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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들의 이승만박사 관련 15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 (이인수박사)

천아1234 2023. 3. 22. 18:21
최근 서울 영복여고 학생 동아리(대표= 이지은)는 건국대통령 이승만박사에 대한 의문사항 15가지를 건국대통령 이승만박사 기념사업회에 문의해 왔다.
 평소  이승만박사에 대해 잘 몰랐으나 신문과 방송 등을 통해 관심을 갖게 된 이들 학생들은 동아리 활동을 통해 이승만박사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되었다며 활동 중에 의문되는 15가지 사항을 답변해 달라고 부탁해왔다.
 아래 답변은 이승만박사의 아들 이인수박사가 직접 작성한 것이다.
 

이승만대통령에 관한 학생 질문에 대답(2011.10.31)

 

 

 질문1. 저희가 100인의 설문조사를 한 결과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부정적이다’ 라는 응답이 많았습니다. 이렇게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가 나쁜 평만을 받고 있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답 : 우남 이승만대통령은 일제에 빼앗겼던 한국인의 나라를 그의 전생애를 바쳐 오랜 독립운동과 건국투쟁으로 대한민국을 건국하여 독립을 회복하고 공산당이 도발한 6.25전쟁에서 자유를 수호하여 국가안보를 강화하였으며 교육에 힘써 인재를 양성하였고 기간산업을 육성하여 국가발전의 기반을 만들어 놓은 경세가(statesman) 입니다. 한마디로 격동기의 이 시대를 보는 눈이 아직도 사람에 따라 달라서 이대통령을 바로 인식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현상입니다.

 그 중요한 원인중에는 첫째가 일본의 한국식민사관의 영향에서 아직도 우리의 학계나 언론계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일본이 가장 싫어하는 인물이 바로 이승만박사 입니다.

 둘째가 북한을 위시한 공산당의 반이승만과 중상(中傷) 및 선전입니다. 공산당은 이승만을 철천지원수(徹天之怨讐)로 생각합니다. 그것은 이박사가 대한민국을 건국하여 공산화를 막았기 때문입니다.

 셋째가 이대통령 하야후 역대정부가 이대통령을 비하(卑下)하고 반이승만(反李承晩)교육을 해왔다는 것입니다. 넷째가 미국내 좌파(소위 수정주의자)의 반이승만선전과 한국현대사왜곡입니다.

 이런 영향으로 반이승만시대(反李承晩時代)가 형성되어 반세기가 넘었습니다. 그러니 알려고 아니하고, 알지도 못하면서 학교나 사회에서 이박사에 대해 나쁜 감정만 심어주었으니 그의 모든 업적이 부정적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지오. 흔히 이성(理性)은 감정(感性)의 노예라고 하지 않습니까. 참으로 우리가 감사해야 하고 세계적으로 자랑해야할 인물을 그동안 가장 못된 사람으로 치부하여 짓밟고 말았으니 조국을 사랑하고 자존심 있는 한국인이라면 이런 어리석은 일을 언제까지 해야할 것인지 생각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

 

 

 질문2. 이승만 대통령이 친미주의사상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다는 것은 배워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미국의 국적을 가지고 있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대통령이 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답 : 이승만박사의 친미는 한국의 자주독립을 위한 친미 입니다. 그것은 미국의 정치나 삶의 체제가 우리의 모범이 될만한 것이 있어서이고 한국이라는 국가를 경영해 나가는데 국제간 필요에 따른 용미(用美)의 성격이 강한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박사는 미국의 국적을 가진 일이 없읍니다.

 재미중 어디까지나 한국인 독립운동가로 처신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승만박사가 미국아닌 외국을 여행할때마다 비정규(非正規)여권을 내주어야 했던 미국무부의 쉬풀리(R. B. Shipley) 여권과장은 이박사부인 프란체스카여사에게 남편을 설득해서 미국시민권을 받도록 하라고 하였으나 이박사의 대답은 언제나 ‘한국이 독립할 것이니 기다려주시오’ 이었습니다. 1948년 7월 20일, 제헌국회33차회의에서 초대대통령을 선출할 때 서재필박사의 표가 하나 나왔으나 미국시민권자라고 무효처리가 되었습니다. 이승만박사는 이때 196명중 180표의 압도적다수로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질문3. 저희 또한 이번 역사 프로젝트를 주진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단점만 알고 부정적으로 바라보던 저희의 인식 또한 일부분 긍정적으로 바뀌기도 했는데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알리고픈 업적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답 : 많은 업적중에서 알아야할 것은 전생애를 한국 근대화의 기수로 구국과 독립운동 그리고 건국투쟁으로 자유민주 대한민국을 건국하여 없어졌던 나라의 국권을 회복하였고 자유를 수호하고 국가안보를 강화하여 교육입국의 이념을 실현, 국가발전의 기초를 마련해준 창업의 대통령이라는 점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의 업적에 혜택을 입지않은 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의 이러한 국가창업은 누가 시켜준 것이 아니라 젊어서부터 연마한 동서양의 학식과 그의 선견지명이며 경륜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질문4. 어떤 이유로 인해 이승만대통령에 대한 연구가 지금까지 본격적으로 시행되지 않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답 : 한국인의 일반적인 반도기질(半島氣質), 다시말해서 기회주의적 성격이 종북좌파의 극렬적인 행동앞에 지식인들의 진실을 알려는 정렬마저 맥을 잃었던 것이지오. 1989년의 동구권 자유혁명이 있기까지 한국의 많은 지식인들은 공산주의를 반기지 않으면서도 한국이 결국에는 공산화될 것이 아닌가 생각을 했어요. 월남도 그렇게 망했드시 ----- . 이런 판국에 양심적인 학문의 연구보다 정치권과 정부의 눈치보기가 급하였고, 때는 바야흐로 반이승만의 시대인데 어디 연구하고싶은 생각이나 하겠어요. 대학의 한국현대사 연구는 북한의 식민지나 다름없고, 뭐 양다리 걸친 글짓기도 보신(保身)에 도움이 되지않겠어요. 그리고 또 이승만연구가 없었던 것은 질문1에서 일부가 언급이 되었다고 봅니다.

 

 

 질문5. 저희가 연구 도중 흥미로운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승만 대통령이 유교에 대해서 긍정적인 평가를 아끼지 않았다는 점인데요. 그것이 그의 정치사상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구체적으로 알고 싶습니다.

 

 답 : 우남은 20세까지 그시대의 관례대로 유학공부를 통해 정치사상을 배우고 또 가졌습니다. 그러나 1894년의 갑오경장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된 후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서양의 신학문을 배웠습니다. 그리하여 우남의 유학에 관한 소양은 비범(非凡)하였고 대통령 재임중에도 유교의 좋은 전통을 -- 특히 선비정신을 -- 지키는데 철저하였습니다.

 그는 동서양의 정치사상에 통달한 정치사상가 이었으며 일찍부터 맑스·레닌사상의 잘못을 비판하고 있었습니다. 기독교인 이었지만 헌법상 종교의 자유를 존중하여 유교나 불교가 사회에 끼칠 장점을 더욱 발휘하게하여 국가목적에 기여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일본식으로 화해버렸던 대처승의 사찰지배를 정화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질문6.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의 초대대통령의 역할 뿐만 아니라 외교가로서의 활동도 했다고 알고 있는데요. 이승만 대통령의 외교가로서의 활동에 대해 어떻게 보고 계신가요?

 

 답 : 이승만박사는 1904년의 옥중저서 ‘독립정신’에서 외교의 중요성을 말했듯이 자신이 외교의 베테랑(veteran-노련한 전문가) 이었습니다. 알고 보면 임시정부의 독립운동도, 대한민국의 건국, 건국후 자유수호의 전쟁, 지금까지의 국가발전도 탁월한 이승만외교의 성과이요 그 연장인 것입니다. 해방후 어디 우리에게 외교전문가가 몇이나 있었나요. 이대통령은 그 재임중 실질적으로 외무장관을 겸하고 있었다고 할수 있습니다.

 

 

 질문7. 6.25전쟁 당시 반공포로석방이 우리나라에게 이익이 되는 사건이었는지 아니면 불이익을 주는 판단이었는지 더욱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저희가 조사한 결과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 판단이 어리석은 것이었으나 미국과 소련이 휴전협정을 위해 묵인되었던 사건이라는 여론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에 많은 의문을 품게 되었고 더욱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답 : 6.25전쟁은 다른 국가간의 전쟁이 아니라 같은 민족끼리의 전쟁이라는 특수성이 있습니다.

 우선 인도적인 면에서 반공포로 2만7천명이 원하는대로 자유롭게 사는길을 열어주었고 대한민국의 국익을 위해 우리가 전쟁의 주체라는 인식을 참전국에 심어주며 통일이 아닌 휴전을 반대하여 그것이 말뿐이 아닌 반공포로석방이라는 우리의 힘을 과시함으로써 우리가 원하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미국이 체결하도록 유도하여 대한민국의 국가안보를 강화한 고도의 외교전략이고 생존전략 이었던 것입니다.

 

 

 

 질문8. 저희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50대, 60대의 여론을 조사한 결과 부정적 인식이 마찬가지로 많았는데요.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의 대통령으로서 활동하실 때의 정치적 상황과 여론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답 : 우선 당시의 언론상황 입니다. 이대통령은 언론인 출신입니다. 그는 언론의 자유를 가장 존중한 분입니다. 그의 재임중 ‘서울신문’을 빼놓고 전부가

야당지 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야당의 정부공격은 강렬하였습니다. 그리고 50대 60대의 교육배경을 이대통령 하야후로 볼때 역대정부는 이대통령의 시대를 일종의 암흑기로 치부하고 폄훼하여 자기들의 정부를 가장 좋은 것으로 보게 하려는 일종의 반사이익을 노렸습니다. 그리하여 이대통령 치하에서 이룩한 민주주의의 신장과 많은 업적은 완전히 매장되고 말았습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 있었던 그 세대가 이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갖는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이대통령에 대해서 배우지도 않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이지요.

 

 

 질문9. 저희가 배우는 국사 교과서에서 이승만대통령과 관련하여 가장 크게 다루어지는 사건은 ‘3.15 부정선거’인데요.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독립되기 전 민족독립투사로서 활동하던 이승만 대통령의 모습과는 상반된 모습이 나타나 저희 조원 모두 의아해 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가하시나요.

 

 답 : 물론 그러실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을 알고 보면 이대통령이 3.15부정선거를 저지른 분이 아닙니다. 3.15선거에서는 민주당의 조병옥씨가 대통령후보로 등록후 미국병원에서 별세하여 이대통령은 상대당 후보가 없는 상태이어서 선거전에 이미 당선이 결정된거나 다름이 없었지만 문제는 부통령후보인 이기붕씨가 당선되어야 대통령 유고시에 대통령직을 이어받을수 있기때문에 그들이 사생결단으로 그 당선을 위해 부정선거를 결행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대통령 모르게 부정선거를 저지른 것이 이기붕씨 내외와 가까웠던 당시의 최인규 내무장관과 이강학치안국장 그리고 자유당의 강경파 사람들 이었습니다.

 이대통령은 평소 국무회의에서 선거를 공명정대하게 치르도록하라고 강조 하였습니다. 이때는 경무대 비서실을 이기붕내외가 장악하여 이대통령에게는 사실상 정보전달이 차단된 상태이어서 4월12일 국무회의에서 이대통령은 시국이 소란한 것 같은데 ‘혹시 선거에 잘못이 있었던 것이 아니냐’고 물으셨지만 국무위원중 아무도 사실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대통령은 궁금히 생각하며 ‘만약에 부정이 있었다면 내가 사임하겠으니 연구해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3.15부정선거는 이대통령이 모르도록 꾸며진 것으로 결국 4.19학생데모가 일어나고 그 진압에 사상자가 생긴다음에야 이대통령은 사건의 전모를 알게되어 그 책임을 지고 하야를 한것입니다.

 이대통령은 ‘선거에 부정이 있다면 당연히 일어나 바로잡아야지! 불의를 보고 일어나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야! 하고 학생들을 칭찬하였습니다. 그리고 병원에 있는 부상학생들을 찾아가 ‘내가 맞아야할 총알을 너희가 맞았다’고 서러워 하였습니다.

 위인(偉人)도 연세가 든 말년에는 뜻밖의 봉변을 당하게 되는 예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나 이대통령은 위기상황에서도 이렇게 언제나 의로운 판단을 잃지 않고 책임을 질줄아는 지도자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질문10. 이승만 대통령이 왜 5.10선거를 서들렀는지 그리고 그 당시 김구선생님과의 의견 차이가 어떠했는지에 대해서 더 사실적인 내용을 알고 싶습니다.

 

 답 : 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연합군이 들어와서 우리의 독립이 곧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 38선의 분단점령으로 남북이 남의 나라처럼 되고 미·소·영·중의 4개국 신탁통치를 받게 한다는 모스크바3상결정이 발표되면서 해방정국은 극도로 혼란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리하여 1946년 5월, 신탁통치를 위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신탁기간중의 한국인정부를 구성하기 위해 상의대상이 될 정당사회단체의 선정문제를 놓고 대립하여 무기연기되자 이박사는 한국문제를 UN에 이관하여야 한다고 판단하고 8월부터 임병직·임영신씨를 시켜 외교활동을 시작하여 한국독립의 길을 열고자 하였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국제정세를 내다본 선견지명이 아닐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소련이 북한에 공산정권을 만들려는 의도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북한에서는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바로 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1946년 2월8일에는 김일성을 내세워 북한의 단독정부인 인민정권을 조직하였습니다. 소련군은 미·소공위를 무시하면서 북한을 페쇄하여 공산화를 추진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박사는 6월3일 정읍에서 남한에서 자율적인 정부 내지 위원회같은 것을 조직하여 소련군이 북한에서 철수하도록 세계여론에 호소해야 한다고 성명을 하였습니다.

 우남 이박사와 백범 김구선생은 우의가 두터웠습니다. 백범은 나이가 자기보다 한살위이고 임시정부의 초대대통령인 우남을 형님이라고 대접하였습니다. 우남은 1945년 10월16일 귀국하여 미군정의 하지사령관에게 임시정부요인을 귀국시키도록 요청해 11월 23일에 백범을 비롯한 임정요인의 귀국이 실현되었습니다. 그후 이 두분은 민주의원의 의장에 이승만 부의장에는 김구와 김규식이 되고 독촉국민회의 총재는 이승만 부총재는 김구가 되어 민족진영을 대표하였습니다.

 우남은 조국에 돌아와 독립촉성국민회를 자신의 대중조직으로 조직하였고 백범은 국민회의 부총재직을 맡으면서도 중국에서부터 있어온 한독당을 자신의 조직으로 육성하였습니다. 대체로 백범은 신탁통치의 반대 등 우남의 지도원리에 따라 정치활동을 했으나 때로는 벗어난 활동도 있어서 1947년 제2차 미소공도위원회가 결렬된 후 12월 1일에 백범은 자신이 우남과 같이 남한에 정부를 수립하려는 입장은 같다고 발표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2일에 한국민주당의 중진 장덕수가 암살되고 그 배후가 백범의 수하 김석황임이 들어나자 한민당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백범은 자기의 정치노선을 바꾸어 통일과 남북협상을 명분으로 북한의 김일성정권에 접근을 하였습니다.

 그동안 제2차 미소공위 결렬후 미국은 9월에 가서야 이박사가 국민외교로 추진중인 한국문제의 UN이관을 실현하여 11월 14일에는 UN총회가 남북한 자유선거와 한국임시위원단의 파견을 결의하였습니다. 그러나 UN이 결의한 남북한 자유선거도 소련의 협조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미 김일성정권을 만들어 공산국가체제를 갖추고 군사력까지 준비한 북한을 해체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즉 소련이 한국공산화를 포기하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그리하여 소련은 UN주관하의 남북한선거를 반대하며 그대신 미·소양군을 철수하게 한후 그들이 선택한 좌파정당단체만으로 전국정치회의를 열어 정부를 수립하게 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그것을 주장한 것입니다. 이 계획에 따르면 북한에 마련된 군사력과 남북한좌익정당의 조직력으로 남한의 공산화는 매우 쉽게 성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UN에서는 선거가 가능하고 인구의 3분의 2가 사는 남한에서 선거를 실시하여 정부를 세우도록 결의하였습니다. 이박사는 북한이 이 선거를 거부하리라는 것을 알았고 남한의 공산화를 막기위해 정부수립이 시급하다생각해 선거를 서둘도록 한것입니다.

 그러나 김구와 김규식 두김씨는 이 선거를 반대하고 북한에 가서 소련의 괴뢰인 김일성과 요담하여 이른바 4.30성명에 서명하고 돌아와 남한국민에게 이것을 성과라고 내놓았습니다. 이 성명은 외국군대 철퇴 후, 남한선거를 반대하는 공산당주도의 56개 정당사회단체(김구의 한독당과 김규식의 민족자주연맹을 포함)만으로 전 조선정부를 수립한다는 것과 남한선거의 결과 즉 건국될 대한민국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소련의 주장을 받드는 공산당의 적화통일안 이었습니다. 두 김씨는 이렇게 남북협상 아닌 소련군 지시를 따르는 성명서에 도장을 찍고 돌아와 스스로 그 하수인이 되어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반대만 하다가 해방정국의 미아(迷兒)가 되고 말았습니다.

 UN결의 남북한총선거는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한국민족이 자유선거로삶의 체제를 선택하고 주권회복과 평화적통일을 동시에 달성하게 하려는 선거이었으나 이것을 반대한 소련과 조선공산당 및 이에 따르던 무리들은 민족분단을 고착화시킨 책임을 면할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두 김씨가 공산당의 적화통일안에 손을 들어준 것은 공산정치에 대한 무지와 중공의 중국대륙 지배를 예상하여 한국의 공산화가 필연적이라는 즉 공산세력에 대한 두김씨의 패배주의(敗北主義)가 크게 작용했다고 할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공산정치가 무엇인지, 국제정치가 어떤 것인지 알고 대한민국을 건국하여 우리가 자유를 누리며 번영과 발전을 거듭하는 오늘이 있게한 이대통령의 선견지명과 영단에 감사해야 할것입니다.

 

 

 질문11. 이승만의 정치이념으로 ‘일민주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요. 이는 실제로 우리생활에 도움이 되었는지 그리고 그 외에 이승만대통령에게 다른 정치사상이 있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답 : 1948년 10월, 정부수립 직후 이승만대통령이 국민통합을 위해 제창한 정치이념 입니다.

 요약하자면 첫째 경제적으로 빈곤한 인민의 생활을 향상하게 하여 부(富)의 평등을 누리게 하고 둘째 정치적으로 대중의 지위를 높여 신분의 차별없는 동등 사회가 되게 하고 셋째 지역간 차별없이 대한국민으로 하나가 되게 하고 넷째는 남녀평등사회를 실현해 전국민의 하나 하나가 국민된 책임을 분담한다는 것으로, 대한민국 국민이 단합된 노력으로 남북통일을 달성하고 세계사에 웅비하자는 포부가 담겨있는 사상입니다.

 새 나라의 창업자로서 가까운데서부터 먼장래를 내다본 포부를 담은 사상이지만 6.25전쟁 때문에 보다 깊이있는 이론화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당시나 지금의 한국사회상에 비추어 절실한 문제가 아닐수 없습니다. 물론 이대통령의 노력으로 그 목표달성에 상당부분 많은 성과가 있었지만 아직도 우리가 힘써야할 일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이대통령의 정치사상은 자유를 기본으로한 민주주의 사상입니다. 이대통령이 1904년에 감옥에서 저술한 ‘독립정신’을 보시기 바랍니다.

 

 질문12. 얼마전 KBS에서 방영한 이승만대통령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저희 조원 모두 같이 시청하였는데요. 여기서 저희가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으로 꼽은 것이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에서 한국의 재미교포를 상대로 계몽교육을 실시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교육에서 가르친 것이 친미적 성향과 관련된 내용들이라는 의견도 있었는데요. 이 교육계몽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재미교포에게 가르친 것이 무엇 이었으며 이것이 우리나라 독립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말씀해 주세요. 

 

 답 : 이대통령은 평소에 자기를 교육자라고 말해왔습니다. 1900년 감옥생활중에도 새로운 국가건설에는 국민교육을 제일 먼저 해야한다고 교육입국을 주장하였습니다. 1912년에 다시 미국으로 망명한 이박사는 한국의 독립운동이 장기화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예견해 이에 대비하였습니다. 이박사는 유태인의 오래된 독립운동과 그들의 민족종교인 유태교와 시나고구(회당) 등의 관계에 주목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한인기독교회(KCC)를 설립하고 교포젊은이에 대한 민족교육을 위해 한인기독학원(KCI)을 개설했습니다. 이 하교에서는 태극기를 걸어놓고 학생들이 애국가를 부르며 울었다고 YWCA의 박·에스터여사가 회상하였습니다. 이학교에서 이박사는 필요에 따라 한국의 국어와 국사 그리고 지리 한문등 여러과목을 가르쳤다고 하며 이 학원에서 배운 학생들은 대한민국 건국후 양유찬 주미대사, 손·노듸 외자청장, 박·에스터 YWCA회장, 김신실 이화대학 교수등 많은 제자들이 나라를 위해 여러방면에서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질문13. 이승만 대통령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우리나라 정치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알고 싶습니다.

 

 답 : 이대통령은 서양이 앞선 것이 기독교문명에서 비롯한다는 생각에서 우리가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선진국과 같이 발전하려면 기독교가 융성하고 기독교인이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재임중에도 스스로 교회에 출석하여 기독교인들의 활동이 각계 각층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헌법상 종교의 자유를 존중하여 불교나 유교가 모두 좋은 전통과 장점을 살려 국가목적과 사회를 위해 일하도록 장려하였습니다. 특히 6.25사변을 당해 군목제도를 두게 한 것은 기독교의 전국적 복음화와 오늘과 같은 교세확장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질문14. 올해 초 고등학교 국사교과서 개편 과정에서 편파성 논란이 많이 있었는데요. 저희가 현재 배우고 있는 교과서 내용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나요?

 

 답 : 유감스러운 점이 매우 많습니다. 역사를 기술하고 가르치는데는 좋고 나쁜 감정을 떠나 진실을 정직하게 전달해야 합니다. 그동안 우리나라 국사교과서가 이렇게 편파성을 가지고 교육을 해왔다는데 놀라지 않을수 없습니다. 공산주의는 미움의 종교라고 합니다. 그 영향이 이렇게 국사교육에도 해독을 미치고 있다 생각합니다. 양심을 가진 정직한 학자와 교육자들이 좋은 교과서를 만들어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합니다.

 

 

 질문15. 현대사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다면요?

 

 답 : 해방후 공산주의자들은 공산주의를 진보적민주주의라고 자칭했습니다.

과연 공산주의가 진보적민주주의 입니까? 이렇게 종북극렬분자들의 진보라는 말장난에 젊은이들이 자각없이 끌려다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우선 양심을 가지고 사리를 판단해야 합니다. 반이승만시대(反李承晩時代)의 반세기가 넘어가고 있습니다.

  현대한국을 만든 불세출의 위인이며 애국자인 이승만을 매장하고 어디로 갈줄모르는 나라가 한국입니다. 이승만을 부정하면 대한민국의 국가적인 정통성을 부정하는 일이요 국민된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행위가 됩니다. 지금 우리나라 교육의 현실이 이러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중화인민공화국의 등소평은 자기를 문화혁명으로 숙청하고 수천만의 인민을 죽인 모택동의 초상을 천안문에서 떼지 않고 국부의 자리를 보존하도록하여 국가의 정통성을 과시하고 있는것입니다. 한국인에겐 그러한 지혜가 없는 것일까요. 우리에게 대한민국이 그들만치 사랑할 가치가 없어서 그러할까요. 우리는 현대한국을 만든 이승만을 알아야하고 우리의 양심과 정직으로 한국현대사의 진실을 알게 될때 우리의 나가야할 길이 보일것입니다.

 

 

 

 

(끝)
출처: 이승만 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