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ICT와 미래(ICT and Future) 티스토리 블로그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 본문

카테고리 없음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

천아1234 2022. 6. 8. 18:29

한국 보호국화를 일찍부터 거론하고 있던 일본은 1905년 들어 러일전쟁에서 승세가 굳어지자 이토 히로부미를 파견하여 보호조약 체결을 추진하도록 하였다. 고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을사조약은 강제로 체결되었고, 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통감부가 설치되어 일본의 간접적인 통치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자 국권침탈에 분노한 의병들도 다시 봉기하여 의병항쟁을 전개하였다.
한국 보호국화를 일찍부터 거론하고 있던 일본은 1905년 들어 러일전쟁에서 승세가 굳어지자 한국의 병합을 굳히기 위하여 앞서 체결했던 ‘한일의정서’와 ‘제1차 한일협약’의 기반 위에 법적으로도 보호국으로 만든다는 계획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계획은 러일전쟁의 종전을 전후하여 열강으로부터 한국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양해받기 위한 작업으로 진행되었다.
우선 1905년 7월에 미국과 카쓰라-테프트 밀약을 교환하여 미국의 사전 묵인을 얻고, 이어서 8월 제2차 영일동맹의 체결로 영국의 동의를 받았다. 이어서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며 9월 5일 러시아와 미국의 포츠머스에서 체결한 러일 강화조약 체결로 러시아의 인정까지 얻어냄으로써 한국을 보호국화하려는 일본의 침략 의도는 주요 제국주의 열강의 지지와 묵인을 받기에 이르렀다.
한국을 보호국화하기 위한 대외적 준비를 마친 일본은 조약문의 원안을 사전에 작성하는 등 치밀하게 보호조약의 체결을 위한 준비를 서둘렀다. 이에 따라 일본은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파견하여 보호조약 체결을 추진하도록 하였다. 11월 9일 한국에 도착한 이토는 고종을 알현하고 일본에서 만들어온 협약안을 제출하고 조약체결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고종이 조약체결을 완강히 거부하자 11월 17일 일본공사는 한국정부의 각부 대신들을 일본공사관으로 불러 보호조약 체결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그럼에도 한국정부의 반대에 부딪혀 결론이 나지 않자 일본공사는 궁궐주위와 시내 곳곳에 무장한 일본을 배치하여 무력시위를 하며 오후 3시 궁중에 들어가 어전회의를 요구하였다. 하지만 어전회의에서는 조약을 거부하기로 결정이 났고, 이후 고종은 어전회의를 거부하고 일본공사의 면회를 거부하였다.
이에 이토는 주한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를 대동하고 들어와 고종이 참석하지 않은 회의를 다시 열어 참석한 대신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조약 찬성 여부를 강요하였다. 이때 조약체결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대신들을 제외하고 찬성하는 박제순·이지용·이근택·이완용·권중현의 5명의 승인을 받아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였다.
을사조약에 의해 한국은 일본에게 외교권을 박탈당하였고 통감부가 설치되어 일본의 간접적인 통치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자 한국 내에서는 반일열기가 고조되어 유생들과 전 현직관료들은 을사5적의 처단과 조약 파기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는 한편 자결로 국권침탈의 울분을 토하기도 하였다. 국권침탈에 분노한 의병들도 다시 봉기하였고 전국적으로 국권 회복을 위한 의병항쟁을 전개하였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