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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 고갈’ 논쟁을 해부한다

천아1234 2021. 8. 4. 13:56

5년마다 한 번씩 치르는 ‘국민연금 홍역’이 어김없이 찾아왔다. ‘연금 고갈 광풍’은 이번에도 국민 불안을 한바탕 들쑤셨다. 고갈이 예상되는 시기가 이전 추계 때보다 3년 앞당겨져 불안 심리를 더 키웠다. 연금 조기 고갈이라는 충격요법은 국민연금 개편의 절박함을 부각하는 데 도움을 준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노후 복지 제도가 지나친 불신에 시달리게 하는 부작용도 크다. 뜨겁게 달아오른 국민연금 논쟁 내막과 참고할 만한 외국 사례를 살펴본다. _편집자
국민연금 재정추계는 법에 따라 5년마다 한다. 연금 재정 상태를 점검하고 보완책을 마련하기 위한 취지다. 또 일정 시기가 지나면 국민연금 기금이 줄어들어 어느 시점에 없어지는 것은 ‘예고된 미래’다. 연금을 받는 고령자가 늘어 적립된 기금이 소진되면 그해 걷은 보험료와 세금으로 연금을 주는 방식으로 바뀌게 된다. 급속한 고령화로 후하게 설계된 연금 제도의 손질은 불가피하다. 유럽 등 다른 선진국에서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고, 제도 개편 과정에서 적잖은 갈등을 겪었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논쟁은 지나치게 적대적이고 소모적이다. 사회적 합의에 이르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는 데 큰 문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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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전선
재정추계는 나올 때마다 거센 후폭풍을 낳는다. 당연한 결과인 연금 고갈만 부각돼 국민 불신을 부추기고 익숙한 ‘국민연금 때리기’가 되풀이된다. 정해식 한국보건사회연구원 공적연금연구센터장은 “기금 고갈이라는 흑마법”이란 표현을 쓰기도 했다. 특히 보수 성향 언론이 앞장서 연금을 받지 못할지 모른다거나 낸 만큼 돌려받지 못할 것이라며 불안을 증폭하는 것은 변함이 없다. 보수세력에게 정부 재정이 들어가는 복지제도가 반가울 리 없다. 2060년으로 예상된 소진 시기가 이번 추계에서 2057년으로 빨라진 점과 최근 부진한 연금 운용 실적이 좋은 먹잇감이 됐다. 국민연금 폐지를 촉구하는 목소리나 ‘용돈 연금’ ‘퍼주기’ 같은 주장도 어김없이 나왔다. 이런 틈을 타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국민연금보다 민간연금이 훨씬 낫다며 판매에 열을 올리는 민간 보험사 모습도 새삼스럽지 않다.


국민연금 논란을 몇 차례 거치면서 ‘국민연금 무용론’은 어느 정도 가라앉은 상태다. 국가 보장이라는 안정성과 납입 보험료에 비해 연금 수령액이 평균 2배에 이르는 수익성에서 국민연금 강점이 탁월하기 때문이다. 특히 전체 62%인 사업장 가입자(직장인)로선 보험료의 절반을 사업주가 부담하므로 이만큼 ‘똘똘한’ 노후 보장 대책이 없다. 굳이 보험료를 내지 않아도 되는 주부 등 임의가입자와 60살 넘은 임의계속가입자가 꾸준히 늘어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럼에도 국민연금 불신 확대는 우려할 수밖에 없다. 국민적 공감을 얻어내기 어렵게 해 생산적 논의와 실행에 큰 장애를 조성한다. 제도를 튼실하게 하거나 연금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을 끌어안기가 더 힘들어진다. 사회안전망이 취약한 한국에선 복지 수준을 높이는 것이 시급하다. 여기에는 국민의 세 부담 증가가 불가피하다. 절대다수가 혜택을 받는 국민연금조차 외면받으면 그 길은 훨씬 멀어질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국민연금 개편은 국민 불신을 부추기는 세력과 전쟁부터 치를 수밖에 없다. 치열한 논쟁도 보수세력의 공포마케팅에 너무 활용되지 않도록 할 필요가 있다. 정부가 국민연금 지급을 보장하는 문제도 같은 맥락이다. 국민 걱정을 더는 데 도움이 된다면 보장 명문화를 꺼릴 이유가 없다.

진보 내부의 시각차
구체적 개편 방향을 둘러싼 논쟁은 진보 성향 전문가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다. ‘노후 복지 강화’ 원칙에는 한목소리를 내지만, 현 상황 진단과 해법에선 시각차가 크다. 그래서 정책 자문안이 ‘소득대체율 감소 중단, 보험료율 2019년 11.9%로 인상’을 뼈대로 한 (가)안과 ‘보험료율 2029년까지 13.4%로 인상, 기초연금 강화’의 (나)안으로 나뉘었다.
(가)안인 국민연금의 노후 보장 기능 강화를 강조하는 쪽은 기본적으로 현재 연금 제도에 대단한 문제가 있지 않다고 본다. 8월23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정세은 충남대 교수(경제학) 등이 이런 주장을 폈다. 연금 기금은 애초 적립이 목적이 아닌 만큼 고갈을 문제 삼지 말고 노후 보장 취지를 제대로 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보험료를 일부 올리더라도 2028년까지 40%로 낮추게 돼 있는 소득대체율을 현재의 45%에서 유지하는 게 필요하고 말한다.
선진국 사례들이 이런 주장의 중요한 근거가 된다. 프랑스·이탈리아 등 대부분 유럽 나라와 일본에서 연금 지급 규모가 국내총생산(GDP)의 10%를 넘는다. 그러나 한국의 국민연금 지급액은 2018년 GDP의 1.3% 수준이고, 70년 뒤인 2088년에도 9.4%에 지나지 않을 것으로 추산됐다. 연금 부담이 국가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은 만큼, 재원이 부족해지면 재정으로 충당해야 한다는 게 이들의 견해다.
(나)안인 연금재정 안정화를 주장하는 쪽은 기금 소진을 더 엄중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본다. 고령화 속도와 맞물려 빨라지는 기금 소진은 미래 세대에 상당한 짐이 되므로 현세대가 더 많은 부담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보험료를 올리고 연금 수령 나이를 늦추는 것 등이 포함된다. 앞으로 재정을 투입하더라도 국민연금이 아니라 기초연금을 강화하는 쪽이 바람직하다고 이들은 말한다. 보험료 납부와 관계없이 동일한 연금을 받는 기초연금이 노후 소득 격차를 줄이는 데 더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오건호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운영위원장이 이런 주장을 적극적으로 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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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갈린 형평성 해석
양쪽이 예측하는 우리 사회의 미래는 그리 동떨어져 있지 않다. 고령화를 넘어 인구 감소가 본격화하면 커다란 사회 변화는 불가피하다. 일하는 고령자가 늘고, 연금 수령 시기도 늦춰질 수밖에 없다. 공적 노후 보장도 ‘국민연금-기초연금-퇴직연금’ 틀로 짜이게 된다. 고령자 비율이 늘어나는 만큼 노후 복지에 재정이 많이 투입되는 것은 상식이다.
그런데도 양쪽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는 것은 형평성 때문이다. 먼저, 현재와 미래 세대 간 형평성 문제다. ‘저부담-중급여’ 체계인 현행 국민연금은 ‘기여와 보상’ 측면에서 보면 미래 세대에 분명히 불리하게 돼 있다. 현실은 팍팍하고 미래는 암울한 젊은 세대 분노를 촉발하기 쉬운 지점이다. 국민연금이 ‘폰지·다단계 사기’니, ‘폭탄 돌리기’니 하는 오명을 쓰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국민연금 강화론자들은 재정 투입도 미래 세대의 세 부담이 늘어나는 것이므로 불공평하기는 마찬가지라고 주장한다. 노후 보장 강화론자들은 기금 고갈이 주는 불안감과 함께 현세대가 ‘연금 먹튀’를 하는 것처럼 보는 시각이 세대 갈등과 연금 불신을 부추긴다고 지적한다. 우리 사회만큼 미래 세대에 대한 투자가 개인 몫으로 떠넘겨진 나라는 없다. 변변한 복지 제도도 없는 최장시간 노동 사회에서 개인이 그 책임을 오롯이 감당해왔다. 사교육을 포함한 자녀 양육과 교육, 대학 진학 이후까지 부모 세대가 뒷바라지해온 게 우리 사회다. 다른 선진국에선 볼 수 없는 광경이다. 그 결과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4배 가까운, 압도적 1위인 노인 빈곤율이다.
따라서 국민연금을 비롯한 노후 복지 강화에 세금을 쓰는 것은 당연하다는 게 이들의 견해다. 재정 투입을 고려할 때 지금 잣대로 70년 뒤까지 예측해 마련한 대책은 정합성이 떨어진다. 한 세대인 30년을 내다보고 세금·고용·복지 제도 전반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나가는 게 필요하다고 이들은 말한다. 그 정도면 우리 사회가 다가올 변화에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같은 세대의 수급자 간 형평성은 국민연금의 소득 재분배 기능에 대한 견해차에서 비롯한다. 보험료 대비 연금액 비율(수익비)은 저소득 가입자에게 훨씬 유리하게 돼 있다. 하지만 고소득자 역시 절대 액수 면에서 누리는 혜택이 적지 않다. 게다가 연금 사각지대에 있거나 가입 기간이 충분치 않아 혜택을 제대로 못 받는 사람 대부분은 저소득층이다. 이 때문에 오건호 위원장은 “현재 소득 격차가 그대로 연금 격차로 이어지는 구조”라며 “현재와 같은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의 하향 조정과 기초연금 강화가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국민연금 강화론자들도 기초연금 강화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국민연금 본연의 기능을 회복하기 위해 현재 수준의 소득대체율 유지는 필요하다고 반박한다.
또 하나 형평성 논란이 있다. 공무원연금, 군인연금과의 비교다. 이들 연금도 혜택이 줄어드는 쪽으로 개편돼 왔지만 국민연금보다는 여전히 유리하다는 게 일반적 인식이다. 연금 통합론자들은 더는 이들 연금을 우대할 이유가 없고 국민 세금으로 재원 부족분을 메우는 상황인 만큼 ‘연금 대통합’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연금이 통합되면 형평성 문제는 자연스레 해소되고, 당장 재정 투입 부담을 줄이는 효과도 있다는 견해다.

‘윈윈’으로 가는 길
국민연금 개편 논란 핵심인 형평성은 결국 ‘기여와 보상’이라는 방정식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 문제로 귀결된다. 기여와 보상을 따지는 것 자체가 국민연금의 특수성에서 비롯한다. 복지제도는 원래 수혜자의 기여를 요구하는 게 아니다. 노후 빈곤의 급속한 확대에 따른 미래 세대 부담을 줄이기 위해 현세대에게 저축을 강제한 것이 국민연금이다. 세대 간 연대 정신을 강하게 반영한 제도인 것이다.
연금, 복지, 일자리, 주거, 육아 등 삶의 질과 관련된 현안은 서로 맞물려 있다. 경제활동이 왕성한 현세대가 먹고살기 힘들어하고 노후를 힘겹게 여길수록 아이 낳고 키우기를 더 꺼리는 것은 당연하다. 지금 우리가 직면한 현실이다. 이런 점에서 현세대의 비난을 통한 세대 갈등 악화는 특히 경계해야 할 대목이다.
국민연금 개편은 전반적인 복지 차원에서 다가갈 필요가 있다. 국민연금만 떼서 수익성과 형평성을 따지는 것은 적절치 않다. 취약한 노후 복지 제도를 그대로 둔 채 부담만 더 요구하면 연금 불신과 노후 불안은 더 커지게 된다. 노후 복지에 더 많은 재원을 투입해야 한다는 데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된다면 제도 개편으로 가는 길이 그렇게 험난하지 않을 것이다. 연금 보험료를 올리는 만큼 노후 소득이 늘어나도록 하면, 보험료 인상을 설득하는 힘도 커진다. 국민연금 지급액을 통해서든, 다른 형태의 연금·수당을 통해서든 노후 보장이 지금보다 튼실해진다면 큰 문제는 없다. 물론 더 바람직한 것은 노후 소득 격차를 줄이는 방향의 정책 결정과 재정 투입이다. 수급자들의 소득·기여와 무관한 노후 소득 보장을 우선하는 것이다. 기초연금 강화가 대표적이다.
이와 함께 이번에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국민연금이 나아가야 할 장기적 방향을 분명하게 설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과거 몇 차례 개편처럼 ‘국민연금 고갈’이라는 충격요법에 기대 보험료 부담이나 지급액을 손대는 선에 그쳐서는 곤란하다. 그렇게 되면 재정추계가 발표되는 5년 주기로 지금과 그리 다르지 않은 소동을 되풀이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당장의 개편안 마련과 더불어 장기 방향과 청사진을 수립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여기에는 국민연금을 포함해 전반적인 노후 보장과 노후 복지 체계를 어떻게 구축·운영할지가 투명하게 담겨야 한다. 이를 기반으로 인구·경제 상황에 따라 보험료와 소득대체율을 탄력적으로 조정하고 △정년과 연금 수령 나이 일치 △납부 나이 상향 조정 △납부상한액 인상 △최소 가입 기간 단축 △공적연금 통합 등 점진적 개혁을 추진한다면 갈등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영국 사례는 참고할 만하다. 정권 교체에도 개혁 작업이 일관되게 진행됐고, 광범한 시민참여단의 ‘숙의’를 거쳐 이해와 공감을 넓혔다. 국민연금 개편은 세대 갈등을 넘어 미래를 함께 모색하는 과제라는 점에서 전문가와 국회 논의를 넘은 숙의민주주의가 더더욱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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