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ICT와 미래(ICT and Future) 티스토리 블로그

대변동(upheaval) 본문

4차산업혁명 관련/책소개

대변동(upheaval)

천아1234 2021. 7. 21. 19:07

대변동 uphaeval – 제레미 다이아몬드/2019년

 

프롤로그 – 코코넛 그로브 화재 사건의 유산

처음 위기 상태에 빠지면 누구나 삶에서 모든 것이 잘못된 듯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그렇게 좌절에 빠진 상태에서는 한 번에 하나씩 문제를 해결해나가기 쉽지않다. 따라서 첫 상담에서 심리 치료사의 일차적 목표는 울타리 세우기 building a fance라 일컫는 방법을 동원해 그런 마비를 해소하는 것이다. 내 문제는 이 울타리 안쪽에 있어. 바깥쪽에 있는 것들은 모두 정상이고 전혀 문제가 없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환자는 그렇게 선택적 변화를 시작한다.

< 개인적 위기의 결과와 관련한 요인 >

1. 위기상태의 인정 2.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개인적 책임의 수용 3. 울타리 세우기, 해결해야 할 개인적 문제를 규정하기 위한 조건 4. 다른 사람과 지원 단체의 물리적이고 정서적인 지원 5. 문제 해결 방법의 본보기로 삼을 만한 다른 사람의 사례 6. 자아 강도 7. 정직한 자기평가 8. 과거에 경험한 위기 9. 인내 10. 유연한 성격 11. 개인의 핵심가치 12. 개인적 제약으로부터 해방

 

< 국가의 위기의 결과와 관련한 요인 >

1. 국가가 위기에 빠졌다는 국민적 합의

2.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국가적 책임의 수용

3. 울타리 세우기, 해결해야 할 국가적 문제를 규정하기 위한 조건

4. 다른 국가의 물질적이고 경제적인 지원

5. 문제 해결 방법의 본보기로 삼을 만한 다른 국가의 사례

6. 국가 정체성

7. 국가의 위치에 대한 정직한 자기 평가

8. 역사적으로 과거에 경험한 국가 위기

9. 국가의 실패에 대처하는 방법

10.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응하는 국가의 능력

11. 국가의 핵심 가치

12. 지정학적 제약으로부터의 해방

<의문점>

· 정치제도와 경제제도의 역할

· 위기 해결에서 국가 지도자의 역할

· 집단 의사 결정 방법

· 국가의 위기는 평화적 타협과 폭력적 혁명 중 어느 쪽을 통해 선택적 변화로 이어지는가?

· 여러 형태의 국가적 변화가 통합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동시에 시도되는가 아니면 시기별로 따로따로 시행되는가?

· 국가의 위기가 내부의 문제로 촉발되는가 아니면 다른 국가에 의한 외부적 충격으로 촉발되었는가? 혹은 또 다른 이유가 있는가?

· 한 국가에서 대립하는 집단들 간의 화해, 국가들 간의 화해를 어떻게 추진할 것인가? 특히 전쟁이나 대량 학살과 관련한 위기가 발생한 후 어떻게 하면 갈등 당사자들의 화해를 도모할 수 있을까?

<핀란드 내전과 소련의 전쟁>

1인당 평균 소득은 독일과 스웨덴, 하지만 안보는 그야말로 역설적 상황에 처해 있다. 자유사회주의 국가로, 과거에는 공산주의 국가이던 소련과 지금은 독재국가인 러시아와 수십 년 전부터 신뢰할 수 있는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선택적 변화의 옳은 예.

장 시벨리우스, 에로 사리넨, 파보 누르미

핀란드는 자체로 의회와 행정부를 두었고, 고유한 화폐, 러시아어를 강요받지 않았다.

1894년 니콜라이2세 즉위 후 니콜라이 보브리코프 총독이후 러시아의 통치가 억압적으로 변하고, 1917년 핀란드 독립선언 후 핀란드 내전.

독립선언의 결과는 쓰라린 내전으로 이어졌다. 보수적 성향을 띠던 백군은 독일에서 훈련받은 핀란드군으로 구성되었는데, 독일군이 핀란드까지 들어와 백군을 지원했다. 상대편은 공산주의자 핀란드인으로 구성된 적군과 당시에도 핀란드에 주둔해 있던 러시아군이었다. 백군은 1918년 5월 승리를 굳혔고, 약 8,000명의 적군을 사살했다. 게다가 2만 명의 적군이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는동안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했다. 하지만 양측은 신속히 화해했고 살아남은 좌파는 정치 권리를 완전히 되찾았다. 게다가 1926년 좌파가 핀란드 총리가 되기도 했다.

1939년 8월 히틀러와 스탈린이 선전전을 별안간 중단하고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이라고도 일컫는 독소불가침조약을 체결했다. 독일은 폴란드를 침략했고, 수주 후에는 소련이 폴란드 동부 지역을 침략했다. 소련은 발트해의 네국가, 즉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로 구성된 발트3국과 핀란드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발트3국은 받아들였다. 핀란드 국민은 반대했다. 오늘 소련의 온건한 요구에 굴복하면 훗날 소련의 더 큰 요구를 거부하지 못할 것이라 걱정했다.

1939년11월 소련은 핀란드군의 포탄이 소련 영토에 떨어져서 몇몇 소련 병사가 죽었다고 주장하며 핀란드를 공격했다. 겨울전쟁. 1940년 3월 평화협상에서는 1939년 10월 거부한 조건보더 훨씬 가혹했다.

계속 전쟁 : 소련에 맞서 똑같은 아픔을 겪지 않으려면 나치 독일과 전략적 연대를 맺는 편이 나았다. 지독히 고약한 선택 중 그나마 나은 것이었다. 소련군은 독일의 공격을 맞는 데 여념이 없었던 까닭에 핀란드는 핀란드령 카멜리아를 곧바로 되찾았고, 과거의 국경을 넘어 소련령 카렐리아로 진격했다. 1/6이 동원.

핀란드는 독일의 두가지 요구 1. 핀란드계 유대인을 색출해 체포하라 2. 레닌그라드 북쪽을 공격해달라-를 거부함.그후 1944년 7월 전선이 안정화되자 핀란드 지도자들은 모스크바로 날아가 평화를 제안하고 새로운 조약에 서명. 라파주 독일군을 추방하는 데 동의.

독일군과 소련군에 맞선 대가로 약10만명의 국민을 잃었다. 휴전협정은 핀란드에 “전쟁범죄로 기소된 사람을 체포하는 일에서 연합국에 협조할 것”-전쟁당시 대통령과 총리,외무부장관,베를린 주재 대사에게 징역형. 특별히 마련한 교도소에서 형기를 채우고 나온 후 대부분이 고위직에 임명 또는 선출. 3억 달러라는 부담스러운 배상금을 6년 내에 지불. 조선업과 수출지향적 산업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됨. 파시키비(10년)+케코넨(35년)원칙. 경제적 독립과 표현의 자유를 부분적으로 희생하더라도 소련의 신뢰를 유지하기 위해 비상한 노력. 핀란드의 지정학적 환경을 지배하는 이해관계에 핀란드의 실존을 맞추는 것. 예방외교의 과제는 위험이 코앞에 닥치기 전에 미리 감지해서 그 위험을 피하는 데 도움이 되는 조치를 위하는 것. 작은 국가는 외교정책의 해법에 공감이든 반감이든 감정을 뒤섞을 여유가 전혀 없다는 것도 경험적으로 배웠다. 현실적으로 국가 간 권력과 국익에 대한 자각에 기초해야 한다.

- 위기 해결에 도움을 주지만 핀란드에 없는 것 동맹의 지원, 본받을만한 사례(핀란드 주변이나 역사적으로 그런 사례가 드물다), 지정학적 제약으로부터의 해방.

 

< 현대 일본의 기원 >

메이지 유신이 있을 때까지 일본의 실질적 지배자는 쇼군이라 불리던 세습 군사독재자였고 황제는 실제 권한이 없는 명목상의 최고위자에 불과했다. 1639~1853년까지 접촉제한.

30만의 카톨릭 교도확대. 1639~1639년 모든 교역 중지, 카톨릭 금지.

1853년의 일본은 여전히 중세 유럽처럼 여러 영지로 분할된 봉건적 지배계급

영국이 값싼 인도의 아편을 중국에 팔아서 은을 주면서 사온 중국의 무역품을 대체하고자 했다. 그 무역적자를 메우는 방법에 중국이 수입금지조치를 내리면서 아편전쟁이 벌어짐. 중국은 엄청난 배상금을 지급하고 다섯 항구를 개방한다는 조약.

일본 정부는 중국이 그렇게 당하는 걸 보았기 때문에 서구 열강이 일본에도 유사한 조약으로 항구의 개방을 요구하는 것은 시간문제라며 두려워했다. 미국의 해상무역의 증가와 난파와 체포등 사건. 1853년 페리 제독은 함대를 이끌고 에도만에 들어섰다. 필모어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 일본의 위기. 1854년 2월 전함을 이끌고 와서 조약을 성사. 항구 2곳 개방, 미국 영사가 거주. 조난된 미국인 선원을 인도적으로 대우.

1854년 이후로 막부의 기본 전략은 시간을 버는 것. 군사와 비군사 분야 모두에서 서구의 지식과 장비, 과학기술과 장점을 도입함으로써 하루빨리 서구에 저항할 수 있는 수준으로 올라서겠다는 뜻. 군대를 현대화, 유학-항해술, 조선, 공업과 과학,법률과 헌법, 정치학과 경제학, 언어와 문자까지 배움. ‘야만인의 책을 연구하기 위한 기관’을 설립. 1. 무기구입과 유학으로 외채가 불어남. 2. 소비재 가격과 생활비가 올라감 3. 사무라이와 상인이 외국 무역을 독점하려는 막부의 노력에 반발 4. 다이묘의 독립성이 강해지고, 서구 열강과 협상하고 조약에 서명했음에도 외딴 지역의 다이묘는 그 조약에 위반.

1862년 영국 상인 찰스 리처드슨이 노상에서 사무라이 공격으로 죽음. 사쓰마 번주의 아버지가 지나는 행렬에 예를 갖추지 않았다는 것이 공격의 이유. 영국 함대가 가고시마를 포격 1,500명 병사가 죽음.

1863년 서구의 선박 포격, 쓰시마해협을 폐쇄. 17척의 영구, 프랑스,미국,네덜란드 함대가 포격.일부 번주, 특히 쓰시마 번주와 조슈 번주는 쇼군이 일본을 서구에 저항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게 키워낼 수 없다고 확신했다. 서구의 과학기술을 도입하겠다는 막부의 목표에 공감하더라도 그 목표를 성취하려면 일본 정부와 사회를 대대적으로 재조직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쇼군을 축출할 계획을 차근차근 추진함. 1868년 교토의 황궁을 점령하고 긴급위원회를 소집해 쇼군의 영지와 지위를 박탈하고 막부시대가 막을내림. 메이지 유신.왕정복고.

황제를 명목상의 지도자로, 자문위원회에 실질적 권한을 두기를 바람. 첫째, 일본도 서구가 강해진 근원을 받아들임으로써 강한 국가로 거듭날 필요가 있었다. 둘째, 일본에 강요한 불평등조약을 바로잡는 것이었다. 셋째,가장 적합한 외국 모델을 찾아 채택하고 수정.

혁신을 이렇게 유보된 전통-다른 국가의혁신에서는 흔히 만들어진 전통이라 일컫는 현상-으로 제정의한 덕분에 메이지 시대 지도자는 과감한 변화를 시도할 수 있었다.

군사적 팽창 정책 : 러일전쟁은 서구를 상대 첫 전쟁에서 승리, 사할린 남쪽, 남만주 철도권, 중국 21개조 요구. 1905년 한국보호국 1910년 합병,

1937년 일본은 중국과 전면전을 시작. 1938년과 1939년에는 러시아를 상대로 짧지만 유혈이 낭자한 두 번의 국경전. 1941년 미국, 영국, 네덜란드를 동시에 공격. 1945년 러시아가 일본을 공격. 1937년부터 비현실적 전쟁은 당시 일본군 지휘관은 나치 독일을 제외하고 해외 경험이 없는 젊고 성급한 장교들. 외국의 보복도 없었음.

 

< 모든 칠레인을 위한 칠레 >

동서로 160키로, 남북으로 4,820키로 높은 안데스 산맥이 칠레를 다른 국가들과 분리. 스페인계와 메스티소(스페인계 후손과 원주민의 혼혈)가 압도적. 선거법 개정으로 과두 집단이 권력을 잃고 좌익의 득표가 증가. 투표권부여, 비밀투표실시로 좌익에 유리함.

몬틸바 대통령은 신속하게 미국기업이 소유한 칠레 구리광산 회사들의 51%지분을 칠레 정부 이름으로 인수. 정부 자금을 경제에 대대적으로 투자하며 가난한 국민에게도 교육받을 기회를 확대, 1인당 금액으로는 미국의 경제지원을 가장 많이 받는 국가. 대농장 분할의 농지개혁. 우익은 지나치게 급진적이었고, 좌익은 충분하지 않았다. 1969년쯤 모든 정파, 즉 우익과 좌익 및 중도 모두가 정치적 상황에 불만을 품기에 이르렀다.

아옌데 정권은 공공연히 마르크스주의 정부를 세울 것이라는 목표를 공언한 것으로 부정적 반응이 곳곳에서 나옴. 하지만 아옌데는 온건파 대통령. 1962년 소련과 미국의 핵전쟁 직전 상황. 쿠바에 미사일 및 핵탄두 도착. 남아프리카에 공산주의 국가 반대 및 칠레구리광산 몰수에 대한 걱정.

아옌데 정권은 구리광산을 국유화, 여러 다국적기업도 국유화, 쿠바인을 데려오고, 피델 카스트로를 초빙해 칠레군부를 겁주기도 했다. 물가를 동결, 노동자 임금을 대폭 인상, 대농장 몰수해 농민 협동조합에 넘겨주며 몬틸바의 농기개혁을 확대. 시행하는 방법은 엉망이었다. 경제적 혼란과 폭력사태, 반대세력이 확대됨. 자카르타가 오고 있다 – 자카르타 비에네- 1965년 인도네시아우익이 공산주의자를 대규모로 학살한 행위.

과거에 성공한 자신감에 반대 세력을 다독거릴 수 있을 것이라 착각했을 가능성

혁명적 좌파운동의 압력

1973년9월11일 쿠테타, 중도와 우익, 다수의 중산층은 쿠데타를 전반적으로 환영. 피할수 없는 과도기. 2년정도 예상했으나 17년동안 군사정부는 모든 정치활동 중단, 의회 폐쇄. 기독교민주당 중도 정당 해산.칠레 대학점령 후 군사령관을 총장으로 임명.

위협적인 인물이 아니었고, 군사위원들이 교대로 최고지도자가 될 것이라고 발표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누구도 예상못했다. DIND 국가 정보기관, 비밀경찰인 국가정보국을 창설. 행방불명된 칠레인들, 라벤다 섹시-그리말디 박물관. 국제적 테러활동. 13만명을 체포, 수천명이 사망하거나 행방불명.

과거에 민주주의를 경험한 국가가 어떻게 그처럼 야만적인 국가로 전락할 수 있었을까? 정치적 분위기의 양극화와 폭력성의 증가 및 정치적 타협의 결렬이 크고 작은 원인이었다. 또 아옌데 시대에 심화된 극좌의 무장, 극우에 의한 대학살을 예고하는 듯한 ‘자카르타 비에네’라는 벽보도 원인으로 손꼽을 만했다. 아옌데가 추진한 마르크스주의적 설계와 쿠바와의 관계가 좌익 프로그램보다 훨씬 더 급진적이었던 까닭에 군부가 겁먹고 예방적 행위를 준비한 것.

인권유린과 경제적 인플레이션으로 미국에 정치적 경제적 도움이 안되었다.

반대 캠페인의 승리,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승리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좌익정당과 중도정당은 콘세르타시온이란 선거연합체를 결성했다. 좌익의 양보로 1990년의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면 대통령직을 좌익과 중도가 교대로 맡고 기독교민주당이 대통령직을 먼저 수행하기로 했다. 그후 네 번의 선거에서 승리함. 그후 우익과 번갈아가면서 정권 잡음. 기능적 민주주의로 복귀했다. 관용과 타협, 권력의 공유라는 엄청난 선택적 변화의 결과였다. 자유 시장경제정책을 더욱 가열차게 추진함. 관세를 낮춤. 미국과 캐나다와 자유무역협정을 체결. 사회보장 프로그램에 대한 정부 지출을 늘리고 노동법을 개혁한 것. 남아메리타에서 가장 높은 건물을 포함해 고층 건물로 가득하고 새로 건설한 지하철과 공항이 있다. 하지만 칠레의 경제 성과는 골고루 분배된 성공은 아니다. 경제적 불평등은 여전히 높고 사회경제적 계급 이동은 낮다. 따라서 칠레는 예전과 다름없이 빈부 격차가 심하다. 칠레의 부유증이 대농장을 소유한 가문에서 기업가로 바뀌었을 뿐이다. 가난한 사람의 절대적 경제적 지위는 예전보다 훨씬 나아졌다.

피노체트 이후 첫대통령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설립했고, 3,200명 명단을 1991년 발표함. 2003년 2차 고문을 고발하는 보고서를 발표.

칠레는 옛 군사정부의 긍정적 면과 부정적 면을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도덕적 딜레마로 아직도 씨름하고 있다. 특히 경제적 성과로 잔혹한 범죄를 상쇄할 수 있느냐는 딜레마로, 결코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다. 물론 경제적 성과와 잔혹한 범죄를 어떻게 비교할 수 있느냐 군사정부가 끔찍한 짓만이 아니라 유익한 유산도 남겼다는 걸 어떻게 인정할 수 있느냐 하고 단순히 반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칠레 국민은 1989년의 국민투표에서 군사정부의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을 비교해서 평가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그들은 피노체트의 임기를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 둘중하나를 선택할 때 42%가 임기 연장을 찬성했다.

정치적 타협을 거부하고 마르크스주의 정부를 도입함으로써 칠레의 만성적 경제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던 아옌데의 실패 / 타협을 거부한 채 군사정부를 지속하고 순전히 자신을 위해 대통령 임기를 연장하려던 피노체트 실패

선의의 온화한 사람에게 성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고 사악한 사람이 반드시 실패하는 것은 아니라는 서글픈 진실을 명확히 보여주는 차이이다.

 

<인도네시아 : 신생국가의 탄생>

인구 2억6,000만명 세계 4위 / 무슬림이 가장 많음 /1910년경에 네덜란드 식민정부가 착취적이던 정책을 중단하고 윤리정책으로 전환하려던 노력으로 학교와 관개시설을 건설, 지방 의회를 수립. 식민지로 통일되고 1945년에 독립한 신생국가. 700개 언어, 종교다양

일본이 1941년 미국에 전쟁을 선포한 후 동인도제도를 점령, 보르네오 유전은 일본에 미국산 원유를 대신할 수 있는 최고의 공급처였다.

1945년 8월15일 일본이 항복하였고, 이틀 후 인도네시아는 독립을 선언. 1945년 9월 영국군과 오스트레일리아군이 일본군에게 점령권을 인계받기 위해 인도네시아에 들어왔고, 그후에 네덜란드 군이 들어옴. 유엔과 미국의 압력으로 1949년 이양 완료. 1948년의 인도네시아 공화국 군대는 공산주의자들의 반란을 진압 8,000명의 인도네시아 공산주의자가 학살됨.

수카르노 –판차실라 5가지 원칙 – 일신교신앙, 인도네시아의 국가 정체성, 인도주의, 민주주의 , 모든 인도네시아 국민을 위한 사회 정의 – 이다.

1965년 PKI는 군부의 약점을 보완하겠다며 농민과 노동자의 무장을 제안했고 수카르노의 지지를 받았다. 표면적으로는 제5의 무장조직을 창설하겠다는 것이었다. 수하르토는 1965년 군부의 재정비. 인도네시아 공산주의자들과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사람들의 대대적인 소탕과 살해를 합리화하기 위한 프로파간다, 즉 선무 공작을 시작했다.

납치된 시신들의 실질적인 살해범은 군부대였지만, 공산주의를 살인주범으로 지목하고 혐오하는 분위기를 조성. 신체를 훼손했다는 험담. 50만명~200만명의 학살.

1998년 아시아금융위기로 화폐의 가치가 80% 폭락했고 폭동이 일어남. 정권이 바뀜.

<독일의 재건>

1945년부터 1961년까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연합국은 독일을 네 곳의 점령 지역으로 분할했다. 남부는 미국, 남서부는 프랑스, 북동부는 영국, 동부는 소련이 점령했다. 1949년 연합국은 세 점령지역을 하나로 통합하며 독일연방공화국이라고 칭했고 특히 서독으로 불렀다. 소련 점령 지역은 별도의 국가, 즉 독일민주공화국이 되었다. 흔히 동독으로 부름. 생활수준과 자유의 수준에서 동독은 서독에 훨씬 뒤처지고 말았다. 1990년 재통일될때까지 두 세대 동안 서구 민주국가의 시민과 달리 동독인은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열심히 일하겠다는 동기부여를 학습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 결과 동독인이 서독으로 탈출하기 시작했다. 모겐소플랜에 따라 공업 재건을 못하도록 농업 중심으로 전환, 전쟁 배상금을 받아내는 것이었다.

1948년 미국이 다른 서유럽 국가에 1947년부터 제공하기 시작한 마셜플랜에 따른 경제원조를 서독으로 확대했다. 서독의 초대 총리 콘라트 아데나워는 공산주의에 대한 미국의 두려움을 교묘하게 활용하는 수완을 발휘하며 연합국이 권한을 줄여가고 서독에 더 많은 권한을 위임하는 묵인을 끌어냈다. 아데나워 시대의 경제장관이던 루트비히 에르하르트는 수정 시장경제 정책을 도입했고, 마셜플랜의 원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놀라운 경제 회복을 이루어냈다. 이런 경제 회복은 훗날 경제 기적이란 뜻에서 비르트샤프츠분더, 라인강의 기적으로 일컬었다. 배급제도를 폐지했고 산업 생산량이 급증했으며 생활수준이 크게 향상되었다. 그 결과, 서독인에게는 자동차와 집을 구입할 수 있다는 꿈이 실현되었다.

24명의 나치 최고 지도자를 전범으로 기소해 뉘른베르트 법정에 세웠다. 탈나치화 작업.

수백만 명의 하급 관리는 확신범이든 나치의 명령을 어쩔 수 없이 따랐든 간에 기소되지 않았다. 또 재판 주체가 독일이 아니라 연합국이던 까닭에 독일인에게 가한 행동에 대해 책임져야할 독일인은 기소되지 않았다. 승자의 재판이라고 여김.

1969년 독일 사회민주당 당수로 서독 최초의 좌파 총리

브란트는 동독과 조약을 체결했고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 국가들과도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또 오데르-나이세 선을 폴란드와 독일의 국경으로 인정함으로써 그 선의 동쪽 영토를 완전히 상실했다는 현실도 받아들였다. 달리 말하면 오랫동안 독일 영토였고 독일 정체성의 중심이던 슐레지엔, 프로이센과 포메라니아의 일부를 포기한 것이다. 이런 포기는 미래를 위한 거대한 진전이었지만 보수적인 기독교민주연합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쓰디쓴 약이라며 1972년 선거에서 승리하면 그 모든 조약을 취소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독일 유권자들은 그 쓰디쓴 약을 삼킨 브란트의 결정을 지지했고 브란트의 정당은 1972년 선거에서 크게 승리했다.

브란트의 이력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은 1970년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를 방문했을 때였다. 폴란드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백분율로 가장 많은 인구를 잃은 국가였다. 또 나치의 대형 강제수용소들이 있던 곳이기도 했다. 따라서 폴란드가 독일인을 회개하지 않는 나치라 혐오하는 데도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브란트는 1970년 12월7일 바르샤바를 방문했을 때 비록 실패했지만 1943년 4월과 5월 나치의 점령에 항의한 유대인 폭동이일어난 바르샤바 게토를 일부러 찾아갔다. 그러고는 폴란드 군중 앞에 자진해서 무릎을 꿇었고, 나치에게 수백만 명이 희생된 사실을 인정하며 히틀러 독재와 제2차 세계대전의 용서를 구했다. 독일인을 끝없이 불신하던 폴란드인조차 브란트의 행동을 계획하지 않은 진실한 마음에서 우러난 것으로 인정했다. 브란트가 바르샤바 게토를 방문해서 무릎을 꿇고 20년이 지난 후에야 서독은 그에 대한 보상을 받았다. 이후 브란트의 정책을 계속 추진하며 동유럽 국가들과 화해를 모색했고 철의 장막 양족의 국가 지도자들과 개인적 친분을 돈독히 쌓아갔다. 마침내 미국과 서유럽은 서독을 민주국가로서 신뢰할 만한 동맹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고, 소련과 동유럽권은 서독을 주요한 무역 상대국으로 평가하며 더는 군사적으로 영토를 위협할 국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1989년 5월2일 헝가리는 서쪽으로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대신하고 있던 담을 허물기로 결정했다. 헝가리는 북쪽으로 체코슬로바키아를 넘으면 동독과 만나는 동유럽 국가였고, 오스트리아는 서독과 국경을 마주한 서유럽 민주국가였다. 그로부터 넉 달 후 헝가리가 공식적으로 국경을 개방하자 수천 명의 동독인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체코슬로바키아와 헝가리를 경유해 서유럽으로 탈출했다. 곧이어 정부에 항의하는 수십만의 동독인들이 라이프치히를 필두로 많은 도시에서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동독 정부는 서독 여행 허가증을 발급하겠다고 발표하며 이런 저항에 대응하려 했다. 하지만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공식적으로 그렇게 발표하자 저항은 더욱 커졌고, 동독 정부는 ‘즉각’ 서독 여행을 허락하겟다고 수정해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 밤, 즉 1989년 11월9일 수만 명의 동독인이 국경 수비대의 공격을 받지 않고 즉시 서베를린으로 넘어갔다.

당시 독일 총리 헬무트 콜은 그런 개방을 주도하지 않았지만 그 순간을 재통일의 기회로 신중하고 현명하게 활용했다. 1990년 5월 콜 총리는 동독과 서독의 경제와 사회를 통합하는 조약을 체결하면서도 정치적 통일을 서두르지 않았다. 콜은 여전히 꺼림칙하게 생각하는 서구와 소련의 반발을 완화하며 독일의 재통일 허락을 받아내려고 능수능란하면서도 혼신의 힘을 다해 노력했다. 예컨대 1990년 미하일 고르바초프와의 중요한 회담에서 콜 총리는 소련에 두둑한 금융지원을 약속하며 독일의 재통일을 용인하고, 통일된 독일이 나토에 계속 머무는 것도 용인하라고 고르바초프를 설득했다. 그리고 마침내 1990년 10월3일 동독은 새로운 주의 형식으로 서독, 즉 독일에 통합되었다.

독일이 우리 기준틀에서 극단적인 면을 보여주는 두 가지 다른 특징, 즉 리더십의 역할과 정직한 자기평가는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 중앙 유럽에 위치한 지리적 조건 때문에 독일은 바다를 천혜의 장벽으로 삼은 영국이나 미국보다 많은 위험과 어려움에 고질적으로 노출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영국과 미국보다 독일은 리더십에 더 큰 영향을 받았다.

 

<오스트레일리아 : 우리는 누구인가? >

 

- 제2차 세계대전의 의미는 제1차 세계대전의 의미와 사뭇 달랐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오스트레일리아가 직접 공격을 받았고 지구의 반대편보다 바로 옆의 섬들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싱가포르에 있던 영국 해군기지를 일본에 양도한 사건이 오스트레일리아의 자아상을 바꿔놓은 결정적 전환점으로 여겨진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처럼 1939년 영국이 다시 독일에 전쟁을 선포하자 오스트레일리아 총리는 의회에 의견을 묻지 않고 즉각 “ 영국이 전쟁을 선포했다. 따라서 오스트레일리아도 독일과 전쟁에 돌입했다” 라고 선언했다. 1942년 2월 오스트레일리아의 북부 도시 다윈을 대대적으로 폭격했다. 일본은 오스트레일리아를 60회 이상 공습했고, 일본 잠수함은 시드니항 습격을 시도하기도 했다.

오스트레일리아인에게 싱가포르 양도는 충격적이고 놀라운 군사적 패퇴였을 뿐 아니라, 영국이란 조국이 오스트레일리아를 배신한 사전으로도 해석되었다. 당시 ‘용납할 수 없는 배신’ 이라는 전신을 보냄. 제2차 세계대전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이민 정책에 즉각적 영향을 미쳤다. 1943년에 이미 오스트레일리아 총리는 적은 인구로는 일본의 위협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며 거대한 대륙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미국과 아시아와 무역교류가 증대.

1955년 영국은 유럽경제공동체를 결성하기 위한 서유럽 6개국과의 협상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영국의 예상과 달리 서유럽6개국은 1957년 영국을 배제한 상태에서 EEC를 구체화하는 데 성공했다. 1961년 영국 총리 해럴드 맥밀런은 영국의 이해관계국이 달라졌다는 걸 인정했다. 유럽이 더 중요했다. 다시 가입 신청하였고, 오스트레일리아 무역에 관세를 높이는 결정으로 오스트레일리아는 충격.

오스트레일리아는 정치와 문화 부문에서도 크게 변했다. 1986년 오스트레일리아는 영국 추밀원에 상고하는 권리를 포기함으로써 영국 통치의 마지막 흔적을 지워버리며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했다. 1999년 오스트레일리아 최고법원은 영국을 외국이라고 선언했다. 문화의 전선에서도 자체 문화가 발전, 포도주,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동양의 식당.

 

<장래에 일본이 해결해야 할 과제는?>

- 정부 부채 : 1년동안 생산한 총 생산량의 2.5배

- 대부분의 부채는 일본공기업인 연기금과 일본은행이 보유하고 있어서 채권자가 정부에 압력을 가하지 않는다. / 이자율이 낮다

- 여성 불평등과 출산율감소, 노령화

- 이주민 : 노령화로 젊은 이주민이 필요함.

- 반성을 병행한 역사교육의 부재

- 자연 자원의 관리 – 참다랑어 국제 보호종 지정에 일본이 공동 발의국에서 빠짐. 고래 포획,

<장래에 미국이 해결해야 할 과제는? 강정과 중대한 문제>

- 정치적 양극화 : 선거비용을 대는 소수의 기부자의 특정한 목적을 우선 수행 / 지역구보다 기부금 모금을 위해 정치인들간의 왕래가 없음 / 게리멘더링 – 선거구재획정 / 유권자 각자가 선택한 확고한 틈새에서만 정보를 얻음

- 편협성과 욕설의 증가 : 사회적자본의 쇠퇴, 사회적 자본은 시민의 품성과 밀접하다. 비대면커뮤니케이션 활성화, 넓은 면적과 개인주의, 5년에 한번 먼거리로 이주함,

- 정치적 타협의 결렬이 군부독재로 이어지며 반대편을 말살하는 명확한 목표를 추진한 두 사례 – 칠레와 인도네시아 –보다 미국이 끔찍한 결과를 맞이할 가능성이 크다. 총기휴대권과 개인의 폭력성,

 

<장래에 미국이 해결해야할 과제는? 세 가지 ‘다른’문제

- 인종문제와 여성문제를 제외한 즉각적이지 않은 위험한 문제들

- 선거 : 낮은 투표율 – 유권자 명단과 선거 절차를 연방정부차원에서 초당적으로 관리하지 않고, 주 정부와 지방정부 차원에서 당파적으로 관리한다. 막대한 선거비용.

- 불평등과 사회경제적 신분 이동 : 재분배, 즉 정부 정책을 통해 부유한 계층에서 가난한 계층으로 실질적으로 이전하는 돈은 다른 민주국가에 비해 적다. 무일품에서 부자가 된 아들은 8%에 불과함.

- 미래를 위한 투자 : 연구개발비가 상대적으로 낮음. 공공의 목적을 위한 투자하는 돈이 줄어들고 있음. 교육에 투자하는 비용의 감소, 교육비에서 얻는 결과의 감소, 미국인이 받는 교육의 질이 천양지차이다.

- 부유하고 영향력이 있는 소수에게 권력이 과도하게 집중된 현상, 부와 영향력을 할애하지 않고 그들 자신과 가족만이라도 미국 사회의 문제에서 탈출할 방법을 찾으려고 뉴질랜드에서 부동산을 매입하거나 미사일 격납고를 고가에 매입해 호화로운 방어 시설로 꾸미는 것.

- 그들은 언제 진지하게 이 문제를 받아들일까?- 물리적으로 불안을 느끼기 시작할 때.

- 다른 국가로부터 배우려하지 않는 ‘미국 예외주의’

- 미국이 위기에 직면한 것이 맞느냐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없고,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다른쪽을 탓하는 습관, 자체의 문제를 바로잡으려 노력하지 않고 자기 보호에 급급한 태도, 다른 국가로부터 배우려 하지 않는 오만함이다.

 

< 장래에 세계가 해결해야할 과제는?>

- 핵무기폭발/ 기후변화 / 세계적 자원 고갈 / 세계적 차원의 생활수준 불평등

- 이슬람 근본주의 / 새롭게 생겨난 전염병 / 소행성 충돌 / 생물의 대량 멸종

- 국가간 및 다국적협정, 지역별 협정, 세계기구를 통한 협의

 

< 교훈과 남는 의문 그리고 미래 전망 >

1. 위기의 인정

-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오스트레일리아와 독일은 조금씩 누적되는 위기를 오랫동안 부인한 국가의 전형적인 예였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영국에 뿌리를 둔 백인이란 정체성을 오랫동안 고집해왔다. 독일은 나치 전범에 대한 책임이 평범한 독일인에게도 있다는 사실, 독일이 영토를 상실했다는 불편한 현실, 동유럽을 지배하는 공산주의 정부의 존재를 오랫동안 부정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독일에서는 이런 문제들을 서서히 민주적으로 정부 정책을 바꾸기 위해 국민적 합의를 이루어낸 유권자의 힘으로 해결했다.

- 현재 일본과 미국은 주된 문제를 선택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일본은 정부부채, 인구 고령화 등 일부 문제는 인정하지만 여성의 역할에 대한 쟁점은 부분적으로 인정할 뿐이다. 인구통계학적 문제로 이민을 고려하지 않고,한국,중국사이에 존재하는 긴장 관계의 역사적 원인도 부인한다. 해외 자연 자원을 지속가능하게 유지하려는 국제적 노력에 동참하지 않는다. 미국도 현재 당면한 주된 문제 – 정치적 양극화, 낮은 투표율, 까다로운 유권자 등록, 제한적인 사회경제적 신분 이동, 공공재에 대한 정부 투자의 감소 등 –를 외면하며 부정하고 있다.

2. 책임을 수용하라! 자신을 피해자로 여기는 자기 연민을 중단하고 남을 탓하지 마라!

- 책임을 부정함으로써 파멸을 초래한 극단적 사례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독일. 상당수의 독일 국민이 나치를 비롯한 많은 독일 학자의 거짓 주장, 즉 독일이 연합군의 압도적 전력에 군사적으로 패배한 것이 아니라 독일 사회주의자의 비겁한 배신 때문에 전쟁에서 패했다고 피해자인척 자기 연민에 빠진 탓에 나치를 지지했고, 2차 대전으로 이어져 독일에 재앙을 줌.

- 일본은 원자폭탄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는 자기 연민에 허우적댈 뿐, 한국과 중국에 범죄적 행위에 대해서 여전히 부정한다.

3. 울타리 세우기와 선택적 변화

- 핀란드는 공산국가 소련과 끊임없이 대화하며 변화를 시도했고, 행동의 자유를 부분적으로 포기하면서도 1차산업 국가에서 현대식 공업 국가로 변신해갔다. 하지만 핀란드는 다른 영역에서는 자유민주주의를 계속 추구했고, 실제로 유럽에서 구소련을 이웃한 어떤 국가보다 더 많은 행동의 자유를 누렸다. 그 때문에 핀란드의 행동은 겉보기에 일관성이 결여되어 지리적으로 잔혹한 핀란드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외부인들에게 많은 비난을 받았다.

4. 다른 국가로부터 지원

5. 본보기로 삼을 만한 다른 국가의 사례

- 미국예외주의라는 믿임이 미국은 캐나다와 서유럽 국가로부터 배울 것이 없다는 믿음으로 폭넓게 변형되었기 때문이다. 의료관리, 교육과 이민, 교정 제도, 노인의 안전 등 모든 나라에서 제기되는 쟁점에 대해 각국이 찾아낸 해결책에서도 미국은 교훈을 얻으려하지 않는다.

6. 국가 정체성

7. 정직한 자기 평가

- 적지 않는 미국 시민과 정치인이 현재의 주된 문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게다가 많은 미국인이 현재 미국에 닥친 문제를 다른 국가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다.

8. 역사적으로 과거에 경험한 국가적 위기

9. 국가의 실패와 인내심

- 미국은 참담한 패배와 점령에 단련된 적이 없었다. 미국은 1846~1848년의 멕시코-미국 전쟁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네 번의 전쟁에서 모두 승리를 거둔 까닭에 실질적인 교착 상태에 빠진 한국전쟁을 용납하지 못했고, 베트남전쟁의 패배를 감내하지 못했으며, 아프가니스탄에서 지루하게 계속되는 군사적 교착 상태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21세기에 들어선 이후 미국은 내부적으로 복잡한 사회경제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와 씨름하고 있지만 그 문제들은 쉽게 해결될만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미국이 여태껏 보여주지 못한 인내와 타협이 필요하다.

10.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응하는 국가능력

11. 국가의 핵심 가치

12. 지정학적 제약으로부터의 자유

- 군사적 테크놀로지의 발달은 과거의 지정학적 제약을 거의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핀란드의 우리의 지리적 조건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좌우명은 모든 국가에 변함없이 적용된다.

- 위기는 필요한가? 일본과 미국은 문제 해결의 단호한 결정을 내리지 않고 있다.

- 역사에서 지도자의 역할 : 제한된 선택항 중에서 선택하는 역할, 지도자는 국민이 이미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견해를 반영한 정책을 추진하는 경우에만 영향력이 있다.

- 국가의 위기 요인의 기준 : 국민의 합의, 책임의 수용, 국가 정체성, 제약으로부터의 자유, 실패를 용인하는 인내, 유연성, 정직한 자기 평가, 변화유무, 국가적 위기를 해결하려는 노력의 성패를 계량적 측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