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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음2/교보문고 북캐스트

우리는 왜 그날을 잊어서는 안 되는가?

천아1234 2021. 7. 20. 07:49

#차이나는클라스 #황석영 #역사 #광주항쟁 #민주주의



너희들은 폭도를 죽이는 거다이것은 살인이 아닌 휴가다.” 1980년 5월 광주로 향한 무장 공수부대의 작전명 화려한 휴가‘. 민간인 사상자 약 4천 7백 명이 발생한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처참한 비극이었다생존과 죽음으로 갈렸던 광주에서의 그날 흘린 피의 대가로 오늘날 민주주의가 주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광주 시민들은 왜 죽어야만 했는가대한민국 현대사의 산증인 작가 황석영이 이야기하는 잊을 수도 없고잊어서도 안되는 1980년 5월 우리가 몰랐던 광주의 진실. “이 빛나는 계절에 위대한 시민들은 세상을 바꾸어놓았다.”



현대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질서가 시작된 곳이 바로 광주입니다전 세계가 모두 근대화를 겪잖아요그런데 우리의
 근대화는 왜곡된 역사예요근대화의 가치가 무엇일까요기본적으로 인권평등자유 같은 개념들을 확인해 가는 과정이에요그런데 우리는 근대화의 기본 가치가 되는 민주화와 민주주의를 억압하면서 근대화를 수행했기 때문에 왜곡될 수밖에 없었어요그리고 거기에 남아 있는 상처가 즐비합니다. 광주는 우리의 모든 우여곡절의 시작으로한국 민주주의가 늘 돌봐야 하는 자기반성의 가치입니다.





박정희 장군으로부터 비롯된 1차 군부의 개발 독재, 전두환으로부터 비롯된 2차 신군부의 개발 독재까지 30년이나 지속된 군부 독재의 시대가 있겠죠. 그 가운데 광주항쟁이 터졌습니다. 광주의 피의 대가로 1987년 6월에 형식적인 민주주의를 얻었죠. 그전까지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실행되지 않았어요.



광주에 와보니 모두 죽고 구속되고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른 지역은 오히려 평온했어요. 대학가나 중요 지역에서는 총검을 든 공수부대가 탱크를 앞세우고 점령하고 있었으니까요. 게다가 방송과 언론은 모두 통제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5월 19일자 신문을 보면 광주에 대한 소식은 한 줄도 실리지 않았어요. 현장에 있던 사람과 서울에 있던 사람이 보고 접한 게 전혀 달랐던 거예요. 정말 자책할 수밖에 없었죠. 도청에서 마지막까지 총을 들고 있었던 정상령과 정영호가 찾아와 광주항쟁을 집대성하는 기록을 만들어달라고 했고, 제가 안 하면 누가 하겠냐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집필하게 된 겁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작한 것도 그래서죠.





광주가 끝난 다음에 살아남은 사람들의 1차적 임무는 광주의 진실을 알려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동아시아의 작가, 특히 분단된 한국의 작가는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요즘도 농담 삼아서 ‘한국작가는 역사라는 엄처시하에 산다’라고 얘기를 해요. 한국의 작가는 자유를 쟁취할 수가 없어요. 예를 들어 바위에 대해서 쓴다거나, 순수한 내 사랑에 대해 쓸 거라고 할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이 한국이라는 땅에서는 그러지 말라는 겁니다. ‘너 정말 그럴 거야? 그럴 수가 있어? 네가 같이 살면서?’ 이런 심리가  있어요.



17일에는 군대가 도서관에 있던 학생이나 학생회를 급습해서 모조리 연행을 했어요. 그리고 학교를 점령했습니다. 학생들이 18일(일요일)에 모여서 ‘비상계엄 해제하라’ 등등을 외치고 있는데, 공수부대가 와서 마구 패기 시작했어요. 학생 중에 부상자가 많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거리로 밀려나오게 되죠. 19일에는 공수부대가 학생뿐만 아니라 시민들이 모여있으면 시위를 했든 하지 않았든 무조건 그냥 팼어요. 그리고 살상이 벌어지기 시작하죠.







그들은 물푸레나무로 만든 몽둥이에 쇠심을 박아서 폭동진압용으로 썼어요. 인마 살상용인 것이죠. 그 몽둥이에 정통으로 맞으면 즉사해요. 19일에는 백주대낮에 벌어지고 있는 살상행위들을 많은 시민이 목격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광범위하게 저항이 일어나고 죽기 아니면 살기식으로 싸우게 되죠. 이른바 생존권 투쟁인 겁니다. 클라이맥스는 20일 광주역 전투였어요. 군 보급품을 모두 광주역에서 받았는데 그것을 빼앗으려고 한 거죠. 21일에는 본격적인 조준사격이 벌어져요. 그러자 시민들이 ‘우리들에게도 무기가 있어야 된다’는 생각에 외곽으로 나가서 예비군 무기고를 탈취해 시민군을 조직하게 되죠.



가구공, 음식점 종업원, 단순노동에 종사하는 청소년 같은 20대 초반의 청년들이 주로 항쟁에 참여했어요. 가정집에 들어가서 시위자건 아니건 젊은 사람이 있으면 다 끌고 나와서 팼습니다. 원래 공수특전단은 민간인을 상대로 투입해서는 안 되는 특수부대예요. 당시 외신기자들은 군인을 폭도라고 묘사했어요. 역사적으로 12·12는 반란군, 군사반란이었다고 단죄를 하고 있고, 전두환이나 노태우도 군사반란죄로 최고 사형을 받았다가 사면이 된 겁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 군대는 국민의 군대가 아니고 폭도로서, 비정통적 군대로서, 반란군으로서, 일부 신군부라는 정치 일파의 사병으로서 폭력을 저지른 거예요. 계엄사의 자료를 보면 계엄령이 떨어지기 전부터 엄하게 훈련시켰다고 합니다. 적개심을 키워서 데모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죽일 듯이 대하게 된거죠. 게다가 아이로니컬하게 작전명이 ‘화려한 휴가’잖아요. 끔찍해요.





감옥을 나와서 나를 기다려준 오랜 벗들에게 ‘내가 이제야 귀국 신고를 한다‘고 말했어요. 그렇게 세상 속으로 나왔고, 광주로부터 비롯된 여정이 끝났어요.  근대의 터널 앞에는 기억과 망각의 갈등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기억하라고 말하는 쪽, 망각하라고 말하는 쪽 이렇게 나뉘어요. 샤머니즘 세계에서는 기억의 끝까지 밀어붙여서 죽은 자와 산 자를 불러내 그 둘을 붙여놓고 진실을 밝힙니다. 그것을 해원이라고 해요. 그리고 나서 용서를 하는 거예요. 그다음에는 같이 사는 거예요. 상생이죠. 

우리 사회도 이래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근대사의 비극적 정점이 광주였고, 그 덕분에 이 정도의 사회 시스템과 제도를 갖추었고 민주적으로 성숙해질 수 있었어요. 하지만 비극은 남아 있죠. 2017년 5·18 기념식에서 항쟁 당시에 태어난 분이 광주에서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쓴 편지를 읽고 문재인 대통령이 가서 안아주는 장면을 보는데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몰라요. 너무 당연한 일인데, 당연히 이랬어야 하는 일인데, 그래서 많이 울었습니다.그러니까 우리가 잊지 말고, 기억하고, 진실을 밝혀내고, 용서하고, 같이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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