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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기자들 다 쫓겨나는데 김대중 기자만 살아남더군"

천아1234 2021. 4. 27. 10:12

조선일보 김대중 고문의 50년, 자뻑 인터뷰가 놓친 것… "한국 언론 고질적 이중성의 축쇄판"
조선일보가 자신들 회사의 김대중 고문을 인터뷰했다. 김대중 고문은 6월1일로 기자생활 50년을 맞는다. 국내 최대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자칭 ‘1등 신문’에서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김 고문의 50년 기록은 평가할 대목이 있다. 그러나 인터뷰어가 “당대 최고의 칼럼니스트”라고 치켜세우고 이에 맞춰 “대통령이나 정부가 잘한다는 글을 쓰고 싶지 않았다”거나 “내가 보수를 대변한다는 말이 싫다”고 눙치는 대목은 어색하다 못해 불편하다.

조선일보의 ‘자뻑’ 인터뷰가 놓친 몇 가지 포인트를 짚어본다.
김대중 고문은 1980년 5월 광주에 있었다. 당시 사회부장이었던 김대중은 직접 광주에 내려가 이런 기사를 썼다.
“광주시를 서쪽으로 들어가는 폭 40미터의 도로에 화정동이라는 이름의 고개가 있다. 그 고개의 내리막길에 바리케이드가 쳐져있고 그 동쪽너머에 ‘무정부 상태의 광주’가 있다. 쓰러진 전주·각목·벽돌 등으로 쳐진 바리케이드 뒤에는 총을 든 난동자들이 서성거리고 있는 것이 멀리서 보였다.”
조선일보는 5월26일 사설에서 “신중을 거듭했던 군의 노고를 우리는 잊지 않는다, 계엄군은 일반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극소화한 희생만으로 사태를 진정시키는 데 성공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김대중 기자는 계엄군과 함께 바리케이트 바깥에서 난동자들이 서성거리고 있는 장면을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을 뿐 아무런 구체적인 취재도 하지 않고 광주를 무정부 상태라고 매도했다. 그리고 뒤늦게 "상황의 산물이었다"고 변명을 늘어놓고 있다. 후회를 하고 있다고 털어놓긴 했지만 정작 아무런 사과도 반성도 없었다. 

김 고문은 17년 뒤인 1997년 5·18 취재 후기를 모은 ‘5·18 회고록’에 실린 ‘악연으로 만났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광주’라는 제목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털어놓고 있다.
(참고 :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4892)
“나는 지금 그럴 바에야 그 기사를 쓰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를 하고 있지만 그 당시는 그 기사가 여러 사람의 입에 올랐었다는 것만은 적어두고 싶다. 결국 기사는, 신문은 그 시대 그 상황의 산물이며 기록일 수밖에 없다는 초라한 자위를 하면서 말이다.”
이에 앞서 출판국장 시절 월간조선 1985년 7월호에 쓴 ‘금남로의 10일’이란 글에서는 광주민주화운동의 희생자가 200~300명 정도라고 보도한 바 있다.

김 고문은 ‘5·18 리포트’에서 당시 상황을 떠올려 “2000명의 희생 위에 선 정권은 이 정권의 영원한 불명예다. 그래서 우리가 취재해 보니 실상 희생자로 파악되는 것은 200~300명으로 나오니 이것을 토대로 써주는 대신 광주사태가 일어나게 된, 즉 그것을 촉발시킨 17, 18일의 상황을 같이 써주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생각했다)”고 장광설을 늘어놓기도 했다.
조선일보는 ‘조선일보 80년사’에서 “(김 주필은) 출판국장 때는 당시 금기 사항이었던 ‘광주사태’를 월간조선의 특집으로 다뤘고 출판국장 재직 때 쓴 ‘일요칼럼’이 대통령 전두환의 반감을 사, 1986년 뜻하지 않은 영국 옥스퍼드대 연수를 1년 동안 다녀왔다“면서 마치 김 고문이 비판 언론인으로 탄압을 받았던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김 고문과 관련된 일화에서 국민신당 막말 사건을 빼놓을 수 없다.
대선을 며칠 앞둔 1997년 12월, 조선일보가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후보에 편향적인 기사를 쏟아내자 국민신당 당원들이 조선일보 사옥 앞에 몰려와 항의 시위를 했다. 그런데 만취 상태의 김대중 당시 주필이 나타나 “너네들, 내일 모레면 끝이야. 국민회의, 국민신당 너희는 싹 죽어, 까불지 마, 내일 모레면 없어질 정당이……”라고 막말을 쏟아냈다. 그렇게 살아왔던 김 고문이 “내가 보수를 대변한다는 말이 싫다”고 너스레를 떠는 건 흥미로운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김 고문은 2001년 김대중 전 대통령 시절 조선일보가 세무조사를 받자 이런 칼럼을 게재한다.
“36년간의 기자생활에서 내가 쓴 기사가 본의 아니게 고쳐진 적도 있고 아예 햇빛을 못 본 경우도 있지만 요즘처럼 자가검열로 위축되고 주눅 든 적은 없다. 김대중 정권의 언론사 세무조사 이후 나는 쓰고 싶은 글을 마음대로 쓰는 데 주저했고 하고 싶은 말을 삼가는 게 익숙해졌다.”
이때만큼 김 고문이 정권에 비판적이었던 때는 없었다. ‘막가는 신문탄압’이라는 칼럼에서는 이런 주장도 펼친다.
“우리가 무엇을 얼마나 잘못했기에 이렇게 뒷조사를 당하며 중죄인 취급을 받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이 나라와 국민에게 무슨 부당한 일을 했으며 무슨 사욕을 챙겼길래 계좌를 추적당하고 전화도청을 의식하며 살아야 하는가.… 대통령은 민주주의를 얘기하며 언론자유를 거론한다. 앞에서는 웃으면서 뒤로는 팔을 비틀고 있는 형국이다. 우리는 김대중 대통령을 자신에 대해 비판적인 신문을 지능적으로 위협하고 탄압한 대통령으로 기록할 것이다.”
황당무계한 오보도 있었다. IMF 외환위기가 터지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선된 직후인 1997년 12월 김대중 주필은 칼럼에서 “미국의 언론들은 김대중 당선자를 아직도 의혹의 눈초리로 보고 있다”면서 “월스트리트저널은 김 당선자를 가리켜 ‘인기주의자(populist)’ ‘예측하기 어려운 (unpredictable) 정치인’이라고 표현하고 그의 경제정책을 ‘근거없는 (unfounded)’것으로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주필은 ‘unpredictable’을 ‘말을 잘 뒤집는’이라는 의미로 해석했으나 지나친 비약이다. ‘unfounded’는 ‘근거없는’이라는 의미 보다는 기반이 취약하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게 맞다. 간판 칼럼니스트의 1면 칼럼으로는 낯뜨거운 수준의 오역이고 오보였다. 애초에 영어실력이 부족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특정 의도로 일부 표현에 과도하게 의미부여를 했을 가능성도 있다.
김 고문은 지난해 12월 헌법재판소가 통합진보당 해산결정을 내리자 칼럼에서 “미국도 나라의 안보를 해치는 일이면 고문도 하고, 도청도 하고, 추방도 한다”는 해괴한 주장을 늘어놓기도 했다. “우리는 분단된 채 이념적 대치 상황에 있는데도 관련자를 고문했다 하면 정권이 넘어가고, 도청했다 하면 정치가 마비되는 나라”라며 “대한민국만큼 늘어질 정도로 방만하고 자유로운 나라는 없다”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참고 :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0828)

김대중 고문은 조선일보의 이데올로그다. 보수 정권이 위기에 빠질 때마다 보수 세력의 결집을 선동했고 기득권 세력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친미 반공 이데올로기를 이땅에 뿌리내리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등신문의 주필과 고문을 역임하면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권력자들이 그의 기사를 민감하게 받아들였다고 해서 그가 권력에 비판적이었다고 해석하는 건 교묘한 비약이다.

리영희 선생은 조선일보 시절 수습기자 김대중을 만난 적 있다. 리 선생이 말년에 문학평론가 임헌영씨와 쓴 ‘대화’에 김대중 고문에 대한 평가가 실려 있다.
“그들(수습기자 6명)은 머리가 좋았던 만큼, 외신부에 들어와서 접하게 되는 세계정세와 인류사적인 변혁과 사건들에 대응해 이해하는 속도가 무척 빨랐어요. 그 세대들을 어려서부터 교육하고 세뇌했던 병적인 반공주의 사상도 나의 시각교정·의식수정 노력에 의해서 놀랄 만큼 교정되어 곧 정상적 가치판단을 하게 됐다, 그랬는데 그 가운데 김대중 군은 사사건건 반공주의만 고집하는 거예요. 베트남전쟁, 중국혁명, 제3세계 인민들의 진보적 운동에서 도도한 시대정신의 세례를 받으면서도, 김대중 군만은 어렸을 때부터 받아온 그 낡은 비이성적인 극우반공주의자라는 의식의 틀을 깨질 못하더라고. 나는 다른 견습기자들은 잘 가르치고 훈련시키면 우수한 저널리스트가 되겠지만, 김대중 군만은 어렵겠다고 실망했어. 그런데 훌륭한 저널리스트가 될 것으로 믿었던 기자들은 1974년에 일어난 언론자유투쟁 때 앞장섰다가 다 쫓겨났어. 반대로 도저히 구제하기 힘들겠다고 생각했던 그 김대중 기자만은 그대로 남아서 논설주간이 되고, 주필이 되고, 한국 여론을 쥐고 흔드는 막강한 <조선일보>의 상징적 존재가 되었더군.”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1998년 12월 월간 ‘인물과사상’에 실린 “김대중 주필님께”란 제목의 글에서 김 고문에게 다음과 같은 공개편지를 보낸 바 있다. 17년 전에 보낸 편지지만 김 고문의 인터뷰를 보고 돌아보면 지금 읽어도 시의적절한 평가라고 할 수 있다.
(참고 : https://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4283)
“유감스럽게도 김 주필님은 그간 자신의 위상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고 그에 따른 권력을 즐기는 데에만 몰두해 왔습니다. 눈에 보이는 게 없겠죠. 이해합니다. 당신이 세상을 우습게 볼 만합니다. 저는 정말 이해합니다. 그간 아무도 당신을, 조선일보를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진보적 지식인들이라는 사람들까지도 말입니다. 그들은 외국에서 수입된 좌파 이론이나 갖고 떠들 뿐 조선일보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조선일보와의 적대적 공존 관계를 통해 자기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그 지경이니 김 주필님의 간이 크게 부어 있다고 해도 전 놀라지 않을 겁니다.”
조선일보는 김 고문의 인터뷰에서 “그의 힘은 논리와 비판을 장착한 글의 힘에서 나왔다”면서 “거의 모든 정권에 눈엣가시 같은 존재, 때로는 어딘가 딴 곳으로 ‘치워버리고 싶은’ 기자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이명박근혜 정권과 불화했다는 소식은 들어본 적 없다. 조선일보 세무조사를 비판했던 것처럼 이명박 전 대통령의 자원외교나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을 비판하는 칼럼을 쓴 것도 본 적이 없다. 그런 그가 “대통령 비판에 모든 열정을 바친다”는 찬사를 듣는 건 오히려 기사를 읽는 쪽에서 민망할 정도다.
강준만 교수의 평가가 여전히 설득력을 갖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김대중 주필은 우리 사회가 ‘왼쪽 날개’에 의해 장악이라도 된 듯이 호들갑을 떨고 북한과의 대화는 절대 불가능한 듯이 호전성을 드러내는 등 이념문제에는 우직함을 자랑하지만 정치문제에 관한 한 그 재주가 지나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상품성’이 강한 칼럼을 생산해낸다. 김 주필은 한국 언론의 고질적인 이중성의 축쇄판이다. (강준만, 월간 ‘말’ 1997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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