은, 인종·피부색·신념·의견과 무관하게, 자신의 온전한 심신 발전의 가능성을 실현하고,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건강 상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섭생·의복·의료·보살핌을 받을 권리가 있다.

2. 사람은 사회에 쓸모가 있고, 세상사에 관심을 가진 시민이 되기 위해 충분한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 사람이 자신의 재능을 계발하여 인류에 봉사할 수 있도록 기회균등의 특별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사람은 일반적 지식의 전 분야에서 용이하게 정보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하며, 토론과 결사와 신앙의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3. 사람은 합법적인 어떤 직업에도 자유롭게 종사할 수 있으며, 자신의 노동과 그 노동이 공동체의 복리에 기여하는 데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만큼의 수입을 올릴 수 있다. 사람은 유급고용에 대한 권리, 그리고 다양한 고용형태가 존재하는 한, 자유로운 직업 선택권이 있다. 사람은 자신의 고용을 제안할 수 있으며, 그런 제안은 공적으로 고려된 후 수용 또는 기각될 수 있다.

4. 사람은, 공동선에 부합하는 양과 한도 내에서, 합법적으로 거래된 것이라면 무엇이든 차별적 제한 없이 매도하거나 매수할 권리가 있다.

5. 사람은 자기 인신 및 합법적으로 취득한 사유재에 대한 사적 폭력, 갈취, 강제, 위협으로부터 경찰과 법의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

6. 사람은 자기 비용으로 전세계를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의 주택이나 아파트 또는 일정한 규모의 정원은 자신의 성과 같아서 주인의 동의가 있어야만 출입이 가능하다. 그러나 자신의 방문이 특별한 해를 끼치지 않는 한, 또는 본인에게 위험하지 않는 한, 그리고 다른 시민에게 지나친 불편을 초래하지 않는 한, 모든 나라, 광야, 산, 농장, 크고 작은 수목원, 바다, 호수, 강을 자유롭게 왕래할 권리가 있다.

7. 자신의 정신 상태로 인해 관할기관으로부터 자신과 타인에게 위험하다는 판정-매년 갱신되는-을 받지 않은 한, 누구도 범법 행위로 기소되지 않은 상태에서 6일 이상 구속될 수 없으며, 기소되었다 해도 공개재판 없이 3개월 이상 구속될 수 없다. 후자의 경우, 구속 만료 시점까지 적법절차에 따른 재판 혹은 선고를 받지 않은 사람은 무조건 석방되어야 한다. 또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를 군이나 경찰에서 강제로 징집해서는 안 된다.

8. 사람은 타인으로부터 자유롭게 비판받을 수 있지만, 고통과 해악을 초래하는 허위 사실이나 무고로부터 적절하게 보호받아야 한다. 자신에 관한 행정상의 기재사항과 기록을 본인이 직접 비공개로 열람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정부 조직도 개인에 관한 비밀기록을 보유할 수 없다. 정부가 관리하는 개인 기록에 대해 당사자가 접근할 수 있어야 하며, 본인의 요청에 따라 확증과 수정이 가능해야 한다. 개인 기록은 단순한 서류에 불과하므로 공개된 법정에서 적절한 확인절차를 거치지 않는 한 법적 증거물로 사용될 수 없다.

9. 누구도 본인의 자유의사에 따른 분명한 동의 없이 어떤 식으로든 상해 또는 단종 시술을 받지 않으며, 자해를 막기 위한 경우를 제외하고 신체적 제약을 받지 않으며, 고문, 구타 및 여타 체벌을 받지 않는다. 사람은 정신적 고통을 야기할 목적의 과도한 방음, 소음, 점등, 암흑 상태에서 구금을 당하지 않으며, 전염의 우려가 있는 비위생적 상태에서 구금되지 않으며, 질병을 전파할 가능성이 있는 수인들과 함께 혼거 수용되지 않는다. 사람은 강제급식을 당해서는 안 되며,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단식의 중단을 강요받지 않는다. 사람은 강제로 투약을 당하지 않으며, 본인의 인지와 동의 없이 약물치료를 받아서도 안 된다. 극형은 15년 이하의 중벌 구금 또는 자발적 죽음의 선택에 국한된다. (웰스는 이런 죽음이 사형과 구분되며, 자살할 권리를 의미하지도 않는다고 부연 설명한다.)

10. 이 선언의 모든 조항과 원칙은 모든 사람이 용이하게 접근할 수 있는 기본적 인권헌장에 공식적으로 폭넓게 규정되어야 한다. 특정한 목적을 품고 이 선언의 내용을 어떤 식으로든 제한하거나 제거해서는 안 된다. 이 선언은 역사상 출현했던 모든 인권선언의 핵심 사항들을 정리한 것이므로 새로운 시대를 맞아 이러한 인권선언이 세계 인류의 기본법으로 제정되어야 한다.

기본권에 영향을 주는 그 어떤 조약이나 법률도, 그것이 성년의 모든 시민들이 적극적 혹은 암묵적으로 동의하여 공개적으로 성립되지 않는 한, 개인이나 지방 혹은 공동체의 행정조직에 구속력을 갖지 못한다. 집단 전체의 행동에 관한 사안에 있어서는 다수에 의한 결정만이 준수 의무를 가진다. 어떤 공적 조직도 비상사태나 편의적 이유를 근거로 이 선언에 나온 자유와 권리를 어떤 식으로든 침해할 수 있는 법률 규정을 제정할 권한을 가질 수 없다. 입법은 공적으로, 명확히 이루어져야 한다. 비공개로 제정된 법규는 개인이나 조직이나 공동체에 구속력을 가질 수 없다. 기존 법률의 적용 범위를 자의적으로 확대하는 어떤 조처도 허용되지 않는다. 입법에 있어 국민 외에 그 어떤 원천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의 생명력은 새로운 세대의 시민들에게 끊임없이 이어지므로, 어떤 세대도 인류의 내재적 권리인 입법 권한을 전체 또는 부분적으로 포기하거나 위임할 수 없다.

마술적 법치 리얼리즘

이쯤 되면 법이라 쓰고 공갈이라 읽어야 정답이 되지 않겠는가. 정리하자면, 대통령 탄핵을 요구한 촛불민심은 박근혜가 꼭짓점을 이룬 지배층이 보여준 형식적 법치와 실질적 법치 사이의 극단적인 괴리, 그 기만성, 그 위선성, 그 이중성, 그 뻔뻔함에 치를 떨고 학을 뗀 것이다.

주름이 가득한 구릿빛 얼굴의 촌로가 칼국수를 먹으며 텔레비전 뉴스를 보다 한마디 던진다. “헌재 심판이 180일이나 걸릴 수도 있다던데.” 앞치마를 두른 주인아주머니가 말을 받았다. “그러니 빨리 심리를 해야 해요.” 정말 간단치 않은 국민이구나 싶었다. 몇 달간 마음 졸였던 긴장이 잠시 풀리면서 오랜만에 비관의 먹구름이 촛불 사이로 흩어지는 듯했다.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되던 순간 나는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한 지자체에서 공무원 인권교육을 하고 있었다. 인권의 날을 하루 앞두고 마련된 자리였다. 강의가 오후 3시부터 시작된 터라 투표 결과에 대한 궁금증이 심했다. 4시가 조금 넘었는데 청중석에 갑자기 스마트폰의 물결이 출렁거렸다. 누군가가 “가결됐답니다!”라고 말해주었다. 일순간 역사의 한복판에 서 있는 듯한, 비장하면서도 벅찬 느낌이 넓은 강당을 채웠다.

보수정권 8년10개월을 돌이켜 보면 인권 분야에서 잘했다 싶은 일을 찾기가 어렵다. 쇠퇴일로의 기간이었다. 작년 이맘때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에서 인권보고 대회를 열었다. 그때 다루어진 사안들을 보라. 메르스 사태 유언비어 엄단, 세월호 사건 유언비어 단속, 국가정보원 불법해킹, 표현의 자유 위축, 다음 카카오톡 세무조사 및 수사, 인터넷언론 등록요건 강화, 방송통신위원회 명예훼손 심의 강화…. 하나같이 반동적이고 시대착오적인 것들이었다. 자유민주주의를 신주 모시듯 하는 권력의 인권관이 고작 이 정도 수준이었다. 지난 몇 달간 벌어진 사태로 미뤄보면 이런 것에도 다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대통령을 위시한 우리 사회 최상층의 정신적 지향성이다. 이런 사고방식의 가장 큰 특징은 법의 지배 원칙에 대한 분열적 태도이다. 한국 보수 지배계급의 의식 근저에 도사린 마술적 법치 리얼리즘을 규명하지 않고 이번 사태를 분석할 수 없다.

한편으로, 형식적 차원에서 마술적 법치 리얼리즘은 법과 규정을 누누이 강조한다. 불법, 엄벌, 엄단, 일벌백계, 척결, 처단, 단두대, 기강확립, 국기문란, 응징 등 권위주의적 언어와 지시로 시민들을 옥죄고 생사람을 잡으면서도 스스로는 법치의 모범생인 양 행세한다. 모든 판단의 최종심급은 검찰의 ‘엄정한’ 수사로 귀결된다. 유엔 특별보고관은 법의 이름을 빌린 이런 식의 겁박 통치가 남한에서 ‘정치적 자유 공간의 위축’으로 나타났다고 비판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공적으로 자기 의견을 말하고자 할 때 수많은 사람이 표현의 수위를 조절하기 위해 은연중 자기검열을 해야 했다.

올해 초 정부 부처들 합동업무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대통령이 한 발언은 이런 경향의 결정판이라 할 만하다. “올해는 국회의원 총선거도 잘 치러야 하는 만큼 엄정한 법질서 확립과 부정부패 척결이 더욱 중요하다”고 위협하면서, “깨진 유리창 이론이 말해주듯이 작은 빈틈이라도 방치하면 탈법·편법 비리가 크게 확산한다”는 경고도 잊지 않았다. 너무 고전적인 적반하장이라서, 법으로 거짓말 장난을 친 피노키오 공주에 관한 동화책이 나올 만도 하다.

다른 한편으로, 실질적 차원에서 마술적 법치 리얼리즘은 법의 지배를 비틀고 농락하고 무력화한다. 탄핵소추안의 사유에도 맨 앞부분에서 이 점이 지적된다. “국민주권주의 및 대의민주주의, 법치국가원칙, 대통령의 헌법수호 및 헌법준수의무… 등 헌법 규정과 원칙”을 위배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가정적 질문을 하나 해보자. 대통령이 그동안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집요하고 살기등등하게 법치를 앞세우지 않았더라도 이번 사태에서 시민들의 분노가 이토록 컸을 것인가. 물론 사건의 중요성에 비추어 여전히 공분은 컸겠지만, 정서적 차원에서 이렇게까지 배신과 허탈감에 빠지진 않았을 것 같다. 나는 이것을 법의 이름으로 행해진 법추행이라고 부르고 싶다.

재벌들도 마찬가지다. 신성한 재산권과 자유기업 원칙을 금과옥조처럼 받들지만 이번에 드러난 삼성의 반사회적, 반시장적, 반기업적 행태를 보라. “대기업 논리는 조폭들의 운영방식과 같다”고 청문회에 나온 어떤 증인이 말하지 않았던가. 법 기술자들의 후안무치한 언동은 한술 더 뜬다. 평생 법질서를 입에 달고 살았던 김기춘은 기억상실로, 공직 검증 책임자였던 우병우는 행방불명으로 법적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

이쯤 되면 법이라 쓰고 공갈이라 읽어야 정답이 되지 않겠는가. 정리하자면, 대통령 탄핵을 요구한 촛불민심은 박근혜가 꼭짓점을 이룬 지배층이 보여준 형식적 법치와 실질적 법치 사이의 극단적인 괴리, 그 기만성, 그 위선성, 그 이중성, 그 뻔뻔함에 치를 떨고 학을 뗀 것이다.

실질적 법의 지배는 이처럼 중요한 가치다. 진정한 법치가 없으면 진정한 인권도 없다. 일찍이 세계인권선언은 전문에서부터 이 원칙을 못 박아 놓았다. “인간이 폭정과 탄압에 맞서 최후의 수단으로 무장봉기에 의지해야 할 지경에 몰리지 않으려면 법의 지배로써 인권이 보호되어야 한다.” 촛불 시민들은 이 점에서 절묘한 균형감각을 보여주었다. 껍질뿐인 법의 지배에 강력히 항거하면서도 평화적 봉기의 대의를 잃지 않음으로써 ‘자기제한적 저항’이라는 고도의 정치참여 행위를 실천한 것이다.

이제 촛불집회는 한국의 대표적인 글로벌 브랜드가 되었다. 언론의 관심만이 아니다. 세계적으로 민주주의가 포퓰리즘과 유사파시즘의 도전 앞에 흔들리고 있는 시점에서 한국 민주주의 모델을 연구하려는 해외 학자들이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단기적으로 촛불집회는 명백하게 직접행동 동원형 신사회운동의 전형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촛불집회가 가시적 성과를 낼 수 있게끔 해준 저변의 장기 역사적 조건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내년에 30주년이 되는 한국 민주주의의 중요한 성과이기도 하다.

첫째, 이런 와중에도 헌정 질서가 어쨌든 유지되고 작동했다. 너무 당연한 것 같지만 놓칠 수 없는 부분이다. 간혹 계엄령에 대한 우려가 나오긴 했지만 적어도 아직까지는 군의 문민통제가 확고한 것으로 나타나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5·16과 12·12를 경험한 나라에서 이건 상당히 평가할 만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친위 쿠데타 같은 시도도 이제 상상하기 어려운 시대가 된 것이다. 병력 수급, 군 인권문제, 방산 비리와 같은 사건으로 인해 군의 개방성과 국방정책의 전문화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면서 역설적으로 군이 국가의 정상적 제도의 일부로 확실히 편입되는 효과가 발생한 측면이 있다.

둘째, 지난 30년간 민주주의의 경험이 시민들의 민주의식을 엄청나게 끌어올렸다. 6회의 대통령 선거와 7회의 국회의원 선거를 거치면서 민주주의 교육의 학습곡선이 가파르게 상승했다. 흔히 민주적 선거를 한번 잘 치르면 유권자들에게 10년 이상의 정치학 공부 효과가 생긴다고 한다. 후보와 정당에 관해 토론하고 논쟁하고 주장하고 소통하는 것 이상의 민주주의 교육이 또 어디 있겠는가. 또한 사회교육, 평생교육 덕분에 공공성에 대한 합의 수준이 높아졌다. 이렇게 민주시민 의식이 축적된 바탕 위에서 촛불집회의 자발성과 방향성이 자연스레 표출되었다고 봐야 한다. 한 사람이 오래 촛불을 들 순 있다. 여러 사람이 잠깐 촛불을 들 수도 있다. 그러나 학습된 민주의식 없이 수백만 시민이 오랫동안 촛불을 드는 건 불가능하다.

셋째, 지난 20년간 시행했던 지방자치 제도가 헌정 중단의 위험 앞에서도 안정적 국정 운영에 보이지 않는 발판 역할을 했다. 중앙정부 차원에서 어떤 위기가 닥쳤다 해도 상대적 자율성을 지닌 지방정부가 완충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시민들의 일상적 삶에는 직접적인 피해가 없었다. 식물 대통령과 겉도는 내각 탓에 중앙 부처 공무원들은 요즘 멘붕에 빠졌다는 소문이 많다. 하지만 지자체 차원에선 큰 동요가 없다고 한다. 예전처럼 지자체 장을 중앙에서 직접 임명한다고 생각해 보라. 요즘 같은 때에 어떻게 되겠는가.

강연을 마치고 귀경 열차를 타기 전, 역 근처의 작은 식당에 들렀다. 주름이 가득한 구릿빛 얼굴의 촌로가 칼국수를 먹으며 텔레비전 뉴스를 보다 한마디 던진다. “헌재 심판이 180일이나 걸릴 수도 있다던데.” 앞치마를 두른 주인아주머니가 말을 받았다. “그러니 빨리 심리를 해야 해요.” 정말 간단치 않은 국민이구나 싶었다. 몇 달간 마음 졸였던 긴장이 잠시 풀리면서 오랜만에 비관의 먹구름이 촛불 사이로 흩어지는 듯했다.

트럼프 시대의 인권 트럼프

트럼프 현상의 원인을 제공한 분배 불평등에 대해 인권이 새로운 시각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기존의 사회권이 신자유주의의 공세 앞에서 상당히 무력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사회정의의 관점에서 용인될 수 없을 정도의 격차는 그 자체가 심대한 인권유린임을 선언해야 한다. 가칭 ‘불의한 불평등 철폐에 관한 국제 인권협약’과 같은 담대한 조처가 필요하다.

경제적 이슈에만 인권운동의 초점을 고정시켜서도 안 된다. 중산층 백인들도 트럼프를 많이 찍었음을 기억하면 그 이유가 나온다. 모든 종류의 낙인찍기와 증오를 배격하고, ‘약자 공격과 증오 선동에 대한 무관용’을 인권의 중핵 과제로 끌어올려야 한다. 표현의 자유 뒤에 숨어 악의적으로 자유의 기반을 허무는 자들까지 인권의 이름으로 옹호해줘선 안 된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저명한 법철학자인 로널드 드워킨의 <권리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기>는 인권학에서 고전에 속하는 저서다. 한국에는 <법과 권리>로 소개되어 있다. 드워킨은 법의 역사 속에서 발전해온 개인의 평등한 권리가 곧 법의 지도원칙이므로 그 어떤 사회적 목표로도 권리를 억압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국가는 설령 공중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인간의 본질적 권리를 침해할 수 없다. “개인의 권리는 그 사람이 가진 정치적 으뜸패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포커게임에서 으뜸패(트럼프)가 다른 모든 패들을 꺾듯이, 사회에서도 권리가 다른 모든 이익을 이긴다는 뜻이다. 인권이 정치 공동체의 트럼프인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트럼프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세계 최강대국의 대통령이 되어 인권과 거리가 먼 정책을 펼치려 하고 있다. 역설이 따로 없다.

며칠 전 트럼프 당선자는 관타나모 기지에 갇힌 수인들이 극히 위험한 존재라는 트위터를 날렸다. 트럼프식 ‘탈진실’의 전형적인 예다. 알다시피 관타나모 기지의 수인 중 720명이 이미 무혐의로 풀려나 제3국으로 이주했고 현재 59명만이 잔류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23명은 국방부와 국토안전부의 결정에 따라 석방 날짜만 기다리고 있다. 9·11사태와 직접 연루된 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은 오직 5명밖에 없다. 그런데도 사실을 완전히 호도하는 발언을 한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인권 전망은 암울하다 못해 시계 제로에 가깝다. 고문에 대한 입장을 보라. 오바마 정부에서 금지되었던 강화심문 기법(물고문의 완곡어법)이 부활할 것 같다. “국민이 강하게 원한다면 물고문 아니라 더 심한 짓이라도 기꺼이 하겠다”고 공언한 상태다. 요즘 미국 내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은 공포 속에 살고 있다. 선거 공약대로라면 수백만명을 색출하여 수용소에 가두거나 강제송환시킬 것이다. 그것도 법의 이름으로 말이다. 이민으로 이루어진 나라 미국의 맥락에서 이런 정책은 나치의 유대인 강제추방에 비견될 정도로 끔찍한 연상을 불러일으킨다.

이주자 집단만이 아니라 무슬림, 히스패닉, 여성, 장애인을 멸시하고 모욕하는 경향도 트럼프의 인식에 깊이 뿌리내려 있다. 내집단과 외집단을 철저히 구분하면서 노골적이고 경멸적으로 ‘타자 만들기’(othering)를 하여 ‘우리’의 일체감을 높인다. 약자, 소수집단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것은 미국에서 새로운 현상이 아니며 미국만의 현상도 아니다. 그러나 세계 최강국의 최고 지도자가 이런 일들을 공식적으로 제도화할 수 있게 해줌으로써, 해묵은 배타주의가 21세기 버전으로 새롭게 승인을 받은 셈이 되었다. 과거에는 차별을 하더라도 대다수가 인권 규범의 눈치를 보면서 조심하던 ‘샤이 차별자’였다. 그러나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규범의 규제를 풀어주는 판이니 이젠 거리낄 게 아예 없어졌다. 앞으론 ‘민낯 차별자’들이 활보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역설적으로 인권운동의 전선이 한층 명확해졌다.

트럼프와 그의 지지자들이 인권을 어떻게 생각할까. 그들에게 인권은 백인 국가의 주권을 강탈하려는 세계주의자들의 음모 또는 노름에 불과하다. 유엔과 같은 다자간 국제기구를 싫어하는 트럼프 추종자들은 인권의 이름으로 가해지는 어떠한 요구도 수용할 마음이 없다. 그러나 타국을 공격하거나 협상의 수단으로 인권을 동원할 수 있다면 그런 인권은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이들은 양식 있는 시민들이 자기들을 무지하고 시대착오적이며 수치스러운 존재로 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바깥으로 비치는 이미지가 어떻든 권력을 잡기만 하면 만사형통이라고 믿을 만큼 교활하고 영리하다. 더 나아가, 이들은 인권을 제대로 지키기 위해 상당히 복잡한 논리와 어려운 실천체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영악하게 이해한다. 인권이 때론 모순적으로 보이기도 하는 구석 역시 이들에겐 행복한 먹잇감이다. 따라서 이들은 포퓰리즘적인 선동으로 인권을 즐겁게 조롱하고 힐난한다.

트럼프의 등장으로 미국민 전체의 체감 인권이 당장 나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타자로 낙인찍힌 약자 집단에 트럼프 대통령은 악몽 중 악몽이지만, 보통 사람들에게 미국은 여전히 자유가 보장되는 활기찬 나라, 혹은 좀 과도한 면이 있긴 해도 여전히 민주주의를 하고 있는 괜찮은 나라다. 그러나 어쩌면 이런 현실이 더 위험할 수도 있다. 극단의 전체주의도 고도의 파시즘도 아닌, 그러나 구성원들 일부를 심하게 배제한 채 나머지들끼리만 일상성과 정상성의 외양을 유지하는 반(反)포용적, 반(半)자유주의적 유사 민주국가로 귀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 사람들의 인권은 트럼프의 미국으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을까. 그의 국수주의적, 고립주의적 경제관은 국제무역 의존도가 높은 나라에 분명 악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리고 미국의 사활적인 국제안보 이해관계가 걸린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겐 생사의 기로가 강요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트럼프의 인권경시 정책이 물결효과를 발생시킬 개연성도 대단히 크다. 미국과 같은 초강대국의 행태는 필연적으로 세계에 예시효과를 전파하기 마련이다. 부시 정부 때 아프리카나 중동의 여러 나라들이 반인권 정책을 부활시켰고 그것을 지적하는 유엔 보고관에게 “미국도 하는데 왜 우리는 못 하는가”라고 공공연하게 반발하기도 했었다. 만일 미국이 공식적으로 고문을 재개한다면 지금도 고문을 시행하는 러시아나 필리핀 같은 나라들이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트럼프가 기후변화를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만에 하나 트럼프 행정부가 기후협정체제로부터 이탈하고 온실가스 감축의 국제 공조시스템이 유명무실해진다면 트럼프 시대는 인류 종말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기점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의 비즈니스형 세계관이 경제·사회적 권리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도 거의 확실하다. 오바마케어의 존폐 논쟁에서 볼 수 있듯 사회권을 부정하는 미국의 태도가 국제적으로도 사회권 보장의 대의를 손상시킬 게 뻔하다.

트럼프의 미국에 대해 세계 인권운동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국제적으로 그리고 일국 내에서 함께 움직임이 일어나야 한다. 크게 봐서 두 가지만 지적하고 싶다. 첫째, 트럼프 현상의 원인을 제공한 분배 불평등에 대해 인권이 새로운 시각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기존의 사회권이 신자유주의의 공세 앞에서 상당히 무력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인간의 본질적 욕구를 공동체가 충족해준다는 사회권의 기본 원칙을 크게 확장해야 한다. 사회정의의 관점에서 용인될 수 없을 정도의 격차는 그 자체가 심대한 인권유린임을 선언해야 한다. 가칭 ‘불의한 불평등 철폐에 관한 국제 인권협약’과 같은 담대한 조처가 필요하다.

둘째, 그러나 경제적 이슈에만 인권운동의 초점을 고정시켜서도 안 된다. 중산층 백인들도 트럼프를 많이 찍었음을 기억하면 그 이유가 나온다. 모든 종류의 낙인찍기와 증오를 배격하고, ‘약자 공격과 증오 선동에 대한 무관용’을 인권의 중핵 과제로 끌어올려야 한다. 물론 인권운동은 표현의 자유를 원칙적으로 옹호해야 한다. 하지만 표현의 자유 뒤에 숨어 악의적으로 자유의 기반을 허무는 자들까지 인권의 이름으로 옹호해줘선 안 된다. 스테판 에셀이 <분노하라>에서 한 말이 있지 않은가. “자유란 닭장 속의 여우가 제멋대로 누리는 무제한의 자유가 아니다.”

사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저지르는 반사회적, 반민주적 존재들이 인권의 보편적 원칙을 악용하는 작태를 무기력하게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이 점을 특히 염려했던 세계인권선언의 제정자들은 선언의 마지막 조항에 대못을 박아 놓았다. “어떤 국가, 집단, 개인이 본 선언의 권리와 자유를 파괴할 활동에 가담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식의 암시나 해석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이제 인권 트럼프가 인간 트럼프로 상징되는 반인권의 공세를 막아내어야 할 과제가 인류 생존의 문제로까지 떠올랐다.

한국인의 인권의식

현재 한국 사회의 인권 상황이 인권을 존중한다고 믿는 국민은 셋 중 한 사람에 불과했다. 인권침해 비율 중 노동권 침해 비율이 제일 높다는 응답이 나왔다. 한국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결과다. 대표적인 차별로는 성차별, 연령 차별, 학력·학벌 차별이 꼽혔다.

우리 사회에서 인권이 침해되고 차별이 자행되는 근본원인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대해 1위가 경제적 지위, 2위가 학력·학벌이라는 응답이 나왔다. 경제 자본과 문화 자본, 이 두 자본의 불평등이 한국에서 인권침해의 심층구조를 이룬다고 국민들이 믿고 있는 것이다. 인권침해와 차별을 저지르는 주체에 대해서 사람들은 정치인, 검찰, 군대 상급자, 경찰, 직장 상사를 열거했다.

최근 국가인권위원회가 <2016년 국민 인권의식 조사>를 펴냈다. 인권위는 2005년부터 국민인권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서울대 정진성 교수가 연구책임을 맡았던 2011년 조사에서 체계적인 틀이 잡혔고, 성균관대 구정우 교수가 이끈 이번 조사는 방법론적으로 진일보한 모습을 보인다. 미디어의 사건 보도 혹은 인권운동가들의 주장과는 다른 차원에서 한국인이 생각하는 인권관을 보여주는 연구다.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인권에 초점을 맞춰 전 국민을 대상으로 전문적 조사를 실시해온 사례는 세계적으로 드물다.

인권 침해를 해결하면 되지 구태여 인권의식 조사가 왜 필요한가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민주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실제로 이해하고 느끼는 인권을 파악하지 못하면 인권 관련 정책이나 행동이 탁상공론에 빠질 수 있다. 또한 국민이 어떤 사회적 고통을 ‘인권 문제’로까지 절실하게 인식한다면 국가는 그런 고통을 최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책무가 생긴다.

국민의 인권의식은 겉으로 드러나는 사회문제의 증상보다 더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인권침해의 근본원인을 찾아내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이런 노력 없이 대증요법에만 치중한다면 동일한 성격의 인권문제가 형태만 달리한 채 반복되기 쉽다. 또한 대중의 인권의식은 그것의 현실적인 영향력 때문에 중요하다. 아무리 좋은 제도가 있어도 사람들이 따르지 않을 때엔 구체적 효과를 내기 어렵다. 아무리 좋은 정책 아이디어가 있어도 사람들이 호응해주지 않으면 시행하기 어렵고 추진력도 확보할 수 없다. 정리하자면, 인권이 절대적 규범성 위에 성립되어 있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을 실행하려면 주권자들의 의식과 선순환 관계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15살 이상 국민 1504명을 대상으로 한 이번 인권의식조사는 여러 면에서 흥미로운 결과를 보여준다. 우선 일반 국민 네 명 중 한 명만이 인권이라는 용어를 친숙하게 받아들였다. 대다수 사람에게 인권은 아직도 낯설고 먼 개념이다. 그리고 인권을 자주 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절대다수가 텔레비전이나 뉴미디어를 통해 인권을 받아들였다. 인권 선진국 국민들도 인권을 일상적으로 흔히 쓰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 경우엔 자국의 현실이 비교적 양호한 까닭에 인권을 상기해야 할 필요성이 낮아서 그렇게 됐을 개연성이 있다. 하지만 한국이 그런 수준의 나라인가. 아니라면 왜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것일까. 이와 연관해서 한국 국민들은 전반적으로 국내외 인권 상황에 대한 인지도가 낮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인권교육의 필요성을 강하게 암시하는 대목이다.

현재 한국 사회의 인권 상황이 인권을 존중한다고 믿는 국민은 셋 중 한 사람에 불과했다. 이렇게 믿는 사람 중에서도 남성이 여성보다 10%포인트 정도 더 높았다. 여성으로서 한국의 인권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열에 세 사람이 채 안 되었다.

상대적으로 인권이 잘 존중되지 않는 영역에는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 공공행정에 참여할 권리, 개인정보 보호, 사회보장권, 노동권 등이 포함되었다. 여성, 아동·청소년, 노인을 제외하고 대다수 취약집단에 속한 사람들, 예컨대 외국인 노동자, 노숙자, 전과자, 성소수자의 인권이 존중받지 못한다고 했다. 인권침해 비율 중 노동권 침해 비율이 제일 높다는 응답이 나왔다. 한국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결과다. 대표적인 차별로는 성차별, 연령 차별, 학력·학벌 차별이 꼽혔다.

세 사람 중 두 사람 이상이 사형을 존치하자고 했고, 얼추 비슷한 비율의 사람들이 범죄 피의자의 얼굴 공개에 찬성했다. 국민의 과반수가 국가보안법을 유지하는 데 찬성했고,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하면 안 된다고 응답했다. 하지만 두 사안 모두에서 젊은층의 의견은 좀더 전향적이었다. 또한 2011년에 비해 두 사안 모두에서 보수적 여론이 줄어든 점이 눈에 띈다. 특히 정부기관의 개인정보 수집·조사에 대해 사생활 침해의 이유로 반대하는 여론이 훨씬 더 높았다. 집회 및 시위의 권리를 지지하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많았다.

경제·사회적 영역에서는 대중의 진보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열에 여덟 명은 비정규직의 차별에 반대했고, 시간당 6470원인 현행 최저시급을 인상해야 한다고 응답한 사람이 무려 91.4%나 되었다. 국민 다수가 사회보장의 확대에 찬동했으며 고소득층의 차별적 의료보장에 분명한 반대 입장을 드러냈다. 부양의무자 규정을 폐지하는 문제에선 찬반 의견이 나뉘었다.

여타 사회적 이슈에서는 찬반이 함께 표출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아동·청소년을 체벌해도 된다는 사람이 48.7%, 외국인 노동자의 가족 입국을 허용하자는 사람이 56.7%, 난민 수용 찬성 국민은 절반 미만, 성소수자의 성적 지향성을 존중하자는 사람은 54.2%로 나왔다.

북한인권 문제에 대한 국민의식도 밝혀졌다. 국민 네 사람 중 세 사람이 북한인권법을 잘 모른다고 대답했다. 대북 인도적 지원 문제에선 무조건 지원하자(26.2%), 투명성을 조건으로 달아 지원하자(41.6%), 즉 국민 셋 중 두 사람 이상이 인도적 지원에 찬성했다. 절대 지원하지 말자는 사람은 28.6%에 그쳤다. 북한인권 향상을 위한 정부의 최우선 과제에 대해서는, 통일에 대비한 인권정책 수립(32.7%), 인도적 지원정책 개발(26.7%), 북한인권 상황 조사 및 침해사례 수집(18.8%), 국제사회 관심 제고(16.5%)라는 응답이 나왔다. 요컨대, 60%에 가까운 국민이 미래지향적 정책과 인도적 지원을 통해 북한인권 문제를 해결하라고 정부에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조사엔 초등학교 5학년 이상부터 중학교 3학년 이하 학생 542명도 별도의 조사 항목에 포함되었다. 초등학생은 친구와의 네트워크가 높을수록, 중학생은 교사와의 네트워크가 높을수록 인권침해를 덜 저지르는 것으로 나왔다. 가정 내에서 인권침해와 차별을 경험한 학생은 학교에서 본인 스스로 인권침해와 차별을 경험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또한 타인의 인권을 침해할 가능성도 높았다. 초등학생들도 성적에 의한 차별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었으며, 외모 때문에 인권침해를 당한다는 응답이 많았다. 초등학교 때에 이미 학내에서 성추행을 당했다는 응답도 많았다. 교육당국과 교사들이 이번 조사를 잘 분석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본질적인 질문에 대한 답변들은 우리에게 특별한 주목을 요한다. 우리 사회에서 인권이 침해되고 차별이 자행되는 근본원인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대해 1위가 경제적 지위, 2위가 학력·학벌이라는 응답이 나왔고, 그보다 한참 떨어진 수준으로 장애 및 전과 여부가 꼽혔다. 경제 자본과 문화 자본, 이 두 자본의 불평등이 한국에서 인권침해의 심층구조를 이룬다고 국민들이 믿고 있는 것이다. 인권침해와 차별을 저지르는 주체에 대해서 사람들은 정치인, 검찰, 군대 상급자, 경찰, 직장 상사를 열거했다. 이 집단들에 대해 특단의 대책이 필요함이 거듭 입증된 셈이다.

공공·민간 기관의 인권보장 노력에 대한 문항도 있었다. 최고 조직으로 시민단체·엔지오가 꼽혔고 국가인권위원회와 국민권익위원회가 그 뒤를 이었다. 최악의 조직으로 청와대와 국회가 뽑혔고 그다음으로 국가정보원과 법무부·검찰이 지목되었다. 그간의 행적으로 보아 놀랍지 않은 답변이긴 하나, 여전히 충격적인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앞으로 어떤 개혁이 필요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이번 조사를 보고 내가 내린 결론은 이것이다. 다수의 한국인은 인권을 명시적으로 인지하진 않지만, 인권이 궁극적으로 정치와 민주주의 및 삶의 질 문제임을 직관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비교적 실용적이고 탈이데올로기적이며 반차별적인 인권관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세대간 차이가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시간은 인권의 편이 아닌가 한다.

날조된 허위정보를 어찌할꼬

‘날조된 허위정보’(disinformation)는 단순한 ‘허위정보’(misinformation)와는 다르다. 날조된 허위정보라는 영어 단어는 러시아말의 ‘데진포르마치야’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주로 정보당국 혹은 군당국이 정치적·군사적·외교적 목적으로 거짓정보를 위조하여 유포하던 것을 지칭했는데 요즘에는 민간, 언론, 기업, 개인들도 널리 활용하게 되었다.

날조된 허위정보와 프로파간다를 그저 무시해선 안 되고, 적극적으로 그것을 비판하는 보도를 해야 한다. 인터넷 서비스 제공자는 팩트 확인 서비스를 제공할 의무가 있다. 특히 “선거 시기와 중요한 공적 이익에 관련된 문제를 토론함에 있어서” 가짜뉴스를 정식 뉴스 의제로 부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올해 있을 대선에서 한국의 언론사가 당장 행동에 나설 수 있는 과제가 아닐까 한다.

삼일절 오후에 서울시청 근처 한 카페에서 직접 마주친 풍경이다. 옆자리에서 안경을 끼고 말쑥한 차림을 한 점잖은 중년 신사풍의 남자가 나지막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정미 재판관 남편이 통진당 당원이라던데.” 같이 있던 사람이 조심스런 어조로 말을 받았다. “음, 내 그럴 줄 알았어….” 말로만 듣던 가짜뉴스가 소비되고 유통되는 현장을 목격한 셈이었다. 이런 ‘뉴스’를 곧이곧대로 믿을 정도라면 으레 어떤 특정한 유형에 속한 사람일 것이라고 상상했던 선입견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가짜뉴스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탈진실이라는 표현은 이미 세계적인 유행어가 되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 탈진실 운운하는 것 자체가 너무 완곡하거나 현학적인 태도가 아닌가 한다. 언제부터 이렇게 빙빙 둘러 말을 하게 되었는지 따져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런 경우에 쓰라고 우리말이 진즉 준비해 놓은 좋은 표현이 있다. 가짜뉴스니 탈진실이니 하는 짓거리는 한마디로 혹세무민하는 ‘새빨간 거짓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지난 금요일 오스트리아 빈(비엔나)에서 중요한 선언이 하나 나왔다. 표현의 자유에 관한 유엔 인권 특별보고관을 중심으로 유럽안보협력기구, 미주기구, 아프리카인권위원회의 표현의 자유 관련 대표들이 발표한 문헌이다. <표현의 자유와 ‘가짜뉴스’, 날조된 허위정보 및 프로파간다에 관한 공동선언>이라는 긴 제목을 달고 있다. 표현의 자유라는 주제를 놓고 여러 국제기구가 이렇게 긴급하게 공동보조를 취한 적은 극히 드물었다.

<선언>의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우선 제목에 나오는 용어를 간략히 정리하고 넘어가자. ‘가짜뉴스’는 사실이 아닌 내용을 통상적인 미디어 기사처럼 포장하여 내놓는 것이다. 가짜뉴스는 그 내용이 사실이 아니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점은 사실이 아닌 콘텐츠를 의도적으로 생산, 확대, 유포, 재활용한다는 데 있다. 가짜뉴스는 날조된 허위정보의 하위 범주에 속한다. 날조된 허위정보란 정보 콘텐츠의 진실성이 허구이면서 어떤 대상을 기만할 목적으로 고의적으로 유포한 메시지를 뜻한다.

이 점에서 ‘날조된 허위정보’(disinformation)는 단순한 ‘허위정보’(misinformation)와는 다르다. 허위정보 또는 오보는 잘못된 정보이긴 하나 그것의 고의성은 명확지 않다. 뜻하지 않게 오보가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날조된 허위정보라는 영어 단어는 러시아말의 ‘데진포르마치야’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주로 정보당국 혹은 군당국이 정치적·군사적·외교적 목적으로 거짓정보를 위조하여 유포하던 것을 지칭했는데 요즘에는 민간, 언론, 기업, 개인들도 널리 활용하게 되었다.

무서운 일이다. 날조된 허위정보가 판치는 곳에서는 정상적인 민주주의도, 개인들 간의 최소한의 이성적인 논의도 불가능하다. 기본적인 사실관계부터 동의가 되지 않는 수준이라면 그 어떤 의사소통도 의미가 없을 것이다.

날조된 허위정보가 인권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선언>은 바로 이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날조된 허위정보는 개인의 평판과 사생활에 큰 침해를 가할 수 있다. 게다가 악의적인 거짓정보는 폭력선동 세력에게 그럴듯한 정당성을 부여해 주고, 특정집단에 대한 차별과 적대감이 기승을 떨칠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한다.

중요한 인권침해는 세 단계를 거치면서 현실로 나타나곤 한다. 우선 ‘팩트’에 의한 인지적 설득이 있고, 그것에 따라 정서적 고조가 일어난 후, 실제 인권침해 행동이 발생한다. 날조된 허위정보는 세 단계 인권침해의 연쇄모델에서 최초의 관문, 즉 ‘팩트’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너무 뻔한 엉터리 주장을 접하면 그냥 웃어넘기곤 한다. 하지만 인권의 역사를 돌아보면 그렇게 간단히 볼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나치는 유대인을 절멸시키기 전에 먼저 그들에게 공식적으로 ‘인간 이하의 종’이라는 ‘팩트’를 부여했다. 일반국민이 유대인을 그런 식으로 인지한 후엔 그 집단에 대한 적개심이 자연스레 일었고, 더 나아가 물리적 가해도 쉽게 일으킬 수 있었다. 어떤 일에서나 첫 단추가 중요한 법이다.

표현의 자유는 원래 ‘정보의 자유로운 소통권리’와 짝을 이룬 개념이었다. 세계인권선언 19조를 보라. “모든 사람은 표현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 이 권리에는 간섭받지 않고 자기 의견을 가질 수 있는 자유와, 모든 매체를 통하여 국경을 넘어 정보와 사상을 구하고 받아들이고 전파할 수 있는 자유가 포함된다.” 그런데 정보의 자유로운 소통권은 ‘옳은’ 정보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고 불쾌감을 유발하며 심적 고통을 가하는 정보도 포함된다.

따라서 날조된 허위정보가 아무리 충격적이고 불쾌하고 역겹다 해도 그것을 일방적으로 금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고 국제인권 기준으로 보아도 쉽지 않은 일이 된다. 바로 이 점에 인권운동의 딜레마가 있다. 인권침해로 직결될 가능성이 농후한 악의적 허위정보를 강제로 차단하고 처벌할 수 있는 방안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선언>은 여기서 두 가지 해법을 제시한다. 우선 날조된 허위정보를 어떻게 할 것인가. 일단 국가가 가짜뉴스의 유포를 무조건 제한하려 들면 표현의 자유 자체를 억제하는 역효과가 발생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이것과 관련하여 (한국처럼) 명예훼손죄를 형법으로 규정해 놓은 것은 폐지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국가는 표현의 자유를 폭넓게 보장하는 한편, 어떤 경우에도 직간접적으로 허위정보를 고무, 유포하는 일에 가담해서는 안 된다. 균형 잡기가 중요한 것이다.

둘째, 표현의 자유를 진흥하기 위해선 국가가 신빙성 있는 정보의 유통을 적극 지원해야 한다. <선언>은 국가가 특히 미디어 다양성을 정책적으로 키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독립적이고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환경을 통해 표현의 자유가 활성화되어 시민의식이 높아지면 가짜뉴스가 공적 영역에서 자연스레 도태될 수 있다는 말이다. 뒤집어 생각해 보면 블랙리스트를 통해 표현의 자유를 억누르면 허위정보가 창궐하는 썩은 늪이 형성됨을 알 수 있다. 또한 국가는 사회 전체의 공동선에 봉사하고, 높은 수준의 저널리즘을 유지하기 위해 공익적 서비스를 하는 미디어를 후원해야 한다.

그것을 위해선 다양하고 수준 높은 미디어 콘텐츠 생산을 위한 재정적·기술적 지원이 필요하다. 미디어 소유권의 집중을 금지하는 조치도 강구해야 한다. <선언>은 가짜뉴스를 가려낼 수 있는 미래시민의 육성을 중시한다. 학교의 정규 커리큘럼에 미디어·디지털 문해증진 교육이 포함되어야 하고, 이런 교육에는 시민사회의 관여가 필수적이다. 날조된 허위정보를 퇴치하고 표현의 자유를 지켜낼 근본조건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평등, 불차별, 문화간 이해, 민주적 가치를 소중히 생각하는 인간의 양성이다.

<선언>은 언론사와 언론인에 대한 당부도 잊지 않는다. 보도의 정확성을 높이기 위해 자율규제 조치를 강화해야 하고, 시민들의 오보 시정 요구를 권리로서 보장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날조된 허위정보와 프로파간다를 그저 무시해선 안 되고, 적극적으로 그것을 비판하는 보도를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가짜뉴스 자체를 심각한 보도주제로 다뤄야 한다는 것이다. 인터넷 서비스 제공자는 팩트 확인 서비스를 제공할 의무가 있다고 한다. 특히 “선거 시기와 중요한 공적 이익에 관련된 문제를 토론함에 있어서” 가짜뉴스를 정식 뉴스 의제로서 부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선언>은 권고한다. 올해 있을 대선에서 한국의 언론사가 당장 행동에 나설 수 있는 과제가 아닐까 한다.

일요일 밤늦게 <선언>을 읽으면서 차기 정부의 언론·미디어 정책에 있어 한줄기 영감을 받은 느낌이 들었다. 더 심해질 가능성이 있는 허위정보와 가짜뉴스로부터 시민들 표현의 자유와 정보의 자유로운 소통권을 보호하는 일, 그리고 다양한 미디어 환경을 조성·후원하는 일, 이것만이라도 앞으로 5년 동안 확실하게 밀어붙이면 어떨까.

인권 대통령 감별법

지금까지 주요 후보들 중 인권과 관련해서 눈에 띄는 발언이나 공약을 내놓은 이가 거의 없다. 성소수자에 대한 입장이 언론에 약간 소개되었을 정도다. 인권특보를 임명한 후보가 있고 북한 인권을 공격 소재로 쓰는 쪽도 있지만 여전히 인권이 이번 대선에서 주된 쟁점이 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인권을 향상하기 위해선 인권문제 해결에 힘을 쏟으면서 그와 동시에 인권 증진을 위한 여건을 형성해야 한다. 후보들은 인권운동의 구체적인 문제제기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고, 선거 국면에서 인권문제를 정면으로 거론하기가 정 부담된다면 여건 형성을 위한 정치적 상상력을 발휘할 줄 알아야 한다.

대통령 선거의 대진표가 나왔다. 조기 대선의 원인을 제공한 대통령 탄핵 사유는 국정농단이었다. 헌법재판소는 이것을 위헌·위법행위에 의한 “대의민주제 원리와 법치주의 정신의 훼손”으로 정리했다. 세계인권선언에서 중요한 인권으로 규정되어 있는 항목들이다.

최고 지도자가 기본인권을 심대하게 위반한 탓에 탄핵을 받고 구속까지 된 역사적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런 난리를 겪은 후에 치르는 대선이라면 당연히 인권이 중요한 쟁점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아쉽게도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지금까지 주요 후보들 중 인권과 관련해서 눈에 띄는 발언이나 공약을 내놓은 이가 거의 없다. 성소수자에 대한 입장이 언론에 약간 소개되었을 정도다. 인권특보를 임명한 후보가 있고 북한 인권을 공격 소재로 쓰는 쪽도 있지만 여전히 인권이 이번 대선에서 주된 쟁점이 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그런데 이런 일은 이번 대선만의 특징이 아니고 한국만의 현상도 아니다.

미국의 경우를 보자. 대선에서 인권을 주요 공약으로 다뤘던 후보는 지미 카터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른바 인권외교를 표방했던 카터는 정확히 40년 전 대통령 취임사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가 자유롭다고 해서 타국 국민들의 자유에 대해 무관심해서는 안 된다. 개인의 인권을 존중하는 나라를 명백히 선호하는 것이 미국민의 도덕관념에 부합된다.” 역사상 미국 대통령 취임사에 인권이 등장한 최초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대외정책에서 그렇게 하겠다는 말이었다. 이라크전쟁 직후 재선에 성공했던 부시도 2005년의 취임사에서 인권을 언급하긴 했다. 그러나 국내의 인권 수호가 아니라 사담 후세인 같은 외국 독재자를 제거한 일을 자화자찬하는 맥락에서였다. 트럼프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오바마조차 공약이나 취임사에서 인권을 거론하지 않았다.

인권이 중요하다는 데엔 모두가 동의하는데 왜 선거에선 주요 이슈가 되지 않는 것일까. 권위주의하에서 선거를 하면 열악한 인권상황을 개선하는 과제가 민주주의 회복이라는 대의로 수렴되곤 한다. 예를 들어, 1987년 민주항쟁 때 “고문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구호가 등장했지만 사실 이 말은 독재를 끝내고 민주주의를 하자는 요구와 같은 뜻이었다.

반면 민주체제에서 선거를 하면 개별 인권 문제가 일반적인 정책의 흐름에 종속되는 경향이 발생한다. 현대 민주국가의 정책은 큰 틀에서 보아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적 목표를 지향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인권에선 단 한 사람의 기본권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고수한다. 그러니 표를 의식하는 후보들은 수적으로 소수에 속한 사람의 권리, 특히 그것이 민감한 쟁점이라면 회피하거나 타협하기 쉽다. 돌이켜보면 1997년 대선에서 국가인권위원회 설립이 공약으로 등장한 건 아주 예외적인 일이었다.

선거에서 인권이 주변적 이슈로 취급된다 하더라도 상대적으로 더 친인권적인 대통령을 뽑는 일은 여전히 중요하다. 그런 대통령을 어떻게 고를 수 있을까. 세 가지 차원의 총점을 합산해 보면 정답이 나온다.

첫째, 후보 개인이 적어도 평균 수준의 인권 감수성과 인권 의식이 있다는 전제하에서, 시민사회에서 주창하는 요구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최근 한국인권학회 준비위원회에서 대선 정국을 맞아 인권 이슈를 점검하는 모임을 열었다. 사회권, 지방정부, 기업, 이주민, 형사사법,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 인권기본법과 청와대 인권보좌관제에 대한 제안이 나왔다.

청소년 인권단체인 인권친화적 학교+너머 운동본부가 주요 대선 후보들을 상대로 실시한 청소년 인권에 대한 ‘인권수능’ 시험성적이 지난 주말에 공개되었다. 7명이 답안지를 제출했고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 후보들은 결시했다. 채점 결과를 보면 후보 간 차이가 있지만 체벌·언어폭력 근절, 청소년 참정권 확대, 학교폭력법 개정, 학생인권 전국적 보장 등에선 대체로 점수가 높았다. 학생인권법 제정에는 대다수가 찬성했다. 청소년 노동인권 등 세부정책에서는 후보 간 차이가 나타났는데 지지율이 높을수록 몸을 사리는 경향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인권을 향상하기 위해선 인권문제 해결에 힘을 쏟으면서 그와 동시에 인권 증진을 위한 여건을 형성해야 한다. 둘 다 잘하면 좋지만 적어도 하나는 잘해야 한다. 후보들은 인권운동의 구체적인 문제제기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고, 선거 국면에서 인권문제를 정면으로 거론하기가 정 부담된다면 여건 형성을 위한 정치적 상상력을 발휘할 줄 알아야 한다.

둘째, 선거 지지율의 분포를 고려해야 한다. 이른바 선택권 집단 이론에서는, 법적으로 선거권을 가지거나 실제로 그 선거권을 행사하는 모든 사람을 선택권 집단이라 한다. 이것과 구별되는 권력획득 동맹이란 게 있다. 이들은 특정 기반에 근거한 열성 지지층으로서 권력획득에 꼭 필요한 핵심 지지세력을 이룬다. 권위주의 체제에서는 선택권 집단의 크기와 상관없이 아주 작은 권력획득 동맹만으로도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 이때 독재자는 핵심 지지층에게만 각종 사회경제적 혜택을 베풀면 된다.

그러나 민주체제에서는 선택권 집단에 비교해 권력획득 동맹의 규모가 상대적으로 커야만 정권을 잡을 수 있다. 따라서 출마자에게는 되도록 많은 사람에게 혜택이 가는 폭넓은 이점을 약속해야 할 인센티브가 발생한다. 달리 말하면 당선에 필요한 절대 수치도 중요하지만, 지지층의 구성이 지역, 연령, 성별, 계층상 고루 분포되어 있는 후보가 만인공통의 재화를 제공할 개연성이 높아진다. 인권은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제공되어야 하는 공공재에 속하기 때문에 그것을 ‘비배제적 재화’ 또는 ‘비경합적 소비재’라고 부르는 것이다. 따라서 가능한 한 다양한 집단으로부터 골고루 지지를 받는 후보일수록 인권을 포괄적으로 보장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셋째, 인권에 관한 국제적 경륜의 차원이 있다. 인권을 시민권과 구분하는 기준은 전자가 국제적인 개념이라는 점이다. 대통령 선거는 한 나라의 최고 대표를 뽑는 자리여서 인권의 초국가적 성격과 완전히 부합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을 대표하면서도 인권의 국제적 지향을 비교적 잘 이해하고 그것을 보편언어로 표현할 줄 알았던 정치인이 김대중 대통령이 아니었던가 싶다.

국제관계에서 인권문제가 어떻게 제기되고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형성·이행되는가 하는 점을 잘 이해하는 차원도 있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좋은 예다. 아마 반 전 총장 같았으면 국제정치 무대에서의 인권 동향이나 인권 의제가 지니는 의미를 외교적으로 능란하게 소화하는 데에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 능력이 대외정책에서 소중한 자산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가 보여준 정치행보의 전말을 보면 국제기구의 고위 기술관료 이상의 인권지도자적 비전을 제시했다고 평가하기 어렵다.

그런데 인간의 생명·자유·행복을 보장한다는 원론적인 의미로 인권을 이해한다면 인권의 국제적 성격을 다르게 규정할 수 있다. 현재 한반도가 처해 있는 상황은 한국전쟁 이래 가장 엄중하다. 만에 하나 우리가 전쟁과 평화의 기로에 선다면 일상에서 인권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사치스런 상황이 올 수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그런 사태를 막는 것이 근원적인 인권보장이라 해야 옳지 않을까. 이런 점에서 본다면 한반도의 파국을 막고 평화, 안정, 공존의 길로 이끌 수 있는 사람이 인권 대통령 타이틀을 지닐 자격이 있다.

안정된 민주공화국이라면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시민의 기본 인권 보장에는 큰 차이가 없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탄핵 사태를 통해 우리는 한국이 아직 진정한 민주공화국의 내적 안정성을 기대하기에는 가야 할 길이 먼 정치공동체임을 확실히 배웠다. 허상이나 막연한 기대에 현혹된 주권자의 ‘민주적’ 선택이 재앙을 부를 수도 있음을 경험했다. 장미 대선에서 인권 대통령을 잘 고를 수 있을지 여부가 대한민국의 흥망을 가르는 이정표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노인을 위한 나라

예전에는 고령화가 극소수 선진국에 한정된 행복한 고민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고령자 중 3분의 2가 소득 중하위권 국가에 거주할 만큼 노인문제는 전세계적인 현상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팻 테인의 말마따나 “늙는다는 것이 역사상 처음으로 정상적인 것이 된” 세상에 살고 있다.

유엔은 노인 인권을 위한 향후 과제 중 하나로 노인들 스스로 공공정책의 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꼽는다. 이는 노인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수동적 접근에서 권리에 기반한 적극적 접근으로 방향 전환을 해야 한다고 보는 고령친화도시와도 통하는 것이다.

얼마 전 경북 영덕에서 경운기 사고로 농부가 사망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60대 노인이었다. 경북 구미에서도 비슷한 사고로 세상을 뜬 농부 소식이 들렸다. 70대 노인이었다. 경북도 소방본부의 집계에 따르면 2016년 한 해 동안 농기계와 관련해 도내에서 발생한 사망자가 총 16명인데 그중 60대가 5명, 70대가 8명이었다. 전국을 합하면 경운기 사고로 목숨을 잃는 고령의 농부들이 얼마나 많을까.

소준철의 연구에 따르면 도시 재활용품을 수집하는 노인들의 삶도 고달프긴 마찬가지다. 이들은 새벽 4시에서 6시 사이에 일을 시작한다. 새벽 1시에서 4시 사이 일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고 한다. 심야 시간은 가장 위험한 시간이기도 하다. 이때 길거리를 헤매는 것은 교통사고 위험을 높인다. 크고 작은 사건·사고가 얼마나 많이 발생할 것인가.

초고속으로 노인층이 늘어나는데도 노인을 위한 대책이 너무나 부족한 나라가 한국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노인 빈곤율, 자살률, 교통사고 사망률이 최악인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삶의 만족도 역시 꼴찌 수준이다. “의지할 수 있는 친척이나 친구가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대변되는 사회적 지지 또한 최하위권이다. 한국 노인들 다수가 가난과 외로움이라는 이중의 늪에 빠져 있는 현실이다.

이번 대선의 유권자 네 사람 중 한 명이 60살 이상이다. 후보들이 내놓은 다양한 노인복지 정책은 주로 기초연금을 올리고 노인의료를 확충하는 게 요점이다. 장기요양보험, 돌봄 서비스, 일자리 등이 단골 공약사항이다. 그런데 이런 논쟁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예전에는 고령화가 극소수 선진국에 한정된 행복한 고민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고령자 중 3분의 2가 소득 중하위권 국가에 거주할 만큼 노인문제는 전세계적인 현상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팻 테인의 말마따나 “늙는다는 것이 역사상 처음으로 정상적인 것이 된” 세상에 살고 있다.

노인 문제에 접근하는 방법 중 비교적 새로운 동향들이 있다. 하나는, 국제적으로 노인 문제를 인권 의제로 다루기 시작한 것이다. 유엔 총회는 2002년 ‘노령화에 관한 마드리드 국제행동계획’을 채택하여 노인에 대한 나이 차별과 방임·학대·폭력을 중요한 인권 문제로 규정했다.

유엔 사무총장이 2011년 유엔 총회에 제출한 노인 인권 문제 보고서에서는 노인들이 경험하는 네 종류의 도전을 지적한다. 우선, 나이에 따른 차별의 문제가 있다. 연령 차별은 성별, 인종, 장애, 사회경제 상황 등 여타 차별과 결합되어 나타나곤 한다.

둘째, 빈곤의 문제가 있다. 가난한 노인들은 노숙, 영양결핍, 만성질환, 식용수나 위생시설에 대한 접근, 의료혜택 부족, 저소득에 시달릴 개연성이 크다. 노인이 가구의 생계나 손자녀 양육을 책임지는 경우엔 더 심한 가난에 빠지곤 한다. 셋째, 신체적·정신적 고통, 더 나아가 성적 학대의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요양시설이나 서비스의 부족이라는 문제가 있다.

올해 3월에 개정된 노인복지법에서는 노인학대를 “노인에 대하여 신체적·정신적·정서적·성적 폭력 및 경제적 착취 또는 가혹행위를 하거나 유기 또는 방임을 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유엔의 접근을 충실히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하나는, 노령화와 도시화가 동시에 진행되는 추세를 감안하자는 움직임이다. 2050년이면 전세계 고령화율이 22%, 도시화율이 66.4%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은 10년 내에 초고령 사회가 되고 도시화율은 85%에 이를 것이다. 즉, 도시에 거주하는 고령자들이 노인대책의 주요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다.

계간지 <걷고 싶은 도시> 최근호는 “노인과 도시”라는 특집을 통해 “고령친화도시” 개념을 소개한다. 고령친화도시는 우선 “활기찬 노년”을 중시한다. 나이가 들어도 삶의 질이 늘어날 수 있도록 건강·참여·안전을 위한 기회를 도시가 최적화해서 제공한다는 뜻이다. 고령친화도시는 시설요양에서 벗어나 “살던 곳에서 늙어가기”로 강조점을 이동시키며, 더 나아가 “지역사회에서 늙어가기”를 최종 목표로 삼는다. 주거 중심의 노인대책에서 사회적 관계 중심의 노인대책으로 지향점이 바뀐다. 이렇게 되면 노인을 포함한 주민공동체 모두를 아우르는 물리적·사회적 도시환경을 설계하는 일이 중요해진다. 서울시는 이미 고령친화도시 아이디어를 정책에 반영하고 있다.

안현찬은 인상적인 설명을 제시한다. “최근 서점에는 고령사회에 관한 책들이 넘쳐난다. 대부분은 우리를 겁먹게 하고, 부지런히 적금과 보험료를 붓게 만든다. 이와 비교하면 고령친화도시는 일종의 사회적 노후 대비다. 여기에도 우리가 꼬박꼬박 부어야 할 게 있다. 살던 곳에서 활기차게 늙어가고 싶다는 동의, 이로부터 생겨나는 노인의 존중과 배려다··· 이러한 개인적 동의와 배려와 노력이 많이 모이면 사회적 합의와 태도와 실천이 된다. 가입자가 늘어날수록, 보험료가 쌓일수록 고령친화도시라는 만기일은 앞당겨질 것이다.”

이런 점에서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는 노인 문제를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게 해 주는 흥미로운 텍스트다. 거대한 청새치를 낚았지만 오히려 고기에게 끌려다니게 된 노인, 그가 표류 도중에 큰소리로 독백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이가 함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날 도와주고, 이걸 같이 볼 수 있을 텐데.” 그러면서 그는 사람이 늙어서 혼자 외롭게 살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천신만고 끝에 귀환한 노인을 대하는 동네 사람들의 모습은 또 어떤가. 노인의 소식을 몰라 애태우던 소년은 오두막집에서 잠들어 있는 그의 모습을 확인하고 안도의 울음을 터뜨린다. 쪽배 주변에 모여든 어부들은 입을 모아 노인의 안부를 묻는다. 카페 주인은 노인을 위해 우유와 설탕을 탄 커피를 소년에게 쥐여주면서 “걱정 많이 했었다고 말해줘”라고 안부를 전한다. 노인은 스페인에서 쿠바로 건너온 이주노동자 출신이다. 갈색 피부의 물라토 원주민들 사이에서 “바다 물빛 눈동자”를 한 이방인으로 살아왔다. 그런 사람 하나가 실종됐다고 해경이 수색에 나서고 비행기까지 동원되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읽으면 산티아고는 지역사회에서 늙어가는, 가난하지만 사회적 지지망에 기댈 수 있는 복노인으로 재해석될 수 있다.

유엔은 노인 인권을 위한 향후 과제 중 하나로 노인들 스스로 공공정책의 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꼽는다. 이는 노인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수동적 접근에서 권리에 기반한 적극적 접근으로 방향 전환을 해야 한다고 보는 고령친화도시와도 통하는 것이다.

단순히 복지 혜택을 누리는 것만이 아니라 공적 결정에 참여할 권리를 노인 인권의 핵심으로 꼽으려면 두 가지가 함께 필요하다. 첫째, 여러 사회집단들 사이에 기본적인 연대의식이 있어야 한다. 특히 젊은이들과 노인들 간의 세대 간 연대가 없으면 안 된다. 둘째, 민주시민으로서의 지향과 자의식을 가져야 한다.

이런 전제 없이 노인 복지만으로 노인 인권을 규정한다면 자신에게 유리한 권익의 총량을 늘리려는 이익집단식 정치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물론 복지는 중요하고 확장되어야 한다. 하지만 세대 간 연대의 정신 위에 구축된 복지가 아니면 진정한 노인 인권이라고 하기 어렵다. 민주시민으로서의 공공성에 입각해 결정권을 행사하는 노인이 많아져야 진짜 노인 인권이 바로 선다. 그런 시민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젊었을 때부터 민주시민으로 살아온 사람이 나이 들어서도 그런 자세를 유지할 수 있다. 공적 시민의식을 지닌 민주적 시니어, 이것이 노인 인권이 지향하는 이상적 노인상이다.

노인 문제는 따로 있지 않다. 노인 역시 전체 인간의 일부이며, 노인 문제가 인간 문제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노인의 고통이 젊은이의 고통과 연결되고, 여성·소수자·이주자에 대한 멸시가 노인에 대한 멸시로 이어지는 세상 이치에 눈을 떠야 한다. 노인을 위한 나라를 원하는가. 구성원 모두의 삶을 소중히 받드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그 지름길이다.

문재인표 인권국가를 생각한다

수준 높은 민주국가들을 관찰해보면 정권이 좌우로 교대해도 사회운영의 기본골격이 바뀌는 일은 거의 없다. 새 정부의 인권정책은 ‘진보적’ 조치라기보다, 정상국가를 위한 공공정치의 토대를 다지려는 노력으로 이해해야 더 정확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논란이 되는 이슈는 그것이 노동이든,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든, 성소수자든, 북한인권이든, 국제인권기준과 권고에 따라 정면돌파하면 그만이다. 유엔사무총장을 배출했고, 유엔인권이사회 의장국을 역임했으며, 유엔인권최고대표사무소의 고위관료 출신을 외교장관으로 지명한 나라에서 무엇을 주저하는가.

지난 주말 외국의 친구들로부터 메일을 받았다. 한국의 새 정부가 인권을 획기적으로 개선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축하한다, 이런 내용이었다. 국내 소식이 그렇게 빨리 바깥에 알려지는 것이 놀라웠고, 그런 칭찬을 듣는 게 생소하기까지 했다. 국가브랜드니 국격이니 하는 말을 달고 살았던 시절 과연 우리의 이미지가 좋아졌고 국격이 올라갔던가. 한 나라의 품격 또는 대외적 평판은 인위적인 마케팅이나 우스꽝스러운 의전과 허세로 높일 수 없다. 그 나라 사람들이 누리는 삶의 격의 합계가 곧 국격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말한 인권국가는 제대로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의 존엄을 한 단계 높일 비전이 될 것이다.

앞으론 국가인권위원회의 대통령 특별보고가 부활하고, 인권위의 지적을 받은 정부기관들은 권고 수용률을 높여야 한다. 인권위 권고의 수용지수를 기관평가에 반영할 모양이다. 공무원들 사이에 갑자기 인권 공부 열풍이 불지도 모르겠다. 인권위의 헌법기구화, 군인권 보호관제 신설, 인권교육법과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인권교육원 설립도 함께 이루어지면 좋겠다. 경찰의 인권보호 기능도 더욱 강조될 것이다. 대통령 부인이 군의문사 유가족을 위한 치유연극을 관람했다는 보도까지 접하니 세상 변화의 속도 앞에 만감이 교차한다.

인권을 국가경영의 핵심가치로 삼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이 질문은 인권과 정치의 바람직한 관계 설정이라는 더 깊은 질문으로 이어진다. 진보적인 정부가 들어서면 분위기가 좀 나아지다 보수정부가 집권하면 쑥 들어가 버려도 괜찮은 게 인권인가. 한국에서 인권은 진보 쪽에서 흔히 주장하는 가치로 알려져 있다. 인간의 사회적 고통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인다는 점에서 인권이 ‘진보적’인 건 맞다. 그러나 인권의 진보적 성격은 보편적인 관점에서 이해해야 하고, 불편부당한 방식으로 실천되어야 한다. 따라서 인권을 진보진영만의 전유물로 보아선 곤란하며 진영논리로 재단해서도 안 된다.

인권은 ‘정상적’ 현대 민주국가의 인프라를 구성하는 기본 중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사상과 정견을 떠나 대다수가 합의하는 정치의 밑절미를 이루는 원칙이어야 하는 것이다. <진보와 보수의 12가지 이념>을 쓴 폴 슈메이커는 이를 ‘다원적 공공정치’ 개념으로 설명한다. 자신이 신봉하는 이념을 넘어서 적어도 이것에는 모두가 동의해야 민주국가로 불릴 수 있는 어떤 토대적 전제를 뜻한다.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중, 기회균등, 생각과 마음의 자유, 법의 지배, 민주적 권리가 그것이다. 인권이 바로 이런 토대다. 박권일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람 귀한 줄 아는 나라’를 만드는 일이다.

인권은 의복에 비유할 수 있다. 옷은 바깥에 드러나는 겉감과 살갗에 닿는 안감으로 이루어진다. 정치에서 겉감은 진보와 보수 등 다양한 이념과 정치적 입장을 나타낸다. 그런데 바깥의 겉감과 상관없이 모든 옷의 안감은 공공정치 원리로 만들어져야 한다. 제대로 된 정치라면 진보와 보수가 다 함께 인권과 같은 안감을 공통적으로 갖춰야 한다는 뜻이다. 지난 보수정부는 겉으로 보여줬던 겉감이 무엇이었든 간에 안감으로서의 공공정치를 엉망으로 헤집어 대통령 탄핵까지 자초하지 않았던가.

수준 높은 민주국가들을 관찰해보면 정권이 좌우로 교대해도 사회운영의 기본골격이 바뀌는 일은 거의 없다. 이미 확립된 인권원칙을 철저히 준수하는 보수와, 새로운 인권문제의 경계를 넓혀가는 진보가 공존하는 나라가 ‘정상화된’ 민주국가다. 이 점에 비추어 한국의 보수정당을 평가하면 바른정당은 공공정치형 보수의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으나, 자유한국당은 공공정치의 본령을 찾기 어려운 옹색한 존재로 전락한 것 같다. 아무튼 새 정부의 인권정책은 ‘진보적’ 조치라기보다, 정상국가를 위한 공공정치의 토대를 다지려는 노력으로 이해해야 더 정확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내실 있는 인권국가가 되려면 모든 영역에 인권적 사고와 실천이 스며들어야 한다. 예를 들어, 교육부가 대학평가를 할 때 인권 가치를 가르치는 교과목이 얼마나 편성되어 있는지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인권은 모든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공통분모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장애인을 위해 지하철 역사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면 노인과 유모차 어머니도 함께 편리해진다. 구치소 조건이 개선되면 일반 형사범만이 아니라 박근혜나 이재용 같은 사람도 혜택을 받는다.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반대하는 시선은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사회인식의 변화와 연결될 수 있다.

인권국가를 지향하는 것은 반갑지만 어떤 기준으로 인권을 규정하고 인권의 범위를 다룰지 논란이 있을 수 있다. 헌법상 기본권에다 국제인권기준을 합친 것이라 보면 된다. 알다시피 대한민국 헌법 6조는, 헌법에 의해 체결·공포된 조약과 일반적으로 승인된 국제법규는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가진다고 선언한다. 인권은 원래 성격상 국내인권과 국제인권 사이의 벽이 낮으면 낮을수록 좋다. 국내인권의 잣대를 국제기준에 맞추고 그 기준을 적극 활용하면 된다. 논란이 되는 이슈는 그것이 노동이든,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든, 성소수자든, 북한인권이든, 국제인권기준과 권고에 따라 정면돌파하면 그만이다. 유엔사무총장을 배출했고, 유엔인권이사회 의장국을 역임했으며, 유엔인권최고대표사무소의 고위관료 출신을 외교장관으로 지명한 나라에서 무엇을 주저하는가.

한국의 법체계에서 국제인권법을 무시해온 역사가 심각한 사법 적폐에 해당한다는 비판도 경청해야 한다. 이것과 관련해 변호사시험의 문제를 지적해야 하겠다. 변호사법 1조를 보라. “변호사는 기본적 인권을 옹호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함을 사명으로 한다.” 이에 따르면 모든 변호사는 당연히 인권변호사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변호사시험에는 인권 과목이 없다. 우리나라 법학 교육은 변호사시험에 의해 결정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험에 안 나오는 과목은 로스쿨에서부터 잘 가르치지 않는다. 인권 옹호가 변호사의 사명이라 해놓고선 시험도 치지 않고 학교에서 가르치지도 않는 현실, 이 얼마나 모순인가. 한국 사법부는 국제인권법을 판결에서 적극적으로 인용해야 하고, 모든 로스쿨에서 국제인권법을 가르쳐야 하며, 변호사시험에 인권 과목이 포함되어야 한다.

새 정부의 인권정책에서 인권과 지속가능발전 목표(SDG)와의 적극적인 연결고리가 보이지 않는 점은 아쉽다. 이미 분위기는 무르익었다. 환경부의 지속가능발전위원회와 총리실의 녹색성장위원회를 합쳐서 대통령 직속 ‘지속가능위원회’로 격상하고, 이 위원회가 유엔의 지속가능발전 목표에 기반한 2030 국가지속가능 목표를 설정하기로 했으니 말이다. 탈원전, 친환경 미래에너지, 신기후체제, 생태계 보전, 4대강 재자연화 등이 눈에 띄는 부분이다. 그러나 지속가능발전 목표는 환경·생태 영역에만 국한된 건 아니다. 빈곤, 교육, 성평등, 불평등, 도시, 인권과 평화 등 총체적 인간발전을 목표로 하고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21세기형 인권국가의 꿈은 국가지속가능 목표를 달성하는 꿈과 ‘동상동몽’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인권국가를 표방할 때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언행일치에 따르는 부담이 그것이다. 인권의 대의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에게 높은 인권기준을 들이대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인권의 대의를 찬동하는 사람에 대한 기대치와 평가기준은 전혀 달라진다. 이들은 평균점수가 높다 해도 언행에 약간만 문제가 있어도 더 엄격한 기준으로 비판받는다. 인권의 탈을 쓴 위선자 또는 이중 기준이라는 지탄을 받기도 한다. 인권에서는 개인의 행동에서부터 강대국의 외교에 이르기까지 위선의 문제가 특히 심각한 쟁점이 되곤 한다. 내가 ‘주창자의 딜레마’라고 부르는 현상이다. 대의를 자임하는 사람이 짊어져야 할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억울하다고 하소연할 수도 없다. 이왕 인권국가를 내세웠으니 최선을 다한 후 국민의 공정한 평가를 받겠다는 자세를 유지하는 게 정도가 아닐까 한다.

신재생에너지를 요구할 권리

에너지 생산 방식과 상관없이 그것을 쓸 수만 있으면 에너지 접근권이 보장된다고 하던 시대는 지났다. 어떻게 만들어진 에너지인가 하는 점을 따져야 하기 때문이다.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 때문이다.

기후변화는 구조적 차원의 문제가 인권침해의 주범이라는 점을 가시적으로 보여 주는 드문 사례다. 세월호와 백남기 농민 사건에서 우리가 느꼈던 통렬한 불의감과 도덕적 공분을 기후변화에서도 똑같이 경험할 수 있을 때에 우리의 인권의식은 진정한 도약을 맞을 것이다.

국제적으로 인정되는 인권이 몇 종류나 될까. 십 년 전 <인권의 문법>을 집필할 때 세어 보니 예순 개 정도였다. 작년에 <인권의 지평>을 내면서 다시 찾아보니 그새 일흔 개 가까이 되었다. ‘권’ 자를 붙인다고 모두 공식 인권이 되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새로운 권리 주장은 인권을 확장하는 견인차 역할을 한다. 알 권리나 잊혀질 권리처럼 꼭 필요하다 싶은 권리도 있고, 불쾌해질 권리(표현의 자유를 극단적으로 인정하자는 입장)처럼 쓴웃음이 나오는 주장도 있다. 요즘 핫하게 떠오르고 있는 새 권리는 ‘신재생에너지를 요구할 권리’다.

오랫동안 개발론을 지배해 온 사상은 경제개발이었다. 국민총생산이 늘어나면 발전이 된다고 보는 단선적 견해였다. 유엔 초기부터 국민계정체계에 따라 각국을 경제발전 기준으로 줄세우기를 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이때만 해도 세계은행이 제시하는 거시경제의 정석을 충실히 따르기만 하면 개발도상국도 언젠가는 선진국이 될 것으로 가정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선발국들의 이해관계에 맞춰 짜 놓은 불평등한 국제경제 체제 내에서 개도국들이 운신할 수 있는 여지가 적었다. 개도국 민중의 실제 욕구를 반영하지 못한 개발 정책도 문제였다. 인프라 확충을 그렇게 강조했지만 보통사람들이 에너지 서비스를 누릴 수 있는 기본 욕구조차 충족되지 못했다. 지금도 전세계 인구 중 3분의 1이 전기 없이 살아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빈곤 탈피는 불가능에 가깝다. 에너지 접근성이 발전권의 핵심으로 부각된 데엔 이런 배경이 있었다.

그러나 에너지 생산 방식과 상관없이 그것을 쓸 수만 있으면 에너지 접근권이 보장된다고 하던 시대는 지났다. 어떻게 만들어진 에너지인가 하는 점을 따져야 하기 때문이다.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 때문이다. 나는 기후변화가 절체절명의 인권 문제라는 점을 <한겨레> 지면에서 역설한 적이 있다(2015년 8월19일치). 공교롭게도 그해 말 파리기후협정 회의 직전 국제 환경운동과 인권운동이 보조를 맞추기 시작했다. 인권과 환경 분야의 대표적인 국제단체인 앰네스티와 그린피스가 <기후변화 시대의 인권보호를 위해 100% 신재생에너지로 시급히 전환해야 한다>라는 공동성명을 발표한 것이다.

두 단체는 기후변화가 계속된다면 반세기 내에 지금의 전세계 빈곤층에 더해 6억 명 이상이 추가로 기근에 시달리게 될 것으로 예측한다. 그렇게 안 될 가능성이 높지만 설령 기온 상승이 2도 내에 머물더라도 인류 일곱 명 중 한 사람이 물 부족을 겪을 것이라 한다. 특히 빈곤층, 여성과 소녀, 원주민, 만성적 차별을 당해 온 사람들이 가장 큰 피해 집단이 된다. 폭염과 신종 질병으로 연간 25만 명 이상이 사망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말라리아, 콜레라, 지카바이러스, 뎅기열이 낯설지 않게 되었다. 열대의학으로 치부되던 곤충매개 감염병을 보건학에서 심각하게 다루기 시작했다.

두 단체의 공동 보고서는 기후변화와 인권을 잇는 연결고리로서 신재생에너지를 부각시킨다. 인류를 구할 수 있는, 단순하지만 통찰력 있는 삼단논법이다. ①기후변화는 인권침해의 주범 중 주범이다. ②기후변화를 일으키는 주원인은 화석연료 사용이므로 화석연료를 신재생에너지로 대체해야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③그러므로 신재생에너지를 사용할수록 인권이 좋아질 것이다.

신재생에너지의 사용 자체가 인권임을 논증한 그린피스와 앰네스티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과감한 주장을 편다. 2050년까지 화석연료를 전면 퇴출하고 100% 신재생에너지 시대를 열자는 것이다. 이런 결단을 세기말로 늦추면 이미 때가 늦다고 한다. 혁명적 변화를 요구하는 주장이 흔히 그렇듯 지극히 상식적이고 원칙적인 입장이다. 난마처럼 얽힌 문제일수록 핵심을 직시하는 자세가 정답이다.

물론 신재생에너지로의 전환에 있어 유의해야 할 점이 적지 않다. 단기적으론 만병통치약이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 화석연료 산업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위한 대책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또한 빈곤층의 생계에 대한 대비가 있어야 한다. 에너지 전환에 따라 젠더 불평등이 일시 악화될 가능성도 생각해야 한다. 신재생에너지의 불안정성과 변동성 때문에 상당 기간 보통사람들의 에너지 접근성이 오히려 낮아질 수도 있는 부작용을 고려해야 한다. 또한 신재생에너지 설비 때문에 지역사회에 각종 문제가 발생하는 현실도 고려해야 한다. 이런 온갖 우려에도 불구하고 기후변화의 실천적 해법으로서 신재생에너지를 부각시킨 점, 그리고 환경운동과 인권운동 간의 건설적 협력관계의 고리를 만든 점은 우리가 곱씹을 만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근래 들어 신재생에너지의 생산 단가가 대폭 떨어진 건 희망적인 소식이다. 세계경제포럼에 따르면 2016년은 “태양광과 풍력을 통한 에너지 생산비가 화석연료 및 천연가스의 생산비와 경쟁할 수 있을 정도로 낮아진 최초의 해”였다. 신재생에너지의 가성비가 높아진 주된 이유는 투자가 늘었기 때문이다. 대규모 보조금 때문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실제로 2014년 전세계에서 화석연료 생산에 제공된 보조금 총액이 신재생에너지 보조금보다 무려 네 배나 많았다. 십 년 전만 해도 천연가스에 비해 태양광 발전 비용이 여섯 배 이상 비쌌지만 현재는 비슷한 수준이 되었고 풍력은 태양광의 절반 정도 비용으로 발전이 가능하게 되었다.

기후변화를 환경 문제만이 아니라 인권의 문제로도 접근할 때 어떤 점이 달라지는가. 우선, 인권의 긴박함과 절대성을 강조할 수 있다. 일반인들은 환경과 생태 이슈를 원론적으로 찬성하면서도 그것을 다소 추상적이고 막연하게 받아들이기 쉽다. 반면 자신의 생명과 건강이 걸린 인권 이슈에는 더 강력하고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경향이 있다. 인권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지구 행성의 생태계를 보존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 권리의 주체인 시민들이 의무의 주체인 국가에 대해 보다 명확하고 구체적인 요구를 할 수 있고, 시민사회는 국가가 그것에 상응하는 대책을 분명히 실천하는지를 따져 정치적 책임성을 물을 수 있게 된다.

파리기후협정에서도 기후변화가 인권과 직결된 문제라는 점을 분명히 지적하면서 각국이 그렇게 행동할 것을 촉구한다. 협정의 전문을 보라. “당사국들은 인권, 건강권, 원주민, 지역사회, 이주민, 어린이, 장애인, 모든 약자 집단의 권리, 발전권, 젠더 평등, 여성의 자력화와 세대 간 형평성에 관한 의무를 준수하고 증진하고 고려한다.”

오랫동안 인권을 가르쳐 왔지만 참으로 쉽지 않다고 느끼는 점이 한 가지 있다. 인권침해가 발생하는 구조적이고 장기적인 뿌리원인에 대해 학생들의 눈을 뜨게 하는 일이다. 직접적인 가해자,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부조리, 누가 봐도 잘못된 악행에 대해서는 인권의 문제로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다. 그러나 눈에 잘 띄지 않고,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요인으로 발생하며, 모두가 속해 있는 시스템 자체의 모순에서 비롯되는 문제를 인권침해의 주범으로 인식하기 위해선 많은 공부와 시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기후변화는 구조적 차원의 문제가 인권침해의 주범이라는 점을 가시적으로 보여 주는 드문 사례다. 세월호와 백남기 농민 사건에서 우리가 느꼈던 통렬한 불의감과 도덕적 공분을 기후변화에서도 똑같이 경험할 수 있을 때에 우리의 인권의식은 진정한 도약을 맞을 것이다.

올여름 <불편한 속편: 권력에게 진실을>이라는 다큐가 개봉된다. 영화 제작에 참여한 앨 고어는 기후변화에 대한 투쟁을 노예제 폐지, 아파르트헤이트(인종 격리 정책) 종식, 여성 참정권, 성소수자 차별 철폐와 맥을 같이하는 역사적 해방운동에 비견한다. 기후변화에 맞서는 녹색 지속가능혁명은 농업혁명, 산업혁명, 디지털혁명으로 이어지는 사회변혁의 최종 단계에 속한다. 어찌 됐든 인류와 지구가 살아남아야 인권을 논할 수 있지 않겠는가. 국가와 기업에 신재생에너지를 인권의 이름으로 요구해야 한다.

바르샤바에서 야곱을 찾아 헤매다

인권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폴란드 유대인의 역사는 인권을 둘러싼 모든 차원의 문제가 얽혀 있는 연구 주제다. 희생자와 가해자, 목격자와 방관자, 부역자와 보호자, 배척과 공존의 이슈가 뒤섞여 있는 모순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폴란드의 비판적 지식인들은 자국민 중에 ‘결백 강박증’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고 지적한다. 강대국들 사이에서 모든 것을 잃었던 국민으로서 붙잡을 동아줄이라고는 ‘우리는 죄 없는 약소민족’이라는 결백감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방적 희생자 의식은 역사 부인을 쉽게 용인하게 만든다.

아주 쉬운 역사 퀴즈. 이스라엘 건국 전까지 세계에서 유대인이 제일 오래, 제일 많이 살았던 나라는? 유대인이 스스로 가장 좋다고 평가했던 나라는?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소비보르, 마이다네크, 트레블린카, 헤움노, 벨제크(베우제츠) 등 나치의 악명 높은 절멸수용소가 모여 있던 나라는? 홀로코스트로 죽어 간 육백만 유대인 중 절반이 나온 나라는?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배경이 된 나라는? 나치와 소련의 박해를 받았으면서 유대인을 박해하기도 한 복잡한 과거사를 지닌 나라는? 정답은 물론 폴란드이다.

인권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폴란드 유대인의 역사는 인권을 둘러싼 모든 차원의 문제가 얽혀 있는 연구 주제다. 희생자와 가해자, 목격자와 방관자, 부역자와 보호자, 배척과 공존의 이슈가 뒤섞여 있는 모순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바르샤바의 옛 게토 지역에 최근 건립된 ‘폴란드 유대인 역사박물관’을 돌아보니 그런 생각이 더욱 굳어졌다. 건물의 위치도 상징적이다. 서독의 빌리 브란트 총리가 1970년 폴란드를 방문하여 바르샤바 유대인 게토 봉기 기념탑을 찾아 무릎을 꿇었던 사진을 기억할 것이다. 박물관은 그 탑을 마주보고 서 있다.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해야 한다”라는 비트겐슈타인의 경고가 무슨 뜻인지 이곳에 와 보면 알 것도 같다.

폴란드의 유대인 역사는 흔히 천년 세월로 친다. 중세가 되면 이미 폴란드 전역의 도시와 타운에 유대인 거주지역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프랑스 혁명 전에 이미 계몽주의적 평등과 관용의 풍토를 가진 나라였다. 유대인들 자신이 폴란드를 ‘유대인의 낙원’(파라디수스 유대오룸)이라 부를 정도였다. 가톨릭교회가 종종 박해를 하고 군주가 재정상의 이유로 유대인을 감싸는 패턴이 반복되었다. 어쨌든 당시 유럽 기준으로는 양호한 거주조건이었다고 한다.

18세기 전반에 전세계에 유대인이 약 120만명 정도 있었는데 그중 75만명이 폴란드에 살았다는 연구도 있다. 팔레스타인을 떠난 뒤 유대인에게 말 그대로 제2의 고향이 된 나라였다. 그러나 폴란드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에 의해 분할된 뒤 유대인의 생활도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1차 대전이 끝나고 폴란드가 독립한 뒤에는 국제연맹의 소수민족 보호규정과 피우수트스키 정부의 통합정책에 따라 유대인의 지위도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2차 대전 직전 폴란드 정치가 우경화되고 반유대주의 선동이 일면서 유대인에게 불안한 시절이 계속되었다. 심지어 대학교 강의실 공간에서 유대 학생용 자리를 따로 분리시켜 지정할 정도였다. 폴란드 정부는 나치 독일의 인종주의를 반대하면서도 자기 내부의 반유대주의 정책을 옹호하는, 모순된 행보를 보였다.

나치는 1939년 9월 폴란드를 침공했고 그 직후 소련도 폴란드 동부를 합병한다. 그다음의 이야기는 잘 알려진 역사다. 전쟁 직전의 인구 센서스에 따르면 당시 폴란드에 347만의 유대인이 있었는데 홀로코스트로 약 300만명 이상, 즉 90%가 희생되었다. 이때 폴란드 국민이 어떤 태도를 취했느냐가 오늘날까지 논쟁이 되고 있다.

나치 점령군은 유럽을 통틀어 유독 폴란드에서 가장 가혹한 정책을 펼쳤다. 유대인을 조금만 도와도 무조건 사형, 그것도 연좌제를 적용했다. 이 때문에 폴란드 사람이 유대인을 돕는 것은 전 집안, 온 동네의 생명을 걸어야 하는 행동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유대인을 도왔던 영웅적인 ‘이방의 의인들’이 다수 나왔다. 이스라엘의 보훈청 야드바솀의 집계에 따르면 지금까지 알려진 ‘의인’은 국제적으로 모두 2만6120명, 그중에서 폴란드 출신이 6620명으로서 단연 1위를 차지한다.

하지만 나치에 부역하여 유대인을 추방하고 밀고한 폴란드 사람이 많았고, 직접 유대인 학살에 참여한 사건도 23건이나 된다. 나치의 강요와 반유대주의 정서 탓이 컸고, 유대인의 재산을 차지하고 싶은 욕심도 한몫을 했다. 소련이 합병한 동부에서 일부 유대계 공산주의자들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적’을 색출하는 데 앞장선 것이 폴란드인들의 공분을 사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고 폴란드의 동부가 소련 영토로 영구 편입되는 바람에 그곳 출신의 유대인이 돌아갈 고향이 없어졌다. 자신의 집과 재산이 모두 파괴된데다 타인이 점거한 경우가 대부분이라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은 생존자가 일시에 난민이 되어 버린 것이다.

전쟁이 끝난 뒤 폴란드 유대인의 역사는 이주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유재산을 부정하는 공산정권이 싫기도 했고, 일가친척이 사라진 저주의 땅에서 계속 살고 싶은 생각이 없기도 했다. 2차 대전 직후의 그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반유대 폭동이 일어나 수십명이 학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때 팔레스타인으로 떠난 유대인은 이스라엘 건국의 중추세력이 되었다. 스탈린 사후에 잠시 개방화 물결이 일었을 때에도 대규모 이주가 일어났다.

오늘날 폴란드에는 유대인이 많지 않다. 자신을 종교적 의미에서 유대인으로 내세우는 사람은 1만~2만명에 지나지 않는다. 굳이 뿌리를 밝히지 않고 사는 유대계를 다 합쳐도 그 수가 많지 않을 것이다. 바르샤바에서 야곱을 찾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배경에서 유대인 역사박물관이 설립된 것은 작은 기적이자 역설이라 할 만하다.

현재 폴란드의 정세는 대단히 우려스럽다. 우파 포퓰리즘의 ‘법과 정의당’이 국회 의석의 과반수를 차지하고 권위주의적 길을 걷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는 역사 연구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폴란드의 나치 부역행위를 연구하는 학자는 ‘반국가적’이라고 손가락질을 받는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폴란드 수용소’라고 부르면 징역형에 처할 수 있도록 하는 법이 발의되어 있다. 폴란드 국민이 유대인을 학살했던 사건을 연구해온 역사학자 얀 그로스 교수는 국가모독죄로 수사를 받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정부는 이런 조치를 ‘적극적 역사정책’이라고 되레 강변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다. 집권여당은 사법부의 독립성을 결정적으로 침해하는 법안을 제출해 놓은 상태다. 유럽연합(EU)은 만일 이 법이 제정되면 유럽연합에서 폴란드의 투표권을 박탈하겠다는 최후통첩을 했다. 이 글을 쓰던 중 바르샤바대학 앞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민주주의 수호’를 외치며 유럽연합 깃발과 촛불을 들고 집회를 벌이는 모습을 보았다. 한국인으로서 기시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폴란드의 비판적 지식인들은 자국민 중에 ‘결백 강박증’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고 지적한다. 강대국들 사이에서 모든 것을 잃었던 국민으로서 붙잡을 동아줄이라고는 ‘우리는 죄 없는 약소민족’이라는 결백감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방적 희생자 의식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게 하고, 무조건적 역사 부인을 쉽게 용인하게 만든다.

이런 식의 역사 왜곡은 역사적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건강성을 회복하는 지속적 과정 속에서, 그리고 민주체제 내에서 조금씩 극복될 수 있다. 하지만 어렵사리 도달한 개방적 역사관도 권위주의 정권 아래서 순식간에 무너지곤 한다. 요즘 폴란드는 유럽연합 국가 중에서 헝가리와 함께 문제아 형제 비슷한 존재로 찍힌 상태다. 난민을 받아들이면 기생충과 전염병이 퍼진다고 집권여당 대표가 공공연하게 막말을 하는 외국인 혐오의 나라가 된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유대인 역사에 대한 폴란드 국민의 인식이 제대로 정립될지 우려와 회의가 든다. 결국 역사를 직시하고 정직하게 기억하는 행위는 민주주의를 지키는 수준만큼만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걱정에도 불구하고 나는 긴 호흡에서 폴란드의 희망을 본다. 나치 폭정과 공산 독재에 끝까지 굴하지 않은 무쇠 같은 의지, 코페르니쿠스의 후예다운 인본주의적 지성, 깊은 신앙심으로 인도되는 내면의 확신, 자기 손으로 민주주의를 일궈본 독립인의 특징인 침착한 긍지를 지닌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바탕 위에서 유대인의 역사를 민주적이고 공정하게 평가하는 날, 폴란드 역사의 새로운 르네상스가 열릴 것이다.

인권의 시각으로 보는 과학기술

과학기술 인권은 자연계열에만 해당되는 개념이 아니다. 이것은 일반대중, 과학기술계, 그리고 국가라는 세 기둥으로 이루어진 건축물에 비유할 수 있다. 첫째 기둥인 일반대중을 보자. 모든 사람은 넓은 의미에서의 모든 문화적 생활에 참여할 권리가 있으며, 과학 진보의 혜택을 누릴 권리가 있다.

국가의 과학기술 정책을 인권적으로 정립하기 위한 가장 깊은 차원에서의 안전장치는 민주주의의 심화 그리고 평화적이고 탈상품화된 사회 기풍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이 갖춰지지 않으면 어떤 국가, 어떤 체제에서도 과학은 인간의 선익을 위한 것이 되지 못한다.

다음 내용 중 공통점이 무엇일까? 살충제 달걀, 사드 환경영향평가, 몰카 피해, 핵무기, 국정원 댓글부대, 대륙간탄도미사일, 문케어, 자주포 사고, 핵발전 공론화, 통신비 할인, 용가리 과자…. 이 모든 사안의 공통분모는 과학기술이다. 오늘날 공적으로 중요한 문제에 있어 과학기술이 개입되지 않은 사례를 찾아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과학기술혁신본부장 임명을 둘러싼 논란은 과학과 기술이 현대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그렇지만 과학기술이 인권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이슈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우선 역사적 배경부터 소개해 보자. 2차대전 후 유엔에서 제일 먼저 시작한 일 중의 하나가 세계인권선언을 제정하는 것이었다. 같은 시기에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일련의 나치 전범 재판이 열리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나치 의사들의 재판이 주목을 받았다. 우생학적 살인, 생체 실험, 가스실 처형 등 의과학 지식을 악용한 반인도적 범죄의 적나라한 실상이 전세계 언론에 보도되자 사람들은 경악하였다. 이를 접한 인권선언문 집필 위원들 역시 과학기술이 인권에 미치는 영향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유네스코의 줄리언 헉슬리 사무총장은 공교롭게도 생물학자이자 작가로 명성이 높은 사람이었다. 세계인권선언 제정에 유네스코의 견해를 반영해야 한다고 믿었던 헉슬리는 과학기술인을 포함한 각계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아 제안서를 만들어 인권선언 집필위원회에 제출했다. 이런 연유로 세계인권선언과 그 이후의 국제인권규약에 과학기술과 관련된 조항이 들어가게 된 것이다.

과학기술 인권은 자연계열에만 해당되는 개념이 아니다. 이것은 일반대중, 과학기술계, 그리고 국가라는 세 기둥으로 이루어진 건축물에 비유할 수 있다. 첫째 기둥인 일반대중을 보자. 모든 사람은 넓은 의미에서의 모든 문화적 생활에 참여할 권리가 있으며, 과학 진보의 혜택을 누릴 권리가 있다. 이때 ‘과학’은 자연과학뿐만 아니라 라틴어의 ‘스키엔티아’가 뜻하는 학문의 전반을 포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초기엔 일반인들이 과학의 혜택을 ‘공유’할 수 있다고 되어 있었지만, 나중에는 ‘향유’할 수 있다는 식으로 표현이 강화되었다.

국제 무대에서 인권은 흔히 보편적이고 격식 있는 법의 언어로 작성되곤 한다. 하지만 점잖은 표현 뒤에 숨어 있는 깊은 차원에서의 의미를 잘 짚어야만 인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외국어를 구사하고 국제 경험이 있지만 사회를 보는 인식이 철저하지 못한 상태에서 국제 인권담론을 활용하면 인권을 형식적으로, 그리고 법이나 외교의 지렛대로만 오해하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과학 진보의 혜택을 모든 사람이 ‘향유’한다는 말의 행간에 숨어 있는 뜻도 마찬가지다. 이 말에는 근본적 차원에서 인권의 평등주의적인 지향이 깔려 있다. 과학기술이 권력자, 엘리트, 지배계층의 전유물이 되어선 안 되고 인종, 국적, 성별, 계급, 지위를 떠나 말 그대로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혜택이 가도록 해야 한다는 근본 원칙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유복한 일부 계층만이 누릴 수 있는 과학기술은 그 자체로 반인권적이라는 사실을 똑바로 볼 필요가 있다. 돈 있고 여유 있는 사람들이 과학기술의 혜택을 더 잘 누릴 수 있는 게 너무나 당연한 일 아니냐고 은연중에 생각한다면 그런 식의 사고방식 자체가 금전만능의 반인권적 세계관을 전제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인권을 규정한 각종 국제 문헌의 진짜 의미를 역사적·사회적·구조적으로 독해하고 실천하는 것이 진정한 인권의 정신임을 잊어선 안 된다.

둘째 기둥인 과학기술계를 보자. 모든 과학기술인은 과학과 문화의 보존, 발전, 확산을 담당하는 중추적 역할을 맡고 있다. 이들은 자유와 권리를 누리는 주체임과 동시에 막중한 책무를 지닌 전문인이라는 이중적 지위를 지닌다. 국제인권규약은 과학자들이 과학 연구와 창조적 활동에 반드시 필요한 자유를 맘껏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규정한다. 과학기술인들은 전문가이자 시민으로서 의견과 표현의 자유, 그리고 결사와 집회를 백퍼센트 보장받아야 한다. 황우석 사태 당시 젊은 과학자들이 용기 있게 진실을 밝혔던 일은 과학기술인의 자유와 권리의 행사라는 측면에서도 중요한 선례가 되었다.

또한 과학기술인에게는 국제적 교류와 접촉을 할 수 있는 자유 역시 중요한 인권이다. 과학은 흔히 보편적 진리 추구의 이상형에 근접한 패러다임으로 묘사되곤 한다. 이것은 과학기술이 초국적이고 공동선을 지향하는 활동임을 암시한다. 오철우 <한겨레> 기자가 지적하듯 과학계에서 애국과 경쟁의 목소리만 들린다면 그런 과학계는 과학의 본령에서 한참 벗어났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학기술인이 지켜야 할 책무 또한 중요하다. 연구 활동이 파괴가 아닌 건설, 갈등이 아닌 평화, 일부가 아닌 만인을 위해 쓰여야 한다는 기본철학을 지녀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하는 뜻있는 과학자들이 적지 않겠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과학계의 모습은 철저하게 도구적 이성으로서의 과학기술뿐이다. 연구 성과 높이기, 국책사업 따오기, <사이언스>나 <네이처> 같은 명망 있는 학술지에 이름 올리기를 최고의 가치로 떠받드는 풍토가 우리 과학기술계의 일상적 풍경이 아닌가.

그러나 모든 과학이 이렇게 묻지마식 실적주의 과학은 아니다. 지난 6월 <사이언스>에 중요한 논문 한 편이 실렸다. “사회적으로 책임 있는 해산물에의 의지”라는 이 논문은 동남아를 비롯한 세계 여러 지역에서 해산물을 수확·가공·포장하는 노동자들이 겪는 노예 상황을 개탄하면서 해양 과학자들이 해산물과 관련된 사회적 이슈와 인권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촉구하였다.

우리 과학기술인들도, 굳이 국내 정치적 의미에서의 진보-보수 구분을 떠나, 전문직 종사자로서의 직업윤리에 입각해 인권을 옹호하는 사람이 많이 나올 수 있는 풍토가 만들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최근 번역된 <과학자는 전쟁에서 무엇을 했나>를 모든 과학기술 전공자들이 읽고 새겨야 할 것이다.

셋째 기둥인 국가를 보자. 모든 시민이 기본적 차원에서 과학 진보의 결과를 고루 누릴 수 있도록 최대한 정책적 배려를 하는 것에서 과학정책이 출발해야 한다. 또한 과학기술인을 국가가 원하는 대로 활용할 수 있는 기능 인력풀 정도로 간주하는 시각을 버려야 할 것이다. 과학기술인의 자유와 권리를 최대한 보장한 정책의 결과로서 국익이 증진된다고 봐야지, 그것의 반대는 곤란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국가 차원의 거버넌스에 참여하는 고위 과학기술인, 과학기술 부문 기업인, 그리고 과학기술 전문 관료에 대한 철저한 검증이 요구된다. 현대국가의 복잡한 정책 과정 속에서 공익을 가장하면서도 매끄럽게 사익 추구를 할 줄 알고, 풍부한 인맥과 산-학-언-군-정을 잇는 네트워크를 통한 로비에 익숙한 구태 인물들에게 과학기술 정책을 맡기면 엘리트 과학, 반인권적 과학, 반평화적 과학의 적폐는 절대 없어질 수 없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 본다면, 국가의 과학기술 정책을 인권적으로 정립하기 위한 가장 깊은 차원에서의 안전장치는 민주주의의 심화 그리고 평화적이고 탈상품화된 사회 기풍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이 갖춰지지 않으면 어떤 국가, 어떤 체제에서도 과학은 인간의 선익을 위한 것이 되지 못한다. 소련의 리센코 사건, 미국의 핵무기 사용을 기억하면 당장 답이 나온다.

서구 몇 나라의 과학계에서 인권 증진을 위한 프로그램과 인턴십을 실시하고 있는 사례를 참고할 만하다. 자기 전공을 살려 주거환경 개선, 식용수나 하수처리 문제 해결, 근린 오염물질 제거, 디지털 약자 계층을 위한 교육활동, 인권단체를 위해 위성사진 이미지 판독기술을 활용한 대규모 인권침해 사건 조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과학기술인의 인권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변호사들이 ‘프로보노’ 공익활동을 하는 것처럼 과학기술인들도 프로보노 활동을 제도화해 봄직하다.

신자유주의가 인권에 남긴 교훈

신자유주의적 지구화가 세상을 급격하게 오른쪽으로 몰고 갔다. 오늘날 인권은 신자유주의와 맞서 싸우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인권은 제자리에 있지만 세상이 과도하게 우경화되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를 거부하는 것이 곧 인권 본연의 길이 되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낸시 프레이저는 부분적 인권론자를 ‘진보적 신자유주의자’라 부르면서 노동-계급운동과 정체성 정치가 함께 가야만 인권을 제대로 지킬 수 있다고 조언한다. 월스트리트와 정체성 정치를 접목하려다 실패한 힐러리 클린턴을 인권운동이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이다.

사례 하나. 해외 투기자본이 나라 경제를 엉망으로 만든다. 외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복지예산이 대폭 깎이면서 약자 계층의 삶이 절망으로 흐른다.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경찰은 집회 신고를 하지 않은 시위에 강경하게 대응한다. 부상자가 속출하고 사망자까지 나온다. 정부는 불법시위에 대해 무관용 원칙을 밝힌다. 이런 상황에 누가 궁극적으로 책임이 있는가. 정부인가 초국적 자본인가.

사례 둘. 대학과 교수들은 연구지원 기관의 프로젝트에 지원할지 말지를 결정할 수 있다. 그러나 절대다수가 지원하려고 무진 애를 쓴다. 프로젝트를 따야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수주율 자체가 평가지표에서 유능함의 증거로 활용된다. 연구 목적도 심각하게 왜곡된다. 연구의 내적 가치보다 채택률을 높일 수 있느냐가 중요해진다. 지원기관이 선호하는 연구 주제와 방향성을 알아내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운다. 인센티브에 자발적으로 반응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자기검열을 한다면 학문의 자유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이런 국내외 사례들은 신자유주의가 인권에 던진 복잡한 도전을 보여준다.

작년 6월 국제통화기금의 공식 학술지 <금융과 발전>에 “신자유주의는 과대평가되었는가?”라는 글이 실렸다. 통화기금의 연구처 부국장인 조너선 오스트리 등이 집필한 논문은 신자유주의 의제란 탈규제와 국내시장 개방을 통한 경쟁력 강화, 그리고 민영화와 재정적자 감소를 통한 국가 역할의 축소가 그 핵심이라고 밝힌다. 이런 정책에 힘입어 국제무역에 의한 빈곤 완화, 개도국에 대한 기술이전, 효율적인 공공서비스 제공 등 긍정적 효과가 발생했다고 논문은 지적한다. 그러나 금융개방과 긴축정책이 성장을 촉진하지 못했고, 불평등을 급격히 확대시켰으며, 경제의 지속가능성을 떨어뜨렸다고 비판한다.

논문의 결론이 흥미롭다. “모든 나라, 모든 시대를 통틀어 양호한 경제적 결과를 낳을 수 있는 단일한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 각국에 경제정책을 조언하는 국제통화기금은 신념이 아니라 실효성이 있다고 판명된 증거에 의해 인도되어야 한다.” 국제통화기금 연구부서의 최고 핵심 전문가가 자기 기관이 증거가 아닌 신념에 기대어 활동해 왔음을 고백한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국제통화기금은 정책기관이 아니라 이념집단이었다는 말인가.

논문을 읽으니 만시지탄의 허탈감과 분노가 함께 밀려온다. 솔직히 말해 이 정도의 주장은 오래전부터 많은 논자들이 해 오지 않았던가. 아마 이와 비슷한 우려와 비판을 다룬 논문이 기백편도 더 나왔을 것이다. 그렇게 경고해도 듣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망가뜨려 놓은 다음에야 뒷북을 치고 나오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신자유주의의 원조로 꼽히는 하이에크는 그것을 단순히 물질적 선익을 증진하기 위한 하나의 경제이론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에게 신자유주의는 총체적 세계관이었다. 애덤 스미스가 시장을 ‘보이지 않는 손’에 비유했다면, 하이에크는 자유시장을 독립적인 ‘자율의식’으로까지 격상시켰다. 이쯤 되면 경제학이 아니라 존재론적 형이상학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신자유주의는 깊은 차원에서 인권에 여러 변화를 몰고 왔다. 우선, 이념의 스펙트럼에서 인권의 좌표를 크게 이동시켰다. 현대인권의 기원으로 꼽을 수 있는 1948년의 세계인권선언은 단순한 선언이 아니었다. 18세기 이래 서구의 대표적 보편이념인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통합하려 한 사상사적 시도였다. 자유권과 사회권을 한 지붕 아래에 나란히 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선언의 제정 과정에서 1차 초안을 작성하여 전체 틀을 잡았던 유엔인권국장 존 험프리 교수는 인권선언이 “인도적 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결합”을 지향했다고 증언한다.

냉전 때 미·소 진영은 인권의 양 날개를 찢어서 각기 편리한 쪽으로 해석하려 했지만 당시 인권운동은 인권의 원형을 보존하기 위해 피눈물 나는 노력을 기울였다. 자본주의, 사회주의, 비동맹권을 가리지 않고 인권의 원칙에 어긋나면 누구든 통렬히 규탄했다. 모든 진영을 비판하던 인권은 모든 쪽에서 욕을 먹었다. 하지만 그것 자체가 인권의 불편부당성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냉전이 끝난 뒤 마침내 인권의 원래 취지에 부합하는 시대가 오는가 싶었지만 그것도 잠시, 신자유주의적 지구화가 세상을 급격하게 오른쪽으로 몰고 갔다. 오늘날 인권은 신자유주의와 맞서 싸우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인권은 제자리에 있지만 세상이 과도하게 우경화되었기 때문이다. 시대의 맥락으로 보아 신자유주의를 거부하는 것이 곧 인권 본연의 길이 되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둘째, 인권을 지킬 의무가 있는 국가의 정치적 책무성을 따지기가 어려워졌다. 원래 인권은 시민권적 사회계약을 상정하여 시민과 국가의 관계를 규율하는 논리로 출발했다. 요즘은 사적 개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도 인권 문제로 보는 경향이 생기긴 했으나 인권의 기본구조는 여전히 공적 영역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공적 시민의 정치참여가 아닌, 사적 소비자가 시장에서 선택권을 행사하는 것을 진정한 주권행사라고 본다. 이렇게 되면 빈곤층이든 중산층이든 실질적으로 공민권을 박탈당한 상태가 되고 주권재민 원칙은 속 빈 강정에 불과한 수사로 전락한다. 정상적인 정치과정 속에서 합리적 판단에 따라 투표를 해봤자 소용이 없음을 깨닫게 된 사람들은 점점 더 구호나 감성적 호소에 즉각적으로 반응하게 되었다. 트럼프 지지자들에겐 팩트체크나 이성적 논증 같은 것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고 중요하지도 않다. 자신의 정서적 갈구를 채워줄 강렬하고 자극적인 메시지?가짜 뉴스, 막말, 증오 선동과 같은 언술적 헤로인?만 계속 제공받으면 된다.

셋째, 신자유주의의 심리적 파괴성을 들지 않을 수 없다. 경쟁이라는 말만 붙이면 그 내용이 무엇이든 무조건 공정하고, 경쟁에 의한 결과는 그것이 불평등이든 차별이든 무조건 최선이라는 경쟁만능주의를 정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보편적 평등의식 따위는 사치스러운 농담으로 비친다. 경쟁심리를 내면화한 대중은 자기가 ‘못나서’ 낙오한 루저라면 차별당해도 마땅한 존재라고 무시하기에 이르렀다. 경쟁이 심한 사회일수록 자해, 거식증, 고립감, 성공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수행불안증, 그리고 사회불안장애가 많이 나타난다.

사람들이 하루하루를 팍팍하게 살다 보니 사회부조리 따위를 생각할 여유도 겨를도 없어졌다. 그러다 보니 심성이 전반적으로 까칠해졌다. 이런 상태에선 타인의 불쾌한 언동이나 혐오표현과 같은 대인관계의 갈등에 특히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다. 이른바 ‘미시적 공격성’이 인권에서 중요한 화두로 떠오른 것도 이 때문이다.

또한 신자유주의는 사람의 소망과 염원을 늘 어떤 미래시점에 투영하곤 한다. 지금은 힘들어도 조금만 더 열심히 경쟁하다 보면 언젠가 행복한 날이 올 것이라 가르친다. 죽기 전에 도달할 수 있는 일종의 ‘세속적 내세’를 끊임없이 우리 귀에 불어넣는다. 그러나 신자유주의가 약속하는 ‘그날’은 영원히 오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신자유주의적 패러다임은 인권운동의 인식에도 영향을 끼쳤다. 불평등과 같은 구조적 인권침해를 함께 다루지 않고 젠더, 섹슈얼리티, 인종, 소수자와 같은 정체성 정치에만 치중해도 인권이 달성될 수 있다고 믿는 일부 경향이 그것이다. 낸시 프레이저는 이런 부류의 부분적 인권론자를 ‘진보적 신자유주의자’라 부르면서 노동-계급운동과 정체성 정치가 함께 가야만 인권을 제대로 지킬 수 있다고 조언한다. 월스트리트와 정체성 정치를 접목하려다 실패한 힐러리 클린턴을 인권운동이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이다.

지금까지 본 것처럼 신자유주의는 현대인권이 근본조건으로 가정했던 정치와 경제의 구조판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 인권을 가해자-피해자의 일차원적 구도로만 이해하는 좁은 틀에서 벗어나 역사와 사회구조가 빚어내는 인권조건에 대한 안목을 기르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21세기 그리스도교와 인권

가톨릭에서는 인간이 ‘이마고 데이’ 즉 신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므로 천부적인 존엄을 지니며 그것이 인권의 토대라고 가르친다. 따라서 인권을 침해하면 신성모독을 범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가톨릭은 세속 인권담론을 대부분 받아들이면서도 가톨릭적 특징을 유지한 인권사상을 발전시켰다.

나는 한국의 그리스도교가 세계적 차원의 인권 발전과 어깨동무하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예수의 행적과 그 신앙의 특성 때문에 그리스도교는 인권을 위한 투쟁에서 비켜나 있을 수 없다.” 복음주의 신학자 볼프강 후버의 말이다.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21세기에 새겨야 할 지향이 아닐까 한다.

다음 주면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에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하면서 시작된 종교개혁이 500년을 맞는다. 인권 발전에 거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이었다. 개신교와 가톨릭을 통틀어 그리스도교의 인권관도 근본적 차원에서 변했다. 큰 틀에서 보면 종교개혁 이후 그리스도교와 인권은 점진적으로 수렴되어 왔다.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그리스도교는 시대적 소임을 마다하지 않았다. 교회에 뿌리를 둔 인권단체들, 그리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정의구현사제단, 정의평화위원회 같은 조직들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 글에선 그리스도교가 전세계적으로 인권의 길로 나아가게 된 과정을 짚어보려 한다. 이 역사를 이해하면 21세기 한국 그리스도교가 가야 할 방향이 보일 것이다.

개신교는 누구도 진리를 독점한다는 이유로 타인의 내적 신념과 외적 표현을 억압할 수 없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성직자의 중재 없이 직접 구원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 그리고 평신도가 성경을 읽고 스스로 해석할 수 있게 한 것은 자유와 자율을 지닌 근대적 개인이 출현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었다. 종교자유 원칙을 실현하기 위해 정치적 권리가 필요했고 이는 근대 인권의 방향과 맞아떨어졌다.

루터와 칼뱅의 신학관에 힘입어 교회의 권력과 재산은 국가로 이동했고 그것을 통해 법을 해석하고 집행하는 방식이 변했다. 교회법원과 국가법원이 통합되었고, 형법 절차가 개선되었으며, 가족법과 사회복지 관련법이 크게 변화했다. 이런 경향은 입헌주의 그리고 연방주의와도 연결되었다. 미국의 경우, 연방헌법 수정조항 1조에서부터 정교분리를 규정한 덕분에 종교자유가 개인권리로 이어지는 정치문화가 조성되었다.

개신교가 종교적 불관용의 태도를 보인 경우도 있었다. 루터의 반유대주의, 크롬웰의 청교도 독재, 칼뱅의 신정주의는 잘 알려진 사례다. 노예제에 대한 태도는 이중적이었다. 식민지배와 정복 과정에서 일어난 학살과 착취는 지금까지 논란이 되고 있다.

20세기 초부터 감리교, 장로교, 성공회, 회중교회, 루터교, 구세군 등 주요 교단들은 인권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유엔 결성과 세계인권선언 제정에도 힘을 보탰다. 빈곤과 정치적 탄압에 맞서고 있던 한국 등 개도국의 민중과 연대하고 그들의 투쟁을 물심양면으로 후원했다. 미국 정부의 제3세계 군사독재정권 지원을 반대하기도 했다.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니카라과의 인권유린 상황을 조사하고 난민을 구호하는 활동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초교파적인 세계교회협의회(WCC)의 활약도 언급해야 하겠다. 이 조직에 깊이 관여했던 프레더릭 놀디 교수는 국제 문제에 관한 교회위원회(CCIA)의 총무를 겸임하면서 세계인권선언 18조에 사상·양심·종교의 자유를 포함시키는 데 산파 역할을 했다. 협의회는 1998년 제8차 세계총회에서 ‘인권에 관한 공식성명’을 발표하여 지구화의 문제점, 인권의 불가분성과 보편성, 인권 정치화 반대, 인권 침해자의 불처벌 반대, 사형 폐지, 평화 구축, 종교자유와 종교적 관용, 여성·원주민·난민·장애인 인권, 모든 종류의 차별 반대를 선언했다.

미국 복음주의 개신교단의 분위기는 달랐다. 냉전 시기에 공산권의 인권침해를 고발하는 성과를 내긴 했으나 우파 독재에는 눈감은 경우가 많았다. 남아프리카의 흑백분리 정책을 반공의 이름으로 용인했던 게 좋은 예다. 유엔의 활동에 제동을 걸었고, 미국의 일방주의적 대외정책을 정당화하곤 했다.

종교개혁 이후 나타난 반종교개혁의 움직임 속에서 가톨릭의 2세대 스콜라 철학자들은 개인의 권리와 공동체의 권한을 통한 새로운 인권이론을 발전시켰다. 아메리카 원주민들 인권을 위해 고군분투했던 라스 카사스 신부도 이런 흐름에 속한다. 그러나 가톨릭은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러서도 과학의 진보와 갈등을 빚고 개인의 사상을 억압하는 일이 잦았다. 프랑스혁명에서 교회는 보수반동의 편에 섰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새천년을 맞아 교회가 인권을 유린한 경우가 많았음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하는 역사적 고백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가톨릭에서는 인간이 ‘이마고 데이’ 즉 신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므로 천부적인 존엄을 지니며 그것이 인권의 토대라고 가르친다. 따라서 인권을 침해하면 신성모독을 범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가톨릭은 그 사회교리 체계를 통해 세속 인권담론을 대부분 받아들이면서도 가톨릭적 특징을 확실히 유지한 인권사상을 발전시켰다. 이에 따르면 권리와 의무는 동전의 양면이고, 모든 권리는 인간의 가치를 법적·제도적으로 충족시키는 것이 되어야 하며, 인권을 실현하려면 사회적 연대와 국가의 역할이 반드시 필요하다. 또한 태아 보호, 안락사 반대, 사형 폐지 등 생명의 가치를 일관되게 옹호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원칙을 고수한다.

가톨릭의 현대 인권 프레임은 1891년 레오 13세 교황의 노동회칙 ‘자본 및 노동의 권리와 의무’에서 비롯되었고, 이 회칙은 유럽에서 사회적 시장경제의 토대가 되었다. 비오 12세 교황은 이차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성탄 메시지를 통해 평화 5개항을 발표했는데 그중 첫째가 인간의 존엄과 기본권이었다. 가톨릭교회는 세계인권선언 제정 과정에 참여했고 유엔을 통한 국제 인권외교의 선두에 서왔다. 가톨릭 학생과 지식인 운동의 연합체인 팍스로마나의 역할도 기록해 둘 만하다.

요한 23세 교황은 1963년 ‘지상의 평화’ 회칙을 발표하여 유엔에서 만든 가장 중요한 문헌이 세계인권선언이라고 인정하면서 이 선언이 “세계 공동체의 법적, 정치적 조직을 위한 중요한 진일보를 의미”하고 “모든 인간에게 더욱 장엄하게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한다고 평가했다. 바티칸공의회에서 나온 종교자유 선언인 ‘인간 존엄성’, 그리고 현대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헌장인 ‘기쁨과 희망’도 가톨릭의 핵심 인권문헌으로 꼽힌다. 오늘날 가톨릭교회는 전세계적으로 인권의 확실한 우군이 되어 있다.

그러나 흠결이 없는 건 아니다. 가톨릭 교세가 강한 여러 지역에서 독재정권을 묵인하기도 했고, 여성의 권리 신장에 소극적이었던 건 부인할 수 없다. 노동자 권리를 옹호하면서도 교회기관의 직원들을 야박하게 대하는 경우가 많았고, 사제의 아동 성추행 사건으로 큰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요약하자면 종교개혁 이래 그리스도교는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인류의 존엄을 지키는 역할을 확대해 왔고 국제인권체제의 발전에도 큰 몫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국제인권규약’의 ‘규약’(Covenant)이라는 용어가 창세기 21장의 “아브라함이 소와 양을 끌어와 아비멜렉에게 주고 두 사람은 ‘언약’을 맺었다”에서 비롯되었다는 점만 보더라도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교와 인권이 긴장관계를 이루는 경우도 있다. 인권을 지지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이성과 계시를 통해 인권을 식별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인권을 성서적 관점에서 정당화할 수 있는지, 그리고 인간의 권리를 절대화하면 신의 주권이 훼손되는지, 하는 신학적 질문을 놓고 고심을 거듭하는 신도가 많다.

인권을 둘러싼 한국 개신교의 최근 논란도 이런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다. 종교인의 관점으로 세상사에 개입하는 것은 정당한 종교자유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종교적 신념을 일반사회에 설파할 때엔 종교인다운 온유와 덕성에 바탕을 두고 처신하는 절제심이 필요하다. ‘무엇을’ 말하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말하는가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신앙과 공적 이성이 건설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인권문제는 흑백으로 가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차이를 완전히 해소하기 어렵더라도 현실적으로 갈등을 줄일 수 있는 절충 방안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한국의 그리스도교가 세계적 차원의 인권 발전과 어깨동무하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예수의 행적과 그 신앙의 특성 때문에 그리스도교는 인권을 위한 투쟁에서 비켜나 있을 수 없다.” 복음주의 신학자 볼프강 후버의 말이다.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21세기에 새겨야 할 지향이 아닐까 한다.

대학 인권을 상자 바깥에서 본다면

대학 인권은 현실적으로 골칫거리지만 이론적으로도 어렵다. 법적으로 처리해야 할 정도의 심각한 사안도 있지만 해석과 뉘앙스에 달린 문제도 있다. 관행의 이름으로 대수롭지 않게 용인되던 일들이 하루아침에 인권 문제로 폭발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학내 민주주의 수준을 높여서 학생, 직원, 교원이 참여하고 숙의하는 전통을 만들어가야 한다. 그렇게 해야 자연스럽게 갑질 문화가 줄고, 약자가 최소한의 대항력을 확보할 수 있다. 그렇게 해야 학생들이 부당한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되 스스로의 책임과 의무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

요즘 전국 대학들이 인권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대학 인권 관련 보도가 나온다. 아마 이 문제로부터 자유로운 대학은 거의 없을 것이다. ‘대학 인권’에는 여러 차원의 문제가 섞여 있다.

우선, 학생들 특히 대학원생에 대한 이른바 교수 갑질의 문제가 있다. 사적 업무지시, 연구비 횡령, 연구성과 도용, 노동 착취, 학위와 미래에 관한 위협이 그것이다. 법인과 대학자금의 유용, 횡령, 배임 등 사학비리도 있다. 예체능계 학생에게 강압적 규율과 폭력을 행사하고 그들의 학습권을 침해하기도 한다.

의사교수가 전공의에게 가혹행위를 하고, 전공의는 간호사에게 분풀이를 하고, 간호사는 후배 학생을 ‘내리 갈굼’하는 연쇄 유린도 발생한다. 단톡방 익명 게시판에서 학생 간 성희롱, 성차별적 콘텐츠의 유포, 혐오 표현에 의한 인격살해가 이 순간에도 진행 중이다. 교수의 막말, 폭언, 폭력, 인종·성별·외모·나이에 관한 차별 발언, 성희롱·성추행, 부적절한 신체접촉 등의 문제도 있다. 이처럼 다양한 이슈들이 ‘대학 인권’이라는 모호한 표현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인터넷 포털의 검색어 트렌드 서비스에서 지난 2년간 대학과 인권, 두 단어를 조합한 검색빈도를 찾아보면 성희롱·성추행 사건과 교수 갑질 사건이 터졌을 때 특히 폭발적으로 검색이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글의 목적을 위해 편의상 ‘대학 인권’을 “대학이라는 교육공간에서 어떤 구성원이 제도상의 결함 혹은 위배, 그리고 타 구성원(들)의 언행이나 조치로 인해 피해, 차별, 모욕, 불이익, 부당함을 경험하거나 인격침해를 받았다고 인식하여 발생한 문제들을 통칭하는 관행적 용어”라고 폭넓게 규정해 보자.

대학 인권은 현실적으로 골칫거리지만 이론적으로도 어렵다. 법적으로 처리해야 할 정도의 심각한 사안도 있지만 해석과 뉘앙스에 달린 문제도 있다. 관행의 이름으로 대수롭지 않게 용인되던 일들이 하루아침에 인권 문제로 폭발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표현의 자유와 ‘정치적 올바름’이 충돌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세대 간 인식의 격차를 반영하는 갈등도 많다. 문제가 대학 당국의 관할권 범위 내에 있는지 분명치 않을 때도 있다. 예를 들어, 성인 학생들 사이에서 벌어진 일에 대학이 어느 정도나 개입해야 하고, 어디까지 ‘책임’을 져야 할지 정하기 어렵다.

흔히 사람들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인권을 호명하곤 한다. 우선 ‘제도로서의 인권’이 있다. 국제규범이나 실정법, 또는 학칙에 확실히 규정되어 있는 사항이다. 이때 해결의 기준과 절차가 비교적 명확하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 주관적으로 억울하다고 느끼는 모든 문제를 ‘인권’의 이름으로 불러낼 때가 많다. 이것은 ‘은유로서의 인권’이다. 대학 인권에는 두 가지가 혼재되어 있어 해결이 어려워지는 경향이 있다.

대학 인권 문제를 쉽고 빠르게 해결할 수 있는 왕도는 없다. 상자 안에서 해결하는 방법과 상자 바깥에서 접근하는 방법으로 나눠 설명해 보자. 전자는 인권이라는 구체적 이슈에 초점을 맞춰 인권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주류적 방법이다. 이것을 위해 여러 아이디어가 나와 있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인권을 다루는 기구와 절차를 통해 대처하고, 교육·계몽·홍보를 통해 구성원들의 의식을 바꾸려는 접근 방식이다. 최근 전국의 237개 대학을 상대로 시행한 조사에 따르면 응답한 97개 대학 중 19개 대학에 인권센터가 설치되어 있었다. 서울대처럼 성희롱·성폭력 상담소에서 인권센터로 진화한 경우도 있다. 현재 더불어민주당 노웅래 의원의 발의로 모든 대학에 인권센터 설치를 의무화하자는 고등교육법 개정 법률안이 제출되어 있다.

국가인권위원회도 대학원이 설치된 전국 182개 대학에 인권전담기구를 만들라는 권고를 내놓았다. 고려대, 동국대, 서강대, 성균관대, 한양대 등에서는 교수의 성차별적 언행을 강의평가에 포함시키기 시작했다. 인권을 침해한 구성원에게 인권교육을 의무적으로 이수하게 하는 학교도 있다. 대학평가의 기준에 인권지표 항목을 추가하자는 제안은 진지하게 고려할 만하다. 성공회대에서는 내년부터 모든 신입생이 인권과 평화라는 과목을 교양필수로 이수하게 된다. 연세대는 피해자-가해자의 단순 구도를 넘어 공동체 전체를 살리는 회복적 정의 개념으로 인권에 접근한다.

대학 인권센터의 학내 위상, 독립성, 법적 권한이 제한적이라는 이유로 그것에 회의적인 시각을 갖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인권 전담조직이라는 상징성과 표출성이 구성원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적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인권을 순수하게 법적 논리로만 다룰 수는 없다. 인권센터이든 상담소이든 피해를 당한 사람이 문을 두드릴 수 있는 창구가 있으면 큰 도움이 된다. 그런데 나는 인권에 특화된 제도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더 큰 그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상자 안에서만 인권을 논하는 태도는 원근법을 무시하고 세밀화에만 몰두하는 것과 비슷하다.

바로 이 때문에 상자 바깥에서 접근하는 방법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학내 인권 문제의 발생을 원천적으로 줄이고, 문제가 발생했을 때보다 용이하게 해결할 수 있는 조건과 환경을 조성하는 일이 중요하다. 이것을 위해선 대학의 일차적 사명을 재확인하는 데에서 출발해야 한다. 공자님 말씀처럼 진부하게 들릴지 몰라도 길게 보면 제일 확실한 방법일 수 있다.

1992년 루마니아의 시나이아에서 유네스코의 유럽고등교육센터 주최로 학문의 자유와 대학의 자율에 관한 국제학술회의가 열린 적이 있다. 회의는 학문의 자유를 “학자가 고등교육기관에서 특정한 지적 개념을 활용하고, 지적 활동의 경로를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는 자유”라고 규정한다. 학문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대학의 자율도 필수적이라고 지적하였다.

이 회의에서 채택된 문헌이 ‘시나이아 성명’이다. 성명은 대학의 연구와 당파적 연구를 구분 짓는다. 전자는 개방적이고 독립적이고 제약 없이 진리를 추구하는 것을 뜻한다. 대학인들 스스로 학문의 자유를 육성할 책임이 있고, 정부와 대중은 대학이 자유로운 연구와 사회적 비판의 중심이 될 수 있도록 존중해야 한다. 또한 대학은 관용의 가치와 평화적인 문제 해결을 절대적으로 중시해야 하며 이런 자세가 없으면 대학의 역할은 말할 것도 없고 문명사회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학문의 자유, 대학의 자율에다 학내 민주주의를 더한 세 개의 치열한 불기둥이 대학 인권을 위한 선결 조건이 되어야 한다. 금기시되는 연구주제는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꼭 필요하지만 인기 없을 것 같은 이슈는 알아서 피해가고, 고액의 프로젝트에 조건반사식으로 반응하는 대학은 대학의 자율이니 독립이니 하는 대접을 받을 자격을 스스로 포기한 것이다. 외부 지원을 받지 말자는 말이 아니다. 원칙을 지키려는 강렬한 문제의식이 먼저 깔려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대학의 큰 줄기가 처음부터 뒤틀려 있다면 그 안에서 제대로 된 인권의식이 나오기는 어렵다.

학내 민주주의 수준을 높여서 학생, 직원, 교원이 참여하고 숙의하는 전통을 만들어가야 한다. 그렇게 해야 자연스럽게 갑질 문화가 줄고, 약자가 최소한의 대항력을 확보할 수 있다. 그렇게 해야 학생들이 부당한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되 스스로의 책임과 의무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 그렇게 해야 대학의 운영에 따르는 현실적 고충을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해야 구성원들 간의 신뢰도가 높아진다.

이런 조건이 갖춰져 있으면 설령 인권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인권센터가 내놓는 해결책을 다 함께 믿고 수긍한다. 하지만 이런 선행조건 없이는 인권센터가 규정대로 일을 처리한다 해도 ‘교수인권센터’라는 비아냥이 나올 수밖에 없다. 결론을 말하자. 학문의 자유, 대학의 자율, 학내 민주주의를 통해 대학이 사회 속에 바로 서야 학내 인권침해가 발생할 확률적 개연성이 줄어든다. 대학 인권 문제가 심각할수록 상자 바깥에서 전체를 보는 통찰이 필요하다.

인권교육과 세계인권선언

업그레이드된 인권교육에 어떤 내용이 포함되어야 할까. 그동안 인권교육에서 부족했던 부분, 즉 인권의 역사적 차원, 인권문제를 다루는 맥락, 그리고 인권에 관한 생생한 스토리텔링을 강화해야 한다고 본다. 그것을 위해 세계인권선언을 중심에 둔 인권교육이 하나의 답이다.

세계인권선언을 처음 읽어본 사람들은 흔히 경제·사회·문화적 권리를 규정한 22조부터 27조 사이의 내용에 놀라곤 한다. “이런 게 언제부터 인권이었나요”라고 묻는 사람도 있다. 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 사회의 인권의식이 국제기준에 비해 70년이 지체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요즘 인권 관련한 교육이 늘어났다. 서울시를 위시하여 공무원들에게 인권교육을 실시하는 지방정부가 많아졌다. 사회복지기관이나 교육계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런 현상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인권교육을 한번이라도 받아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교육 내용을 완전히 내면화하지 않더라도 인권을 강조하고 교육을 실시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에게 사회적 행동의 새로운 준거점을 일깨우는 효과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현재 시행 중인 인권교육은 지식과 정보의 제공, 그리고 행동 변화를 위한 인식 제고라는 양대 축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런 방식에서는 인권침해의 설명, 인권보호 규정 소개, 매뉴얼식 대처 방법 등이 주를 이룬다. 그런데 이런 접근이 초기 인권교육의 모델이었다면 앞으로 인권교육을 내용과 형식 면에서 더 풍부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표준교안에 따른 엇비슷한 내용을 매년 되풀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업그레이드된 인권교육에 어떤 내용이 포함되어야 할까. 그동안 인권교육에서 부족했던 부분, 즉 인권의 역사적 차원, 인권문제를 다루는 맥락, 그리고 인권에 관한 생생한 스토리텔링을 강화해야 한다고 본다. 그것을 위해 세계인권선언을 중심에 둔 인권교육이 하나의 답이다. 2018년이 유엔에서 세계인권선언을 선포한 지 70주년이 되는 해인 만큼, 이를 인권교육을 개혁할 수 있는 절호의 계기로 삼을 만하다.

몇해 전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라는 소책자가 우리 독서계에 큰 울림을 준 적이 있다. 에셀은 그 책에서 세계인권선언을 만드는 과정에 참여한 이야기를 하면서 오늘날에도 이 선언이 얼마나 적실한지를 강조한다. 그때 우리나라에 세계인권선언에 관한 책이 얼마나 출판되어 있는지 검색해보았다. 한 권도 없었다. 설마 해서 여러번 확인했는데 정말 한 권도 나오지 않았다. 상당히 놀랐다. 우리 인권교육의 척박함을 보여주는 증거 같았다. 그 때문에 일종의 의무감에서 세계인권선언을 해설한 책 <인권을 찾아서>를 출간하기도 했는데, 지금도 당시에 느꼈던 당혹감을 떠올리면 씁쓸해진다.

책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세계인권선언에 대한 관심 자체가 적은 것은 적잖게 걱정이 된다. 물론 이유가 있다. 일단, 70년 전의 선언이어서 딱딱한데다 구식으로 들리는 구석이 많다. 게다가 짧은 텍스트에 역사, 사상, 철학, 법학과 관련된 논의가 빼곡하게 들어 있어서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압축파일을 풀듯 늘여서 자세히 설명을 해야 한다.

너무 모범생 같은 톤으로 일관해서 우리의 팍팍한 인생살이에 살갑게 다가오는 감흥이 부족한 점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차별과 증오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면 ‘진지충’이라고 냉소하는 극혐의 시대에 살고 있다 해도 인권의 규범적인 원칙을 포기할 순 없다. 조지프 히스가 말한 ‘제정신 정치’를 위해서라도 세계인권선언의 진지한 호소에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세계인권선언은 인권교육의 출발점이 되어 마땅하다. 누가 뭐라 해도 인권의 바이블이기 때문이다. 세계인권선언 외에도 1993년의 빈(비엔나)국제인권선언 등 여러 선언이 나왔지만 그 어떤 문헌도 세계인권선언만큼의 지지와 권위를 누리지 못했다.

세계인권선언이 어째서 이런 무게감을 갖게 되었는가. 우선, 보편의 의미를 재정립했기 때문이다. 한자 문화권에서는 흔히 ‘세계인권선언’이라 하지만 실제 원문은 ‘인권의 보편선언’이다. 보편인권이 선험적으로 존재한다고 가정하지 않고, 인류의 중지를 모아 인권의 대의를 ‘더불어 함께 선포’한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 민주적 합의에 의해 인권 개념과 구체적 내용을 정립했다는 뜻이다.

또한 세계인권선언은 흔히 서양 인권역사에서 상식처럼 되어 있던 자연권적 천부인권설에서 탈피하여 인권의 철학적 토대를 인간의 이성과 양심, 존엄, 평등(반차별), 자유, 우애의 정신에 두었다. 인권의 사상적·문명적 기원을 괄호 안에 둔 채 새로운 인간관을 선포의 형식으로 제시했다. 일종의 사회구성주의적 인권론으로 출발한 것이다.

경제·사회·문화적 권리가 정식 인권목록에 포함된 것도 중요한 특징이다. 미국독립선언이나 프랑스혁명 인권선언과 확연하게 대비되는 부분이다. 세계인권선언을 처음 읽어본 사람들은 흔히 경제·사회·문화적 권리를 규정한 22조부터 27조 사이의 내용에 놀라곤 한다. “이런 게 언제부터 인권이었나요”라고 묻는 사람도 있다. 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 사회의 인권의식이 국제기준에 비해 70년이 지체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 세계 최고의 교육열을 자랑하는 나라 사람의 인권의식이 이 정도에 불과한 것을 우리는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사상사적 측면에서도 생각해볼 점이 있다. 나는 위에서 말한 책을 쓰면서 선언의 제정위원회에서 부위원장을 지냈던 중국 출신 장펑춘 박사의 활약을 알게 되었다. 그는 공자의 인(仁) 사상에서 인권의 정신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사람(人)이 둘(二) 있을 때 서로 간에 취해야 할 상호존중의 정신이 인(仁)이라는 것이다. 장펑춘 박사는 볼테르와 같은 유럽 계몽주의자들이 유교철학에서 깊은 영감을 받았고, 그것이 근대 인권사상에 영향을 끼쳤다고도 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장 박사의 말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러나 그 후 황태연·김종록이 저술한 <공자, 잠든 유럽을 깨우다>를 읽고 공맹의 국가철학, 동아시아 과거제도, 관료제, 양호국가 개념, 민본주의, 예치, 덕치, 간언, 상소제도 등이 서구 계몽주의에 깊은 통찰을 제공했음을 알게 되었다. 서로 다른 문명이 만나 새로운 사상체계를 창조한다는 이론을 ‘공동형성학설’이라고 하는데, 인권 역시 예외가 아닌 것이다.

물론 세계인권선언이 완벽하다고 할 순 없다. 오늘의 눈으로 보면 70년 전의 시대적 한계가 많이 드러난다. 국민국가 체제의 바탕 위에서 전 인류의 인권을 말하는 모순이 대표적인 한계다. 법, 정치, 경제, 사회보장, 노동, 교육 등 근대적 시스템을 전제로 한 것이 전세계 원주민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양성평등과 이른바 ‘정상’ 가족을 당연시했던 관점도 21세기의 시각으로 보면 구식이다.

구체적 권리의 조항 하나하나가 모두 새로운 논쟁거리로 등장한 점도 고민해봐야 한다. 예를 들어, 노예나 종속상태를 금지한 규정이 현대 자본주의 체제에서 먹고살기 위해 ‘자발적으로’ 예속관계에 진입하는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는 풀기 어려운 문제다. 인권을 인간 중심적으로 규정해놓은 점도 생태계 보존이라는 작금의 절체절명의 과제에 비추어 보면 너무나 아쉬운 대목이다.

이런 한계가 분명 있지만 그것이 세계인권선언의 본질적 가치를 폐기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건 아니다. 여러 흠결에도 불구하고 전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인권의 공통분모를 설정한 공로, 그것 하나만으로도 선언의 의미가 크다. 요즘같이 전세계가 극도로 갈등하는 상황에서는 세계인권선언과 같은 낙관적인 문헌에 인류가 합의하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인권교육에서 세계인권선언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우선 선언의 역사성과 그것의 진화 과정 및 정치적·국제적 맥락을 잡아주는 길잡이 강의가 필요하다. 오늘의 문제의식으로 선언의 조항들을 비판적으로 따져보거나, 각 조항과 관련된 활동을 하는 개인이나 엔지오(NGO) 사례를 찾아볼 수도 있다. 21세기 한국 사회에 필요한 맞춤형 인권선언을 다시 쓰는 연습을 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요컨대 인권교육 2.0 시대를 열기 위해선 인권규정의 준수를 위한 방법론적 차원의 교육을 넘어 민주시민교육으로서의 인권교육 내용이 대폭 추가되어야 한다. 인권에 대한 문제제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열린 교육의 장이 되어야 하고, 그런 토론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민주시민을 만드는 것이 인권교육의 중요한 목표가 되어야 한다. 세계인권선언은 민주시민교육으로서의 인권교육을 위한 플랫폼으로 소중하게 활용될 수 있는 인류의 자산인 것이다.

국제 홀로코스트 추모일에 부쳐

유엔은 2005년 총회결의안 60/7호를 채택하여 1월27일을 국제 홀로코스트 추모일로 지정했다. 결의안은 홀로코스트 부인 행위를 단호히 거부하라고 촉구하고, 민족과 종교 집단에 가해지는 불관용, 증오 선동, 괴롭힘, 폭력을 규탄했다.

홀로코스트의 역사성을 기억하면서 현재적 의미를 함께 상기하는 것도 중요하다. 홀로코스트를 예비하던 단계에서 나타났던 온갖 차별과 증오를 오늘 우리 사회의 혐오 현상과 연결시켜 해석할 줄 알아야 한다. 특히 소수자에게 가해지는 혐오 표현의 심각성을 직시해야 한다.

철조망 뒤에서 소총보병 322사단을 기다린 것은 7천명의 산송장 같은 수인들, 불태워진 수백명의 유해, 37만명분의 남자 옷과 84만명분의 여자 옷, 그리고 7.7톤의 머리칼이었다. 1945년 1월27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도착한 소련군이 맞닥뜨렸던 광경이다. 우려했던 나치 독일군의 저항은 없었다. 소련군의 진격이 가까워지자 화장장을 파괴한 뒤 걸을 수 있는 6만명의 포로를 끌고 ‘죽음의 행진’에 나섰기 때문이다.

유엔은 2005년 총회결의안 60/7호를 채택하여 1월27일을 국제 홀로코스트 추모일로 지정했다. 결의안은 홀로코스트 부인 행위를 단호히 거부하라고 촉구하고, 민족과 종교 집단에 가해지는 불관용, 증오 선동, 괴롭힘, 폭력을 규탄했다. 또한 결의안은 홀로코스트가 “증오, 선입견, 인종주의, 편견의 대상이 될 위험에 처한 모든 사람들을 위한 영원한 경고”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유엔 회원국들이 미래 세대에게 홀로코스트의 교훈에 관해 교육을 실시하라고 권고했다.

홀로코스트가 현대 인권을 형성하는 데에 중요한 단초를 마련한 사실은 세계인권선언의 전문에 잘 나와 있다. “인권을 무시하고 짓밟은 탓에 인류의 양심을 분노하게 한 야만적인 일들이 발생하였다. 따라서 보통사람들이 바라는 간절한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모든 사람이 말할 자유, 신앙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결핍으로부터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세상의 등장이라고 우리 모두가 한목소리로 외치게 되었다.”

국제 인권학계에서는 해가 갈수록 더 다양하고 풍부한 홀로코스트 연구 성과가 나오고 있다. 우리의 인권학이나 인권담론에서 민간인 학살이나 과거사 청산 문제가 주류에서 약간 비켜난 이슈로 다뤄지는 현실과 대조를 이룬다. 최근엔 기존의 홀로코스트 서사에서 정설로 취급되던 관점에 의문을 제기하는 연구가 많이 등장했다. 작년에 출간된 댄 플레시의 <히틀러 이후의 인권>이 대표적인 성과다.

홀로코스트 연구에서 통용되어온 표준적 서사는 다음과 같다. 전쟁 중 연합국 쪽은 유대인의 박해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정확한 실상을 인지하지 못했다. 설령 정확한 사실을 알았다 한들 급박한 상황에서 홀로코스트를 중단시키기 위해 별도의 노력을 기울이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종전 후 독일의 뉘른베르크와 일본의 도쿄에서 전범재판이 열려 역사청산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 유엔에서는 1945년 이후 인권을 인류 공통의 의제로 채택하여 발전시켰다.

플레시에 따르면 이런 유의 설명은 홀로코스트에 관한 정보가 완전히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생겨난 오해에 가깝다고 한다. 최근에 기밀해제된 유엔의 문서고에서 그가 복원해낸 실상은 기존의 홀로코스트 서사와 많이 다르고, 기존의 인권 현대사 서술과도 상당히 결을 달리한다.

미국, 소련, 영국, 중국을 포함한 연합국 쪽 26개국은 1942년 1월1일 ‘유엔선언’을 발표한다. 유엔(국제연합)이라는 용어가 최초로 등장한 시점이다. 선언은 “세계를 지배하려는 사악한 세력에 맞서 인권과 정의를 지키기 위해 함께 투쟁할 것이다”라고 결의를 다진다. 또한 “전체주의적 군국주의의 한통속인 독일, 이탈리아, 일본에 대해 완전한 승리를 목표로 한다”고 적시한다. 1945년 초까지 21개국이 선언에 추가로 참여했고 그 후 몇 나라를 더해 총 51개국이 유엔헌장을 제정하기 위한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참가했던 것이다.

유엔선언이 나오고 다음해인 1943년에 유엔전쟁범죄위원회(UNWCC)가 비밀리에 결성되었다. 적국의 전쟁범죄 행위를 조사하는 일 자체가 극도로 민감한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전시였으므로 위원회는 개별 참여국들의 독자적인 활동, 그리고 그들이 보내오는 정보를 런던과 워싱턴에서 취합하는 정보교류의 기능을 담당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전쟁의 최전선에 있었던 강대국보다 중소국, 비서구권, 그리고 망명정부들이 더 큰 활약을 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홀로코스트가 일어나고 있던 바로 그 시점에서 자국의 지하 저항조직이 수집한 방대하고 상세한 일차 정보들을 모아 전범을 기소할 수 있는 구체적인 법적 증거로 재구성하였다. 정보의 정확도가 대단히 높았다. 트레블린카 절멸수용소의 가스실 바닥이 도기 벽돌로 깔려 있어 표면이 젖으면 매우 미끄럽다는 사항까지 보고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외부 세계에서 홀로코스트에 대해 잘 몰랐다는 건 사실과 다르다. 연합국 지도부의 정치적 판단으로 전쟁 수행의 우선순위에서 밀렸을 뿐이다.

위원회는 전쟁 시 여성에 대한 성폭력을 심각한 인권유린으로 파악하는 일에도 열심이었다. 흔히 이 문제는 1990년대의 보스니아 사태 그리고 일본군 위안부 이슈를 통해 국제적인 쟁점으로 등장했다고 보는 게 지금까지의 통설이었다. 그러나 전범위원회는 2차대전 도중에 이미 ‘강간과 강제 성매매’를 전쟁범죄로 규정하고 그리스, 필리핀, 폴란드 등지의 사례들을 채증하고 법적 소송을 준비했던 것이다.

전범위원회는 나치의 폭격이 이루어지는 와중에도 이렇게 철두철미한 조사를 진행하여 전범 약 3만6천명에 대해 사전 기소를 완료하였고, 종전 후 실제로 세계 각지에서 약 2천건의 크고 작은 전범재판을 통해 이들이 처벌받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흔히 2차대전 인적 청산의 대명사로 불리는 뉘른베르크 재판은 전쟁 후 진행된 세계적 전범처리의 그물망에서 상징적으로 유명세를 탔던 하나의 그물코에 불과한 것이다.

전범위원회의 또 다른 공헌은 새로운 법적 개념을 도입하여 현대 국제인권기준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이다. ‘침략전쟁’의 개념을 새롭게 정립하고, 상부의 명령을 단순히 따랐다는 핑계가 법적으로 인정될 수 없다는 원칙을 세우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다. 또한 국제형사재판소와 같은 중앙집중식 국제법정이 아니라 각국의 기존 사법체계 틀 내에서 국제기준에 따라 전쟁범죄를 처벌할 수 있는 지역분권적 인권법정의 가능성을 제시한 것도 중요한 기여로 꼽을 수 있다.

유엔전범위원회는 세계인권선언이 나온 1948년에 활동이 중단되었고 이듬해에 모든 자료가 기밀로 분류되어 봉인되기에 이른다. 복역 중이던 나치전범들이 비슷한 시기에 일제히 풀려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냉전 반공주의를 내세우던 트루먼 미국 대통령 입장에선 전범 청산보다 서독과 일본을 돈독한 우방으로 만드는 게 절실했다. 미 국무부 내에서도 나치 척결파와 나치 활용파가 대립했다. 나치 부역자들을 반공투사라고 치켜세운 매카시 상원의원도 한몫을 했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고 다시 세상에 나온 유엔전범위원회의 기록은 오늘날 인권운동에 현실적인 교훈을 주고 있다. 기록 보존의 중요성이 첫째다. 당장 해결이 안 되더라도 기록이 있으면 언젠가 역사를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이다. 인권 문제를 정치 논리로 재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도 얻을 수 있다. 전범위원회를 종결하면서 내놓았던 논리와 오늘날 과거사 청산을 덮자고 하는 논리가 유사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반인권의 논리에는 ‘보편적’인 회로가 있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 그 자체의 역사성을 기억하면서 그것의 현재적 의미를 함께 상기하는 것도 중요하다. 홀로코스트를 예비하던 단계에서 나타났던 온갖 차별과 증오를 오늘 우리 사회의 혐오 현상과 연결시켜 해석할 줄 알아야 한다. 특히 소수자에게 가해지는 광기에 가까운 혐오 표현의 심각성을 직시해야 한다. 홍성수 교수의 근작 <말이 칼이 될 때>가 이런 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나는 인권교육, 인권강사 교육에 홀로코스트 교육을 포함시킬 때가 되었다고 본다. 그것을 통해 인권 문제를 역사적, 구조적 맥락과 동떨어진 개별적 에피소드로 다루는 인권의 파편화와 왜소화 경향을 시정해야 한다고 믿는다.

올해 국제 홀로코스트 추모일을 기념하여 일반 대중을 위한 홀로코스트 문화주간 행사가 1월23일부터 24일까지 주한독일문화원에서 열린다. 인권을 세계사적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호모 로컬리스와 지방분권

인간은 특정 지역에 생활 본거지를 둔 존재, 즉 호모 로컬리스다. 국민국가 체제가 확고히 자리를 잡으면서 국가에 소속된 지위로서의 시티즌십 사상이 나오긴 했다. 하지만 시티즌십이 정치적이고 인위적인 기획의 산물이라면, 호모 로컬리스는 실생활과 밀착된 자연발생적 개념이다.

인권에 기반을 둔 지방분권 모델이 주목받는다. 국가 차원에서 인정되는 보편 인권기준을 모든 지방정부에서 실천하도록 요구할 수 있으므로 전국 차원의 형평성을 보장할 수 있는 개념적 안전장치가 마련되는 큰 장점이 있다.

독일의 대학에서 강의를 하던 중 이 나라에서 교사가 되려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학생들이 금방 답을 못하고 서로 물어보는 게 아닌가. 주마다 교육자 양성과정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연방제나 지방분권 국가에선 당연한 일이 한국인에겐 이렇게 낯설다. 요즘 개헌 논의가 한창이다. 흔히 개헌의 3대 쟁점으로 기본권, 지방분권, 정부 형태(권력구조)를 들곤 한다. 하지만 지방분권은 인권과 동일한 선상에서 취급해야 하는 주제다.

인류가 수렵채취에서 농경으로 정착 생활을 시작한 이래 인간은 자기가 속한 생활권의 범위 안에서 사회적 정체성을 발전시키는 쪽으로 진화해 왔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특정 지역에 생활 본거지를 둔 존재, 즉 호모 로컬리스다. 국민국가 체제가 확고히 자리를 잡으면서 국가에 소속된 지위로서의 시티즌십 사상이 나오긴 했다. 하지만 시티즌십이 정치적이고 인위적인 기획의 산물이라면, 호모 로컬리스는 실생활과 밀착된 자연발생적 개념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지역’이라는 용어에는 두 가지 뜻이 혼재되어 있어 혼동을 일으킨다. 국가(중앙) 차원이 아닌 로컬이라는 의미와, 서울이 아닌 지방이라는 의미가 함께 들어 있기 때문이다. 중앙이냐 로컬이냐 하는 구분에 따르면 서울에 살아도 로컬 주민이고 우도에 살아도 로컬 주민이다. 지방분권은 주로 이 점을 겨냥한다. 로컬 차원에서 결정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을 로컬로 이양하고, 중앙정부는 나머지 부분을 보완하는 역할을 한다. 이것을 ‘탈중앙화’라고 부른다. 따라서 지방분권 개헌은 탈중앙화 개헌이라고 표현하는 편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반면, 서울 한 곳에 자원, 인프라, 영향력이 몰려 있는 것을 지방으로 분산시키자는 주장은 ‘탈집중화’로 설명할 수 있다. 탈집중화는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자원의 분산을 뜻한다. 한국은 중앙화와 집중화가 모두 극심한, 예외적인 나라다. 지방이 서울에 대해 극심한 박탈감을 느끼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방분권이 왜 필요한가. 지방분권의 궁극적 목적은 호모 로컬리스가 필요로 하는 구체적 삶의 문제를 잘 해결하기 위해서다. 호모 로컬리스가 사회적 삶을 제대로 영위하려면 최소한의 의식주, 생계, 건강, 의료, 환경, 교육, 노동, 사회보장, 불차별, 준법이 필요하다. 이런 것들이 곧 인권이다. 따라서 지방정부는 인간의 본질적 욕구에 해당하는 인권을 실현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규정할 수 있다. 초대 유엔 인권위원장을 지내고 세계인권선언의 제정을 주도했던 엘리너 루스벨트의 유명한 말이 있다. “인권은 우리가 사는 주변, 작은 곳에서부터 지켜져야 한다.”

지방자치를 하지 않던 시절엔 중앙정부가 도지사를 직접 임명했다. 주로 지역 연고가 있는 내무부 소속 고위 공무원들이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곤 했다. 도지사는 임명제청권자인 내무부 장관, 그리고 임명권자인 대통령에게만 책임을 졌다. 전형적인 상향 책무성 제도였다. 언론엔 누가 ‘도백’이 됐다더라 운운하는 전근대적인 표현이 자주 등장했다. 주민들에게 책임질 의무가 없는 사람이 지방정부의 우두머리였으니 그것이 얼마나 비민주적인 상황이었는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반대로 지방자치는 지방정부의 수장이 주민들에게 직접 책임을 지는 제도이니 이것이 내재적으로 얼마나 민주주의에 가까운지 알 수 있다.

지방분권을 실현하는 방식에는 세 가지 접근이 있다. 첫째는 위에서 말한 탈중앙화 방안이다. 통상적으로 이것을 지방분권이라 한다. 주민에 대한 하향 책무성이 강화되고 수요 중심의 행정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탈중앙화는 지방분권의 출발점에 불과하며, 잘못 시행될 때 부작용이 크다. 우선, 지방정부들 사이에 칸막이가 쳐지면서 중앙정부가 지역 간 형평을 달성하기 위해 전국 단위의 정책을 펼 수 없게 될 위험이 다분하다. 잘사는 지역이 못사는 지역을 돕는 연대성의 원리가 헌법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근거다.

탈중앙화를 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주민참여와 인권이 실현되지도 않는다. 이 문제의 전문가인 김중섭 교수는 <인권의 지역화>에서 지역공동체의 고유한 질서와 집단주의적 속성이 반인권적일 수가 있고, 그것이 새로운 인권규범을 수용하지 못하게 가로막는다고 지적한다. 토박이들의 동질성 의식 때문에 외지 출신은 아무리 오래 살아도 ‘굴러온 돌’ 취급을 받기 일쑤다. 또한 무슨 가문이네, 학교네 하면서 지역 유지들끼리 배타적 카르텔을 유지하면 평등을 강조하는 인권 가치와 충돌할 수밖에 없다.

둘째, 주민참여를 통해 지방분권을 실천하는 방안이 있다. 이때 지역 시민사회가 참여형 거버넌스를 통해 부문별로 특수한 욕구를 행정에 반영할 수 있고, 각종 위원회를 통해 제도적 형태로 행정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것처럼 시민사회의 제도적 참여가 요식행위로 변질되는 경우가 적지 않고, 지방분권형 주민참여 역시 전국 차원의 수평적 형평을 보장하는 데에는 역부족이다.

바로 이 때문에 셋째 방안, 즉 인권에 기반을 둔 지방분권 모델이 주목받는다. 국가 차원에서 인정되는 보편 인권기준을 모든 지방정부에서 실천하도록 요구할 수 있으므로 전국 차원의 형평성을 보장할 수 있는 개념적 안전장치가 마련되는 큰 장점이 있다. 그런데 연구에 따르면 인권에 기반을 둔 접근을 할 때 고정된 법적 권리들을 항목별로 실천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손쉬운 방법이긴 하나 길게 보면 효과가 적을 수도 있다고 한다. 이 점은 지역 시민단체나 인권운동이 주의해야 할 부분이다. 오히려 지방정부의 의사결정과 행정 속에 인권의 팬더(PANTHER)원칙―참여, 책무성, 불차별, 투명성, 인간존엄, 권한 강화, 법의 지배―이 녹아들도록 하는 편이 장기적으로 바람직한 지방분권의 방향이라는 것이다.

몇 년 전 유엔 인권이사회가 지방분권과 인권에 관해 보고서를 낸 적이 있다. 지방분권의 헌법적 보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누누이 강조한다. “국가의 헌법에서 지방정부를 인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헌법상의 보장이 지방분권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데 있어 최선의 방안이다.” 요즘 회자되는 지방분권형 개헌 논의가 명백하게 옳은 방향임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이것에 더해 보고서는 국가가 비준한 국제인권법의 내용을 지방정부가 풀뿌리 차원에서 이행할 의무가 있다고 일깨운다. 따라서 “지방자치단체의 출마자는 주민인권 보호에 특별한 의지가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솔직히 말해 중앙 차원이든 지방 차원이든 인권에 대한 신념이 없는 사람이라면 공직에 출마하지 않는 게 옳다고 본다. ‘갈등 전문가’라는 오명을 얻었던 서울 강남구청장의 사례는 반면교사가 된다. 충남도의회가 인권조례를 폐지한 것도 지방자치 정신을 스스로 부정한 경우에 해당된다.

끝으로, 21세기 미래지향적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지방분권이 되려면 금과옥조로 여겨져 온 개발모델을 지역 차원에서 답습하는 것이 되어선 안 된다. 묻지마식 개발 패러다임으로 지방분권을 시행한 것이 어떤 암울한 결과를 낳았는지 알고 싶으면 중소도시 외곽에 세워진 텅 빈 아파트 단지들을 보면 된다. 개발의 명분으로 승인권자와 건설업자들이 결탁하여 지역사회를 망쳐 놓는 작태를 지방분권의 이름으로 허용해서는 안 된다. 외형적인 성장과 토건식 개발에 목말라하는 풍토, 개발의 명분 앞에서는 그 어떤 가치도 맥을 못 추는 현실을 바꾸기 위해선 특단의 노력이 필요하다. 가장 현실적인 대안은 지속가능발전목표(SDG)의 거시적 틀 안에서 지방분권을 작동시킬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다.

‘국민’이 정치적이고 법적인 정체성이라면, ‘지역 주민’은 현실적 조건으로서의 인간 정체성이다. 보통사람은 호모 로컬리스의 자의식을 갖고 자신의 생활세계를 중심으로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게 가장 자연스럽다. 지방분권을 해야 인권이 보장되고, 인권적인 지방분권을 해야 진정한 지방분권이 가능하다. 새 헌법에 이런 방향성을 담아야 한다.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꿈을 이룬 너는 나의 챔피언

장애인권리협약은 장애인도 모든 권리의 정당한 향유자임을 명쾌한 언어로 선포한다. 장애란 어떤 손상을 지닌 사람과 사회 전체의 태도 및 환경적 장벽이 상호작용하는 과정 속에서 발생한다는 사회적 모델을 취한다. 사회환경이 좋아질수록 긍정적으로 재구성될 수 있는 가변적 상태로 파악한다.

장애복지가 발전해도 젠더는 여전히 중요한 요소로 남는다. 여성 신체장애인, 여성 지적장애인의 인권침해에는 고유의 특성과 맞춤형 지원이 필요하다. 보호자와 부모와 돌봄 제공자 중에서도 어머니와 여성의 역할이 두드러져 보이는 현상을 젠더 관점에서 고민해 봐야 한다.

학급당 학생 수가 예순 명이 넘던 시절이 있었다. 양쪽 클러치를 쓰는 한 장애 급우가 짧은 휴식시간에 화장실에 가고 싶어도 느린 동작 때문에 다시 주저앉곤 하던 광경이 떠오른다. 교사부터 학생들까지 장애 친구를 비속어로 부르기 일쑤였고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경우는 드물었다. 부끄러운 기억이 아닐 수 없다.

장애인을 바라보는 세 가지 시각이 공존해 왔다. 운명이라고 받아들이고 체념하는 시각이 있었다. 기피하거나 멸시하는 시각이 있었다. 연민과 자비의 대상으로 보는 시각이 있었다. 마지막은 자선사업, 사회사업과 가까웠던 시각이다. 이러한 전통적 장애관에 혁명적 변화가 왔다. 그 변화의 핵심에 장애인권이 있다.

전세계적으로 1980년대 이래 개인이나 국가가 베푸는 ‘시혜’를 장애인이 ‘고맙게’ 받는다는 구도가 통하지 않기 시작했다. 장애인도 인격적 주체고, 국가공동체의 구성원 자격(시티즌십)을 요구할 권리가 있으며, 동정의 시선보다는 인권과 그것의 완전한 향유를 바라는 흐름이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인권에 기반을 둔 장애 개념은 실천과 이론 모두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장애인을 인도적, 종교적 정신에서 돕는다고 가정해 왔던 자선 모델은 방향 전환을 요구받았다. 장애인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당연시했던 관행들, 그리고 자선 모델에 비추어 보더라도 잘못된 조치들이 비판을 받았다. 학문도 마찬가지였다. 계급, 인종, 젠더에 몰두하던 사회과학에 장애라는 새로운 쟁점이 큰 과제로 등장했다.

국제적으로 장애인 권리는 늦게 발전한 편이다. 1948년의 세계인권선언에는 장애에 대한 언급이 없다. 1966년의 양대 국제인권규약에도 장애가 규정되어 있지 않다. 1950년의 유럽인권협정에 정신장애에 관해 부수적 언급이 있었고, 1961년 유럽사회헌장은 장애인의 고용, 직업훈련, 주거를 별도 항목으로 다루었다. 국제노동기구는 1955년 장애인의 직업재활을 다룬 권고99호를 발표했다. 유엔도 1971년 지적장애인의 권리선언을 선포했고, 1975년에는 장애인권리선언을 제정했다.

유엔은 1981년을 국제장애인의 해로 정했고 그해 한국의 보건사회부는 4월20일을 제1회 ‘장애자의 날’로 지정했다. 유엔은 1983년부터 ‘장애인의 십년’ 기간을 선포했고, 그 이듬해에 최초로 장애인권 특별보고관을 임명했다. 1989년의 아동권리협약 23조는 정신적·신체적 장애아동에게 존엄성이 보장되고 자립이 촉진되며 적극적 사회참여가 장려되는 여건 속에서 품위 있게 살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인정했다.

유엔총회는 1990년대 들어 정신질환자 보호에 관한 원칙, 그리고 장애인의 기회균등에 관한 기본규정을 만들었다. 이런 단계를 거쳐 2006년 말에야 역사적인 장애인권리협약이 제정되었고 2008년 5월3일 드디어 발효되었다. 한국도 그해에 협약을 비준했다. 이처럼 장애인 권리가 국제법상의 인권으로 인정된 것은 최근의 일이라 할 수 있다.

왜 이렇게 늦어졌던가. 장애를 주로 병리적 현상으로 설명하고, 장애인은 누군가에게 의존해야 하므로 의학적 개입과 사회사업적 지원이 최상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인권 원칙에 따르면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모든 인권을 똑같이 누릴 수 있기 때문에 장애인 권리를 별도의 범주로 둘 필요가 없다는 형식논리도 한몫을 했다.

2006년의 장애인권리협약은 이런 경향에 종지부를 찍었다. 제정 과정이 속전속결이었고, 장애인 당사자단체(DPO), 비정부기구(NGO), 정부대표가 긴밀한 협의를 통해 도출한 국제조약이었다. 한국의 장애인 단체들도 뉴욕에서 협상과 로비에 적극 참여했다. 한 제자가 유엔본부에서 현장중계로 전해주던 이메일을 학우들과 함께 읽던 기억이 생생하다.

장애인권리협약은 장애인도 똑같은 존엄을 지닌 존재임을,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권리가 있음을, 법적 주체성을 가진 인격임을, 참여하고 발언할 수 있는 대등한 시민임을, 모든 권리의 정당한 향유자임을 명쾌한 언어로 선포한다. 협약은 장애를 개인의 문제로만 보지 않는다. 장애란 어떤 손상을 지닌 사람과 사회 전체의 태도 및 환경적 장벽이 상호작용하는 과정 속에서 발생한다는 사회적 모델을 취한다. 장애를 개인에게 고착된 낙인이 아니라, 사회환경이 좋아질수록 긍정적으로 재구성될 수 있는 가변적 상태로 파악한다는 뜻이다.

협약은 장애인의 특수한 욕구 충족을 위한 권리를 요구하는 공민권적 접근을 넘어, 보편적 접근을 중요하게 다룬다. 전자는 장애인도 주류사회의 제도와 서비스에 동등하게 접근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다. 후자는 사회가 다수의 비장애인과 소수의 장애인으로 이루어진다고 보지 않는다. 누구라도 생애주기 속에서 잠재적으로 장애인이 될 가능성이 있고, 장애인들 중에도 기능적 제약의 정도가 다양하므로, 만인의 인권을 염두에 둔 포괄적 장애정책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장애인권리협약 덕분에 인권의 문법이 많이 변했다. 국가가 간섭하지 않으면 된다고 하던 자유권을 국가의 개입 의무가 발생하는 권리로 바꿔 해석한다. 예를 들어 표현의 자유를 접근 가능한 정보취득권으로 전환시켰다. 이렇게 되면 국가의 역할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의사결정을 둘러싼 관점에도 근본적 변화가 왔다. 과거에 장애인을 대신해서 결정해 주었다면, 이제는 장애인이 의사결정을 잘 내릴 수 있도록 돕는다는 패러다임으로 바뀌고 있다. 발달장애인이 어떻게 제대로 된 결정을 스스로 내릴 수 있겠는가, 하는 회의적 관념은 이제 구식이 되었다.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자기 결정이 아니다. 장애인의 ‘자기 결정권’은 고전적인 두 차원의 자유론과 연결될 수 있다. 우선 자신과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간섭받지 않고 자기 의지대로 행동할 수 있는 소극적 차원의 자유가 있다. 그리고 자신에게 진정 유리한 선택을 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기 위해 정부와 복지기관의 지원과 조력을 받을 적극적 차원의 자유가 있다. 이런 경우 사회복지사의 전문적 개입은 부당한 간섭이 아니라 자유의 증진에 해당된다.

장애인권이 보장되는 사회는 종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얼마나 진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바로미터다. 이런 나라들을 관찰할 기회가 있었다. 주관적으로 느낀 바를 정리하면 이렇다. 첫째, 처음부터 수준 높은 국민은 없다. 사회의 조직 방식, 제도, 정책이 대중의 인식을 끌어올린다. 둘째, 장애인 권익운동과 공동선에 기반한 민주정치가 같이 갈 때에 장애인권이 발전한다. 양자가 분리되면 지속적인 변화가 어렵다. 셋째, 데인저와 리스크를 구분한다. 안전을 위협하는 위험요소(danger)는 최대한 줄여야 하지만, 삶의 일부인 확률적 리스크(risk)는 감당하겠다는 능동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무조건 안전만 강조하면 장애인에게서 도전과 경험을 통해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고, 복지기관은 방어적이 되는 경향이 생긴다. 장애 당사자, 보호자, 서비스 제공자 사이에 리스크에 관해 공감대가 형성되어야만 혹시라도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에 지혜롭게 책임 소재를 가리고 대처할 수 있다. 넷째, 장애인 권리가 보장될수록 의도치 않은 연관 효과가 발생한다. 장애인의 욕구를 이해하고 그것에 반응할 줄 아는 섬세한 시선의 대중이 많아지면 예술, 문화, 미디어의 감수성이 높아지고, 정치 과정에서 커뮤니케이션의 수준도 올라간다. 비즈니스의 질도 향상될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장애복지가 발전해도 젠더는 여전히 중요한 요소로 남는다. 여성 신체장애인, 여성 지적장애인의 인권침해에는 고유의 특성과 맞춤형 지원이 필요하다. 보호자와 부모와 돌봄 제공자 중에서도 어머니와 여성의 역할이 두드러져 보이는 현상을 젠더 관점에서 고민해 봐야 한다.

패럴림픽 개막식에서 조수미와 소향이 열창한 주제가를 들으며 이 글을 쓰고 있다. “꿈을 꾸는 나는 너의 챔피언… 꿈을 이룬 너는 나의 챔피언….” 장애인 권리에 대한 인식과 상상력이 높아진 대한민국의 꿈을 함께 이루자.

한국 인권 어디까지 왔나

세계정의프로젝트(WJP)가 평가한 2017년 한국의 법의 지배 상황이 그 전해에 비해 어떤 변화가 있을까. 이 질문은 ‘새 정부가 인권에 유의미한 변화를 가져왔는가’라는 평가와 직결되어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2016년에 비해 2017년 들어 지표가 약간 호전되기 시작했다.

혁명적 감전현상과 인권의식의 고양은 한반도 전체 차원에서의 변화를 이끌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미투운동이 잘 결실을 보아 뼛속까지 남성우월적이었던 사회의 내밀한 감성을 바꾸어 놓는다면 그것이 한반도의 평화를 상상하는 관점에도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것이다.

다음달이면 새 정부가 출범한 지 한 돌을 맞는다. 세부적으로 보면 촛불의 염원에 못 미치는 점들이 적지 않지만, 큰 틀에서 보면 전 사회에 자유와 인권의 기운이 분명 늘어났다. 그런데 체감 분위기를 넘어 구체적으로 얼마나 좋아졌는가 하는 점은 인권을 깊이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질문일 것이다. 이 의문에 대해 단서를 제공하는 증거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알다시피 세계 각국의 인권 상황을 일정한 기준으로 비교하는 지표들이 여러 가지 있다. 이런 연구들은 통상 1년 단위로 조사가 이루어지는데 2017년 상황을 평가한 조사들이 요즘 속속 나오고 있다. 그중 ‘법의 지배 지표’라는 조사가 있다. 세계정의프로젝트(WJP)라는 국제 연구기관이 거의 십년째 매년 내놓는 중요한 지표다. 여기에서 평가한 2017년 한국의 법의 지배 상황이 그 전해에 비해 어떤 변화가 있을까. 이 질문은 ‘새 정부가 인권에 유의미한 변화를 가져왔는가’라는 평가와 직결되어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2016년에 비해 2017년 들어 지표가 약간 호전되기 시작했다. 일관성 있는 기준으로 장기 추세를 추적해온 단체의 연구이니 신뢰해도 좋을 것이다. 한 가지 유의할 점이 있다. 조사 기간인 2017년의 전반부는 새 정부의 성과와 직접 관련이 없다. 따라서 본격적인 지표 변화는 내년 조사에서부터 반영될 것이다. 어쨌든 긍정적인 방향으로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건 사실이다. 연구 결과를 소개하기 전에 우선 법의 지배 지표가 무엇인지 알아보자.

세계정의프로젝트는 법의 지배 개념을 네 가지 보편적 원칙이 통용되는 체제로 규정한다. 정부와 개인이 법 앞에 책임을 지는 법적 책무성이 있어야 한다. 기본권이 보장되는 명확하고 공정한 법률이 있어야 한다. 법률을 제정·집행하는 과정에서 공평하고 접근성 높고 효율적인 열린 정부가 있어야 한다. 불편부당한 분쟁 처리 체계가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법의 지배 지표가 인권 수준을 알아보는 데 있어 왜 중요한가. 인권의 구체적인 침해상황을 조사하는 연구와는 달리 인권을 안정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시스템 조건의 수준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법의 지배 지표는 구체적으로 8개 대주제와 44개의 소주제를 선정해 전세계 113개국을 조사한다. 나라마다 대표적인 세 도시에 거주하는 주민 1천명의 평가, 그리고 그 나라 전문가들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를 합쳐 최고 1점, 최저 0점으로 각 나라의 점수를 매긴다. 총점의 순위와 주제별 순위를 모두 알 수 있다. 총점으로 1위는 덴마크(0.89), 113위는 베네수엘라(0.29)로 나왔다. 한국은 총점 0.72로 20위였다. 전체 결과만큼이나 주제별 평가를 살펴보는 게 중요하다.

여덟 가지 대주제 중 전세계 기준에 비추어 한국이 상대적으로 양호한 점수를 받은 주제는 규제조치의 집행성, 민사법과 형사법 영역이었다. 상대적으로 점수가 낮게 나온 주제는 정부권력 제한, 부정부패 해소, 정부 개방성, 기본권, 질서와 치안이었다. 이 중 정부 개방성을 빼고 나머지는 모두 2017년 들어 그 전해보다 개선된 결과를 보인다. 특히 정부권력 제한은 27위에서 26위로, 부정부패 해소는 35위에서 30위로, 기본권은 32위에서 29위로 올랐다.

소주제의 평가를 따져보면 법의 지배 중에서 강점과 약점 부분이 드러난다. ①정부권력 제한을 다룬 대주제 내에서 최고점은 권력의 합법적 이양, 최저점은 사법부에 의한 권력통제가 받았다. 한국의 사법부는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우는’ 그런 수준의 기관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 ②부정부패 해소 중 최고점은 사법부, 최저점은 입법부가 받았다. ③정부 개방성 중 최고점은 정보 접근권, 최저점은 시민 참여로 나왔다. 아직도 국정의 시민 참여가 피상적이라는 뜻이다. ④기본권 중 최고점은 생명권과 안전권이 개선된 것으로 나왔고, 최저점은 노동권이었다. 국제적으로 악명 높은 한국의 노동 현실이 또다시 입증된 것이다.

⑤질서 및 치안 주제에서 최고점은 내전이 없다는 사실, 최저점은 폭력범죄 피해자의 구제로 나왔다. ⑥규제조치의 집행성 중 최고점은 신속한 처리로, 최저점은 효과적 이행성으로 나왔다. ⑦민사법 영역의 최고점은 법정이 아닌 제3자에 의한 대안적 분쟁 해결로, 최저점은 비용감당 어려움으로 나왔다. ⑧형사법 영역의 최고점은 적법절차와 신속한 판결, 최저점은 효과적 수사로 나왔다. 경찰과 검찰이 밥그릇 싸움을 벌이고 있지만 그들의 존립 목적이나 다름없는 수사 항목에서 꼴찌가 나온 점을 어떻게 해명할지 궁금하다.

이번 결과와 한국의 예외적 성격을 비교해 볼 수 있다. 우리보다 순위가 높은 나라 중 홍콩을 제외하고 식민지배의 경험이 있는 곳은 한국뿐이다. 전쟁의 위협이 있는 유일한 나라, 유엔 가입이 가장 늦은 나라라는 특징도 있다. 흥미롭게도 삶의 질과 사회권으로 봐도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중 가장 낮은 수준이니, 우리의 위치가 세계 속에서 어디쯤인지 객관적으로 드러난다. 법의 지배든 삶의 질이든, 한국은 상중하로 따져 세계적으로 ‘상’에 속하지만, 상급 국가들 내에서 수우미양가로 따지면 양 또는 가에 불과하다. 더 올라가야 하는 건 분명한데 어떻게 하면 올라갈 수 있을까. 여기서 인권운동이 유념해야 할 점이 있다. 단순히 개별적 인권침해 사안의 해결 또는 제도 개선만으로는 부족하다. 근본적 차원에서 사회 전체의 가치관이 변해야 한다.

한국의 사례는 독재와 강압을 극복하고 이룰 수 있는 성과의 최대치와 한계를, 그리고 우리의 인권 수준 역시 이 점과 내재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특수한 조건 아래서 국민을 몰아붙이면 단기간에 덩치와 형식적 제도는 상당히 키울 수 있다. 하지만 사회의 내적 수준은 그런 식으로 높이지 못한다. 압축성장은 가능해도 압축성숙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가치관의 왜곡으로 인해 성장론이 성숙론을 비웃으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조차 모른다는 점이다. 이것을 혁파하지 않으면 법도 재벌한텐 물러지고, 더 이상의 인권 개선도 돈과 개발논리의 벽을 넘지 못할 것이다. 우리 사회 전체의 암묵적 분위기 자체가 그렇게 되어 있다.

그래도 촛불혁명을 통해 근본적 변화 가능성이 보인 것은 다행이다. 탄핵과 정권 교체만 해도 작은 일이 아닌데 노동과 복지와 휴식에 대한 인식이 크게 바뀌고 있지 않은가. 미투운동 역시 촛불에 의해 정치적 기회의 공간이 열린 후 사회적 의미에서의 기회의 창이 열린 경우다. 촛불혁명을 겪으면서 자기표현의 힘을 자각한 여성들 사이에 형성된 어떤 감응성의 총체가 젠더 불평등이라는 오래된 모순에 균열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유의 혁명적 감전현상과 인권의식의 고양은 우리 사회의 정신적 체질을 바꾸고, 한반도 전체 차원에서의 변화를 이끌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2015년 아일랜드에서 동성 간 결혼 합법화 조처에 크게 고무된 측이 누구였는지 아는가. 북아일랜드 평화프로세스 찬성파였다. 아일랜드 국민의 성의식 변화라는 변수가 평화를 결정하는 정치협상에서도 개방되고 실용적인 태도로 표현될 것이라는 전망 때문이었다.

미투운동이 잘 결실을 보아 뼛속까지 남성우월적이었던 사회의 내밀한 감성을 바꾸어 놓는다면 그것이 한반도의 평화를 상상하는 관점에도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걱정이 있다. 요즘 들어 보수가 더욱 인권을 반대하는 세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모습이 그것이다. 미투운동이 진보를 포함한 모든 남성들에 끼친 충격파, 그리고 최근 보수의 지적 쇠락을 보면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한다. 진보는 어제의 진보를 보수처럼 보이게 하고, 보수는 어제의 보수를 양반처럼 보이게 한다. 성평등 요구가 어느 정도 정리되면 청소년들이 다음 차례를 이을 것으로 예상된다. 한편으로 민주의식의 성숙,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인권의제 집단의 등장, 이 두 축이 잘 맞물려 돌아가면 우리라고 인권 선진국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유엔에서 한반도를 염원하다

만일 북한 당국 스스로도 통상적 경제개발을 상정하고 있다면 그들에게 새로운 발전모델을 설파할 필요가 있다. 김정은 위원장이 성장기를 보낸 스위스가 현재 지속가능발전 목표를 가장 빨리 달성하고 있는 나라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면서 그를 설득하면 어떨까. 한반도에서 동방의 스위스를 건설해 보라고 말이다.

평화-발전-인권을 하나의 패키지로 묶어서 사고하고, 한반도 평화와 번영, 통일의 길을 닦으려면 인권이라는 토대가 깔려야 한다는 기본 관점을 가져야 한다. 인권 문제에 방어적으로 대처하거나, 남북관계가 개선되기만 하면 이 문제가 저절로 해결될 수 있다고 기대한다면 국제 동향을 오독하는 것이 된다.

얼마 전 유엔 본부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뉴욕에 다녀왔다. 유엔 공보국과 유네스코가 공동 주최한 연례 세계시민교육 국제 세미나 자리였다. 세계인권선언 제정 70돌을 기념하여 올해의 주제를 세계인권선언과 세계시민교육으로 정했다고 한다. 나는 기조연설을 하고 패널토론에도 참여했다. 세계시민교육에 대해 견식을 넓힐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세계시민교육은 유네스코가 발전시키고 있는 현재진행형 개념으로서, 정확히 말하면 전지구적 시티즌십 교육(GCED)이다. 우리가 자신이 속한 나라와 지역을 초월하여 더 큰 인류 공동체에 속한 구성원이라는 자각을 갖는 것이 전지구적 시티즌십의 핵심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의 전통적인 귀속성을 무시할 순 없다. 따라서 전지구적 시티즌십은 단순한 세계주의가 아니라 지역사회, 국가, 그리고 전세계가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서로 의존하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이런 원칙은 인권의 기본정신과도 부합된다. 인권은 자신이 속한 지역사회 풀뿌리 차원에서부터 국가 차원, 더 나아가 전세계 차원에서 모두 통용되고 실천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인권을 한국 사회 내의 문제에 국한해서 생각하기 쉽다. 흔히 국민의 기본권으로 인권을 이해하는 방식이 그것이다. 그러나 인권을 원래 의미대로 사용한다면 국내의 인권 문제에 대해 우리가 불의감을 느끼는 것만큼이나 로힝야족, 시리아 난민, 콩고 내전 희생자에 대해 똑같이 불의감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실천하기 어렵더라도 적어도 인권을 이야기할 때엔 의식적으로 이런 태도를 지녀야 한다. 그런 면에서 세계시민교육의 취지는 인권과 결이 같다.

현재 유엔에서 중점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지속가능발전목표(SDG)의 세부목표 4.7에 세계시민교육이 포함되어 있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2030년까지 모든 학습자들이 지속가능발전 및 지속가능한 생활방식, 인권, 젠더 평등, 평화와 비폭력 문화 증진, 세계시민의식, 문화 다양성 및 지속가능발전을 위한 문화의 기여에 대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되어 있다. 기조강연에서 나는 인권교육이 세계시민교육-지속가능발전목표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때 내용상 풍부한 어떤 새로운 담론이 형성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공교롭게도 유엔 회의와 남북한 정상이 판문점에서 만난 시점이 겹쳤다. 행사 후 여러 사람들이 다가와 축하와 덕담을 해주었다. 저녁식사 때 누군가가 스마트폰으로 두 정상이 조우하는 영상을 보여주었다. 뜨거운 느낌이 가슴에서 올라왔지만 겉으로 평정을 가장하느라 애를 써야 했다.

감격 때문인지 시차 탓인지 잠이 오지 않았다. 호텔 방에서 밤을 꼬박 새워 현지 신문들을 읽고 텔레비전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며 동아시아에서 전해져 오는 역사적 사건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아래 내용은 이번 회의를 통해 배운 점들과 미국 조야의 분위기를 접하고 느낀 바를 한반도에 적용시켜 두서없이 메모해 본 것이다.

첫째, 북한의 개혁·개방의 방향에 관하여. 통상적인 경제개발의 논리, 구시대적 성장논리가 전체 논의를 주도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북한의 엄청난 자연자원, 저임의 질 좋은 노동력… 이런 식의 보도가 홍수를 이루지만 정작 지속가능발전 이야기는 찾기 어렵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개발이 크게 지체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처음부터 21세기형 지속가능발전 모델로 곧바로 진입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탈화석연료형 신재생에너지 경제, 4차 산업혁명, 경제-사회-환경의 통합적 플랜이 가능한 곳이 바로 북한이 아닐까 한다.

지난주 이 지면(5월3일치 ‘야! 한국사회’ 칼럼 ‘북한을 향한 동상이몽’)에서 김성경 교수가 통렬히 지적한 것처럼 사람·환경·공동체를 진지하게 고려한 적이 없는 천박한 자본가들이 더 이상 착취할 것조차 없어진 한국 땅을 벗어나 그다음 먹잇감으로 북한을 상상하고 있지나 않은지 냉정하게 따져봐야 한다. 만일 북한 당국 스스로도 통상적 경제개발을 상정하고 있다면 그들에게 새로운 발전모델을 설파할 필요가 있다. 김정은 위원장이 성장기를 보낸 스위스가 현재 지속가능발전 목표를 가장 빨리 달성하고 있는 나라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면서 그를 설득하면 어떨까. 한반도에서 동방의 스위스를 건설해 보라고 말이다.

둘째, 북한 인권에 관하여. 자칫 인권 이슈가 ‘한반도 평화와 번영, 통일’을 가로막는 돌부리가 될지도 모른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일리 있는 견해다. 냉전 현상유지 세력들이 인권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려는 시도를 차단해야 한다. 또한 이제 겨우 대화가 시작된 단계에서 공식적으로 인권을 거론하기 어려울 거라는 점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런데 길게 보아 국제사회에서 인권 이슈가 어떻게 다뤄질지 고려해야 한다. 인권이 평화의 돌부리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북한 인권에 대한 장기적 대비를 세울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북한 주민들을 위해서도 그러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평화-발전-인권을 하나의 패키지로 묶어서 사고하고, 한반도 평화와 번영, 통일의 길을 닦으려면 인권이라는 토대가 깔려야 한다는 기본 관점을 가져야 한다. 인권 문제에 방어적으로 대처하거나, 남북관계가 개선되기만 하면 이 문제가 저절로 해결될 수 있다고 기대한다면 국제 동향을 오독하는 것이 된다. 풍계리 실험장 폐기가 비핵화의 가시적 상징인 것처럼, 정치범 수용소 폐쇄가 체제 보장의 실질적 이정표가 될 수 있다고 북한을 독려해야 한다.

북한의 발전을 위해 언젠가는 개입할 수밖에 없는 세계은행이 다당제 민주주의 거버넌스를 강조하고 있는 사실, 아시아개발은행도 인권 압력을 받고 있는 현실, 세계무역기구조차 노동권과 노동조건을 중시하는 추세, 경제 분야에서도 인권을 핵심 가치로 간주하는 유럽연합 등을 방정식에 넣어 생각해야 한다.

셋째, 북한에 대해 미온적인 미국 내 여론에 관하여. 트럼프의 적극적 행보와는 달리 미국의 여론 주도층, 심지어 진보 진영조차 북한의 변화를 회의적으로 평가하는 분위기가 많음은 잘 알려져 있다. 그 이유야 어떻든 변치 않을 사실이 있다. 트럼프 이후에도 한반도 평화가 유지되어야 하고, 미국은 여론의 나라라는 점이다. 트럼프만 바라볼 게 아니라 미국 전체를 상대로 홍보전을 펼쳐야 할 이유는 차고 넘친다.

우리 정부가 직접 하기 어렵다면 입법부라도 나서야 한다. 초당적 의원외교는 이럴 때 하라고 있는 것이다. 당장 국회의장과 정당 대표들이 미국으로 달려가 공화당, 특히 민주당 의원들을 만나고, 뉴욕 외교협회나 조지타운대학에서 연설을 해야 한다. 그들은 주로 세 가지 질문을 던질 것이다. ① 비핵화에 대한 북한의 태도변화가 이번에는 믿을 수 있다고 보는 근거가 무엇인가. ② 북한의 변화를 위해 남한이 어느 정도나 경제적·정치적 비용을 부담할 용의가 있는가. ③ 경제적으로 일부 개방할지 몰라도 여전히 독재체제를 유지하려는 나라를 미국이 왜 정상국가로 상대해 주어야 하는가.

이런 질문에 대해 미국의 국익과 민주주의 논리를 함께 아우르는 답변을 준비해 가야 한다. 그리하여 한반도에 ‘영구적이고 검증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평화와 번영’(PVIPP)이 미국을 포함한 모두에게 축복이 된다고 당당하게 말해줄 필요가 있다.

넷째, 유럽과의 관계에 관하여. 대북 제재를 푸는 문제는 결국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달려 있으므로 영국, 프랑스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영국은 평양에 대사관까지 두고 있지 않은가. 이들에 더해 독일과 브뤼셀까지 합친 콰르텟(사중주단)에 한국의 입장을 설명하고 외교적인 우군으로 확실히 붙들어야 한다. 특히 유럽은 핵시설의 감시·검증, 군축에 관해 세계 최고의 평가기술을 보유하고 있어서 향후 이들의 역할이 더욱 커질 가능성이 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파격적으로 편집된 <한겨레>를 읽었다. 철든 후 무언가를 이렇게까지 간절히 염원해 본 적이 있었던가 싶다.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서라면 무엇을 못 하겠는가. 다 같은 마음일 것이다.

비엔나 인권체제 25년

비엔나선언은 사회권이든 자유권이든 모든 인권은 서로 나눌 수 없는 한 덩어리이고(불가분), 모든 권리들이 서로 기대어 있으며(상호의존), 모든 권리들이 서로 연결된다(상호연관)는 원칙을 재확인했다. 또한 민주주의, 발전, 인권을 함께 추구해야 한다는 ‘자유로서의 발전’ 원칙도 이때 나왔다.

비엔나선언이 부족한 점도 많다. 지난 25년간 인류에 심각한 영향을 끼친 거시적 요인들을 다루지 않은 건 결정적인 오류다. 예를 들어, 생태, 세계화(지구화), 신자유주의, 불평등과 같은 단어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는 더 근본적으로는 전통적 인권담론의 문제이기도 하다.

오늘날 한국 인권운동은 비엔나 93 인권체제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비엔나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지난 주말에 열린 한국인권학회의 학술대회에서 1993년 비엔나(빈) 세계인권대회 25주년을 기념하는 세션이 마련되었다. 당시 비엔나 대회에 참가했던 한 인권운동가의 회상이다.

“비엔나 이전의 인권운동은 한마디로 ‘대정부 투쟁’이었어요. 비엔나 대회에서 전세계 다양한 인권운동을 접하고 충격을 받았지요. 마치 우물 안에 있다 갑자기 큰 바다를 바라보게 됐다고나 할까….” 1970년대 초 인권 명칭을 쓰는 단체들이 생겨난 뒤 1990년 초까지가 인권운동의 1세대였다면, 비엔나 대회 이후 지금까지는 본격적으로 분화·발전한 2세대 인권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시대다.

이렇게 중요한 전기가 된 비엔나 세계인권대회가 무엇이었나. 유엔이 소집하여 1993년 6월 하순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열렸던 대규모 공식 국제인권대회를 말한다. 171개국 정부 대표와 수백개 엔지오, 수천명의 활동가와 전문가들이 참여했던 포럼이었다. 대회는 ‘비엔나선언 및 행동프로그램’이라는 최종 문헌을 채택했다. 유엔인권최고대표실과 국가인권기구 등 인권 실행을 위한 제도화, 그리고 여성 인권, 원주민 인권, 인종 차별과 외국인 혐오, 민족·종교적 배타주의 등이 주요 의제로 다뤄졌다. 이들은 대부분 그 후 인권운동에서 구체화되었다.

세계인권대회가 열린 가장 큰 계기는 냉전의 종식과 관련 있었다. 냉전 중 인권은 동서 진영의 이데올로기 대결 와중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신세였다. 미국은 자유권만 진정한 인권이라고 주장했고, 자본주의권의 인권을 비판하는 단체에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의 대변자라는 색깔을 씌웠다. 소련은 소련대로 사회권만 강조하면서, 공산주의권의 인권을 비판하는 단체를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앞잡이라고 몰아세웠다.

이러한 이념적 양극화가 막을 내리면서 인권이 그 본래적 총체성을 회복할 수 있는 국제정치 환경이 마련된 것이 대회 소집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비엔나선언은 사회권이든 자유권이든 모든 인권은 서로 나눌 수 없는 한 덩어리이고(불가분), 모든 권리들이 서로 기대어 있으며(상호의존), 모든 권리들이 서로 연결된다(상호연관)는 원칙을 재확인했다. 또한 민주주의, 발전, 인권을 함께 추구해야 한다는 ‘자유로서의 발전’ 원칙도 이때 나왔다.

문민정부 시대를 맞았던 한국 인권운동은 비엔나 대회에 조직적으로 참여했다. ‘유엔세계인권대회를 위한 민간단체공동대책위원회’가 만들어져 홍성우 변호사가 상임대표, 천정배 변호사가 집행위원장을 맡았고, 조용환 변호사의 사무실이 공대위 사무실 역할을 했다. 참가단체로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민주주의법학연구회,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불교인권위원회, 국제노동기구(ILO) 전국노동자공대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천주교 인권위원회가 있었다. 참관단체로는 민족사진연구소,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있었다. 단체 리스트에서 한국 인권운동의 어제와 오늘 사이의 차이와 변화상이 느껴질 것이다.

비엔나 대회는 인권의 보편성 논쟁에 불을 붙이기도 했다. 대회 전 아프리카의 튀니스(튀니지), 라틴아메리카의 산호세(코스타리카), 아시아의 방콕(타이)에서 지역별 준비모임이 소집되었다. 그런데 방콕 모임에서 각국 대표들이 ‘방콕선언’을 발표해 버렸다. 선언은 세계인권선언 이래의 정통 인권관을 재확인하면서도 국가주권과 내정간섭 반대를 강조했고, 인권이 보편적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각국 및 지역적 특성과 역사·문화·종교의 배경이 중요하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고 했다. 소위 ‘아시아적 가치논쟁’의 신호탄을 쏜 것이다.

방콕선언은 그 내용만큼이나 선언을 추진한 주체들의 정치적 동기가 입방아에 올랐다.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중국 등 권위주의적 발전 모델을 추구하던 나라들이 자신의 정치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아시아적 가치를 내세운 게 아니냐는 비판이 나왔다. 방콕선언의 주장을 비엔나 대회가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가 큰 관심사로 등장했다. 결국 비엔나선언은 방콕선언을 껴안으면서도 그것을 물구나무세우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즉, 비엔나선언은 각국 및 지역적 특성과 역사·문화·종교의 배경이 중요하긴 하나, 각국의 정치, 경제, 문화 시스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인권과 기본적 자유를 증진하고 보호할 의무가 있다고 선포한 것이다.

비엔나선언은 인권 상대주의에 맞선 인권 보편성의 주류 담론에 판정승을 내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인권의 보편성 논쟁은 그 후 약간 다른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 비엔나 이전에 보수파가 아시아적 가치론으로 인권 보편성에 도전장을 내밀었다면, 비엔나 이후에 일부 진보파가 탈식민이론으로 인권 보편성에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최근 언론에 보도된 거울 이미지와 같은 사례를 살펴보자. 아랍계 후손으로서 프랑스 소르본대학의 총학생회장인 마리암 푸제투라는 여학생이 히잡을 착용했다는 이유로, 도대체 68 학생혁명의 진원지에서 어떻게 세속주의적 보편성 원칙을 반대하는 처신을 할 수 있느냐는 비판을 받은 사건이 벌어졌다. 그런데 이란 이슬람혁명 가문 출신의 마시 알리네자드라는 여성이 히잡 착용을 강요하는 억압적인 조국을 떠나 영국에서 자신의 두발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는 뉴스도 비슷한 시기에 나왔다.

어느 쪽 주장이 인권의 보편성 원칙에 부합하는가. 요즘엔 자신의 개별적 선택을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는, 다시 말해 특수한 예외성을 행사할 수 있는 자기결정권이 인권의 보편성에 더 가깝다는 해석이 많이 나오는 추세다. 단일 기준을 예외 없이 적용하는 것만이 인권 보편성은 아니라는 식으로 보편성을 유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보면 된다.

비엔나선언이 세계 인권 발전에 큰 획을 그었지만 부족한 점도 많다. 선언치고 대단히 긴 문헌인데도 지난 25년간 인류에 심각한 영향을 끼친 거시적 요인들을 다루지 않은 건 결정적인 오류다. 예를 들어, 생태, 세계화(지구화), 신자유주의, 불평등과 같은 단어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는 비엔나선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전통적 인권담론의 문제이기도 하다. 인권을 나무와 가지로만 파악하고, 전체 숲으로 보는 눈이 부족한 것이다. 내가 누누이 지적해 왔듯 인권이 전문적 권리체계로만 치달으면 거시적 사회변동과 분리된 미시적 개입 테크닉으로 왜소화할 위험이 커진다.

올해 비엔나+25라는 이름으로 열린 국제포럼의 주제는 불평등과 안보였다. 그러나 사반세기 동안 무얼 하다 이제야 뒷북을 치는가 하는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작금에 인권을 둘러싼 국제환경이 극히 열악해졌는데 법제화를 최고선으로 간주해온 인권담론의 책임도 없지 않다. 최근 비엔나 대회를 기념하면서 후세인 유엔인권최고대표는 인권이 전세계적으로 우선순위(priority)가 아니라 추방천민(pariah)의 신세가 됐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비엔나 인권체제가 인권운동에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 우선, 냉전 잔재가 한반도에서 해체된다면 우리 인권 상황은 마치 전세계가 냉전 후 비엔나선언에서 다짐한 것과 같이 자유권과 사회권의 통합을 추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지금보다 훨씬 용이하게 분배와 복지와 사회권을 논할 수도 있다. 또한 비엔나 후 부각된 인권 이슈들―여성, 외국인 혐오, 증오, 선동 등―이 우리 사회에서도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지난 주말의 학술대회에서 충남인권조례 폐지에 대한 논의도 나왔다. 은우근 교수는 지금까지 극우 반공주의 즉 이데올로기가 반인권의 주요 원천이었다면 앞으로는 종교와 결합된 극우 차별주의가 그것을 대체할 것이라는 지적을 했다. 비엔나적 문제의식을 더욱 선명하게 가질 필요가 여기에 있다.

이와 함께, 위에서 말한 비엔나선언의 한계에 대해서도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비엔나 체제를 감당하면서 그것을 넘어서는 이중과제가 한국 인권운동의 목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인권에서 양심이란 무엇인가

현대 인권에서 말하는 양심(conscience)의 어원은 ‘자신이 알고 있는 바’(scientia)를 ‘함께 나누다’(con)라는 라틴어에서 왔다. 함께 나눈다는 말도 누구와 나눈다는 것인지 명확하진 않지만 ‘자기 자신과 나눈다’는 뜻으로 보통 해석한다. 요컨대 양심의 원뜻은 ‘스스로와 나누는 도덕적 성찰’인 것이다.

대체복무의 내용을 군복무보다 어렵게 만들어 아예 잠재적 가짜들에게 유혹의 여지를 주지 않겠다는 발상 자체가 우리 사회가 불신사회임을 자인하는 태도다. 그런 식으로 접근하면 ‘양심이 무엇인가’라는 본질적 질문은 사라지고, ‘진짜와 가짜를 어떻게 가려낼 것인가’라는 방법론적 문제로 모든 논쟁이 귀결된다.

지난주 양심적 병역거부에 관한 헌법재판소의 결정 이후 벌써부터 국방력의 약화나 대체복무제도에 대한 우려의 소리가 나오고 있다. 앞으로 시행 방식을 둘러싼 논란이 이번 판정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자칫 엉뚱한 방향으로 논의를 왜곡하지 않을지 염려된다.

보통사람들에게 양심적인 사람이 누구인지 물어보면 ‘착하다, 올바르다, 정직하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우리가 ‘착하다’ 또는 ‘올바르다’고 할 때 대다수 사람들이 수긍할 수 있는 어떤 객관적 도덕칙을 가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인권에서 말하는 양심은 꼭 그런 것만이 아니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은 양심(良心)을 “사물의 가치를 변별하고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의 판단을 내리는 도덕적 의식”이라고 정의한다. 이 풀이에 따르면 양심은 그저 착하다기보다, 어떤 것의 도덕적 성격을 구분할 줄 아는 이성을 뜻한다. 흔히 통하는 관용어법과 다르다.

오래전 헌법재판소에서도 양심을 “어떠한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데 있어 그렇게 행동하지 아니하고서는 자신의 인격적 존재가치가 허물어지고 말 것이라는 강력하고 진지한 마음의 소리”라고 해석했다. 인권에서 말하는 양심의 개념에 보다 더 가깝지만 이것 역시 일반적인 어법과는 약간 다르다.

우리가 보통 사용하고 이해하는 ‘양심’, 그리고 철학이나 인권에서 의미하는 ‘양심’ 사이에는 미묘하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 이 때문에 군 복무를 마친 사람들이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말에 격하게 반발하는 경우가 발생하곤 한다. “아니, 군대 빠지려고 하는 자가 양심적이라면 우리같이 군대 다녀온 사람은 비양심적이란 말이냐, 그게 말이 되는가…”라는 식이다. 정확한 의미를 오해한 데서 비롯된 갈등이다.

현대 인권에서 말하는 양심(conscience)의 어원은 ‘자신이 알고 있는 바’(scientia)를 ‘함께 나누다’(con)라는 라틴어에서 왔다. 자신이 알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 명확하진 않지만 전통적으로 이것을 ‘도덕적 의식’이라고 해석한다. 그런 의식이 어디에서 왔는가. 신일 수도 있고, 특정 문화권에서 형성된 초자아일 수도 있고, 자기성찰일 수도 있다. 함께 나눈다는 말도 누구와 나눈다는 것인지 명확하진 않지만 ‘자기 자신과 나눈다’는 뜻으로 보통 해석한다. 요컨대 양심의 원뜻은 ‘스스로와 나누는 도덕적 성찰’인 것이다.

더 나아가, 인권에서는 다음의 두 조건이 더해져야 양심으로 인정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우선, 단순한 의견이나 피상적인 선택과 취향은 양심이 아니다. 타당성, 진중함, 정합성, 중요성이 입증되어야 한다. 마음속 깊은 차원에서 다져지고 정제된 믿음의 결정체가 양심이다. 양심이란 말은 함부로 꺼낼 수 없는 심각한 개념이고, 일단 꺼냈다 하면 대단히 무게 있게 다뤄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깊은 생각에서 나온 신념이라면 다 양심인가. 히틀러가 ‘진심으로’ 인종차별주의를 확신해서 홀로코스트(대학살)를 저질렀다면 그것도 양심인가.

그렇진 않다. 이 때문에 둘째 조건이 필요하다. 아무리 깊은 믿음에서 나왔다 해도 모든 신념이 양심은 아니다. 인간 존엄성을 존중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어야 한다. 이 두 조건을 충족하는 범위 내에 존재하는 다양한 형태의 믿음을 그 사람의 양심이라고 인정해 주자는 것이 인권의 원칙이다.

헌재 결정이 나온 뒤 병역거부자에 대해 ‘양심’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이 못마땅했는지 일부 언론은 ‘종교적 병역거부자’라는 표현을 썼다.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라고 구분해서 불러야 옳다는 의견도 나왔다. 이런 생각들은 인권에 관한 오해 또는 무지에 가깝다.

국제 인권 기준에서는 거의 언제나 생각-양심-종교의 자유(the right to freedom of thought, conscience and religion)를 한 묶음으로 취급한다. 세 가지를 하나의 권리 범주로 분류하는 것이다. 세계인권선언, 국제자유권규약, 미주인권협약, 아프리카인권헌장, 유럽인권협정, 유럽연합기본권헌장 등이 모두 그러하다.

양심의 자유는 종교의 자유와 같은 종류이지만 좀 더 포괄적이다. 종교의 자유가 특정 종교를 믿고 예배할 자유를 가리킨다면, 양심의 자유는 종교의 자유에 더해, 국교 또는 다수 종교를 따르지 않을 자유, 종교를 믿지 않을 자유, 불가지론을 유지할 자유, 세속적 차원의 마음의 자유를 모두 포함한다.

이런 양심의 자유를 탄압하면서 투옥, 태형, 암살 등이 다반사로 벌어지는 곳이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이라크, 말레이시아, 인도, 수단, 이란 등이다. 이들 나라에서는 다수 종교를 따를 ‘자유’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양심의 자유는 자기 마음을 남에게 드러내고 남들과 그 생각을 나눌 수 있는 권리와 연결될 수밖에 없다. 자기 생각을 마음속에 담아 두기만 하는 것을 자유라 할 순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각-양심-종교의 자유는 필연적으로 표현의 자유 및 집회·결사의 자유와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이런 권리들이 자유권의 핵심을 이루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만일 자유민주주의를 그토록 신봉한다 하면서 양심적 병역거부나 집회의 자유를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세상에 모순도 그런 모순이 없다.

대체복무 조건을 까다롭게 해서 가짜 양심범들을 가려내겠다고 벼르는 듯한 경향도 우려스럽다. 물론 제도를 악용하는 이들까지 모두 용인할 순 없다. 하지만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곧이곧대로 이해하면 이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양심을 지키려 하는 사람이다. 옛날 같았으면 배교하느니 순교를 택할 사람들이다. 양심은 그만큼 무거운 것이니만큼 사람들이 양심을 함부로 팔 것이라고 지레짐작해선 안 된다.

원론적으로 말해 양심적 병역거부자에게 군대 내 생활조건은 아무런 고려사항이 되지 못한다. 설령 군 생활이 아무리 편하다 해도 입대를 거부해야 진정한 양심적 거부다. 기합이나 폭언이 전혀 없고, 사병 월급이 대기업 사원보다 더 많고, 병영 시설이 5성급 호텔보다 더 좋고, 군 복무 기간이 6개월밖에 안 된다 해도 자기 양심 때문에 군대에 못 가겠다고 하는 이가 양심적 병역거부자다.

대체복무의 내용을 군복무보다 어렵게 만들어 아예 잠재적 가짜들에게 유혹의 여지를 주지 않겠다는 발상 자체가 우리 사회가 불신사회임을 자인하는 태도다. 그런 식으로 접근하면 ‘양심이 무엇인가’라는 본질적 질문은 사라지고, ‘진짜와 가짜를 어떻게 가려낼 것인가’라는 방법론적 문제로 모든 논쟁이 귀결된다.

모태신앙임을 입증할 수 있는 자료를 제출하라, 신앙 경력 몇 년부터 교인으로 인정할 것인가 등등, 기발하고 우스꽝스러운 판별 기준이 등장할지도 모른다. 진짜 양심임을 변별할 수 있는 길고 긴 특수 검사 항목이 고안되는가 하면, 거짓말탐지기가 등장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 그런 테스트를 뚫을 수 있는 ‘족보’가 암암리에 돌아다닐 수도 있다. 양심을 정확하게 가려낼 수 있는 방안을 놓고 전문적이고 테크닉적인 토론이 이루어지고 대중 역시 그런 식의 피상적인 논쟁에 뛰어들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참된 ‘배움’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사라지고, 주관식이 아닌 객관식 문제로 ‘공정하게’ 채점하여 학생들 간의 차이를 가려내는 것이 교육의 주된 목적으로 귀결되는 현실과 비슷한 상황이 재연될 가능성이 있다.

헌재 결정은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우리 사회 신뢰성의 토대에 깊은 과제를 던졌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신뢰가 없는 사회라면 대체복무제가 자칫 불신의 대상이 되거나, 아니면 유엔에서 반대하는 유사형벌적 제도로 전락할 수도 있다.

제도 변화보다 규범의 변화가 더 어렵다. 양심적 병역거부의 제도화를 우리 사회 전체 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어떤 사람이 양심을 근거로 어떤 호소를 해도 “그 말을 도대체 어떻게 믿어”라는 반응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는 사회라면 그 어떤 제도를 갖춰도 양심이 진정으로 존중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인권과 평화의 두 날개

새먼 레빈슨이라는 미국 법률가가 있었다. 1차대전의 참화를 목격한 그는 전쟁을 합법화한 것이 인류 최악의 실수였다고 확신했다. 살인을 금하는 법은 있는데 전쟁을 금하는 법은 왜 없단 말인가. 그는 전쟁을 없애려면 군축이나 국제연맹을 통한 중재보다 전쟁 자체를 불법화하는 길이 가장 근본적인 방안이라고 믿었다.

지난 몇년 사이 전쟁 불법성의 원칙이 후퇴하는 징조가 농후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한반도의 중요성을 찾아야 한다. 한반도의 평화 구축은 전쟁을 불법시한 부전조약과 유엔체제의 질서가 후퇴하고 있는 현시점에서 이 질서의 향방을 가늠할 중요한 바로미터다.

지난주 정전협정 65돌을 맞아 <한겨레>가 뽑은 헤드라인은 “65년 유예된 평화… 눈앞에 온 종전선언”이었다. 65년이나 미뤄진 평화라니, 자괴감이 엄습하면서 어떻게든 이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간절함이 더해진다.

인권과 평화는 동일한 내용을 다른 관점에서 표현하는 동전의 양면이다. 인권이 평화의 토대가 되고, 평화가 인권을 보장한다. 세계인권선언은 첫 줄부터 인류 가족 모두의 평등한 권리를 인정할 때 평화적 세계의 토대가 마련된다고 호소한다.

존 험프리가 작성했던 선언의 초안은 더 직설적이다. “전쟁이 폐지되지 않는 한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지킬 수 없다.” 그러니 전쟁이 65년이나 연장된 상태에서 진정한 의미의 자유와 존엄을 지키기 어려웠다고 할 수 있다.

2차대전 이후의 국제질서가 완벽하지는 않지만 전 시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평화가 유지되어온 건 사실이다. 방어전쟁이나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승인한 전쟁을 제외한 모든 전쟁은 원칙적으로 불법이 되었다. 그러나 최근 이런 질서가 흔들리고 있는 징조가 뚜렷하다. 1999년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코소보 공습,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중국의 남중국해 도서 점령, 미국과 이스라엘의 시리아 공격 등이 대표 사례다.

우리가 이런 사건들을 개탄할 때 그 밑바닥에 ‘전쟁이란 부도덕하고 불법적인 행위’라는 가치판단이 깔려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이와 정반대였던 시대가 있었다. 전쟁이 정당하고 바람직하고 합법적이었던 때가 있었던 것이다.

국제법의 창시자로 꼽히는 휘호 흐로티위스의 합법 전쟁론을 보자. 1603년 싱가포르에서 포르투갈의 대형 범선 산타 카타리나호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수병들에게 나포되어 화물을 압수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피해를 당한 포르투갈이 발끈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고, 네덜란드 국내에서도 부도덕한 해적 행위라는 부정적 여론이 일었다.

그러나 엄청난 부를 잃고 싶지 않았던 회사의 주주들은 흐로티위스에게 법적으로 유리한 논거를 만들어달라고 자문한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전쟁과 평화의 법에 관하여”는 원래 사건보다 훨씬 큰 주제를 다룬 문제작이 되었다.

흐로티위스는 국가가 어떤 이유든 근거를 제시하면서 전쟁을 벌이면 그런 전쟁은 정당하다고 본다. 국가와 국가 사이를 규율할 수 있는 더 높은 차원의 권위(세계정부)가 없으므로 국가들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을 때 전쟁은 그것을 해소할 수 있는 효과적이고 정당한 수단이라는 이유에서다.

흐로티위스는 어느 나라가 타국에 의해 피해를 당한 후 합당한 배상을 받지 못했다고 느끼기만 해도 무력에 의한 침략과 점령으로 재산을 빼앗고 주민들을 다스릴 권리가 생긴다고 주장한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전쟁은 부도덕하거나 범죄적인 행위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국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합법적이고 정상적인 국가정책이다.

교전국이 아닌 제3국은 그 어느 편을 들어서도 안 된다. 철저하게 중립을 지키지 않으면 그 즉시 적국으로 간주되어 공격 대상이 된다. 전쟁을 개시한 나라에 대해 제3국이 무역·경제제재를 가해도 불법으로 간주되어 원수지간이 된다. 전쟁이 아닌 방식으로 분쟁을 해결하려는 노력 자체가 불법으로 찍힐 가능성이 많았다.

이런 식의 국제질서가 극적으로 분출된 사건이 1차대전이었다. 비극이긴 해도 완벽하게 합법적인 전쟁이었다. 흐로티위스의 법논리는 서구의 제국주의적 팽창정책에도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우나 해서웨이와 스콧 셔피로는 <국제주의자들>에서 이러한 흐로티위스식 ‘구세계질서’가 ‘신세계질서’로 바뀐 과정을 추적한다. 새먼 레빈슨이라는 미국 법률가가 있었다. 1차대전의 참화를 목격한 그는 전쟁을 합법화한 것이 인류 최악의 실수였다고 확신했다. 살인을 금하는 법은 있는데 전쟁을 금하는 법은 왜 없단 말인가.

그는 전쟁을 없애려면 군축이나 국제연맹을 통한 중재보다 전쟁 자체를 불법화하는 길이 가장 근본적인 방안이라고 믿었다. 전쟁의 합법성을 전제로 한 채 이러저러한 제한을 추가하던 기존의 평화 구상들과는 달리 전쟁의 불법성을 전면에 내세운 레빈슨의 사상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레빈슨이 주도한 ‘전쟁 불법화운동’은 우여곡절 끝에 1928년 8월27일 파리평화조약으로 결실을 맺었다. 흔히 켈로그-브리앙조약 또는 부전조약이라 불리는 이 약정으로 인해 사상 최초로 전쟁이 ‘불법’이 되었다. 이달 말이면 체결 90주년을 맞는 부전조약으로부터 ‘신세계질서’가 비롯되었다. 그 후 침략전쟁은 불법, 호전적 국가에 대한 외부 경제제재는 합법이 되었다. 패러다임이 180도 바뀐 것이다.

그러나 이 조약은 뜻은 좋지만 구속력이 없는 선언에 불과해 1931년 일본의 만주침략을 필두로 결국 2차대전을 막지 못했다는 비판을 듣는다. 이 때문에 역사책의 각주에 등장하는 이상주의적 에피소드에 불과하다는 혹평이 따른다. 하지만 일본의 침략은 부전조약에 가입했던 국제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다. 부전조약 이전이었다면 아무 문제 없이 인정받았을 것이다.

합법화된 상태에서 일어나든 불법화된 상태에서 일어나든 전쟁은 전쟁인데 무슨 차이가 있는가라고 물을 수도 있다. 인간은 인지적 동물임을 기억해야 한다. 전자의 전쟁은 상식, 정상, 규범으로 인식되므로 전쟁에 대해 사람들의 문제의식이 얕고 좁아진다. 후자의 전쟁은 금기, 일탈, 범죄로 인식되므로 사람들은 비판적 관점에서 전쟁을 재인식하게 된다. 국가의 행동도 국제여론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2차대전의 본질이 흐로티위스식 구세계질서의 복원을 원하던 추축국들과 신세계질서를 꿈꾸던 연합국들 간의 투쟁이었다는 시각도 있다. 후자가 승리한 후 작성된 유엔헌장은 부전조약을 그대로 계승했다. 헌장의 2조 3항이 “국제분쟁을 평화적 수단으로 해결해야 한다”, 그리고 4항이 “타국의 영토 보전이나 정치적 독립에 관해 무력위협이나 무력행사를 삼간다”고 되어 있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전쟁이 합법화된 상태에서 늘 전쟁이 일어나는 구질서와, 전쟁이 불법화된 상태에서 간혹 전쟁이 일어나는 신질서를 비교해보자. 전자는 일관성이 있고 ‘솔직’하지만 인간 고통의 총량은 크다. 후자는 일관성이 부족하고 위선적이지만 인간 고통의 총량은 적다. 부전조약 이전에는 보통의 국가가 타국에 정복당할 확률이 수십년에 한번꼴이었지만, 조약 이후에는 그 비율이 천년에 한두번 정도로 낮아졌다.

전쟁이 불법이 되었으므로 전쟁을 일으킨 책임자를 범죄자로서 처벌하는 것이 이론적으로 가능해졌다. 국제형사재판소의 로마조약 제정 20주년인 올해, 조약이 개정되어 지난 7월17일부터 침략범죄의 책임자를 개별적으로 처벌할 수 있게 되었다. 강대국이 많이 불참하긴 했지만 전쟁의 불법화 수준을 한 단계 높인 역사적 사건이다.

위에서 말했듯 지난 몇년 사이 전쟁 불법성의 원칙이 후퇴하는 징조가 농후하다. 국가간 전쟁보다 국가 내 분쟁, 그리고 비국가 집단에 의한 테러 등이 늘어나는 경향도 보인다. 포퓰리즘과 무역분쟁도 좋은 조짐이 아니다. 강대국들이 대놓고 전쟁을 벌이거나 무력사용 위협을 가하는 경우가 생겼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한반도의 중요성을 찾아야 한다. 한반도의 평화 구축은 전쟁을 불법시한 부전조약과 유엔체제의 질서가 후퇴하고 있는 현시점에서 이 질서의 향방을 가늠할 중요한 바로미터다.

요즘 세계정세가 워낙 불안정하여 평화의 사례가 잘 보이지 않는다.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 사이의 평화 소식이 유일하다. 한반도의 평화는 그보다 훨씬 더 중요성이 크고 세계사적인 함의를 지닌다. 국제 평화애호 시민사회와 연대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한반도의 평화 구축을 국지적, 예외적 차원이 아닌 보편적 차원의 평화 아이콘으로 격상시킬 때 그동안 어긋났던 세계사의 시간과 한반도의 시간이 정렬될 수 있다. 그날이 오면 동아시아 인권의 지평도 질적으로 확장될 것이라 생각한다.

사회복지사와 인권

어느 쪽이 옳은가. 법적인 ‘형식상의 책무성’은 물론 복지법인이 져야 한다. 그러나 복지기관의 예산을 거의 전액 제공하는 공공기관엔 ‘사실상의 책무성’이 발생한다. 이 점에서 혼란이 온다. 이중적 책무성의 불명확성 때문에 서로 책임을 떠넘기는 가운데 현장의 사회복지사들이 책임을 뒤집어쓰는 구도다.

인권 문제의 원인에 대해 구조적 문해력이 존재하지 않을 때, 인권이 근시안적 담론으로 전락할 우려가 크다. 이용자 대 사회복지사 간의 갈등구도가 아니라, 이용자와 시민과 사회복지사가 연대하여 국가에 복지제도 개선을 요구하는 구도가 형성될 때 복지 현장에서 인권이 질적으로 비약하는 계기가 마련될 수 있다.

현업에 종사하는 사회복지사는 법정 의무교육을 받는다. 인권도 교육에 포함되어 있다. 복지 현장에서 인권이 강조되는 이유도 있고, 재원을 제공하는 지방자치단체에서 기관평가 항목에 인권교육을 포함한 이유도 있다. 정책상 좋은 방향이다.

나는 사회복지계와 직접 관련이 없지만 사회복지사들에게 인권교육을 실시할 기회가 있었다. 관찰을 해보니 보완할 점이 보이기 시작한다. 국외자로서 느낀 바를 조심스럽게 말해보려 한다.

지금까지 사회복지사에 대한 인권교육은 주로 권리침해 문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권리침해의 종별, 발생원인, 대처방안, 예방책 등을 가르쳤다. 덕분에 과거보다 복지 현장에서 인권침해가 많이 사라졌다. 관행, 타성, 인식 격차로 인해 발생하던 구시대적이고 반인권적인 행동이 크게 줄었다. 인권교육의 성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이런 방식에 문제도 있다. 대상자들을 잠재적인 인권침해자로 가정한 상태에서 인권교육이 이루어진다. 이렇게 되면 교육을 받는 입장에서는 방어적이 되거나 위축되기 쉽다. “인권 하면 겁부터 난다, 마치 죄인이 된 듯하다”고 털어놓거나, “우리 인권은 어떻게 보호받는가”라고 반문하는 사회복지사도 있다.

인권은 좋은 것인데 일부에서나마 왜 이런 거부감이 생기는가. 사회복지사들이 인권을 반대해서 그런 건 아닐 것이다. 인권교육이 이루어지는 맥락의 차원과, 사회복지사 양성과정에서 형성된 직업적 정체성의 차원으로 나눠 생각해보자.

첫째, 맥락의 차원. 인권침해를 클라이언트가 직접 경험하는 영역에 국한해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되면 인권은 대면관계상 나타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개념화되고, 그것은 흔히 갈등관리로 귀결된다. 권리가 침해되었다고 느끼는 이용자의 불만과 모든 문제가 자기 책임으로 귀결되는 상황에 답답함을 느끼는 복지사의 입장이 충돌하는 경우가 생긴다.

개별 사회복지사가 잘못하는 경우도 물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가 발생하는 근본 원인을 찾는 노력은 부족하다. 복지시설 이용자가 억울한 일을 당하여 자신의 인권 문제를 제기한다고 치자. 이때 그의 요구를 들어줄 궁극적 의무를 지닌 주체는 누구인가. 사회복지사인가, 시설장인가, 법인 대표인가, 아니면 공공기관인가.

복지 현장에서 해결이 어려운 인권 문제가 발생한다면 그것은 인권을 보호할 의무의 주체가 명확하지 않다는 현실에서 비롯되었을 개연성이 크다. 한국전쟁 후 민간 자선단체의 활동에서 시작하여 점차 공적 지원이 확대되어온 것이 우리나라 복지의 역사적 특징이다.

복지시설 입장에서는 부족한 지원과 불합리한 제도가 바탕에 깔려 있는 상태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오로지 시설이 다 책임지라고 요구하는 건 부당하다고 느낀다. 지자체가 자기들을 마치 하청업체 다루듯 한다고 하소연하기도 한다. 그러나 관리감독 관청에서는 서비스를 실제로 제공하는 복지기관이 당연히 이용자의 인권을 보호할 책임이 있다는 원칙적 입장을 고수한다.

어느 쪽이 옳은가. 법적인 ‘형식상의 책무성’은 물론 복지법인이 져야 한다. 그러나 복지기관의 예산을 거의 전액 제공하는 공공기관엔 ‘사실상의 책무성’이 발생한다. 이 점에서 혼란이 온다. 이중적 책무성의 불명확성 때문에 서로 책임을 떠넘기는 가운데 현장의 사회복지사들이 책임을 뒤집어쓰는 구도다.

이렇게 되면 우리 사회 각 분야에서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문제, 즉 구조적인 원인은 도외시한 채 실무자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문제가 되풀이된다. 불만을 제기하는 민원인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실무자와 갈등을 빚기 쉽다.

공공기관이 복지시설에 대해 인권교육을 의무화하는 것만으로 자신의 책무성을 다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인권 문제의 소지가 줄어들도록 복지시설의 여건을 조성하는 것도 중요하다.

여기서 복지시설 종사자들의 근로조건 개선을 빼놓을 수 없다. 시설의 종류에 따른 근무 격차도 해결해야 한다. 또한 종사자들의 노동권 문제가 클라이언트의 인권 문제보다 더 많이 제기되는 작금의 경향을 읽어야 한다. 종사자와 기관 사이에 발생하는 노동 문제에 관한 가이드라인을 제정하고, 재정지원 기관의 책임 범위를 더 넓혀서 고민해야 한다.

복지서비스 이용자와 시민, 공공기관, 시설장, 법인 대표, 사회복지사, 인권전문가 등을 대상으로 스터디모임 혹은 초점집단 면접조사를 조직해보시라고 제안한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장을 마련하면 좋을 것이다. 구체적 해법을 목표로 하지 않아도 된다. 당사자들이 바탕에 깔고 있는 기본 전제를 솔직히 털어놓고 서로 다른 입장과 고충을 천천히, 진지하게 고민하는 일련의 만남을 가져보라.

이용자의 인권과 사회복지사의 노동권을 함께 다루고, 한국 복지의 역사·구조적 특성까지 고려하면서, 좁은 의미의 문제해결식 접근이 아니라 상자 바깥에서 문제 자체를 출발점에서 새롭게 상상하는 깊은 토론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인권에서 숙의민주주의를 실험하는 단초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권 문제의 원인에 대해 구조적 문해력이 존재하지 않을 때, 인권이 몸통은 제쳐두고 깃털끼리의 갈등만 다루는 근시안적 담론으로 전락할 우려가 크다. 이용자 대 사회복지사 간의 갈등구도가 아니라, 이용자와 시민과 사회복지사가 연대하여 국가에 복지제도 개선을 요구하는 구도가 형성될 때 복지 현장에서 인권이 질적으로 비약하는 계기가 마련될 수 있다.

둘째, 사회복지사의 정체성 차원. 보수교육을 통해 인권의식을 기르는 것도 필요하지만 양성과정에서 처음부터 인권을 배우는 편이 훨씬 효과적임을 기억해야 한다. 사회복지학 교육과정에서 ‘실천론’이나 ‘행정론’과 같은 실무역량 과목은 전공필수지만, ‘사회복지 윤리와 철학’ 과목은 선택에 불과하다. 사회복지사 자격시험에도 나오지 않는다. 반드시 시정되어야 할 점이다.

한국 사회복지사 윤리강령은 “사회복지사는 인본주의·평등주의 사상에 기초하여, 모든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존중하고 천부의 자유권과 생존권의 보장활동에 헌신한다. 특히 사회적·경제적 약자들의 편에 서서 사회정의와 평등·자유와 민주주의 가치를 실현하는 데 앞장선다”고 해놓았다. 또한 “사회복지사는 인권존중과 인간평등을 위해 헌신해야 하며, 사회적 약자를 옹호하고 대변하는 일을 주도해야 한다.” 이렇게 훌륭한 강령을 만들어놓고 왜 그것을 학생 때부터 확실히 가르치지 않는가.

국제사회복지사연맹(IFSW)은 지난달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열린 대의원 총회에서 윤리원칙 선언을 개정하여 발표했다. 여기서도 인간의 본질적 존엄성, 인권, 사회정의를 제일 먼저 강조한다. 만일 사회복지사들이 윤리강령을 철저히 배웠더라면 인권에 대해 방어적이 되거나 피해의식을 갖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사회복지사들에게 세계인권선언에서 사회권의 백미로 꼽히는 25조 1항을 들려주곤 한다. “모든 사람은 자신과 가족의 건강과 안녕에 적합한 생활수준을 누릴 권리가 있다. 이러한 권리에는 음식, 입을 옷, 주거, 의료, 그리고 생활에 필요한 사회서비스 등을 누릴 권리가 포함된다. 또한 실업 상태에 놓였거나, 질병에 걸렸거나, 장애가 있거나, 배우자와 사별했거나, 나이가 많이 들었거나, 그 밖에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형편이 되어 살기가 어려워진 모든 사람은 사회나 국가로부터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

이런 업무를 담당하는 사회복지사는 자신이 사회권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는 인권전문가라는 정체성을 가져야 마땅하다. 사회복지사 교육에서도 복지가 곧 인권의 실현이라는 가치를 분명히 가르쳐야 한다. 사회복지사협회는 권익단체로서 회원의 처우 개선뿐만 아니라, 전문단체로서 직업윤리를 지키는 보루의 구실을 해야 한다. 그것이 길게 보아 사회복지사의 사회적 위상을 높이는 길이다.

사회복지사는 복지국가로 가야 하는 우리 공동체의 소중한 인재들이다. 이들이 전문가로서의 자긍심과 윤리의식에 바탕을 두고 업무에 임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복지서비스를 누리는 시민들의 인권을 위해서도 그러하다.

앰네스티의 변화가 주는 교훈

올해의 서문은 말 그대로 특별한 내용이었다. 경제 정책이 전세계적으로 인권에 미치는 악영향을 정면으로 다루었기 때문이다. 내가 기억하는 한 앰네스티가 연례보고서에 이런 서문을 실은 것은 처음이다. 경제의 인권적 함의를 그만큼 심각하게 본다는 방증이다.

노회찬 의원은 유엔 사회권위원회의 권고를 실천하기 위해 국가인권위원회법의 개정안을 발의했었다. 국가인권위가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에 대한 침해 및 차별행위를 조사할 수 있도록 해서 사회양극화와 불평등의 시대에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사회권 보호를 확대하자는 개정안이었다.

전세계적으로 인권의 강조점이 바뀌고 있는 추세가 오늘의 주제다. 인권을 옹호하는 사람이라면 국제적 인권상황과 담론의 변화를 주의 깊게 관찰하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 인권은 말 그대로 모든 인간의 문제이므로 국내 위주로만 인권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인권이라기보다 일국적 시민권에 가까운 개념이 된다. 많은 이들이 흔히 빠지는 함정이다.

전세계 인권 현황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자료를 펴내는 대표적인 인권단체로 국제앰네스티와 휴먼라이츠워치가 있다. 이들이 펴내는 연례보고서의 정확성과 공신력은 오랜 세월을 통해 입증되었다. 두 보고서의 형식은 비슷하지만 차이가 있다. 휴먼라이츠워치는 서문에 이어 바로 각 나라 인권 상황을 소개한다. 국제앰네스티는 맨 앞에서 아프리카, 아메리카, 아시아·태평양, 유럽과 중앙아시아,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지역별 개관을 먼저 제시한 후 각국에 대해 기술한다.

휴먼라이츠워치 보고서의 서문은 매년 특정 주제나 문제를 집중적으로 부각한다. 작년과 올해, 계속해서 포퓰리즘의 위험을 경고하는 글이 실렸다. 국제앰네스티 보고서의 서문도 간혹 특정 주제를 다루곤 한다. 지난 십년 동안 서너 번 그런 글이 나왔다. 그런데 올해의 서문은 말 그대로 특별한 내용이었다. 경제 정책이 전세계적으로 인권에 미치는 악영향을 정면으로 다루었기 때문이다.

내가 기억하는 한 앰네스티가 연례보고서에 이런 서문을 실은 것은 처음이다. 경제의 인권적 함의를 그만큼 심각하게 본다는 방증이다. 인권을 개별적 권리침해 문제로만 보지 말고 사회구조적 차원에서 파악해야 한다고 오랫동안 주장해온 내 입장에서 환영할 만한 움직임이다.

지난 토요일은 2008년 월가의 금융위기가 발생한 지 십년째 되는 날이었다. 기고만장하던 신자유주의의 날개가 꺾이고, 그런 식의 자본주의가 인권에 얼마나 큰 폐해를 끼치는지가 만천하에 드러난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 후 어떻게 되었던가. 문제의 근본 원인을 직시하고, 빈곤층과 사회 약자에게 상대적으로 큰 혜택이 돌아가는 방향으로 경제체제의 전환이 이루어졌는가.

위기의 원인을 제공한 자들에게 책임 추궁은커녕 혈세를 풀어 구제해 주고, 아무 책임이 없는 애꿎은 서민들을 더 큰 고통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그 과정에서 국가가 공공채무에 따른 예산적자를 줄이기 위해 각종 지출을 삭감하고 부가가치세를 늘리는 등 긴축정책(austerity)이 보편화되었는데 바로 이것이 오늘날 전세계인들이 겪는 고통의 뿌리가 되었다고 앰네스티는 진단한다. 그 결과 ‘타자를 악마화하는 정치’가 일상화되었다고 한다.

긴축의 타격을 받은 나라 사람들은 교사들이 빠져나가고 시설도 낙후된 학교에 자녀를 보내야 한다. 일자리가 줄고 실업상태가 길어져 우울증에서 암까지 온갖 건강 문제를 겪는다. 대출로 구입한 주택을 빼앗긴 후 낡고 좁고 춥고 습한 지하방으로 가족들이 옮겨간다. 사회보장 예산이 줄면서 노인들 돌봄 서비스도 대폭 축소되었다. 영국의 경우 긴축재정으로 인해 의료와 돌봄 관련한 사망자가 12만명이나 늘어났다.

긴축은 경제사회적 권리만 동결하지 않는다. 정부의 정책에 항의하는 시민들에게 무자비한 진압이 가해지고, 치안 예산이 깎이면서 범죄율도 높아진다. 법률지원 제도가 축소되어 무전유죄의 가능성이 가시화된다. 시민정치적 권리도 땅에 떨어진다.

이 같은 현실에 대해 극빈층의 인권 문제를 다루는 유엔 특별보고관은 긴축정책과 인권이 양립 불가능하다고 단언한다. 지극히 상식적인 결론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인권은 구체적인 침해가 일어난 후의 상황을 다루는 식으로 주로 발전해 왔으므로 긴축과 같은 특정한 경제정책―그것이 아무리 인권을 침해할 것으로 예상되더라도― 자체를 인권의 이름으로 미리 반대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앰네스티는 이런 딜레마를 인정하면서도 인권의 이름으로 경제정책에 개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정부는 공식 정책의 결과에 대해 정치적으로 무한책임을 져야 한다는 대전제가 깔려 있다. 일반시민들은 경제정책에 대해 정부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권리가 있고, 정부는 이 질문에 성실하게 답할 의무가 있다.

첫째, 얼마나 철저히 정책을 검토했는가. 둘째, 정책 결정 과정이 어느 정도나 참여적이고 투명했는가. 셋째, 그 정책이 경제사회적으로 가장 취약한 계층에 어떤 잠재적 결과를 미칠 것인가. 넷째, 정책으로 인해 초래될 것으로 예상되는 악영향을 경감할 조치를 미리 취했는가.

경제사회적 권리를 위해서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을 갖추는 것은 초보적 조치에 속한다. 더 나아가 앰네스티는 “특별한 시대는 근원적인 대안의 고려를 요구한다”고 선언하면서 대표적인 대안을 소개한다. 여기에는 보편적 기본소득과 필수 사회서비스의 국가 제공이 포함된다.

앰네스티는 세계인권선언 18조 사상·양심·종교의 자유, 그리고 19조 의견과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기 위해 출발한 단체다. 그러나 1999년 포르투갈의 트로이아에서 열린 24차 국제대의원총회에서 경제 문제와 인권에 관한 연구와 행동에 나서기로 결의하였다. 오히려 뒤늦은 감이 없지 않았지만 당시엔 반대도 많았다. <이코노미스트>는 앰네스티가 잘못된 길을 간다는 사설을 실었고, 전통적 지지자들 중에 단체를 탈퇴하는 이도 있었다.

인권을 오래 공부해 보니 기존의 인권문법 내에서 문제 해결에 치중하는 것보다 인권의 방향성 변화가 중요하다는 것을 자주 실감한다. 이 점과 관련하여 우리 국가인권위원회에 대해서도 한마디 하고 싶다. 노회찬 의원이 타계한 후 여러 추모들이 나왔지만 나는 특히 한 가지 기억으로 고인을 추모한다.

작년 11월 노 의원은 유엔 사회권위원회의 권고를 실천하기 위해 국가인권위원회법의 개정안을 발의했었다. 국가인권위가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에 대한 침해 및 차별행위를 조사할 수 있도록 해서 사회양극화와 불평등의 시대에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사회권 보호를 확대하자는 개정안이었다.

이것이야말로 노회찬 의원의 유지를 계승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 참신한 방안이 아닐까 한다. 정부가 바뀐 뒤 국가인권위를 개혁하기 위한 시도가 있었다. 적폐청산이 상자 내에서의 문제 해결이라면, 인권위의 행동반경 자체를 바꾸는 것은 상자 바깥에서의 변화를 뜻한다.

애초 국가인권위 제도의 설계에 내포된 한계로 인해 한국에서 인권이 지나치게 직접적 침해와 차별 중심의 담론으로 귀결된 측면이 없는지 냉정하게 돌아볼 때가 되었다. 지금과 같은 식의 패러다임을 계속 고수한다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엇비슷한 인권 문제를 끝없이 다루어야 하는 제도적 병목에 빠지게 되어 있는 구조다.

한국의 인권운동은 미시적 권리침해를 다루되 그것을 넘어 국가인권위가 경제부총리와 청와대 정책실장에게 경제사회적 권리와 관련된 정책을 매섭게 추궁할 수 있도록 방향 전환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국제적으로도 인권이 이런 지향을 가져야 한다는 지적은 오래전부터 제기되어 왔다.

앰네스티는 408쪽에 달하는 올해 보고서를 끝으로 내년부터는 온라인 버전으로만 출판을 고려하고 있다고 한다. 커뮤니케이션의 혁명적 변화상에 보폭을 맞추고, 기후변화 시대에 종이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겠다는 상징적 의사가 느껴진다. 앰네스티 연례보고서는 1962년에 16쪽짜리 팸플릿으로 초판이 나온 이래 전세계 인권운동의 등대 역할을 해온 아이콘이었는데 큰 변신을 도모하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감회가 깊다.

인권이든 그 무엇이든 시대에 맞춰 변하고 혁신해야 원래의 정신을 수행할 수 있다. 말은 쉬워도 행동은 어렵다. 인권을 이해하는 인식의 틀이 특정한 방향으로 고정되고 나면 제도와 조직, 전문지식의 성격, 인적 구성 등이 그것에 맞춰 형성되기 마련이다.

이렇게 되면 인권에 관한 불만과 비판조차도 기존의 인식틀 내에서 개념화되고 제기되는 경향이 굳어진다. 앰네스티라고 그런 어려움이 없었겠는가. 하지만 끊임없이 환골탈태하고 적응하려는 노력만큼은 평가할 만하다.

밀레니엄 대학생이 온다

밀레니엄 청소년들은 상충되는 두 흐름의 한복판에서 사회화를 거쳤다. 하나는 이명박, 박근혜 시대의 특징이었던 경쟁과 실적주의에 근거한 가치관의 내면화다. 모든 측면에서 ‘실력’과 ‘성적’ 순서로 보상이 주어지느냐를 면도칼처럼 따지는 것이 정당성의 기준이 되었다.

사람들이 힘을 합치면 얼마든지 격퇴시킬 수 있다는 ‘신나는’ 저항의 서사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젊은이들에게 영향이 큰 게임산업에서 기후변화에 대적하는 지구인들의 ‘영웅적’ 투쟁과 같은 소재를 작품으로 개발하여 출시할 날을 고대하고 있다.

요즘 대학가는 입시철로 분주하다. 내년 2019학년에 입학하는 새내기들 대다수가 언제 태어났는지 아시는가. 서기 2000년이다. 대학의 21세기는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물론 우리 삶의 양상이 달력에 따라 달라지진 않는다. 그러나 연대기적 시대구분이 인간의 의식 속에 깊게 각인되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새천년의 학생들을 어떻게 만날 것인가. 모든 교육자가 고민하는 질문이다.

대학생뿐만 아니라 한국의 대다수 21세기 청소년들은 능력이나 자질 면에서 그 전 시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나다. 얼마 전 세계은행의 발표를 보니 그 점이 확연히 드러난다. 5살까지의 아동 생존율, 학업 예상 기간과 학업 성취도로 계산한 학교 교육, 그리고 60살까지의 성인 생존율과 5살 이하 아동의 발달 정도를 점수로 계산한 어린이·청소년의 인적자본지수에서 한국이 0.84로 전세계 157개국 중 2위를 차지하였다.

물론 이런 식의 지표에는 허점이 적지 않다. 삶의 질이나 개인의 주관적 경험, 사회적 환경과 문제를 도외시하는 외형적 평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량적 역량지수가 높다는 말은 정성적 내용을 채울 수 있는 토대가 탄탄하고, 사회자본을 추가로 투입할 필요가 적다는 뜻이니 일단 양호한 객관적 조건이라 할 수 있다. 이 점을 전제로 해서 밀레니엄 또래집단의 인권 관련된 교육에서 유념해야 할 바를 짚어보자.

우선 밀레니엄 청소년들은 상충되는 두 흐름의 한복판에서 사회화를 거쳤다. 하나는 이명박, 박근혜 시대의 특징이었던 경쟁과 실적주의에 근거한 가치관의 내면화다. 모든 측면에서 ‘실력’과 ‘성적’ 순서로 보상이 주어지느냐를 면도칼처럼 따지는 것이 정당성의 기준이 되었다. 사회 전체에서 공정함이 제대로 발현될 수 있는 맥락이 소거된 채, 미시적이고 형식적인 공정성이 거의 이데올로기 수준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다.

또 하나는 이들이 세월호와 탄핵을 거치면서 사회와 정치의 토대가 붕괴되는 것을 목격하고 체험했다는 사실이다. 이 사건들은 형성기의 청소년들에게 집단적·감정적 트라우마와 권위에 대한 냉소, 정치적 분노와 열광을 동시에 경험하게 하였다.

두 흐름은 인권에서 모순적 형태로 나타나곤 한다. 불공정에 극도로 민감한 태도가 입시부정으로 촉발된 사건을 촛불혁명으로까지 상승시켰는가 하면, 또 다른 한편으로 우리 사회 시스템을 공짜로 악용하는 것처럼 보이는 난민 신청자들을 거부하게끔 만들기도 한다. 형식적 공정에 대한 집착을 실질적 공정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하고, 개별 원자적인 반차별 감수성을 인도적 성격의 반차별 의식으로 이끌어야 할 과제를 우리는 지고 있다.

밀레니엄 청소년들은 전지구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체념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기후변화에 대해 숙명론적인 인식이 많다.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 국제비교 연구에선 각국 응답자 중 평균 14% 정도가 기후변화에 대해 체념적 태도를 보이는데, 연령대를 20대로 좁혀 보면 그 비율이 22%로 급증한다고 한다.

내 경험에 따르면 신자유주의에 의한 구조적 불평등 같은 문제에 대해서도 젊은 학생들에게 그것의 ‘불공정성’을 인식시키고 그것에 대해 ‘불의감’을 느끼도록 안내하기가 쉽지 않다. 너무 거대한 문제에 압도당하거나, 눈을 감아버리는 경향이 있지 않나 싶다.

추상적인 것 같은 문제에 대해 정답을 강요하기보다 청소년들의 감성에 부합하는 어떤 출구를 인도해주는 접근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50년 뒤, 100년 뒤의 예상수치와 과학적 모델링으로 기후변화를 설명하기보다 올여름 폭염으로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병들고 고생했는지를 스토리로 제시하는 교육이 훨씬 낫다.

아무리 엄청난 난제라 해도 사람들이 힘을 합치면 얼마든지 격퇴시킬 수 있다는 ‘신나는’ 저항의 서사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젊은이들에게 영향이 큰 게임산업에서 기후변화에 대적하는 지구인들의 ‘영웅적’ 투쟁과 같은 소재를 작품으로 개발하여 출시할 날을 고대하고 있다.

세대 간 민주주의의 화두 역시 인권의 관점에서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 인구구조가 급격히 변하고, 앞선 세대가 채택한 정책이 후속 세대에 예기치 못한 영향을 끼치는 오늘날, 세대 간 이해관계가 제로섬의 권리 충돌 문제로 비화되기 쉽기 때문이다.

세대 간 대화의 핵심은 적극적인 경청에 있다. 이란 출신의 급우가 난민 자격을 얻도록 힘을 모았던 중학생들이 발표한 입장문을 보면 그들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고 지원해주었던 조희연 교육감과 염수정 추기경에 대한 감사의 인사가 나온다. 세대 간 경청의 모범사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권 감수성이 선순환의 촉매제가 되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 2016년 한국일보가 한국, 브라질, 덴마크, 일본 국민을 대상으로 다시 태어나도 자기 나라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은가 하는 조사를 했다. 부정적 응답률 중 한국인이 40%로 제일 높았다. 특히 20대에서 54%가 한국에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고 했다. 한국 젊은이들 절반 이상이 잠재적 이주자라는 뜻이다.

다시 태어나도 내 나라를 택하겠다는 사람이 자기 나라 인권에 문제를 제기한다면 그것은 사회를 더 살기 좋게 만들기 위한 건설적인 비판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나는 다시 태어나도 우리나라를 선택할 거야. 그런데 이렇게 좋은 나라에서 왜 이런 인권 이슈가 터져 나오는 거지. 이건 정말 우리 사회에 어울리지 않는 문제야. 빨리 시정해서 더 좋은 사회를 만들어야겠어.” 이것은 미래지향적이고 낙관적인 인권이다.

그러나 이 나라에서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인권 문제를 제기한다면 그것은 코너에 몰린 상황에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의 절박한 인권이 된다. 어차피 싫은 나라지만 그래도 일단 살고 봐야 하니 인권을 호명하는 것이다. “다시 태어난다면 절대 이 나라를 택하지 않을 거야. 뭐 제대로 된 구석이 하나라도 있어야 말이지. 하지만 어쨌든 내 한목숨 지켜야 하니 악착같이 권리를 찾을 수밖에 없어.” 이것은 수세적이고 비명에 가까운 인권이다.

후자의 인권담론이 팽배한 사회에서는 사람들의 자존감이 낮고, 자신의 가치를 하찮게 여기기 쉬우며, 대안을 상상하기도 어렵고 타인과 자신에 대해 폭력적인 성향을 띠게 된다. 어린이들이 자해 인증샷을 올리는 사회가 바로 그런 사회다. 이런 곳에서 호명되는 인권은 절망과 불만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똑같은 문제제기라 해도 그것이 나타나는 맥락에 따라 이처럼 전혀 다른 양태로 인권담론이 통용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불러내는 인권이 긍정적 선순환의 촉매제가 될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을 조성하는 데 더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조효제 성공회대 교수·사회학

이런 이야기를 꺼내기가 조심스럽긴 하지만 희망의 인권을 말할 때가 되었다고 본다. 프랜시스 허치슨에 따르면 희망에도 종류가 있다. 수동적 희망은 순진하고 낙천적이다. 화물신앙처럼 인과관계를 혼동하면서 단순히 기술적 해법을 내놓거나, 미래의 변화에 대해 판에 박힌 환원론적인 인식에 의존하기도 한다. 매뉴얼 같은 식으로 인권침해에 대응하면 언젠가는 인권이 잘 지켜지는 사회가 올 것이라고 막연하게 기대하는 것이 수동적 희망에 근거한 인권담론이다.

능동적 희망은 친사회적 인간관계 기술, 적절한 자신감, 개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과 전지구적인 것을 통합할 줄 아는 최적 조건의 문해 능력에 기반을 둔다. 능동적 희망으로서의 인권은 인권 근본주의에 빠지지 않고, 인권과 평화와 지속가능발전의 황금비를 모색하는 담론인 것이다.

앞으로 십년, 이십년 뒤엔 한반도 상황이 지금보다 훨씬 진전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때엔 이 땅의 모든 사람들―남북한 선주민과 이주자―을 아우르는 포괄적 인권이 우리 공동체의 본질적인 화두로 떠오를 것이다. 그 일을 해낼 주인공들, 능동적 희망의 인권을 실천할 밀레니엄 신입생들을 하루빨리 만나고 싶다.

증오의 불끄기

인권의 역사를 아는 사람은 맘충, 틀딱충, 한남충, 급식충, 지방충, 난민충과 같은 극혐 표현을 접하면 불길한 기시감에 사로잡히곤 한다. 히틀러는 유대인을 ‘해충’, 스탈린은 독립자영농 쿨라크를 ‘계급의 적’, 르완다의 후투족은 투치족을 ‘바퀴벌레’로 각각 지칭하지 않았던가.

불을 끄려면 ‘연소의 3요소’ 중 일부 혹은 전부를 통제해야 하듯, 증오를 근절하려면 체계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증오의 ‘불꽃’을 피우는 지도자를 제압하기 위해선 합리적 선거제도, 정당 발전, 분열적·선동적 정치인의 퇴출이 핵심이다.

지난 주말 한겨레에 중요한 인터뷰가 실렸다. 그 기사에서 국가인권위원장은 ‘소수의 어떤 견고한 집단’이 혐오를 전체로 확장하고 있으며, 인간을 벌레집단으로 몰고 가는 식의 차별적 혐오를 그대로 두면 큰 사회적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인권의 역사를 아는 사람은 맘충, 틀딱충, 한남충, 급식충, 지방충, 난민충과 같은 극혐 표현을 접하면 불길한 기시감에 사로잡히곤 한다. 히틀러는 유대인을 ‘해충’, 스탈린은 독립자영농 쿨라크를 ‘계급의 적’, 일본은 연합국 영미를 ‘귀축’(鬼畜), 크메르루주는 탄압 대상을 ‘불순분자’, 르완다의 후투족은 투치족을 ‘바퀴벌레’로 각각 지칭하지 않았던가. 이 정도라면 혐오를 넘어 파괴적인 증오다.

어떤 사람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호명하는 순간, 해로운 ‘그것’을 제거하는 일은 반드시 수행해야 할 과업이 된다. 그렇게 한 결과가 어떠했는지 우리는 잘 안다. 타자를 인지적으로 비인간화하기 시작하면 감정적 적개심으로 번지기 쉽고, 그런 적개심이 사악한 행동으로 표출되는 건 시간문제다.

이런 증오가 어디서 오는가, 왜 이렇게 극악한가,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우리는 모든 것이 다른 모든 것과 연결된 지구화 시대에 살고 있다. 전세계적 현상으로서 증오를 통찰할 수 있어야 한다. 유엔이 정한 국제관용의 날인 11월16일, 유럽안보협력기구의 ‘민주제도와 인권사무국’은 2017년 39개국의 증오범죄 현황을 발표했다.

공식적으로 집계된 증오범죄와 증오사건만 6천건 가까이나 되었다. 증오범죄는 단순한 범죄가 아니라 특정한 편향동기를 가진 범죄행위다. 이 조사에서 인종차별-외국인 혐오, 성적 지향과 젠더 정체성 혐오, 여혐과 남혐, 반유대인, 반무슬림, 장애인 혐오, 로마-신티 집시 혐오, 종교 혐오 등이 주요한 편향동기로 꼽혔다. 한국에서도 이런 동기들을 관찰할 수 있다.

세계적으로 증오범죄가 심각해지면서 전문적 연구도 늘었다. 5년 전 결성된 국제증오연구네트워크(INHS)는 “증오에는 국경이 없다”는 명제를 내걸고 ‘증오연구’라는 세부 학문분야를 주도하면서 ‘증오연구저널’이라는 학술지까지 발간하고 있다. 홍성수 교수의 <말이 칼이 될 때>도 이런 경향을 반영한 저서다.

증오범죄와 증오사건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것의 맥락조건과 구성요소를 함께 알아봐야 한다. 이것들이 서로 이어지면서 증오가 폭발한다.

우선 정치적 맥락의 조건. 권위주의 성향의 지도자 출현, 난민의 대량유입, 극단적 포퓰리즘, 불안정한 정부 구성, 가짜뉴스와 유사뉴스, 왜곡뉴스를 양산하는 새로운 정치 커뮤니케이션 방식, 민주세력의 지리멸렬 등을 꼽을 수 있다. 한국에선 세월호 사건, 촛불집회와 대통령 탄핵, 한반도의 극적인 정세변화가 주요한 정치적 맥락이라 할 수 있다.

다음으로 경제적 맥락의 조건. 특히 세계적으로 악화된 불평등 구조가 중요하다. 사회가 불평등할수록 사람들의 허탈감, 시기, 열등감, 불만, 우울, 타자와 자신에 대한 공격 성향이 늘어난다. 끓어오르는 분노의 압력은 사회의 약한 틈새인 소수-약자집단을 희생양 삼아 터져 나오기 쉽다. 미국의 연방수사국과 민간 연구기관의 조사에 따르면 불평등이 심한 주일수록 증오범죄-증오사건이 증가하는 상관관계를 보인다고 한다.

한국의 불평등도 심각하다. 근로소득과 자산소득을 합친 통합소득의 지니계수가 0.5를 넘어 국제기준으로도 매우 높은 불평등 수준이라는 조사가 얼마 전에 보도되었다. 지난주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최하위 1분위 가구와 최상위 5분위 가구 사이의 소득격차가 조사 이래 최악인 5.52배로 나왔을 정도다.

마지막으로, 집단 무의식의 맥락조건도 있다. 요즘 증오연구에서는 융의 정신분석 이론을 활용하곤 한다. 이슬람이 7~17세기 사이 동유럽과 남유럽에 침입했던 역사적 사례가 오늘날 반난민 정서의 원형일 가능성이 있다. ‘명백한 운명’이라는 미국의 역사적 환상은 트럼프의 선거구호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로 부활했다. 남북한 화해에 대한 반작용으로 레드 콤플렉스의 집단 무의식이 수면 위로 드러날 때가 많다.

이런 맥락조건이 있다고 해서 무조건 증오가 나타나는 건 아니다. 추가적인 구성요소들이 맞물릴 때 본격적으로 증오가 증오범죄 또는 증오사건의 형태로 발현된다. 이것을 ‘증오의 3요소’라 한다. 첫째 요소는 증오를 부추기는 지도자다. 그는 카리스마를 갖추고 권력의 사유화를 추구한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선 어떤 짓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이 신봉하는 가치는 보통 사람들과 전혀 다르다.

예를 들어, 그가 무고한 사람에 대한 폭력을 규탄한다면 빈곤층이나 약자계층에 대한 폭력을 규탄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과 같이 매일매일 순교자처럼 헌신하는 사람에 대한 세상의 ‘몰이해’와 ‘비방’과 ‘음해’를 규탄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지도자가 사용하는 표현과 수사는 거짓이나 위선이 아니다. 그런 사람은 애당초 근본에서부터 뒤틀린 자기만의 세계관에서 나온 확신을 도덕적 가치로 내세우는 것이다.

둘째 요소는 증오의 지지자들이다. 이들 중 적극적 동조자는 증오선동 지도자의 가치관에 진심으로 공감하고 능동적으로 행동에 나선다. 소극적 순응자는 현실 욕구불만, 미성숙한 자아, 부정적 자기평가와 낮은 자존감을 특징으로 하면서 증오선동에 은근히 동의하고 박수를 친다.

안제이 워바체프스키는 어느 사회든 폭력, 고통, 잔인성을 긍정하는 이들이 포함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이런 ‘소수의 어떤 견고한 집단’은 규모가 작지만 활동범위가 넓고, 확신의 강도가 상상할 수 없이 단단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가하고 악영향을 끼친다.

증오를 선동하는 지도자와 지지자들 사이엔 공통점이 많다. 이들은 죄의식과 자기성찰이 부족하고 소유욕과 지배욕이 강하다. 사고와 감정이 경직되어 있고, 인지적·정신적 결핍 때문에 타인에 대한 공감이나 연대를 못 한다. 남을 끝없이 의심하는 편집성 인격장애, 자신의 옳음을 맹신하는 자기애적 인격장애, 타인을 목적 달성의 수단으로 간주하는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가진 사람도 있다. 증오를 선동하는 지도자는 반대파에겐 불순세력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추종자들은 애국시민이라고 떠받들면서 사회 분열을 심화한다.

셋째 요소는 증오를 야기하는 환경이다. 정치, 사회 상황이 불안정하고, 경제적 어려움을 실제 또는 가상적으로 우려하는 사회 분위기가 큰 몫을 한다. 높은 실업률과 감당할 수 없는 주거상황, 집단 정체성을 강조하는 문화, 강력한 지도자를 희구하는 열망, 외집단을 배제하는 내집단 중심담론, 조금이라도 상황이 불확실해지면 질서 회복을 위해 무슨 조처든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태도도 증오를 불러오기 쉬운 환경을 만든다. 이럴 때면 악화된 환경이 증오의 ‘수요’를 만들어내고, 그것에 호응하는 지도자-지지자들이 증오를 ‘공급’하는 순환구도가 형성된다.

증오의 구성요소는 화재가 발생하는 ‘연소의 3요소’와 비슷하다. 불이 붙으려면 불꽃과 연료와 산소가 있어야 한다. 증오를 선동하는 지도자는 불꽃이고, 증오를 지지하는 자들은 연료이며, 증오를 야기하는 환경은 산소에 비유할 수 있다.

불을 끄려면 ‘연소의 3요소’ 중 일부 혹은 전부를 통제해야 하듯, 증오를 근절하려면 체계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증오의 ‘불꽃’을 피우는 지도자를 제압하기 위해선 합리적 선거제도, 정당 발전, 분열적·선동적 정치인의 퇴출이 핵심이다.

증오의 ‘연료’가 되는 지지자들을 봉쇄하기 위해선 학교와 직장 민주주의, 갑질문화 근절, 인권교육 활성화, 가짜뉴스 퇴치 캠페인, 이성적 소통 훈련이 필요하다. 차별금지법도 도움이 된다. 증오를 확산하는 ‘산소’를 차단하려면 빈부격차를 줄이는 포용적 사회·경제정책이 시행되어야 한다.

단기간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지만 촛불혁명을 이뤄 낸 시민들에겐 불가능한 과제가 아니다. 세계인권선언 70주년을 맞아 증오의 3요소를 격퇴할 아이디어를 함께 찾아보자.

세밑에 인간의 존엄을 다시 생각한다

탈종교적, 세속적으로 인권이 방향을 전환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인간 존엄을 초월적 원칙으로 인식한다. 그 결과 인간 존엄이 우리 바깥에서 우리를 지켜주는 어떤 객관적 방패라고 오해하는 경향이 생겼다. 하지만 인간 존엄은 우리의 의지와 실천만큼만 보장된다.

존엄이라는 단어를 주문처럼 되뇐다고 해서 인간이 존엄해지진 않는다. ‘우리가 김용균이다’라는 절규에 호응할 때, 광화문 여성들의 외침에 귀 기울일 때, 한국 국적이 없는 이방인의 처지를 같은 인간으로서 헤아릴 때에만 모든 인간의 존엄이 조금씩 늘어날 수 있다.

세계인권선언의 탄생 70주년을 기념했던 올해, 인권의 바탕을 이루는 핵심 개념인 인간의 존엄에 대한 경멸과 부정을 우려하는 분위기가 전세계를 휩쓸었다. 어쩌다 인권을 둘러싼 환경이 이렇게 나빠졌는가. 이런 상황을 반영하듯 인간 존엄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도 늘었다.

최근 창간된 <인권운동>에서 류은숙 인권활동가는 이렇게 지적한다. “…‘무미건조한’ 보편의 언어로서의 인권은 ‘텅 빈 그릇’ 같아서, 누가 갖다 써도 되고, 누가 무엇을 그 안에 담아도 되는 것처럼 섬세하지 못하다. 가령, 인권의 초석이라는 ‘존엄성’이라는 말만 봐도 그렇다. 여성의 낙태권을 반대하는 종교계 등의 세력도, 여성의 임신중단권을 주장하는 쪽도 모두가 ‘존엄성’을 내세운다. 존엄한 죽음을 요구하는 쪽도 존엄사를 반대하는 쪽도 ‘존엄성’을 내세운다.”

존엄성은 라틴어의 디그니타스 혹은 영어의 디그니티를 번역한 말이다. 원래는 어떤 사람의 지위에 걸맞은 품위, 그리고 사람의 인격과 자존감이라는 뜻을 가진 어휘다. 나중에 인권에서 말하는 ‘존엄’이라는 의미가 추가되었다. 그것은 이마누엘 칸트의 <도덕형이상학>에 나오는 뷔르데(W?rde)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칸트에 따르면 인간의 존엄은 그 자체로서 소중한 내재적 기본가치를 뜻한다. 사람은 가격을 매기거나 다른 어떤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절대적 존재다. 인간의 고유한 개별적 완결성을 지향하는 원칙이 존엄성이다. 따라서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존엄하다면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귀하게 인정함과 동시에, 스스로의 존엄도 지켜야 한다. “자신을 벌레 취급 하는 사람은 나중에 짓밟히더라도 불평할 수 없다.”

인권(인간권리)은 인간을 존엄하다고 동의하는 바탕 위에서 법이나 제도상의 ‘권한’을 결합시킨 개념이다. 인권에서 인간 존엄을 제외하면 순수하게 법적인 권리만 남게 된다. 이 때문에 인권과 관련 있는 모든 국제 문헌에서 잊지 않고 존엄을 포함시키는 것이다.

유엔헌장과 세계인권선언을 필두로, 사회권규약, 자유권규약, 인종차별철폐협약, 아파르트헤이트범죄처벌협약, 교육차별철폐협약, 인신매매억제협약, 고문철폐협약, 여성차별철폐협약, 여성정치권리협약, 아동권리협약, 이주노동자권리협약, 장애인권리협약, 강제실종철폐협약, 유럽인권협정 사형폐지부속의정서, 헬싱키협정, 유럽연합기본권헌장 등 주요 국제인권규범에는 인간 존엄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여러 나라의 헌법에도 존엄이 나온다. 2차대전의 추축국이었던 독일과 이탈리아의 헌법에 인간 존엄이 명시되어 있다. 일본 헌법 13조는 “모든 국민이 개인으로서 존중받는다”고 규정하는데 학자들은 이를 인간 존엄 원칙으로 해석한다. 유럽에서 늦게 민주화되었던 스페인, 포르투갈, 그리스의 헌법에도 인간 존엄이 들어 있고, 남아프리카 헌법에서도 존엄성이 중요하게 취급된다. 민주자본주의 체제로 이행한 러시아, 헝가리, 폴란드, 체코, 우크라이나,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의 헌법에서도 존엄성 조항을 찾을 수 있다.

한국 헌법도 마찬가지다. 국민의 권리와 의무를 다루는 2장의 10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고 선언한다.

흥미롭게도, 존엄이 제일 먼저 포함된 헌법은 민정이양으로 박정희가 5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1963년 12월17일에 시행된 헌법 제6호였다. 그 8조에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이를 위하여 국가는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최대한으로 보장할 의무를 진다”고 나와 있다. 취임식 일주일 전에는 세계인권선언 15주년을 기념하는 우표 2종을 발행하기도 했다.

국가인권위원회법의 1조에서도 “이 법은 국가인권위원회를 설립하여 모든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보호하고 그 수준을 향상시킴으로써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실현하고 민주적 기본질서의 확립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규정한다. 이처럼 국내외를 막론하고 지난 70여년은 인간 존엄이라는 키워드가 지배한 시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2차대전이 끝나기 전까지는 인간 존엄이라는 말이 인권 관련 문헌에 잘 등장하지 않았다. 마그나카르타에는 나오지 않고, 영국권리헌장에는 현재의 도덕적 의미가 아닌 뜻으로 나온다. 프랑스혁명의 인권선언이나 미국독립선언 혹은 미국연방헌법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노예폐지운동이나 여성참정권운동, 국제노동자협회(제1인터내셔널)의 발기문에서도 존엄이라는 어휘가 쓰이지 않았다.

결국 2차대전이 끝난 후에야 인간 존엄을 인권의 토대적 개념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그런 면에서 유엔헌장과 세계인권선언이 인권 개념에 큰 변화를 줬다고 할 수 있다. 왜 20세기 후반에 인간 존엄의 원칙이 인권에서 이렇게까지 중요해졌을까.

전후 세계질서의 수립 과정에서 인권의 보편화를 추구하게 되었으므로 그 전까지 지배적이었던 유대-그리스도교적 천부인권 사상으로서의 자연권을 넘어설 ‘보편적’ 논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즉, 서구적인 천부인권(天賦人權)이 아니라, 인간 존재 자체에서 인권이 도출된다고 하는 인중인권(人中人權)을 내세운 것이다. 그런 면에서 칸트의 정언명령적 도덕관은 매력적인 대안이 되었다.

또한 인간 존엄 사상은 민주주의의 시대정신과도 부합했다. 신분과 차별을 타파하고 독립적인 개별 존엄자들이 공동체의 의사결정에 평등하게 참여한다는 원칙은 현대의 정치문화와 잘 맞았다.

인간의 개별적 존엄을 인정할 때 몇가지 생각해볼 점이 있다. 우선, 인권의 내용이 당사자들의 주관적 요구와 견해를 반영하여 만들어지는 경향이 생겼다. 이 과정에서 인간 존엄에 관한 여러 해석과 요구들이 각축, 경합, 절충, 타협하면서 인권의 목록이 확장되었다.

탈종교적, 세속적으로 인권이 방향을 전환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인간 존엄을 어떤 초월적 원칙으로 인식하곤 한다. 그 결과 인간 존엄이 우리 바깥에서 우리를 지켜주는 어떤 객관적 방패라고 오해하는 경향이 생겼다. 하지만 인간 존엄은 우리의 의지와 실천만큼만, 딱 그만큼만 보장된다.

또 다른 차원의 오해도 있다. 인권에서 인간 존엄을 규정하기 전까지, 즉 2차대전 끝나기 전까지는 야만의 시대였지만 그 후 국제적으로 인권이 확고하게 자리 잡고 나서부터는 세상이 질적으로 달라졌다고 보는 생각이 그것이다. 이런 식의 단절론적 인권 세대관은 오류이자 위험한 인식이다.

최근 전세계적으로 포퓰리즘이 확산되면서 갑자기 인간 존엄의 기반이 악화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신중하게 다뤄야 한다. 예를 들어 트럼프, 푸틴, 시진핑 유의 권위주의적 지도자들의 등장이 인권을 악화시킨 독립변수인가, 아니면 더 깊은 원인이 따로 있고 이들은 매개변수에 불과한가.

마지막으로, 인간 존엄 사상의 토착적 등가물을 찾아서 새로운 해석과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도 이루어져야 한다. 예컨대, 우리의 인내천(人乃天) 사상은 세계적 수준의 인권 이론으로 손색이 없다.

결론적으로, 인간 존엄이란 인간의 고유한 개별적 완전성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아 인간을 상향평준화하려는 지적, 실천적 지향이라 할 수 있다. 반대로, 인간의 개별적 완전성을 해체하여 그 구성요소들의 경제적·사회적 효용성만 써먹으려는 모든 시도는 인간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삼는 반인권적 패악이다.

존엄이라는 단어를 주문처럼 되뇐다고 해서 인간이 자동적으로 존엄해지진 않는다. ‘우리가 김용균이다’라는 절규에 호응할 때, 광화문 여성들의 외침에 귀 기울일 때, 한국 국적이 없는 이방인의 처지를 같은 인간으로서 헤아릴 때에만 모든 인간의 존엄이 조금씩 늘어날 수 있다.

칸트가 한 말도 있지 않은가. “인간의 도덕적 완전성은 인간의 의무를 계속 준수하는 전진 속에서만 성립할 수 있다.” 인간 존엄의 진정한 뜻을 되새기는 것으로 올 한해를 마무리하면 어떨까.

여성인권 40년의 역사에서 배운다

여성차별철폐협약이 전세계 여성의 삶과 지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여성의 정치적 권리 신장에 확실히 기여했고, 사회적 권리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으며, 경제적 권리에 작지만 일정한 효과가 있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개혁적인 제도가 흔히 그러하듯 ‘협약’도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아왔다. 전통 보수주의는 여성의 개별적 완전성과 독립성, 평등성을 주창하는 ‘협약’을 못마땅해한다. 급진 페미니즘은 ‘협약’이 젠더평등을 양성평등에 국한시킨 점 등을 비판한다.

세계 여성인권의 주요 이정표가 세워진 지 올해로 40년이 된다. 인권운동가들이 흔히 ‘시이도’(CEDAW)라 부르는 여성차별철폐협약(협약)이 그것이다. 과거엔 굉장히 불온하게 여겨진 여성의 평등한 지위와 권리가 오늘날 당연한 (적어도 원칙과 형식에 있어) 상식으로 자리잡는 데에는 이 ‘협약’의 공이 컸다.

반세기 전만 해도 국제 인권운동에서 여성인권은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다. 주로 개발 분야에서 여성의 주장과 욕구를 정책에 반영해야 한다는 관점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1966년 자유권규약과 사회권규약이 나온 뒤 여성 권리를 독자적인 인권 의제로 인정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생겼다.

그런 움직임에 호응하여 유엔 총회는 1967년 여성차별철폐선언을 내놓는다. “여성에 대한 차별은 근본적으로 불의하고, 인간 존엄의 침해다”라는 1조의 천둥소리로 많은 사람들의 눈에서 비늘이 떨어졌다. 그 여세를 몰아 유엔은 1975년을 국제여성의 해로 정했고, 그때부터 법적 구속력을 가진 조약을 준비하여 마침내 1979년 ‘협약’을 제정하였다.

다른 국제인권기준들과 비교해보면 ‘협약’의 특징이 드러난다. 대단히 구체적인 행동 의무를 당사국에 부여한다. 그리고 각국 헌법과 법령에 나오는 여성의 법적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장해야 한다는 실천성을 누누이 강조한다. 실질적 보장성이 무엇인가.

우선 법이나 정책이 구속력을 가진 효과를 내야 한다. 제도와 인프라의 수준을 높여 여성차별에 관해 공무원, 경찰, 공공부문 종사자를 훈련시켜야 한다. 여성의 출산과 양육의 특성을 사회를 조직하는 모든 단계에서 감안해야 한다. 그리고 여성인권에 대해 모든 사람의 인식과 태도를 바꿔야 한다. 이런 주장은 지금이야 정상이라고 생각하지만 당시엔 혁명공약만큼이나 파격적이었다.

‘협약’이 전세계 여성의 삶과 지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여성의 정치적 권리 신장에 확실히 기여했고, 사회적 권리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으며, 경제적 권리에 작지만 일정한 효과가 있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협약’ 위원회에서 일반권고를 통해 ‘여성에 대한 폭력’ 문제를 정식 인권 의제로 각인시킨 공로도 평가할 수 있다. ‘협약’에 들어 있지 않은 이슈라 해도 위원회가 하기 나름으로 얼마든지 중요하게 만들 수 있다는 선례를 세웠다.

‘협약’만 따로 떼어 효과를 논하기보다 여러 연관된 요인들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그 나라가 ‘협약’과 중복되는 내용의 여타 국제조약에도 의무를 지고 있는지, 지속가능발전목표(SDG)와 같은 정책 목표를 잘 지키는지, 정부와 국민이 성평등 의지를 가진 상태에서 ‘협약’을 비준했는지, ‘협약’이 그 나라의 기존 법체계와 잘 호응하는지, 그리고 특히 시민사회 활동이 얼마나 단단히 뿌리를 내렸는지 등의 요인도 중요하다.

물론 ‘협약’에 가입한다고 해서 어떤 나라의 여성인권 수준이 당장 좋아진다고 보긴 어렵다. 정부가 위원회에 보고서를 제출하는 사이클이 되풀이되면서 정부의 여성 정책이 위원회의 지적과 권고에 서서히 맞물려 돌아가게 된다. 그렇게 본다면 마흔살이 된 ‘협약’이 전세계 여성의 인권을 주류화하는 데 분명한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현재 189개국이 ‘협약’을 비준한 상태다. 이란, 소말리아, 수단, 통가는 서명을 하지 않았고, 미국과 팔라우는 서명만 하고 비준을 하지 않았다. 한국은 1984년에 비준을 했다. 한국이 유엔에 가입하기 전에 비준한 인권 조약으로 ‘협약’과 인종차별철폐협약이 있다.

5공 시절인 1982년, 한국 대표단이 유엔 여성지위위원회에 옵서버 자격으로 참석한 뒤 ‘협약’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됐다. 국제적 신망을 높이려고 ‘협약’의 비준을 추진했지만 국적법의 부계혈통주의가 걸림돌로 작용했다. 또한 호주제나 동성동본 불혼제 등도 문제가 있었지만, ‘협약’의 일부 조항을 유보한 상태에서 서둘러 비준을 추진했다. 그 뒤 국적법과 가족법을 개정하여 유보 조항을 철회하게 된다.

한국이 ‘협약’을 비준한 뒤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이루어진 입법 중 ‘협약’을 반영한 법률이 상당수 있다. 1994년의 ‘성폭력 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그리고 1998년의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은 여성에 대한 폭력을 반대한 ‘협약’ 위원회의 취지를 이어받았다. 1999년의 ‘남녀차별 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률’과 2004년의 ‘성매매 알선 등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률’ 역시 ‘협약’으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은 것이다.

개혁적인 제도가 흔히 그러하듯 ‘협약’도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아왔다. 전통 보수주의는 여성의 개별적 완전성과 독립성, 평등성을 주창하는 ‘협약’을 못마땅해한다. 혼인과 가족관계의 모든 측면에서 평등을 규정한 16조를 유보한 채 협약을 비준한 국가가 많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급진 페미니즘은 ‘협약’이 젠더평등을 양성평등에 국한시킨 점, 섹슈얼리티에 관한 다양한 시각을 반영하지 못한 점 등을 비판한다.

‘협약’ 40주년을 맞아 현재 한국 사회를 격동시키고 있는 페미니즘의 도전과 젠더 이슈를 어떻게 보면 좋을까. 첫째, 제도적인 성평등조차 지체된 분야는 근본적으로 재정비해야 한다. 예를 들어, 과거 호주제 아래서 자녀는 아버지의 성과 본을 무조건 따라야 했다. 그러나 개정된 민법 781조 1항은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자는 부의 성과 본을 따른다. 다만, 부모가 혼인신고 시 모의 성과 본을 따르기로 협의한 경우에는 모의 성과 본을 따른다.”

강제 부성 원칙에서 부모 협의 원칙으로 개선된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혼인신고 할 때 미리 그렇게 해놓아야 한다는 뜻이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의 성을 혼인신고 때 미리 정해놓을 신혼부부가 과연 몇이나 될까. 작년의 국민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3분의 2 이상이 이런 규정이 불합리하다고 지적했다. 현행 민법으로는 결혼 시점에 어머니의 성을 따르기로 미리 상의한 경우와, 혼인외자만이 어머니 성을 따를 수 있다.

이건 거의 블랙코미디 수준의 법이라 할 수밖에 없다. 조경애와 조은경은 아이의 출생신고를 할 때 부모가 협의하여 성을 결정하고, 그것이 어려우면 성을 미정으로 둔 채 일단 신고한 뒤 나중에 법원의 결정에 따르자는 대안을 제시한다. 장기적으로는 사람의 성을 국가가 규율하는 제도 자체를 폐지하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둘째, 페미니즘의 문제 제기가 국제적인 여성인권운동 조류와 연대할 수 있도록 운동가들과 연구자들의 의식적인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게 될 때 여성인권운동은 젊은 페미니스트들의 첨예한 문제의식에 자극받아 시대정신에 민감한 운동으로 진화할 수 있고, 페미니즘은 국제 인권운동이 오랫동안 발전시켜온 수준 높은 정책적 도구와 방법론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오랜 시간 속에서 누적된 모순의 폭발로서 나타난 페미니즘의 주장과 그것의 표현형을 역사적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런 차원과 맥락을 배제한 채 공시적이고 국면적인 분석으로만 접근하면 자칫 인상기적인 비평이나 불만에 빠질 위험이 있다. 모든 사회운동이 다 그렇지만 특히 성평등을 둘러싼 논란은, 우리에게 긴 호흡의 역사의식을 가지고 인간해방이라는 대장정의 일부로서 이 문제를 바라볼 것을 요청한다.

마지막으로, ‘협약’에서 간과되어온 전문의 여러 부분을 재발견해야 한다. 예를 들어 “모든 형태의 인종주의, 인종차별, 식민주의, 신식민주의, 침략, 외국의 점령 및 지배와 국내 문제에 대한 간섭 등의 제거가 남녀 권리의 완전한 향유에 필수적”이라는 지적을 보라. 성평등의 문제가 전세계적이고 국제적인 구조의 모순과도 연결된다는 통찰을 수용할 필요가 있다. 미투운동이나 디지털 성범죄 반대 운동이 이런 차원에까지 눈을 돌려 한반도의 구조적 모순을 타파하려는 움직임과도 소통할 때 젠더평등이 더욱 견고한 기반 위에 구축될 수 있을 것이다.

인권도 마음이 중요하다

냉전이 격화되고 동서 진영 갈등을 지정학적 체스게임으로 설명하기 시작하면서 사람의 마음에 주목하는 접근 방식은 비과학적이고 비체계적인 방식으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최근 국제정치학, 경제학, 사회학에서 인간행동의 심리적 추동 원인을 재발견하기 시작했다.

인권에 있어 사람의 심리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양육의 초기 단계부터 인권 친화적인 마음을 길러야 한다. 과도한 처벌, 무관심과 방치, 지나친 응석 허용은 인권과 반대되는 성격을 만들기 쉽다. 자기 행동으로 타인이 해를 입을 수 있다는 점을 이해시켜야 한다.

하노이에서 트럼프와 김정은이 이번에는 어떤 역사를 쓸 것인가. 현재 진행 중인 한반도 상황에는 과거와는 다른 특징이 많다. 그중 하나가 양국 지도자의 성격이다. 두 사람 다 자기중심적 과시형인데다, 목표지향적 성취욕에 불타고, 위험감수 승부사적 기질이 두둑하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끌리는 것일까. 언론에서 이런 측면을 많이 부각하는데, 이를 단순히 가십거리로만 볼 순 없다.

국내외를 통틀어 정치 지도자들의 만남에서 양자의 ‘케미’에 이렇게까지 주목한 사례가 근자에 또 있었던가. 최고 의사결정자들의 정서적 친밀성에 바탕을 두고 톱다운 방식으로 내린 결정이 한반도와 세계 평화, 통일, 그리하여 남북한 주민들의 인권에까지 획기적인 영향을 끼친다면 세기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두 사람의 성격적 특징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순 없다. 하지만 마음이 통하지 않았더라면 여기까지 못 왔을 가능성이 상당하다.

지도자들의 마음만 중요한 게 아니다. 지난달 <한겨레>에서 서재정 교수가 말한 대로 현재 북-미는 “서로를 겨누는 군대와 무기체계, 군사연습 자체가 필요 없는 상황을 만드는 노정”에 있으므로, 양국 관계 변화의 핵심에는 “마음 안에 있는 적대감, 불안감을 씻어내는 과정”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므로 북한, 미국, 한국 국민들의 마음 변화가 대단히 중요하다. 전통적인 냉전형 군비통제 논리 혹은 대북제재로써 비핵화를 압박해야 한다는 식의 전략적이고 계산적인 사고로는 현 상황을 설명하지 못한다고 서 교수는 강조한다.

1945년 제정된 유네스코 헌장도 이와 비슷한 점을 지적한다. 헌장의 첫 문장을 보라. “전쟁은 인간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므로 평화의 방벽을 쳐야 할 곳도 인간의 마음이다. 서로의 풍습과 삶에 대해 무지했던 것이 인류 역사를 통틀어 세계인들 사이에서 의혹과 불신을 초래한 공통적인 원인이 되었으며, 이 의혹과 불신으로 인한 생각 차이가 너무나 자주 전쟁을 촉발시켰다.”

냉전이 격화되고 동서 진영 갈등을 지정학적 체스게임으로 설명하기 시작하면서 사람의 마음에 주목하는 접근 방식은 비과학적이고 비체계적인 방식으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최근 국제정치학, 경제학, 사회학에서 인간행동의 심리적 추동 원인을 재발견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비국가 행위자들이 왜 급진화되기 쉬운가 하는 질문에 거시적 시스템의 분석만으로 답하긴 어렵다. 차가운 인지(이성적 사고)와 뜨거운 인지(심리적 동기)가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과거엔 인지 지도를 그리거나 심리학적 프로필로서 지도자의 성격 특징이 정치적 결정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곤 했다. 그러나 요즘에는 개별 사례들로부터 일반 원칙을 도출하려는 경향이 늘었고, 지도자가 처한 상황이나 제도환경의 차이가 의사결정의 인센티브를 다르게 만드는 측면을 분석한다. 인권학에서도 사회심리에 주목한 지 이십년쯤 되었다. 대표적인 연구 흐름을 살펴보자.

첫째, ‘인류 공동체’에 대한 태도다. 역사, 문화, 전통 등 온갖 차이에도 불구하고 지구상의 모든 사람을 하나의 인간가족으로 받아들이느냐 하는 점을 연구한다. ‘인류 공동체’ 개념은 15세기부터 조금씩 발전해왔다. 존 던이 17세기 초에 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낭만적인 인류 개념을 표현한 시다. “대륙의 한 부분이 대양의 파도에 휩쓸려 나간다. 우리는 인류의 한 부분, 그러니 마을에서 조종이 울릴 때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는지 알아보려 사람을 보내지 말라. 종은 바로 그대를 위해 울리는 것이니.”

이런 전통을 이어받은 간디는 다음과 같이 웅변한다. “모든 인류는 서로 나눌 수 없는 한 가족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든 사람들의 잘못에 책임을 느껴야 마땅하다. 아무리 사악한 인간이라도 나와 동떨어진 존재라고 끊어낼 수 없다.” 인권은 모든 인류를 나의 내집단으로 간주하겠다는 엄청난 지성적·정치적 기획인 셈이다.

한가지 질문을 해보자. 세월호, 백남기, 송파 세 모녀, 김용균…. 이런 사건들로부터 우리가 경험하는 정서적·도덕적 충격을 콩고, 시리아, 예멘, 로힝야 사태에서도 동일하게 느끼는가. 우선 나부터도 머리로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으로는 그게 잘 안 된다. 인간의 공감능력은 가까운 집단부터 시작해서 여러개의 동심원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인권은, 우리가 어떤 집단과 동일시하는 자아범주화를 제일 높은 수준, 즉 인류 전체와 동일시하는 차원으로 확장할 것을 요청한다. 인권을 문자 그대로 실천하려면 공감의 동심원을 하나의 큰 동그라미로만 그려야 한다. 솔직히 말해 어려운 일이며, 그만큼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둘째, 성격에 따라 인권을 대하는 태도가 어떻게 달라지는가. 자기범주화의 동심원이 작을수록, 다시 말해 자기 종족 중심적일수록 인권으로부터 멀어진다. 세상을 상하로 나누는 데 익숙하고, 사회적 지배성향이 강할수록 반인권적 행동을 하기 쉽다. 전통, 복종, 처벌을 중시하는 우익권위주의적 성향일수록 인권과 잘 맞지 않는다. 그러나 공감성향이 있고, 도덕적 추론을 할 수 있는 사람일수록 인권과 정비례하는 태도를 보인다.

셋째, 인권에 찬성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인권과 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 왜 그렇게 많은가. 두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대다수 사람은 추상적 차원에서는 인권에 찬성하지만 구체적인 인권문제를 접하면 평상시의 사고방식으로 재단하는 경향이 있다. ‘착한’ 피해자와 ‘싸가지 없는’ 피해자를 나누고, 보호할 ‘가치’가 있는 인권문제와 그렇지 않은 인권문제를 나눈다. ‘피해자답게’ 행동하는 불쌍해 보이는 사람의 인권을 보호해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피해자가 사회통념과 어긋나는 문제를 호소하거나 자기주장을 너무 많이 하는 것 같은 사람에게는 냉담하게 반응한다. 그러므로 인권의 역사는 추상적 인권원칙과 실질적 인권의식 사이의 일관성을 높이려는 투쟁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자신이 속한 집단의 규범과 행동기준에 자기 행동을 맞추려는 경향도 있다. 사회적으로 우월한 집단에 속해 있는 사람은 열등한 집단에 대해 비대칭적 권력관계를 유지하는 쪽으로 행동한다. 이런 사람은 자기 집단의 추론 방식을 무비판적으로 따르기 쉽다. 유유상종은 인권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자기들끼리만 소통하는 에스엔에스(SNS)에서의 확증편향이 무서운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절대다수의 한국인이 겉으로는 인권에 찬성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증적인 조사를 해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2008년 전세계 19개 나라 국민을 대상으로 한 ‘고문에 관한 세계여론조사’ 보고서가 발표되었다. ①모든 고문이 폐지되어야 한다(평균 57%) ②테러범에게는 약간 고문을 해도 된다(평균 26%) ③고문을 평상시에 허용해도 된다(평균 9%)라는 결과가 나왔다. ①번에서 절반 이하로 답한 나라 ②번에서 30% 이상으로 답한 나라 ③번에서 10% 이상으로 답한 나라, 이 세 범주에 모두 속한 나라가 딱 5개국이었는데 그중에 한국도 들어 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얼마나 먼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결론을 내자. 인권에 있어 사람의 심리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양육의 초기단계부터 인권 친화적인 마음을 길러야 한다. 과도한 처벌, 무관심과 방치, 지나친 응석 허용은 인권과 반대되는 성격을 만들기 쉽다. 자기 행동으로 타인이 해를 입을 수 있다는 점을 이해시켜야 한다. 삶에서 경험한 고통을 반추하면서 역지사지하는 공감능력을 키우도록 안내할 수도 있다. 세계시민교육을 통해 자기범주화 수준을 높이는 것도 중요하다.

인권에는 왕도가 없다. 구속력 있는 법제도가 필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자기 집단의 반인권적 규범을 따르지 않게 하려면 사회 전체를 관통하는 강력한 인권 규범이 있어야 한다. 지속적인 민주시민교육을 통한 인식 변화도 필요하다. 이런 노력에 더해 인권 증진의 개연성을 높이는 사회구조의 변화가 있을 때 비로소 인권이 조금씩 전진한다.

대중과 인권 이야기하기

지금까지 인권운동의 주된 방식은 정해져 있는 규범에 비추어 현실을 비판하고 그에 맞추라고 촉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새 대중의 ‘가슴과 마음’을 사로잡아야 인권을 유의미하게 확장시킬 수 있는 시대가 와버렸다. 인권에 무관심하거나 미온적인 대중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오늘날 한국이 과거에 비해 인권을 더욱 지지하는 사회가 되었는가. 겉으로는 당연히 그런 것처럼 보인다. 인권에 대한 발화가 늘어났고 권리주장도 흔해졌다. 그러나 인권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을 들여다보면 복잡하고 모순적인 면이 나타난다. 꼭 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어떤 변화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다.

인권을 규정하는 방식이 많이 달라졌다. 권위주의 시대에는 독재에 반대하는 가치와 지향으로서 인권을 상정하곤 했다. 인권은 신성한 개념이었고 불의한 권력을 거부하는 깃발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요즘 인권은 개인의 삶 속에서 경험되는 구체적인 실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흔히 이해된다. 내가 불이익을 당했을 때 불러내는 문제 해결사의 역할도 한다.

또 다른 변화는 인권의 당파적 양극화 현상이다. 인권을 말하면 십중팔구 특정한 진영에 속해 있을 거라고 지레짐작하는 경우가 많다. 정치적 저의를 포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권을 내세운다는 의구심도 있다. 인류의 보편적 포부라는 기본 원칙이 한국에 오면 이른바 ‘좌파’의 전유물로 치부되거나, 그런 식의 편 가름 속에 자리매김되어버린다.

예전에 비해 이런 경향이 심해졌다. 심각한 문제다. 오해를 받아 개인적으로 억울해서가 아니다. 인권의 당파적 낙인효과는 필연적으로 인권의 왜곡으로 이어지고 그 후유증은 모두에게 미친다. 앞으로 선거철만 되면 인권 중에서도 아주 첨예한 몇몇 이슈를 중심으로 후보와 정당을 싸잡아 평가하고, 그에 따라 당락이 바뀌는 일이 나타나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이런 위험은 민주주의 원리 속에 이미 내재되어 있기도 하다. 아무리 다수결이라 해도 개인의 기본권을 침해해선 안 된다는 원칙이 있지만, 그 원칙이 흔들리는 건 아주 쉽다. 극소수를 제외한 대다수 정치인이 소수자의 인권 문제를 거론하는 것 자체가 불리하다는 정치공학적 인식을 가지고 있다. 반인권 세력은 똘똘 뭉쳐 그런 약한 구석을 파고들면서 혐오를 조장하고 인권을 흔들어댄다.

전통적으로 인권운동은, 인권을 보호할 법과 제도를 잘 마련하면 인권이 지켜질 수 있다는 제도주의적 인과모델에 크게 의존해왔다. 이런 모델이 일정한 효과를 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전제가 통하려면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어떤 평형 상태가 유지되어야 한다. 이런 토대적 조건이 붕괴하면, 예컨대 극심한 불평등, 삶이 한순간에 무너질지 모른다는 불안, 폭발 일보 직전의 울분, 제도에 대한 불신과 냉소가 팽배한 상황에서는 법과 제도만으로 인권을 지키기가 어렵다.

바로 이 지점에 인권의 딜레마가 있다. 지금까지 인권운동의 주된 방식은 이미 정해져 있는 규범에 비추어 현실을 비판하고 그 규범에 맞추라고 촉구하는 것이었다. 나 역시 인권은 세간의 평가와 무관하게, 옳은 원칙에 따라 밀고 나가면 되는 것이라 생각해왔다. 그런데 어느새 대중의 ‘가슴과 마음’을 사로잡아야 인권을 유의미하게 확장시킬 수 있는 시대가 와버렸다. 인권에 무관심하거나 미온적인 대중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이제 인권운동은 정치인들만큼 여론에 일희일비할 정도는 아니라 해도,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전략적 커뮤니케이션을 고민해야만 하게 되었다. 전세계 인권운동에서도 우파 포퓰리즘의 시대에 일반 시민에게 어떻게 말을 걸고, 어떻게 인권을 설득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핫한 이슈가 되어 있다. 그중 대표적인 아이디어 몇가지를 소개한다.

우선 인권 이야기의 틀을 잘 짜야 한다. 가치에 근거한 서사를 만들려면 말을 거는 방식을 잘 궁리할 필요가 있다. 문제를 지적하는 것을 넘어 건설적인 해결책을 함께 제시하는 게 바람직하다. ‘이 분야에 예산 1억원만 쓰면 1천명의 시민에게 다음과 같은 도움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인권 이야기의 톤을 조절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개탄과 비판과 계도로만 인권을 이야기하면 자칫 거부감이나, ‘가르치려 든다’는 반발심을 부를 수 있다. 인권을 주장하는 사람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이 불완전한 존재임을 인정하면서 ‘우리 모두 이런 점을 성찰하고 바꿔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낮은 소리로 말을 거는 편이 대중에게 호소력이 있다고 한다.

어떤 집단을 명확한 개념어로 규정하면 가시성을 높일 수는 있지만, 사회적 거리를 더 멀게 할 우려도 있다. ‘노숙인’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거처할 곳이 마땅찮은 분들’이라고 표현하거나, ‘빈곤층’을 ‘삶의 기본 욕구를 충족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이웃들’이라고 묘사하는 편이 낫다.

과감한 역할 분담, 그리고 칸막이를 헐어 외연을 넓히는 것도 중요하다. 예를 들어 난민 이슈에 대해 난민운동가가 아닌 유명 연예인이 발언하는 것이 대중에게는 색다른 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 그 대신 난민인권단체는 평소에 여타 시민운동과 협력관계를 맺어놓는다. 예를 들어, 평상시에 어린이 관련 단체의 활동이나 캠페인에 힘을 보태놓으면 난민 아동을 지원할 필요가 생겼을 때 그 단체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품앗이 활동을 통해 인권단체가 마당발이 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되면 시민사회 전체에서도 인권운동이 융복합적으로 커질 수 있다.

인권운동은 당연히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위한 활동을 벌인다. 그런데 대중은 인권운동이 이런 활동에만 관심을 기울인다고 곡해하곤 한다. 인권운동이 특정 이슈에 몰두하고,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고통과 애환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소통장애가 쌓이면 인권운동과 일반 대중이 자칫 멀어질 수 있다.

그렇다면 대중이 일상적으로 겪는 사회모순에 대해 인권운동이 좀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면 어떨까. 예를 들어, 서민들의 등골을 휘게 만드는 주택 문제, 수많은 젊은이들을 나이 19살에 이미 ‘루저’처럼 기죽게 만드는 줄세우기식 대학입시 문제에 인권운동이 파격적으로 대처하는 걸 고려해볼 수도 있겠다. 부동산 투기와 학력·학벌 차별을 반인도적 범죄나 마찬가지인 중대 인권유린이라고 선언하고 개입한다면 대중이 인권운동을 가깝게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신경과학의 통찰을 인권에서 활용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고문에 대한 태도 차이를 조사한 연구에 따르면, 진보 성향의 사람은 고문 피해자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보수 성향의 사람은 고문의 신체적 측면에 더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면 전자에게는 개인의 사연에 초점을 맞춘 메시지가, 후자에게는 고문이 초래하는 끔찍한 고통과 후유증을 부각하는 메시지가 효과적일 것이다.

인권운동이 전략적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수용할 것인지, 수용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에 관해서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한가지는 분명하다. 인권운동이 인식하는 인권과, 대중이 인식하는 인권 사이에 상당한 격차가 생겼다는 사실이다. 이건 민주주의의 역설이자 현실이다. 인권운동 앞에 놓인 큰 도전이다.

경제정책이냐 인권정책이냐

최근 대통령이 경제계 원로들을 청와대에 초청하여 의견을 들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여러 쓴소리와 제안이 나왔다고 하는데 그중 정운찬 전 국무총리의 발언이 흥미로웠다. “소득주도성장 정책은 경제정책이라기보다 인권정책이다.” 경제계에서 인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보다 더 솔직하게 말하기도 어렵지 않을까 한다.

명망 있는 경제학자가 인권을 바라보는 시각이 이렇다면 대다수 경제인들이나 경제 전문가들의 시각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소득주도성장 정책에 대해 얼마든지 다양한 평가가 있을 수 있다. 다만 경제와 인권 간의 관계에 있어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어떤 일반적인 경향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소득주도성장 정책은 경제정책이라기보다 인권정책이다”라는 언술에 깔려 있는 기본전제는 다음과 같은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인권정책은 대체로 이상주의적이고 대중영합적이며 비현실적이기 쉽다. 반면 경제정책은 현실적 타당성과 경제 패러다임의 내적 논리에 따라 추진해야 한다. 그러므로 경제정책을 인권정책과 같은 식으로 다루어선 안 되고, 두가지를 명확히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요컨대 꿈꾸는 아마추어 식으로 경제를 운용하지 말라는 주문인 셈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많은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소득주도성장 정책을 딱히 인권정책이라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일단 그렇다고 가정해보자. 인권정책과 비슷한 경제정책을 취할 수밖에 없었던 사회경제적 배경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던가.

어째서 불평등과 중산층 몰락과 청년실업과 주거난과 출산율이 이렇게까지 심각한 지경에 처하게 되었는가. 국가인권위가 2016년 실시한 대규모 국민인권의식 조사에서 왜 응답자 중 절대다수가 사회보장 확대에 찬성하고, 비정규직 차별에 반대했으며, 어째서 최저시급 인상에 찬성한 비율이 무려 91.4%나 나왔던가. 국민이 원하는 대로 인권정책처럼 경제정책을 추진한 게 잘못이었다면, 그 이전의 수많은 (인권정책과 달랐던) 경제정책들은 사람들을 얼마나 살 만하게 만들어 주었던가.

더 나아가, 경제정책과 인권정책을 완전히 가르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개인과 기업의 경제적 자유를 위해서 공정한 질서가 필요하고, 지속가능한 시장경제를 위해서 인간의 존엄성이 보장되는 근로조건이 마련되어야 하고, 경제성장은 그 자체로 목표가 아니라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위한 수단이라고 대한민국 헌법에도 나와 있지 않은가.

경제가 대다수 인간 삶의 기본 조건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이 평범한 진리가 최근 다시 부각된 데에는 지난 한 세대 동안 전세계와 한국을 지배해온 터보 자본주의(신자유주의)의 심각한 폐해가 있었다. 심지어 다보스 경제포럼조차 전지구적 불평등의 악화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다국적 기업들의 약탈적 사업 관행과 천문학적인 투기성 경제 방식을 통제하기 위해 유엔이 주도한 글로벌 콤팩트가 2000년에 나왔다. 아무리 돈벌이가 중요하더라도 환경과 노동과 인권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윤리경영 원칙이었다.

글로벌 콤팩트의 취지를 확장하여 유엔 인권이사회는 2008년 유엔사무총장 특별대표인 존 러기 교수가 마련한 ‘기업과 인권을 위한 프레임’을 채택했고, 2011년에는 ‘기업과 인권 이행지침’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경제정책과 인권정책을 연결시키려는 중요한 국제적 노력의 결실이었다. 지침은 세개의 개념적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국가는 제3자에 의한 인권침해로부터 사람들의 인권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 제3자는 초국적기업을 비롯한 모든 사업체를 말하며, 의무는 법적·정치적 책무를 뜻한다. 둘째, 기업은 인권을 ‘존중’할 책임이 있다. 기업이 사업을 벌일 때 소비자를 비롯한 모든 관계당사자들의 권리를 직접 침해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고, 사업활동으로 부정적 영향이 초래되지 않도록 적절한 주의를 다하여 계획을 수립하고 시행할 책임이 있다. 셋째, 권리가 침해된 사람은 구제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국가는 기업 활동의 피해자가 사법, 행정, 입법 조처를 통해 구제를 받을 수 있도록 보호할 의무가 있고, 기업은 사업활동으로 권리침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과 보상 책임을 져야 한다. 삼성반도체 노동자 산재 사건의 전말을 ‘기업과 인권 이행지침’의 틀에 적용시켜 보면 지침의 구도를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

유엔은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NAP)과 구분되는 별도의 <기업과 인권 NAP를 위한 안내서>를 2015년에 펴냈다. 유엔 사회권규약위원회는 2017년의 <일반논평> 24호에서 기업과 인권의 문제를 중요하게 다뤘고, 같은 해 함부르크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의 공동선언문에서도 ‘지속가능한 글로벌 공급망’에 관한 언급이 포함됐다.

이처럼 지난 몇년 사이 기업과 인권, 인권경영 등의 키워드가 국제사회에서 뜨거운 이슈로 등장했고 각국 정부도 비상한 관심을 표하고 있다. 그런데도 인권정책과 경제정책을 분리해서 파악한다면 세계적 동향으로부터 한참 뒤떨어진 인식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한국에서도 기업과 인권에 관한 논의가 점점 더 주목을 받고 있다. ‘제2차 국가인권정책 기본계획: 2012~2016’에 기업과 인권 항목이 처음으로 포함되었고, ‘제3차 국가인권정책 기본계획: 2018~2022’에서는 기업과 인권을 독립된 장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이에 따르면, 기업에 인권 존중 책임이 있다는 점을 교육·홍보하고, 사회적 책임을 고려한 공공조달, 생활제품 안전 확보, 기업의 양성평등 경영 지원, 해외진출 기업의 현지노동자 인권침해 방지, 가습기 살균제 피해 구제, 소비자 친화적 리콜제도 등이 기업 활동의 바탕을 이루어야 한다.

서울교통공사, 한국가스공사, 국민연금공단, 부산항만공사, 전남개발공사, 천안시설공단 등 여러 공기업에서 ‘기업과 인권 이행 지침’을 연구하고 현장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민간 기업체에서도 이행지침의 실행을 위해 전문가 자문을 구하는 경우가 늘었다고 한다. 첫술에 배부를 순 없겠지만 바람직한 변화라고 생각한다.

기업 활동을 넘어 정부의 경제정책 자체를 인권원칙에 부합되는 방향으로 입안하고 실행해야 한다는 과감한 제안도 나오기 시작했다. 지난 3월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논의된 ‘경제개혁 정책의 인권영향평가에 관한 이행지침’이 대표적인 시도다. 이번 제안은 그 어떤 경제정책도 사람들의 기본권, 특히 여성, 빈곤층, 사회 취약계층의 인권을 침해해선 안 된다고 하는 원칙을 지켜야 하며, 그 원칙을 고수하는 것이 국가의 존립 목적이자 국제사회에 대한 약속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자유경제에서의 ‘자유’는 인권을 보호하고 신장한다는 조건 내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빈곤과 생계 문제로 시름시름 고통받는 현실을 인권학자들은 ‘슬로모션의 폭력’ 또는 ‘백만개 상처에 의한 죽음’이라 부른다. 인권영향평가가 제도화되어 기획재정부와 국가인권위 직원들이 이런 사회적 고통을 경감할 방안을 놓고 일상적으로 머리를 맞댈 때가 머잖아 올 것이다. 경제정책과 인권정책은 다르다는 생각이 오래전의 에피소드로 회자될 날을 기다린다.

깨끗한 공기를 호흡할 권리

지난 주말 미세먼지와 관련해서 중요한 보도가 나왔다. 국제호흡기학회에서 대기오염과 건강에 관한 기존의 연구들을 집대성하여 검토한 결과를 발표했다. 요지는 미세먼지의 영향이 여태까지 생각해온 것보다 훨씬 더 치명적이어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신체의 모든 기관을 망가뜨린다는 것이다.

얼마 전 미세먼지가 심한 날 하루 종일 걸어 다닌 적이 있다. 조금 걱정을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부터 천식에 몸살 기운으로 열흘 가까이 앓았고 지금도 잔기침을 하며 글을 쓰고 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다음 대선에서 미세먼지를 해결하는 이가 대통령이 될 거라고 말하는 사람이 늘었다.

미세먼지는 대기오염 또는 공기오염이라는 큰 틀에서 파악해야 한다. 공기오염을 모든 사람의 인권 문제로 바라보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인류의 90퍼센트 이상이 세계보건기구가 권장하는 기준치보다 나쁜 공기를 마시며 살고 있다고 한다. 유엔인권이사회는 최근 ‘청정공기호흡권’에 관해 환경권 특별보고관이 집필한 보고서를 심의하면서 공기오염을 중요한 인권 이슈로 다루기 시작했다. ‘깨끗한 공기를 누릴 권리’, 이 얼마나 직관적으로 와닿는 말인가.

인간의 삶은 숨으로 시작해 숨으로 끝난다. 세상에 나오자마자 첫 숨을 들이쉬고 한평생을 살다가 마지막 숨을 내쉬고 세상과 하직하는 게 우리들 인생이다. 이렇게 보면 깨끗한 공기는 근본적 차원에서 인간 존재의 핵심인 ‘숨’의 원천이 되는 질료다.

공기오염이 유발하는 인권침해는 세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우선 생명권의 문제가 있다. 공기오염 탓에 전세계적으로 매년 700만명에서 900만명의 조기 사망자가 발생한다. 모든 사망자 9명 중 1명이 나쁜 공기 때문에 자기 명대로 살지 못하는 셈이다. 흡연에 의한 사망자보다 많고, 에이즈와 결핵과 말라리아를 합친 사망자보다도 많다. 이 수치에는 동남아의 200만명, 중국과 한국을 포함한 서태평양 지역의 200만명, 아프리카의 100만명이 포함된다.

두번째로 건강권 문제가 있다. 오염된 공기, 특히 초미세먼지는 혈류를 타고 온몸의 장기로, 심지어 뇌 속으로까지 파고든다. 호흡기, 심장, 폐암, 뇌졸중, 백내장, 발육부전, 당뇨, 비만, 피부병, 방광암, 장암, 골형성부전, 임신장애와 유산, 신생아 폐질환, 저체중, 정신질환 등 수많은 병이 미세먼지와 관련이 있다. 베이징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대기오염을 줄였더니 그 시기에 태어난 아이들 체중이 그 이전 시기보다 양호했다는 연구도 있다.

마지막으로, 오염된 공기는 사람들에게 차별적인 영향을 끼친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미세먼지를 경험하지만 모든 사람이 똑같이 고생하는 건 아니다. 공기오염 때문에 특히 고통받는 취약집단이 있다. 장시간 실외공기에 노출되는 노동자, 정보가 부족하거나 오염된 실내공기를 마실 수밖에 없는 빈곤층, 이미 만성질환을 가진 사람들이 더 고통을 받는다.

여성, 특히 개발도상국에서 실내 취사와 난방을 전담하는 여성의 건강이 나빠지기 쉽다. 얼마 전 코이카(한국국제협력단)와 비정부기구인 한국제이티에스(JTS)가 방글라데시에 있는 로힝야 난민촌에 가스버너 10만개를 전달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실내 공기오염으로 고통받는 저개발국의 일반적 사정과 연관해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환기가 잘 안 되는 비닐하우스에서 생활하는 이주노동자들도 오염된 공기의 피해자가 된다. 아동은 생리적으로 공해에 특히 민감하고 유아기에 심신이 쇠약해지면 평생 그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경우가 많다. 저개발국 노인들의 건강수명이 선진국 노인들의 그것에 비해 훨씬 짧다는 연구보고도 있다.

초국경적 불평등도 발생한다. 부자나라에 공산품을 수출하기 위해 방글라데시, 인도, 파키스탄 같은 나라는 대규모의 공기오염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중국의 수출산업 종사자 중 공기오염에 의한 조기 사망자가 10만명 정도라고 한다. 무역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생명권의 불평등한 교환이다.

공기오염과 기후변화가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우선 공기오염과 기후변화의 원인이 서로 겹치는 경우가 많다. 화력발전, 철강, 제조산업, 내연기관 등이 대표적이다. 온실가스 자체가 공기오염의 한 형태라 할 수 있다. 공기오염이 단기적이고 지역적이라면, 기후변화는 장기적이고 전 지구적인 범위를 가졌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기후변화와 공기오염 간의 연관성을 대중들에게 인지시키지 못해 기후변화 초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반성이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작금의 미세먼지 사태에 대해 시민들이 느끼는 우려와 경각심은 차라리 잘된 일일 수도 있다. 기후변화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획기적으로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미세먼지 대책과 기후변화 대책은 둘 다 함께 추진할 수 있으므로 ‘일석이조의 정책효과’가 있다. 최근 설립된 미세먼지 해결을 위한 국가기후환경회의도 기후변화 대처까지 염두에 둔 방향으로 정책을 설계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흔히 미세먼지에 있어 중국 탓을 하곤 한다. 물론 중국 책임이 어느 정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청정공기호흡권은 개인, 개별 가구, 로컬, 국가, 대륙, 국제적 차원에서의 행동이 다 함께 보조를 맞춰야 풀릴 수 있는 다차원적 문제임을 잊어선 안 된다. 인권이사회가 미세먼지 대책에 있어 이성적이고 체계적이고 숙의적인 접근을 강조하는 이유도 이런 점을 상기시키기 위해서다.

공기오염을 해결하기 위해 국가는 절차적 의무와 실질적 의무를 모두 충족해야 한다. 절차적 의무에는 시민교육과 홍보, 정보 제공, 환경정책에 있어서의 시민참여 독려와 촉진 등이 있다.

국가의 실질적 의무에는 국가가 수행해야 할 통상적 인권의무의 구도가 그대로 적용된다. 우선 국가나 공기업이 공기를 직접 오염시키는 행동을 해선 안 된다.(존중의무) 그리고 기업 등 제3자에 의한 공기오염에 대해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보호의무) 예를 들어 대기오염 물질의 측정치를 조작했다는 혐의를 받는 삼성전자, 지에스칼텍스, 금호석유화학, 롯데케미칼, 엘지화학, 한화케미칼에 대해서는 철저한 책임추궁이 있어야 한다.

유엔인권이사회는 청정공기호흡권을 보장하기 위해 국가가 7가지 단계의 조치를 취하라고 권고한다. ①공기질과 공기질이 건강에 미치는 효과를 모니터링한다. ②오염 배출원을 찾아 그것의 경중을 평가한다. ③공기질에 관한 정보를 발표하고 홍보함에 있어 시민의 정보 접근권을 존중한다. ④대기질을 개선하기 위한 입법, 규제, 기준 설정 등을 추진해야 한다. ⑤공기질 개선을 위한 행동계획을 마련하고, 특히 취약계층을 위해 효과적인 보호조치를 도입해야 한다. ⑥공기질 개선을 위한 조치들을 이행·강제해야 한다. ⑦지속적 평가 및 수정을 통해 정책 사이클을 선순환시켜야 한다.

깨끗한 공기는 인간 기본권을 위한 공공재이자 삶의 은유적 상징과도 같은 신비로운 것이다. 카테리나 스토이코바 클레머는 이렇게 말한다. “시를 쓰려면/ 나비가 팔랑거리는/ 공기를 잡아야 한다.” 탁한 공기 속에선 생명도 시도 나오기 어렵지 않은가.

시민사회는 진화한다

지난달 말에 내가 재직하는 대학의 엔지오대학원에서 설립 20주년을 기념하는 조촐한 행사가 열렸다. 이 말은 한국에서 시민사회와 관련하여 대학 차원의 교육을 시작한 지 20년이 됐다는 뜻이다. 그동안 한국 전체가 바뀐 것만큼이나 시민사회도 상전벽해로 변했다.

요즘이야 시민사회라는 말이 자연스럽지만 1990년대까지만 해도 전혀 그렇지 않았다. 처해 있는 정치적·경제적·사회적 환경과 내부 구조, 그리고 영향력의 발휘에 있어 상당히 취약했다. 시민사회가 오늘날 이 정도라도 당연시될 수 있도록 성장하기 위해선 많은 선배 운동가들과 깨어 있는 시민들의 땀과 피와 헌신이 켜켜이 쌓여야 했다. 역사를 쓰는 심정으로 이 점을 기록으로 남긴다.

최근 서울에서 개최된 한 국제 인권 콘퍼런스에서 기조강연자로 나선 루이 빅퍼드 박사는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어떤 사회가 진정으로 변화하려면 단단하고 영향력 있는 시민사회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시민사회가 얼마나 자리 잡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로서 ‘협치’(거버넌스) 개념의 정착을 들 수 있다. 거버넌스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국가 역할이 축소되면서 그 공백을 대체하기 위해 민간영역과 시민사회가 정부 및 국제기구와 파트너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세계은행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된 말이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협치’는 그보다 더 적극적이고 건설적인 실천개념으로 확장되어 사용되고 있다.

시민사회론이 대세를 이루기 전만 해도 변혁이나 해방, 민주화 등이 사회운동에서 ‘마스터 프레임’을 이루었다. 그러나 지금은 인권이 전체 시민운동의 마스터 프레임으로 등장했다. 어떤 영역에서건 소외되고 배제된 사람들의 자력화가 사회변화의 핵심이라고 모두가 동의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오늘날의 시민운동가들은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찾아주는 시민 자력화 전문가들이라 할 수 있다.

시민사회가 크게 발전하면서 넘어야 할 언덕도 달라졌다. 누누이 지적되었지만, 조직이 상설화되고 사회적으로 수용도가 높아지면서 제도화에 따르는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다. 공공기관과의 협치가 시민사회의 ‘운동성’을 약화시키는 측면은 없는지, 외부 후원이나 프로젝트 사업에 의존하는 비중이 늘면서 회원들과의 유대보다 재정 지원자에 대한 책임성에 더 신경을 써야 하는 경우가 없는지 성찰해야 하게끔 되었다.

후속세대 활동가들의 재생산도 큰 과제가 되었다. 시민사회 운동을 일종의 당위적이고 무보수적인 헌신으로 여겼던 기성세대 운동가들은 젊은 활동가들의 생각의 결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다.

사회학 연구자 김민성의 연구에 따르면 시민단체에 지원하는 젊은 활동가들은 열악한 근무환경에 대해 충분히 숙지한 상태에서 활동을 시작한다. 그러나 이들이 기대하는 바는 명확하다. 자기가 일하는 시민단체가 공익적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기를 원하고, 학생운동의 경험을 발전적으로 살릴 수 있었으면 한다. 거기에 더해 재미있고 활동적인 업무를 했으면 하는 바람도 강하다. 시민단체는 공조직이나 일반 기업과 달리 유연하고 수평적인 조직 형태일 것이라는 기대도 있다.

그러나 이런 소망은 비공식적인 안내나 추천이 작용하는 채용 과정에서부터 깨지기 시작한다. 업무도 단순한 과업만 부여받고 오랫동안 보조 구실만 해야 할 때도 많다. 프로젝트형 업무가 많다 보니 늘 일에 치여 지낼 수밖에 없다. 심층면접에서 어느 활동가는 이렇게 지적한다. “저는 이 시민단체에서 일을 굉장히 많이 줄여야 된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너무 중구난방으로 일을 많이 하고 있고… 다 같이 이렇게 힘들 필요도 없는 것 같아요.”

수직적인 운영방식에 실망도 생긴다. 위계적으로 의사결정이 이루어지거나 개별 활동가의 결정권한이 너무 적다고 느낀다. 선배 활동가나 단체 회원들과의 소통도 많이 부족해서 시민운동이 관성적으로 이루어지기 쉽다. 개인의 역량에만 의존해서 일을 해야 하고 장기적으로 유의미하게 이루어지는 활동가 교육이 너무나 적다고 한다.

시민단체가 직접 추동하지 않는 시민사회의 외부 환경 변화도 시민운동에 큰 도전이 되고 있다. 상설조직으로 만들어져 있는 시민단체 입장에서는, 단체가 아닌 대중의 자발적, 간헐적, 유동적, 폭발적 직접행동형 움직임은 영감의 원천임과 동시에 큰 생각거리를 안겨준다. 예를 들어 촛불집회처럼 시민들의 조직되지 않은 정동적 표출에 대해 비정부기구가 어떤 방식으로 만나야 할지 깊은 논의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한국의 시민사회가 특히 유념해야 할 중기적 과제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우선 입법과 제도개선에 치중했던 역사의 긍정적 토대 위에서 개혁의 실질적 이행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것을 인권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권리주장에서 권리효과로 목표를 전환한다는 말이 된다.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무조건 제도화만을 요구하는 방식을 넘어 실질적 이행을 더욱 따져야 하는 것이다.

시민사회 내의 극단적 이념 갈등도 고질적 상태로 고착화되지 않도록 심각하게 고민을 해야 한다. 원래 시민사회는 공공성, 젠더평등, 민주주의, 인권, 평화, 생태, 보편 등의 가치를 추구하는 공간으로 구상되었다. 세계적으로도 그렇고 한국에서도 그랬다.

그런데 최근 몇년 사이 시민단체의 외양을 하고 활동양식도 그와 비슷하지만 시민사회의 통상적 가치를 부정하는 이상한 흐름이 생겼다. 심지어 시민사회의 전통적 주장들을 생경한 목적을 위해 뒤집어 사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도발적 반정명(反正名)의 시대에 개별 영역을 떠나 시민사회 전체가 함께해야 할 일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협치를 실질적으로 진전시키려면 공조직은 시민단체를, 시민운동가는 공조직을 더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신규 공무원들의 임용 전 기본교육 과정에 협치를 반드시 포함하고, 공무원들의 보수교육에 시민사회와의 협력 내용을 반드시 넣어야 한다. 지방자치단체 공무원과 시민운동가들이 서로 교차해서 파견근무를 할 수 있는 제도를 시행해보면 어떨까.

시민사회 활동가들의 공익성을 인정하여 이들에게 정책적, 사회적 지원을 하는 방안도 강구해볼 만하다. 예를 들어, 역량강화교육 기회를 주고 새로운 정보기술(IT)의 공익적 활용을 위한 전문 트레이닝을 실시하는 것도 고려해보자.

21세기형 애드버커시(주창활동)나 캠페인을 전개할 수 있도록 활동 맥락과 권력의 분석, 이해당사자들의 지도 그리기, 영향력 행사 전술, 캠페인 과정의 불확실성에 대처하는 법, 원칙과 타협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의 판단 기준에 대해 토론할 기회가 있어야 한다.

1987년 민주화를 이룬 뒤 우리는 많은 것을 경험했고 많은 것을 배웠다. 그중 가장 중요한 교훈은 민주적 정부도 물론 중요하지만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차원에서의 변화는 자각한 민주시민들로부터, 아래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거시적이고 시스템 자체와 관계있는 문제들에 대해 새로운 비전의 대안을 시민들과 함께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가 이 시대에 시민사회에 기대하는 모습일 것이다.

스포츠권을 위한 첫걸음

간단한 퀴즈 몇개를 풀어보자. 건강을 위할 겸 환경도 위할 겸 해서 되도록 걸어 다니고 계단을 이용하는 것, 스포츠인가 아닌가. 장애인들이 무용과 몸동작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행위, 스포츠인가 아닌가. 노인주간보호센터에서 웃음율동 테라피에 참여하는 것, 스포츠인가 아닌가. 세이브더칠드런에서 어린이의 놀권리 회복을 위한 캠페인을 벌이는 것, 스포츠와 관련이 있는가 없는가.

이 모두 넓은 뜻에서 스포츠에 속한다고 보는 게 21세기의 정답에 가깝다. 스포츠가 아무리 좋다 한들 그렇게까지 범위를 넓히는 건 좀 지나치지 않은가 하고 생각한다면, 세계적인 추세를 따라잡지 못한 것이다. 유엔에 따르면 스포츠는 육체적 건강과 정신적 안녕과 사회적 상호작용에 도움이 되는 모든 형태의 신체활동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놀이, 레크리에이션, 생활 스포츠와 경쟁 스포츠, 원주민들의 전통 유희활동 등이 다 포함된다.

스포츠는 그 자체로서 중요한 목적이 되는 활동이다. 나는 몇년 전 <한겨레> 지면에 기고한 ‘올림픽, 스포츠, 인권’이라는 글에서 스포츠의 내재적 가치와 스포츠 인권에 대하여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그러나 잊을 만하면 터져 나오는 스포츠계의 일탈, 잠깐 주목과 망각이 되풀이되는 사이클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대대적인 인식변화와 어떤 발본적인 조치가 있어야만 하겠다.

스포츠의 내적 가치는 유네스코가 1978년에 선포한 ‘체육 교육과 스포츠 헌장’에 선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모든 사람의 기본인권으로서의 체육 교육과 스포츠 활동을 규정한 1조를 보라. “모든 사람은 자신의 필수적 인성 계발에 반드시 필요한 체육 교육과 스포츠에 대해 근본적 접근권을 가진다. 교육 시스템 내에서 그리고 사회생활의 모든 측면에서 체육 교육과 스포츠를 통하여 신체적, 지성적, 도덕적 역량을 발전시킬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

지금까지 말한 바가 주로 스포츠 자체의 중요성이라면, 스포츠가 인간 사회에 공헌하는 혜택과 선익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논할 때가 되었다. 국제사회는 오래전부터 스포츠의 이러한 측면에도 관심을 기울여왔다. 어쩌면 이런 논점에 주목하는 편이 스포츠에 관한 우리의 상상력을 넓히는 데 더욱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우선,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스포츠가 건강에 미치는 선기능을 상기해야 한다. 심혈관 질병, 암, 당뇨 등 비감염성 질환의 예방과 완화에 운동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현대인들의 신체활동 저하는 세계적인 보건 문제가 되어 있다. 의료비와 건강보험 재정에 끼치는 영향이 천문학적 규모이기 때문이다. 몇년 전 캐나다에서 실시한 연구에 따르면 운동 부족 탓에 발생한 건강 관련 손실액이 무려 6조원을 상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스포츠 활동에 1달러를 투자하면 의료비를 3.2달러 이상 절약할 수 있다는 연구도 있다.

둘째, 스포츠가 교육에 미치는 순기능을 살펴보면 눈이 번쩍 떠질 정도다. 따지고 보면 모든 교과목 중 ‘몸’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과목은 체육밖에 없다. 몸을 사용해야 하는 스포츠는 자기 몸과 타인의 몸도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는 태도를 길러준다. 이렇게 되면 자해와 자살 충동 그리고 각종 중독성 활동뿐 아니라 타인에 대한 공격성과 폭력까지 줄일 수 있다고 한다.

유엔은 스포츠를 통해 체득할 수 있는 능력과 가치를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협동정신, 페어플레이, 의사소통, 나눔, 규칙 존중, 자존감과 자중, 문제 해결, 신뢰, 이해력, 정직성, 타인과의 유대, 리더십, 관용, 상대방 존중, 회복탄력성, 노력의 가치, 팀워크, 이기는 법과 지는 법, 자신감, 규율, 올바른 경쟁 등이 그것이다.

이런 장점들을 생각하면 왜 스포츠가 사람들에게 ‘평생학교’ 역할을 한다는 건지 이해가 간다. 11살에서 17살 사이 청소년들의 운동 부족 비율을 비교한 결과 한국이 120개국 중 꼴찌를 차지했다는 조사도 있다. 나는 머리만 쓰도록 강요당하고 몸을 쓸 기회가 적은, 통제적이고 앉아서 생활하는 상황이 청소년들의 스마트폰 집착, 가상현실에의 탐닉, 전혀 새로운 유형의 행동반응 등에 어느 정도 책임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상상을 하곤 한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면으로 그것에 대응하기보다 간접적이고 에두른 방식의 접근이 훨씬 더 효과가 있고 갈등을 덜 유발한다는 사실이 근년 들어 많이 밝혀지고 있다. 정공법적인 대처는 그 의도와는 달리 또 다른 갈등과 반발을 불러올 개연성이 높기 때문이다. 스포츠가 사회문제의 만병통치약은 아닐지라도 많은 경우에 ‘뜻밖의’ 묘약이 될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셋째, 현재 국제사회가 추진하고 있는 지속가능 발전 목표의 달성을 위해서도 스포츠가 할 수 있는 몫이 적지 않다. 스포츠를 통한 경제 발전, 특히 지역경제 발전의 효과를 고려할 필요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스포츠용품 제조 활동, 스포츠 관련 일자리 창출, 스포츠 인프라 건설 등을 적극적으로 찾아보라고 유엔은 권고한다.

마지막으로 스포츠가 평화에 기여하는 바에 더욱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지난해 평창 동계올림픽이 남북한의 새로운 관계 설정에 상징적인 이정표가 되었던 광경이 생생하지 않은가. 난민들의 정착과 난민 청소년들의 심리적 안정 및 교육 동기 유발에도 스포츠가 큰 역할을 한다. 스포츠를 통해 소년병들의 치유와 사회통합을 촉진한 사례도 보고되고 있다.

스포츠의 이런 효과들은 결국 스포츠가 인간의 보편적 의사소통을 위한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증거다. 그런데 이런 수준에서까지 스포츠의 의미를 찾으려면 우리가 스포츠를 대하는 인식과 태도를 질적으로 완전히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선수들의 ‘몸값’ 운운하는 천박한 상업주의적 가치관, 그 어떤 원칙도 메달 따기라는 지상목표 앞에 서면 한없이 작아지는 현실을 혁파하려면 특단의 조치가 있어야 한다.

우리가 스포츠권 또는 ‘스포츠 및 놀이 할 권리’라는 대원칙에 동의한다면 국가에 대해 그런 원칙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주지시켜야 한다. 최근 스포츠혁신위원회가 스포츠기본법의 제정을 제안한 것은 그런 점에서 매우 구체적이고 진전된 발상이다.

이 제안에 따르면 스포츠기본법은 스포츠 패러다임의 전환 및 확장을 선도하는 정책 수립의 필요성을 제시하고, 학교스포츠, 생활(평생)스포츠, 엘리트스포츠 및 아동·청소년, 여성, 장애인, 노인, 이주민 등 모두의 스포츠를 위한 국가 차원의 전략과 정책 수립, 그리고 신체활동 증진을 위해 구체적으로 필요한 정부의 시책을 명시하도록 되어 있다.

어떤 학생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보육원 출신 형들 그리고 탈북 새터민 형들과 함께 자전거로 동해안을 주파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질적인 두 그룹이 잘 어울릴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긴 여정을 의외로 유쾌하게 끝낼 수 있었다는 거다. 스포츠의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입증한 예화에서 나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스포츠기본법이 만들어져 젊은이들의 이런 멋진 시도들이 과감하게 지원받을 수 있는 날을 기다린다.

바이마르 공화국 백년의 교훈

3·1운동과 임시정부 백주년인 올해, 대일관계가 최악의 상태에 놓였다. 대다수 전문가들이 이번 사태가 강제징용이라는 ‘인권’ 문제로 촉발되었다는 데에 동의한다. 노동권을 규정한 세계인권선언 23조는 전쟁 때 발생한 강제노동의 폐해를 반성하며 만들어졌다.

한일협정으로 개인청구권이 소멸됐는가 하는 문제는 법절차에 초점을 둔 쟁점이다. 더 크게 보면, 이차대전 후 인권은 시간상으로는 과거사로, 공간상으로는 전세계로, 내용상으로는 사회권과 연대권 영역으로 확대·순환되면서 발전해왔다. 따라서 이번 사태의 본질은 인간 자유의 세계사적 확장을 수용하느냐, 구시대적 아집을 고수하느냐 사이의 충돌에서 찾아야 한다.

이런 배경하에서 과거사를 대하는 아베 정부의 태도와 독일의 태도를 비교한 논의가 많이 나왔다. 독일이 일본에 비해 적극적으로 과거사 청산에 임해온 건 사실이다. 그런데 그것이 단순히 주변국과 피해집단에 대한 대외적 행동만으로 가능했던 건 아니다. 대내적으로 끊임없이 민주주의를 성찰, 실행하는 노력, 그리고 격렬한 논쟁을 극복하면서 확보한 동력을 바탕으로 대외적 행동에 나설 수 있었다.

바르샤바의 유대인 게토 봉기 기념탑 앞에서 브란트 총리가 무릎을 꿇고 사죄했던 광경을 많은 이가 기억한다. 그러나 당시 독일 국내의 보수 여론이 반발했던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홀로코스트를 둘러싼 역사 논쟁도 심했다. 처음부터 모든 독일인이 한목소리로 반성한 게 아니었다. 반세기 넘게 민주주의를 교육하고 삶의 모든 차원에서 민주주의를 실천하면서 새로운 세대를 꾸준히 양성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독일 역시 올해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이정표의 해다. 이번 달에 바이마르공화국 헌법 제정 100주년이 되고, 11월에는 베를린장벽 붕괴 30주년을 맞는다. 현재 베를린의 독일역사박물관에서 바이마르공화국을 주제로 민주주의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바이마르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이상주의적 헌법과 무질서한 현실, 무책임한 정쟁정치, 최악의 경제상황, 외교적 사면초가 등 부정적 서사가 주를 이룬다. 하지만 전시회는 그런 통념을 뒤집는다. 비록 실패하긴 했어도 민주주의 수준이 높았고, 그 정신만큼은 오늘의 현실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본다.

특별전은 ‘바이마르―민주주의의 본질과 가치’라는 제목을 달고 전세계적으로 자유민주주의가 더 이상 당연시되지 못하는 현실에 경종을 울린다. 민주정치의 역사가 오래된 나라들도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다고 지적한다. 현시점에서 독일인들이 느끼는 민감한 정치의식을 반영한 전시회다.

1919년의 총선에서 사상 최초로 여성과 군인이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득표율 37.9%의 사회민주당, 19.7%의 중도당, 18.5%의 중도좌파당이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극우와 극좌를 제외한 진보파와 범민주파의 승리였다.

그해 8월11일에 선포된 헌법은 유럽 최고 수준의 기본권과 자유를 규정했고 전세계에 영향을 주었다. “모든 독일 국민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라는 109조에 의해 인간 평등이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헌법적 기본권으로 격상되었다. 사회국가 원칙이 수립되었고, 실업급여보험이 제도화되어 민주주의의 실질화가 진전되었다. 도시계획, 공공주택, 도시텃밭도 이때 시작된 개혁이었다.

바이마르공화국을 흔히 “민주주의자 없는 민주주의”라고 조롱하지만 실제로는 모든 분야와 차원에서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실험하고 지키려 했다. 예를 들어, 1922년 발터 라테나우 외무장관이 암살당하자 전 국민이 항의에 나설 정도였다. 베를린에서 열린 공화국 수호 결의 대회에 나온 수십만 민주시민들의 사진은 전시회를 통틀어 제일 감동적인 자료다.

그런데도 왜 공화국이 실패했던가. 반동적인 수구 언론들이 인종주의, 반유대주의, 민족주의적 혐오를 선동했다. 극우와 극좌가 공화국을 시도 때도 없이 흔들었다. 공화국보호법이 제정됐지만 사법부는 이 법을 주로 극좌파 처벌에만 적용했다. 대공황으로 경제가 직격탄을 맞았고 실업률, 인플레가 하늘을 찌르자 반공화파들은 마치 이 모든 고통이 정부만의 책임인 양 공격을 해댔다. 프랑스혁명이 모든 근대혁명의 원형이 된 것처럼, 바이마르는 모든 실패한 민주체제의 원형이 되어 버렸다.

전시회의 제목을 그냥 지은 게 아니었다. 헌법학자였던 한스 켈젠이 1920년에 쓴 동명의 저서에서 따온 것이다. 전시회의 마지막 순서에 이 책의 한 구절이 전시되어 있다. 켈젠은 요한복음 18장에서 빌라도 총독이 예수를 심문하던 이야기를 화두로 삼는다. 빌라도가 예수를 풀어주려 했지만 군중이 도둑 바라바를 원한다고 요구하자 하는 수 없이 그 뜻을 따랐다는 일화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다수결’에 의해 신의 아들을 사형에 처한 것이다.

재판의 전말을 기술한 후 켈젠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확신에 찬 정치적 신념가라면 이 사례를 민주주의 지지가 아니라 민주주의 반대 논거로 이용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주장을 받아들일 순 있겠지만,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그 정도로 확고하게 자기주장을 하려면 자신의 정치적 진리―필요하다면 정치적 권력으로 강제해야 하는―가 옳다는 것을 신의 아들만큼이나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전시회의 결론이다.

민주주의의 본질이 가치의 다원성과 상대성을 인정하는 바탕에서 서로 타협하는 데에 있다는 켈젠의 테제는 자유민주주의의 고전적 정의에 가깝다. 타협은 더러운 말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패스워드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켈젠의 결론은 오늘날 상황에 비추어 너무 점잖고 이상적이다.

첫째, 민주주의 체제 내의 정당한 반대자가 아니라, 민주주의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해 민주제도를 악용하려는 세력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들과 타협할 수 있을까. 타협가능한 민주주의의 경쟁자와, 타협불가능한 민주주의의 적을 어떻게 판별할 것인가. 그것에 실패해서 나치 집권의 대참사가 발생하지 않았던가.

둘째, 사람들로 하여금 극단적 주장, 가짜 뉴스, 혐오·증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조건을 개선하는 데 사활을 걸어야 한다. 차별과 희생양 만들기와 극혐적 표현에 사람들이 쉽게 유혹될 만큼 경제사회적 바탕이 악화되어 있다면 민주주의는 공염불에 빠지기 쉽다.

7월20일은 군부에 의한 히틀러 암살 기도 75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메르켈 총리는 기념식에서 모든 시민이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극우파의 준동에 반대할 ‘의무’가 있다고 호소했다. 최근 신나치에 의한 정치인 암살이 발생할 정도로 독일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정부 추산으로 2만4천명의 극우파가 있고, 그중 1만3천명이 폭력 성향을 띠고 있다고 한다.

이 지점에 독일의 고민이 있다. 민주주의 실천과 역사 청산이 모범적이라고 인정받는 성공담 속에 또 다른 문제의 씨앗이 싹트고 있는 역설을 어떻게 볼 것인가. 여기서 우리가 취할 교훈은 명백하다. 민주주의는 쉼 없이 달려야 하는 자전거다. 그리고 페달을 계속 밟기 위해선 각 세대마다 새로운 도덕성과 사회경제적 근육이 필요하다.

기후위기 시대의 실존적 인권

지붕이 무너져 내린다고 치자. 이 문제를 서까래에만, 대들보에만, 기둥에만 해결하라고 할 순 없다. 모두가 나서야 한다. 기후위기도 마찬가지다. 이 문제를 환경부, 환경운동가, 기후전문가에게만 맡길 순 없다. 그러기에는 상황이 너무 절박하다. 인권, 언론, 도시, 방재, 여성, 장애, 노동, 청소년, 보건, 종교, 교육 등 모든 분야가 팔을 걷어붙여야 한다.

한편에선 아직도 기후위기를 부인, 축소, 낙관하는 목소리가 있다. 기온을 3.5도 수준에서 ‘최적화’하여 관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경제학자도 있다. 다른 한편으론 기후위기가 인류문명의 종말로 이어질 거라고 단언하는 소리도 나온다. 어느 쪽이 옳은가. 전자는 명백히 틀렸고 후자는 뉘앙스 있는 추가설명이 필요하다.

기후위기의 본질은 불확실성에 있다. 나빠질 것은 분명한데 인류가 한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전대미문의 사태여서 얼마나 악화될지, 어떤 식으로 악화될지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

확실한 점도 있다. 삶이 팍팍하고 버거운 사람들은 기후위기로 몇 배나 더 힘든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기후위기는 현존하는 불평등과 사회모순을 더 첨예하게 악화시키는 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도시 쪽방 주민, 홀몸 노인, 환기 불량 주택 거주자, 저소득층, 기초생활수급자, 에너지 빈곤층, 야외 건설·산업 노동자, 비닐하우스 이주노동자, 노약자, 만성질환자, 심신 쇠약자, 정신질환자, 상습 침수지역 및 녹지 협소 지역 주민, 재정자립도가 낮은 지역 주민들은 마치 남아공 흑인들이 인종분리정책의 희생이 되었던 것처럼 ‘기후위기 인간차별’의 직격탄을 맞을 것이다.

하루 종일 냉방시설에서 냉방시설로 이어지는 동선을 따라 살 수 있는 극소수와, 다양하게 폭염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나머지로 이루어진 새로운 기후계급이 탄생할지도 모른다. 기후위기를 경험하는 불평등의 정도를 따지는 ‘기후 지니계수’ 같은 지표가 나올 날이 머지않았다.

‘문명의 종말’이라는 표현에 주목해야 한다. 인류가 적어도 이번 세기 내에 물리적으로 종말을 맞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이 뒤집히는 상태, 통상적 사회질서가 크게 무너지고 법치의 근본이 흔들리는 ‘기후 아노미’가 곧 문명의 붕괴다. 현재 대학생이 쉰살이 되기 전에 홉스가 말했던 아수라장 같은 세상이 올 수도 있다.

기후위기가 누구 책임인가. 여러 겹이 쌓여 있는 구조다. 첫째 겹은 현대적 삶의 양식 자체다. 자동차를 타고 에어컨을 돌리고 육식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 조금씩 책임이 있다. 그러나 이런 점만 얘기하면 서로 다른 책임의 비중이 사라진다.

둘째 겹은 산업혁명 및 그것과 동반된 식민지배였다. 서구 제국들은 천연자원과 면화와 설탕과 차와 고무를 위해 인도, 멕시코, 브라질, 앙골라, 모잠비크, 카나리아, 케이프베르데, 마데이라, 서인도, 가이아나, 말라야, 인도네시아 등지의 산림과 자연을 철저히 유린했다. 비서구권의 지속가능성을 황폐화하면서 서구로 부를 이전시킨 것이다. 일제 강점기엔 어땠을까.

셋째 겹은 화석연료의 위험이 과학적으로 입증된 후에도 수십년 동안 사실을 부인하고 왜곡하면서 수익에만 몰두해온 엑손모빌과 같은 에너지 악덕기업이 있다. 석탄산업, 발전산업도 여기에 해당한다.

넷째 겹은 지정학적 갈등이다. 최근 발생한 브라질의 열대우림 화재가 전형적인 사례다. 미-중 무역갈등으로 돼지고기 최대 생산국이자 소비국인 중국의 돈육 가격이 크게 올랐다. 그런데 중국은 돼지 사료용 대두를 주로 수입한다. 브라질은 미-중 갈등을 틈타 대중국 대두 수출을 늘려 미국을 이미 추월하였다. 그 와중에 우파 정부가 아마존 우림의 방화를 방치, 조장한 것이다. 이런 식의 국가경쟁으로 온실가스는 늘어만 간다.

이 네 겹의 밑바탕에는 국가들의 의무 불이행과 개인 차원의 심리가 깔려 있다. 지난주 발표된 ‘기후위기 선포를 촉구하는 지식인·연구자 선언문’에 이런 말이 나온다. “한국은 이산화탄소 배출량 세계 7위, 기후악당국가의 불명예를 안고 있으나 석탄화력 발전에 대한 투자는 여전히 많고 폐쇄 계획은 더디다.” 전세계가 기후비상사태를 선포하는데도 우리 정부의 위기감은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개인 차원의 심리도 인식전환을 가로막는 장애다. 인지적으로는 심각성을 이해하지만 정서적으로 실감하지 못하고 행동 변화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 아직도 기후나 환경을 이상주의적 성향을 지닌 일부 녹색 ‘마니아’들의 전유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의식의 칸막이를 당장 허물어야 한다.

보통 사람들은 기후위기에 대해 아무리 경고를 들어도 그 심각성을 잘 느끼지 못한다. 하루하루 살기에 바빠 그런 문제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다. 그러나 상황이 너무 심각해져서 사람들이 큰일 났다고 느낄 정도가 되면 이미 때는 늦었다. 이런 상황을 ‘기든스의 역설’이라고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역설적 상황을 지켜만 보고 있지 않은가.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들은 기후위기가 큰 딜레마라고 지적한다. 기후위기의 실상을 곧이곧대로 전달하면 사람들은 포기하거나 체념하고, 동기화된 망각기제를 발동시켜 끔찍한 메시지를 의식에서 밀어낸다. 하지만 전기 아끼기, 승용차 덜 타기 등 개인적인 실천 메시지만 전달하면 부담은 덜 되지만 기후위기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순 없다. 국가 정책의 변화로 이어지지 않으면 별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자기중심적 위험 인식도 문제다. ‘설마 내가 사는 동안은 괜찮겠지’ 하는 식의 현재편향과, 미래에 대한 과도한 가치폄하도 나타난다. 인간의 인지능력은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추세를 감지하기 어렵게 진화해왔다. 하루 이틀 날씨가 좋으면 ‘기후위기라 해도 별문제 없구나’ 하고 걱정을 내려놓는다. 인류세를 논할 정도로 인간이 스스로 지질적 힘으로 등극했지만 지질적 차원의 시간대로 사고하지 못하는 한계가 인간 종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인간의 이런 특성이 인권에도 결정적인 장애가 되었다. 눈앞의 직접적 차별에 대해서는 그렇게 감수성을 강조하면서도, 인류의 장기적 실존에 대한 감수성은 별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인권침해의 가해자를 찾는 데엔 열심이지만 가해 원인을 찾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세대간 기후정의를 이야기해야 한다. 피해가 가장 클 것으로 예상되는 세대, 다시 말해 가장 오래 살아갈 세대에게 정치적 발언권을 더 많이 부여해야 한다. 엉망이 된 지구를 후대에게 물려주는 기성세대에게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청소년들에게 투표권을 보장하는 게 백번 옳다. 이들이 요구하는 대로 어른들이 따라야 한다.

그것의 첫걸음이 오는 9월21일 기후위기 비상행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또한 지자체 행정과 모든 인권교육에도 기후위기를 포함시켜야 한다. 잘만 하면 기후위기가 전화위복이 될지도 모른다. 인간의 종적 한계를 초월하여 역사적 축적물로서, 사회적 산물로서의 자기존재를 자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기존의 인권을 넘어 새로운 인권담론이 출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생각한다.

한글날에 생각하는 문화와 생명

일제강점기에 소학교를 다녔던 선친께서 들려주신 일화다. 학교에서 조선말을 쓰지 못하게 했지만 아이들은 대화 중에 계속 조선말을 썼다. 어느 날 일본인 교장이 전교생을 모아 놓고 앞으로 조선말을 쓰다 걸리면 운동장 구석에서 큰 돌덩이를 들고 서 있는 벌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번은 아버지가 벌을 받게 되었는데 다른 아이가 잡혀 차례를 넘겨줄 때까지 울면서 계속 돌덩이를 들고 있어야 했다는 것이다. 억압적 언어정책이 우리 민족에게 얼마나 깊은 정신적 상흔을 남겼을까.

언어와 인권에 관하여 유명한 사례가 있다. 캐나다의 백인 지배자들은 원주민들을 주류 사회에 동화시키기 위해 19세기 초부터 기숙학교 시스템을 운영했다. 원주민 부족의 아이들을 부모로부터 강제로 떼어내 수백킬로 떨어진 기숙학교에 입교시켜 영어나 프랑스어, 서양 문화, 서양 종교를 가르친 것이다.

원주민 아이들은 분리 트라우마, 언어와 문화 박탈, 체벌, 열악한 생활환경 때문에 수천명이 죽었고 열등감, 자존감 상실, 정체성 혼란으로 평생 고통을 겪었다. 자기 부족의 언어를 썼다는 이유로 묶여 있거나 비누를 먹는 벌을 받기도 했다. 20세기 들어서 이런 학교들이 없어졌지만 이미 원주민들의 영혼은 상할 대로 상한 상태가 되었고, 이들의 과거사 문제는 지금까지도 캐나다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적, 사회적 문제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최근 들어 가톨릭과 개신교에서는 자기들이 기숙학교 운영에 관여했던 역사적 죄과를 통회한다는 발표를 했다. 연방정부 차원에서 배상금을 지급하였고 진실화해위원회가 진상 조사와 화해를 위한 정책적, 교육적 조처를 발표하였다. 원주민 아이들에게 모어 사용을 금지시킨 일이 ‘문화적 제노사이드’에 해당된다고 결정한 점은 특기할 만하다.

자신의 언어를 제약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상태를 인권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중반 이후부터이다. 원래 인권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누리는 개인적 권리라고 생각되었다. 그런 면에서 1세대 시민적·정치적 권리와 2세대 경제적·사회적 권리는 내용상 다르지만 개인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는 같다.

그런데 언어는 한 무리의 사람들 전체 정체성의 일부로서, 그리고 의사소통의 수단으로서 의미가 있다. 따라서 언어는 본질적으로 개인의 권리라기보다 집단의 권리라는 특징이 있다. 이 논리를 확장하면 어느 집단이 공유하는 역사, 제의, 생활양식, 의식주 등과 관련이 있는 인간의 모든 공통적 활동을 집단적 권리로 규정할 수 있다. 음악, 미술, 문학 등 예술 활동만이 아니라 인류학적 의미에서의 문화를 생각하면 된다.

어느 인구 집단이 자신의 문화와 삶의 양식을 지키며 살기 위해서는 그 집단이 몸담고 있는 대지와 산과 강과 숲, 그 안의 동식물, 자연환경, 생태, 경관 등의 조건이 유지되어야 한다. 이런 조건 역시 그 사람들이 공통으로 누릴 수 있어야 하는 집단권리이다. 얼핏 관련이 없어 보이는 문화와 환경이 인권에서 이런 식으로 동전의 양면처럼 연결된다.

이런 깨달음에서 뒤늦게 3세대 문화적·환경적 권리가 집단권으로 개념화되었다. 이처럼 3세대 인권이 비교적 최근에 등장하긴 했지만 그것은 상당히 긴 역사적 배경을 지니고 있다. 식민지배와 착취, 2차대전 이후 개발 시대의 도래, 그리고 신자유주의적 지구화가 그것이다.

이런 눈으로 보면 19세기 말부터 지금까지의 한국 역사가 문화적 정체성의 유지와 지속가능 발전을 고민한 3세대 인권투쟁의 파노라마로 그려질 수 있다. 언어라는 관점에서 보면, 중국어에 치였고, 일본어에 치였고, 지금은 영어에 치이고 있는, 그러나 끈질기게 생명을 잃지 않은 한국어의 인정투쟁, 언어권리의 수호 역사이기도 한 것이다.

최근 기후위기와 대멸종의 징후를 암울하게 전망하는 여러 논의가 나오고 있다. 그중에서도 언어와 환경의 연관성에 대한 연구가 이목을 끈다. 언어다양성과 생물다양성 사이에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소수언어가 사라지면 생물다양성도 크게 낮아진다는 사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인가. 여기에 인간 언어의 비밀이 숨어 있다.

모든 언어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들의 경험과 집단지성이 녹아 있는 인류 지혜의 백과사전이다. 단순한 팩트가 아닌 세상을 보는 관점과 가치관까지 언어 속에 들어 있다. 자연계를 대하는 태도 역시 언어에 나와 있다. 생물종의 명명, 동식물과 관계 맺는 표현, 절기를 구분하고 날씨에 맞춰 농사를 짓는 지식집약적 노동관 등이 언어의 형태로 표현되고 전승된다.

그런데 자연을 돈벌이 수단으로 착취하는 자본주의형 개발과 현대농업이 기승을 부리면서 전승지식의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과 생물다양성이 함께 사라지고 있다. 단일경작과 화학농법으로 인해 농업 섹터가 온실가스 배출의 3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토착어의 소멸과 생물다양성의 감소와 기후위기의 심화는 하나의 사이클로 돌아가는 악순환이다. 이제 언어권리는 한 집단이 자기 모어를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넘어, 인간 생존의 바로미터가 된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한국에 적용해보면 맨 먼저 제주도의 상황이 떠오른다. 유네스코는 2010년에 ‘위험에 처한 세계의 언어 현황’이라는 조사에서 세계 모든 언어의 건강도를 여섯 단계로 분류하였다. ①안전 ②취약 ③확실한 위험 상태 ④심각한 위험 상태 ⑤위중한 상태 ⑥소멸. 여기서 제주어는 소멸 직전의 ‘위중한 상태’라는 진단을 받았다. 제일 젊은 사용자가 조부모 또는 그 이상 세대이며 모어를 부분적으로 또는 간혹 사용하는 상태인데, 당시에 이미 70~75살의 세대 5천명에서 1만명 정도만 이 범주에 속한다고 했으니 지금은 더 줄었을 것이다.

나는 제주 강정 해군기지, 개발과 부동산 투기 광풍, 비자림 도로, 신공항 건립과 같은 소식을 들을 때마다 소멸의 길에 들어선 제주어를 함께 기억한다. 제주어의 운명이 제주의 문화, 제주의 환경, 제주도민의 생존권과 거대한 인과의 그물망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진리를 개발론자들은 알고 있을까. 개발을 부추기는 정치인들은 현세대와 자식세대와 환경에 얼마나 큰 죄를 짓고 있는지 인식하고 있을까.

강영봉 제주어연구소 이사장은 양전형 시인의 ‘사라오름’이라는 시를 인용하면서 제주어를 살리자고 호소한다. 가장 아름다운 토착어로 표현된 가장 격렬한 생명권 선언이다.

올해는 유엔이 정한 세계 토착어의 해이다. 토착어는 곧 생명이다. 한글날의 의미를 언어만이 아니라, 문화다양성과 만물의 공생을 지향하는 날로 넓혀 잡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경제개발에서 발전권으로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얼마 전 부마 민주항쟁과 10·26 사건 40주년을 지냈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천지개벽의 변화를 겪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도 거의 변하지 않은 점이 있다. 한국인에게 유전자처럼 박혀 있는 개발에 대한 관점이 그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박정희가 남긴 가장 심각한 역사적 유산인지도 모르겠다.

경제개발과 경제성장에 대한 극단적인 집착은 한국 국민 집단무의식의 출발점이고 원형이며 자동선택 옵션이 됐다. 분배정의에 대한 견해가 다를지라도, 정치적 지향이 다를지라도, 사회 현안에 대한 판단이 다를지라도, 개발과 성장만큼은 절대다수가 당연시하는 공통의 합의사항이다. 거의 신앙에 가깝다. 대규모 집회에 쏟아져 나온 인파를 보고 있으면 경제개발주의의 명암이 군중의 얼굴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개발지상주의의 주술에 씌어 살았다. 가난과 굶주림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 때문이었다 해도 그 방식이 대단히 강압적이고 예외적이었으며, 예상치 못한 수많은 결과를 초래했다.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정치 위기, 경제 위기, 교육 위기, 성평등 위기의 본질은 거의 대부분 경제개발과 성장주의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이 사실을 직시하지 않는 한 그 어떤 기술적인 해결책도 백약이 무효한 지경에 이르렀다.

바로 이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전문가의 처방이 아닌 평균인의 상식을, 묻지마식 개발이 아닌 숙고된 발전권을 찾아야 하게끔 되었다. 경제개발이 워낙 강고한 경로를 형성하면서 우리를 끌고 왔으므로 그것의 부작용을 조금이라도 줄이고, 회복력을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 없이는 한국 사회가 내파될 수도 있음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출산율 저하, 정치·경제 양극화, 사회통합의 해체는 그런 비극의 전조라 할 것이다.

과거 제3세계에서 큰 영향을 끼쳤던 개발주의는 제1세계의 케인스주의형 복지국가와 제2세계의 국가사회주의형 산업국가의 장점을 취하려 했던 국민경제 기획이었다. 한국과 일부 신흥공업국이 채택했던 발전국가는 제3세계 개발주의의 변형된 버전이었다. 그때의 개발주의는 성장과 근대화를 절대선으로 간주하고, 상황이 아무리 힘들어도 산업화 전략을 통해 미국과 서구의 생활수준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명제에 매달렸다.

하지만 개발이 문화 파괴와 환경 훼손과 지역공동체의 와해라고 하는 부작용을 낳기 시작하면서 1970년대 초에 ‘지속가능 발전’이라는 개념이 등장하였다. 이때 소개된 지속가능 발전은 기존의 개발 관념에 대한 반대급부의 성격이 강했다. 그 이전 세대에서 진리처럼 여겨지던 전통 개발모델, 즉 문화와 환경의 파괴를 무릅쓰고라도 경제개발을 포기할 순 없다는 식의 고정관념을 거부하는 사상이었다.

지속가능 발전 개념을 제시했던 사람들이 경제개발과 경제성장 자체를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이 거부한 것은 경제가 인간의 삶에서 최고의 가치라고 보는 경제 환원주의, 경제개발과 경제성장이 가치중립을 유지할 수 있다고 보는 실증주의적 관점, 전세계 모든 나라가 영미식 산업화 모델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서구중심주의였다. 이런 파괴적 삼각구도가 기존 개발 패러다임의 문화적 둔감성과 환경 파괴의 주요 원천이었으므로, 이와 같은 구도를 시정해 ‘좋은 발전’을 추구하면 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새롭게 등장한 지속가능 발전 개념은 인권에서 단비와 같은 지성적, 실천적 돌파구가 됐다. 이와 연관해서 김태균 교수는 개발학이라는 말 자체를 이제 ‘발전학’이라 불러야 한다고 지적한다. 아무튼 이때부터 전세계 인권운동은 그 이전과 크게 달라진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고 대안적 발전권 개념을 꾸준히 확장시켜 왔다.

첫째, 진정한 발전을 위해 의사결정에 있어 대중이 폭넓고 깊이 있게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을 권리로서 부여해야 한다. 예컨대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경제 논리로만 접근해서는 절대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발전권은 대중의 참여권리 및 민주주의 권리와 함께 가야 한다.

이런 식의 발전권을 주도적으로 확산시켜온 옥스팜은 빈곤 퇴치를 경제적인 관점으로만 봐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한 단체다. 여기서 이른바 ‘권리에 기반한 접근’이라는 유명한 개념이 나왔다. 옥스팜은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접근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안전한 작업조건, 자연자원을 활용할 능력, 적정한 생태적 실천을 전제로 한 ‘생계를 누릴 권리’, 깨끗한 물, 공중위생시설, 교육 등 ‘기본적 공공 서비스를 누릴 권리’, ‘재해로부터 안전할 권리’, 공적인 논의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고, 의사결정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경청의 대상이 될 권리’, 그리고 인종, 문화, 종교, 여성, 장애 여부와 상관없이 직업과 자원과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평등한 존재로 대우받을 권리’가 있어야 빈곤이 근절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여기서 마지막 두 항목인 경청받을 권리와 평등한 대우 권리는 경제적 권리가 아니라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속한다.

둘째, 여성과 문화와 환경을 하나로 통합한 패러다임이 발전권의 기본전제가 됐다. 빈곤 및 빈곤층의 사기 저하와 생활 침체를 시정하면서도 진보적 젠더관계를 옹호하고, 문화유산을 보호하며 환경을 보전하는 발전을 참된 발전으로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여성·문화·발전’(WCD) 패러다임이라 한다. 이 패러다임은 빈곤 퇴치라는 목표로부터 젠더 평등, 문화적 감수성, 환경 보전의 목표를 분리해서 취급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좋은 개발과 성장’에 대해서도 그 한계를 지적한다. 이런 논리를 연장하면 페미니즘이 기후위기 대응의 선봉에 서지 못할 이유가 없다.

셋째, 자유권, 사회권, 연대권의 구분을 넘어선 통합적 인권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개별 권리들도 결국은 다음과 같은 ‘인권 꾸러미’에 속하는 방식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고 보기 시작한 것이다. 즉, 기본욕구를 충족하고 공중보건과 양호한 의료를 통해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도록 해주는 권리 꾸러미, 권력과 고정관념의 부당한 간섭 없이 자신의 재능과 생각과 정체성을 키우고 꽃피울 수 있게 해주는 권리 꾸러미, 전쟁, 내전, 범죄 그리고 인종차별, 계급차별, 성차별, 동성애 혐오, 외국인 혐오와 관련된 구조적 폭력 없이 살 수 있게 해주는 권리 꾸러미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새로운 발전권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크다. 기존의 경제개발과 성장 논리로는 절대로 풀리지 않는 고질적 문제를 해결할 단초를 제공한다. 생활고를 비관한 가족의 극단적 선택, 탈북민의 아사, 심각한 노인 빈곤 문제를 보라. 이런 사람들에게 굴욕감 없이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발언권과, 여성주의 시각으로 문화와 환경을 지킬 권리와, 필요한 다면적 욕구를 패키지로 제공받을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 주었어야 했다. 신자유주의에서는 자본이동과 자유무역과 소비지상주의가 곧 발전을 뜻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어떻게 귀결되었는지 잘 안다. 이제 21세기형 발전권을 다시 불러올 시간이다.

사회학으로 인권을 봐야 할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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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82년생 김지영>이 평점 테러를 당했다고 한다. 같은 영화를 두고 여남 관객들 사이에 이렇게 호오가 갈리다니. 조국 사태를 놓고 86세대와 청년들 사이의 골이 깊어졌다는 분석도 많다. 전통 인권과 첨단 인권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도 크게 나뉜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어떤 사안을 놓고 찬반이 확연하게 갈릴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봐야 한다. 논쟁의 구도가 제대로 설정되었는가. 잘잘못만 따지는 논쟁인가 전체 맥락까지 보는 논쟁인가. 현재 이야기만 하는가 역사적인 차원도 말하는가. 한국 사회만의 문제인가 전지구적 자본주의 체제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문제인가.

이런 점을 파악하려면 사회(과)학적 시각이 필수다. 사람들이 내놓는 비전들 사이의 결정적 차이를 판별할 수 있기 때문이고, 죽느냐 사느냐를 다투는 문제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가한 소리로 들리는가. 예를 들어보자.

<누가 왜 기후변화를 부정하는가>라는 책으로 한국에 잘 알려진 기후학자 마이클 만 교수가 최근에 인터뷰를 했다. 기후위기를 부인하는 입장이 진화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과거처럼 기후변화가 없다는 식의 완강한 부인은 이제 거의 없어졌지만 훨씬 더 미묘하고 ‘설득력’ 있는 부인이 등장했다고 한다.

이런 식의 부인은 음식이나 교통수단의 선택, 에너지 절약 등 개인의 행동 변화에 초점을 맞춰 메시지를 전달하곤 한다. 이렇게 되면 문제가 많다. “그런 것은 일종의 회피 전략이기 때문이다. 선의의 사람들이 이런 함정에 빠지곤 한다.”

만 교수가 개인의 행동 변화를 반대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개개인의 변화는 기후위기의 대응에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개인의 행동 변화는 거시적 정책 변화에 ‘더하여’ 이루어져야 진정한 의미가 있다. 개인 변화가 정책 변화를 대체하기는 어렵다. 정치적으로 각성한 유권자, 화석연료 산업에 분노하는 시민, 환경윤리를 지키는 개인이 합해져야 한다.

기후위기 대처가 개인의 생활양식 변화에만 치우치게 되면 두가지 결정적 폐해가 생긴다. 개인적 선택과 미시적 올바름을 강조할수록 기후위기를 염려하는 ‘착한 사람들’ 사이에서 누가 더 옳으냐를 두고 설전이 벌어지기 쉽다. 또한 그런 식의 논쟁 때문에 정작 더 큰 문제인 석유, 발전 등 온실가스 발생을 규제해야 할 정치·정책적 압력이 분산된다.

“개인 변화를 강조하는 입장은 일종의 연성적 부인에 해당되고 그것은 여러 면에서 과거의 흑백식 부인보다 훨씬 치명적이다.” 마이클 만은 자연과학자지만 사회학적 관점을 아주 잘 이해하는 것 같다. 상당수 인권 논쟁도 기후위기 대응 비슷하게 개인 행동에 초점을 맞춰 벌어지곤 한다.

사회학적으로 인권을 볼 줄 아는 안목이 그래서 중요하다. 인권 문제를 권력의 원근법으로 파악할 수 있고, 핵심적인 문제와 부수적인 문제를 가릴 수 있으며, 인권을 총체적이고 전지구적이고 역사적인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첫째, 어떤 인권 문제가 왜 발생하게 되는지를 알 수 있다. 어떤 사회적 고통이 생기더라도 그것이 즉각 인권의 레이더에 잡히지는 않으며, 인권의 레이더에 잡히더라도 즉각 공적인 의제가 되지도 않는다. 시대적,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어떤 조건이 형성되어야 어떤 고통이 인권 문제라고 비로소 논쟁의 대상이 된다. 즉 사회적 고통은 역사 변화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산업혁명으로 도시 노동자라는 완전히 새로운 계층이 탄생하기 전에는 노동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만들어지기 어려웠다. 선거제도가 도입되기 전에는 투표권을 행사하기 위한 참정권 운동 자체가 금시초문인 것이었다.

둘째, 수많은 사회적 고통이 있는데 왜 어떤 문제는 인권으로 인정되거나 정책적 해결이 되는 데 반해, 왜 어떤 문제는 풀리기가 그렇게 어려운지를 설명할 수 있게 해준다. 고통받는 당사자, 인권운동단체, 인권 옹호가들이 어떻게 자원을 동원하면 될지, 어떤 식으로 프레임을 짜면 효과적일지, 인권을 원하는 쪽과 그것에 반대하는 쪽이 어떻게 대결, 타협, 합의하는지를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셋째, 사회학은 어떤 인권 문제가 어떤 입법이나 정책의 형태로 ‘해결’되었을 때 당사자들에게 유의미한 권력관계 변화가 왔는지를 평가할 수 있는 기준과 도구를 제공해준다. 어떤 피해자들에게 유리한 변화가 왔다 해도 그것이 미처 예상치 못했던 부작용을 낳거나 의도치 않게 누락된 대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사회적 고통이 나타나고 그것을 권리의 이름으로 요구하여 마침내 그것이 해결되었는가 싶었는데 또 다른 억압권력이 새로운 고통을 발생시키는 끊임없는 과정, 그것이 인권 역사의 영속적인 유형이다.

마지막으로, 사회학은 인권 감수성에 두 종류가 있음을 가르쳐준다. 당대의 불의한 현실에 대한 인권 감수성과 역사적 인권 발전에 대한 감수성이 그것이다. 시대별로 사람들이 유독 민감하게 느끼는 사회적 고통이 있다. 그것이 당대의 인권 감수성이다.

국왕의 자의적인 권력남용에 질렸던 시대에는 ‘법의 지배’만 확립되어도 정말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고 믿었다. 모든 책을 검열하던 시대에는 ‘출판의 자유’만 보장되어도 숨 쉬고 살겠다고 믿었다. 30여년 전 유월항쟁 때에는 ‘고문 없는 세상’과 ‘대통령 직선제’ 요구가 무척 많이 등장했다. 그것만 이루어지면 편한 세상이 올 줄 알았다.

그런데 시대별로 특유한 억압권력에 의해 인권 문제가 나타난다 하더라도 그 시대에 그 문제만 있다는 뜻은 아니다. 여러 문제가 존재하거나 잠복한 가운데 어떤 문제가 유난히 도드라지게 나타날 뿐이다.

이것을 인권 열차에 비유해보자. 인권 열차의 기관차와 각 차량은 각각의 인권 문제를 상징한다. 기관차에도 엔진이 있고 각 차량에도 엔진이 있다. 앞에서 끌고 뒤에서도 밀어주어야 움직이는 열차다. 시대별로 기관차의 선도 구실을 하는 인권이 달라진다. 예전에 ‘법의 지배’가 인권 열차의 기관차였다면 오늘날에는 ‘페미니즘’이 기관차가 되었다. 앞으로 시대가 바뀌면 또 다른 이슈가 기관차가 되어 인권 아이콘 구실을 할 것이다. 이런 점을 볼 줄 아는 눈이 인권의 역사적 감수성이다.

젊은 세대는 아무래도 눈앞의 문제에 민감한 당대적 감수성을 갖기 쉽다. 반면 기성세대는 경험에 근거한 역사적 감수성이 있다. 서로가 상대를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기성세대는 젊은 세대의 당대적 감수성이 없으면 인권이 새롭게 확장, 발전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젊은 세대는 자신의 당대적 감수성과 분노가 역사적 인권 발전이 축적된 덕분에, 그 토대 위에서 표출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사회학적 시각을 갖추면 자기 자신과 자기 세대의 인식적 특성조차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다.

나는 여성이든 남성이든, 젊은 세대든 86세대든, 고정관념이나 자기류의 확신을 넘어, 좀 더 사회학적인 시각으로 사회의 변화를 파악하면 좋겠다. 자칫 피상적인 논쟁에 빠지면 그것이 겉으로 아무리 치열해 보여도 막대한 기회비용을 발생시키면서 인권과 사회의 진정한 진보를 늦추기 때문이다.

인권에 대한 공격, 어떻게 막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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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한국인권학회가 동계 학술대회를 열었다. 한국 사회에서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인권에 대한 공격이 어떤 양상을 띠는지, 그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또 인권운동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다루었다. 인권 운동가들과 연구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중지를 짜낸 결과의 일부라도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싶다.

대다수 참석자가 인권에 대한 공세의 수위와 범위에 우려를 나타냈다. 그런 공격은 처음엔 인권조례를 반대하는 극소수의 목소리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인권조례뿐만 아니라 평등, 다양성 등의 가치를 담고 있는 각종 조례와 정책들 일체를 반대하는 흐름으로 이어지고 있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그런 공격을 받는 대표적 집단인 성소수자와 난민을 살펴보자. 누가, 어떤 식으로 이들을 공격하는가. 성소수자에 대해 개신교 쪽의 문제제기가 제일 강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실증 조사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주요 종교들 중 개신교가 성소수자에게 가장 부정적이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교인일수록 그런 경향이 강하다. 이들은 자신의 행동이 착한 의도에 기반한 ‘선도’ 행위이며 그것이 곧 ‘사랑’이라고 믿는다.

목회자를 잘 따르고 그 설교를 신뢰할수록 성소수자에 부정적인 견해를 지니고 있는 점도 특이했다. 한국의 개신교에서 목회자의 권위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점과도 연결된다. 기성 교회 성직자의 권위에 저항하면서 출발했던 개신교에서 프로테스탄트 본연의 가치가 전도되어 나타나고 있다.

개신교 중 어느 정도가 동성애를 거부하고 공격하는지, 그리고 이들을 어떻게 부르는 것이 맞는지에 대해서도 논의가 있었다. 확신을 품고 성소수자를 거부하는 이들은 소수에 불과하므로 이들을 ‘극우 개신교 근본주의 세력’이라 칭하는 것이 정확하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이것이 개신교 전반에 퍼져 있는 현상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극소수의 주장이 과잉대표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난민의 경우는 또 다르다. 한국인이 난민을 바라보는 이미지는 대략 세가지이다.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 열등한 존재, 가짜 불법 체류자. 이런 편견을 강하게 가진 사람들에게 난민의 특수한 처지를 설명하기도 어렵고 설명해봤자 잘 통하지도 않는다. 아마 한국에서 가장 근본적 차원에서 타자화된 집단이 난민일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난민에게 “돌아가라”는 말이 서슴없이 나온다. 난민에게는 이 말이 “돌아가 죽어라”로 들릴 것이다. 그래서 난민들은 가장 쉽게 희생양이 될 수 있는 처지에 놓여 있다. 이들에 대해 분노하는 일부 급진 그룹의 행태도 그렇게 설명될 수 있다. 진보적 일관성이 유독 난민에게만 해당되지 않을 때가 있다. 특히 난민이나 이주민이 한국민의 돈을 축낸다는 인식이 적지 않다. 우리도 어려운데 왜 이방인에게 혈세를 제공하는가 하고 화를 낸다.

난민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마스크를 끼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소리를 내곤 한다. 온라인 메시지와 오프라인 행동이 가장 신속하게 가장 폭넓게 확산되는 영역도 난민 반대 운동이다. 촛불혁명으로 민주시민 의식이 결정적으로 높아졌지만 그것이 국민국가에 국한된 배타적 시민권 의식으로 잘못 귀결될 위험도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한국인에게 ‘보편적’ 인권 의식이란 게 과연 얼마나 있는가 하는 날카로운 질문도 제기됐다. 국제사회에서 인권 선진국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어 하지만, 사실 그것은 국위 선양형 사고방식이고 인권을 도구적으로 활용하려는 동기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내재적 보편 의식이 부족한 상태에서 인권을 겉으로 보여주기 식의 담론으로 간주하는 것은 길게 보아 인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근래에 인권의 지형이 근본적으로 변했다는 견해도 나왔다. 과거의 인권투쟁이 ‘독재국가 대 인권 요구 시민’의 구도로 벌어졌다면, 오늘의 인권투쟁은 인권 자체에 대하여 해석을 달리하는 ‘시민 대 시민’의 구도로 전개되고 있다. 국가는 차별금지법 같은 것을 제정하려 하는데 민간사회의 일부가 이를 저지하고 있다. 실제로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조차 명목상으로나마 차별금지법의 불씨를 완전히 꺼뜨리지 않았는데 지금은 시민들 일각에서 차별금지법을 열렬히 반대하는 것이 이를 입증한다.

시민 개개인의 권리 의식은 대단히 높아졌지만 그런 의식이 인권의 보편적 차원으로 확대되지 못하는, 이른바 ‘개인화된 방식’의 인권이 확산되었다는 의견도 나왔다. “인권을 챙긴다”는 표현이 그런 경향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완전히 사유화된 형태로, 마치 자기에게 유리한 이권 챙기듯 인권을 챙겨야 한다는 인식이 많다면, 그것은 인권의 두 기둥―정당한 개인 권리와 이에 근거한 정치공동체의 평화로운 존립―이 무너질 지경이 된 위험한 상황이라고 진단할 수 있다.

민주제도를 악용하여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드는 행태에 대한 생생한 증언도 나왔다. 지역에 기반을 둔 의원들의 취약성을 이용해서 인권을 반대하는 세력이 큰 영향력을 발휘한 사례, 주민발의제도를 악용하여 인권조례를 없애기까지 한 사례가 보고되었다. 이런 세력들은 국가인권위원회법 자체가 한국 사회 모든 인권 담론의 출발점이므로 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할 만큼 대담해졌다. 중요한 실정법조차도 자기들 마음에 들지 않을 때엔 바꿔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소수자를 공격하는 집단의 언설은 민주사회에서 인정될 수 있는 여러 의견 중 하나의 의견이라 볼 수 없으므로 원칙적으로 배격되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반면 그런 사람들을 확신형의 소수 열성파와 다수의 소극적 동조자로 나눌 수 있기 때문에, 후자에게는 교육과 설득 노력을 포기해선 안 된다는 의견도 나왔다. 개신교 지도층의 중재자 역할을 기대하는 견해도 있었다.

지역사회에서 인권 거버넌스를 구축하려면 정치인이나 행정가만 바라보고 있을 수 없다는 현장의 목소리도 나왔다. 주민 스스로가 조직화하고 자력화해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토 세력의 눈치를 보기 쉬운 정치인들만 믿고 앉아 있을 순 없다는 말이었다.

지금까지 법과 규범을 동일시해온 관행을 넘어, 전 시민적 민주 규범을 세우는 것에 더욱 노력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구구절절 설명을 요하는 인권운동의 전통적 문법을 넘어서 쉽고 설득력 있고 직관적으로 와닿는 구호와 설명 자료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정부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인권정책을 미루곤 한다. 그러나 사회적 합의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사회적 합의를 추동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토론을 듣고 있자니 인권에 대한 공격의 근본 원인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리고 현재의 국면이 인권의 실질적인 퇴보를 의미하는지, 아니면 전체적으로는 인권이 개선되었지만 특정한 측면에서 인권이 극단적으로 정치화되어 갈등이 초래되는 복합적 상황인지가 궁금했다. 또한 이러한 백래시(사회 변화에 대한 반발)가 오히려 인권운동을 긴장시키고 재활성화하도록 자극하는 건 아닐까 하는, 약간의 희망적인 기대를 해보았다.

2020, 광주에서 글래스고까지 인권의 길을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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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새해 첫날이자 21세기 세번째 십년이 시작되는 날이다. 인권은 구체적인 사건과 매일 씨름하는 야전병원 같은 기능을 한다. 하지만 새해맞이 등산을 하듯 잠시나마 인권을 둘러싼 전체 지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무리 열심히 싸운다 해도 길을 잃고 헤맨다면 낭패가 아닐 수 없다. 인권에도 조감도가 필요한 이유다.

2020년은 인권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몇개의 이정표가 있는 해이다. 역사를 잘 기억하고 그 의미를 잘 해석해야 제대로 된 행동이 나올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올 한해는 인권을 전략적으로 고찰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그런 기회는 한국전쟁, 광주민주화운동, 유엔, 그리고 글래스고라는 네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한국전쟁 발발 70년이 되는 올해 우리는 인권의 관점에서 무엇을 기억하고 해석하며 또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 6·25가 남긴 유산을 생각해보자. 파괴, 살육, 상실, 분리, 원한, 적대, 공포와 같은 구체적인 흔적은 잘 알려져 있다. 나는 전쟁이 끝나고 몇년 뒤에 태어났지만 팔, 다리를 잃고 쇠갈고리를 한 상이군인들이 동네에서 걸식하러 다니던 광경을 일상적으로 보며 자랐다. 총성은 멎었지만 어수선하고 폭력적인 전쟁의 그림자가 오랫동안 드리워져 있던 시대였다.

그런 식의 생생한 상흔은 이제 더 이상 찾기 어렵다. 그러나 전쟁의 유산은 우리의 가치관, 사회 구성원리, 정치문화, 대인관계에 속속들이 배어 있다. 매사를 대결과 승패로 파악하고 해결하려는 관행이 대표적이다. 생존본능이 여전히 최우선이고, 그 어떤 원리원칙도 ‘먹고사는 문제’라고 주장되는 사안 앞에서는 무효가 되어버리는 경향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자본주의가 재산권 만능주의에 기대어 유난히 극성스러운 자본주의로 귀결된 것도 전쟁이 한몫을 했다고 봐야 한다. 그뿐인가, 전쟁의 학습효과로 세상 이치가 제로섬이라고 믿게 된 나라에 신자유주의가 들어오니 무한대의 경쟁과 배제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수용되었다. 이런 모습을 보면 다수 국민이 무의식의 차원에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전쟁이 국민의 원초적 심리를 비틀어놓았다면, 올해 40주년을 맞는 광주민주화운동은 국가 폭력성의 적나라한 실상을 각인시켜주었다. 그것에 더해, 엄연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증언하고 기록하는 일조차 불의한 권력이 개입될 때 어떻게 부인되고 왜곡될 수 있는지가 생생하게 드러났다.

5·18은 대규모 인권유린의 일차적 가해성과 사건 이후의 이차적 가해성이 정치적, 이념적으로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똑똑히 보여주는 교과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역사적 기억은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석판에 새겨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끝없는 토론과 의미 부여를 통해 현재의 무대에 계속 호출해내어야 하는 것임을 우리는 알게 되었다. 민주주의의 영원한 여정과도 같다.

광주민주화운동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중추 세력이라고 일컬어지는 86세대를 키운 모태가 되기도 했다. 솔직히 말해 사회의식을 조금이라도 품고 그 시대에 형성기를 보낸 사람 중 광주의 영향을 받지 않았던 이들이 몇이나 될까. 명백하고 현존하는 불의에 대해 감연히 맞서야 함을 체득했던 86세대의 집단적 에토스는 지금까지 한국 정치문화의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하지만 최근 86세대에 가해지는 젊은 세대의 싸늘한 눈길은 역사적 맥락의 반전이자, 전통적 인권담론에 대한 도전장이기도 하다.

올해는 유엔 창설 75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전세계적으로 유엔에 관한 각종 논의와 대화가 일년 내내 계속될 예정이다. 하지만 정작 유엔은 잔칫상을 받을 만한 형편이 못 된다. 2차대전 이후 어쨌든 국제질서의 근간이 되어온 다자주의와 국제협력을 통한 문제해결이라는 원칙이 크게 손상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가장 근본적인 성찰을 강요당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인권담론이다. 인권은 좋든 싫든 서구 주도의 자유주의적 국제정치 이념이라는 배경에 의존했던 측면이 강했는데 그러한 병풍 자체가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도처에서 유사권위주의와 포퓰리즘이 인권의 바탕을 갉아먹고 있는데다, 중국식 발전 체제가 강력한 반서구적 대항이념으로 등장하고 있는 현실도 기존의 인권에 유례없는 도전이 되고 있다.

유엔에서 오랫동안 구축해놓은 국제인권법 체제는 ‘법’이라는 명칭을 달고 있긴 하지만, ‘깊고 강한’ 구속력보다 ‘얕고 넓은’ 설득력으로써 인권을 실현하겠다는 취지로 발전해왔다. 이것은 인권담론을 일반적 차원에서 확산시키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적어도 사법적 의미에서의 문제 해결에 크게 기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왜 인권을 말로는 중요하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권고밖에 못 내리는가”라는 볼멘소리가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렇다고 국제형사재판소와 같이 ‘깊고 강한’ 접근이 늘 효과가 있는 것도 아니다. 유엔을 통한 인권 실행이 일종의 병목 지점에 빠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올해 11월9일부터 19일 사이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에서 기후협약 26차 당사국총회가 열린다. 이번 총회는 2015년 파리협약의 구체적 결정판이 될 것이다. 각국이 2030년 및 2050년의 온실가스 감축목표 및 관련 계획을 올해 말까지 마감하여 제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글래스고에서 합의가 마무리되지 못하면 1.5도(섭씨, 지구의 평균 온도 상승폭 제한 목표) 억제는 고사하고 방어선으로서의 2조차 지키지 못할 가능성이 커진다. 그랬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국제 교육계에서는 학교에서 기후변화를 독립 과목으로 가르쳐야 한다는 논의가 나올 정도인데 한국의 전반적인 의식 수준은 아직 초보 단계에 머물러 있다.

결론적으로 전쟁, 광주, 유엔, 기후, 이 네가지 열쇳말을 통해 올 한해의 인권을 조망할 때에 유념해야 할 점들이 있다. 첫째, 전쟁 방지와 국가폭력 청산과 다자주의적 국제협력은 앞으로도 여전히 인권에서 극히 중요한 토대로 인정될 것이다. 새로운 인권 이슈가 아무리 많이 제기된다고 해도 이런 기본을 잊어선 안 된다.

둘째, 다시 교착상태에 빠진 한반도에서 평화와 공존과 통일을 논할 때 인권이 설 자리가 어디인지를 잊어선 안 된다. 국제적으로 한반도의 인권 논의가 사라질 가능성은 거의 없고, 일각에서 주장하듯 평화와 인권이 꼭 긴장관계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 남북화해와 통일을 원하는 사람일수록 ‘적절한’ 방식으로 인권을 계속 모색해야 한다.

셋째, 권력과 정치를 강조했던 인권담론이 현재엔 생활세계와 개인의 사적 영역, 성과 정체성에 대한 관심으로 방향이 바뀐 상태다. 그러나 인권담론이 86세대 버전에서 2030세대 버전으로 교체됐다기보다는 확장됐다고 보는 게 정확할 것이다. 양자 간의 최적화를 찾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앞으로 수십년간 기후위기가 인권담론의 핵심적 맥락을 이루게 될 가능성이 크다. 재앙적 기후위기가 초래할 인권침해의 범위, 규모, 특성을 예상하여 인권담론을 서둘러 재구성, 재정렬할 필요가 있다. 진작에 추진했어야 할 과업이다.

빛바랠 수 없는 ‘아우슈비츠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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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월요일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해방’ 75주년이 된 날이었다. 2차대전 막바지였던 1945년에 소련군이 강제수용소에 진주했던 날을 기리기 위해 유엔은 1월27일을 국제 홀로코스트 추모일로 지정했었다. 특별히 올해엔 전세계 지도자들이 이스라엘의 공식 추모기관인 야드바솀이 주관한 행사에 참석하였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큰 국제행사였다고 한다.

러시아 대통령, 프랑스 대통령, 독일 대통령, 미국 부통령, 영국 왕세자 등 40여개국 정상이 모여 한목소리로 이런 비극이 절대로 되풀이되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정치인들이 으레 내놓는 수사라고 넘길 수도 있겠지만 요즘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보면 ‘이런 비극이 절대로 되풀이되어선 안 된다’는 말이 불길한 경고처럼 들리는 건 나만의 기우일까.

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 혐오와 증오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반유대주의, 반동성애, 반난민, 반장애인, 반여성의 언행이 차고 넘치는 이 시대에 홀로코스트를 추모하는 일은 우리에게 아주 특별한 각성의 계기를 제공한다.

지난달 영국 총선에서 노동당이 크게 졌던 패인 중 하나가 당내 반유대주의 경향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왔었다. 미국에선 백인우월주의자들이 공공연하게 네오나치를 표방하며 조직을 넓혀가고 있다. 유대교 회당을 공격하고 가정집을 습격해 살인을 저지른다. 며칠 전엔 ‘더 베이스’라는 극우단체의 활동 양상이 폭로되기도 했다.

독일에선 반유대주의가 이제 일상적 걱정거리가 됐을 정도다. 직접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야 ‘뭐 그렇게까지 심하진 않겠지’라고 할지 몰라도 막상 당사자가 되면 이야기가 전혀 달라진다. 반유대주의 언동을 일삼는 자들이 유대인만 표적으로 삼는 건 아니다. 나쁜 짓들은 유유상종으로 연결되어 있기 마련이다. 극우파들이 한꺼번에 발호하는 듯하다.

야드바솀의 추모행사는 과거사 청산의 어려움을 또다시 보여준 자리이기도 했다. 원래 참석하기로 했던 폴란드 대통령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는 연설 차례를 주면서 자기에겐 기회를 주지 않는다고 아예 불참을 선언해버렸다. 사실은 최근 러시아 쪽에서 2차대전 발발에 폴란드에도 일부 책임이 있다는 식의 역사관을 내세운 것이 결정적 이유가 되었다는 해석이 나온다. 과거사, 특히 전쟁이 얽힌 과거사를 정리하는 과제가 얼마나 풀기 어려운 매듭인지 상기하게 한다.

추모행사장의 모습을 다룬 기사 중에 유독 눈길을 끌었던 대목이 있다. 행사장 바깥에서 시위대가 ‘홀로코스트 파티를 집어치우라’는 펼침막을 내걸었다고 한다. 빈곤에 시달리는 고령의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을 정부가 제대로 돌보지 않는 것에 대한 항의였다.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았던 사람들이 그 뒤 어떤 삶을 살아야 했던가. 홀로코스트에 관한 방대한 연구주제 중 하나가 생존자들에 관한 것이다.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죽기 직전 상태에서 해방된 유대인 중 몇주 내로 사망한 사람이 수만명이나 되었다. 나머지 25만명은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지에 급히 마련된 이산민 캠프에 수용되었다. 되돌아갈 동포 공동체와 재산이 사라졌고 일가친척의 생사도 모르는 상태였다. 강제수용소에 갇히지 않았던 유대인들까지 합해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을 ‘살아남은 사람들’(셰리트 하플레타)이라고 불렀다. 실종된 이산가족을 찾아주는 적십자사의 국제심인서비스도 여기서 비롯되었다.

이산민 캠프에 지내던 사람들은 1950년대 초까지 모두 외국으로 이주를 했다. 그중 절반 이상이 이스라엘을 택했고 나머지는 미국 등으로 갔다. 마침내 죽음의 땅을 벗어나 새로운 곳으로 이주했다고 해서 이들의 삶이 곧바로 좋아진 것은 아니었다. 이른바 ‘생존자 증후군’이라는 고통을 오랫동안 겪어야 했다.

생존자들에게는 심신의 피폐, 외상 후 스트레스, 사회 부적응이 광범위하게 나타났다. 2세들에게도 정신질환이 일반인들보다 높은 비율로 발생했다. 연구에 따르면 생존자의 가족 내에서는 ‘무언의 커넥션’이 작동한다고 한다. 부모의 과거지사를 말하지도 않고 묻지도 않는 ―그러나 다들 짐작하는― 어떤 침묵의 불문율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스라엘로 간 생존자는 동포들 사이에서도 자기가 유럽에서 겪은 홀로코스트의 경험을 전하기가 어려웠다. 생존자가 어렵사리 이야기를 꺼내도 ‘순한 양처럼 그런 일을 당하고만 있었느냐’는 식의 눈총을 받기 쉬웠다. 나치에 부역을 하여 살아남은 것 아니냐는 의심까지 받았다. 1960년대 초 아이히만 재판이 있고 나서야 과거의 경험을 공개적으로 증언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조금씩 만들어졌다.

강의 시간에 이런 설명을 하면 요즘 학생들은 잘 이해를 하지 못한다. 피해를 당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피해자성’을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비교적 최근의 사고방식이다. 피해를 당한 사람의 고통은 그것이 아무리 분명한 ‘사실’이라 하더라도 세상 속에서 인정투쟁을 거치면서 힘들게 사회적 시민권을 획득하는 경우가 많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 강제징용 노동자, 민주화 희생자, 산재 피해자들도 이런 과정을 거쳐야 했다.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은 경제적으로도 어려웠다. 교육이나 직업훈련을 받을 형편이 안 되는 사람이 많았고 독일과의 배상·보상 과정에서 문제도 있었다. 1952년 독일은 이스라엘과 ‘룩셈부르크 합의’를 통해 일단 15억달러를 생존자 지원금으로 내놓았다. 이스라엘 정부는 그 돈을 공식 창구를 통해 받았는데 1953년 이전에 이스라엘로 이주해온 생존자들만 신청이 가능하다는 원칙을 세우는 바람에 늦게 도착한 생존자들은 재정 지원에서 제외되고 말았다.

그 뒤에는 ‘국제 유대인 피해청구 회의’라는 단체를 통해 독일의 추가기금을 피해자들에게 직접 지원해왔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기금의 전용, 투명성 논란이 일었다. 몇해 전 이스라엘의 복지부 장관이 홀로코스트 생존자 중 약 2만명이 그때까지 단 한푼의 배상금이나 복지 혜택도 받지 못했다고 밝힌 적이 있다. 복잡한 관료제, 무관심한 공무원들, 수많은 유관기관의 무능력이 겹쳐져 생존자들이 빈곤과 방임을 겪었다고 고백한 것이다.

현재 이스라엘에는 약 20만명의 생존자가 남아 있는데 그중 3분의 1 내지 4분의 1이 빈곤층이라는 보고도 있다.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이 같은 동포의 나라에서 받은 처우가 이 정도였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해방 이후 한국 사회에서도 이런 일이 얼마나 많이 일어났던가. 여기서 우리는 인권의 보편성이란 게 결국 인간 고통의 보편성과 동의어임을 깨닫게 된다.

마침 1월30일부터 3월22일까지 서울역사박물관이 이스라엘의 야드바솀과 함께 ‘아우슈비츠 앨범―아우슈비츠 지구의 한 장소’라는 특별전시회를 개최한다. 한국에서 접하기 어려운 희귀자료들이 공개될 예정이다. 인권을 세계사적인 지평에서 공부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어린이, 청소년, 학생들에게 인생을 바꿀 경험이 될 수도 있다. 특히 오는 4월 총선에서 처음으로 투표권을 행사할 18살 유권자들에게 ‘강추’하고 싶다. 민주-인권 시민의 역사의식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지구화와 기후변화는 바이러스의 여권

한국인들이 먼 나라 이스라엘에서 문전박대를 당했다.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는 요코하마에 묶여 있기 전인 지난해 12월부터 일본, 대만, 부산, 홍콩, 베트남, 싱가포르 등지를 순회하였다. 중국의 생산라인이 멈추는 바람에 애플사와 한국의 자동차, 관광, 유학교육 등이 큰 낭패를 겪었다.

현재 코로나19는 아시아, 러시아, 북미, 오스트레일리아, 중동,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등 전세계로 확산되는 추세다. 지구화의 빛과 그늘 중에서 그늘 부분을 극적으로 보여준 사례가 이번 사태다. 이제 세상 사람들은 모든 것을 서로에게 의존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 땅에서 기르고 만들 수 있는 것조차 수만리 바깥에서 굳이 생태 발자국을 찍으며 들여온다. 무역과 사람의 이동이 전대미문의 수준이다.

오늘의 젊은 세대는 믿기 어렵겠지만 한때 반신자유주의, 반지구화 운동이 국내외 사회운동의 선두주자였던 시절이 있었다. 지구화를 어쩔 수 없는 대세처럼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널리 퍼진 것이 10여년 된 것 같다. 하지만 이번 전염병은 모든 것이 연결되는 지구화가 내적으로 얼마나 종이로 쌓은 집과 같이 취약한지를 보여주었다. 돈과 사람만 세계로 통하는 것이 아니라 바이러스와 재난까지도 세계가 하나로 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절실히 체감한다.

지난주 ‘에너지와 청정공기 연구센터’(CREA)에서 최근 중국의 온실가스 배출치를 추산해서 발표했다.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로 생산부문의 에너지 수요, 교통운송 이용률, 건설업 활동 등이 모두 감소했다. 2020년 초의 2주 동안 온실가스 배출이 전년 같은 기간 대비 약 25%나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이 얼마나 세계의 공장 역할을 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미국과 유럽연합을 위시하여 많은 나라들이 얼마나 온실가스 배출을 중국으로 ‘외주’하고 있었는지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이런 현상은 남반구에서 아주 흔하게 벌어지고 있다. 그곳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저가 의류의 홍수 뒤에는 개발도상국 민중의 피착취와 고통이, 환경의 오염과 지속 불가능성이 도사리고 있다. 이 모든 것을 엮는 거대한 인과의 그물망을 읽으면서 이번 사태를 ‘맥락화’하는 시각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제 기온상승과 사람과 물건과 바이러스의 교환으로 하나가 된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전지구적 바이러스 네트워크’(GVN)라는 연구단체가 있다. 전세계 29개국 48개 연구소의 바이러스 전문 학자들이 활동하는 모임이다. 지난해 연례 총회에서 이들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해마다 약 3~4개의 새로운 바이러스가 발견되는데 이들 바이러스 대다수가 동물로부터 인간에게 직접 혹은 모기나 진드기 같은 매개체를 통해 전염된다고 한다. 그런데 세계적으로 인구가 늘어나고 초대형 밀집 도시들이 많아지면서 바이러스 전파 양상이 대단히 빨리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런 경향을 부추기는 배경에는 무역과 여행의 지구화 그리고 기후변화가 도사리고 있다고 했다. 네트워크는 “지구화와 기후변화는 바이러스의 여권”이라는 표현을 쓴다. 기후위기가 진행되는 한 앞으로 신종 바이러스가 계속 등장, 재등장을 반복할 것이라는 지적도 덧붙였다.

더 나아가 네트워크는 이제 인간의 건강과 동물의 건강과 생태계의 건강을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고 경고한다. 이들은 공중보건 전문가, 동물보건 전문가, 식물 전문가, 생태 전문가들이 힘을 합쳐 지구 혹성에 사는 생명 전체의 연계성 속에서 인간 건강을 바라보는 ‘하나의 건강’(One Health)을 지향하자고 호소한다.

사람-동물-생태계를 하나로 엮어 다층적이고 포괄적인 접근으로 건강을 추구하자는 주장은 세계보건기구를 비롯한 주요 기관에서 이미 논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명백히 지구화 및 기후변화와 연결시킨 발상은 주목할 만하다. 우리에게 더 넓은 맥락에서 사태를 볼 수 있게 해준다. 잊을 만하면 터져 나오는 대형 감염질환 사태가 앞으로 ‘뉴 노멀’(New Normal)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세계적 규모로 역병이 자주 창궐하면 인간의 생명권과 건강권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고, 경제사회적 토대를 뒤흔든다. 만일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발본적 차원의 성찰에 나서야 마땅하다. 알다시피 생명권과 건강권은 국가가 가용 자원을 최대한 동원하여 반드시 지켜야 할 핵심적 인권이자 국가의 존립 근거가 되는 의무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핵심 인권이 더 자주, 더 심각하게 위협받는다면 국가의 대응 방식도 혁명적으로 달라져야 한다. 의료전달체계와 역학 지원 시스템을 지구화와 기후변화의 조건하에서 완전히 새롭게 재구성해야 한다. 종합병원의 겉보기 시설이 마치 호텔같이 번쩍거린들 기본적 보건 인프라가 허술하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의료민영화다, 의료관광이다 하면서 돈벌이 타령만 했지 보건의료의 참된 목적 따위를 깊이 고민해보았던가.

몇년 전 전국 주요 대학들의 학교 소개 안내 책자를 비교해볼 기회가 있었다. 지구화, 세계화, 글로벌화, 국제화 등의 모토가 등장하지 않는 학교가 거의 없었다. 대학의 국제교류는 학문의 상호 자극을 위해 적극 권장할 일이다. 그런데 그런 용어를 사용하는 톤이 대단히 구호성이고 시류에 편승하는 것 같았고, 한마디로 들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번 바이러스 사태를 겪으며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 이유는 한국의 지구화 담론이 그것의 빛과 그림자를 감당할 만한 토대와 준비 없이 허술하고 성급하게 추진되었던 게 아닌가 하는 반성 때문이다.

기후변화도 마찬가지다. 바이러스 사태와 기후변화를 연결할 줄 아는 생태적 상상력이 인권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석탄, 석유를 펑펑 때는 식으로 사는 한, 감염병으로부터 안전할 조건의 창은 그만큼 닫히고, 그렇게 되는 한 사람들의 생명권과 건강권은 계속 나빠질 것이다. 이 지면을 통해 여러번 강조했지만 20세기적 시각과 안목, 전통적인 인권관으로는 앞으로 인권을 증진하기는커녕 최소한의 기본권조차 방어하지 못할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나무만 보지 말고 숲을 봐야 한다.

이번 바이러스 사태가 심각하긴 해도 머지않아 정점을 찍고 안정화될 것으로 기대한다. 지금 당장은 경황이 없지만 사태가 진정된 뒤에는 정말 장기적 안목으로 지구화의 결함 특히 '의료자원의 집중과 건강 불평등과 기후위기'가 생명권과 건강권에 미치는 악영향에 대처할 방도를 찾아보면 좋겠다. 총선에 임하기 전, 각 정당이 이런 문제에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는지 따져보는 것도 민주시민의 자세일 것이다.

젠더적 접근이 필요한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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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사태로 많은 나라에서 급한 불을 끄느라 정신이 없다. 미디어 보도 역시 눈앞의 사건 진행에 압도적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런 와중에도 젠더적 관점에 주의를 환기하는 목소리가 국제 인권운동과 보건계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무척 중요한데도 그동안 너무 경시되어온 시각이다.

젠더에 관한 지적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간호사, 간호조무사, 요양사, 간병인, 콜센터 근무자 중 여성이 많은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비정규직, 비공식 부문의 여성들은 경제가 멈추면 당장 막막해진다. 개학이 늦춰지면서 어린이 양육을 많이 책임지는 어머니들의 고충에 대해서도 논의가 있었다.

하지만 이번 사태를 젠더 시각에서 체계적으로, 분석적으로 다룬 논의는 드물다. 건강과 질병의 문제가 성별에 따라 차등적으로 발현된다는 사실은 기본에 속한다. 아주 분명하고 큰 차이가 난다.

몇 해 전 서아프리카에서 에볼라 사태가 발생했을 때의 일이다. 유독 여성들의 감염률이 높았다. 단순히 생물학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았다. 결국 사회문화적 젠더의 차이가 삶과 죽음을 가를 정도의 요인이었음이 밝혀졌다. 아픈 환자를 돌보는 사람들 중 여성이 월등히 많았기 때문이다.

보건의료 현장의 종사자 중에도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자신에게 영향을 줄 중요한 정책 결정에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도 없었다. 게다가 역병으로 세상이 흉흉해지고 경제조건이 나빠지면서 가정폭력이 늘었다. 재난 후 가족 내에서 성별에 근거한 폭력이 늘어나는 것은 세계 공통의 현상이다.

감염병이 도는 화급한 상황이라 해도 단순히 남녀 환자의 숫자만 체크해서는 안 된다. 질병의 1차 효과가 있고, 2차 효과가 있다. 1차 효과는 바이러스가 직접적으로 악영향을 주는 것이다. 감염자나 사망자 숫자에서 남녀 차이를 따지는 방식이다. 이런 정보는 쉽게 조사가 가능하다. 그러나 젠더에 관한 한 간접적인 2차 효과도 중요하다. 보건의료 노동력의 젠더화된 성격을 따져보면 이 점이 잘 드러난다.

세계적으로 보건의료 분야에는 다른 산업 분야보다 여성이 훨씬 더 많다. 종사자의 70% 이상이 여성이다. 바이러스 사태의 한복판에 있었던 중국 후베이성의 경우 그 비율이 무려 90%라고 한다. 우리는 전염병의 최일선에서 자기 목숨을 걸고 직무를 수행하는 여성 보건의료 종사자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학교가 문을 닫은 나라들, 예를 들어 한국, 중국, 홍콩, 이탈리아 등에서는 여성의 자녀양육 부담으로 인해 이미 경제적 여파, 고용, 사회적 기회의 불평등한 상실이 나타나고 있다. 필리핀, 인도네시아, 홍콩, 싱가포르 등 동남아시아에 많이 있는 지역 내 여성 이주노동자들이 코로나 사태로 해고, 송금 중단, 출입국 제한, 가족부양 문제 등으로 아주 딱한 상태에 놓이게 됐다고 한다.

의료와 직접 관련이 있는 격리조치 시에도 남녀 차이를 고려한 접근이 이루어졌는지 젠더 시각으로 봐야 한다. 여성의 특징을 고려한 환경과 서비스, 안전 조치가 제공되었는지 살펴야 하는 것이다. 평소에 공공의료를 줄였던 나라에서는 이번처럼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다른 쪽에서 병상, 의료진, 의료자원을 끌어올 수밖에 없다. 그럴 때 여성들의 일상적인 의료 욕구가 침해받으면서 젠더적 인권침해가 발생할 개연성이 높아진다. 5년 전 시에라리온에서 모성보호용 의료자원을 에볼라 대책으로 전용하는 바람에 산모 사망, 사산, 영아 사망 등 3600명의 추가 사망이 발생한 적도 있었다.

젠더적 시각이 적은데다 보건의료계에서 여성 리더들이 아직도 소수이기 때문에 문제가 잘 안 풀리기도 한다. 최근 ‘글로벌헬스 50/50’이라는 단체의 조사에 따르면 세계 보건의료 관련 기관의 대표급으로 남성이 70%를 차지한다고 한다. 이런 추세를 적극적으로 시정하지 않으면 몇십년이 지나도 현실이 변하지 않을 것이다.

여성은 사회적으로 돌봄 역할을 많이 수행하기 때문에 지역사회의 전염병 상황을 누구보다 더 빨리 포착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환자 발생이나 미묘한 변화의 조짐을 가장 먼저 알아차리는 사람은 전문가들이 아니라 지역사회의 일반 여성 시민들이다. 이렇게 본다면 젠더적 접근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것은 인구집단 모두에게 득이 되는 현명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코로나 사태가 아니었더라면 지금쯤 여성, 여성건강에 관한 이슈가 국내외에서 큰 화두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올해는 지속가능발전목표(SDG)를 시작한 지 5년, ‘유엔 여성’(UN Women)을 창설한 지 10년, 유엔 안보리에서 여성·평화·안보에 관한 획기적인 결의안이 나온 지 20년, 베이징 세계여성대회 선언이 나온 지 25년이 되는 해다. 특히 베이징 선언 이후 젠더 불평등이 여성건강에 미치는 영향이 아주 많이 밝혀진 상태이므로 그간의 성과 위에서 새로운 모색을 할 때가 되었다.

여성건강에 있어 젠더적 분석방법을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건강, 여성인권, 젠더 평등, 젠더 규범성, 젠더 편견, 여성 리더십 등의 차원을 따져보면서 젠더적 요소가 계급, 빈곤, 인종, 민족, 성적 지향 등 구조화된 사회 불평등 현실과 어떻게 교차하고 변형되고 심화되는가를 분석하는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한국의 여성건강에 대해 조금 알아보자. 2003년 보건복지부에서 한국 여성의 건강통계를 처음으로 발표한 적이 있다. 최근 2016년 질병관리본부에서 <수치로 보는 여성건강>을 펴내면서 기본 실태가 알려졌다. 여성 노인 중 빈곤한 사람이 거의 절반이라는 놀라운 사실도 그때 밝혀졌다.

19살에서 64살 사이 성인 여성 중 교육수준이 낮은 사람의 자가평가 건강수준이 아주 낮았고, 65살 이상 여성도 마찬가지였다. 65살 이상 여성으로서 교육수준이 낮으면 활동제한율이 매우 높게 나왔다. 여성의 교육수준이 중요한 변수로 확인된 것이다. 65살 이상 여성 중 고혈압과 당뇨의 유병률이 남성보다 높게 나왔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전체 범죄 중 성폭력과 폭행이 계속 증가하는 추세를 보인 것은 사회적으로 특히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여성의 불안장애와 우울증도 높게 나왔다. 우울의 이유로서 35살 미만은 취업과 육아를, 35~64살은 직무 스트레스와 신체기능 변화를, 65살 이상은 신체기능 약화와 사회경제적 불안을 꼽았다. 거의 모두 사회적 불평등과 연결되는 문제다.

여성건강권 활동가들은 모든 보건의료 이슈에 젠더적 분석을 기본값으로 적용하라고 요구한다. 지금이라도 코로나19 대처에서 젠더적 접근에 나서야 한다. 빠를수록 모든 사람이 혜택을 볼 것이다.

인권도 상전벽해가 가능할까

경제 논의를 단순한 정책의 차원을 넘어 경제사회적 권리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문제다.

좋은 정책과 인권 정책은 동의어가 아니다.

좋은 정책은 공공성이 높고 혜택이 최대 다수에게 돌아가는 착한 정책이긴 하다.

하지만 상황과 조건에 따라 변할 수 있고, 후퇴할 수도 있다.

인권 정책은 모든 사람이 권리로 요구할 수 있는 정책이다.

일단 확정되면 되돌리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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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총선 결과를 보도한 각 언론의 헤드라인을 보면서 든 생각은 이것이었다. 인권에서도 이런 상전벽해가 일어날 수 있을까. 기대의 높이와 결과의 높이가 이번에는 좀 가까워질 수 있을까.

일단 우려되는 것은 권력의 역설적 속성이다. 권력이 커질수록 책임도 커질 수밖에 없다. 잘하든 못하든 모든 책임을 몽땅 뒤집어써야 한다. 큰 권력은 다른 누구에게 핑계를 댈 수도 없다. 국민의 심리적 균형추도 한쪽으로 쏠리기 쉽다. 잘한 것은 당연시되고 못한 것은 극대화된다.

새 국회는 올 6월에 개원한다. 다음 대통령 선거는 2022년 3월에 열린다. 그러고 석달 뒤엔 지방선거가 예정되어 있다. 21대 국회는 두 행정부와 절반씩 병립하는데 현 정부 아래에서 제대로 일할 수 있는 기간은 길어야 1년 반 미만이다. 내년 가을 정기국회는 이미 대선의 격랑 속에 들어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짧은 1년 반 동안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무엇에 집중할지를 결정하는 안목 자체가 정치적 능력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우선순위를 정하는 가치판단이 곧 정치적 유능함이다. 유권자들의 심판을 받을 시점이 되어 2년 전에 왜 그런 문제에 시간을 허비했는가 후회하지 않기를 바란다.

한국 사회의 토대가 민주화 세대로 교체된 것이 이번 선거에서 극적으로 표출되었다는 해석이 나온다. 구조-인구학적 분석은 거시적인 전망으로 보아 설득력이 크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점이 있다. 민주정치의 패턴과 역사의 장기 추세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선거에서는 우회와 역류가 다반사로 일어난다. 당대 사람들의 삶의 경험과 특정한 국면에 좌우되기도 한다.

인권의 관점에서 앞으로 1년 반 동안 국회에 바라는 바가 있다. 인권을 위해서, 그리고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꼭 필요한 사항들이라고 믿는다.

우선 반드시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라고 권하고 싶다. 혐오·차별을 받는 사람들의 피해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모든 국민의 생명, 자유, 행복을 보장한다는 국가가 왜 필요한지를 입증하는 차원에서 실천해야 할 일이다. 같은 동료 인간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찍어서 괴롭히는 나쁜 인간들을 막을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왜 입법하지 않는가. 현 정부 출범 뒤 제일 먼저 했던 약속이 인권국가의 건설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행여 차별금지법이 득표에 도움이 안 되고 골치만 아픈 법이 될까봐 주저한다면 한번 더 숙고하기 바란다. 2년 뒤 대선에서 어떤 문제가 쟁점으로 부각될지 상상해보면 금방 답이 나온다. 현 시대상황이 그렇다. 정서적으로 인화성이 높은 인권 관련 이슈를 물고 늘어지는 후보가 반드시 등장한다. 그런 문제를 고리로 사회적, 종교적, 정치적 조직화를 꾀하는 반인권 세력이 이미 존재한다. 대권을 놓고 죽기 살기로 싸우는 마당에 이들이 금도를 지키겠는가.

이런 공세를 막느라 진을 빼다 보면 다른 주요 쟁점들을 깊게 토론할 공간이 줄어든다. 선거가 인권 논란에 ‘하이재킹’ 당할 수도 있다. 민주주의의 손실이고 비극이다. ‘전체 국민을 똑같이 보호하는 선치’와 ‘일부 국민을 기필코 배제하는 악치’ 중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를 국민에게 묻는 방식의 메시지를 일관되게, 지속적으로 발산해야 한다. 일찌감치 쐐기를 박아놓아야 한다. 대선 레이스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이미 때가 늦다. 이렇게 많은 의석을 갖고도 차별금지법을 못 만들면 ‘나중에’ 언제 만들 것인가.

차별금지법이 인권의 가시적 침해를 막는 대증요법이라면, 다수 대중의 삶의 조건을 개선하는 것은 원인 치료에 해당한다. 코로나 사태의 역학적 단계가 지나면 경제사회적 후폭풍이 본격적으로 불어닥칠 것이다. 이미 일시 휴직자가 사상 최대 규모로 늘었고 취업자는 크게 떨어졌다. 노인 일자리 사업이 연기되고 서비스업종에서 무급휴직이 증가했으며 고용률도 추락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국제적으로 한국의 경제 전망이 그나마 덜 나쁘다고 하지만 오십보백보일 것이다.

경제적으로 아주 어려울 때쯤 다음 대선이 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요즘 재난기본소득에 관한 논의가 많은데 정치적 상상력을 더 넓힐 필요가 있다. 두가지를 함께 고려하면 어떨까 싶다.

하나는 ‘창조적 파괴’를 이참에 과감하게 실천하는 것이다. 발상의 전환 정도가 아니라 아예 상자 바깥으로 나와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코로나 위기가 끝나도 기후위기는 여전히, 더 심각한 문제로 남는다. 총선 전에 여당은 그린뉴딜기본법을 제정하고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각 정당 연합체를 구성하겠다고 약속했었다. 이것과 기본소득을 연계하여 ‘녹색기본소득’을 구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강상구가 저술한 <걷기만 하면 돼>에 나오는 아이디어 등을 연결고리로 해서 정책연합을 추진할 정도의 파격적인 행보가 필요하다.

또 하나는 경제 논의를 단순한 정책의 차원을 넘어 경제사회적 권리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문제다. 좋은 정책과 인권 정책은 동의어가 아니다. 좋은 정책은 공공성이 높고 혜택이 최대 다수에게 돌아가는 착한 정책이긴 하다. 하지만 상황과 조건에 따라 변할 수 있고, 후퇴할 수도 있다. 인권 정책은 모든 사람이 권리로 요구할 수 있는 정책이다. 일단 확정되면 되돌리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기존질서가 해체되고 있는 현시점이 경제사회 정책의 권리화를 제도로 보장하기에 적기라 할 수 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1944년에 제안했던 ‘경제권리장전’이 떠오른다. 미국의 연방헌법 수정조항에 나오는 ‘권리장전’이 주로 시민적·정치적 권리를 다루었으므로 추가로 헌법 개정을 해서 제2권리장전을 더하자는 주장이었다. 구체적으로 노동, 의식주, 농민 소득 보장, 불공정 경쟁 금지, 의료, 사회보장, 교육 등을 인권으로 못박아 영속성을 부여하려는 시도였다.

애석하게도 경제권리장전은 성공하지 못했다. 만일 루스벨트의 구상이 실현되어 제일 영향력이 큰 나라에서 경제사회 정책의 기본틀이 되었더라면 그것의 전세계적 파급 효과는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다. 하지만 경제권리장전의 기본 구도는 오늘날 경제적·사회적 권리로 계승되었다. 이 부분을 지금 이 땅에서 적극적으로 실현한다면 그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이 되겠는가.

여러 논자들이 지적했듯이 한국은 ―여전히 모순을 안고 있지만― 이제 단순히 서구 따라잡기, 배우기가 통하지 않는 독특한 정치공동체로 진화했다. 코로나 사태에서 보듯이 외부에서 준거를 찾을 필요도, 찾을 수도 없는 영역이 많아졌다. 우리의 경험을 공유해달라고 외국에서 요청할 정도가 되었다. 인권에서도 한국이 새로운 희망의 준거점이 되도록 새 국회가 분발해주면 얼마나 좋겠는가.

인간 안보를 다시 생각한다

기후위기 상황은 인간 안보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기후위기가 심해질수록 인간 안보는 악화될 수밖에 없다.

기후위기는 인간의 생계를 위협하고, 지역공동체의 문화와 정체성을 잠식시키며, 사람들에게 원치 않은 이주에 나서도록 강제하고, 국가가 인간 안보를 보장할 수 있는 역량을 약화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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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10일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3주년을 맞아 중요한 발언을 했다. ‘인간 안보’로써 한반도를 둘러싼 내외의 도전을 풀어보자는 제안이었다. “오늘날 안보는 전통적인 군사 안보에서 인간 안보로 확장돼 모든 국가가 연대와 협력으로 힘을 모아야 대처할 수 있다”고 전제하면서 “남과 북도 인간 안보에 협력해 하나의 생명 공동체가 되고 평화 공동체로 나아가길 희망한다”고 했다. 인간 안보에 의한 남북 협력 사례로 코로나19, 말라리아, 아프리카돼지열병 등 공동 방역을 꼽았다고 한다.

인간 안보는 새로운 사상이 아니지만 한반도의 맥락에서, 그것도 바이러스 사태의 와중에 제안되었다는 점에서 우리의 주목을 끈다. 지난달 판문점선언 두 돌을 맞았을 때도 문 대통령은 “남북은 생명 공동체”이며 코로나19 위기가 남북 협력의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때도 코로나에 대한 공동 대처 협력에서 시작하여 “가축 전염병과 접경지역 재해 재난, 기후환경 변화에 공동 대응하는 등 생명의 한반도를 위한 남북 교류와 협력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환경, 보건, 재난 극복을 통해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의 안전이 보장되는 공동체를 지향하자는 메시지의 일관된 흐름이 분명히 느껴진다. 환경연구자 황준서는 비슷한 맥락에서 ‘환경-평화-안보 삼중 연계’로써 한반도의 평화 정착을 꾀할 수 있다고 제안한 적도 있다.

‘인간 안보’는 유엔개발계획(UNDP)의 <인간개발보고서 1994>에서 처음 선보인 개념이다. 보고서는 그때까지 통용되어 온 안보 개념을 뒤집어 전세계에 큰 지적 충격을 주었다. 무력으로써 국토를 지킨다는 전통적 안보 개념을 넘어서, 발전으로써 인간을 지킨다는 새로운 안보 개념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인간 안보는 기아·질병·탄압과 같은 만성적 위협으로부터 보호의 측면, 그리고 가정·직장·사회에서 발생하는 급작스러운 위협으로부터 안전의 측면을 두루 지닌다. 구체적으로 인간 안보는 일곱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경제 안보, 식량 안보, 건강 안보, 환경 안보, 개인 안전(고문·전쟁·탄압·범죄·젠더폭력·아동학대 등), 공동체 차원의 안전, 정치 안보.

<인간개발보고서>의 저자들은 인간 안보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고 설명한다. 첫째, 세계 모든 곳의 모든 사람이 공통으로 인간 안보에 관심을 둔다. 둘째, 인간 안보의 모든 요소들은 서로 의존한다. 셋째, 인간 안보는 사후 대책보다 사전 예방으로 잘 보장될 수 있다. 넷째, 인간 안보는 “사회 속에서 숨 쉬고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을 중심에 놓고 생각한다.

보고서는 인간 안보를 실행하기 위해 새로운 제안을 많이 내놓았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유엔 경제안전보장이사회를 신설하자고 했다. 세계사회발전 정상회의를 개최하자고도 했다. 요즘 피케티가 주장하는 전 지구적 과세와 비슷한 아이디어도 제안되었다. 세계사회헌장의 초안도 나왔다. 유명한 문구가 들어 있었다. “사람들이 가정에서, 직장에서, 지역사회에서, 환경 내에서 안전하지 않으면 유엔헌장의 어떤 조항도 안보를 보장할 수 없다.”

사람 친화적, 일자리 친화적, 자연 친화적인 지속가능 인간발전이라는 사상은 당시 버전으로 일종의 글로벌 뉴딜이었다. 전세계 모든 나라에서 1년에 3%씩 군사비를 줄여 인류가 ‘평화 배당금’의 혜택을 누리게 하자는 아이디어도 이때 나왔다.

<한겨레> 김정수 선임기자가 지적한 대로 대통령이 인간 안보의 사례에 환경을 포함시킨 점을 기후변화와 연결하여 정책으로 구체화하는 일도 중요하다. 코로나 대응으로 국제적 신망이 높아진 한국이 기후 대응에서도 모범을 보이고 그것을 한반도에서 구체적인 실천으로 이어가면, 국제 협력의 선도국 역할은 떼 놓은 당상이라 할 수 있다. 한 세대 동안 쌓아도 이루기 힘든 외교적 성과를 일거에 올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담대한 상상력과 정치적 의지가 지금처럼 필요한 적도 없다.

기후위기 상황은 인간 안보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기후위기가 심해질수록 인간 안보는 악화될 수밖에 없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협의체(IPCC·아이피시시)도 이 점을 ‘확실한 증거, 그리고 높은 합의 수준’에서 인정하고 있다. 기후위기는 인간의 생계를 위협하고, 지역공동체의 문화와 정체성을 잠식시키며, 사람들에게 원치 않은 이주에 나서도록 강제하고, 국가가 인간 안보를 보장할 수 있는 역량을 약화시킨다.

아이피시시는 기존의 인간 안보론을 계승하면서도 기후위기와 관련하여 인간 안보를 “인간 삶에 반드시 필요한 핵심 요소가 보호될 때, 그리고 사람들이 존엄을 갖추고 살 수 있는 자유와 역량을 가질 때 형성되는 조건”이라고 재정의한다. 인간 삶에 반드시 필요한 핵심 요소란 “사람들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행위하는 데 필요한, 보편적이면서도 문화적으로 특정한, 물질적-비물질적 요소들”을 말한다.

기후위기 시대의 인간 안보는 특히 빈곤이나 여러 종류의 차별, 극단적 자연재해와 장기적 환경 악화로 위협받는다. 기후위기가 국제 분쟁과 갈등을 부추긴다는 사실은 이제 누구나 아는 상식이 되었다. 이런 입장을 뒤집어 기후변화를 자연재난으로만 인식하지 말고 더욱 폭넓은 이슈로 프레임 삼을 때 사람들 사이의 평화적 공존과 화해를 증진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 안보는 인권과 어떤 관계를 이루는가? 인권을 달성하는 방법론에 따라 인간 안보와 인권은 벌어지기도 하고 수렴될 수도 있다. 크게 보아 인권을 달성하는 방식은 기준 이행 접근방식과 조건 형성 접근방식으로 나눌 수 있다.

우선, 기준 이행 접근방식은 전통적인 주류 인권 담론이다. 일정한 개별 권리들을 확정해 놓고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최저 기준으로서 보편적으로, 법적으로 인정해주는 방식이다. 그러나 여러 이유에서 인권 책무를 완벽하게 준수하지 않거나, 못하는 나라가 많다. 인간이 아닌 존재에 대한 침해 문제는 전통적 인권 담론에서 아직까지 잘 다루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기준 이행 접근방식에 의한 인권은 인간 안보 개념과 꼭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반면, 조건 형성 접근방식은 권리를 보장할 수 있는 여건과 환경을 중시한다. 사회과학적으로 인권을 파악하는 관점이다. 조건 형성 접근방식은 개별 권리침해의 법적 해결을 넘어, 인권이 실현될 확률적 개연성을 높이는 요소를 찾으려 한다. 이것은 인간의 기본 이익을 수호할 수 있는 정치적, 사회문화적, 경제적 요소를 강조하는 인간 안보 개념에 가깝다. 기후위기 시대에 전통적 기준 이행 접근만으로는 부족하고 조건 형성 접근까지도 통합한, ‘인간 안보 친화적 인권 담론’이 요구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국가의 시간, 인권의 자리

이때의 예산편성은 인권과 직접 관련된 예산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모든’ 예산이 인권의 렌즈를 통해서 편성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정부가 모든 사람의 모든 인권을 잘 보호하려면 예산을 인권적으로 잘 편성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유엔에서는 정부의 예산편성에 개입하는 것 자체가 인권이라고 본다.

국가의 시간이 도래한 시대에는 기획재정부처럼 예산편성을 책임지는 부서에 인권의 정신이 들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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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시간이 오고 있다. 국내외적으로 국가의 회귀를 요청하는 소리가 높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들이 이젠 상식처럼 취급된다. 국가의 확장개업은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꾸준히 진행되어오다 코로나 사태를 계기로 완전히 상승세를 탔다. 단기적 현상이 아니라 장기적 추세다.

국가가 재난지원금을 개인들에게 직접 지급하는 전대미문의 일이 벌어졌다. 한국판 뉴딜도 공식화되었다. 그린뉴딜까지 얹어서 큰돈을 쏟을 것이라 한다. 그린뉴딜이 막판에 포함되긴 했어도 그것의 방점이 녹색전환에 찍혔다고 보기는 어렵다. 기후위기에 본격적으로 대응하려면 훨씬 더 많은 자원을 투입하고 국가의 총력체제를 가동해야 한다.

기본소득 논의도 불이 붙었다. 그것의 실행 가능 여부를 떠나 사람들 귀에 솔깃하게 들리기 시작한 게 사실이다. 재난지원금으로 이미 약효를 본 상태다. 여론조사에서도 기본소득 찬성 비율이 높게 나오고 보수권에서도 거론하기 시작했다.

기본소득을 비판적으로 보면서 전면적인 전국민 고용보험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기본소득이 기존 복지의 대체냐 보완이냐, 그리고 전국민 고용보험의 폭과 속도에 따라서 차이가 나겠지만, 어쨌든 많은 이들이 국가가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그와 함께 재원을 마련할 방법론을 고민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한국에서 증세는 일종의 천기누설형 금기어였는데 이제는 증세를 공개적으로 논해도 역적 소리를 듣지 않을 정도의 물꼬는 터졌다. 탄소세, 데이터세, 로봇세, 토지보유세 등으로 재원을 만들자고 한다. 전국민 매달 60만원 수준으로 지급하려면 108조원 정도의 순증세가 필요하다는 진단도 제시되었다.

금융과 무역의 신자유주의적 지구화가 퇴조하고 있는 것도 국가의 귀환을 재촉하는 요인이 되었다. 사람들을 ‘자유’ 시장으로 몰아넣은 뒤, 죽든 살든 알아서 하라는 식의 방임형 경쟁 정책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21세기 국가의 귀환이 2차대전 뒤 서구 복지국가 전성시대를 되풀이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당시 국가는 노동운동 및 사민주의 정치와의 역사적 타협을 통해 시민들에게 ‘마음 좋은 삼촌’과 같은 이미지로 다가왔다. 시민들은 개인이라기보다 노동조합원, 교사, 사회복지사, 간호사, 공무원과 같은 공공부문 일꾼으로서 국가와 만나는 경우가 많았다.

온정주의라는 비판을 받긴 했지만 국가는 어쨌든 복지체제를 통해 사람들에게 사회적 안전망을 제공해 주었다. 나라에 따라서 공공재냐 권리냐 하는 차이가 있었지만 사람들의 삶이 전반적으로 덜 팍팍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지금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는 국가의 귀환은 상당히 다른 양상을 하고 있다. 노동운동이나 사민주의 정치가 과거와는 다르고, 공공부문도 예전과는 다른 수익구조와 조직문화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국가와 개인 사이에 존재하던 조직화된 완충지대가 크게 줄어든 상태에서 21세기의 국가 개입은 개별 국민에게 수직적으로 혜택을 내리꽂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다.

서구 복지국가의 국민은 집단에의 귀속성을 가진 존재이자, 국가와 동질성을 많이 공유한 집단이었다. 그러나 21세기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개별화된 소비자 정체성을 갖고 있고, 어떤 조직에 속하는 것을 자유의 제약으로 여기곤 하는 정서를 지니고 있다. 국내외적으로 비슷한 양상이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연대’라는 말이 상당히 부정적 어감으로 들리는 현실이 이 점을 단적으로 입증한다. 요컨대 ‘국가의 시즌2’는 과거 복지국가와는 많이 다른 구도와 감수성의 맥락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국가의 재등장은 인권에도 큰 영향을 준다. 국가가 커질 때 인권의 자리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좋은 조짐인가, 복합적인 조짐인가, 나쁜 조짐인가. 이 모든 조짐을 하나로 묶어 21세기형 ‘국가의 시간’이라 불러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국가가 커진다는 것은 결국 국가 재정의 비중이 늘어나고, 그것을 집행할 조직과 인력이 늘어난다는 뜻이다. 이 점을 감안하여 국제인권운동에서는 ‘정부 예산과 인권’이라는 분야를 발전시키고 있다. 유엔 인권최고대표실에서는 이 방면의 매뉴얼까지 만들어 각국 정부에 보급하고 있다.

정부의 가장 중요한 경제정책 문헌은 뭐니 뭐니 해도 예산편성 내역인데, 하물며 국가가 커진다면 예산편성이 인권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겠는가.

이때의 예산편성은 인권과 직접 관련된 예산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모든’ 예산이 인권의 렌즈를 통해서 편성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단순하게 말해, 정부가 모든 사람의 모든 인권을 잘 보호하려면 예산을 인권적으로 잘 편성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유엔에서는 정부의 예산편성에 개입하는 것 자체가 인권이라고 본다. 국제인권기준에 나와 있는 국정 참여권리, 정보 접근권, 그리고 정부의 책무성을 물을 수 있는 권리가 그 바탕에 깔려 있다. 이런 주장은 인권을 확장시켜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의 귀에도 파격적으로 들릴 것이다.

흔히 자유권은 정부가 시민들의 자유에 간섭하지 않기만 하면 보호될 수 있으므로 자원이 크게 소요되지 않는다는 통념이 있다. 꼭 그렇진 않다. 사법부 독립, 민주적이고 유능한 경찰, 인도적인 교정시설을 위해 예산이 많이 필요하다.

사회권에는 더욱 큰 규모의 자원이 필요하다. 특히 국가가 커지는 시대에는 사회, 보건의료, 교육, 여성, 아동, 복지, 환경 등이 단순히 공공정책인지, 수급권을 요구할 수 있는 사회권 정책인지에 따라 큰 차이가 난다. 사회권 정책으로 간주하는 경우에는 예산안 편성 시 사업유형별 지침의 작성 방법 자체를 바꿔야 한다.

유엔은 예산이 많이 필요한 ‘예산집약형 인권’과, 예산이 많이 필요하지 않은 ‘예산함축형 인권’을 나눠서 생각하라고 권고한다. 예산집약형 인권은 특히 정부의 적극적 의무와 전향적·지속적 달성이 필요한 인권이다.

자칫 예산편성 자체가 인권을 침해하는 경우도 생긴다. 예산편성 방식에서 인권적 고려가 결여되어 있는 경우다. 차별적으로 예산을 짠다거나 퇴행적, 축소지향적으로 예산을 짤 때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다. 인권적 차원이 빠진 예산편성은 경로의존형 정책집행으로 이어져 정부의 의도와 상관없이 인권침해가 발생할 가능성이 커진다.

국가의 시간이 도래한 시대에는 기획재정부처럼 예산편성을 책임지는 부서에 인권의 정신이 들어가야 한다. 패러다임 변화라는 말이 요즘처럼 맞아떨어지는 시대도 없다. 인권운동도 국가의 성격이 천지개벽하고 있는 현 시대상을 정확히 읽어야 한다. 국가의 시간이 오면 자원 배분의 관문이 인권의 자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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