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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주필이 모르는 소송 '준비서면' 속의 김대중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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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주필이 모르는 소송 '준비서면' 속의 김대중

천아1234 2021. 4. 11. 12:22

내가 당한 명예훼손 사건
수습기자로 출발하여 한 신문사에 반세기를 재직한 사람은 내가 아는 한 우리 언론 역사상 김대중 고문이 유일하다. 일선기자에서 부장, 국장, 주필을 거치는 동안 글 쓰는 부서에만 종사하면서 세운 기록이다. 하지만 김대중을 평가할 부분은 따로 있다. 그는 1990년 대 10년 동안 전국 언론인 가운데 영향력 1위의 자리를 내놓지 않았다. 논객으로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독보적인 위상이다. 여기서 나는 김대중 고문이 모르는, 어쩌면 작지만 의미 있는 사건을 이야기 하고자 한다.
1999년 6월에 나는 강준만(전북대), 김동민(당시 한일장신대) 두 교수를 상대로 명예훼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한 일이 있었다. 두 사람이 ‘인물과 사상’이라는 출판물에 나를 비방하는 글을 실었기 때문이다. 강준만은 ‘실명비판’의 기치를 내걸고 보수논객을 공격하는 방법으로 ‘언론자유’를 만끽하는 대중성 있는 필자였다. 한겨레, 서울신문(당시 제호는 대한매일), 경향신문을 비롯한 여러 신문 잡지에 쉬지 않고 글을 실었다. 그가 지은 책들은 이 신문들이 다투어 소개하고 있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거의 같은 때에 나를 비방하는 글을 ‘인물과 사상’에 실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보니 ‘인물과 사상’은 하나가 아니라 두개였다. 나는 그때까지 그런 사실을 몰랐다. 개마고원이 발행하는 단행본 형태의 무크(mook)와, 인물과 사상사라는 출판사가 발행하는 같은 제호의 월간잡지가 하나 있었다. 개마고원의 무크지 ‘인물과 사상’은 발행인 장의덕, 저자는 강준만이었다. ‘인물과 사상사’의 월간 발행인은 강준우였는데 나중에 알았지만 강준만의 동생이었다. 무크와 월간은 둘 다 강준만 편집의 개인 간행물이었다.
무크는 잡지와 단행본의 장점을 동시에 갖고 있어서 1997년 1월에 1집이 나온 이래 그때까지 10집이 발행되었으며 그 가운데 어떤 것은 6쇄 또는 10쇄까지 발행될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다. 강준만은 발행처가 다르면서 제호가 같은 2개의 매체를 활용하여 반복적으로 나를 비방하면서 명예를 훼손했다. 강준만과 김동민이 나를 거론한 글은 다음 3건이었다.
① 강준만, 「조선일보의 최장집 죽이기」, 월간 '인물과 사상'(인물과 사상사, 1998.12),20~33쪽.
② 김동민, 「역사가 말하는 조선일보의 진실」, 단행본 '조선일보를 아십니까?', (개마고원, 1999.4), 65~90쪽.
③ 김동민, 「언론학자 정진석과 조선일보」, '인물과 사상10', (개마고원, 1999.4) 131~156쪽.
①과 ②는 나를 본격적으로 겨냥하지는 않았지만 조선일보를 비판하는 가운데 나를 지목했다. 조선일보를 옹호하고 그 신문에 유착된 인물이라는 것이다. 근거 없는 내용에 논평의 정도(正道)를 한참 벗어난 표현의 글이었다. 강준만은 “정진석이 나와 같은 언론학자라는 사실에 정말 낯이 뜨거워진다. 일부 사람들이 ‘조선일보 맨’으로 활약해온 사람(정진석)에 대해 왜 그렇게 호의적인 평가를 하느냐고 시비를 걸었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고 했다. 그밖에도 여기에 다시 옮기거나 떠올리기도 창피한 말들이 있었다.
중재신청과 법정 소송
김동민은 한술 더 떴다. 이런 구절이 있었다. “정치권력과 언론권력에 기생하여 잇속과 허명을 추구하는가 하면 표절을 밥먹듯이 하는 선학들도 있다. 그러면서도 언론학회 회장을 하겠다고 열을 올린다. 철면피들이다.”라거나 “언론학이 바로서는 것을 경계하면서 그들은 언론기본법을 찬양하는 등 군사 독재정권의 주구노릇을 하는 한편으로 역시 수구언론의 주구노릇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 더러운 지면과 방송에 이름과 얼굴을 팔고자 안달을 했다. 나는 이제 그런 이들에게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한다. 그 첫 번째 대상이 외국어대학교 신문방송학과의 정진석 교수다.”
정진석이 그 첫 번째 대상이라니? 나는 언론학회 회장에 출마하도록 추천 받은 일이 있지만 고사했다. 표절한 글도 없다. 언론기본법 찬양, 독재정권의 주구노릇을 한 일은 더구나 없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고 자부한다. 나름대로 언론자유의 수호를 외치고 권력을 비판하는 글을 많이 썼다. 나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한 것이다. 언론학 교수 가운데 첫 번째로 지목될 정도로 내가 가장 만만해 보였던 모양이다.
이리하여 나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외로운 싸움을 벌이지 않을 수 없었다. 언론중재 신청과 법정 소송을 통한 대처였다. 두 사람이 ‘인물과 사상’이라는 출판물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면서 나를 반복해서 공격하지만 나는 대응할 무기가 없었다. 그러니 법적 구제 방법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대로 두고 본다면 그들의 주장은 사실로 굳어질 수 있고, 나는 앞으로 더 많은 공격을 당할 염려가 있었다.
결론은 어떻게 났는가. 언론중재위원회에는 강준만과 김동민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두 사람을 중재위원회에서 만나 시비를 다툴 기회는 없었다. 두 간행물의 발행인(장의덕, 강준우)이 중재위원회에 출석한 가운데 내 반론문을 두 개의 ‘인물과 사상’에 가감 없이 전문을 싣기로 중재가 성립되었다. 반론문을 싣는 조건으로 법정소송은 철회해 달라는 개마고원의 제안을 나는 거부했다.
몇 달을 밀고 당긴 법정 소송은 결국 담당판사의 중재로 두 사람이 사과문을 게재하는 선에서 마무리 되었다. 나는 이 때 판사의 전횡을 처음으로 경험했다. 그 후로 막말 판사, 상식에 벗어나는 납득할 수 없는 판결을 내리는 판사, 비리 판사가 있다는 신문 보도를 볼 때면 내 소송 사건을 맡았던 판사의 불쾌한 언동이 생각나서 사법부의 개혁과 견제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소송과정에서 피고인들은 내가 쓴 글 가운데 김대중 주필을 언급한 부분도 해명 자료로 제시했다. 그들이 법원에 제출한 '준비서면'에는 내가 월간조선 1993년 11월호에 쓴 '한국의 논객들'이라는 글이 언론학자로서 지켜야 할 객관성을 벗어났다는 주장이 들어 있었다. 글 가운데 “김대중은 현역 언론인 가운데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논객이라 할 수 있다”는 부분을 문제 삼았다. 나는 이때 민사소송에 '준비서면'이라는 제도가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원고의 '소장(訴狀)'에 대해서 피고인이 진술하고자 하는 사항을 미리 법원에 제출하는 변론서 성격의 글이 준비서면이었다.
'한국의 논객들'과 김대중 주필
월간조선에 쓴 '한국의 논객들'은 구한말 서재필 이래 일제 강점기를 거쳐 광복 이후 그때까지 한국 언론사에 이름이 남을 논객들을 두루 살펴본 글로 15쪽에 이르는 분량이었다. 그 가운데 김대중에 관한 서술이다.
“현역 언론인 가운데 누가 대표적인 논객인가를 선정해 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필자의 주관이 크게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객관적인 기준으로 위암 장지연기념사업회가 선정한 위암언론상 수상자를 찾아보면, 한겨레신문 사장 김중배, 조선일보 주필 김대중, 한국일보 논설위원 정경희가 있다.”
김대중 주필은 위암언론상 제2회 수상자였다. 그래서 ‘객관적인 기준’으로 김중배, 김대중, 정경희를 거론하여 논객으로서의 특징을 소개했다.
“김대중은 현역 언론인 가운데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논객이라 할 수 있다. 그는 1981년 10월부터 조선일보에 「동서남북」으로부터 「일요칼럼」을 거쳐 「김대중 칼럼」을 집필해 오고 있으며 명쾌한 논리가 뒷받침 된 예리한 필치를 휘두르고 있다.”
이어서 류근일 논설주간의 말을 인용해서 이렇게 썼다.
“같은 신문사의 류근일은 김대중이 국가이익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언론의 독특한 영역을 천명하면서 그 필봉을 오늘의 우리 정치현실로 돌린다고 지적한다. 김대중의 특장(特長)은 그 어느 상대방에 대해서도 결코 눈치를 살피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러기에 그는 이편이든 저편이든 그 어느 대집단의 눈 흘김에 대해서도 한 사람의 기자로서의 독립선언과 자주선언으로 응수한다. 이러한 독립성은 오늘날과 같은 양극화와 흑백대결의 시대에서는 좀처럼 감내하기 힘든 부담을 필자들에게 안겨 준다는 것이다.”
'안티 조선일보'를 기치로 내건 사람들의 눈에는 마땅치 않은 칭찬이었을 수 있다는 사실은 그때야 깨달았다. 소송이 벌어진 때로부터 6년 전에 쓴 글을 찾아내어 준비서면에 제시해야 할 정도로 나를 비방한 글을 뒷받침 할 근거를 찾기가 어려웠던 사정도 있었을 것이다. 이 글 외에도 내가 조선일보에 쓴 글을 샅샅이 찾아내어 무슨 큰 죄나 되는 듯이 제목을 열거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의 글 가운데 '같은 신문사의 류근일'이 말했다는 부분은 김대중 칼럼집 '不自由 시대'(1986·정우사)의 '머리말'에서 따왔다. 그러니 머리말을 쓴 류근일 논설주간에게 원죄를 물어야했던 셈이다. 위암 장지연기념사업회가 선정하여 시상한 논객이라는 기준 외에 또 다른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하여 나는 김대중을 한국의 당대 영향력 있는 논객으로 평가했다.
10년간 영향력 1위의 최고 논객
그것은 ‘시사저널’의 여론조사 결과였다. '시사저널’은 1989년 10월에 창간하면서 매년 한국을 움직이는 인물을 선정하는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전문가 집단 1000여 명을 상대로 실시한 조사에서 김대중 당시 주필은 1990년대를 통틀어 ‘신문 방송 잡지에서 활약 중인 언론인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10년 연속 1위의 자리를 지켰다. ‘시사저널’은 여론조사 결과를 이렇게 보도했다.
‘언론 사주를 제외한 영향력 있는 언론인’을 조사한 결과에서도 조선일보는 김대중 주필(1위)말고도, 류근일 논설실장(6위), 조갑제 부국장(8위) 등 3명이 올랐다. 이들의 영향력이 곧 조선일보 영향력의 원천인 셈이다. 언론인 영향력 조사에서는 무응답 률이 38.3%로 높게 나타난 가운데 조선일보 김대중 주필의 1위 독주가 9년째 이어지고 있다.(시사저널, 1997.10.30)
내가 강준만 김동민 두 사람을 상대로 소송을 진행하고 있던 1999년 10월에도 김대중은 부동의 1위였다.
“방송 매체의 약진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조선일보 주필이 10년 연속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 1위’를 차지한 것은, 활자 매체만이 갖고 있는 논객의 힘을 보여준다. 이번 조사에서 김 주필에 이어 김중배 씨와 류근일 조선일보 논설실장이 나란히 6위, 7위를 차지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현역 방송인 가운데 10위 안에 든 사람은 1명도 없었다(과거 10위권에 한두 사람씩 끼어 있던 앵커도 이번 조사에서는 일제히 빠졌다). ‘동업자’인 언론인(43.3%)과 정치인 집단(34.5%)으로부터 특히 그 영향력을 인정받는 김대중 주필은 언론 사주를 포함시킨 이번 여론조사에서도 부동의 1위를 차지해 ‘당대 최고 논객’이라는 찬사가 헛되지 않음을 보여주었다.”(시사저널, 523호, 1999.11.4)
‘안티조선’ 일파는 김대중, 류근일, 조갑제를 향해서 온갖 험한 말을 동원하여 공격하고 조롱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 사람은 그들의 공격에 일체 대응하지 않았다. 조선일보라는 영향력이 가장 큰 공공매체에 몸을 담은 한국의 대표 논객들이 게릴라 전술의 인물과 일대 일로 대응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일종의 비대칭 무기로 덤비는 세력에 조선일보가 공개적으로 대응한다면 그들의 위상만 올려주는 역효과를 낼 터였다. 김대중 같은 논객이 직접 나설 싸움판이 아니었다.
시사저널의 지적대로 김대중, 류근일, 조갑제는 조선일보 영향력의 원천이었을 수 있었다. 조선일보에 몸담고 있었기에 이들의 영향력이 컸던 것도 사실이지만, 이들을 품은 조선일보의 성가도 높아졌다고 볼 수 있었다. 상호보완적이었지만 나는 이들이 조선일보에 있었기에 더욱 빛나고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고 본다. 김대중 정부는 그들을 조선일보에서 제거하라는 압력을 여러 차례 넣었다. 앞서 전두환 정부도 김대중의 붓을 꺾으려 해서 김대중은 한때 영국 옥스퍼드대학으로 가 있어야 했다.
위암언론상 수상과 장지연의 기개
김대중 주필은 1991년에 제2회 위암언론상을 받았다. 황성신문에 을사늑약을 반대하는 명 논설 '시일야방성대곡'(1905년 11월 20일자)을 썼던 위암 장지연 선생의 정신을 이어받자는 취지에서 제정된 상이다.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인해서 신문이 정간당하고 장지연은 투옥되어 고초를 겪었던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 이후에 이 논설이 지속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일반인이 잘 모른다. 영국인 배설(裴說·Bethell)이 발행하던 대한매일신보와 영문 ‘코리아 데일리 뉴스’는 11월 27일자에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을 영문으로 번역하여 호외를 발행했다. 호외는 한쪽 면에 영문, 다른 면은 순한문으로 이토 히로부미의 강요로 을사늑약이 체결된 내막을 폭로하는 '오건조약청체전말(五件條約請締顚末)'을 게재하였다. 통감부는 한국인 발행 신문은 탄압할 수 있었지만 치외법권의 보호를 받는 영국인 발행 신문은 손을 쓸 수가 없었기에 대한매일신보의 호외 발행이 가능했던 것이다.
호외로 발행된 황성신문 논설의 여파는 국내에서 그치지 않았다. 일본 고베에서 영국인이 발행하던 저팬 크로니클(1905.12.21)은 대한매일신보의 영문번역 호외의 '시일야방성대곡'을 전재해서 일본의 한국침략을 일본에 거주하는 서양 사람들과 서방 여러 나라에 알렸다. 영문호외 '시일야방성대곡'은 맥켄지 (F A McKenzie)의 ‘대한제국의 비극·The Tragedy of Korea’(1908)과 ‘한국의 독립운동·Korea's Fight for Freedom’(1920)에도 실렸다. 맥켄지의 책은 일본에서도 번역(‘朝鮮の悲劇’, 1972)되어 '시일야방성대곡'이 실렸다.
장지연의 논설은 이처럼 1905년 11월에 발표되던 때로부터 반세기 넘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한국어 원문→영어→일본어로 번역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원래의 문장과는 다소 달라진 모습으로 역사적인 사명을 다하고 있었다. 논설은 ①황성신문(1905.11.20)→②대한매일신보・코리아 데일리 뉴스 호외(1905.11.27)→③저팬 크로니클(1905.12.17)→④맥켄지(The Tragedy of Korea, 1908; Korea's Fight for Freedom,1920)→⑤일어 번역(조선의 비극, 1972)에 이르는 5 단계, 또는 6단계를 거치면서 장기간에 걸쳐 세계 여러 나라에 전파되었다.
그런데 2005년 초부터 장지연의 친일논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장지연기념사업회는 그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서 프레스센터에서 세미나를 개최했고, 나는 그 주제발표자였다. 일반인은 별로 관심을 두지도 않는 상황이었으니 참관하러 온 사람도 적어 장내는 한산했다. 그런데 그 세미나장에 김대중 주필이 나타났다. 도대체 친일논쟁의 근거가 무엇인지 알아보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신문사 주필이지만 현장취재에 나선 일선기자의 자세를 보여준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친일을 주장하는 세력의 집요한 공세로 2011년에는 정부가 장지연 선생에게 추서했던 훈장을 박탈하는 사태로 가고 말았다.
김대중은 이 때 칼럼에 썼다. “내가 받은 몇 안 되는 언론 관계 상(賞) 중에 가장 영예롭게 여기는 것이 ‘위암장지연상’이다. 이제 나는 그 상을 반납해야 하는 것 아닌가 고민하게 됐다”면서 개탄했다. “장지연 선생의 서훈박탈은 이 땅에 보수정치가 마감되고 있음을 예고한다. ‘멍청한 정부’ 탓에 개인적으로는 가장 존경하는 언론인 대선배의 명예가 더럽혀졌지만 나는 그래도 장지연상을 자랑으로 간직하고자 한다.”(김대중 칼럼, 2011.4.19)
김대중은 이토 히로부미가 이끄는 일본군의 총칼이 번쩍이고 군화 소리가 요란하던 시기에 목숨을 걸고 논설을 쓰던 120년 전 선배 언론인 장지연의 기개를 본받고자 하는 논객인가. 그는 말한다. “나는 글 쓰는 자리를 벗어나면 이런 유의 글은 쓰지 않을 생각입니다. 가령 에세이를 쓰거나, 또는 전기를 쓰거나, 또는 소설 같은 걸 써 본다든가.” ‘이런 유의 글’이란 검찰의 소환을 거부하면서 사표를 던지고 신문사를 떠나면서 쓴 글이다. 신문에 실리지는 않았다.(오효진의 인간탐험, '김대중 주필 直筆과 直情의 대논객', 월간조선, 2001.11.) 그의 칼럼 전체가 ‘이런 유의 글’에 해당된다.
언젠가 김대중 주필의 문학적 소양이 묻어나는 에세이, 그가 다룬 전기물, 그리고 상상력이 발휘된 소설까지 읽어볼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앞으로도 일단 ‘아니오’로 시작하는 그의 반골기질을 다 받아 준 조선일보에서 글 쓰는 자리를 오래 지키면서 휘두르는 건필을 보고 싶다.


◎정진석 교수는?


중앙대 영문학과와 서울대 신문대학원, 영국 런던대 언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외국어대 교수를 지내고 같은 대학 명예교수로 있다. '대한매일신보와 배설' '한국 언론사' '역사와 언론인' '언론 조선총독부' 등 많은 역저를 냈다. 대한매일신보·독립신문·한성순보 등 영인본과 '일제시대 민족지 압수 기사 모음' 발간 등 발로 뛰는 자료 발굴로 언론사 연구의 기초 토대를 놓은 한국 언론사 연구의 최고 권위자다. 정년 후에도 '전쟁기의 언론과 문학' '남궁억' '항일민족 언론인 양기탁' 등을 내며 활발한 연구 활동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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