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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석의 화.들.짝

천아1234 2022. 5. 22. 18:43

미국 우선주의, 과거·현재와 미래

1987년 9월, 40대 초반의 부동산업자이던 도널드 트럼프는 많은 돈을 들여 <뉴욕 타임스> <워싱턴 포스트> <보스턴 글로브>에 ‘공개서한’ 형태의 전면 광고를 낸다.“강한 기개 없이는 미국의 해외 방위 정책을 바로잡을 수 없다”는 제목이다. 그는 “스스로 지킬 만한 능력이 충분한 나라들의 방어에 우리 돈을 쓰는 일을 멈춰야 한다”며 일본·사우디아라비아 등의 방위비(미군 주둔비) 분담을 주장한다. 그는 이후 기자회견에서도 동맹국에 일종의 세금을 부과해 미국 재정적자를 해결하고, 대일본 무역 불균형 문제에서 더 강경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트럼프의 진실>)지금 트럼프 정부의 미국 우선주의와 동일한 내용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집권 공화당 안에서도 거의 호응을 얻지 못한다. 공화당 주류파는 이 광고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 대한 공격이라며 비난한다. 트럼프는 상업적이고 선동적인 인물로 의심받는다.이렇게 주변부에 머물렀던 사고가 어떻게 미국 대외정책의 주류가 됐으며,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미국 우선주의는 자국 이익을 앞세우는 민족주의의 한 유형이다. 지구촌에서 미국 위상을 특별하게 설정하는 점에서, 미국 예외주의 및 일방주의와 뿌리를 공유한다.미국 우선주의는 두차례 세계대전이 있었던 20세기 전반기에는 비개입주의(흔히 고립주의라고 한다)로 표출됐으나, 2차대전 참전과 승리로 확실한 패권국이 된 뒤로는 사정이 달라진다. 지구촌 중요 사안에 관여하되 어떤 방식으로 하느냐에 따라, 국제협력과 자유민주 이념을 중시하는 국제주의와 권력 정치에 충실한 현실주의가 큰 흐름을 이루고 비개입주의는 발언권이 크게 줄어든다. 미국의 패권이 관철되는 상황에서는 설령 미국 우선주의를 실행하더라도 이전의 비개입주의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레이건 집권기(1981~88년)는 이후 한 세대 동안 관철될 미국 대내외 정책의 뿌리가 형성된 시기다. 레이건은 경제와 외교, 사회문화 영역에서 모두 성과를 낸 대통령으로 평가된다. 그는 신자유주의를 밀어붙여 1970년대의 스태그플레이션을 극복하고 세계 경제에 대한 미국의 지배력을 강화한다. 힘의 우위에 기초한 현실주의 대외정책으로 냉전 종식을 앞당기고 소련과의 핵무기 제한 합의를 끌어낸 것도 그의 공적이다. 기독교 보수파는 그의 집권기 동안 중요한 사회·정치 세력으로 성장한다.그는 모든 보수세력을 통합했다는 의미에서 ‘레이건 동맹’을 만든 주역으로 꼽힌다. 신자유주의, 현실주의, 기독교 우파 세력이 핵심이다. 트럼프와 같은 미국 우선주의자와 네오콘은 곁다리다.■ 뒤이은 조지 부시 정부(1989~1992년)의 성격도 비슷하다. 단, 그의 집권기에 일어난 1차 걸프전과 소련 붕괴 등은 네오콘 세력이 힘을 키우는 계기가 된다.신자유주의는 민주당 출신의 빌 클린턴 대통령 집권기(1993~2000년)에 더 번창한다. 세계무역기구(WTO)가 설립되고 금융규제가 풀리며 국경을 넘는 자본의 활동이 활발해진다. 대외정책에서는 국제주의가 주를 이루면서, 국제기구와 비정부기구(NGO)의 활동이 크게 늘어난다. 클린턴 정부는 사회문화 영역에서 진보적 자유주의를 추구하지만, 이에 대한 반발로 기독교 우파의 활동이 더 활발해진 것은 역설적이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하원 다수당이 수십년 만에 공화당으로 넘어간다. 신자유주의 전성기인 이 시기에 미국 우선주의가 설 자리는 없다. 커지는 빈부 격차와 노동조건 악화 등에 항의하는 반세계화 운동이 거세지지만, 민족주의보다는 약탈적인 자본에 맞서 다양한 민중 세력이 연대하는 성격이 강했다.■ 신자유주의는 아들 조지 부시 대통령 집권기(2001~2008년)에도 이어져 2008년 미국발 세계 경제위기를 낳는다. 대외정책에서는 네오콘 세력과 일방주의가 득세하고, 기독교 우파는 보수정권을 뒷받침하는 분명한 축의 하나가 된다. 이 시기 네오콘은 자유주의·세계주의와 일정 부분 결합한 면에서 미국 우선주의와 거리가 있다. 이라크 침공을 주도한 세력이 ‘민주주의 확산’을 명분의 하나로 내세운 것이 그런 사례다.버락 오바마 대통령 정부(2009~2016년)가 신자유주의에 대한 확실한 개혁을 추구하고 대외 개입을 줄였다면 이후 미국 우선주의가 득세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오바마는 경제위기의 주범이었던 금융자본을 규제하는 데 실패한다. 그가 의욕적으로 추구한 건강보험 개혁도 악화한 양극화 추세를 바꿔 삶의 질을 개선하는 데까지는 가지 못한다. 오바마 정부의 국제주의도 부시 정부의 일방주의로 무너진 국제 체제에 새 힘을 불어넣기에는 미흡했다. 그의 대외정책은 어설픈 타협을 추구하거나 불필요한 개입을 계속한다는 이유로 보수·진보 양쪽으로부터 비판받는다. 거기에다 경제위기로 큰 타격을 받은 중산층과 저소득층의 불만이 누적된다. 이런 맥락 속에서 미국 우선주의는 새 기회를 맞고, 이는 트럼프의 극적인 대통령 당선으로 나타난다.■ 트럼프 정부는 미국 우선주의와 네오콘, 기독교 우파 세력을 토대로 한다. 한 세대 전 레이건 집권기와 비교해보면, 신자유주의와 현실주의에 대해 보조적 위치에 있던 미국 우선주의와 네오콘이 주된 자리로 올라섰음을 알 수 있다. 사회정치 세력으로서 기독교 우파는 꾸준히 영향력을 유지한다.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는 모든 국내외 정책에 적용된다. 국내에서는 이주민을 비롯해 소수파에 대한 공격이 핵심이다. 나라의 정체성을 백인에서 찾기 때문이다. 흔히 미국을 이민자의 나라라고 하지만, 미국 우선주의자를 비롯한 완고한 보수세력에게 백인은 신대륙을 개척하고 나라를 만들어 주도하는 특수한 지위를 갖는다. 대외관계에서 미국 우선주의는 잠재적 적국이나 경쟁국뿐만 아니라 동맹국과 우방국에도 적용된다. 상대가 누구든 압박을 가해 이익을 끌어낸다. 공격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시한도 없다. 상대가 한번 양보하면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양상마저 보인다.■ 트럼프 정부의 행태는 미국 바깥뿐만 아니라 안에서도 비판받는다. 하지만 민족주의는 미국 정치권에서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 미국 우선주의가 정착돼가는 양상이다. 트럼프가 사라지더라도 미국 우선주의는 상당 부분 유지될 것이다.가장 분명한 분야가 중국 정책이다. 트럼프가 벌이는 대중국 관세·기술·통화 전쟁은 달러패권의 앞날을 가늠할 시금석이다. 트럼프를 경원한 전통적인 공화당 주류파뿐만 아니라 민주당의 다수도 중국에 대해 강한 경계심을 나타낸다. 어느 정권이든 적어도 앞으로 10년 동안은 대중국 공세를 이어갈 거라는 전망이 유력하다. 중국의 강한 반발을 고려하면, 미국의 모든 대외정책이 대중국 관계를 중심으로 움직일 수 있다.이제 미국 우선주의를 배제한 지구촌 국제관계는 생각하기 어렵다. 지난 2~3년 동안 일어난 정세 변화의 많은 부분이 이와 연관된다. 미국 우선주의를 상수로 두면, 지구촌 전역에서 민족주의가 강해지고 갈등이 더 커질 것이 분명하다. 세계주의 성격의 신자유주의가 대규모 경제위기를 불러온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새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

걷는 생활의 뒷면

필자는 장애인이다.오른쪽 다리가 거의 없어, 양쪽에 지팡이를 짚고 다닌다. 의족은 오히려 몸에 부담돼, 오랜 우여곡절 끝에 포기했다. 휠체어를 타고 다니기도 했으나, 10여년 전 마음먹고 걷기를 시도한 뒤로는 사용하지 않는다. 몇해 전부터는 지하철로 출퇴근한다. 집에서 역까지, 역에서 회사까지 각각 10~15분씩 걸린다. 만만찮은 거리다. 점심시간의 산보까지 합쳐 하루 1만걸음은 걷는다. 이제 팔다리 힘이 부족하거나 체력이 달려 걷지 못하는 일은 없다.지하철에서 나와 같은 장애인은 거의 본 적이 없다. 정해진 시각에 출퇴근하는 장애인이 많지 않은데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쉽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나 역시 지하철 출퇴근을 하기까지 오랜 시일이 걸렸다. 실제 해보니 상당한 적응 과정이 필요했다. 곤란한 경우도 계속 생겼다. 이런 경험을 얘기하는 것은 일상의 작은 부분들이 모여 함께 사는 삶이 이뤄진다는 생각에서다.■ 지팡이를 짚고 다니면 조심해야 할 게 많다. 돌발 상황에 대한 대응력도 떨어진다.계단을 내려갈 때 벽 쪽에 붙는 것은 기본이다. 사람을 피하고, 넘어지더라도 덜 다치기 위해서다. 에스컬레이터를 안정감 있게 타게 될 때까지 적잖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움직이는 계단 바로 앞에 서서 오른손으로 난간을 잡고 왼발을 정확하게 디뎌야 한다. 오른쪽 지팡이가 바닥이나 벽에 걸리면 안 되므로 동시에 살짝 안쪽으로 튕긴다. 그리고 바로 왼쪽 지팡이를 왼발 옆에 위치시켜 균형을 잡는다. 쉬운 듯하지만, 지금도 첫발을 디딜 때 약간 긴장한다. 한번은 넘어지기도 했다. 내릴 때는 계단을 몇개 남겨두고 양쪽 지팡이를 똑바로 세워 준비해야 한다. 앞사람과 붙어 있으면 부닥칠 수 있으므로 적어도 두 계단 정도는 간격을 둬야 한다. 한번은 여행 가방을 끌고 가던 앞사람이 늦게 내려 가방 위에 쓰러진 적이 있다.전동차 안에서는 반드시 출입문 가까이에 있어야 한다. 사람에 막혀 내릴 수 없는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서다. 혼잡한 전동차의 반대쪽 문으로는 내리기가 어려우므로 다음 차를 기다려 탄다. 다행스럽게도 출근 시간에는 시내에서 바깥쪽으로 가는 방향이어서 대개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양쪽 끝 노약자석은 대개 한둘 정도 빈자리가 있다. 그래도 안심할 수 없으므로 승강장에서 차량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있다가 빈 좌석이 있는 곳으로 이동해서 탄다. 내릴 때는 전동차가 역에 진입할 때쯤 일어나 어딘가에 기대 서 있는 게 좋다. 차가 완전히 정지하면 두세걸음 이동해서 내린다.내린 뒤 계단 쪽 모서리를 돌 때가 가장 위험하다. 전동차에 타려고 뛰는 사람이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있다. 그래서 애초부터 내리는 역의 계단 전체가 보이는 칸에 탄다. 계단을 오를 때도 역시 오른쪽 난간이나 벽 쪽에 붙는다.이 모든 걸 실수 없이 해야 안전하게 지하철을 이용할 수 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돌발 상황이 벌어진다. 며칠에 한번은 위험한 일을 겪는다. 거의 사람이 원인이다.무엇보다 앞을 보지 않고 걷는 사람이 너무 많다. 원래 산만한 이도 있지만 요즘은 대부분 휴대전화 탓이다. 지팡이를 짚고 가면 바닥을 보고 걸을 수밖에 없다. 작은 굴곡이나 물기, 쓰레기 등도 피해야 하기 때문이다. 시야는 발아래 1~2m 정도로 제한된다. 그런데 앞쪽에서 그 범위 안으로 다가오는 사람이 있다. 한번 지하철을 타고 내릴 때마다 적어도 10여차례는 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젊은 사람이 많았지만, 이제는 나이 든 이도 적잖다. 나이가 많을수록 동작이 둔해 부닥치기 직전에야 멈추게 된다.바로 앞에서 휴대전화를 보며 가다가 갑자기 서버리는 경우도 하루 여러차례 경험한다. 옆으로 피할 수가 없어, 재빨리 서지 않으면 충돌한다. 계단을 오를 때는 더 위험하다. 약간의 반동을 주고 한번에 두세 계단씩 오르는 게 보통인데, 앞에서 멈추면 부닥칠 확률이 아주 높다. 이런 사람은 대개 걸어가는 속도도 느리다.에스컬레이터에서 걸어서 올라가며 가방이나 몸이 내 지팡이에 부닥치기도 한다. 학생이나 젊은 여성이 여러개의 가방을 들고 가거나 휴대전화를 보며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미안하다는 말도 없는 것을 보면, 자신의 행동이 옆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게 분명하다.전동차에 빨리 타려 하거나 한가운데 서서 내리는 길을 막는 사람도 가끔 있다. 자칫 지팡이와 부딪치면 사고로 이어질 수 있어 가슴이 철렁한다. 전동차 문이 열릴 때까지 문 안쪽에 붙어 서서 길을 막는 사람도 있다. 대개 휴대전화를 보거나 졸고 있다.지팡이를 짚고 다니면, 사람들의 동선을 살펴 그 흐름을 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된다. 그런데 흐름을 흩트리거나 무심하게 다니는 사람이 상당히 있다. 모두 움직이는 폭탄과 같다. 뛰어다니는 사람은 더 위험하다. 그래 봐야 절약할 수 있는 시간은 1분이 안 된다.■ 우리나라 지하철은 세계에서 가장 쾌적하고 안전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나에게는 그렇지 않을 때가 있다.비가 오는 날에는 역 바닥 전체가 너무 미끄럽다. 지팡이 아래쪽 고무의 지름은 4.5㎝ 정도다. 미끄러지지 않도록 항상 조심해야 한다. 이상하게도 돈을 많이 들인 곳일수록 더 미끄럽다. 아스팔트나 거친 시멘트 길이 가장 마찰력이 강해 안전한 편이고, 반질반질한 지하철 바닥은 주차장과 더불어 최악이다. 걸음마다 지뢰밭을 통과하듯이 조심해야 한다. 몇차례 넘어지기도 했다. 처음 공사할 때 신경 쓰지 못했더라도, 적어도 바닥 일부분을 덜 미끄럽게 바꿀 수는 없을까.엘리베이터가 적은 것은 어쩔 수 없는지도 모른다. 가끔은 직원이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라고 안내하기도 한다. 가는 방향과 다르면 이용하기 어렵다.출퇴근 시간의 혼잡은 피할 수 없겠지만, 흐름을 더 원활하게 하는 방법은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 오가는 사람이 마주치는 곳에는 대개 봉과 줄 등의 차단 시설이 돼 있다. 하지만 지키지 않는 사람이 적잖다. 좁은 공간에 발 디딜 곳이 없을 정도로 사람이 몰려오는 경우가 흔하다. 이런 구역에는 좀 더 확실하게 흐름을 통제할 수 있도록 시설을 보완할 필요가 있다.■ 나의 걷는 생활에서, 지하철의 난이도는 중간 정도다. 시내버스는 그 위쪽에 있다. 혼잡한 차 안에서 자리 잡기와 승하차가 모두 어렵다. 그래서 아직도 혼자서는 버스를 타지 않는다. 길을 걸을 때도 지하철만큼은 아니지만 조심해야 한다. 각종 요철과 장애물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은 사람이다. 좁은 인도에선 사람끼리 부닥치고, 좀 넓은 인도에는 자전거와 킥보드는 물론이고 오토바이까지 다닌다. 등산은 스스로 선택한 고생길이므로 논외로 한다.애초부터 시설이 미비하면 이후에 고치기는 몹시 어렵다. 사람의 행위는 조금만 신경 쓰면 바꿀 수 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할수록 함께 사는 삶은 더 풍요로워진다. 고령화가 심해지는 상황에서는 더 그렇다. 매일 걸으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생각한다.

인종주의 확산, 어디까지?

지구촌 곳곳에서 인종주의가 확산하고 있다. ‘네 나라로 돌아가라’는 구호가 상징하듯이, 이제는 새 이주민뿐만 아니라 자국 시민이나 오랜 거주자에도 칼을 들이댄다. 인종주의를 공개적으로 내건 나치 정권이 2차대전을 일으킨 1930년대 이후 가장 위험한 상황이라는 분석까지 나온다. ‘성공한 다인종 국가’인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이에 크게 기여하는 점은 역설적이다.■ 인종주의(racism)란 “행위가 아니라 속성에 근거해 타자를 분류하고, 측정하고, 가치 매기고, 증오하고, 심지어 말살하는 서양 근대의 이데올로기”(<낙인찍힌 몸>)다. 곧 겉모습만으로 다른 사람을 차별하고 박해하는 정치·사회 이념이다. 가장 두드러진 속성은 피부색이지만, 종교·민족·외모·문화 등도 빌미가 된다. 이슬람권 이주민을 공격하는 유럽 극우파의 행동 역시 인종주의의 산물이다.인종주의는 서구 제국주의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대외 팽창에 나선 서구인이 자신과 겉모습이 다른 사람에 대한 착취와 억압을 정당화하려고 고안한 사상적 도구가 인종주의다. 가장 구체적인 계기가 아프리카 흑인의 노예화와 노예무역이다. 유럽인이 주도한 대서양 횡단 노예무역 규모는 16세기 중반부터 19세기 말까지 1200만명에 이른다. 유럽인은 이 노예들에게 열등한 인종이라는 낙인을 찍었다.현대 과학의 틀이 마련된 19세기에 인종주의는 새 차원으로 접어든다. 두개골을 측정하는 골상학과 우생학이라는 유사과학을 통해 인종 사이 우열을 정당화하려는 시도가 기승을 부린다. 강자 중심의 논리로 왜곡된 사회진화론도 인종주의 확산에 기여한다. 민족주의가 근대국가의 기본 원리로 자리를 잡으면서 인종주의의 외연이 넓어지고 강도가 높아진 것도 이 시기다. 생물학적 인종주의라고 할 이런 여러 흐름이 모이는 곳에 나치 정권이 있다.지금의 인종주의는 신인종주의 또는 문화적 인종주의로 불린다. 생물학적 인종주의에 사회·경제·종교·문화적 요인이 더해져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지리적으로도 인종주의 역사가 오랜 서구 나라들뿐만 아니라 이들을 모델로 삼아 근대화에 나선 많은 나라가 인종주의에서 비롯되는 크고 작은 갈등을 겪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인종주의 행태는 젊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백인 우월주의자 수준으로 뿌리가 깊은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그러나 정치 무대에 나선 뒤로는 일관되게 인종주의에 기댄다. ‘정치적 인종주의자’ 또는 ‘전략적 인종주의자’인 것은 확실하다. 그는 최근 유색인종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고 있다. 여성 유색인종으로 민주당 초선의원이 된 4명에게 “네 나라로 돌아가라”고 한 게 대표적이다. 이들은 각각 푸에르토리코계, 소말리아계 무슬림, 팔레스타인 난민 2세, 흑인이다. 그의 인종주의는 외국인·여성에 대한 혐오와 결합해 있다.인종주의 정치는 1970년대까지 흑인이 많은 미국 남부에서 성행했다. 이후 이 지역의 경제·문화가 발전하면서 크게 줄었고, 인종주의에 기댄 정치 행태는 일종의 금기가 됐다. 트럼프는 이 흐름을 되살려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고 있다. 최근 잇달아 일어난 백인 우월주의 총격범죄도 그 흐름 속에 있다.트럼프는 ‘착한 우리 대 나쁜 그들’의 구도를 만들어 당파성을 극대화하는 정치를 한다. 겉모습이 다른 소수파를 희생시켜 지지세력을 결집하고 권력 집중을 꾀하는 것은 인종주의 정치의 기본 공식이다. 공화당 안에서는 이미 성공하고 있다. 트럼프에게 호응해 발언하는 의원이 늘고 있으며, 온건파는 침묵한다. 트럼프가 백인 정체성 강화를 부추기기 위한 무기는 하나 더 있다. 경제 민족주의가 그것이다. 곧 인종주의와 무역전쟁이 트럼프 정치의 고갱이다.■ 트럼프의 인종주의는 공격적이긴 하지만 아직 미완이다. 오랜 시일에 걸쳐 형성된 자유·민주 제도가 작동하는데다 여론의 저항도 거세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자국 내 소수파에 대한 인종주의를 법으로 이미 완성한 나라가 있다. 이스라엘이다.이스라엘은 건국 70돌을 맞은 지난해 7월 전례 없는 내용의 민족국가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이스라엘은 유대인의 역사적 조국이며, 그들은 배타적 자결권을 갖는다”고 규정한다. 이스라엘에는 인구의 20%가 넘는 200만명의 아랍계 주민이 산다. 유대인이 배타적 자결권을 갖는다면 이들이 설 자리는 없다. 정부는 이들의 시민권을 보장하겠다고 하지만 실제 분위기는 그렇지가 않다.아랍계 주민(팔레스타인인)들을 축출하려는 움직임이 갈수록 힘을 얻고 있다. 골다 메이어 전 총리는 ‘요르단이라는 팔레스타인 국가가 이미 있는데, 왜 팔레스타인 사람이 이스라엘에 사는가’라고 한 바 있다. 이른바 ‘요르단 옵션(선택지)’이다. 우파 정치인과 군인, 학자 등을 중심으로 이에 대한 지지가 커진다.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인구 위협’으로 규정한 바 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추방을 지지하는 유대인의 여론도 절반 정도까지 높아졌다. ‘땅과 평화의 교환’이라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해법은 사실상 폐기 상태다.이런 인종주의는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거울 이미지처럼 뒤집어 놓은 것과 같다. ‘욕하면서 닮는’ 꼴이다. 트럼프는 이스라엘 우파의 이런 움직임을 강하게 지지한다. 그는 이스라엘이 1967년 3차 중동전쟁 때 점령한 골란고원에 대한 이스라엘의 주권을 지난 3월 공식 인정하기도 했다. 그는 이스라엘을 본떠 ‘미국은 백인이 배타적 자결권을 갖는 국가’라고 규정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네 나라로 돌아가라’는 구호는 일본에서도 나온다. 대상은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이주한 재일동포와 그 후손이다. 일본 우익세력은 재일동포가 오히려 특권을 누린다며 추방할 것을 주장한다. 이들은 군대위안부나 강제징용자 개인 배상 문제도 인종주의 시각에서 본다. 존재하지 않거나 이미 해결된 사안인데도 자꾸 들추는 것은 뒤떨어진 민족이 ‘무오류 천황’이 통치해온 일본을 흠집 내기 위해서라고 강변한다.이런 인식은 강도는 다르지만 아베 신조 총리 등 일본 집권세력도 공유한다. 그 매개 조직이 일본회의다. 이 단체는 식민지 지배와 전쟁범죄에 대해 공식으로 사과한 무라야마 총리 담화 등이 나온 1990년대 중반, 극우·보수 세력이 결성한 최대 신우익조직이다. 아베 총리는 창립 회원이다. 현재 아베 내각 각료의 80%, 국회의원의 40% 정도가 이 단체와 관련돼 있다.유럽 대륙에서도 2010년 경제위기 이후 인종주의의 득세가 뚜렷하다. 영국에서는 강경 브렉시트 지지자인 보리스 존슨 총리가 최근 취임하면서 인종주의가 더 기승을 부릴 가능성이 크다. 성향이 비슷한 트럼프와 존슨이 장기 집권에 성공한다면, 과거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가 신자유주의 시대를 열었듯이 새로운 인종주의 시대가 올 수 있다.■ 인종주의는 인류 역사에서 최대 치부 가운데 하나다. 확산하는 인종주의를 그대로 방치한다면 큰 희생과 더불어 파국으로 향할 수 있다. 우리나라 또한 이 흐름에서 자유롭지 않다.

정의와 포용

인류는 지금 대전환기에 살고 있다. 한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선진국에선 장기 저성장 추세가 뚜렷하다. 지난 한 세대 동안 지구촌의 성장 엔진 구실을 해온 중국 등 큰 개도국들도 앞날이 불확실하다. 포퓰리즘이 득세하고 주도권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모든 나라의 스트레스가 커진다. 잦아지는 갈등과 분쟁 속에서 큰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그나마 다행스러울 정도다.그럴수록 우리가 사는 자리를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무엇이 중요하며 어떻게 내실을 다져나갈지 따져보고, 더 나은 길을 찾기 위해서다.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과제는 역시 정의다. 정의롭지 못한 사회는 분열과 대립을 부르고 구성원에게 지속적인 행복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맹자가 양나라의 혜왕을 만난다.왕이 말한다. “선생(맹자)이 천리를 멀다 않고 오셨으니, 또한 내 나라에 이익이 될 일이 있겠지요?”맹자가 대답한다. “왕께서는 하필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이익 말고도) 또한 인의(仁義)가 있으니 그것만을 말씀하십시오.” “왕께서 ‘어떻게 내 나라에 이익이 될까’라고 하시면, (그 아래) 대부(귀족)들은 ‘어떻게 내 집에 이익이 될까’라고 하고, 일반 백성은 ‘어떻게 하면 내 몸에 이익이 될까’라고 합니다. 이렇게 위아래가 서로 이익을 다투면 나라가 위태로워집니다.” “만약 의를 나중으로 하고 이익을 우선으로 하면 (아래는 위가 가진 것을 모두) 빼앗지 않고는 결코 만족하지 않을 것입니다.”<맹자>의 맨 앞쪽에 있는 ‘양혜왕’편의 한 대목이다. 정의(의)는 동아시아의 문화 전통에서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한다. 맹자는 인(사랑)을 가장 우위에 둔 공자를 계승하면서 의를 인과 대등한 수준으로 높인다. 이후 ‘인의’ 또는 ‘인의예지’는 유교의 최고 규범으로 자리잡는다.■ 역사적으로 볼 때, 정의에 대한 인류의 사고는 크게 세 범주로 나뉜다. 첫째는 공리주의 영역이다. 여기서 정의의 실현은 목표에 얼마나 다가가느냐에 따라 평가된다. 그래서 목표 성취에 도움이 되는 원칙·규칙·제도를 잘 정하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공리주의 영역이라고 하는 이유는 역사상 나타난 다양한 목표 가운데 공리주의가 내세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가장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이 목표는 주기적인 선거와 다수결을 기본 원리로 하는 근대 민주정치의 정신과 맥이 닿는다.이와 달리 의무론적 영역은 특정한 목표 달성과는 별개로 옳은 것이 존재하며, 이를 지키는 것이 바로 정의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는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절대 정의로울 수 없다고 강조했고, 이마누엘 칸트는 ‘너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인격을 언제나 목적으로 대하고 수단으로 대하지 말라’고 했다. 의무론적 영역의 많은 부분은 현대 민주사회에서 기본권의 형태로 자리잡고 있다. 곧 모든 구성원이 자유권·평등권·사회권·참정권·행복추구권 등을 갖지 못한 사회는 정의롭지 못하다.마지막 영역은 상호성에 뿌리를 둔 정의다. 상호성은 사람들 사이 관계에서 생기는 정의감을 중시한다. 고대사회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와 같은 원칙이 이에 해당한다. 현대 정의론을 정립한 미국의 정치철학자 존 롤스는 현대사회를 ‘자유롭고 평등한 사람들 사이에 오랜 세월에 걸쳐 공평하게 작용하는 사회적 협력 시스템’으로 보고, ‘공정으로서 정의’를 주장한다. 사회를 구성하는 상대적으로 대등한 사람들이 공정에 대해 평가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균형 있는 상호성’이다. 대등한 사람끼리는 서로에 대한 의무도 같으며, 이것이 바로 공정이자 정의다.(<정의의 역사>)현대사회에는 이 세 가지 형태의 정의가 섞여 있다. 셋이 유기적으로 잘 결합해 실행에 옮겨질수록 건강하고 활력있는 사회가 만들어진다.■ 정의와 자유는 어떻게 연관될까?자유는 민주사회의 기본 전제이지만, 사회적으로 정의는 자유를 규율한다. 자유의 구체적 형태는 세 가지 정의관의 연장선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우선 모든 사람의 기본권은 보장돼야 하므로, 다른 사람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자유는 허용되지 않는다. 또한 원칙적으로 현대사회의 모든 시민은 균형 있는 상호성을 가지며, 동일한 수준의 자유와 의무가 적용된다. 삶의 조건이 열악하거나 보통의 시민에 비해 대등하지 않은 사람은 이미 자유에서 제약을 받고 있으므로, 기본권인 자유권을 보장하는 차원에서 사회적인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 ‘사회적 협력 시스템’이 작동하는 사회라면, 삶의 조건이 나은 이들이 여기에 필요한 자원을 능력에 따라 부담하는 것은 민주주의 원리에 들어맞는다. 물론 그 부담이 일정한 선을 넘어설 경우 자유의 제약이라는 반발이 나오는 것은 피할 수 없다. 그 선은 각 사회의 고유한 규범과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그 외의 영역에서는 공리주의 원칙이 작동한다. 최대 행복의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어떤 행위든 자유롭다. 거꾸로 말해, 어떤 행위든 할 수 있지만 본인뿐만 아니라 다수에게 행복을 주고 있는지를 계속 점검해야 한다. ■ 문재인 정부는 과거 어느 정부보다 포용을 강조한다.성장의 혜택이 소수에게 독점되지 않고 모두에게 골고루 돌아가는 ‘포용적 성장’과 최소주의 사회복지에서 벗어나 모든 국민이 전 생애에 걸쳐 누리는 ‘포용적 복지 체제’를 추구한다. 나아가 국가 비전으로 ‘혁신적 포용국가’를 내세운다.포용은 정의 실현의 전제조건이자 유용한 수단이 될 수 있는 개념이다. 혁신적 포용국가 역시 사회정의와 긴밀하게 연관돼 있다. “국민 누구나 성별·지역·계층·연령에 상관없이 차별이나 배제 받지 않고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으며 함께 잘 살 수 있는 국가”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혁신은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이를 위한 역량과 체제를 갖춘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런 접근은 오랫동안 생산과 성장 쪽에 치우쳤던 정책의 중심을 국민의 행복과 사회정의 쪽으로 옮겼다는 점에서 역사적 타당성이 있다.중요한 것은 실천이다. 혁신적 포용국가를 만들려면, 각 분야의 각론을 비롯한 정교한 로드맵뿐만 아니라 지속해서 정치·사회적 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신뢰 구축이 필수다. 국민 다수가 사회적 협력 시스템의 가치와 역할에 대해 폭넓게 재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일찍이 공자가 말했듯이 백성의 가난보다 더 큰 문제는 고르지 못한 것이다. 다산 정약용도 “정치는 정의롭고 (백성이) 고르게 살도록 해주는 것”이라고 했다.꼭 유교 전통이 아니더라도 우리나라 사람은 정의에 대한 감수성이 강하다. 작은 일이라도 부당하게 차별을 당하면 크게 분노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살신성인의 자세로 몸을 던진다. 이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떳떳하게 살아가기 위한 근원적인 자존심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이런 정의감에 걸맞은 사회적 협력 체제를 만들어 발전과 통합의 원동력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갈수록 양극화가 심해지고 버젓한 일자리 구하기가 어려워지는 상황이어서 더 그렇다.

중동·동북아의 전쟁과 평화

‘2개의 전쟁’은 냉전 종식 이후 미국 국방전략의 기본 틀이었다. 지구촌 2개 지역에서 동시에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이길 수 있도록 한다는 게 핵심이다. 전쟁 발발 지역으로 가장 먼저 꼽힌 곳이 중동과 한반도다. 이를 반영하듯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2002년 초 중동의 이라크와 이란, 동북아의 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목했다. 이 전략은 2003년 이라크 침공으로 시작된 긴 중동전과 2008년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한곳에서 승리하고 다른 곳의 도발을 억제한다’는 내용의 ‘원 플러스’ 전략으로 바뀌었으나 한반도 전쟁이라는 가정 자체는 여전했다.■ 이제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한반도에선 평화 분위기가 조성되는 반면 중동에선 새롭게 긴장이 높아지고 있다.수십년 동안 중동 지역에선 이스라엘과 아랍 나라들의 충돌, 민족주의 세력과 외세의 갈등, 현지 세력과 손을 잡은 강대국 사이의 대립, 각국 내부의 정치·경제·사회적 모순과 분열 등이 복잡하게 얽혀 크고 작은 전쟁이 계속돼왔다. 지금은 대치선이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미국과 이스라엘·사우디아라비아·아랍에미리트가 한쪽에 있고, 이슬람 시아파가 다수인 이란·이라크·시리아·레바논이 반대쪽에 있다. 사우디와 이란 사이에 자리한 카타르·오만·쿠웨이트와 지역 강국인 터키는 양쪽과 거리를 둔다. 또 다른 강국인 이집트는 미국 쪽에 가깝다.도널드 트럼프 정부 출범 이후 이런 구도를 만든 미국은 이미 여러 효과를 거두고 있다. 팔레스타인 문제와 관련한 이스라엘과 아랍 나라 사이 대결이 희석되고, 이스라엘과 사우디가 전에 없이 가까워졌으며, 오랜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시리아 내전으로 손상된 미국의 이 지역 지배력이 강화될 터전이 마련됐다.이 구도의 전제는 이란을 용납할 수 없는 악으로 설정하는 것이다. 미국은 이를 위해 일방적이고 무리한 행동을 되풀이한다. 미국이 지난해 5월 이란의 핵 보유 시도를 막을 수 없다며 핵협정에서 일방적으로 탈퇴한 것이 고비였다. 당시까지 이란은 협정을 잘 이행하고 있었다. 미국은 이란을 테러지원국으로 다시 지정한 데 이어 정규군 조직인 혁명수비대(IRGC)를 최근 테러단체 명단에 올렸다. 이제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이란 최고지도자까지 제재 대상이 됐다.미국 쪽은 이란을 이라크·시리아·레바논과 묶어 ‘시아파 벨트’라고 비난한다. 하지만 세 나라 시아파는 각각 다른 국내 상황에 힘입어 세력을 확대했을 뿐 일방적으로 이란의 지시를 받는 조직이 아니다. 이란이 의도적으로 이들의 투쟁을 지원하기보다는 반시아파 세력의 공세가 이들과 이란 사이 협력을 유도한 측면이 강하다. 범시아파와 범수니파의 대립이라는 설정 자체가 정치적이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첫째는 전쟁에 상응하는 긴장 속에서 장기 대치로 가는 경우다. 지난 2년 동안 만들어진 신냉전 구도의 고착이다. 이와 관련해 미국이 유럽의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와 비슷한 ‘중동판 나토’ 구축을 꾀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란이 옛소련과 같은 ‘악의 제국’ 구실을 하고, 이라크·시리아·레바논 등이 이란의 위성국으로 설정되는 구조다. 현지 반이란 세력의 버팀목은 이스라엘과 사우디다. 대치선이 종교이므로 과거 냉전보다 더 오래갈 분열 구도다. 중동 사람들은 고통스럽겠지만 미국과 이스라엘로선 명쾌하다. 미군의 장기 주둔에 따른 현지인의 반발 문제도 한꺼번에 해결된다.둘째는 전쟁이다. 미국은 이란 체제를 용납할 수 없다며 ‘최대 압박’에 이어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하고 이란은 끝까지 싸우겠다고 맞선다. 타협의 여지가 보이지 않으니 논리적 귀결은 전쟁이다. 칼자루는 미국이 쥐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전쟁 없이 이란을 굴복시키고 싶어 하지만,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과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등은 그렇지 않다. 볼턴이 대표하는 네오콘 강경파는 이라크전에 대해서도 지구촌 시민 다수와 생각이 다르다. 이라크 침공은 정당하고 필요한 것이었으나 부시 대통령이 전쟁을 잘 수행하지 못했으며, 뒤이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전쟁을 망쳤다고 본다. 이란을 굴복시키면 그때의 실패를 보상받고 중동에서 훨씬 나은 위치에 설 수 있다는 게 이들의 판단이다.중동 지역 패권 유지는 미국 대외정책의 중요한 축이다. 방법은 정권에 따라 달라진다. 현지 세력을 활용해 갈등을 부추기고 분할지배하는 것이 기본이지만, 무력 개입도 항상 선택지에 있었다. 민주주의 확산, 근본 악을 막기 위한 최후의 전쟁(아마겟돈) 등이 뒷받침하는 논거로 사용된다.■ 이란은 미국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 없지만 미국 역시 승리하기 어렵다.이란은 침공 당시의 이라크에 비해 면적은 4배가 넘고 인구는 4배에 가깝다. 미군 수십만명을 투입해도 완전한 점령은 불가능하다. 유전 등 이란의 산업시설을 파괴하고 대외관계를 봉쇄해 스스로 무너지도록 해야 하는데, 40년 내전 속에서도 버티는 아프가니스탄 저항세력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수십년은 갈 것이다. 이란의 끈질긴 저항과 함께 국제 유가는 급등하고 중동 전역이 심한 갈등에 휩싸이게 된다. 공멸의 길이다.미국 정부 안에서도 의견 일치가 돼 있지 않다. 국방부와 군부 인사들은 중국·러시아에 초점을 맞춘 대국 경쟁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이들은 이라크전 이후 그랬듯이 테러 대응 등 비대칭적 전쟁에 계속 매달리다가는 중·러의 추월을 허용하게 될 것으로 우려한다. 미국 내 여론도 또 다른 중동 전쟁에 우호적이지 않다.이런 분위기는 전쟁보다 신냉전 고착 쪽의 가능성을 높인다. 어느 한쪽의 섣부른 행동으로 국지전이 일어나더라도 전면전으로 확산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신냉전 역시 전쟁이다. 기존 문제는 거의 해결하지 못한 채 새 갈등이 깊어져 중동 전역을 피폐하게 만들 것이다.■ 어떤 곳에서 전쟁 위험이 이어지는 것은 평화의 구조를 만들지 못했거나 그런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슷한 위험지역으로 여겨진 중동과 한반도·동북아의 가장 큰 차이가 여기에 있다.미국과 중국은 지금 무역·기술 등 경제 영역에서 패권 쟁탈전을 벌이고 있다. 군사 분야에서도 남중국해를 중심으로 영향력 강화 경쟁을 한다. 남중국해나 동중국해에서 미국과 중국 사이에 무력 충돌이 일어날 수도 있다. 한반도·동북아라는 지역 개념을 동아시아 전체로 확장한다면 평화 구조가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이를 미-중 신냉전의 시작으로 볼 수 있다.그러나 냉전 시절처럼 한반도를 두 진영의 최전선 또는 우선 충돌 지점으로 보는 시각은 바뀌고 있다. 앞으로 동아시아에서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한반도는 아니다. 우리가 평화를 위해 그만큼 노력했고, 북한·미국·중국 역시 속셈은 다르더라도 상당 부분 호응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명확하게 합의된 형태는 아니더라도 평화를 떠받치는 기반이 넓어지고 있다. 북한 핵 문제 해결 노력이 되돌릴 수 없는 실천 단계에 접어든다면 항구적 평화 구조가 더욱 분명하게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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