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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그는 김대중인가 윤대중인가 제갈대중이인가? 본문

정치인 김대중

김대중 그는 김대중인가 윤대중인가 제갈대중이인가?

천아1234 2021. 7. 2. 13:12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의문이 드는 점이 있습니다.

저도 김씨 이지만 가끔씩 의문이 드는 점이 있어 발제를 해봅니다.

현대 생활에 성씨는 따져 뭐하랴 생각도 들지만

지인들과 술자리에서 가끔씩 듣는 말이 있습니다.



한귀로 듣고 흘려 버리는 센스를 발휘하면 되지만

너두 김씨잖아야~~ 이런 소리를 가끔씩 듣다보면

한편으로 이런 이야기가 흘러나오면 요즘말로 애매합니다.

물론 서로 상처를 깊게 하지않으려는 배려도 입지만 뼈있는 이야기도 될 수도 있기에

과연 김대중 전대통령의 본은 어떻게 표현해야 올바른 것일까요?

이에 저도 의문을 가지며 다음 블러그에서 글좀 옮겨와봤습니다.

정치적이나 지역색을 떠나 고유의 성씨만 따진다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김씨..윤씨..제갈.. 회원님들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본문입니다.



김대중, 그는 金大中인가? 尹大中인가? 諸葛(제갈)大中인가?



[손충무 칼럼] 김대중 묘비에 새겨진 출생의 거짓말ㅡ그 진상을 처음 밝힌다!..
전라도 검찰은 진짜 호적등본 찾기 위해 칼럼자의 사무실과 집을 3일간 뒤졌다




(손충무 칼럼)

지난 8월 18일 세상을 하직, 8월 23일 현충원에 묻힌 김대중씨의 죽음이 2개월도 못되어 국민들 머리 속에서 잊혀져 가고 있다.

그런데 10월 6일 오후 묘비 제막식 때문에 또 한번 세상을 소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그 바람에 지금까지 파묻혀 있던 김대중인가? 윤대중인가? 제갈대중인가? 하는 치욕스러운 비밀까지 살아나게 했다.



이제 김대중의 묘비에 새겨져 있는 거짓말과 진짜는 어떤 것이었나를 한번 살펴보자.

ㅡ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후광 (後廣) 김대중 선생은 본관이 金海 이시다. 아버지는 김운식 공이고 어머니는 장수금 여사이며 1924년 1월6일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도 에서 태어나셨다ㅡ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멀쩡한 거짓말이다. 김대중은 자신을 만들어준 진짜 생물학적인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는 私生兒(사생아)이다. 지금 같으면 DNA 검사를 해보면 간단 하게 알 수 있는 일이지만…

아버지로 되어 있는 김운식은 김대중이 7살 때 자신의 호적에 첩의 아들로 이미 7년 전에 태어난 庶子로 올려 주어 학교를 다니도록 만들어 주고 먼 훗날 정치인으로 변신한 김대중의 호소로 본부인과 이혼하고 4일 후 김대중의 어머니와 바로 결혼 정식, 정부인으로 올려 김대중을 嫡子로 만들어 주었을 뿐이다.

김대중의 어머니 장노도(張齒島-후에 장수금으로 개명)씨는 18살 때인 1911년 같은 옆 섬 마을에 사는 제갈성조(諸葛成祚) 라는 사람에게 시집을 가서 딸 2명을 낳았다.(1990년 9월 29일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면장 김광홍 발행 호적초본)

1920년 12월 제갈성조가 사망하자 제갈성조의 형인 제갈성복(諸葛成福)이 과부가 된 젊은 제수씨를 위로 해주기 위해 자주 동생 집을 방문하다가 비밀리에 육체관계를 가졌으며 아이를 임신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여러 증언과 기록에서 나온다.

인구 1천 여명 정도의 좁은 섬 마을에 젊은 과부의 배가 불러오자 소문이 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제갈성복은 장노도 여인이 출생한 건너편 섬인 뻐리섬으로 이사를 보내면서 친구인 윤창언(尹昌彦) 에게 중매를 서는 것처럼 하여 동거를 시켰다. 윤창언은 본래 농악을 하는 사람이었으며 부인과 사별한 후였다.

동거를 한지 얼마 안되어 출생한 것이 사내아이였다. 그의 이름을 윤대만(尹大萬-또는 윤성만)이라고 불렀다. 그가 훗날 김대중이로 변한다. 윤대만 이가 태어날 때 김대중의 이모가 되는 장도산이 조산원 역할을 했다고 한다.(윤창언씨의 조카 윤일만 경찰관 증언, 공화당 조사 팀 조사 기록)

그 2년 후 장노도는 다시 사내아이를 출생했다. 그는 윤창언과 사이에 정상적으로 태어난 아이였다. 그는 윤대의(尹大義) 라고 불렀다고 한다.

몇 년 후 윤창언도 사망했다. 김대중의 어머니 장노도는 졸지에 딸 2명 아들 2명을 길러야 하는 청상과부가 되었다. 그녀가 어려울 때 김대중의 생물학적 아버지이자 한때 동거했던 시숙 제갈성복이 돈을 내어 뻐리섬 선창가에 주막집을 차려 주었다.

그 주막집에 큰 섬을 돌면서 발동선을 이용 방물장사(생활용품 장사)를 하러 자주 섬에 오던 김운식(金云植) 씨와 동거를 하다가 윤대만이 7살이 되어 초등학교를 가기 위해 호적이 필요했다.

당시 뻐리섬에는 초등학교가 없었고 서당만 있었다. 초등학교를 가기 위해서는 본 섬인 큰 섬으로 가던지 목포로 가야만 했다. 장노도는 뻐리섬의 재산을 정리, 목포로 옮겨 가서 여관을 경영하면서 김운식의 호적에 첩으로 올라간다.

당시 호적에는 본부인 외에 제1첩 ?제2첩을 호적에 등재했으며 첩하고 사이에 출생한 자녀들은 서자(庶子-첩이나 외부에서 외도를 하여 얻은 자식)로 올렸다.

1924년(단기 4257년) 7월 7일 윤대만이 김대중(金大仲) 으로 이름이 바뀌어 김운식의 서자(庶子)로 등재되었다.(1988년 7월 18일 하의면장 장명우 발행 호적등본)

당시 김운식에는 본부인 김순례(金順禮)가 있었으며 그사이에 아들 대봉, 딸 매월, 안례, 용례 등 1남 3녀가 있었다.

목포 北국민학교(초등학교)와 목포상고를 거쳐 6,25 전쟁 후 부산 피난 건국대학교 야간부 2학년을 다니다가 목포에서 1954년 국회의원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된 바로 다음날 전과 7범의 민원비서실장 오길록을 검찰에 보내 칼럼자를 비롯 함윤식, 손창식, 이도형 등 언론인 등 14명을 형사 처벌하라는 고소를 했다. 사진은 지난 2002년 '한길소식' 손창식 편집인이 칼럼자에게 보낸 편지


목포의 나이든 유권자들은 김대중의 출신 성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표가 나오지 않았다. 목포에서는 자신의 출생비밀 때문에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된 김대중은 1959년 6월 5일 강원도 인제 지구에서 출마하면서 다음해인 1960년 6월 1일(단기 4293년) 호적을 정리했다.

계부 김운식은 6월 1일 본부인 김순례와 협의 이혼을 하고 6월 5일 첩으로 있던 장노도와 정식 혼인신고를 하여 정부인이 됐다. 그와 함께 서자 김대중은 적자(嫡子) 아들로 승격한다.(1990년 9월 15일 신안군 하의면 면장 김광홍 발행 호적등본)

사람들은 김대중의 그런 출생비밀 사실을 모르고 세월은 흘러갔다. 그러다가 1971년 그가 야당의 대통령 후보자로 탄생하자 당시 공화당 의장이었던 김종필의 사무실에 신안군 하의면과 목포 등지에서 김대중의 출신 성분과 공산당 관련 사실을 알리는 투서 형식의 편지가 수십 통이 들어왔다.

그래서 김종필 의장은 비밀리에 김대중의 정체를 알기 위한 신상 조사반을 만들었다. 이 조사반에 경찰, 중앙정보부, 군 특무대 출신 요원들 5명이 차출됐으며 팀장에는 헌병장교 출신 수사관 하영조(河永祚)가 임명되었다.

그런데 이들 5명 가운데 김대중과 5살 까지 함께 살던 의붓 아버지 윤창언의 조카 윤일만(尹一萬)이 포함되어 있었다. 윤일만은 당시 치안국 특정과에 근무하던 경찰 수사 관이었다.

따라서 장노도 여인이 임신을 한 후 자신의 작은 아버지뻘이 되는 윤창언씨 집으로 재가를 온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장노도 여인이 김운식의 첩으로 가서 김대중의 이름을 갖게 된 사실을 집안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모두 알고 있었다.

김대중 신원 조사반은 40일간 신안군 하의도, 뻐치섬, 목포 등지로 다니며 조사한 기록을 김종필에게 넘겼으며 김정필이 그 보고서를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박정희는 그 보고서를 읽은 후 공식 발표는 하지 못하도록 지시했으나 공화당은 은밀하게 소문을 흘렸다. 박정희가 당선되고 한참 세월이 흐른 후 1979년 10.26 사건이 발생하면서 유신정권의 망령이 막을 내렸다.

1980년 5월 서울의 봄은 매우 떠들 석 하고 혼란스러웠다. 5월 8일 경주에서 경주 김씨의 金山大祭 제사가 열렸다. 이 자리에 김대중이 참석했다.

그런데 이 행사장 여러 곳에 “윤대중은 물러가라” “제갈대중은 사라져라” 하는 플래카드가 나부껴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런 사실이 가십(gossip) 으로 언론에 보도되자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기자들에게 “김대중씨는 대통령에 출마하는 것 보다는 자신의 姓氏를 먼저 찾도록 하라”고 말했다.

전두환이 정보부에 보관되어 있던 김대중의 파일을 보았던 것이다. 그때 서울에 머물던 일본 산케이신문(山徑)의 시바다 미노루(紫田?) 논설위원과 칼럼자는 통역 김영희를 데리고 신안군과 목포 등지를 돌며 취재했다.

시바마 미노루는 도쿄로 돌아가 ‘김대중의 좌절’이라는 글을 5월15일부터 6개월간 산케이신문에 연재 보도한 후 책을 발행했다. 그는 기사를 통해 섬에서 만난 노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취재한 김대중의 출생 비밀을 폭로했다.

그 책은 일본에서 출판되었기 때문에 한국 국내에는 극소수 사람들만 아는 가운데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1986년 공화당 중앙위원을 지낸 이한두(李澣斗)씨가 ‘유신공화국’이라는 책을 발간하면서 문제의 김종필의 지시에 의한 하영조 조사 보고서를 전문 그대로 게재했다.

그 내용에 추가 첨부를 하여 1997년 10월 한길소식(발행인 함윤식, 편집인 손창식) 제2호에 '김대중 출생 및 가계의 비밀을 밝힌다'고 몇 페이지에 걸쳐 보도했다.

이 기사를 칼럼자가 발행하는 인사이더월드에 전재했다. 사실 당시 칼럼자는 하영조 보고서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도 사용하지는 않았다.

김대중은 1997년 12월 17일 당선됐으며 다음날 아침 당선 제1성으로 “정치보복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다음날 전과 7범의 민원비서실장 오길록을 검찰에 보내 손충무, 함윤식, 손창식, 이도형 등 언론인, 출판인, 소설가 등 14명을 형사처벌하라는 고소를 했다.

그리고는 검찰총장에게 야당 국회의원 5명을 보내 자신이 고소한 그들 14명을 해외 출국금지, 긴급구속 하도록 압력을 행사했다. 함윤식씨가 1차로 구속되고 칼럼자가 몇 개월 후에 2차로 구속되었다.

한편 손창식씨는 불구속 기소가 됐다. 칼럼자는 징역 2년, 함윤식은 징역 1년 6개월, 이도형은 집행유예 2년, 손창식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됐다. 검찰 수사관들은 칼럼자의 집과 사무실을 3일 동안 뒤졌다.

그러나 이미 칼럼자는 김대중에 관련된 주요 자료는 다른 곳으로 모두 빼돌렸으며 미국과 일본에 한 카피씩 갖다 두었다. 칼럼을 쓰는 이 시간 처음으로 김대중이 제갈성복의 후손임을 밝히는 호적등본, 김운식의 서자로 입적한 호적등본, 서자에서 적자로 둔갑하는 호적등본을 공개하는 것이다.

김대중이 당선된 후 정보부에 있던 파일, 보안사령부에 있던 파일은 모두 흔적없이 사라져 버렸으며 신안군 하의면과 목포지방 법원에 보관되어 있어야 할 제갈성조, 김운식의 호적이 모두 개정되었거나 멸실로 사라져 새로 작성했다는 것만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제 독자들은 처음으로 김대중의 어머니 장노도씨가 제갈성조 집안으로 시집을 간 사실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아마 칼럼자가 이런 귀중한 자료를 갖고 있는 사실을 김대중 가족들과 추종세력들은 생각지 못하고 묘비를 거짓말로 만든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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