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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삼성과 대한민국 미디어

삼성과 대한민국 미디어

천아1234 2021. 2. 26. 19:25

삼성은 어떻게 미디어를 통제하는가

2017년 12월22일 미디어 비평 전문지인 미디어오늘은 ‘중앙일보 간부들의 손석희 흔들기’란 기사를 보도했다. 중앙일보 간부들이 홍석현 전 중앙일보 그룹 회장과의 식사 자리 이후 손석희 JTBC보도담당 사장을 폄하했다는 지라시가 나돌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 기사는 지라시 내용의 진위 여부보다 홍석현과 계열사 핵심 임원들 간의 갈등 상황에 주목했다. 여기에 삼성 그룹 광고라는 변수를 놓고 중앙일보와 JTBC 간의 미묘한 경쟁 구도도 첨가했다.
[ 관련기사 : 중앙일보 간부들의 ‘손석희 흔들기’ ]

 
▲ 손석희 JTBC보도담당 사장. 사진=사진공동취재단

이 기사 내용만을 놓고 보면, 중앙일보 그룹과 삼성 그룹, 홍석현, 손석희의 JTBC, 그리고 중앙일보 임원들은 독립적인 존재로 묘사된다. 미디어오늘 기사뿐만 아니라 다른 언론 보도들도 유사한 보도 행태를 보여왔다. 이런 유형의 기사들은 몇 가지 의문점을 갖게 한다. 이들은 각기 다른 조직과 역사를 갖고 있는 법인과 존재들인가? 아니면 하나의 조직이며 그 조직의 구성원들로 볼 수 있는가? 홍석현 전 중앙일보 그룹 회장은 왜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고서도 중앙일보 임원들과 식사를 하면서 JTBC와 손석희 사장을 논의할까? 홍 전 회장은 그런 권력을 행사하는 근거가 무엇인가? 중앙일보 미디어 그룹은 왜 종합 편성 방송 이름을 JTBC로 지었을까? 그 이름은 삼성 소유의 동양방송(TBC)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중앙일보 그룹은 삼성 그룹과 어떤 관계를 갖고 있나? 손석희 JTBC 사장은 왜 중앙일보 임원들에게서 비난을 받고 있는가?
삼성 미디어 제국의 건설
얼핏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다. 그러나 답을 하다 보면 오히려 새로운 궁금증이 이어진다.
삼성 제국의 역사가 궁금해지고 여기에 한국 매스컴의 역사가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지 파고들게 된다. 신문 시장 구조, 광고 시장 구조, 유료 방송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다시 삼성 미디어 제국의 소유 구조와 사업 확장 과정이 궁금해진다. 답할수록 어려워지는 질문이다. 하지만 삼성의 미디어 권력에 대한 심도 깊은 분석과 이해 없이는 삼성 공화국을 제대로 인식할 수 없고, 인식할 수 없으면 벗어날 수도 없다.
1960년대 시작한 한국 미디어의 기업화는 삼성의 정보 산업 및 오락 산업의 진출과 궤를 같이 한다. 특히, 한국 정부가 시장주의 개념을 미디어 산업 전반에 도입한 1990년대에 삼성의 오너 일가는 미디어 사업 분야를 케이블 방송, 영화 투자, 유통, 극장, 연극, 드라마 제작, 디지털 콘텐츠 투자 등의 사업으로 확장했다. 그 결과, 삼성 오너 일가는 한국 미디어 콘텐츠의 생산과 유통 그리고 전시 분야까지 진출, 2008년 이후 한국 정보 산업과 대중 오락 산업의 최대 생산자이자 투자자이며, 유통업자이고 전시자가 되었다. 이를 통해 삼성이 한국 미디어 산업 흐름을 통제할 수 있는 최고 권력이 되었다. 그 권력의 정점에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존재한다.

 
▲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 연합뉴스

그래서 나는 이건희 회장이 한국 미디어를 통제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미디어 정치경제학
미디어 산업화가 우리보다 먼저 진행된 서구에서는 일찍부터 시장과 미디어 재벌, 그리고 정치 권력의 관계에 주목하여 연구를 진행했다. 달라스 스마이스(Dallas Smythe), 허버트 쉴러(Herbert Schiller), 존 렌트(John A. Lent) 제임스 큐란(James Curran), 벤 배지키언(Ben Bagdikian), 안드레 쉬프린(Andre Schiffrin) 등은 신자유주의가 도래한 197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미디어 소유 구조, 이사회 임원 구성과 정치 경제 파워 엘리트 간의 연결, 미디어 법과 정책 변화, 시장 구조 변화와 콘텐츠의 흐름 등을 분석하였다. 미디어 정치경제학의 탄생이다. 미디어 정치경제학자들은 미국, 영국, 프랑스 등에서 다양한 미디어 기업을 분석한 결과, 어느 국가에서건 정치 권력 변화가 미디어 법과 제도에 영향을 끼치며, 동시에 시장 주도 미디어 기업의 활동과 시장 구조 변동과도 유기적으로 연동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들은 특히 시장주의 이데올로기가 미디어 산업 구조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1980년대 후반부터 미디어 대형화가 시작되었음에 주목했다. 정부의 소유 규제 완화와 공기업 민영화 정책은 금융 자본들이 미디어 산업에 진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열어 줬고, 그 결과 초대형 문화 기업(또는 미디어 재벌)이 출현했다는 것이다. 미디어 재벌(media conglomerates 또는 cultural conglomerates)이란 기업들이 두 개 이상의 미디어 사업 분야에 진출해 수십 개의 계열사를 거느리면서 중앙집권식의 소유 구조를 유지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Kunz, 2007: Meehan, 2005). 우리가 알고 있는 문화 산업 재벌들로는 미국의 GE-NBC, Disney-ABC, News Corporation(Fox 채널 소유), Time-Warner, CBS-National Amusement, Sony사들이 있다. 이들 미디어 재벌들의 출신은 제조업이거나 미디어 전문기업이다. GE처럼 제조업에서 미디어 사업으로 확장한 기업이 있는가 하면, Disney처럼 미디어 전문 기업도 있다.
이들 소유 형태는 대부분 금융사들이 최대 주주이다. Disney 최대 주주는 미국의 대표적인 금융 자산가인 워렌 버펏(Warren Buffet)이다. 그가 소유한 금융 회사가 Disney의 최대 주주이다. 이와 달리 CBS-National Amusement는 레드스톤 (Red Stone)가문이 80%이상 소유지분을 갖고 있다. 레드스톤 가문은 지분만 갖고 있고 경영에는 참여하지 않는다. 같은 가족 기업 소유 형태를 보이는 News Corporation은 루퍼트 머독(Rupert Murdoch)과 그의 가족들이 경영까지 관여한다. 삼성과 달리 루퍼트 머독 집안은 News Corporation에 30% 이상 지분을 갖고 있다. 또한 아시아에도 미디어 재벌들이 있다. 예를 들면 인도의 Bennett & Coleman, 필리핀의 ABS-CBN, 말레지아의 Media Prima, 싱가포르의 Singapore Press Holdings (SPH) 등이다.

 
▲ 루퍼트 머독 (Rupert Murdoch)

미디어 재벌의 시장 통제
미디어 재벌의 등장으로 미디어 시장 구조는 독과점화됐다. 강력한 현금력을 갖춘 미디어 재벌들은 적극적인 기업 인수 합병을 통해 시장 점유율을 높여갔다. 그 결과, 미디어 재벌들은 시장의 흐름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력을 갖게 됐다. 이들 기업들이 시장의 필터 노릇을 하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미디어 재벌의 입맛에 맞지 않는 작품은 제작 기회조차도 배제된다. 설령 운이 좋아서 작품이 완성되었다 하더라도 시장에서 유통될 수 없다. 미디어 재벌들이 유통시장 출입구를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중소형 미디어 기업들이 작품을 기획할 때부터 유통 대기업의 입맛에 맞는 작품만을 만들도록 유도하는 자체 검열 기제를 작동하도록 한다. 다시 말하면 중소형 기업들은 생존하기 위해 작품의 다양성을 추구하기보다 시장에서 팔릴만한 작품에만 치중하게 된다(Meehan, 2005: Schiller, 1989: Schiffrin, 2000, 2006).
또한 여론 생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쇄 매체 시장에서도 미디어 대형화의 폐해는 심각하다. 광고주들이 발행 부수가 많은 매체만을 선호하기 때문에 대중적인 신문과 잡지들은 사회의 진보적인 가치에 대한 보도 빈도를 줄일 수밖에 없다. 대중 인쇄 매체에 대한 광고주들의 통제 기제는 광고비와 협찬비 등의 형태로 직간접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진보적인 가치를 주창하는 인쇄 매체들이 시장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언감생심이다(Curran, 2003: Freiberg, 1981).
다시 말하면, 미디어 재벌들은 시장 구조 장악을 통해 콘텐츠의 생산과 유통을 통제할 수 있는 권력을 갖게 됐다. 문화적 재벌들이 미디어 상품의 게이트 키퍼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미디어 시장의 양극화는 심화됐고, 중소형 미디어 기업들이 몰락함에 따라 콘텐츠의 다양성은 심각하게 훼손됐다.
삼성의 미디어 정치경제학
서구 미디어 정치경제학자들의 문제의식과 연구 결과는 서구 자본주의를 뒤쫓아 걸어온 한국에도 적용 가능할 것이다. 삼성의 미디어 정치경제학은 바로 이러한 인식에서 출발한다. 한국의 경우 언제부터 미디어 규제 완화가 진행됐는가? 되었다면 언제, 누가, 어떤 형식으로 제도화했는가? 한국형 미디어 재벌이 등장했는가? 등장했다면 서구의 문화 기업 재벌들과 어떤 유사점과 차이점을 보이는가? 한국 미디어 시장도 서양처럼 양극화가 심화했는가? 한국 미디어 재벌은 어떤 소유 구조를 갖고 있는가? 한국의 문화 파워 엘리트들은 어떻게 미디어 기업 내부에 통제 라인을 설치했는가? 한국 미디어 재벌의 등장은 한국 여론과 대중 문화 흐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사옥. ⓒ 연합뉴스

이러한 질문에 하나씩 답을 찾아 나가면 자연스럽게 하나의 미디어 집단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바로 삼성이다. 한국의 대중 매체사에서 삼성은 재벌 중에서 가장 먼저 미디어 산업에 진출했다. 삼성은 지난 1963년 중앙방송(나중에 동양방송으로 개명)을 시작으로 신문, 잡지, 광고, 드라마 제작, 케이블 방송, 영화 제작 분야까지 진출했다.
재벌의 진화 과정 측면에서도 삼성은 두드러진다. 1990년대 금융 자유화가 본격적으로 도입되면서 재벌들은 분화하기 시작했다. 재벌 창업주들이 세상을 떠난 뒤 기업을 물러 받은 후손들은 선친의 기업을 몇 개로 나눠 갖는다. 그 과정에서 기업들 간의 업종별 전문화가 함께 진행됐다. 이런 재벌들의 기업 나눠 갖기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1997년 금융 위기가 찾아왔다. 이 같은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선출된 정치권력은 미디어를 포함하는 문화 산업을 국가 진흥 산업으로 지정했다. 정치권은 미디어법과 제도를 자유화하면서 재벌과 외국의 대형 미디어 기업들을 한국 미디어 진흥 동반자로 초대했다(Shim, 2000: Jin, 2011: Kwak, 2012). 이 같은 규제 완화 정책 속에서 이건희 삼성 그룹 회장은 1990년대 이병철 설립 회장의 삼성 그룹을 5개의 재벌 그룹으로 분화했다. 이들 기업들 중 삼성과 중앙일보와 CJ 그룹이 적극적으로 미디어 전 사업 부분에 진출했다. 다시 말하면, 삼성은 다른 재벌들과 달리 가장 먼저 미디어 사업 부분에 진출했고, 지속적으로 미디어 사업을 확장했다.
여기에서 중요한 질문이 던져진다. 삼성, 중앙일보 그리고 CJ 그룹은 미디어 재벌인가? 이들 3개 재벌 그룹은 어떤 형태의 미디어 소유 구조를 유지하고 있는가? 이들 미디어 기업들은 한국 미디어법과 정책 변화에 어떻게 반응했는가? 정책과 유기적으로 연동했는가, 아니면 정책 변화를 추인했는가? 이병철 후예의 미디어 기업들은 어떻게 한국 신문, 방송, 영화, 광고 시장 구조에 영향을 미쳤는가? 이들 미디어 기업의 최종 수혜자는 누구인가? 다시 말하면, 삼성의 이씨 일가는 한국 미디어 시장의 제후들인가, 아니면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한국 미디어 시장의 황제인가?
2회부터는 꼬리에 꼬리는 무는 삼성의 미디어 정치경제학 질문을 하나씩 해결해 보도록 하자.

삼성재벌, 한반도의 국제 정치경제학 산물

삼성 재벌의 역사

 
▲ 1938년 대구 삼성상회. 사진=호암재단 홈페이지

삼성은 1936년 곡물 도정업을 시작으로 주류·무역업·식품업·의류업·석유화학·전자·건설·의료·호텔·부동산·미디어·정보통신 및 디지털 등 경공업에서 중화학 공업, 서비스 분야까지 사업을 확장했다. ‘표1’에서 보여지듯, 삼성은 한국 정치 경제 변화의 터널을 통과하면서 상업 자본에서 산업 자본, 그리고 초국적 자본으로 성장했다.

 

이병철, 한국의 자이바츠(Zaibatsu)를 꿈꾸었나
이병철은 일제강점기인 1936년 경상남도 마산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친구 2명과 함께 자본금 3만 원으로‘협동정미소’란 곡류 도정업계에 발을 내딛었다. 당시 마산은 한반도의 쌀을 일본 본토에 수출하고, 만주의 콩 등이 대량으로 수입되는 무역항이었다. 이곳에서 이병철은 곡물 도정업과 함께 트럭 20대를 이용, 곡물을 운송하는 사업도 함께 진행했다. 여기에 그는 일본 산업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부동산업에도 뛰어들어 토지 2백만 평을 소유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1937년 만주사변으로 마산에서의 사업을 접어야 했다. 2년 뒤인 1938년, 이병철은 대구에서 건어물과 잡화 등을 수출입 판매하는‘삼성상회’라는 무역회사를 차렸다. 그가 무역업을 선택한 것은 시대적 상황과 맞물린다.
그 당시 대부분의 제조업은 일본 재벌인 자이바츠(Zaibatsu)만 할 수 있었다. 자이바츠는 부호의 가족 또는 동족들이 폐쇄적인 소유 지배구조를 유지하면서 다각적 사업체를 운영하는 일본의 대기업 집단이다. 일본 정부가 메이지 유신 이후 경제 부흥을 위해 인위적으로 키운 기업들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미쯔비시, 미쯔이, 스미모토 등이 대표적 일본 대기업집단들이다. 이들 자이바츠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미국 맥아더 제독에 의해 해체되고 기업 집단(Kigyosudan)으로 변신했다.
이들 기업 집단은 한국의 재벌과 유사한 사업 특징을 갖고 있다. 국가가 몇몇 소수의 기업들에 특혜를 베풀어 국가 경제 성장과 국부를 증진시켰다는 점과 사업 진출 분야가 경공업에서부터 중화학공업, 유통업까지 문어발식으로 확장하고 있다는 점도 비슷하다. 하지만 두 가지 차이점이 있다. 일본 대기업은 한 가족이 아니라 한 가문 또는 문중이 공동으로 기업 집단을 통치한다. 반면 한국 재벌은 한 가족과 그의 친척들이 지배한다. 다른 차이점은 일본 자이바츠는 은행을 포함하는 금융업을 하고 있지만, 한국 재벌은 은행업을 할 수 없다는 점이다(김영래, 2000).
이병철은 일제 강점기에 자이바츠의 활동을 지켜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 기록에는 나와 있지 않다. 하지만 이 회장은 일본의 경제 동향과 기업들의 움직임을 삼성 사업 다각화와 기업 통제방식에 응용했다. 그는 삼성 그룹 제조업체의 플랜트 시설과 부품 등을 일본에서 구입하는 것을 가장 선호했다. 일본제품의 가격이 저렴하다는 점과 거리가 가까워 부품 조달과 플랜트의 애프터서비스가 용하다는 점 때문이었다. 또한 신규 사업에 관련된 컨설팅도 일본에서 받았다. 특히 이병철은 내년 연말 도쿄에 머물면서 일본의 기술정보와 시장 정보를 수집했다. 일본의 자본과 기술, 경영 방식을 삼성그룹에 도입하기 위해서였다(김영욱, 2010).

 
▲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 사진=호암재단 홈페이지

삼성이 재벌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은 해방 이후 이승만 정권 때다. 삼성그룹의 모태가 되는 삼성물산, 제일제당, 제일모직 설립이 모두 이 시기다. 이승만 정권은 제일모직과 제일제당을 일본 제국주의자가 남긴 귀속 자산으로 이병철에게 염가로 넘겼다. 또한 이승만은 제일모직 운영에 필요한 자금과 기계 설비 수입 등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더욱 눈에 띄는 것은 시중의 4개 국영 은행 중 3개를 민영화하면서 삼성에게 은행업을 할 수 있는 길을 터 주었다. 이 같은 특혜의 댓가로 이승만 정권은 대략 10~20% 정도 액수를 리베이트로 받았다. 이는 삼성이 정경유착을 통해 재벌로서 성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Cummings, 1997; 이시가와 요이찌, 1988). 삼성의 모태가 되는 이들 3개의 기업은 이병철이 단독으로 설립하지 않았고 동업의 형태로 지배했다. 제일제당을 예를 들어 설명하겠다. 발기인 명단을 보면, 이병철(27.5%), 조홍제(15%), 김생기(11.5%), 구영회(10%), 허정구(10%) 등이다. 이병철을 제외한 다른 주주들은 나중에 삼성과 결별하고 별도의 기업을 창업했다. 조홍제는 효성그룹을, 허정구는 삼양통상을, 김재명은 동서식품을, 성상영은 대한화섬을 설립했다(이정원, 1989).
박정희와 이병철의 긴장관계
삼성의 이병철 회장에게 첫 번째 시련이 닥쳤다. 1961년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이병철 등 10여 명을 부정축재자로 몰았다. 이병철은 박정희에게 경제인들에게 벌금 대신 공장을 건설케 하여 그 주식을 정부에 납부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또한 이병철은 시중은행 3개(상업·조흥·한일)를 국가에 헌납하겠다고 약속했다. 국민의 배고픔을 해결하겠다는 명분으로 쿠데타를 한 박정희는 이병철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과정에서 발표된 것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다(Kim, 1997). 군사 독재자 박정희와 삼성 그룹의 총수 이병철의 동거가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불안한 동거는 1965년 삼성 사카린밀수 사건 계기로 끝났다. 이 사건으로 이병철은 삼성그룹 오너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했다. 밀수 재벌의 오너란 비난을 받으면서도 그는 처벌되지 않고 그의 둘째 아들 이창희가 구속됐다. 또한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해야만 했다. 그 뒤 이병철의 장남인 이맹희가 삼성그룹 회장 자리를 잠시 맡았다. 하지만 이병철은 삼성 경영 일선에 다시 복귀했고 이맹희는 삼성에 다시 복귀하지 못했다. 박정희 정권과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이병철 회장은 1969년 삼성전자를 창립했다. 삼성은 필요한 기술과 자금을 미국으로부터 끌어들였다. LG와 대한전선 등 다른 재벌들이 일본 전자분야 대기업 집단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것과는 차이점을 보인다. 후발주자로서 어쩔 수 없었던 선택으로 보인다. 또한 이병철 회장은 중화학분야, 조선, 건설분야까지 사업를 다각화했다. 그 결과, ‘표2’에 보여지듯, 삼성은 1950년 후반부터 재벌 순위 1,2위 자리를 유지하며 최상층부의 자격을 지속적으로 유지했다.

 
▲ 사진은 국내 공업단지 시찰을 하고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앞줄 왼쪽 두번째)과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앞줄 왼쪽 세번째).
 

삼성이 재계 1위로서 자리를 굳건히 한 1970년대 이병철 회장은 삼성그룹을 그의 셋째 아들인 이건희에게 물러주기 위해 장기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그가 사용한 방법은 삼성문화재단을 이용하는 것이다. 비영리법인을 통해 삼성그룹을 그의 아들에게 물려줄 경우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법의 허점을 노린 셈이다. 그는 이건희를 후계자로 지명한 이후 삼성문화재단의 그룹 내 지분을 높여 갔다. 재단은 면세 혜택을 받는다는 점을 악용한 것이다. 1980년대에 들어서 이병철 회장은 이건희 그룹 부회장과 의사 결정을 공유하면서 자연스럽게 삼성그룹 내에 이건희 체제가 들어설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실제로 1987년 이병철 사망 이후, 삼성그룹을 통째로 물려 받은 이건희는 삼성의 사업 외연을 넓히기보다 삼성을 다국적 기업으로 만드는데 역량을 쏟았다. 동시에 선친 회장에게서 물려받은 삼성그룹을 5개의 범 삼성그룹으로 분화했다. 그렇게 탄생한 범 삼성그룹은 삼성, 한솔, 새한(1997년 금융위기 이후 파산), 중앙일보, CJ 그리고 신세계이다.
총수 일가 내부 통제라인 : 삼성주의, 돈 & 비서실
이병철은 제국 통치를 위해 3가지 방법을 상호연계해서 사용했다. 그 통제 방식은 삼성주의라고 불리울 수 있는 삼성 경영 철학의 상징화, 비서실을 통한 대리통치 그리고 피라미드 소유 지배 구조의 고착화이다. 이중 삼성주의는 미디어를 통해 일반인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이병철은 기업을 통해 국가와 사회에 봉사한다는 사업 보국, 인재제일, 그리고 합리 추구라는 3가지 경영철학을 표방했다. 나는 이 경영 철학을 삼성주의라고 명명한다. 왜냐하면, 이 이념이 총수 일가가 제국을 지배 통치하는데 정당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삼성의 이씨 일가에 대한 비판적인 언론 기사나 삼성의 악행을 고발하는 기사를 작성하면 기자들이 많이 받는 말이 “삼성이 망하면 대한민국이 망한다. 대한민국 망하면 네가 책임질거야?”라는 비난 섞인 비아냥이다. 삼성에 대한 이같은 무조건적인 옹호는 삼성주의가 대한민국 국민들의 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기업 애국주의 이데올로기는 삼성만 쓰는 홍보 전략이 아니다. 지난 1950년대 매카시즘이 팽배했던 미국적의 다국적 기업인 제네럴 일렉트릭(GE)도 많이 사용했다. 실제, 미국인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이 이데올로기가 아직까지도 작동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사옥 앞. ⓒ 연합뉴스

또한 삼성주의는 삼성맨은 엘리트이므로 삼성이 하면 국가에 도움이 된다는 의식과 연관돼 있다. 이는 철저하게 이씨 일가가 길러낸 그럴 듯한 허위의식이다. 왜냐하면 삼성그룹이 다른 재벌에 비해 사원 교육 프로그램을 일찍, 다양하게 실시하고 있지만, 그 내용은 철저하게 삼성 총수 이익을 위해서만 활용되기 때문이다. 삼성은 자연인을 선출한 다음 사내 연수라는 성형술을 통해 삼성에 필요한 인재를 길러내고 이들에게 엘리트 의식을 주입한다. 이성태 경제평론가는 지난 1992년 월간 ‘말’ 67호에서 “삼성의 기업 연수 내용을 살펴보면 몇 가지 특징이 발견된다. 그것은 주로 삼성인으로서의 소속감을 심어 주기 위한 내용과 삼성의 역사와 기업 이념 소개를 통한 긍지, 그리고 신입 사원으로 새 출발 한다는 관념을 불어넣어 주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프로그램은 철저히 삼성이라는 기업 중심의 사고를 하도록 작성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이처럼 삼성맨으로 길러진 사람들이 최고 경영자가 되기 위해선 반드시 거쳐야하는 관문이 있다. 삼성그룹 비서실(또는 기획조정실, 구조본부)이다. 이 곳의 명칭이 시대에 따라 바뀌지만 그 기능은 동일하다. 정치적 상황에 따라 삼성은 유동적으로 비서실의 이름만 바꿀 뿐 비서실을 통해 제국 내부 구성원을 통제하는 그 기능은 바뀌지 않았다. 비서실은 삼성그룹의 현재와 미래를 통제하는 권력 핵심부이다. 실제, 이곳에서 근무하지 않은 사람은 삼성그룹의 주요 의사 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없고 최고임원이 될 수도 없다.
그 역사를 추적해 보자. 비서실은 지난 1956년 이병철 회장이 직접 그룹 내에 설치했다. 직접 통치보다 비서실을 통한 간접 통치 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회장이 비서실을 지배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회장만 비서실장을 임명하고 파면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다. 비서실장은 회장과 의논해 비서실 임원과 직원들을 선발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다. 비서실 직원들은 계열사에서 삼성맨으로서 능력과 충성심을 검증 받은 사람들만 선출된다. 하지만 이들 조직은 외부에 드러나지 않는다(Kang, 1997).
예를 들어 보자. ‘정경문화’ 정형태 기자는 1985년 2월 ‘삼성의 요새: 이병철회장 비서실’이란 제하의 기사를 통해 삼성 비서실을 조명했다. 그 당시 비서실에는 150여 명의 임직원들이 13개 팀에 소속돼 있었다. 비서실장의 통제 하에 있는 비서실 직원들은 삼성그룹의 인사, 업무 감사, 관계사의 위험 관리, 정보 수집 등 대외 활동, 국제 동향, 오너 일가의 자산 관리, 그룹의 차기 사업 기획, 홍보 등의 업무를 담당한다. 이처럼 삼성의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삼성 비서실은 1985년 당시 ‘서울직업별 전화번호부’ 어느 구석에도 찾아 볼 수 없었다. 30년이 지난 현재도 삼성 비서실은 외부에는 비밀에 쌓여 있다. 흥미롭게도, 삼성의 미래를 이끌어갈 비서실 임직원들은 이씨 일가가 월급을 지급하는 것이 아니라, 삼성 계열사에서 월급을 받는다. 삼성의 최고 의사결정권자는 총수 일가이지만 월급은 삼성 법인에서 받는 이같은 이중 구조는 회사법인과 오너 일가가 경영과 소유를 함께 장악했기에 가능한 기업 문화이다(김용철, 2010).
마지막 통제 양식은 돈이다. 삼성 총수 일가는 적은 소유 지분으로 많은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씨 일가가 비서실을 통한 제국 장악력을 확보한 점과 정치권력의 암묵적인 동의하에 가능한 일이다. 소유구조는 오너 일가-중핵기업-비 중핵기업이라는 피라미드 구조다. 일명 출자 순환 구조라고도 불리운다. 이것도 역사가 오래됐다. 삼성그룹의 소유 구조는 지난 1964년을 기점으로 변화했다. 이병철은 삼성의 사업 분야를 석유화학, 비료, 보험, 미디어, 의료, 대학교까지 넓혔다. 하지만 이들 계열사를 직접 소유할 정도의 자금은 없었다. 그래서 활용한 것이 중층 지배 구조 구축이었다. 이씨 일가가 중핵기업만을 직접 소유하고, 나머지 기업들은 중핵기업들이 비 중핵기업을 지배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중핵기업은 삼성물산, 삼성생명, 제일제당, 제일모직, 전주제지, 중앙일보, 삼성전자 등이다. 이들 중핵기업들은 총수일가와 비 중핵기업들 간의 소유관계에서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 (왼쪽부터)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사진=뉴스타파 캡쳐

이는 삼성이 사업 분야를 넓혀갈수록 이씨 일가의 지분이 줄어듦을 의미한다. 제일모직을 예로 들어 보겠다. 총수 일가는 제일모직 지분을 1965년에는 59.4% 소유했다. 하지만 그 지분은 줄어들었다. 1974년에는 38.3%, 1985년 11.4%, 1990년 7.2%까지 감소했다. 특히, 기업 공개를 전후로 이씨 일가 지분이 더 크게 감소했다. 제일모직이 기업을 공개한 1975년을 기점으로 비교해 보면, 오너 일가 지분은 1960-1974년 연평균 44.8%에서 1975-1990년 25.6%까지 감소했다. 즉 피라미드 구조처럼 이씨 일가는 중핵기업 지분만 소유하고, 중핵기업은 산업별 계열사를 지배하는 형식이다(김영욱, 1993).
이 같은 피라미드 소유구조는 이건희 회장이 삼성그룹을 그의 외아들인 이재용에 물려주는데도 적극적으로 활용됐다. 2004년 8월 ‘월간조선’ 송승호 기자는 ‘삼성그룹의 3대 승계 어디까지 왔나’란 제목의 기사를 통해 이건희 회장이 중앙 집권식 소유 지배 구조를 이용해 삼성을 그의 아들에게 넘겼다고 주장했다. 1995년 이건희 회장은 자신의 돈 60억 8천만 원을 이재용에게 물려줬다. 증여세를 제외한 44억 원을 종잣 돈 삼아, 이재용은 삼성의 최대 주주가 되었다. 삼성그룹을 상속받는데 있어 16억 8천만 원만 지불했다고 비난을 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다. 이때 구축해 놓은 삼성재벌의 지배구조는 2014년까지 별 변동이 없었다 (송원근, 2014). 적은 지분으로 많은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이건희-이재용으로 이어지는 삼서 그룹내 경영권에 변화가 없음을 의미한다.

삼성家, 한국주류사회 어떻게 지배하게 됐나

세계 기업 역사에서 재벌은 가족 기업으로 분류할 수 있다. 혈연과 혼인으로 맺어진 창업주와 그의 친인척이 주요 주주이고, 경영에 관여할 수 있는 보직을 차지하고 있으며, 중요 의사 결정 과정에 관여하는 기업을 가족 기업이라 분류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20세기 초반 미국과 독일에서 상장된 100대 기업 중 각각 17%가 가족 기업이었다. 이태리의 경우는 50%가, 스위스는 33% 정도가 가족 기업이었다. 영국은 1989년 런던증권거래소 100대 기업 중 13% 정도가 가족 기업이었다(Colli, 2003).
이 같은 가족 자본주의 형태는 서구보다는 일본, 중국, 한국, 대만 등 동아시아 권역에서 더 많이 발견되고 있다. 서구 가족 기업 구성원들은 동아시아 가족 기업 회사원들이 그룹 내외의 사회적인 관계에 좀 더 주목하는 것에 비해 좀 더 개인적이고 자유로운 성향을 보인다(Hofstede & Bond, 1988).
차이를 보이는 가장 큰 이유는 자본주의 발달사의 차이와 문화적 차이 때문이다. 서구 자본주의는 분권형 봉건제가 붕괴된 이후 대지주가 산업 자본가로 변신한 반면, 일본을 제외하고 동아시아 자본주의는 식민 체제를 경험한 다음 정치권력이 신흥 자본가를 키워내는 발전주의 전략을 갖고 발달했다는 차이점이 있다. 또한 서구 자본주의는 개인적인 자유를 중요시하는 기독교 윤리에 기반 한 반면, 동아시아는 집단성을 강조하는 유교 철학에 기초했다는 차이점도 있다.

 
▲ 공자 (孔子)

유교는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연장자에 대한 권위 존중, 부계 쪽의 가족 동맹 강화 그리고 사람들 사이의 의리 등을 중요시 한다. 동시에 나이, 성별과 계급에 따른 위계질서를 강조하면서도 같은 구성원들끼리의 화합을 강조한다. 이 같은 유교적 가치들이 동아시아 가족 기업 형태와 결합되면서 임금에 대한 충성심은 회사에 대한 충성심으로, 연장자에 대한 존경은 상사에 대한 존중으로, 구성원 간의 의리는 조직원 간의 화합을 강조하는 형태로 나타난다(Chen & Chung, 1994). 그래서 일본, 대만, 한국, 중국 등의 자본주의 형태를 유교자본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다.
흥미로운 점은 같은 유교자본주의 국가로 분류된다 할지라도 유교적인 가치가 기업 내부 문화 형성 과정에서 약간의 차이점을 보인다는 점이다. 개인보다는 조직의 안정과 화합을 강조하는 유교의 철학이 다르게 나타난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 보자. 한국 기업 문화는 같은 그룹 내부의 위계질서 안에서의 화합(인화)를 강조한다. 일본 기업은 그룹 내에서의 조화와 사회적 응집력을 갖는 화합(wa)을 강조한다. 중국은 조직원 간의 조화 또는 화합을 강조한다는 점은 한국과 일본 기업 문화와 비슷한 측면을 보이지만 그룹 내 네트워킹이 그룹이 아닌 개인적 친분(guanxi)에서 일어난다는 점은 차이가 난다(Alston, 1989).
특히 한국 재벌처럼 가족끼리만 대규모 기업 집단을 소유하고 통제하는 폐쇄적인 특징은 다른 나라에서는 잘 발견되지 않는다. 심지어 같은 유교자본주의 국가인 일본과 중국도 다른 가족 또는 가문들과 기업의 소유 지분과 이사회 의석을 공유하지만 한국 재벌은 왕조 체제처럼 기업에 관한 통제권을 철저히 가족 내부 구성원만 행사할 수 있다(Ungson et.al, 1997). 이 같은 한국재벌의 폐쇄성은 재벌 형성 초기부터 형성되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한국 파워 엘리트 기원: 연고주의
재벌의 창업자와 그의 가족들은 한국 대자본가들이다. 이들은 한국형 파워 엘리트로 규정 할 수 있다. 미국 사회학자 돔호프(Domhoff, 2006)는 파워 엘리트를 상류 사회의 일원이면서 기업 공동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며 국가 정책 형성 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규정한다.
기업의 임원을 파워 엘리트 중에 엘리트로 표현하는 돔호프와 달리 한국 사회학자 홍덕률(2002)은 한국형 정치경제 파워 엘리트를 ‘주류’라는 말로 표현한다. 주류는 사회의 제도적 권력과 지배적 지위를 차지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특히 한국 주류들은 ‘아는 사람’끼리 밀어주고 끌어주는 선택과 배제의 원리에 충실하다. 그 ‘아는 사람’는 지연, 혈연, 학연 그리고 결혼이라는 접합점을 통해 확장된다. 같은 지역, 같은 고향, 같은 학교 그리고 같은 집안이라는 필터를 통해 주류에 편입될 수 있는지 배제되는지 결정된다.

 
▲ 이승만 전 대통령(왼쪽)과 박정희 전 대통령

이처럼 폐쇄적인 한국 주류 집단은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 때 형성됐다. 그래서 홍덕률(2002)와 김교동 (1976)은 재벌의 창업주들을 정치적인 기업가들이라고 규정한다. 왜냐하면 재벌 창업주들은 학연과 지연 등의 연고주의 고리를 통해 정치권에 줄을 대고 각종 특혜를 그들끼리만 독식했기 때문이다. 자원을 배분하는 독점적 권한을 가진 정치 권력자들이 그들과 같은 고향, 같은 학교, 같은 집안의 특정 기업가에게만 특혜를 베푼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재벌의 창업주들은 6·25 전쟁이 끝난 이후 연고주의를 기반으로 전쟁 구호 물자와 구호 자금을 독점하기 위해 각종 협회를 구성했다. 정치권도 이 협회에 가입한 기업들에게만 원조 물자 배당 등의 각종 특혜와 원료 독점, 판매독점권을 보장했다. 대표적인 협회는 제당협회, 방직협회, 제분공업협회, 건설협회 등이다. 삼성 창업주 이병철이 관여한 협회는 대한제당협회, 대한제분협회, 대한소모방협회, 대한모방직협회, 대한주정협회 등이다. 그는 협회에서 받은 자원과 자금을 이용해 제일제당, 제일모직, 조선양조 등의 회사를 1950년대에 설립하거나 확장했다. 이 같은 선택과 배제의 연고주의는 박정희 독재정권까지 이어졌다. 박정희 정권은 외자 물자를 통해 기업가 집단을 순치한 이승만과 달리 은행 등의 금융을 통해 재벌 창업주들을 통제했다. 정부는 금융 특혜, 조세 감면, 차관 배정, 부실기업 인수 특혜 등을 소수의 선택된 재벌들에게만 제공했다. (Chang, 1993). 이처럼 1950년대와 1960년대 정권과의 결탁을 통해 성장한 재벌 창업주들은 한국형 대자본가가 될 수 있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연고주의를 기반으로 한국형 정치경제 엘리트의 탄생이다. ‘표1’에서 보여지 듯, 핵심 정치 집단은 특정 학교와 지역 출신이 주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경제 집단은 이들과 연결된 재벌 창업주들이다. 상호협력 관계를 통해 성장해온 한국 정치 경제 파워엘리트들은 몇가지 이념들을 공유한다. 대표적인 이념들은 성장제일주의와 반공 이념을 공유하면서 친일과 친미 외교 정책, 국가의 축적된 부의 재분배 과정에서‘선성장 후분배’란 이념으로 노동자 배제 등이다. 이승만과 박정희때 공유된 이 이념들은 40년이 지난 현재까지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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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흐름에 따라 지연과 학연 등의 연고주의는 재벌 창업주들이 정치권과 연결돼는 고리로만 작동한 것은 아니다. 연고주의는 재벌에서 일하는 직원을 선발하고 임원으로 승진시키는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2000년대 초반 유태현 외 5인(2005)이 분석한 삼성 그룹 임원의 출신 지역을 살펴보자. 출신 지역이 확인된 임원 652명 중, 영남권 출신이 256명(41.0%)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며, 수도권 출신이 239명(38.2%), 중부권 출신이 88명(14.1%), 호남권 출신 37명(5.9%)이다. 또한 삼성 그룹 임원 중 서울대 출신이 가장 많다. 유태현 외 5인(2005)이 조사한 1,184명의 임원진 중에서 서울대 출신 298명(25.2%), 지방 대학 241명(20.4%), 서울대와 연고대를 제외한 서울 소재 대학 176명(14.9%), 연대와 고대 출신은 각각 108명(9.1%)와 107명(9.1%)명이다. 출신 대학별 대표 이사 구성도 비슷한 패턴을 보인다. 당시 삼성 그룹 전체 68개 계열사 중 자료를 수집한 66개 계열사의 대표 이사 중 출신 지역을 확인한 57명의 출신 지역별 구성을 보면, 영남권 26명(45.6%), 수도권14명(24.6%), 중부권8명(14.0%), 호남권 6명(10.5%), 기타 3명(5.3%)이다. 이들의 출신 대학은 서울대가 가장 많고, 그다음은 연대와 고대 순이었다. 이들 회사의 사외 이사들 비율도 임원 비율과 비슷하다. 다만 특이한 점은 지방 대학 출신은 드물다는 것이다 (pp. 143~148)
또 하나의 가족: 결혼 동맹
재벌 창업주들은 자녀들의 결혼을 통해 그들만의 성을 높이 쌓았다. 사돈을 맺는 대상은 시대에 따라 약간의 차이점을 보인다. 한국 대자본가 집단은 정치권력이 경제 권력을 지배했던 1980년대 이전까지는 정관계 가문과 결혼동맹을 결성했다. 정치권력이 자원배분 독점권을 통해 경제 권력을 지배했던 시기였던 만큼 정관계 인사들과 인맥 쌓기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본 축적 과정이 끝난 1980년대 이후에는 같은 재벌가 가문 자녀와 성혼하는 경향을 보였다. 재벌 이익 단체인 전경련 회원 소속사 창업주 자녀들의 결혼 사례를 분석한 공정자(1989)는 재벌 가문들의 혼인 유형은 상류층 간의 계급내혼의 특징을 보인다고 밝혔다. 재벌 창업주들은 재계를 포함해 정·관계 등의 저명인사들과 사돈관계를 맺고 있다는 의미이다. 결혼도 성별에 따라 다른 특징을 보인다. 재벌 창업주들이 며느리를 맞이할 경우 정관계 출신을 선호하고, 이들이 사위를 맞이할 경우 정관계보다는 재계 출신을 선호했다 (서울경제신문, 1992). 이 같은 차이를 보이는 것은 가부장적 재벌문화와 연관된다. 아들은 그룹 계열사 상속을 통해 그룹의 재산을 늘릴 수 있는 기회가 제도적으로 보장되지만 딸은 그룹 내 경영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재벌들은 결혼동맹을 통해 서로 연결될 수 있다. 박해현 (1992)의 분석 기사를 보자. 이병철 회장의 3남인 이건희가 지난 1967년 홍진기의 맏딸 홍라희와 결혼하면서 전 국무총리인 노신영 그리고 현대그룹 정주영과 건너 사돈이 된다. 홍진기가가 양쪽집안과 혼사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유사한 연구결과도 있다. 신호철(2005)은 사회관계망 조사 방법론을 이용해 8대 재벌과 88개 유력 가문에 속한 361명의 혼맥 관계를 분석했다. 그 결과 재벌가 혼맥 중심은 LG가문이었다. 재벌 가문들이 LG 가문을 통할 경우 13촌 이내에서 모두 연결됐다. 그 다음으로 네트워크의 중심에 있는 가문은 삼성가문이었고, 가장 화려한 혼맥을 가진 언론 가문은 중앙일보 가문이었다.

 
▲ ⓒ getty images bank

삼성 파워 네트워킹 핵심: 이병철-신현확-홍진기
삼성가는 한국 재계-정계-관계의 거미줄 혼맥도에서 주요한 한 핵을 차지하고 있다. 창업주 이병철이 직접적으로 정관계 인사들과 혼맥으로 연결된다기보다 결혼을 통해 한 가족이 된 홍진기 자녀들의 혼맥을 통해서다. 이씨와 홍씨의 혼맥 분석을 하기 전에 이들의 관계 분석을 해 볼 필요가 있다. 한국 파워엘리트들의 특징을 고스란히 갖고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병철과 홍진기를 연결해 준 사람은 TK 마피아의 대부인 신현확이다. 이병철과 신현확은 같은 영남출신이다. 신현확과 홍진기는 학연으로 연결돼 있다. 이들 모두 경성제대(서울대) 법무학부을 졸업했다. 또한 고등문관시험(사법고시)에 합격한 고위 관료출신이라는 공통점도 있다. 신현확은 학연으로 알게 된 홍진기를 지연으로 이병철을 소개한 것이다. 1960년 3·15 부정선거 당시 내무부 장관이었던 홍진기는 경무대 입구 발포 명령자란 혐의로 구속 복역 중이었다. 그때 이병철이 감옥으로 홍진기 면회를 가면서 만남이 시작됐다. 당시 무기 징역을 선고 받은 홍이 어떻게 풀려났는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는 감옥에서 나온 이후 동양방송 사장에 취임했다. 그 뒤 이병철과 함께 중앙일보을 창간하고 확장하는데 적극 개입했다. 그룹 내에서 그의 위상은 계열사 회장 이상이었다. 예를 들어보자. 1971년 삼성 후계자를 정한 다음 이병철은 유언장에 “삼성 그룹의 후계자는 건희로 정한 만큼 건희를 중심으로 삼성을 이끌어 갈 것이며, 홍진기 중앙일보 회장이 뒷받침해서 승계해 주기 바란다”라고 명기해 놓았다(이경남, 1986). 다른 예도 있다. 이병철은 1986년 세상을 떠난 홍진기에 대한 조사에서“당신은 내 일생을 통해 제일 많은 시간을 접촉한 평생의 동지요, 삼성을 이끌어온 같은 임원이요, 사업의 반려자였으며, 가정적으로는 나의 사돈이었다”고 추모했다(이경남, 1986).

 
▲ 신현확 전 국무총리

신현확은 홍진기와 달리 오랜 동안 정관계에 몸담았다. 1964년 경제과학심의위원이 되어 제3공화국 정부와 인연을 맺은 그는 박정희 정권에서 보사부 장관과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을 역임했다. 1979년 10·26 사태 이후 최규하 정부에서 잠시 동안 국무총리를 역임하기도 했다. 신현확이 삼성 그룹에서 일을 하게 된 것은 홍진기 중앙일보 회장이 세상을 떠난 두 달 뒤인 1986년 9월이다. 당시 삼성 그룹의 소유 구조에서 중핵 기업인 삼성물산 사장직을 맡았다. 1년 뒤 이병철 회장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이건희가 삼성 그룹을 무난히 승계 받을 수 있도록 대내외적인 환경을 관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병철 자녀들

 
▲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

경북 의령군에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이병철은 ‘표2’에서 보듯 3남 5녀의 자녀를 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재벌의 남성 위주의 가부장적 문화가 삼성에서도 발견된다. 아들들은 모두 그룹 내 계열사 경영에 참여하고 있지만 딸들은 대부분 경영에 참여하지 않는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장남 이맹희는 경북고 32회 졸업생으로 노태우 전 대통령, 김윤환 전 정무제1장관, 정호용 전 내무부 장관 등과 고교 동기다. 그는 일본과 미국에서 교육을 받았고 삼성물산과 한국비료 등 삼성 계열사 임원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1965년 삼성이 사카린 밀수 사건에 연루돼 이병철이 삼성 그룹 회장직에서 잠시 물러나 있을 때 그룹을 책임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 후 어떤 이유에서인지 알 수 없지만 그는 삼성 그룹의 경영 일선에 복귀하지 못했다(이맹희, 1993). 그는 1958년 경기도지사와 농림부 양정국장을 지낸 손영기 딸과 결혼했다. 이맹희가 삼성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것과 달리 그의 아내는 1992년 안국화재(현 삼성생명)의 최대 주주(19.6%)로서 상무이사를 맡아 경영에도 참여하기도 했다. ‘표3’에서 보듯, 이맹희는 3명의 자식이 있다. 그의 큰 아들이 CJ 그룹을 이끌고 있다.

 

이병철 회장의 둘째 아들인 창희는 일본 와세다 시절 만난 이영자와 결혼했다. 그녀의 부친은 일본 재벌인 미쯔이물산 임원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성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옥고를 치룬 이창희는 1990년대 범 삼성 계열 그룹인 새한 그룹을 이끌다가 세상을 떠났다.

 
▲ 2012년 7월29일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과 부인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 관장, 장녀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삼성일가가 영국 런던 올림픽파크의 아쿠아틱스 센터에서 열린 2012 런던올림픽 남자 자유형 400m 결승을 참관하기 위해 수영장을 방문했다. ⓒ 연합뉴스

이병철 선대 회장에게서 삼성 그룹을 물러 받은 사람은 3남인 이건희다. 일본 와세다 대학과 미국 조지워싱턴대학에서 교육을 받은 그는 중앙일보, 삼성전자 등 계열사에서 임원으로서 활동했다. 그는 1967년 자유당 시절 법무장관과 내무장관을 지낸 홍진기의 장녀 홍라희와 결혼했다. 서울대 미대 출신인 홍라희는 이건희가 그룹 회장으로 취임하기 전까지 중앙일보 편집국과 경영 일선에서 활동했다. ‘표4’에서 보여듯이, 이들 부부는 1남 2녀 자녀를 두었다. 이들 자녀들은 모두 삼성 그룹 내에서 최대 주주이며 경영자들이다.

 

결혼을 통해 이병철가의 일원이 된 홍라희 가족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병철 회장의 회고록에 언급될 정도로 친분이 두터운 홍라희의 부친 홍진기는 이병철-이건희 승계 라인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고, 범 삼성 그룹에 포함되는 중앙일보 그룹 홍석현 회장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홍석현은 홍라희의 남동생이다. ‘표5’에서 보듯, 홍라희는 5명의 동생들이 있다. 이들 모두 한국 최고 학벌을 취득했고, 한국 주요 파워 엘리트들과 결혼했다. 예를 들면, 그의 큰 동생 홍석현은 박정희 정권 당시 검찰총장과 안기부장을 지낸 신직수의 딸과 결혼했다. 신직수는 박정희 철권 통치때 법률자문을 담당했다. 그의 여동생은 노신영의 차남과 결혼했다. 이 결혼을 통해 삼성은 다른 재벌가와 연결될 수 있는 고리를 갖는다. 노신영의 장남 노경수는 현대 정세영의 장녀와 혼인했다. 현대의 정몽준은 전 외무장관 김동조 자녀와, 김동조의 또 다른 자녀는 GS 창업 가문과 결혼했다. 홍라희는 또 동아일보 소유 집안과 사돈이다. 그녀의 사위가 동아일보 주식을 갖고 있고 창업주의 손주다(신호철, 2005; 조동명, 2004).

 

마지막으로, 이병철의 장녀 이인희는 경북지역 대지주 조범석의 자제로 경북대 의대를 졸업한 의사와 결혼했다. 그녀의 남편은 고려병원(현 강북삼성병원)장을 지냈다. 차녀는 LG 창업주인 구인회 회장의 3남과 결혼했다. 이병철의 3녀 순희는 교수 출신과, 4녀는 삼성맨과 결혼했다. 막내딸은 4·5대 국회의원과 삼호방직 회장의 차남과 결혼했다.

삼성의 미디어 진출 역사는 한국 미디어의 기업화 과정

언론의 본질보다 그룹의 이해관계를 우선시
한국 언론과 대중문화는 이승만 정권보다는 박정희 독재 정권의 비호 아래 기업으로서 성장했다. 박 정권은 소수의 체제 순응적인 언론 소유주에게만 특혜를 베풀고 왜곡된 광고 시장 구조를 용인하면서 언론 기업화를 가속화시켰다. 그래서 Park, et al.(2000)은 한국 언론은 서구와 달리 정치적인 후원을 통해 성장해 시민의 민주 권리보다는 국가 안보를 우선시하는 미디어 콘텐츠를 제작 유통하는 국가주의 전통이 강하다고 지적한다. 이는 한국 언론기업들이 언론 자유와 민주주의 가치를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언론 자본을 축적하고 언론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음을 의미한다.

 
▲ 사진은 국내 공업단지 시찰을 하고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앞줄 왼쪽 두번째)과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앞줄 왼쪽 세번째).

한국 언론기업들은 소유 지분과 이사회 의석을 금융 자본과 공유하는 서구 언론기업들과 달리 가족들이 기업을 소유하고 지배하는 가족 자본의 성격이 강하다(Kwak, 2012). 이들은 언론사 내부의 편집권과 경영권 통제를 통해 정보 제작, 유통 과정에 관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들 가족 자본가들은 또한 왜곡된 한국 광고시장 구조에 기대어 자본을 축적했다. 자본주의가 발달한 세계 어느 나라에도 한국 광고 시장처럼 중립성이 배제된 곳은 없다. 서구 자본주의 국가는 상품 정보의 중립성 확보를 위해 광고 회사 설립에 엄격한 제한을 두고 있다. 광고주나 광고하는 매체, 심지어 기타 광고 자재를 공급하는 업체조차도 광고 회사에 투자할 수 없다. 광고를 제작 유통하는 회사의 중립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다(신이섭·서범석, 2011). 한국과 유사한 미디어 시스템을 갖고 있는 일본조차도 광고시장의 중립성은 보장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 광고주가 광고 회사를 갖고 있으면서 매체를 갖고 있는 경우도 많다. 심지어 광고주와 광고회사 그리고 언론사가 한 가족의 소유인 경우도 있다. 이런 기울어진 언론지형은 1960년대부터 시작된다.
독재정권, 재벌, 언론 기업화
한국 대중 매체 역사를 가르는 기준점은 1960년대와 1980년대다. 1960년대는 정치적인 통제가 한국 언론과 대중문화를 통제했고, 1980년대 후반부터는 시장을 통한 경제적인 통제가 시작된 시기다. 매체별로 살펴보면, 1960년대 한국 신문들과 영화사들은 기업화 과정을 시작했고, 1970년대 광고 시장이 성장하면서 방송도 매출 확장을 통해 기업의 모습을 갖춰갔다. 1980년대는 미국의 통상 압력으로 인해 영화와 광고 시장이 개방되기 시작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방송과 신문을 동시에 소유하는 복합미디어 기업을 해체했다. 그 후, 1987년 시민혁명이후 한국 신문 시장은 정치적인 통제가 아닌 시장 통제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1990년대는 케이블 텔레비전과 디지털 미디어가 본격 도입되면서 다매체 다채널 영상 시대가 열렸다. 이처럼 한국 언론과 영상 매체들은 각기 다른 시기에 기업화 과정을 거쳤다(Jin, 2011). 자, 이제 시대별로 살펴보자.
해방 이후 한국 신문들은 ‘신문 및 정기간행물 허가에 관한 ’미군정법령 88호에 의해 통제를 받고 있었다. 미군정은 이 법령으로 좌익 성향의 신문을 탄압하고 친 우익적인 매체만을 시장에 남겨뒀다. 진보적인 신문이 대중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원천 차단한 셈이다. 이승만 정권도 미군정과 유사한 언론 정책을 행사하면서 한국 신문은 태생적으로 집권 세력 편향적인 보도를 하거나 탈정치적인 대중 신문만이 생존할 수 있었다(김남석, 2010).

 
▲ 1961년 5월16일, 박정희 소장을 비롯한 대한민국 육군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권력을 잡았다.

1961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채찍과 당근’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언론법과 정책을 시행했다. 채찍 정책은 체제에 반항하는 언론사 허가 취소, 제반 인쇄 시설과 통신 시설 의무화, 기자와 경영진 분리 정책 등이다. 이 정책은 자금력이 약한 비판적인 성향의 신문사들을 시장에서 쫒아내는 효과를 발휘했다. 이로 인해 정권에 우호적인 신문이거나 정권 비판에 소극적인 신문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또한 언론 기업의 경영 여건을 개선한다는 목적으로 편집인 제도를 도입, 기자와 경영진들의 관계를 기존의 동지적 협력 관계에서 상하적 종속 관계로 변질시켰다.
박정희의 당근 정책은 대대적인 물량공세다. 정권 코드 맞추기에 적극적인 언론사들은 정권으로부터 저리의 자금 융자, 신문용지용 원목의 수입 관세 인하, 세제 지원 등의 특혜를 받았다. 또한 방송 사업을 신청할 경우 방송-통신 겸업을 허가해 주었다. 여기에 경영 다각화를 위해 인쇄업, 광고업, 운송업, 호텔업 등을 할 수 있도록 정책적 지원을 하고, 이를 설립 운영할 수 있는 자금인 상업 차관을 저리에 대출해 주었다(서현진, 2003). 다시 말하면 한국 신문은 재벌처럼 박정희 정권 비호 아래 언론 자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1960년대 신문 기업화를 촉진한 박정희는 또한 방송기업화도 함께 시도했다. ‘표 1’에서 보듯, 한국 방송은 1950년 후반부터 미국 텔레비전 제조회사인 RCA가 한국 방송 시장에 진출해 있었다. 하지만 대중이 시청할 수 있는 수상기 부족과 광고주 부족으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이런 와중에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국영 방송국을 설립하고 재벌들에게 민간 방송국을 허가해 줬다. 하지만 방송국들은 재정난에 허덕였다. 시설 자금 외에도 수익 낼 수 있는 창구가 마땅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박정희는 국영 방송국인 KBS가 시청료를 국민으로부터 받고 상업광고를 할 수 있는 길을 터주었다. 하지만 1960년대는 한국 제조업이 경공업 수준에 머물고 있어 대형 광고주가 출현하지 않은 시기였다.

 

영화도 산업으로서 정비되기 시작한 시기는 1960년대다. 박정희 정권은 1962년 최초의 영화법 제정을 통해 영화 제작업자, 수입업자, 수출입업자의 등록제를 도입했다. 이법은 몇 번의 개정 작업을 통해 군소 프로덕션을 정비하고 신문과 방송처럼 일정 시설과 인원을 갖췄을 경우만 영화사를 할 수 있도록 했다. 여기에 독립된 영화 제작자의 탄생을 전속제, 시설 기준, 예치금 납부 등으로 철저히 묶어두면서 영화에 대한 박정권의 통제 권한을 행사했다. 또한 외국 영화 수입 추천권을 국산 영화 제작, 수출 편수 및 수상 실적과 연계시키는 방식을 도입함으로써 제작자 중심의 편향된 시장 구조를 만들었다.
이로 인해 영화 제작에 필요한 하부 산업이 발전할 수 있는 길은 원천적으로 차단됐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이 세계 영화사에 길이 남을 제도를 도입한 것도 있다. 1966년 스크린 쿼터제 도입이다. 국산 영화 및 합작 영화의 수출 실적에 따라 외화 수입량을 연동시킨 것은 한국 영화가 지속적으로 제작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한 장점도 있다(영화진흥위원회, 2001).

 
▲ 제일기획 사옥. 사진=제일기획 Blog

1970년대는 광고 산업의 확장과 방송사들의 기업화 과정이 활발했다. 재벌들이 사업 분야를 경공업에서 중화학 공업으로 넓혀가면서 대중 소비를 촉진하기 위한 광고 확대의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광고에 마케팅의 개념을 접목시켜야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도입된 것이 광고 대행사였다. 광고 대행사란 자사의 제품이나 서비스를 구매하여 줄 고객을 갖고 있는 판매자를 대신하여 광고물을 기획, 개발, 제작하여 광고 매체에 싣는 크리에이티브 및 영업 업무를 맡고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독립적인 기업 조직체이다. 광고주와 광고 매체의 중간에서 상품에 대한 소비자의 기호 조사, 시장 조사 등으로 광고주를 돕는 마케팅 활동도 함께 수행한다 (원우현, 1984. pp. 202-210). 이 시기 등장한 광고 대행사는 제일기획, 연합광고, 만보사 그리고 오리콤이다.
이들 광고 대행사들은 재벌의 소유이거나 신문사와 소유지분을 공유한다. 세계 광고역사에서 한국만이 갖는 특이성이다. 서구에선 광고주와 광고 매체는 광고회사를 소유할 수 없다. 상품 정보의 중립성을 훼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일기획과 연합광고 지분을 살펴보자. 1973년에 설립된 제일기획 소유 지분을 살펴보자. 자본금 1억 원으로 출범한 제일기획의 주요 주주는 롯데제과, 삼립식품, 태평양화학, 제일모직, 신세계백화점, 동방생명(현 삼성생명), 제일모직, 제일제당, 방우영 조선일보 사장, 장기영 한국일보 사장 등이다. 제일기획의 주요 광고주는 삼성전자. 신세계백화점 제일제당 등 삼성 계열사들이다.
1974년 설립된 연합광고 주요 주주는 문화방송·경향신문(20%), 동아일보(10%), 태광산업(10%) 등이다. 주요 광고주는 금성사, 기아산업, 동아제약, 럭키, 미원, 해태제과 등이다. 이처럼 광고회사와 광고주 그리고 광고매체가 동일한 경우가 많다. 제일기획은 중앙일보와 TBC과 함께 삼성 계열사다. 이병철 일가의 통제를 받는 재벌 그룹이다. 연합광고는 MBC TV와 라디오 및 경향신문과 같은 계열사이고, 이들 광고주들이 주요 주주이다. 상품정보가 대중에게 선보이기 전에 대자본 위주로 오염될 수 있는 구조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이들 광고대행사들은 모두 하우스에이전시이다. 재벌이나 언론사를 배경으로 설립됐다는 의미다. 이들 광고 대행사들은 상품 마케팅만 전개한 것이 아니라 사보 발행을 통해 기업 이미지 향상에 기여했다 (신이섭·서범석, 2011). 이 같은 재벌과 광고시장의 구조적 유착관계는 한국 언론 시장의 대자본 편향적인 구도를 만들었다.
‘표 2’에서 보듯, 재벌들은 신문, 방송, 통신, 광고 시장에까지 진출했다. 재벌이 미디어 기업을 소유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경제적으로 언론 기업을 계열사로 둠으로써 정보의 불확실성과 거래 비용을 감소시킬 수 있다. 정치적으로는 모기업인 재벌이 정권과 긴장 관계를 형성할 때 방패막이로 활용할 수 있다(강현두·이창현, 1987).

 

마지막으로 1980년대는 한국 미디어 산업 구조를 정권이 직접 통제하는 정치적인 지배에서 시장을 통한 경제적인 통제로 넘어가는 과도기다. 1979년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은 비판적 언론인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고 지방 언론사들을 강제로 통폐합한다. 이 통폐합 조치에 ‘방송·통신 겸업 금지’도 포함됐다. 이로 인해 기존에 신문과 방송 또는 통신 계열사를 운영하고 있던 재벌들은 언론 시장에서 자리를 감추기 시작한다. 삼성은 방송을 포기한 대신 신문을 선택하고 지방 문화방송국을 소유하고 있던 다른 재벌들은 소유 지분을 전두환 정권에게 넘긴다. 통신사를 운영하고 있던 두산, 삼호 그리고 쌍용도 언론사업을 접었다(Kwak, 2012).
삼성을 제외하고 정보 시장에서 물러난 재벌들은 1980년 후반 시장 개방과 자유화 바람을 타고 영상 산업에 진출하기 시작한다. 재벌의 영화와 비디오 산업 진출은 이데올로기적 측면보다 경제적 이윤 추구 목적이 더 크다. TV나 VTR을 제작하던 삼성과 대우, LG 등은 수요 창출을 위해 비디오 유통업에 진출했다. 전자제품인 하드웨어 소비를 촉진하기 위해 비디오 제작 시장에 뛰어 들었다는 의미다. 여기에 케이블 방송 도입을 앞두고 새로운 먹잇감을 찾아 재벌들이 영상 산업 시장에 진출했다(영화진흥위원회, 2001).
삼성, 미디어 사검열 역사
삼성의 미디어 진출 역사는 한국 미디어의 기업화 과정과 일치한다. 삼성은 다른 재벌들에 비해 대자본 축적 과정이 빨랐다. 대부분의 재벌 그룹들이 1960년대 박정희 정권과의 유착 관계를 통해 사업 영역을 확장하던 시기에 삼성은 신문사와 방송국을 설립했다. ‘표 3’에서 보듯, 삼성은 1960년대에 신문과 방송 분야에 진출했고, 1970년대는 광고와 사보, 1980년대에는 영상과 음반 산업에 진출했다. 1984년 삼성은 삼성물산 산하에 ‘스타맥스 (Starmax)’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드림박스로 명명된 이 회사는 VHS 판매를 위한 비디오 작품을 제작하거나 헐리우드 등에서 외화를 수입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영상 부서였다. 1985년 삼성은 또한 삼성SDS를 설립했다. 그룹 내 전산 업무를 담당하기 위해 설립된 이 회사는 1980년대 당시 정부가 추진 중인 정보통신 국가 프로젝트에도 참여했다. 삼성SDS는 1990년대 다른 재벌 기업들이 PC통신에 투자를 확장한 것과 달리 인터넷을 이용한 디지털 소통방식에 더 치중했다. 1990년대 삼성은 오렌지(Orange)라는 대중 음반 생산을 담당하는 회사를 제일기획의 산하 기업으로 설립했다(Variety, 1997). 그리고 1990년대에는 케이블 방송 분야에 진출했다.

 

삼성이 TBC 설립 이후 1965년 중앙일보를 설립하려 하자 조선, 동아, 한국일보 등의 반발이 거셌다. 중앙일보를 설립할 당시 방우영 조선일보 사장은 이병철 삼성 회장에게 “재벌이 어떻게 신문을 만듭니까. 나랏돈 갖고 돈 번 사람이 정부를 비판할 수 있겠습니까. 신문 사업이란 것이 돈벌이와는 거리가 멀어 우리도 겨우 먹고 살기 바쁩니다. 재벌이 왜 신문에까지 손을 대려고 합니까. 그럴 돈 있으면 신문에 광고나 많이 내 신문사들을 도우십시오.”(2008, pp. 53-54) 라고 충고했다고 회고록에 적고 있다. 재벌의 언론시장 진출에 대한 거부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막강한 자금력을 갖고 있는 삼성이 기업화 초기 단계인 신문시장에 진출한다는 것은 기존 언론사들에겐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실제, 중앙일보 창간 이후 다른 언론사들이 어려움에 처했다. 삼성이 경쟁사에서 기자들을 대량으로 스카우트해 갔다. 여기에 중앙일보는 무가지를 살포하고 경품 끼워 넣기 등 공격적인 마케팅을 전개하면서 기존 신문 시장 질서를 통째로 뒤흔들었다(김주환, 2006, p. 267).

 
▲ 중앙일보 사옥. 사진=미디어오늘 자료사진

삼성은 1960년대부터 신문(중앙일보)과 라디오 텔레비전 방송국(TBC)을 운영하는 복합 미디어 기업이었다. 이들 미디어 기업들은 매출을 통해 이익을 창출하기보다는 모기업인 삼성의 이익을 최대화하고 경쟁사들을 비방하는데 활용했다. 강현두·이창현 (1987) 연구 결과가 하나의 사례일 수 있다. TBC는 1966년 삼성 사카린 밀수 사건과 1969년 미원-미풍 조미료 광고 방송 사건이 터졌을 때 삼성에 유리한 내용을 보도하거나 프로그램으로 편성했다. 공공재인 미디어를 사적 이익을 위해 활용한 것이다. 미디어 소유 집중에 따른 ‘사적 검열’이 일어난 사건이다.
김주환(2006)도 유사한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삼양사 소유의 동아일보와 삼성 소유의 중앙일보 사례를 꼽았다. 1950년대 제당과 의류 분야에서 앞서 있던 삼양사는 이승만 정권의 비호로 급성장한 삼성과 1960년대 강하게 대립했다. 이런 상황에서 1966년 사카린 밀수 사건이 터지자, 삼양사 소유의 동아일보는 이 사건을 4개월 동안 집중 보도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모기업인 삼성은 10년 간 동아일보에 광고를 중단했다. 재벌 소유 언론사인 중앙일보는 삼양사 소유 고려중악학원의 토지 불법 매각과 탈세, 동아일보 사주 일가의 상속세 탈루와 그린벨트 훼손 등을 집중 보도했다. 동아와 중앙의 이전투구 양상 싸움의 근원은 모기업 재벌 이익 보호를 위해서였다. 이 같은 편파주의 보도 행태는 언론의 주도권이 시장으로 넘어간 2000년대에는 더욱 교묘하고 정교해졌다.

삼성 오너만 자유로운 시장주의 체제

신자유주의, 시장경제, 재벌
1980년대는 과도기였다. 정치적으론 군사 독재정권에서 시민정부로의 절차적 민주주의가 시작된 시기였고, 경제적으론 관치경제에서 시장경제로 전환되는 도입기였다. 정치적 전환 변곡점은 1987년 시민혁명이다.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은 7년 동안 국민들을 강압적인 폭력으로 통치했다. 하지만 그는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민혁명에 의해 권좌에서 물러났다. 그 이후, 한국인은 자유롭게 정치 지도자를 선출할 수 있게 됐다. 정치적 자유화인 절차적 민주주의가 시작된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경제적 체제 변화는 시민들의 자발적 선택이 아니었다. 미국에 의한 외압 때문이었다. 한-미간 무역거래에 있어 미국의 적자가 크다는 이유에서였다. 1985년 한국정부와 미국 통상대표부는 한국의 금융, 보험, 광고, 영화 시장 개방에 대한 협상을 시작했다. 한국경제가 세계 경제 자유화 흐름에 편입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그 다음해부터 한국정부는 보험업과 증권 등 금융업과 영화와 광고 등의 미디어 시장을 개방했다. 경제 중심축이 정부 주도형에서 시장 중심으로 옮겨가기 시작한 시간이었다(Sa, 1993).
사실 한국 시장 개방은 미국의 통상압력에 의해서만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전두환 정권의 자발적 협력도 있었다. 1980년 5월 광주시민을 학살하고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박정희의 경제개발 모델을 승계할 수 없었다. 그동안 금전적 물적 자원을 지원해 줬던 미국과 일본이 상황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과 영국 등 앵글로색슨 자본주의 국가들은 불황 타개책으로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신자유주의 정책은 한마디로 시장 중심 경제구조를 말한다. 대표적인 정책들은 공기업의 사기업화, 금융시장 활성화, 소유 지분 완화 및 기업의 인수 합병 (M&A) 활성화 등이다. 미국과 영국은 또한 이 같은 경제 개방화 조치를 아시아국가도 요구했다. 자국의 기업들이 아시아 시장에서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길을 터주기 위해서였다(Harvey, 2005). 이 같은 시장 개방화 흐름 속에서 전두환은 적극적으로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이려 했다. 미국으로부터 정치적 인정을 위해서였다. 전두환 정권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도입하기 위해 미국에서 경제학 공부를 하고 돌아온 시장주의자들을 경제 관료로 임용했다. 이들은 정부의 시장 개입 축소, 기업 활동 자유 보장, 금융 자유화 그리고 공공 부문 민영화 정책을 추진했다 (Kim, 1999).

 
▲ 1985년 4월26일 미국을 방문중인 전두환 대통령 내외와 레이건 대통령 내외가 백악관 발코니에서 환담을 나누고 있다. ⓒ 연합뉴스

이 같은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들은 한국 미디어 시장에도 영향을 미쳤다. 미국은 1980년 중반 통상 협상을 통해 새로운 민영 방송국 설립, 외국 광고대행사의 자유로운 영업활동 보장, 헐리우드 영화의 직접 배급 등을 요구했고 이를 관철시켰다. 이 같은 미국 측의 요구로 1980년대 후반부터 한국정부는 SBS 등을 포함하는 민영방송국을 추가로 허가했고, 다국적 광고대행사들과 헐리우드 영화 배급사들은 한국 미디어 시장에서 자유롭게 영업 활동을 하게 됐다(Kim, 1996). 이 같은 신자유주의 정책들은 1993년 대통령으로 취임한 김영삼 정권 때 더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1994년 쌀 시장을 개방했고 1995년에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했다. 시장의 자율성과 효율성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는 한국 독점기업으로 성장한 재벌들에게 날개를 달아줬다. 특히, 재벌들은 외국 은행에서 차관을 직접 들여와 금융 계열사를 설립하고 국민들을 상대로 이자 장사를 했다. 또한 이미 포화상태에 이른 중화학 공업, 반도체 그리고 자동차 산업에 진출해 한국 경제 부실 규모를 키웠다. 하지만 김영삼 정부는 재벌의 무분별한 경제활동을 제재할 수단이 없었다. 독재 정권 시절의 ‘강한 정부-약한 재벌’의 권력 관계가 민주 정부시절엔 ‘약한 정부-강한 재벌’로 역전된 것이다 (홍덕률, 2006). 한마디로 1990년대는 선출되지 않은 경제 권력이 선출된 권력을 통제하는 재벌공화국 시대였다.
금융 자유화와 삼성가의 편법 상속
경제 자유화와 시장 개방화 흐름 속에서 삼성의 통치권은 설립자 이병철에서 이건희로 교체됐다. 이병철 삼성 창립자는 1987년 11월 세상을 떠났다. 그 당시 삼성은 32개의 그룹 계열사, 종업원 15만 명, 11조 원이상의 자산에 17조 원이 넘는 매출액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의 셋째 아들인 이건희가 12월1일 그룹 회장 직을 승계했다. 회장에 취임한 그는 당면한 두 가지 과제가 있었다. 그룹의 새로운 먹거리 발굴과 형제들 간의 상속 문제였다.
이건희 회장은 자동차, 유통, 종합화학, 영화-영상사업, 인터넷 등의 사업 분야에 진출했다. 하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특히 삼성자동차는 1999년 법정관리로 넘어가면서 약 4조5천억 원의 부채까지 남겼다. 자산 매각을 통해 2조 원 정도의 부채는 상환했지만, 나머지 약 2조5천억 원을 갚아야했다. 이처럼 이 회장의 경영실적은 탁월하진 않았다. 하지만 최악은 아니었다. 그는 삼성전자를 초국적 기업으로 성장시켜 세계인의 머릿속에 삼성을 각인시켰다. 이건희의 경영 스타일은 이병철과 비슷하다. 그룹 비서실 (또는 구조본부)을 통해 수렴 청정하는 방식이다. 그룹의 장기적인 밑그림과 자금운영은 비서실에서 총괄하도록 하고, 정기적인 그룹 사장단 회의를 통해 계열사 업무를 보고 받았다(선우정, 2000).

 
▲ 1980년대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사진=삼성

이건희 회장의 또 다른 임무는 가족 간의 상속 문제를 무난히 처리하는 거였다. 그는 선대회장으로부터 그룹을 통째로 물려받았다. 그가 낸 상속세는 150억 1800만 원이었다. 삼성 자산 규모에 비해 턱없이 낮은 상속세금을 냈지만 위법 사항은 아니었다. 이병철 삼성 창업주가 아들에게 넘긴 자산은 237억 원 2300만 원과 몇 개의 공익재단이었기 때문이다(권영준, 2005). 공익재단에 대한 세금 규정이 없는 점과 재벌 총수가 그룹 경영권을 통제하는 한국 재벌의 특성을 적극 활용해 세금을 아낀 것이다. 한국 최고의 재벌이 법의 허점을 이용해 세금을 적게 냈다는 도덕적 비난을 받았지만 법적 처벌 사항은 아니었다.
선대 회장은 공익재단을 이용해 절세했다면 이건희 회장은 금융기법을 적극 활용했다. 이들 부자의 상속 방법은 달랐지만 법의 허점을 이용, 상속세를 적게 냈다는 공통점은 있다. 선대회장 보다 이건희 회장의 상속 문제는 더 어려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출자순환구조를 깨뜨리지 않으면서 삼성 그룹을 6개 범 삼성가로 나누고 그의 자녀들에게도 경영권을 세습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범 삼성가를 이룬 사람들은 모두 공정거래법에서 규정한 특수 관계인들이다. 이병철은 1987년 1월 일본 동경으로 6명의 사람을 부른다. 동경 6인들은 큰 딸인 이인희, 작은 아들 이창희, 셋째아들 이건희, 장손자 이재현, 그리고 막내 딸 이명희 등이다 (정혜연, 2012, p. 200). 특수 관계인은 그룹 창업자의 배우자, 6촌 이내의 혈족과 4촌 이내의 인척들을 특수 관계인으로 명명한다.
삼성을 분할하는데 있어서 이학수 등 구조본부 사람들의 역할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모두 재무 전문가들이다. 이들은 중핵기업들에 첨단 금융기법을 접목시켰다. 대표적인 중핵기업은 에스원, 엔지니어링, 제일기획, 서울통신, 에버랜드 그리고 SDS 등이다. 활용한 금융 기법은 사모전환사채 (CB)와 신주인수권부사채(BW)다. 정부가 기업들의 자금 조달 편의성을 위해 1990년대 도입했다. 삼성은 주식 상장을 앞둔 중핵기업의 CB와 BW를 상속 수단으로 활용했다. 기상천외한 방법이었다. 비상장 주식이 장외시장에서 거래돼 소득이 발생할 경우 시세차익에 대해서만 세금을 부과하지만, 상장 주식의 경우 세금을 부과하지 않는 법의 허점을 이용한 것이다. 삼성의 행위는 동일한 패턴을 보인다. 삼성비서실의 종자돈 불리기(1단계), 불어난 자금으로 핵심회사 장악하기 (2단계: 불어난 자금으로 핵심회사인 에버랜드, 삼성전자, 삼성 SDS의 CB나 BW를 저가로 인수하는 단계), 순환출자구조를 통해 그룹에 대한 지배력을 확장하기, 지배구조의 강화 및 안정화(4단계), 차기 경영 전면에 등장 및 황제이미지 구축하기 등이다 (조승현, 2014, p. 274).

 
▲ 2013년 5월31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삼성물산 패션부문장 사장이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호암상 시상식에서 나란히 앉아 있다. ⓒ 연합뉴스

1990년대 삼성에버랜드를 예를 들어 설명하겠다. 그룹 내 부동산 관리회사였던 중앙개발에서 삼성에버랜드로 개명한 이 기업은 그룹의 사실상의 지주회사였다. 1995년 이건희 회장은 그의 자녀들에게 약 61억 원을 증여했다. 증여세금 약 16억 원을 내고 남은 돈 46억 원으로 주식 상장 직전인 에스원과 삼성엔지니어링 주식을 구매했다. 상장되자마자 주식을 되팔아 450억 원을 만들었다. 이 돈을 종자돈 삼아 회장 자녀들은 에버랜드와 삼성전자, 그리고 제일기획에서 발행한 CB를 대량 구입한다. 다른 주주들은 대부분 신주 인수를 포기한다. 그 결과, 아래 표에서 보듯, 이재용과 그의 여동생 3명은 1996년 삼성에버랜드 최대주주로 등극했다. 이 회사는 삼성 그룹의 사실상의 지주회사이므로 이재용과 그의 여동생들은 16억 원의 세금만 내고 삼성을 상속 받은 셈이었다. 왜냐하면 에버랜드를 정점으로 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카드-에베랜드로 돌고 도는 순환 출자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씨 일가가 삼성에버랜드를 통해 그룹 경영권을 세습하고 통제권을 확보하는 행위는 현대, SK, LG 등 다른 재벌에서도 그대로 재현됐다(조승현, 2014).

 

특히, 표 내용 중 중앙일보와 이재현, CJ의 지분 변동을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회장의 처남인 홍석현은 1996년 중앙일보 사장이었지만 그의 지분은 1%도 되지 않았다. 그 당시 중앙일보 최대주주는 이건희 (26.44%)였다. 나머지 중앙일보 지분은 이 씨의 형제들과 삼성 중핵기업들이 공유했다. 홍석현씨나 그의 형제들 이름은 명부에 없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상황이 1996년부터 벌어졌다. 중앙일보는 삼성 에버랜드의 신주 CB 인수를 거부했다. 이로 인해 삼성에버랜드 최대주주 자격을 상실했다. 심지어 1998년에는 에버랜드 주식이 하나도 없다. 1년 뒤 1999년 중앙일보는 삼성그룹에서 분가했다. 보광 그룹과 함께 삼성에서 떨어져 나온 중앙일보의 최대주주는 홍석현이었다. 그의 지분은 1997년까지 1%미만에서 1999년 21.51%로 증가했다(최경운, 2005, p. 205). 삼성에버랜드와 중앙일보 지분이 맞교환 됐을 수도 있다고 추론할 수 있다. 분가 이후 중앙일보 최대주주는 홍석현 등 홍씨일가다. CJ와 이건희의 큰 조카 이재현도 살펴보자. CJ는 1997년 삼성에서 정식 분가했다. CJ는 다른 주주들과 달리 삼성에버랜드의 CB 발행 신주를 유일하게 인수했다. 그 지분을 2010대 초반까지 갖고 있었다.

 
▲ 2013년 5월4일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미국으로 출국하기 위해 부인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과 함께 서울 강서구 공항동 김포공항 출국장에 들어서고 있다. 홍라희 여사 뒤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보인다. ⓒ 연합뉴스

이런 식의 주주 맞교환 형식을 통해 이병철의 삼성은 6개의 범 삼성가 그룹으로 확대됐다. 이인희씨는 삼성으로부터 전주제지 등의 제지사업과 통신장비계열사를 인계 받아 1993년 분가해 한솔그룹으로 독립했다. 이창희씨는 VCR 등 전자부품을 생산하는 기업과 한일합섬을 상속받아 새한그룹으로 독립했다. 이건희는 핵심사업 영역인 전자, 금융, 제조, 의류, 서비스 관련 계열사를 그대로 상속받았다. 이재현은 식품업 위주로 상속 받아 CJ 그룹으로 1997년 독립했다. 이명희는 1999년 백화점 등 유통업 계열사를 갖고 1999년 분가했다. 이건희의 처남인 홍석현은 1999년 중앙일보 그룹으로 분가했다. 이들 범 삼성가 그룹들 중 새한 그룹을 제외하고 모두 시장에서 선두 기업들이다. 이들 모두 한국 광고 시장을 떠받치는 광고주들이다. 이중 삼성, 중앙일보 그리고 CJ 그룹이 분가 이후 정보와 대중문화 분야로 사업을 확장했다. 김춘효 자유언론실천재단기획편집위원

조중동 독과점 심화와 재벌의 영향력 확대

신자유주의의 자유 시장 정책은 미디어에도 적용됐다. 미국 매체 정치경제학자 배지키언(Bagdikian, 2000)은 신자유주의 체제가 미디어에 대한 규제를 크게 완화시켰으나 시장 경쟁의 심화가 자유 언론을 보장해 주기는커녕 미디어 독과점 현상을 심화시켰다고 주장했다. 신자유주의 미디어 정책이 도입될 무렵인 1983년 대형 신문사 수는 50개였으나 극심한 시장 경쟁 체제를 거치면서 1990년대 말 10개 안팎으로 줄었다는 것이다. 후속 연구에서 미한(Meehan, 2005)은 시간이 흐를수록 미디어 독점화 현상이 더 심해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한국 또한 1987년 민주화 이후 미디어 규제 완화가 진행됐다. 한국 신문 시장은 외견상 미국과 다른 모습을 보였다. ‘표1’에서 보듯 규제 완화 조치로 신문사들의 숫자가 줄어들기는커녕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신문의 숫자 증가와 무관하게 한국 또한 미국과 마찬가지로 규제 완화로 오히려 독과점 현상의 심화돼왔다.

 

언론통폐합·동아사태·자본통제
조선·중앙·동아일보 등 중앙 일간 신문사들은 1970년대의 광고 시장 팽창으로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특히 1980년 전두환 신군부는 ‘언론기본법’ 제정을 통해 언론 통폐합을 단행했다. 이 법은 방송 공영화, 신문과 방송의 겸영 금지, 신문통폐합, 지방지의 1도1사제, 통신사 통폐합 등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송건호 외 저, 2015). 사회 정화라는 명분으로 추진된 언론 통폐합 조치로 정기 간행물 172종은 폐간했고 870명의 언론인을 대량 해고했다. 5공화국 출범 이후 시장에 남아있는 기업은 신문사 21개(중앙지 11, 지방지 10), 계열사 포함 방송사 27개, 통신사 1개 등이었다(옥기원, 2012, p. 11).
재벌의 언론 소유 경영을 엄격히 제한하려는 신군부는 재벌들에게 선택을 강요했다. 이로 인해 삼성을 제외한 재벌들은 잠시 언론 정보 시장에서 물러나 있게 된다. 삼성은 TBC 방송국을 포기하고 중앙일보를 선택했다. 통신사를 운영하고 있던 쌍용과 두산그룹 등은 각각 뉴스통신 사업권을 포기했다. LG그룹은 부산 국제신문과 경남일보를, 일산그룹은 충청일보를, 동부그룹은 강원일보를 포기했다(김남석, 1994).
신군부는 신문사들을 대상으로 ‘채찍과 당근’ 정책을 사용했다. 정보기관원을 편집국에 상주시키고 ‘보도 지침’을 통해 기사 논조를 통제했다. 통제를 벗어난 기사가 나오면 정보기관이 관련 언론인들을 연행, 협박하기도 했다. 동시에 유화 정책도 함께 사용했다. 언론 사주들은 독점(지방지) 또는 경쟁 완화(중앙지)로 손쉽게 수익 창출을 보장받았다. 여기에 더해 일간지들이 출판업과 공연 등 문화 사업을 할 수 있는 사업 다각화를 허용했다. 기자들에게는 복지 향상이란 명목으로 주택 공급, 저리 대출 등의 혜택을 주었고, 해외 연수 프로그램도 제공했다. 박정희 체제부터 이어진 언론인의 고위 공무원 발탁이나 국회의원 공천도 계속됐다. 박명진(Park, et al., 2000)은 이 관계를 후원자-고객(Patron-Clients) 관계라고 규정했다. 왜냐하면 군부 정치 세력과 신문사주 및 기자의 이 같은 관계는 언론 카르텔을 형성, 정권의 입맛에 맞는 뉴스만을 제작 유통시켰기 때문이다.

 
▲ 지난해 12월에 개봉한 영화 ‘1987’에서 ‘보도 지침’을 볼 수 있다.

정권과 언론의 안정적인 담합은 1987년 시민 혁명으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노태우 정권은 1988년 언론기본법을 폐지하고 정기간행물법을 제정하면서 신문사 설립을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전환했다. 이로써 한국 신문은 본격적인 시장 경쟁 체제에 들어섰다. 신문사 설립 조건 완화로 새로운 신문이 쏟아져 나왔다. 신문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큰 종합 일간지 시장 진출은 국민주, 재벌 그리고 종교 단체에 의해 이루어졌다. 1987년 국민들이 최대 주주인 국민주 형식의 한겨레신문이 창간됐다. 1987년 순복음교회에서 국민일보를 창간했고, 1989년 통일교에서 세계일보를 창간했다. 1990년 한화그룹은 경향신문을 인수했고 1991년 현대그룹은 문화일보를 창간했다. 이때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경쟁 체제였다.

 

언론 통폐합 조치에서 살아남은 언론사는 경쟁 없는 자본 축적을 이룰 수 있었다. 안정적인 독자와 광고를 시장의 소수 신문들에게 몰아주는 효과를 발휘했기 때문이다. 중산층의 확대로 정보 수요에 대한 욕구가 지속적으로 증가했고, 재벌들은 방송에 비해 신뢰도가 높은 신문을 광고 매체로 선호했다. 이처럼 광고 수요는 많은데 매체는 부족한 상황에서 신문 광고 비용은 부르는 게 값이었다. 반면 구독료는 정부의 물가 억제 정책 품목으로 철저한 규제를 받았다. ‘표3’에서 보듯 구독료는 1982년 저물가 대책에 포함된 이후 상승 폭이 크지 않았다. 게다가 정부의 발행 면수 통제로 발행 면수도 묶여 있었다. 정부의 통제로 모든 신문은 휴일에 신문을 발행하지 않았다.
당시 군사 정부는 특별한 광고 정책을 갖고 있지 않았다. 광고주와 신문사 자율에 맡겼다. 가장 큰 이유는 신문 지대 및 발행 면수 억제 정책에 대한 보상이기도 했다. 이러한 환경에서 신문사들은 광고 효과와 무관하게 광고액수를 책정하여 고수익을 확보하였다. 군사 정권의 광고 방임 정책으로 한국 신문 시장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 과도하게 지대보다 광고 수익에 의존하게 있었다 (옥기원, 2012).
1987년 언론 자유화로 신규 신문사들이 시장에 들어서자 이전과 같은 시장 카르텔에 의한 수익 창출이 불가능해졌다. 신문사들은 증면 경쟁을 통해 시장 점유율을 높이려 했다. 1989년 7월 한국일보가 휴일판을 발행하면서 단초가 열린 신문 판매 경쟁으로 증면 경쟁이 과열되기 시작했다. 1988년 12면 발행하던 신문은 1993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32면 발행, 1994년 중앙일보의 48면 발행 등으로 지면을 급격하게 늘렸다(송건호 외저, 2015, p. 525). 독자 확보 경쟁도 과열됐다. 삼성이 1965년 중앙일보를 세우면서부터 시작한 ‘확장지’가 다시 등장했다. 확장지는 독자 배가 운동을 할 때 사용되는 신문이다. 배급을 맡고 있는 신문사 지국이 자사 신문을 구독하지 않는 가정에 무료로 신문을 투여하고, 구독을 강요하는 방식이다. 신문사들은 무가 부수 배포뿐만 아니라 구독료 할인도 함께 추진했다. 심지어 배달 지국은 이삿짐 날라 주기 등으로 예비 독자를 끌어들이기에 안간힘이었다. 여기에 중앙 일간지 지국 간 경쟁이 과열되면서 살인 사건까지 발생했다(강기석, 2008, pp. 44-45).

 
▲ 현재 국내에서 발행되고 있는 전국 일간지들. 사진=미디어오늘 자료사진

신문사들은 시장에서의 우위 확보를 위해 발행 면수를 대폭 늘리고 그에 따라 구독료도 인상했다. 하지만 증면에 따른 비용 증가는 구독료 인상에 따른 수입 증가를 훨씬 능가했다. 지대 수입은 신문 발행 비용에도 미치지 못해 광고 수익의 변화 없이 구독자가 증가하면 오히려 신문 수익이 악화되는 상황이었다. 증면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광고 수익을 더욱 확대해야 했다. 신문 시장이 지대보다 광고에 의존하는 수익 구조가 시장 경쟁 상황에서도 고착된 것이다. 그리고 광고 중심 수익 구조는 결국 주요 광고주인 재벌의 신문 통제 권한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신문 시장이 과열 출혈 경쟁에 들어서면서 언론자본은 신문과정에 노골적으로 간섭하기 시작했다. 노동조합과 단체협약을 통해 편집권의 독립을 상호 합의했음에도 이를 애써 무시한 것이다. 1991년 동아사태가 대표적인 예이다. 동아일보 사주 김병관의 신문 제작 간섭을 거부하다 경질된 김중배 편집국장은 이임사에서 “과거 언론 자유를 위협한 세력은 정치세력이었지만 90년대 들어서면서 자본이 언론 자유를 위협하는 최대 세력으로 등장했다”고 말했다(송건호 외저, 2015, p. 527). 이 이임사는 시장 경쟁으로 군사 독재 정권의 언론 통제가 신문 자본과 재벌과 같은 광고주 자본의 언론 통제를 막아주던 역설이 풀렸음을 선언한 것이다.
떠나가는 독자들… 조중동 쏠림 현상과 재벌
1997년 금융 위기는 재무구조가 취약하고 독자 경쟁력이 부족한 한국 신문들을 사지로 몰았다. 최대 광고주였던 재벌의 위기가 그대로 신문 시장을 관통했기 때문이다. 또한 신문시장에 진출한 재벌인 현대와 한화는 신문 시장을 떠나서 문화일보와 경향신문은 우리사주제로 전환해 스스로 시장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금융 위기로 기업들이 어려워지면서 1990년대 말 광고 매출은 급감했다. 금융위기 이전에 2억 원까지 집행되던 상위 신문의 뒷면 전면 광고는 3000~4000만 원의 가격으로까지 낮아졌다. 기업들은 군사 독재 정권 시절부터 내려오던 ‘광고 효과와 무관한 광고 집행 관행’에서 벗어나 효과를 따지면서 광고를 집행했다. 가장 많은 독자와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는 신문으로 광고가 집중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동아일보의 독과점 신문 구조는 더욱 강화했다(옥기원, 2012, p, 49~50).
상업 한국 신문 시장의 가장 큰 특징은 독자들이 떠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표4’에서 보듯 열독률과 구독률이 각각 1996년 85.2%과 69.3%에서 2015년 25.4%와 14.3%로 떨어졌다. 거의 20년 동안 진행된 독자 떠남 현상은 한국 신문의 여론 형성력과 장악력이 크게 떨어졌음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융 위기 이후에도 일간지의 발생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 일간지로서 허가를 받고 신문을 발행하는 기업이 1998년 125개에서 2009년 290개로 거의 2.5배 증가했다. 신문 시장의 악화와 무관하게 신문들이 도태되지 않고 오히려 증가하고 있다. 이는 미국에서 미디어 규제 완화 이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신문사의 숫자가 줄어드는 배지키언(Bagdikian, 2000)의 연구 결과와는 반대되는 양상이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걸까? 한-미간 비교 연구 결과는 아직 발표된 바는 없다. 추론컨대, 가장 큰 이유는 미국과 한국 신문 자본의 발전 역사의 차이다. 미국 신문 자본은 독립운동의 동반자였고 자본주의 발달의 협력자였다. 이 과정에서 시장 경쟁이 내면화됐다. 그래서 시장 자유화로 경쟁력이 떨어지는 신문사는 도태되거나 또는 신문사 간 인수 합병을 통해 경쟁력을 제고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반면 한국 신문자본은 독립운동의 협력자가 아니었으며 독재 권력에 기생해 언론 자본으로 성장했다. 시장 경쟁보다는 기사와 광고의 교환, 광고주 협박, 신문 발행으로 다른 영역에서 이권 확보 등을 통해 수익을 창출하는 정치권력의 후원을 받는 특권 자본주의가 익숙하다. 다시 말하면, 신자유주의 정책이 경쟁이 내면화된 미국 신문시장에선 신문기업 숫자 감소로 나타나지만, 특권이 내면화된 한국 신문 시장에선 반대되는 현장이 나타난다. 즉, 미국은 시장 상품 가치를 통한 수익 창출이라는 시장 본래의 목적에 충실한 경쟁의 결과 생존이 줄어들지만 한국 신문은 시장 경쟁 외적 동인에 의해 작동하기 때문에 악화하는 시장 상황과 무관하게 오히려 증가한다.
미국과 달리 시장 자유화로 발행 신문은 더 늘었음에도 신문의 독과점 현상은 한국에서도 미국과 마찬가지로 진행되고 있다. ‘표5’에서 보듯 금융위기 이후 이른바 조중동으로 일컬어지는 조선일보·중앙일보·동아일보의 시장 점유율은 1998년 52.3%에서 2002년 67.7%로 꾸준히 상승했다.

 

조중동의 시장 점유율 확대는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 번째 특징은 규제완화로 신문사의 숫자가 늘어났음에도 조중동과 중소형 신문사간의 시장 양극화 심화다. 이는 중소형 일간지의 몰락과 경영 위기로 인한 여론 다양성 축소다. 두 번째 특징이다. 정부 의존형 독과점 시장 구조를 통해 언론자본을 축적했던 조중동과 달리, 규제 완화이후 시장에 진출한 중소형 언론사들의 재무형편은 그리 넉넉한 편이 아니다. 이로 인해 시장의 검열에 더 강하게 반응할 수 있는 구조에 놓이게 된다. 생존의 위기가 상존하기 때문이다. 시장의 통제가 편집국 기자에게 생존의 자기 검열을 하게한다는 의미다. 이는 보도의 보수화와 뉴스 상업화로 연결돼 저널리즘을 고사의 위기로 몰아넣는다(McChesney, 2010). 다시 말하면, 한국 신문은 조중동 위주의 광고 쏠림현상 심화로 인해 진보적이거나 독립적인 언론은 시장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소외되고 있다.

 
▲ 사진=미디어오늘 자료사진

시장 구조의 양극화는 또한 조중동 매출 쏠림 현상으로 나타난다. 광고주인 재벌들이 발행부수가 많은 조중동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표6’에서 보듯 조중동은 일간지 시장 매출액에서 다른 신문사의 총합보다 더 많은 매출액을 올리고 있다. 옥기원 (2012, p. 83)이 1997년부터 2003년까지 분석한 종합 일간지의 광고의존도[(광고수입/(광고수입+구독료) x100]에 따르면, 일간지의 광고의존도는 1997년 약 72%에서 2003년 82%까지 증가했다. 신문광고주가 재벌인 점을 고려한다면, 조중동 중심의 독과점 체제를 재벌이 지원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구 보수적인 논조를 유지하는 조중동과 한국 독점 자본인 재벌이 시장 구조 속에서 이해관계를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표7’은 재벌 상위 그룹인 삼성과 현대 그리고 LG그룹 등이 2003년에 중앙일보·조선일보·동아일보에 각각 집행한 광고액수이다. 1위부터 4위까지 광고액수는 다르지만 광고주 순위는 같다.

 
 
▲ 2017년 1월2일자 주요 일간지 1면. 하단 광고가 모두 삼성 기업광고다.

재벌의 광고가 조중동에 집중되면서 생존 위기에 처한 중소형 일간지들은 재벌의 홍보지로 전락하고 있다. 김수찬(Kim, 2008)은 한국 신문 구조가 자본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상업주의 체제로 변질되면서 기사 내용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경제지 기자들은 기사를 작성할 광고주가 제공하는 정보를 토대로 기사를 작성하고 있으며, 광고지면을 확보하기 위해 출입처에서 영업 활동을 하고 있다. 디지털 카메라, 건강관련 상품, 부동산, 백화점 관련 기사는 기자들이 취재한 기사라기보다 홍보성 기사거나 또는 협찬광고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신문이 독자들에게 공정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광고주인 재벌의 이익만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보도행태는 경제지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상업화된 한국 신문의 현 주소이다. 신문 시장의 자유로운 경쟁이 독자들에게 양질의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신문사의 돈줄인 재벌만 자유롭게 만들어줬다.

누가 한국광고 시장을 통제 하는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감옥에서 나온 다음날, 한국 언론은 또 다시 애완견이 됐다. 권력을 비판하고 감시하는 정의의 감시견이 아니라 삼성의 이익 지키기에 여념이 없는 삼성 PR지가 된 것이다. 어떤 뉴스 프레임을 사용해 이재용을 묘사했는지 잠깐 살펴보자. 시장 점유율 1위인 조선일보는 ‘이재용 정경유착 굴레서 풀려났다’란 헤드라인을 통해 그를 부당한 정치 희생양으로 묘사했다. 이재용과 특수 관계인이 사주로 있는 중앙일보와 동아일보는 각각 ‘이재용, 항소심서 집행유예… 353일 만에 석방’과 ‘353일 만에… 이재용 석방’이란 제목을 통해 이재용이 오랫동안 억울하게 감옥에 있었다는 동정 뉴스 프레임을 사용했다. 경제신문 중 시장 점유율 상위인 매일경제는 ‘승계 청탁 없었다, JY 353일 만에 석방’이란 제목을 통해 대법원 판단이 남았음에도 이미 판결이 완결된 듯 한 뉴스 프레임을 사용했다. 정부가 최대 주주인 서울신문은 ‘이재용 부회장 석방되자마자 첫 행보로 아버지 병문안’이란 기사를 통해 효자뉴스 프레임을, 연합뉴스TV는 ‘이재용 석방에 삼성전자 주가 나홀로 반등’이란 기사를 통해 판결의 효과로 인해 주가가 올랐다는 경제 우선주의 뉴스 프레임을 사용했다.

 
▲ 지난 2월5일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징역 2년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353일만에 구치소에서 석방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서울구치소를 나서고 있다. ⓒ 연합뉴스

왜 한국 언론들은 삼성 PR지를 자처하고 있는 것일까? 삼성의 돈의 위력과 한국 광고시장의 왜곡된 구조가 자체 수익 기반이 취약한 한국 언론이 결합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삼성그룹은 한국 여론을 움직이는 광고를 가장 ‘많이, 오랫동안 그리고 지속적’으로 제공했다. 지난 30년 동안 한국 최고 광고주는 삼성전자이고 시장점유율 1등 광고대행사는 제일기획(2008년 Cheil Worldwide 개명)이다. 삼성전자와 제일기획은 삼성의 중핵기업들이다. 이재용은 삼성그룹의 사실상 오너이다. 여기에 한국 광고시장의 왜곡된 구조도 삼성의 여론 장악력을 상승시킨다. 한국 광고시장은 광고주와 광고대행사가 분리돼 있지 않다. 재벌이 광고주이고 광고대행사의 오너이다. 어느 나라에도 광고주와 광고대행사가 한 몸인 관계는 없다(이수범 외저, 2010). 서구는 여론 형성의 건전성 확보를 위해 광고를 요청하는 광고주와 광고를 기획·제작하는 광고대행사의 분리 운영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세계 광고시장 점유율 10위권 안에 들어있는 미국의 더블유피피(WPP)와 영국의 옴니콤(Omnicom)은 광고대행사이지 광고주가 아니다. 그런데 한국 광고시장은 광고주와 광고대행사가 한 몸이다. 광고시장 내부의 견제와 균형의 원리 부재는 광고주의 이익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양산한다. 또한 왜곡과 과장 광고 제작 그리고 유통으로 이어진다. 정당한 정보를 제공받지 못한 피해는 모든 비용을 마지막에 결제하는 소비자가 본다. 그런데 돈을 내는 소비자들은 왜곡된 한국 광고시장 구조에 의해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대신 중간에 광고주로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삼성전자 등의 오너일가가 그 혜택을 독점하고 있다. 왜곡된 한국 언론시장 구조와 광고시장 구조가 결합되면서 언론시장의 오염도가 상승하고 있는 것이다.
내 주장이 너무 허무맹랑한가? 이에 대한 증거로 한국 광고시장 구조 변동과 시장 점유율 변화 추이 속에서 삼성의 언론 장악력을 구조적으로 분석해 보겠다.
쩐의 전쟁터가 된 한국 광고시장
세계광고시장에서 한국의 시장 규모는 세계 10위권 안팎이다. 일본이 아시아에서 가장 큰 광고시장이며 그 다음이 한국이다. 1995년 한국 광고시장 규모는 세계 10위였고, 2005년에는 11위, 2014년에는 세계 8위였다 (콘텐츠산업백서 2016). ‘표1’에서 보듯 한국 광고시장은 1968년 총 광고 매출 92억 원에서 1980년 2천 753억 원, 2000년 약 6조 원, 2015년 약 11조 원까지 성장했다. 한국 광고시장 규모가 지난 50년 동안 1165배나 증가했다. 광고 매출 증가는 한국사회가 광고라는 수요관리에 의해 유지되는 소비사회에 1990년대부터 접어들었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광고하는 품목은 제조업이나 도매업종이 아닌 소비자들의 욕구에 직접 호소하는 소비재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광고매출이 이처럼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는 것은 인쇄와 영상매체 산업규모가 급증했다는 의미이다. 실제로 한국 미디어 시장은 지난 1990년대부터 정부통제 방식에서 시장 규제 방식, 즉 상업 미디어 시스템으로 전환했다. 자본의 논리에 의한 미디어 통제 방식은 다매체 다채널이라는 시대적 흐름과 함께했다. 1988년 신문 산업은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전환되면서 완전 경쟁체제에 돌입했다. 1991년 SBS 등 민영방송국을 추가로 허용하기 시작했고, 1993년에는 케이블 텔레비전을, 2000년 디지털위성방송을, 2005년 방송과 통신의 미디어 융합방송인 DMB을, 2010년 사실상의 지상파 기능을 갖는 종합편성프로그램 등을 도입했다. 여기에 인터넷텔레비전(IPTV)까지 도입되면서 한국은 명실상부한 미디어 천국이 됐다. 이로 인해 신문·방송·잡지·인터넷 등의 매체별 광고 집행비가 증가했다. 한국 미디어 시장 규모는 표2에서 보듯, 1999년 약 4조6천억 원 규모에서 2015년 11조3천억 원으로 증가했다. 지난 20년 동안 가장 큰 성장세를 보인 매체 시장은 인터넷과 케이블TV이고 라디오와 지상파TV 그리고 잡지시장은 완만한 성장세를 보였다. 하지만 여론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신문시장 광고 매출은 급격한 하락세를 보였다. 다시 말하면, 지난 20년 동안 한국 신문시장은 광고주들에게 지속적으로 외면 당해왔고, 지상파 방송은 현상을 유지하는데 그쳤으며, 상대적으로 새로운 미디어인 디지털과 인터넷 매체는 광고주들에게 지속적으로 재정적 후원을 받아왔다.

 

이처럼 한국 매체 광고비용 증가는 광고시장 개방과 연관돼 있다. 지난 1987년 미국의 통상압력에 의해 시작된 광고 자유화 조치는 1991년 외국인 투자 100% 허용, 1995년 광고영화제작부분까지 완전 개방했다. 다국적 광고대행사가 한국 광고시장에 진출 형태는 업무제휴방식, 단독투자 (예: 제이월터톰슨), 지분참여(TBWA 코리아) 그리고 재벌 광고대행사와 합작회사 설립 (예: 제일보젤, 휘닉스 커뮤니케이션) 등 4가지 형태다. 광고시장개방이후 국내에 들어온 다국적 광고회사는 미국의 BSBW사이다. 1989년 현대그룹 광고대행사였던 금강기획과 업무제휴를 통해 한국에서 광고영업을 시작했다. 1997년 이전에 한국에 들어와 있던 다국적 광고대행사들은 프랑스의 퍼블리시스, 하바스 그룹, 미국의 인터퍼블릭, 보젤과 옴니콤 그룹, 영국의 더블유피피 그룹, 일본의 덴츠와 하쿠호도 그룹 등 세계 10대 광고대행사들이 모두 한국에 진출해 있었다.

 
▲ 제일기획(cheil) 홈페이지

하지만 이들의 시장 점유율은 1998년 이전까지 미미했다. 가장 큰 이유는 광고주를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초창기 다국적 광고대행사들의 고객들은 한국에 들어와 있는 다국적 기업 (예: 코카콜라)들이었다. 한국시장 특징을 파악한 이후 시장을 넓히려 해도 할 수 없었다. 가장 큰 이유는 한국 광고 시장의 특징인 인하우스 에이전시 (in-house agency) 때문이었다. 광고주인 재벌이 계열사인 광고대행사를 통해서만 광고를 판매하는 이 제도는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광고시장 폐쇄성이다. 재벌이 인하우스 에이전시 방식을 고수하는 것은 광고에 대한 정보를 경쟁사에 노출시키고 싶지 않는 재벌의 폐쇄적 경영방식과 연관이 깊다(Kim, 1996). 이는 다른 나라에는 없는 방식이다. 광고주와 광고대행사가 분리돼 있는 외국과 달리, 한국은 광고주와 광고대행사가 한 몸이 경우가 많았다. 이 같은 관행은 1997년 금융위기 이후 완화되기 시작했다. 재벌들이 유동성 위기에 휘말리면서 광고대행사를 다국적 기업에 매각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997년 미국계 다국적 광고대행사인 옴니콤이 SK그룹 광고 계열사인 태광멀티애드의 주식을 전량 인수해 TBWA 코리아를 설립했다. 해태그룹의 광고대행사인 코래드는 다국적 투자자문회사 코론사에 지분을 넘겼다. 런던에 본사를 두고 있는 WPP사는 2002년 LG그룹 광고대행사인 LG애드 지분을 인수해 최대주주가 됐다. WPP사는 또한 2003년 코디언트를 인수 합병 함으로써 금강기획을 계열사에 포함시켰다. 코디언트는 1999년 현대그룹 광고대행사인 금강기획을 인수·합병했다. 재벌들만 다국적 기업들이 사들인 것은 아니었다. 1999년에는 프랑스 퍼블리시스는 국내 독립광고대행사인 웰콤을 인수했다. 일본광고대행사인 하쿠호도사는 제일기획과 함께 하쿠호도제일을 설립했다. 다시 말하면, 다국적 광고대행사들은 1997년 이후 재벌 소유의 광고대행사를 인수·합병하거나 자금력이 부족한 독립 광고대행사들을 인수·합병을 통해 광고시장 점유율을 높혔다(이수범 외저, 2010, pp.113-115; Kim & Cha, 2009).

 

그 결과 ‘표3’에서 보듯 다국적 광고대행사들은 금융위기 이후인 1998년 7.6%의 시장 점유율에서 2006년 34.3%까지 시장 점유율을 확장했다. 하지만 이들의 시장 확대는 더 이상 이뤄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현대와 SK, 그리고 LG그룹이 인하우스 에이전시 시스템을 부활시켰기 때문이다. 2004년 LG그룹은 HS애드를 설립해 LG전자 등의 광고물량을 지원했다.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차 그룹은 2005년 ‘이노션’을, SK그룹은 2008년 SK M&C라는 광고대행사를 설립했다. 그 후 다국적 광고대행사들의 시장 점유율은 오르지 않고 있다. 다시 말하면 금융위기 이후 다국적 광고대행사들과 재벌의 광고대행사들이 한국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쩐의 전쟁을 벌였다. 국내자본이 광고대행사를 국외자본에 매각하면서 시장 점유율을 나눠 가졌고, 2005년을 기점으로 재벌이 자체적으로 광고대행사를 다시 설립함으로써 다국적 광고대행사와의 경쟁에서 승리한 듯 보인다.

 

하지만 이를 단순히 국내와 국외 자본과의 싸움에서 국내 자본이 승리했다는 애국주의 분석법은 위험해 보인다. 왜냐하면 단지 3개의 재벌그룹이 광고대행사를 국내 광고회사로 옮겼다고 해서 시장 점유율이 급격하게 변한다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한국 광고시장의 독과점화가 심화됐다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표4’에서 보듯 1999년부터 2014년까지 SK텔레콤과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LG전자는 지난 15년 동안 10대 광고주에 들었다. 이 기간동안 최고의 광고주는 삼성전자이다. 10대 광고주에 포함되는 기업들이 모두 재벌그룹 계열사인 것을 고려해 본다면, 재벌들이 광고주로서 한국 여론시장에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확대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재벌 그룹별로 광고 집행 액수는 다른 점은 또한 재벌(삼성: 비삼성)간 의 양극화가 심화됐음을 추정할 수 있다.
심화되는 독과점 구조 속 삼성 광고 쏠림
한국 경제의 독점 자본으로 성장한 재벌들은 광고시장을 주무르는 큰 손이었다. 1980년대 광고대행사들의 출신은 재벌계열사가 다수를 차지하고 선연 등 독립대행사, 그리고 다국적 광고대행사 등이었다. 시장 점유율 순위에서 제일기획과 금강기획 등 재벌 소속 광고대행사들과 독립 대행사들 간의 치열한 싸움이 전개됐다. 그런 흐름은 199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다. 광고회사나 매체의 변화가 거의 없으면서 전체 상위 10개 광고대행사가 1997년 금융위기 직전까지 70% 시장 점유율을 차지했다(이규완 외저, 2000). 이들 10대 광고대행사에는 다국적 광고대행사는 포함되지 않았다. 재벌과 독립 대행사들간의 광고 유치경쟁이었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1997년 금융위기 이후 광고시장의 주요 기업 명단에서 독립대행사들은 사라졌다. 자금력을 앞세운 다국적 광고대행사들이 독립 대행사들을 인수·합병했기 때문이다. 재벌과 다국적 기업 간의 광고 전쟁이 시작됐다는 의미다. 그 결과는 상위 광고대행사들의 시장 독과점 심화다. ‘표5’에서 보듯 10대 광고대행사들의 광고 매출 대비 시장 점유율은 2004년 71.3%에서 2014년 85%까지 악화됐다. 이 자료는 한국광고연합회가 매년 발표하는 광고회사 현황 조사 결과다.

 

업계 자료가 아닌 학자들의 시장 분석 결과도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지난 1990년부터 2009년까지 20년 동안 광고대행사 시장은 매출액 기준으로 평균 12.97% 성장률을 기록했다. 인하우스 광고대행사가 집중된 상위 1~3위의 점유율은 평균 54%, 상위 1~5위의 점유율은 평균 68%로 광고시장 개방 이후 매년 지속적으로 증가하다가 IMF이후에는 다소 떨어졌다. 상위 1~10의 점유율은 평균 84%를 기록했다. 또한 상위 1~15위 이상의 점유율은 92%를 기록했다. 특히 또한 광고시장개방이후 인하우스 광고대행사들과 다국적 광고대행사들로 구성된 상위1-5위 집중도는 오리려 심화되어 광고시장 개방이후 광고대행사들이 양극화됐다(함성호·서상호, 2011).
그렇다면 상위 10위 광고대행사들은 누구이며 얼마만큼의 시장 점유율을 점유하고 있는가? 이에 부합하는 자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정부는 지난 2005년부터 광고시장 관련 통계를 정식으로 집계하기 시작했고, 그마저도 제일기획의 광고연감이나 한국광고연합회가 발표하는 자료를 취합 발표하는 수준이다. 제일기획 자료에는 1~10위까지 명단과 매출액이 나온다. 하지만 각각의 시장 점유율은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이들 10위까지 기업들의 매출 총합을 각각의 기업 매출로 나눠봤다. 이들 10개 기업의 시장 점유율이 2004년 17.3%에서 2014년 85%까지 증가한 상황에서 이들 기업들 간의 우열을 알아보기 위해서다. 그 결과가 ‘표6’이다.

 
 
▲ 최근 TV 및 온라인 매체를 활용해 방영된 삼성전자 영상광고

‘표6’에서 보여지듯 금융위기 직후와 2009년 2014년의 자료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10대 기업 중 1~2위 기업의 시장 점유율 총합이 나머지 8개 기업들의 시장점유율 총합을 더한 것보다 높다는 점이다. 독과점 시장 구조내부에서조차 양극화가 심화됐다는 뜻이다. 심지어 2014년 자료에서 보듯, 1위 광고대행사인 삼성의 제일기획과 2위 현대차의 이노션의 시장 점유율도 10%이상 차이를 보인다는 점이다. 삼성 광고가 한국 상업 미디어 체제를 유지하는데 있어 가장 많은 돈을 꾸준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집행하고 있다는 뜻이다. 시장 점유율 비중도 1999년 17.8%에서 2014년 40.3%까지 증가했다. 2009년 시장 점유율이 1999년에 비해 증가한 것은 광고주인 삼성전자 등이 해외광고비 집행을 강화하면서 광고대행사인 제일기획 (2008년 Cheil Worldwide 개명)의 매출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또 다른 특이 사항은 독립 광고대행사의 몰락이다. 1999년에 10권 순위에 포함됐던 웰컴과 애드벤처월드와이드 모두 시장에서 사라졌다. 다국적 광고대행사에 인수·합병됐기 때문이다. 미디어 시장의 대형화가 중소형 기업의 몰락을 초래했다는 기존 연구 결과가 한국 광고시장에서도 그대로 발견된다. 한마디로, 지난 20년간 한국 광고시장 특징은 부자 부모(재벌 또는 다국적 기업)을 둔 자식만 살아남고 가난한 집 자식은 시장에서 사라진 독과점 양극화 시대였다.

한국 영화는 CJ·롯데·중앙일보에 장악됐다

영화는 어둠을 배경으로 빛과 소리로 내러티브(서사 구조)를 만든다. 그 서사 구조는 인간의 욕망을 대사와 음향 그리고 이미지로 표현한다. 완성된 영화가 대중들을 만나기 위해 영화 예술인들의 피와 눈물 그리고 그 사회가 축적한 과학기술이 결합해야 한다. 영화인의 노력과 과학의 결합도 자본이 없으면 제작도 유통도 상영도 할 수도 없다. 영화인의 노력도 자본을 만나야만 비로소 빛을 볼 수 있다. 자금력이 낮은 기업들은 쉽게 영화 시장에 들어올 수 있지만 오래 버틸 순 없다. 고위험-고수익 산업 특징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 산업은 자본 논리가 다른 미디어 산업에 비해 더 강하게 작용한다.
한국 영화가 대내외적으로 대자본의 논리를 경험하기 시작한 시기는 1980년대 중반부터다. 미국은 한·미간 무역 적자 해소의 일환으로 한국 영화 시장 개방을 요구했다. 비디오카세트레코더(VCR)를 제조 판매하는 재벌들은 수요관리 차원에서 영상 제작 시장 진출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는 한국 영화가 더 이상 중소기업 보호 업종에 머물 수 없음을 의미했다. 사실 박정희 독재 정권은 지난 1962년 영화법 제정을 통해 영화 제작과 수입 그리고 수출 사업을 연계해 운영했다. 일정 비율의 한국 영화를 제작해야만 외화를 수입 방영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것이다. 하지만 영화 배급과 상영에 대해선 개입하지 않았다. 다만 1966년부터 영화상영일 365일중 5분의 2 이상을 반드시 국산 영화를 상영하도록 하는 스크린 쿼터 제도를 도입해 지방 행정 기관들이 관할 내 극장주들의 상영 일자를 관리·감독하도록 했다. 소수의 사람들에게 영화 사업 독점권을 보장해 주면서 스크린 쿼터제를 통해 국산 영화가 지속적으로 제작 유통되도록 하는 보호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국산 영화 보호 정책들은 시장 개방화 시대에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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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행 자본 입도선매 제작에서 기획 영화 시대로
미국영화협회(MPPA)는 미국 통상대표단과 함께 움직인다. 미국 정부가 세계 각국에 통상 압력을 행사 할 때 항상 요구하는 사항이 있다. 해당 국가의 영화 시장 개방이다. 미국 상품과 헐리우드 영화는 세계 무역 협상에서 세트 메뉴란 이야기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워너브라더스 등 헐리우드 영화 배급사들은 미국 영화를 한국에서 직접 배급할 것을 요구하면서 한국의 스크린 쿼터 제도 축소 또는 폐지를 요구했다. 미국 수출 시장을 포기할 수 없었던 전두환 정권은 1985년 5차 영화법 개정을 통해 영화 제작업과 수입업을 분리했다. 이로 인해 1988년부터 헐리우드 배급사들은 한국 내에 수입업자 등록만 하면 헐리우드 영화를 배급 할 수 있게 됐다. 전두환 정권은 또한 스크린 쿼터 제도에 대한 의무적 규정을 다소 완화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하지만 이를 축소하진 않았다. 영화시장 개방화 조치는 헐리우드 영화사들에게 1990년대 막대한 수익을 올릴 수 있도록 했다.
시장 개방화 조치는 또한 재벌들에게도 기회였다. 삼성, 대우, LG 등 가전제품을 생산하는 재벌 그룹들은 전자 제품 수요 관리 차원에서 비디오 제작 시장에 진출했다. 가전 제품을 팔기 위해 영화 제작 시장에 뛰어 든 것이다. ‘표1’에서 보듯, 대우와 선경(SK) 그룹은 1980년대 중반부터 영화를 제작하고 외화를 수입 배급했다. 이들 재벌 상위집단들은 또한 자체 제작한 비디오를 유통시킬 수 있는 유통 대행업도 진행했다. 이병철의 삼성 그룹에서 분사한 삼성, 새한, 제일제당도 모두 1990년대 영상 제작 및 유통 그리고 상영 사업에 진출해 있었다. 삼성은 드림박스 등의 비디오 프로그램 공급업체를 통해 월트 디즈니가 제작한 영화들을 유통시켰다. 또한 명보극장과 서울극장 등 극장 운영 사업 분야에도 진출했다. 제일제당은 호주의 빌리지사와 합작해 CGV를 설립, 우리나라 최초로 멀티플렉스를 세웠다(영화진흥위원회, 2001).

 

재벌이 충무로에 뛰어 들면서 한국 영화는 자본의 논리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흥행 자본에 의존하던 입도선매 방식에서 기획 영화 시대에 접어 든 것이다. 기획과 제작을 분리하면서 업무 전문화가 강화됐다. 시장 리스크 관리를 위해 기획 단계에서부터 시장 분석 과정이 이뤄졌다. 관객층은 세분화 됐고 이에 적합한 배우나 시나리오를 찾아 영화를 제작했다. 여기에 시장성에서 검증된 쟝르(예: 로맨틱 코메디, 액션)가 스타시스템과 결합되면서 내용의 획일화 (또는 표준화)가 진행됐다. 여기에 영화 개봉되기 전부터 광고를 하는 사전 마케팅이 도입돼 홍보비가 증가했다. 재벌이 영화시장에 등장하면서 충무로는 산업으로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김태준, 2005).
재벌이 충무로 영화 시장에 뛰어든 것은 정부의 영상 진흥 정책과도 연관돼 있다. 1993년 김영삼 정부는‘신경제 5개년계획’을 수립해 영상 진흥 정책을 시작했다. 영화인의 창작 의욕을 고취시키기 위해 제작업을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전환했다. 촬영 장소 확충을 위해 경기도 남양주시에 서울영화종합촬영소를 건립하는 등 영상 인프라 작업도 진행했다. 김대중 정부는 ‘문화산업진흥기본법’을 제정해 국가 예산의 1%를 문화 산업에 배정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영상 기업을 벤처 기업으로 지정해 국가와 금융기관의 지원을 제도적으로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이처럼 정부의 영화 진흥 정책과 재벌의 영화 산업 참여는 ‘표2’에서 보듯, 한국 영화 기업의 외형적 성장을 가져왔다. 1999년 367개였던 제작사는 2011년 2664개로, 배급사는 같은 기간 155개에서 641개로 늘어났다. 한국 영화 르네상스 시대가 시작됐다.

 

특히, 김대중 정부는 약 1670억 원의 영화 진흥 기금과 영상 투자조합이 조성될 수 있는 물적 토대를 만들었다. 5년 동안 프로젝트 형식으로 운영되는 영상투자조합은 벤처캐피털 회사와 정부의 공적기관 그리고 일반 투자자들이 공동으로 참여했다. 정부와 함께 주주로서 영상투자조합을 운영하는 이들 투자사들은 한 작품에 제작비를 지원하기보단 여러 영화에 일정비율만 투자하고 수익을 거둬들이는 프로젝트 형식으로 운영됐다. 정부는 투자금의 약 25% 정도만 책임지고 일체 관리 운영에 간섭하지 않았다. 나머지 75% 투자금은 재벌, 금융기관 또는 영화 투자사나 배급사들이 공동으로 모금했다. 이들 영상 조합들은 투자 작품을 선택할 때 영화 프로듀서와 감독의 역량과 시나리오 완성도, 제작사의 신뢰도, 마케팅 능력, 캐스팅 등을 고려했다(영화산업백서, 2001).
영화시장에 꾸준히 자금이 유입되면서 한국 영화 제작비는 상승하기 시작했다. ‘표3’에서 보듯, 1996년 10억 원이던 총 제작비는 20년이 지난 2016년에는 24억 원까지 증가했다. 제작비의 증가와 함께 눈에 띄는 지출은 마케팅 비용의 증가이다. 이는 한국 영화가 작품으로 승부를 보기보단 광고를 통한 마케팅을 통해 관객을 모았다고 해석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2008년부터 2012년까지 한국 영화 제작과 배급에 투여되는 자금을 분석해 보자. ‘표4’에서 보듯, 광고비와 마케팅 비용 그리고 배급 수수료는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반면 인건비와 진행비 그리고 후반 작업 비용은 변동이 없고 기획 개발 비용은 오히려 감소하고 있다. 이는 한국 영화가 연구 개발을 통해 새로운 작품을 개발 제작하기보다 기존의 검증된 작품만을 제작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로 인해 2000년 중반 한국 영화 수익률은 상당 부분 감소했다(백일, 2014).

 

재벌 그늘 아래 신음하는 충무로
금융 위기를 기점으로 충무로 주자들의 손바꿈이 있었다. 김대중 정부가 금융 위기를 불러온 상위 재벌 그룹인 삼성, LG, 현대, SK 등에게 제조업종에 집중할 것을 요구함에 따라 이들 재벌 주자들은 영화 시장에서 사라졌다. 재벌 상위 그룹이 떠난 자리를 CJ, 롯데와 오리온 등 서비스 전문 재벌 그룹들이 파고들었다. 이들은 제작에 집중하는 금융 투자사들과 달리 영화 배급과 상영 시장에도 함께 진출하기 시작했다. CJ그룹은 전문 영화 배급사인 CJ엔터테인먼트를 설립했다. 또한 호주의 빌리지 시네마사와 함께 CGV 멀티플렉스 영화 상영관을 설립해 1998년 서울 강변역에 우리나라 최초로 멀티플렉스 전용관을 개관했다. 후발주자인 오리온과 롯데그룹도 CJ처럼 영화 배급과 상영시장에 뛰어들었다.

 

그 결과 ‘표5’에서 보듯, 영화 스크린 숫자는 1999년 588개에서 2015년 2424개까지 증가했다. 지속적인 멀티플렉스 증가와 함께 기업들 간의 인수합병도 활발히 일어났다. CJ는 2004년 중형 영화 전문 기업인 시네마서비스의 상영관 사업인 프리머스를 인수·합병했다. 2012년 중앙일보는 오리온 그룹이 맥쿼리 사모펀드에 팔아넘긴 메가박스를 인수했다. 범 삼성가인 CJ와 중앙일보가 한국 극장가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중소형 극장들의 숫자가 줄어들었다. 명보극장과 스카라 극장 등 중소형 영화 상영관들이 CJ와 롯데 등에 경영권을 위탁하면서 재벌의 하청 영화관이 되어야 했다. 가장 큰 이유는 영화 배급업자들 때문이다. 영화 유통업을 담당하고 있는 배급업자들은 이들 중소형 극장주들에게 동시에 4개 이상의 스크린 확보를 요구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신규 영화 공급을 중단하겠다고 통고했다. 그러자 독립 극장주들은 생존을 위해 극장 운영권을 멀티플렉스를 장악하고 있는 CJ와 롯데 등 재벌들에게 넘겨야했다. 중소기업의 몰락이자 재벌 독과점이 시작된 것이다.

 
▲ 그래픽=안혜나 기자

구체적으로 배급 시장 구조부터 살펴보자. ‘표6’에서 보듯, 5개의 영화 배급사들이 시장 점유율 60~70%를 차지하고 있다. 비록 영화 배급사들이 1999년 155개에서 2011년 641개로 늘어났다 할지라도 소수의 기업들에 의해 배급 시장이 통제되고 있다는 의미다. 재밌는 현상은 1980년 후반부터 한국 배급시장에서 들어온 헐리우드 영화사들이 한국 배급 업체와의 시장 경쟁률에서 밀리고 있다는 점이다. 이 같은 현상은 세계 영화 시장에서 드물게 발견되는 현상이다. 헐리우드 배급사들은 2000년대 들어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하지 못했다. 2001년과 2003년 한국 영화 배급 시장에서 절대 강자는 재벌도 헐리우드 배급사도 아닌 독립 영화사들이었다. 시네마서비스와 청아람, 플레너스 등의 독립 영화 배급사들이다. 하지만 이들 독립 영화 배급업체들은 2007년 이후 보이지 않는다. 시네마 서비스와 플레너스는 2005년 CJ에 인수 합병됐기 때문이다. 다른 독립 영화 배급사들도 후발 주자인 롯데와 오리온 재벌에게 인수 합병됐다.

 

2013년에서 2016년까지 10대 영화 배급사들의 명단과 시장 점유율인 ‘표7’도 한번 살펴보자. ‘표6’에서 등장했던 CJ는 CJ E&M으로 개명했을 뿐 시장 점유율은 여전히 1위다. 쇼박스, 롯데E, 헐리우드 배급사들의 명단도 그대로다. NEW, 아이러브시네마, 씨너스, 메가박스플러스엠 등이 새롭게 등장한 영화 배급사다. 이중 메가박스플러스엠은 중앙일보사가 영화 상영관인 메가박스를 지난 2012년 인수한 이후 배급업에 진출하면서 설립한 기업이다. 시장 점유율도 이들 10대 배급사들이 거의 90%이상을 점유하는 과점 구조를 보이고 있다.

 

특히 심각한 것은 영화 상영 시장을 CGV와 롯데시네마, 메가박스 등 3개 기업이 장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표8’에서 보듯, 이들 3개 재벌 기업에 의해 95% 이상 장악되어 있다. 공정거래법상에서 규정하는 독과점 시장이다. 거래법은 시장에서 단독 기업이 50%이상 또는 3개사의 합계가 75%이상의 시장 점유율을 보이면 독과점 시장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상영 시장이 독과점 구조라는 것은 한국 영화의 수익을 3개 재벌들이 독식하고 있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다. 한 관객이 1만 원을 지급하고 영화 한 편을 보면 그중 50%인 5천 원은 극장주에게 무조건 가야 한다. 왜냐하면 상영관과 다른 영화 조직과의 수익률 배분은 5:5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5천원 중 60%인 3천 원은 영화 투자사나 투자 조합으로 돌아간다. 남아있는 2천 원 중에서 배급사 수수료(6~12%)를 준 다음 남아있는 1천 원을 웃도는 돈이 제작사 수익으로 돌아간다. 영화 한편 제작비가 평균 30억 원인 점을 감안하면, 관객이 500만 명 정도는 들어야 제작사는 손해를 보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제작비가 30억 원을 넘을 경우 영화는 흥행했지만 제작사는 파산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2007년 김지훈이 감독한 ‘화려한 휴가’를 예를 들어 보면 100억 원 정도의 제작비가 투여된 이 영화의 유료 관객이 730만 명이었다. 이 영화 배급사인 CJ엔터테인먼트와 상영관 CGV는 엄청난 수익을 올렸지만 영화 제작사는 파산했다. 유사한 현상은 2008년 개봉한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에서도 그대로 재현됐다.
다시 말하면 한국 영화 제작은 과당 경쟁 체제이고 영화 배급은 과점 구조이며 상영관은 독점 구조이다. 이로 인해 영화가 흥행에 성공해도 영화를 만든 회사가 빚더미에 앉는 기이한 현상이 일상화되고 있다.

 
▲ CGV 홈페이지

한국 영화 시장이 독점화됐다는 것은 한국 영화가 재벌 3사의 통제 하에 놓여 있다는 의미이다. 독점 자본은 시장에서 가격 결정권을 갖고 유통될 수 있는 물량을 조절할 수 있는 힘을 갖기 때문이다(Baran & Sweezy, 1966). 영화 배급 및 상영 시장이 독과점 구조로 정착되면서 시장질서가 문란 해 지고 있다. 재벌기업들이 시장에서 지배적 위치를 남용하면서 그 피해를 고스란히 중소형 영화업자들이 당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면 2004년 오리온 그룹의 영화 배급사인 미디어플렉스는 전주 영화 상영관인 (주)시네타운의 영화 배급 요청을 2년 동안 거절했고 시네타운은 스크린 쿼터에 따른 한국 영화 상영 의무 일수를 채우지 못해 영업 정지 처분을 받았다. 이들의 횡포는 유료 방송 시장에서도 있었다. CJ그룹의 영화 배급사인 CJ엔터테인먼트와 오리온 그룹 소속 미디어플렉스는 2008년 판권을 소유한 영화를 자신들의 계열사 케이블텔레비전에만 공급하고 다른 사업자에게는 공급하지 않는 차별적 행위를 자행했다. CJ엔터테인먼트 등 5개 영화 배급업자들(시장 점유율 총합 79.3%)은 또한 2008년 영화 관람료 할인의 종류와 범위를 구체적으로 정하고 이외의 할인은 금지하도록 하는 공문을 상영관에 발송했다. 상영관은 배급업자에게 영화를 받아야만 영업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상영관은 영화 관람료 할인 행사를 중단해야 했다(박제현, 2008). 다시 말하면 영화 배급과 상영 시장을 장악한 3개의 재벌(CJ, 중앙일보, 오리온, 롯데)들이 한국 영화 산업화의 결과물을 독식하면서 그 피해는 영화 제작 예술인들과 소비자들에게 돌아가고 있다.

재벌들 투기장 된 유료방송…채널수는 증가, 콘텐츠는 획일화

돈 내고 방송 보는 시대 도래
2017년 1월 우리나라 가구 기준으로 90.1%가 유료방송 가입자다 (방송통신위원회, 2017). 열 가구 중 아홉 세대는 일정액을 내고 방송을 시청하고 있다는 의미다. 꼬박꼬박 정기적으로 유료방송 사업자에게 현금을 납부하고 있다는 뜻도 함께 내포하고 있다. 자 유료방송이 뭐가 있는지 잠시 생각해 보자. 1995년부터 우린 케이블 방송을 시청해왔다. 첫 번째 유료방송이다. 2000년에는 디지털위성방송인 SkyLife가 도입됐다. 5년 뒤 2005년 방송통신융합 이동방송인 위성DMB와 지상파DMB도 공짜 방송은 아니었다. 2008년 도입된 인터넷텔레비젼(IPTV)도 신규 유료매체이다. 지금까지 도입된 한국의 유료방송 매체들이다.
이들 유료매체가 등장하게 된 계기는 지난 1980년부터 전 세계를 지배하는 신자유주의 정책과 연관돼 있다. 시장의 자유를 주장하는 신자유주의는 기업들의 자유로운 경쟁이 소비자들에게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신화를 지속적으로 퍼트려왔다. 미디어산업에서 신자유주의 모습은 공기업 사기업화와 소유 지분 완화다. 전 세계적으로 공기업 사기업화는 통신시장과 공영방송에서 일어났다. 미국과 일본, 프랑스 등 앞선 자본주의 국가들은 국영 통신사를 민영화했다. 영국과 프랑스, 이태리 등은 공영방송국을 자본들에게 양도했다(Murdock&Wasko, 2007). 그렇게 해서 탄생한 언론재벌들이 폭스 채널을 갖고 있는 뉴스코러페이션(News Corporation) 그룹 오너인 루퍼트 머독이다. 그는 영국과 미국 미디어 시장에 불어 닥친 신자유주의 흐름과 금융권과의 결합을 통해 언론재벌이 됐다(Meehan, 2005).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는 이태리의 공영방송 민영화 정부 정책을 이용해 언론 재벌이 됐다. 그 다음 정계에 진출해 총리가 됐다(Padovani, 2004).
지난 1980년 후반부터 한국도 경영 합리화란 이름으로 국가 기간산업인 통신과 방송의 민영화가 진행됐다. 신자유주들이 공기업 적자 해소를 위해 민영화를 추진해야한다고 강변했지만 한국전기통신공사(Korea Telecom=KT) 민영화 사례는 정확히 그 반대다. 한국통신은 지속적으로 흑자를 낸 알짜배기 국영기업이었다. 그런 한국의 흑자기업도 앵글로색슨이 만든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경제 이념에 의해 민영화 대상이 됐다. 지난 1988년부터 수면으로 떠오른 KT 민영화 논의는 2000년 초반에서야 마무리됐다. 민영화가 늦어진 가장 큰 이유는 강성 노조 때문이 아니라 지분 관계 때문이었다. 정부 소유지분을 어떻게 얼마만큼 누구에게 넘길 것인가를 두고 12년 넘게 씨름한 것이다. 그 결과 정부가 절반에 못 미치는 지분을 가지면서 최대주주로서 경영권을 행사하고 나머진 시장에 팔았다. SK그룹과 삼성그룹 등 재벌들도 KT의 대주주에 육박하는 지분을 가졌고, 외국인들도 민영화된 한국통신 주주로 등극했다(Jin, 2006). 또 다른 민영화 분야는 방송 분야다. 영국과 프랑스, 이태리 등 전 유럽은 공영방송이 민영화 대상이었다. 하지만 한국은 공영방송 민영화 정책이 추진되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공영방송 민영화 대상으로 지난 1990년 초반부터 논의됐던 문화방송(MBC)소유 지분 때문으로 추정된다. 만약 수구보수 세력(예로 군 출신)과 시장주의로 무장한 보수주의자(예로 이명박)들이 1990년대와 2000년 초반에 정권을 잡았더라면 문화방송은 민영화 됐을 것이다. 그 당시 세계적인 흐름이 공영방송 민영화였다. 하지만 그 시기동안 한국은 야당 출신 지도자가 대통령이 되면서 문화방송 사기업화는 진행되지 않았다. 문화방송 소유 지분은 정부가 70% 지분을, 박근혜 영향권 아래 있는 정수장학회가 30% 지분을 갖고 있다. 정부가 주식을 모두 시장에 판다면 (또는 주식을 개방한다면), 최대 주주로 정수장학회가 남게 된다. 민주정부에게는 상상하고 싶지 않은 최악의 시나리오였을 것이다. 공영방송 민영화는 이런 복잡한 정치적인 이해관계 속에서 현실화 되지 못했다.

 
▲ ⓒ gettyimages bank

이와 달리 통신 민영화 정책과 연관된 케이블 등 유료방송 분야는 규제완화 가속도가 붙었다. 한국 정부는 케이블 사업에 재벌과 외국인 투자자들을 끌어 들이기 위해 소유 지분을 완화하고, 통신 망 사업의 일정 부분을 케이블 망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민영화를 추진했다. 또한 새로운 미디어인 위성채널과 디지털 기반의 융합 미디어를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케이블, 피라미드 유료방송 구조 최강자
한국 케이블 방송 도입은 한국통신 민영화 정책과 맞물려 있다. 왜냐하면 케이블은 지상파와 달리 반드시 망을 통해서만 방송을 내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지상파가 영상 이미지와 텍스트를 불특정 대중에게 무료로 송출한다면 케이블은 똑같은 미디어 콘텐츠를 한정된 지역에 망을 통해서 돈을 낸 가입자에게만 전달한다. 망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다면 케이블 방송은 할 수 없다. 그래서 케이블 방송은 통신사업 민영화 정책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한국은 77개 권역으로 나눠서 케이블 망이 깔려있다. 또한 ‘표1’에서 보듯, 이 매체는 프로그램을 공급하고 이를 송출하는 회사가 별도로 존재해야 한다. 프로그램 공급자 (Program Provider=PP)들은 자신들이 직접 제작하거나 수입한 작품을 케이블 망과 방송을 송출할 수 있는 기기를 갖고 있는 종합유선방송사업자(System Operator=SO)에게 일정한 돈을 받고 판매한다. 즉 SO는 PP들에게 방송 편성권을 갖고 있다는 의미이다. SO가 갑이고 PP가 을이란 뜻이다. 자본력이 있는 법인이나 사람은 SO를, 재능과 열정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PP 법인 소속이란 의미이기도 하다.

 

사실 한국의 케이블 방송은 1995년 처음 선보였다. 삼성과 대우 등 재벌들에게 29개 PP들을 허가해 줬다. 케이블 방송이 자리를 잡기 위해 강한 현금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또한 케이블 망을 재벌들에게 개방했다. 공기업 민영화가 케이블 망 사업 분야에서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예를 들어 보자. CJ 홈쇼핑 (현재 CJ오쇼핑)은 1999년 12월 KT가 운영하고 있던 케이블 망 93.26%을 매입, 종합유선방송사업자가 됐다(이은주, 2008, p.93). CJ홈쇼핑은 케이블 망 사업을 전담하는 CJ 헬로비전을 설립했다. 이때 외국인 투자자를 유치해 회사 지분을 공유했다. 2008년 태광그룹에 인수 합병 된 큐릭스는 1998년 홍콩 SSB-Aim 그룹과 미국 시티그룹에서 외자를 유치했다. 중소기업인 이민주씨는 2000년 외국인 사모펀드로 추정되는 자금을 끌어와 C&M을 설립했다. 2008년 CJ에 피인수 합병됐던 오리온그룹의 온미디어도 2000년 홍콩 신동아시아투자기금과 미국 시티그룹에서 투자금을 유치했다. 다시 말하면, 한국 케이블 방송 분야는 매체 도입 초기부터 재벌들과 외국인들이 함께 시장에 들어와 있었다.
외국인은 한국 미디어 사업 분야 중 케이블 망 사업과 광고 분야만 자금을 투자한다. 하지만 외국인의 두 시장 접근 방식은 약간 상이하다. 광고는 제작과 기획 등의 분야에 지사를 설립하거나 한국 광고회사 지분을 인수하거나 투자한다. 어떤 경우에는 대주주로서 이사회에서 의결권을 행사한다. 하지만 케이블 분야에서 외국인들은 SO로서 케이블 망 사업에 지분을 투자하거나 재벌이 갖고 있는 PP 계열사에 일정 지분만을 투자한다. 하지만 그 지분은 이사회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을 만큼 대자본은 아니다.
특이하게도 외국인 지분율이 높은 기업들이 2008년 집중적으로 피인수 합병 됐다. 즉, 방송을 돈 벌이의 수단으로 여긴 외국인 사모펀드 자본이 한국 유료방송 시장에서 회사를 키운 수익만 챙긴다는 의미다. 예를들어 보겠다. MSO업체인 큐릭스는 태광그룹에 팔렸고, C&M은 국민유선방송투자 (MBK 파트너스와 맥쿼리 합자)에 지분을 팔아넘겼다. MPP였던 온미디어도 CJ에 매각됐다.
이처럼 재벌과 외국인들이 케이블 방송, 특히 SO에 투자를 집중하는 것은 높은 수익률 때문이다. ‘표2’에서 보듯, 고객들이 낸 돈의 약 68.7%가 케이블 SO업체로 간다. 영화 관람료의 50%는 무조건 극장주에게 가듯, 케이블 방송을 송출해주는 서비스만 제공하는 SO가 수익의 약 70% 정도를 가져간다. 실제로 작품을 제작하는 PP는 20% 미만의 수익률을 올리고 있다. 한국은 SO와 PP의 비율이 2:7이라면, 미국은 5:5 정도다. 즉 작품을 기획 제작하는 독립 제작사보다 유통업자가 더 많은 돈을 버는 착취적 구조를 갖고 있다. 이 같은 고수익 구조 때문에 재벌과 외국인 투자가 몰린 것이다.

 

케이블 시장의 착취 구조는 정부의 시장 양적 성장만을 위한 규제완화 정책에 기인한다. 공급과 수요를 통한 시장의 안정성보다 빠른 양적 성장에 집중에만 집중하는 관료주의 정책의 폐해다.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재벌을 통해 실행하고 노동자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개발모델’을 케이블 등 유료방송 시장에 적용했다(Nam, 2008). 제조업의 개발모델이 노동자의 희생을 담보로 했다면, 유료방송의 개발모델은 독립 제작 회사들의 희생과 눈물을 담보해 했다. 예를 들어 보면 ‘표3’에서 보듯, 정부는 지속적으로 신규 미디어들을 도입을 SK 등 재벌들에게 허가해 줬다. 동시에 제작 지원 정책도 진행했다. 신규 매체에 필요한 작품을 충원하기 위해서다. 유료방송에 작품을 공급하는 제작 회사들은 기존 정부의 허가제에서 등록만 하면 영업을 할 수 있게 됐다. 또한 영상 회사들도 정보통신(IT)기업처럼 벤처기업에 지정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독립 영상 회사들이 스크린 쿼터 제도처럼 방송 쿼터 제도를 통해 지상파와 케이블 방송국들은 일정 비율 이상 국내 작품으로 편성토록 했다. 즉, 정부가 신규 미디어 도입과 채널을 돌릴 수 있는 영상 공급 수요를 조절하면서 영상산업 진흥 정책을 추진했다. 이는 관료들이 독재시대의 경제개발 모델을 영상 산업 진흥을 위해 미디어 산업에 활용한 것이다.

 

‘표4’에서 보듯, 실제로 정부의 규제완화 정책은 방송 사업의 성장을 이끌어 냈다. 공정거래위원회 (2010)가 2004년부터 2008년까지 방송 사업자 규모수를 보면, 지상파 방송 법인 수는 증가했고, 케이블 PP법인도 증가했다. 여기에 위성방송은 방송통신 융합 기능을 갖고 있는 DMB 도입으로 그 숫자가 늘었다. 2008년에는 신규 유료방송인 인터넷 방송 서비스도 증가했다. 다만 케이블 방송에서 단순히 중계업무를 보던 RO와 음악유선방송 수만 줄어들었다. 그 결과, 2004년부터 5년 동안 전체 사업자 수는 735명에서 490법인으로 줄었다. 시장에서 경쟁자들이 줄어들었으니까, 수익률은 상승했을까? 시장 구조 분석으로 가 보자.

 

규제완화, 승자 독식 가속 페달
한국 유료방송은 새로운 유료매체인 인터넷방송(IPTV)을 2008년에 도입했다. 케이블과 위성방송 등 양강 체제로 유지됐던 유료방송 시장에 새로운 경쟁자가 등장한 것이다. 정부는 IPTV 사업 허가권을 기존 통신시장 강자인 SK, KT, LG 등 통신 3사에 할당했다. 이런 와중에 케이블 시장에 대형 인수합병 두건이 발생했다. 종합유성방송국 즉 케이블 망 사업자인 태광그룹이 외국인 자본이 결합된 큐릭스를 인수해 시장점유율 1위 업체로 등극했다. 또한 CJ는 오리온 그룹과 특수 관계인 동양그룹의 케이블 프로그램 공급업체, 시장 점유율 2위인 온미디어를 인수해 시장 점유율 1위 업체로 등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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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케이블망 사업인 SO시장은 이미 태광그룹의 Tbroad 등 8개 업체가 83.7% 시장 점유율을 보일 정도로 과점상태였다. 각각의 8개 기업들은 또한 유선방송국은 2개 이상 소유한 MSO들이었다. 이 시장이 독과점 구조를 보인다는 의미는 한국 케이블 방송 편성 권한을 이들 8개의 기업이 좌지우지 한다는 뜻이다. 확대해석하면, 이들 MSO들의 영향력은 유료방송업계의 봉건군주들이다. 왜냐하면 케이블 위상이 피라미드 구조 특성을 보이는 유료방송 시장 구조에서 최상위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케이블에서 유통된 콘텐츠가 위성방송과 IPTV에 동시에 유통되거나 재송신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2008년 당시 시장 점유율 21.3%로 업계 1위였던 Tbroad가 7개의 SO를 소유한 큐릭스를 인수했다.

 

프로그램 제공 시장은 2008년 기준으로 18개의 채널을 보유한 CJ 등을 포함한 5개 MPP의 방송수익 수익률 대비 시장 점유율은 64.7%로 다소 경쟁구조를 보이고 있다. 5개 주요 MPP들이 70% 미만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공정거래법은 3개 기업의 시장 점유율이 70% 이상을 보일 경우 독과점 시장으로 규정하고 있다. ‘표6’애서 보듯, SO 시장과 달리 독과점 구조를 보이지 않고 있다. 그만큼 경쟁이 치열하다고 추론할 수 있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업계 1위인 CJ는 2008년 연말에 업계 2위인 온미디어를 인수 합병했다. 이로 인해 2009년에는 업계 1위인 CJ와 2위인 SBS의 시장점유율에서 두배 이상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2008년 케이블 방송시장에는 태광그룹이 큐릭스를, CJ그룹이 온미디어를 인수 합병했다. 그 결과 ‘표7’에서 보듯, 케이블 방송업계의 강자였던 이들 재벌들은 시장에서 콘텐츠의 흐름을 조절할 수 있을 정도로 시장 권력을 갖게 됐다. 케이블 프로그램을 공급하고 동시에 편성권을 갖고 있는 업체들을 MSP 시장에서 1위인 CJ와 2위인 태광의 방송 사업 수익 대비 시장 점유율은 39%이다. 이는 유료방송 시청자들이 매달 내는 돈의 약 40% 정도는 CJ와 태광 통장으로 입금된다는 의미이다. 1위 업체인 CJ는 표에서 보듯 6년 뒤에는 9개의 독립 SO들의 지분을 사들여 업계 1위로 등급 했다. 그동안 케이블 주요 기업들의 명단변경은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부여 이들 MSO들의 시장 점유율에서는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똑같은 시장을 놓고 IPTV라는 경쟁자가 등장한 만큼, 전체 유료시장에서의 수익률은 낮아졌을 것으로 보인다. ‘표8’에서 보듯, 케이블 TV는 전체 유료시장 수익 점유율에서 49.6%를, 위성방송은 10.7%를, IPTV는 39.6%를 기록했다. 2008년 도입된 IPTV가 7년 만에 급격하게 성장세를 보인 반면, 1995년부터 시청자를 확보하기 시작한 케이블 방송국들의 시장 점유율은 2009년을 기점으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위성방송 시장 점유율이 변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케이블 방송 대표주자인 CJ와 태광그룹과 IPTV 대표주자인 SK, KT, LG 등 5개 재벌들의 살벌한 시장 쟁탈전이 전개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투기 자본 담합… 소비자 미디어 접근권 제한
지난 1995년 처음 선보인 유료방송은 한국 전체 가구 세대의 90%가 시청할 정도로 급성장했다. 한강의 기적이 유료방송 시장에서도 일어났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누구에게 기적인가라는 질문으로 세분화해 보면, 그 답변은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 유료방송으로 미디어 채널 수가 증가했지만 미디어 다양성이란 측면에선 부정적이기 때문이다.
한국 유료방송의 고질적인 문제점은 SO 시장 구조의 독과점 구조다. 소수가 지배하는 독과점 구조는 상품이 유통되는 시장의 흐름을 막아 소비자들의 미디어 접근권을 제한하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공정거래위원회(2011)는 ‘IPTV에서 왜 인기채널을 볼 수 없을까’란 제목의 보도 자료를 발표했다. 그 내용은 5개 MSO (Tbroad, CJ 헬로비전, C&M, HCN, 규릭스)가 담합을 통해 시장 질서를 교란했다는 것과 그에 대한 처벌 내용이었다. 5개 기업은 약 100억 원의 과징금을 부과 받았고 담합행위를 주도적으로 한 태광의 로드와 CJ 헬로비전을 검찰 고발했다. 사건 개요는 다음과 같다. 2008년 11월 케이블 편성 권한을 갖고 있는 5개 MSO들은 새로 도입된 IPTV 영업을 방해하기 위해 IPTV에 채널을 공급하기로 한 온미디어 채널을 축소하고 CJ 미디어에는 방송 채널을 공급하지 않는 조건으로 약 250억 원을 지원하기로 했다. 이로 인해 IPTV 사업자는 프로그램을 구하지 못해 129개 채널이 가동되지 못했다. 또한 온미디어의 시청가입자수가 9백만 명으로 축소됐다. 이런 상황에서 CJ는 2008년 연말 온미디어를 인수 합병했다. 이 사건은 돈을 지불하는 시청자의 미디어 주권에 대한 보호 장치가 미흡함을 보여준다. 단적인 예로 케이블 방송에서 기본서비스에 포함된 작품조차도 시청률이 올라가면 예고도 없이 고가 상품으로 옮겨버린다.
또 다른 독과점의 폐해는 PP들의 수익률 착취다. 가입자들이 낸 케이블 수익 배분율에 있어서 SO들이 약 70% 수익을 가져가고 PP들에겐 약 20% 정도의 돈만 돌아간다. 낮은 수익률은 제작할 수 있는 비용을 제한하고, 이로 인해 제작비가 낮은 작품만을 지속적으로 제작할 수 밖에 없게 만든다. 심지어 오래된 작품을 재방송을 반복적으로 하기까지 한다. 방송통신위원회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2008년 SO들의 재허가 조건으로 방송 수신료 수익의 25%이상을 PP들에게 지급하는 것을 심사 조건으로 내걸었다. 하지만 SO와 PP의 오래된 갑을관계 관행으로 인해 정책적으로 실효성 효과를 잃어가고 있다(홍정윤 외저, 2016).
SO의 독과점 폐해는 유선 방송망과 통신망을 설치하는 하청 노동자들에게까지 전가되고 있다. 이들 방송 통신 업체들은 망을 보수하는 업무와 소비자에 대한 서비스 업무를 협력사에게 하청을 주면서, 작업에 따른 위험비용을 노동자들에게 떠넘기고 있다. 또한 하청 노동자들과 개인도급사업자로 계약을 맺어 실적 부진에 따른 수익 감소를 노동자들에게 떠넘기고 있다. 2017년 2월 기준으로 SK와 LG의 도급사업자 비율은 각각 36%, 48%에 이른다(김유경, 2017).

‘디지털 한국’ 기획자는 삼성이다

이건희는 지난 1990년대 금융 기법을 활용해 이병철의 삼성그룹을 6개의 범 삼성그룹으로 나눴다. 이들 그룹 중 삼성, CJ 그리고 중앙일보가 미디어 사업을 하고 있다. 삼성은 디지털 미디어(삼성물산과 삼성SDS)와 광고(제일기획) 분야에서 대한민국 최고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중앙일보는 신문 등 인쇄매체(중앙일보)와 방송 등 영상매체(JTBC·메가박스) 분야에서 선두 기업이다. CJ는 케이블(tvN)과 영화(CGV) 등의 영상 분야와 함께 온라인 게임(넷마블) 등에서 한국 최정상 기업이다. 즉, 삼성과 CJ 그리고 중앙일보는 한국인들의 여론과 소비 문화생활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디어 복합 기업이다.
미디어 복합 기업(Media Conglomerates)은 중앙집권적 지배구조를 갖고 두 분야 이상에서 미디어 사업을 벌이는 대기업을 말한다(Kunz, 2007). 미디어 복합기업은 정부의 미디어 규제완화와 공기업 사영화 조치 이후 등장한 기업의 형태이다. 미국의 GE-NBC, Disney-ABC, CBS-Viacom, News Corporation, Sony 등이 대표적인 문화 재벌들이다. 이들은 1990년대 세계 미디어 시장에서 콘텐츠의 흐름을 통제하는 시장의 절대 권력들이다.
하지만 이들 앵글로색슨 자본의 복합 미디어 기업들은 한국 미디어 시장에서 잘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럴까? 이들은 세계 10대 미디어 시장 규모를 갖고 있는 한국 시장에 진출하지 않은 것일까? 이를 파악하기 위해선 한국 복합 미디어 기업들의 지배구조를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외국계 문화기업들은 토착기업들과의 지배구조 공유를 통해 해외시장에 진출하는 영업 형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지배구조는 경제적 소유구조와 이사회 구성 그리고 기업의 사업 전략과 자원 배분 등을 보여준다(Murdock, 1982). 이는 지배구조를 분석하면 ‘누가 그 기업을 통제하는지’를 한눈에 알 수 있다는 의미이다. 저자는 삼성과 CJ, 중앙일보의 지배구조를 분석하기 위해 이들 3개 기업의 감사보고서와 사업보고서를 분석할 것이다. 분석 시기는 1999년 이후부터다. 왜냐하면 재벌 기업에 관한 정보가 그때부터 일반인에게 공개되기 때문이다. 김대중 정부는 재벌의 불공정 행위를 감시하기 위해 공정거래법을 1998년 개정했다. 개정된 법은 재벌 계열사나 재벌 오너 일가가 투자하는 기업들에 대해선 모두 사업보고서나 감사보고서에 그 내용을 기재토록 명시했다.
삼성물산, 디지털 한국 기획자 & 투자자
2015년 삼성물산은 지난 1948년 삼성물산과 다르다. 이름만 같고 하던 사업이나 그룹 내 위상이 다르다는 의미다. 2018년 삼성물산은 삼성그룹의 사실상 지주회사다. 1948년 삼성물산은 이병철 삼성 창업자가 구인회 LG 창업주와 조홍제 효성 창업주와 함께 설립한 무역회사다. 그 후 도소매업과 1970년 후반 건설업을 추가했다. 1948년 삼성물산은 그룹 자본의 모토가 된 기업이다. 또 다른 삼성 자본의 모태가 된 기업은 1953년 설립된 제일제당과 1954년 제일모직이다. 이들 세 회사 중 제일제당은 지난 1997년 이건희 회장의 조카인 이재현에게 넘겼다. 나머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2015년 통합됐다. 이로 인해 삼성물산이 사실상의 지주회사가 됐다. 이 회사가 그룹 내 피라미드 지배 구조상 정상에 있기 때문이다.

 
▲ 1950년대 삼성물산공사 시절 고 이병철 삼성 회장. 사진=삼성

이를 이해하기 위해 삼성 역사와 지배구조 변동을 함께 분석해야만 알 수 있다. 2015년 삼성물산은 여섯 번의 개명 작업을 거쳤다. 1963년 삼성그룹의 부동산 업무를 위해 설립됐던 동화부동산이 최초의 이름이다. 일제강점기부터 부동산을 통해 재를 증식시켰던 이병철은 동화부동산의 이름을 동화진흥과 중앙개발로 두 번 개명했다. 1970년 중반 가축분뇨 무단 방료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던 기업이 중앙개발이다(이시가와 요이찌, 1988). 삼성그룹을 승계한 이건희는 이 기업을 삼성에버랜드로 개명했다. 그 과정에서 최대 주주를 그의 처남인 홍석현에서 그의 외아들 이재용으로 교체했다. 2013년 삼성에버랜드는 상장사인 제일모직의 패션사업을 인계받고, 2014년 제일모직으로 개명한 다음, 주식시장에 상장했다. 이는 전형적인 우회상장 수법이다. 비상장기업이 증권거래소의 까다로운 심사를 피하기 위해 상장기업을 인수한 다음, 재상장 절차를 그대로 답습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1년 뒤 제일모직은 또 다른 삼성 모태자본인 삼성물산을 합병했다. 이 과정에서 주식 가격 산정을 놓고 많은 불협화음이 발생했다. 상장사인 삼성물산 주식 가격을 지나치게 낮게 산정했기 때문이다. 또한 국민연금 기금을 무리하게 끌어들여 삼성물산 합병자금으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재용이 삼성물산(구 삼성에버랜드) 대주주로 공식적으로 등극한 것은 1999년 이후다. 1999년 이재용은 삼성그룹의 사실상 지주회사 지분 25.1%를 확보함으로써 1대 주주가 됐다. 2대 주주는 그룹 내 중핵기업인 삼성카드(14.0%)와 삼성캐피탈(11.6%)이다. 5%이상 대주주 명단에는 포함돼 있지 않지만 삼성전기와 삼성SDI 등 그룹 내 중핵기업들도 모두 주주 명단에 포함돼 있다. 삼성캐피탈은 2004년 삼성카드에 합병됨으로써 삼성카드가 26.64% 지분을 확보해 이재용을 누르고 1대 주주가 된다. 삼성카드는 2004년부터 2011년까지 삼성그룹의 사실상의 지주회사 최대주주였다. 그러나 2012년 이후 삼성카드 지분은 5%까지 줄어든다. 삼성카드의 지분이 줄어 듬과 동시에 이재용이 다시 1대 주주로 등극한다.

 

이재용 재등극과 함께 눈에 띄는 점이 두 가지 있다. 첫째는 2대 주주로 2012년부터 현대가의 KCC 그룹(17%)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현대 창업주 고 정주영 회장의 막내 동생인 정상영이 창업한 KCC는 건축자재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재벌그룹이다. 다른 가문의 자본을 5년 이상 지주회사에 등재한 것은 재벌역사에서 흔한 경우는 아니다. 두 번째 눈에 띄는 대목은 2015년부터 국민연금이 5%이상 대주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씨 일가와 삼성 중핵기업의 5%이상 지분의 총합이 1999년 75.9%에서 2016년 42.79%로 줄어들고 있다. 이는 이씨 일가의 자금력이 지주회사를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부족함을 의미한다. 만약 이씨 일가가 삼성그룹 내에서 경영권을 행사하지 못했다면, 삼성그룹 지배력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을지 회의가 드는 대목이기도 하다.
또한 몇 가지 특이한 사항을 추론할 수 있다. 첫 번째 추론의 대상은 제일모직이다. 삼성 모태 자본의 하나인 제일모직은 삼성에버랜드 지분 4%를 2000년부터 2012년까지 갖고 있었다. 이는 2013년 삼성에버랜드가 제일모직 패션사업 부분을 인수할 수 있는 근거가 됐다. 두 번째 추론은 CJ과 삼성과의 연계 고리이다. CJ 이재현은 삼성에버랜드 지분을 2003년까지 소유하고 있었다. 어떤 이유에서 삼성에버랜드 지분을 처분했는지 알 수는 없다. 다만 CJ는 2004년부터 본격적으로 영화와 케이블, 인터넷 게임 기업들을 사냥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CJ는 오락산업 분야에서 강자가 된다. 이는 CJ 미디어 사업 부분에서 본격적으로 증명하겠다. 세 번째 추론 대상은 이유정과 조운해이다. 범 삼성계에 포함되는 신세계 그룹의 이명희(이건희 막내 여동생)의 딸인 이유정과 한솔그룹의 이인희(이건희의 큰 누나)의 남편인 조운해가 삼성그룹 지주회사 지분을 갖고 있다. 비록 적은 지분이지만 가문의 일원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해석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삼성 지주회사는 기업공개가 이뤄진 2014년 전까지 소수의 이씨 가족과 이들이 통제할 수 있는 기업만 주주가 됐기 때문이다. 심지어 삼성전자조차도 이 기업의 지분을 오랫동안 갖고 있지 않았다. 삼성전자의 최대주주는 외국인들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삼성물산은 소수의 이씨 가족만 소유권을 갖는 그룹의 사실상 지주회사이다.

 

삼성물산은 더욱이 이재용이 최대주주로 등극한 1999년 이후 한국 디지털 미디어의 재정적 후원자였다. 삼성물산(구 삼성에버랜드)은 2000년 e-삼성 프로젝트 이외에도 인터넷 금융과 보험 그리고 정보보안 관련 기업에 지분을 투자했다. 이들 기업들은 디지털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거나 업체이거나 소프트웨어를 생산하는 업체들이다. 투자금은 삼성물산 지분뿐만 아니라 삼성 계열사들이 참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표면상으로 이재용이 e-삼성 프로젝트를 포기하면서 실패한 듯 보였다. 하지만 이에 대한 결론은 유보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소프트웨어 개발 사업은 삼성그룹의 시스템 통합사업을 하는 삼성SDS 영업 활동과 직접적으로 연관돼, 매출 확대에 지속적으로 기여하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몇개 기업들의 사업영역과 소유구조를 살펴보자. ‘올앳’ (현, 케이지올앳)은 전자상거래나 인터넷 금융 거래 시 ActiveX를 쓰는 지급 결제 대행 소프트웨어를 개발한 업체다. 주요 주주는 2000년부터 현재까지 삼성카드, 삼성물산, NHN(네이버) 등이다. 현재까지 지분 변동이 없다. 이들 3개 대주주들은 한국 온라인 금융상거래의 최대 수혜자라고 할 수 있다. 소비자들은 거래를 할 때마다 올앳이 개발한 프로그램을 자신들의 디지털기기에 설치해야 하기 때문이다. ‘시큐아이 닷컴’은 정보 보안 프로그램 개발과 온라인 사업 모델을 개발하는 업체다. 주요 협력기업은 마이크로소프트웨어(MS)다. 2000년 설립 당시 최대주주는 에스원(53.62%)이며 삼성에버랜드와 함께 삼성SDS(4.47%)등이 주주였다. 2015년 삼성SDS가 에스원 지분을 인수해서 1대 주주가 됐다. ‘엠포스’는 인터넷 광고 기법을 개발하고 판매하는 온라인 소프트웨어 기업이다. 한국 광고시장이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넘어간 2010년 이후 급성장했다. 이처럼 성공한 디지털 투자와 달리 실패한 기업도 있다. ‘가치네트’는 인터넷 뱅킹과 온라인 보험회사다. 이 기업의 소유지분은 2000년부터 2010년까지 이재용이 최대 주주였다. 2000년 지분을 살펴보면 이재용(52.4%), 삼성에버랜드(19.1%), 삼성SDS(9.5%), 이학수(4.8%) 그리고 삼성경제연구소(4.8%) 등이다. 2010년까지 지분 변동은 있지만 이재용이 최대주주라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치네트는 2014년 청산됐다.

 
▲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출근 모습. ⓒ 연합뉴스

특히 이재용이 투자한 이들 기업 중 증권시장에 상장된 기업도 있다. ‘크레듀’(현재 멀티캠퍼스)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회사는 인터넷 사이버 위탁 교육 서비스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업체로 2006년 코스닥에 상장됐다. 2000년 주요 주주는 e-삼성(48.32%), 삼성경제연구소(14.50%), 삼성네트워크(9.66%) 등으로 모두 이재용이 직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업들이다. 이재용이 디지털 투자 사업을 포기해 실패한 듯 보였지만 삼성 계열사들이 최대 주주로 참여하고 있다. 특히 2002년 크레듀는 이재용이 최대주주로 있는 가치네트의 교육사업을 인수해 사이버 위탁 교육 서비스 사업을 확대했다. 또한 삼성 이데올로기를 생산 유포하는 삼성 지식정치 사령부인 삼성경제연구소가 이 기업의 대주주이다. 디지털 지식을 생산하고 유포하는 기업이 하나로 결합된 사례이다.

 

이처럼 이재용의 e-삼성 프로젝트가 실패한 듯 보이지만 삼성의 디지털 미디어 권력이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삼성물산의 이사회 구성을 특징에서 찾을 수 있다. 임기임원들은 다른 기업에서 오거나 다른 기관에서 온 사람은 없다. 등기임원들은 모두 삼성 구조본이나 삼성 계열사 임원 출신이다. 이미 이씨 일가에 대한 충성심과 능력을 검증 받은 사람들이다. 1999년부터 2016년까지 등기임원은 13명에서 5명까지 숫자가 유동적이다. 이건희 회장은 1999년부터 2004년까지 등기임원이었다. 삼성 구조본부를 책임지고 있던 이학수는 1999년 등기임원이었다. 그 이후 삼성 구조본 재무통인 최광해가 2000년부터 2003년까지 감사로 등록했다.
외부 임원이 등재되기 시작한 것은 제일모직과 합병되기 1년 전인 2013년부터다. 사외이사들의 출신은 재벌 기업(KCC) 이사출신, 경제학 또는 건축학 등 교수들, 전 청와대 비서관 등이다. 이들이 삼성물산의 2014년과 2015년 합병 건에 대해 비판적 의견을 공개적으로 표명한 경우는 없다고 파악되고 있다.
삼성SDS, 디지털 한국 건설자
삼성SDS는 1985년 그룹 내 컴퓨터 임대 등을 목적을 하는 정보시스템 업무을 위해 설립됐다. 그 이후 삼성생명 전산시설을 구축하는 등 정보통합서비스(System Integration=SI) 업체로 성장했다. 삼성SDS는 1997년 마이크로스프트(MS)사와 전력적 협력관계 확대를 통해 사이버 코리아를 건설하는데 앞장섰다. 건설업체에서 원청이 있고 그 아래에 하청 기업들이 있듯이 삼성SDS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사이버 건설 업체라는 뜻이다. 예를 들면 삼성SDS가 도로공사로부터 하이패스 설치 공사를 따 오면 이 기업은 이를 다른 기업에 하청을 준다는 의미이다. 2000년 초반부터 현재까지 이 기업은 한국 최대 SI업체다. 이 기업의 주요 고객들은 정부 (국세청, 인천공항, 검찰청, 국가교육센터), 금융(산업은행, 농협), 대학(명지대) 등이다. 주요 공공시설의 인터넷 통합 서비스 사업을 가장 많이 수주한다.
이 기업의 1대 주주는 삼성전자이다. 삼성전자가 디지털 기기를 만든다면, 그 디지털 기기를 가동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소프트웨어를 연결하는 서비스를 하는 곳이 바로 삼성SDS다. 그 다음 주주는 삼성물산와 삼성전기 등 중핵 기업들이다. 1999년부터 2016년까지 계속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은 이재용과 이부진 그리고 이서현이다. 실은 삼성에스디에스는 그룹 승계 문제와 연계돼 있었다. 삼성은 1999년 삼성물산 (구 삼성에버랜드)에서 사용했던 금융기법을 이곳에서도 똑같이 사용했다.

 
▲ 2013년 5월31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삼성물산 패션부문장 사장이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호암상 시상식에서 나란히 앉아 있다. ⓒ 연합뉴스

신규 전환사채 발행과 유통 과정을 통제하면서 이재용과 그의 여동생(이부진, 이서현, 이윤형) 지분을 늘려줬다. 그 행위는 불법이었다. 삼성 구조본부를 책임지고 있는 이학수와 이인주가 주도했다. 재무 전문가인 이 두 사람은 2008년까지 삼성SDS 지분을 갖고 있다. 이 회사는 2014년 증권거래소에 상장됐다. 그 이후 이들의 지분은 보이지 않는다.

 

삼성SDS는 삼성물산처럼 소프트웨어 개발 기업에 지분을 투자한다. 1999년 인터넷 백신을 만드는 안철수연구소(23.0%)도 이 기업의 투자를 받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포탈 사이트인 네이버(18.4%)도 마찬가지로 삼성 돈으로 성장했다. 우리나라 최초 기업간 거래(B2B) 프래그램을 개발하는 일렉트로피아에도 투자했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웹사이트를 기획하고 운영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디자인스톰과 정보시스템 운영 회사인 시스게이트 모두 삼성SDS 사내 벤처 기업이라는 점이다. 실은 네이버도 마찬가지로 삼성의 사내 벤처였다. 2004년에는 동아닷컴 지분을 19.90% 갖고 있다. 또한 삼성물산(구 삼성에버랜드)과 함께 정보 보안업체인 시큐아이닷컴과 사이버 위탁 교육서비스인 크레듀(현 멀티캠퍼스), 가치네트에 공동 투자했다.

 

삼성SDS 임직원 구성도 삼성물산과 유사하다. 등기임원 숫자는 6~7명 순이다. 기업을 공개하기 전인 2013년까지 삼성그룹 출신의 임원들이 등기 이사이다. 이 기업이 삼성 상속문제와 연관돼 있어 최광해 등 삼성 구조본부 재무팀장이 감사로 등재돼 있기도 한다. 2014년 기업 공개이후 사외이사들이 활동하고 있다. 사외이사 출신은 변호사, 경영학과와 공대 교수들, 그리고 검찰 고위직 출신이다.
제일기획(Cheil), 삼성 미디어 자금 집행자
삼성그룹은 1970년대까지 설탕과 밀가루 등 소비제품 판매를 통해 삼성 자본을 축적했다. 그래서 다른 재벌들에 비해 일찍 광고업에 진출한 것으로 추론된다. 광고의 본래 목표는 소비자 수요 관리이기 때문이다. 실제 재벌 그룹 중 최초로 광고대행사 제일기획을 1973년 설립했다. 삼성물산이 6번의 개명을 통해 불법성의 이미지 세탁을 한 것과 반대로 제일기획은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다만 제일기획이란 이름을 2008년에 영문으로 ‘Cheil’로 바꿨을 뿐이다.

 
▲ 제일기획 사옥. 사진=제일기획 Blog

삼성 역사를 살펴보면서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창업주 이병철의 엘리트 의식과 연관된 것으로 추론된다. 삼성 계열사중 많이 쓰는 글자가 ‘제일○○’이다. 제일제당, 제일기획, 제일모직 등이 그 사례이다. 삼성그룹의 사훈 중 하나가 ‘인재제일’이다. 그 다음에 쓰는 글자가 ‘중앙○○’이다. 중앙일보, 중앙개발(구 삼성에버랜드) 등이다. 삼성이란 이름도 3개의 별이란 뜻이다. 3이란 숫자는 동양학에서 ‘천·지·인’을 의미한다. 완전함이란 뜻이다. 삼성그룹 광고 카피 중에도 ‘아무도 2등을 기억하지 않습니다’란 글귀도 이런 삼성의 역사적 맥락에서 나온 글귀이다. 즉 ‘제일’, ‘삼성’, ‘중앙’이란 글귀는 모두 삼성그룹을 대표하는 이미지들이다. 이런 그룹 이미지를 만들고 삼성 제품을 광고하는 곳이 제일기획이다.
제일기획은 삼성관련 미디어 업무를 총괄했다. 이 기업은 1970년대에는 광고에 집중했고 1980년대에는 비디오 프로덕션 등 영상 제작분야까지 진출했으며 1990년대는 케이블 방송사업까지 확대했다. 하지만 이병철의 삼성그룹이 이건희 삼성그룹으로 재조직된 2000년대 이후부터는 광고사업에만 집중하고 있다. 2000년대 삼성전자의 해외 사업 확대와 맞물려 스포츠를 통한 광고 후원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특히 제일기획은 2010년 전후로 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등 각국의 광고기업 인수 합병을 통해 세계 20권내의 광고대행사로 성장했다. 실제 2016년 제일기획 매출의 60%이상은 해외시장에서 발생하고 있다. 외국 기업 광고 대행을 통해서 수익을 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삼성그룹 계열사의 해외 광고를 대행하면서 발생한 수익들이다.

 

제일기획의 매출을 분석하기 위해선 누가 광고주인지를 파악하면 된다. 주요 광고주들은 대부분 삼성전자, 삼성테스크, 제일모직 등 계열사들이다. 다른 큰 광고주들은 CJ홈쇼핑, 동서식품, NHN(네이버) 등으로 삼성 계열사였거나 삼성 그룹과 연관된 사람이 설립한 회사들이다. 다른 광고주는 KTF와 신한은행 등이다.
제일기획은 삼성물산과 삼성SDS와 달리 삼성 오너일가가 직접적으로 소유 지분을 갖고 있지 않다. 삼성그룹의 중핵기업들이 대주주이다. 이재용이 1999년 제일기획이 주식시장에 상장될 당시 29.75% 지분을 갖고 있었지만 연말에 모두 팔아치웠다. 이는 제일기획도 삼성SDS와 삼성물산처럼 삼성그룹 승계 작업에 이용됐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이건희 삼성 회장과 이학주 구조본부 책임자가 1998년 모두 등기이사로 등록했다. 이재용이 주식을 모두 처분 한 후 이 두 사람은 이사명부에서 빠졌다. 이를 통해 제일기획도 삼성 승계 작업에 활용됐음을 추측할 수 있다.

 

제일기획이 삼성 승계 작업과 연관됐다고 추론할 수 있는 또 다른 근거는 타법인 출자 현황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제일기획은 삼성물산과 삼성SDS가 투자하고 있는 크레듀(현 멀티캠퍼스), 배틀탑, 오픈타이드 코리아, 에스코어 등의 회사들에 지분을 투자하고 있다. 제일기획은 또한 인터넷 광고업체인 하이퍼네트 코리아와 텔레마케팅 회사인 MPC 등에도 투자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제일기획 임원들의 특징을 살펴보자. 삼성물산과 삼성SDS가 2014년 상장된 것과 달리 제일기획은 1998년 주식 시장에 개방됐다. 이사회 명부에 등재된 이사들 숫자는 1998년 11명(사내 8명+사외 3명)에서 2002년 9명(사내 5명+사외 4명), 2016년 7명(사내 4명+사외 3명) 등으로 유동적이다. 사내에서 임명된 이사들은 모두 삼성 계열사 임원 출신이거나 제일기획에서 근무한 삼성맨들이다. 사외이사들은 모두 한국 파워엘리트로 분류할 수 있다. 대부분 SKY(서울대·연세대·고려대) 출신으로 미국 유학을 다녀온 대학교수, 사법고시를 통과한 검사장 출신, 회계사 시험을 통과한 회계법인 대표, 국회사무처 수석 전문위원 출신 등이다.

기업사냥으로 세운 미디어제국 CJ

한국 영상 산업은 CJ를 빼놓고는 이야기를 할 수 없다. 작품 기획에서부터 제작, 배급 그리고 상영까지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업 분야의 다각화와 함께 시장 점유율도 시장 최고이다. 2016년 현재 CJ는 유료방송 최정상에 위치한 케이블 시장 최강자이다. 29개 케이블 채널과 23개의 케이블 방송국을 통제하고 있다. 또한 한국 영화 제작의 가장 큰 손이다. CJ 돈을 받은 독립 제작회사는 CJ 영화 배급사와 상영관을 통해야만 가장 많은 관객을 만날 수 있다. 한국 영화 시장의 쇼케이스를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CJ가 대한민국 대중문화의 게이트키퍼라고 단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CJ가 무엇을 제작하고 어떻게 배포하고 언제 시장에 노출시킬지를 결정할 수 있는 권력을 갖고 때문이다.
여기에서 몇 가지 질문들이 떠오른다. 한국 대중문화의 흐름을 조절하는 CJ는 누가 통제하는가? CJ는 어떻게 대한민국 최대의 복합 미디어 기업이 되었나? 성장에 필요한 자금은 어디에서 왔는가? 저자는 이 질문들에 답을 하기 위해 CJ 제국의 역사와 기업 성장 과정을 분석하겠다. 분석 시기는 CJ가 미디어 사업 내용을 공개하기 시작한 1998년부터 2016년까지다. 분석 자료는 CJ그룹의 지주회사인 CJ의 사업보고서와 감사보고서를 토대로 주요 미디어 기업(CJ 오쇼핑·CJ 인터넷·CJ CGV)의 소유구조와 이사회 구성, 그리고 타법인 투자현황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한다.
CJ 미디어 제국의 역사와 지배구조
CJ는 1993년 삼성그룹으로 분리를 선언했다, 하지만 완전 분리를 이룬 시기는 1997년이다. 그 당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조카인 이재현은 한 개의 상장사(현 CJ)와 씨제이골든빌리지(현 CGV) 등 10개의 비상장 기업을 갖고 CJ그룹을 만들었다. 그 뒤 지속적으로 기업 인수 합병을 통해 2016년 현재 CJ CGV 등 6개의 유가상장사와 CJ E&M 등 2개 코스닥 상장사 그리고 49개 비상장회사와 199개 비상장 해외법인을 갖고 있는 복합 미디어 기업으로 성장했다.

 
▲ 2017년 12월17일 이재현 CJ그룹 회장이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장모 고 김만조 박사 빈소로 수행원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서고 있다. ⓒ 연합뉴스

‘표1’에서 보듯 CJ는 2011년까지 지속적으로 기업 인수합병을 단행했다. 눈에 띄는 기업 사냥은 2000년 삼구쇼핑, 2004년 플레너스 그리고 2009년 온미디어 인수이다. 2000년 삼구쇼핑을 합병할 당시 CJ는 삼구그룹으로부터 4개의 케이블 채널(제일방송· 양천케이블TV·아이삼구, 룩티브)도 함께 인수했다. 이 4개의 회사는 CJ가 케이블 사업을 확장하는데 발판이 된다. 특히 양천케이블TV는 CJ가 케이블 SO 사업자로서 성장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CJ는 케이블 방송국을 인수하면서 시골보다는 대도시지역을, 단독주택보다는 아파트 단지가 많은 중소형 케이블 방송국을 집중적으로 인수하거나 합병했다. 이때 중추적인 역할을 한 기업이 CJ 오쇼핑이다. 삼구쇼핑에서 개명한 이 회사는 CJ그룹이 다른 케이블 방송국이나 채널들을 사들일 때 거래 창구역할을 했다.

 
▲ 표1) CJ 성장의 주요 내역

2004년 플레너스 인수를 통해 CJ는 영화 배급시장 점유율 2위에서 2005년부터 1위로 껑출 뛰어 올랐다. 또한 플레너스가 소유하고 있던 온라인 게임회사도 함께 인수했다. CJ 게임즈나 또는 넷마블로 알려진 회사들은 모두 CJ가 설립해서 키운 것이 아니라 돈으로 산 기업들이다. 특히 2009년 연말 CJ가 케이블 사업의 양대 산맥 중 하나인 오리온 그룹의 온미디어를 인수함으로써 유료방송 최강 기업이 됐다.
다시 말하면 CJ 미디어 제국은 자체 미디어 기업을 설립해서 수립된 것이 아니라 강력한 자금력을 기반으로 한 기업 사냥을 통해 만들어진 제국이다. 그 결과 CJ의 미디어 기업들은 이재현을 정점으로 하는 비대칭적 피라미드 지배구조 아래 있다.

 
▲ 2015년 CJ 미디어제국 소유 구조. 디자인=안혜나 기자


CJ 성장의 3대 인수합병
CJ 미디어 제국은 CJ 오쇼핑 (구 삼구쇼핑), 플레네스, 온미디어 인수 합병을 통해 완성됐다. 흥미롭게도 이들 3개의 기업들은 몇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첫 번째는 외국인들이 회사 설립 초기부터 5%이상의 대주주였다는 점이다. 두 번째 유사점은 외국 자본을 유치한 다음 모두 코스닥에 상장됐다는 점이다. 마지막 공통점은 이들 모두가 CJ에 합병됐다는 점이다. 이는 CJ의 성장은 자구적 노력이 아닌 자금력을 기반으로 한 기업 사냥으로 기업 외면을 확장시켰다는 의미이다.
구체적으로 이들 3개 기업의 역사와 소유구조 그리고 사업 내역을 살펴보자.
CJ 오쇼핑은 삼구그룹이 지난 1994년 설립했다. 삼구는 1996년 케이블 채널인 제일방송을 인수한 다음, 1997년 천만 달러 외자를 유치했다. 2년 뒤인 1999년 코스닥에 상장됐다. 같은 해 삼구그룹은 케이블 민영화 대상인 한국통신케이블텔레비젼을 인수한 뒤 이름을 ‘양천넷’으로 개명했다. 그리고 1년 뒤 2000년 삼구그룹은 CJ그룹에 삼구쇼핑을 매각했다. 그 뒤 CJ는 삼구쇼핑을 CJ 39쇼핑에서 CJ 오쇼핑으로 개명했다. ‘표2’에서 보듯, CJ 오쇼핑은 모기업의 지주회사인 2000년부터 최대주주인데 이는 이 기업이 CJ그룹 내에서 핵심기업이란 의미이다.

 
▲ 표2) CJ 오쇼핑 소유지분 변동 내역

‘표3’에서 보듯CJ 오쇼핑은 지속적으로 다른 미디어 기업들을 인수하거나 지분을 투자하고 있다. 2005년 즈음에는 케이블 방송국 인수 합병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2010년 즈음부터는 영상 컨텐츠 제작 자금에 지분을 늘리고 있다. 2015년에는 케이블 유선방송국과 인터넷 브로드밴드 사업을 주로하고 있는 CJ 헬로비전의 최대주주로 등극했다.

 
▲ 표3) 타 법인 출자 변동 현황

이사회 임원구성에서 2005년이 분기점이 된다. 2005년 이전까지 삼성 그룹의 주요 임원들이 CJ 오쇼핑 등기이사로 기재돼 있다는 점이다. 이는 CJ가 삼성맨 출신을 주요 이사로 기용했다는 의미이다. 특히 2000년 등기 이사에 시티그룹 소속인 시키코프가 이사회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CJ 오쇼핑이 삼구그룹에 소속돼 있을 때도 등기 이사로 기재돼 있었다. 2006년 이후 CJ는 등기이사에 삼성맨 출신을 기용하기보다 다른 대기업 출신의 임명하고 있다. 이사회 임원수는 그룹내 이사 3~4명과 사외이사 3~4명을 임명하고 있다. 사외이사 출신은 미디어학과 대학교수들, 전직 공정거래위원회와 검찰청 그리고 기획예산처 고위직 출신들을 기용하고 있다. 이는 CJ가 사외이사 제도를 활용해 한국 파워엘리트들과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CJ가 삼구쇼핑 인수를 통해 케이블 망 사업자 시장에서 입지를 다졌다면 ‘플레너스’와 ‘온미디어’의 인수합병을 통해 미디어 컨텐츠 시장에서 최강자로 부상할 수 있었다. 우선 플레너스의 역사와 지배구조를 살펴보자. 플레너스는 기업 역사를 살펴보면, 한국 미디어 시장의 투기성을 한눈에 알 수 있다.

 
▲ 표4) CJ 게임즈(구 플레너스) 회사 내역

‘표4’에서 보듯 플레너스는 여러번 개명을 한다. 1982년 전자부품을 생산하는 중소기업이었던 동보강업은 1999년 코스닥 시장에 상장된다. 그 뒤 벤처사업가인 김형순은 이 회사를 인수한 다음 로커스 홀딩스로 개명한다. 그 뒤 그는 김형순은 영상물 제작사인 ‘싸이더스’를, 영화 배급사인 ‘시네마서비스’를, 온라인 게임 포털업체인 ‘넷마블’을, 그리고 영상물을 DVD 등으로 판매하는 ‘아트서비스’를, 음반 유통업인 예전미디어를 인수 합병했다. 이들 회사들은 모두 플레너스 엔터테인먼트 계열사로 편입됐다. 그 뒤 외국인 투자를 받은 다음 영화 상영관사업을 위해 ‘프리머스’ 시네마를 설립한다. 로커스는 1년 뒤 인터넷 게임포털 업체인 넷마블을 인수 합병 온라인 게임시장에 진출했다. 이후 최대주주로 강우석 영화감독이 부상한 다음, 한국 온라인 게임의 대표주자중 하나인 방우혁이 최대주주로 이름을 올린다. 그뒤 인터넷 쇼핑몰 사업과 온라인 광고사업을 첨가한다.
이렇게 대주주가 김형순→강우석→방준혁으로 바뀌는 과정에 외국 사모펀드(2000년 WP Seoul IV)가 이 회사에 투자한다. 즉 벤처사업가와 영화와 게임 사업가들이 회사를 키우는 과정에 외국 자본이 결합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그 회사는 지속적으로 미디어 콘텐츠를 생산하지 않고, 다른 기업에 판매를 함으로써 미디어 돈놀이의 대상이 된다. 실제로 영화제작, 배급(시네마서비스), 상영사업(프리머스)과 온라인 게임 사업을 2004년 CJ에 넘겼다. CJ는 플레너스를 인수할 당시 소유지분을 외국계 T. Rowe Price International(8.75%)와 공유했다. 이 같은 외국인 투자 지분은 2010년 CJ E&M에 합병될 때까지 지속된다.
‘표5’에서 보듯 CJ가 영화, 연예 매니지먼트 그리고 온라인 게임 시장에서 우월적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플레너스 인수 이후다. 2007년부터 이 회사는 온라인 게임회상에 대한 지분을 지속적으로 늘리고 있다. 심지어 2016년에는 한국 온라인 기업의 대표주자인 엔씨소프트까지 지분을 확대하고 있다.

 
▲ 표5) CJ 게임즈(구 플레너스) 타 법인 투자 현황

한때 CJ그룹의 경쟁자가 소유했던 ‘온미디어’도 외국자본이 설립 초기부터 투자돼 있었다. 이 기업은 오리온시네마네트워크 등 4개 케이블 채널과 5개 케이블 방송국을 소유하고 영화배급 사업을 전개했던 미디어 복합기업이었다. 2006년 거래소에 상장될 당시, 대주주는 오리온 (38.13%)과 외국계 사모펀드인 Tabimax SGP(16.71%)와 CiGEPEF(12.78%)였다. 2009년 CJ에 매각될 당시에는 외국인 지분이 다수 있었다. 특히 이 회사는 알레스델어네이들이라는 홍콩계 은행인 HSBC 자산운용 이사가 이사회에서 직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CJ 중핵 미디어 기업: CJ E&M과 CJ CGV
CJ E&M도 계열사간의 인수합병을 통해 탄생한 기업이다. CJ는 2011년 5개 영상 계열사(온미디어, CJ 엔터테인먼트, CJ 인터넷, CJ 미디어, 엠넷 미디어)를 합병했다. 합병 당시 계열사들은 손주 계열사를 보유하고 있었다. 온미디어는 오리온시네마케트워크, 온게임네트워크, 바둑TV, 디지털 온미디어, 이플레이온 등을 계열사로 갖고 있었다. 영화배급을 전문으로 하는 CJ 엔터테인먼트사는 아트서비스, 클립서비스, 엠바로 등의 계열사를 보유했다. 온라인 게임 사업을 책임지고 있던 CJ 인터넷은 미디어 웹, 애니파크, CJ 스포츠와 시드나인스포츠 등을 보유하고 있었다. 또한 케이블 음악 전문 채널인 엠넷미디어는 공연사업을 전문으로 하는 좋은콘서트와 케이블 채널 KMTV을 보유하고 있었다.

 
▲ CJ 사옥. ⓒ 연합뉴스

한국 최대 컨텐츠 기업인 CJ E&M의 소유지분은 ‘표6’에서 보듯 그룹 지주회사인 CJ가 최대주주이다. 특이하게도 이재현의 가족들이 모두 이 회사 지분을 갖고 있다. 2012년를 예로 들면, CJ 오너인 이재현(2.43%), 그의 아들인 이경후(0.28%)와 이선호(0.7%), 이재현의 누나인 이미경(0.15%), 그의 외삼촌인 손경식(0.02%) 등이다. 회사 임원 구성도 다른 계열사와 비슷한 유형을 보인다. 2013년까지 이재현이 등기이사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나머지는 CJ맨으로 분류할 수 있는 사람들이 경영을 맡고 있다. 사외이사는 미디어학과 교수, 전 국세청, 검찰청 그리고 금융감독원의 임원출신 들이다.

 
▲ 표6) CJ E&M 지분변동

‘표7’에서 보듯 CJ E&M은 인수 합병 초창기에는 합병한 회사들을 계열사로 거느리고 있다. 하지만 2014년이 지나면서 온라인 광고나 시나리오 전문 회사들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있다.

 
▲ 표7) CJ E&M 타법인 현황

CJ CGV는 영화를 전문적으로 상영하는 상장회사다. 이 회사는 지난 1996년 한국의 제일제당, 홍통의 골든 하베스트 그리고 호주의 빌리지 로드쇼가 합작해서 만든 ‘CJ 골든 빌리지’를 전신으로 한다. 1998년 한국 최초 멀티플렉스관을 서울 테크노마트 강변역에 개관한다. 1년 뒤 이 회사는 영화 배급사인 CJ엔터테인먼트(50.0)사와 호주의 멀티플렉스 업체인 빌리지로드쇼 인터내셔날(village roadshow international(50.0)이 합작해서 만든 ‘제일빌리지’에 합병된다. 그 뒤 이름을 ‘CJ빌리지’에서 ‘CJ CGV’로 개명한뒤 2004년 한국 증권시장에 상장했다. 외국계 합작회사인 CJ CGV는 영화 상영사업에만 집중한다. ‘표8’에서 보듯 최대주주는 CJ 계열사이거나 지주회사이다. 2010년까지 외국계 사모펀드가 꾸준히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다른 상장 계열사와 마찬가지로 2005년까지는 삼성그룹 출신이 등기 임원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또한 2013년까지 모기업 최대주주인 이재현이 등기이사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사외이사는 다른 계열사와 마찬가지로, 미디어학과 교수, 전 국세청과 검찰의 고위직 공무원들이 참여하고 있다.

 
▲ 표8) CJ CGV 소유지분 변화

CJ와 삼성 그리고 중앙일보
CJ 지주회사를 통해 CJ 미디어 기업을 통제하고 있는 이재현은 삼성그룹의 중핵기업 소유지분을 2012년까지 소유하고 있었다. ‘표9’에서 보듯 CJ는 삼성그룹의 사실상의 지주회사인 삼성에버랜드와 삼성생명 지분을 1998년부터 2012년까지 갖고 있었다. 이재현 씨제이 회장의 삼성 에버랜드 지분은 2003년부터 삼성 에버랜드 감사보고서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CJ의 타법인 출자 현황에는 2012년까지 지분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동시에 CJ는 중앙일보 지분을 2010년까지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 표9) CJ 그룹내 범 삼성계 간의 지분 공유 내역

사실 중앙일보와 CJ는 유료방송 시장에서 소유지분을 공유하고 있었다. ‘표10’에서 보듯 ‘오리온시네마네트워크’에서 CJ와 중앙일보가 만나고 있다. 이 회사는 동양그룹 (나중에 오리온 그룹 개명)이 1999년 설립한 케이블 프로그램 공급회사다. 설립 당시 최대 주주는 동양그룹 미디어 지주회사인 온미디어(50.48%)와 중앙일보사(16.52%) 그리고 TWE Korea Hodlings(33.0%)이다. 1999년 설립 당시 중앙일보의 최대주주는 홍석현이었다. CJ가 2009년 온미디어를 인수할 당시에도 중앙일보는 오리온시네마네트워크 지분을 그대로 유지했다. 2013년 CJ E&M이 오리온시네마네트워크를 인수할 당시까지 중앙일보와 소유지분을 공유했다.

 
▲ 표10) 오리온 시네마네트워크 소유지분 변동

이외에도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은 개인 자격으로 2001년 케이블 음악 채널인 엠넷 미디어(7.24%)를 짧게 보유했다. 오리온시네마네트워크와 엠넷 미디어를 통해 유추할 수 있듯이, 범 삼성가문은 미디어 기업의 소유 지분을 공유하고 있다.

삼성미디어 제국 징검다리는 중앙일보

이병철 삼성 창업자는 8·15 해방직후 신문사를 경영 한 적이 있다. 당시 대구지역 사업가들의 친목단체 ‘을유회’ 소속이었던 이병철은 경영난에 봉착한 ‘조선민보’를 인수했다 (삼성비서실, 1988년 215쪽). 하지만 그는 이 신문사를 오랫동안 경영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사업적인 이유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948년 이병철은 사업 본거지를 대구에서 서울로 옮겼다. 효성 창업자인 조홍제와 엘지 창업자인 구인회와 공동으로 ‘삼성물산’을 설립해 본격적으로 무역업에 뛰어들면서 언론사와의 인연은 멀어지는 듯 했다.
하지만 1963년 이병철은 라디오, 텔레비전, 신문을 포함하는 언론사업 진출 의사를 밝혔다. 그는 언론사업 청사진을 이승만 정권 때 법무부 장관과 내무부 장관을 지낸 홍진기와 함께 그렸다. 그 결과 1964년 5월 ‘라디오 서울’을 개국했고 같은 해 12월 동양방송국(TBC)을 개국했다. 삼성은 1년 뒤인 1965년에 중앙일보를 창간했다. 사실 이병철은 1961년 중앙일보 창간을 위해 삼성 비서실에 신문창간 기획안 마련을 지시했다. 그는 특히 중앙일보 창간에 앞서 일본 3대 신문사인 아사히·마이니치·요미우리 신문사를 직접 방문하고 경영과 편집시설 등 신문제작 전반을 시찰한 후 중앙일보를 창간했다(삼성비서실, 1988년 225~226쪽). 중앙일보 창간 당시 이병철은 대표이사직을 홍진기는 부사장직, 이병철의 둘째아들인 이창희는 이사직을 갖고 경영에 참여했다. 중앙일보는 이렇게 ‘이병철-홍진기’ 통제 아래 종합 일간지로서 성장해갔다.

 
▲ 1965년 9월22일 이병철 삼성그룹 창립자가 중앙일보 창간호를 보고 있다. 사진=이병철 자서전 호암자전

중앙일보는 사실 이병철 삼성 그룹의 중핵기업이다. 오너 일가가 직접 소유지분을 갖고 있고 경영에도 직접 참여한다. 이병철 셋째아들이자 홍진기 사위인 이건희는 1970년 초반부터 중앙일보 경영에도 참여했다. 이건희 부인인 홍라희는 1980년 초반까지 중앙일보 편집국 문화부에서 미술 등 문화관련 기사를 작성했다. 특히 홍라희 큰 동생인 홍석현이 1994년부터 중앙일보 경영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홍석현이 명실공히 중앙일보 최대 실력자가 된 것은 그 후 5년이 지난 1999년, 삼성그룹에서 분리하면서 부터다. 삼성그룹을 이어받은 이건희가 그의 형제와 삼성 중핵기업들이 갖고 있는 중앙일보 지분을 홍석현 등 홍씨 일가에게 넘겼기 때문이다. 이는 중앙일보 통제라인이 ‘이병철-홍진기’에서 ‘이건희-홍석현’으로 전환됐다는 걸 의미한다. 즉 중앙일보는 삼성그룹 창업자인 이병철 가문과 정치 엘리트인 홍진기 가문이 창간 단계에서부터 공동 기획·운영한 가족 미디어 기업이다. 그 전통은 2018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1999년, 불안한 중앙일보 독립
중앙일보는 1965년 창간 이후 2000년대 복합 미디어 기업으로 성장했다. ‘표1’에서 보듯 중앙일보가 관여하는 미디어 사업은 종합일간지 등을 포함하는 인쇄매체, 종합편성 케이블방송 등의 방송, 영화 투자와 제작 등의 영상 매체 그리고 광고 제작과 유통 등이다.

 
▲ 표1) 중앙일보 연혁

중앙일보는 이병철과 홍진기의 통제 아래에 있던 1987년까지는 신문과 방송 사업에 집중했다. 하지만 1980년 전두환 정권이 신문과 방송 겸업을 금지하면서 방송 사업은 접어야했다. 그 뒤 이병철과 홍진기는 신문 등 인쇄사업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이건희가 삼성그룹을 인수 한 다음 중앙일보는 1996년 일본 다국적 광고회사인 덴츠와 50:50 지분으로 종합 광고대행사인 휘닉스커뮤니케이션을 설립해 한국 10대 광고대행사로 성장시켰다. 그 뒤 홍석현이 중앙일보 최대주주로 부상한 1999년 이후 중앙일보는 인쇄매체뿐만 아니라 드라마 제작 등 영상 제작과 유통 그리고 영화관 사업까지 확장했다. 2005년 중앙일보 계열사는 79개에 달했다. 그 뒤 중앙일보가 광고회사와 반도체 장치 그리고 리조트와 편의점 사업 등을 묶어 보광그룹으로 분할하면서 중앙일보 계열사 숫자는 40개 내외로 줄었다.
중앙일보는 1999년 4월 삼성그룹으로부터 몇개의 반도체와 LCD 제작 기업, 제2금융기업, 편의점, 레저 스포츠, 광고와 케이블 등 미디어 사업 등을 넘겨받았다. 사업을 넘겨받음과 동시에 홍석현이 중앙일보 최대주주로 부상했다. ‘표2’에서 보듯 홍석현은 1998년 중앙일보 최대주주였지만 중앙일보를 혼자서 경영할 정도의 지분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가 갖고 있는 지분을 제외할 경우 삼성 총수인 이건희와 그의 통제 아래에 있는 범 삼성가의 지분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그 이후 홍석현은 중앙일보를 CJ그룹 계열사와 2010년까지 공동 소유하고 있다. 유민재단은 그의 부친인 홍진기를 기념하는 재단이다. 특이하게도 2016년 지분에서 보듯 중앙미디어네트워크가 중앙일보 최대주주로 홍석현 지분보다 더 많다. 이 회사는 2011년 중앙일보 유상증자를 통해 최대주주 지위를 확보한 중앙일보 미디어 그룹의 사실상의 지주회사다.

 
▲ 표2) 중앙일보 대주주 변동

하지만 1999년은 중앙일보에게 있어 가혹했다. 홍석현 중앙일보 최대주주가 탈세 혐의로 구속됐기 때문이다. 중앙일보가 삼성에서 분리될 당시 증여세와 법인세 등을 제대로 납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백병규, 1999년 77쪽). 세금 탈루 혐의에 연관 된 기업들은 지난 1983년 홍진기가 설립한 텔레비전브라운관 부품업체와 반도체 장비기업들, 종합 레저시설, 1990년 일본 세이유 그룹과 제휴해 설립한 ‘훼밀리 마트’ 등이었다. 최대주주의 구속은 중앙일보에게 있어 최대 위기였다. 오너가 절대적 권한을 행사하는 재벌의 경영방식에 비춰보면 오너의 부재는 통제라인 부재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 중앙일보 사옥. 사진=미디어오늘 자료사진

홍석현은 구속에서 풀려난 뒤 중앙일보를 제외한 광고와 반도체 제조, 리조트, 편의점, 금융사업을 묶어 그의 형제들에게 사업을 분리해 줬다. 그 기업의 이름이 보광그룹이다. 중앙일보 그룹이 2005년을 두 개의 재벌기업으로 분할했다.
기업사냥, 중앙미디어 제국 발판
홍석현은 구속에서 풀려난 이후 중앙일보를 복합 미디어 제국으로 성장시키기 위해 다양한 분야에 지분을 투자했다. ‘표3’에서 보듯, 중앙일보는 무료 신문사업, 방송 제작업, 영상 투자사업, 경제 신문, 연극과 뮤지컬 등 공연 투자사업, 종합편성채널 획득, 온라인 신문 등에 지속적으로 투자했다. 이들 투자기업들은 중앙일보가 영상 사업 분야로 진출하는데 교두보 역할을 한다.

 
▲ 표3) 중앙일보 주요 타법인 출자 시기

중앙일보도 CJ 그룹처럼 기업 인수합병(M&A)을 통해 미디어 제국을 완성해 갔다. 이는 금융자유화 이후 재벌들이 미디어 사업 확장을 위해 사용한 ‘우회상장’ 기법과 ‘신주인수권부사채(BW)’ 발행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음을 의미한다. 우회상장이란 수익을 내지 못하고 있는 상장된 중소기업을 인수한 다음 사업 내용에 미디어 사업을 추가하고 이름을 바꿔 재상장하는 수법을 말한다. 신주인수권부사채(BW:bond with warrant)는 새로운 주식 발행을 통해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도입된 신 금융기법이다. 하지만 재벌 오너들이 세금을 적게 내고 그룹을 자녀에게 물려주기 위해 사용한 방법이다. 이건희 회장은 이재용 등 그의 자녀들에게 그룹을 상속하기 위해 삼성에버랜드와 삼성 SDS 그리고 제일기획 등 중핵기업을 상속 통로로 활용했다.
중앙일보는 계열사인 제이콘텐트리에서 우회상장과 BW 기법을 활용했다. 사실 중앙일보가 이 기업을 인수할 당시 이름은 일간스포츠였다. 이 신문은 사실 종합일간지 시장에서 중앙일보 경쟁사였던 한국일보가 소유한 스포츠와 연예소식을 주로 보도하는 대중지였다. 하지만 1997년 금융위기 이후 경영이 악화된 한국일보는 피혁제품을 제조하고 판매하는 상장사인 한길무역 지분을 획득한 다음 회사이름을 일간스포츠로 변경했다. 그뒤 사정은 ‘표4’에서 보듯, 이 회사 이름은 일간스포츠-아이에스플러스코프-제이콘텐트리로 개명했다.

 
▲ 표4) 제이콘텐트리 연혁

‘표5’에서 보듯, 이름이 변할 때마다 최대주주가 바뀌었다. 이 회사는 2001년에는 한국일보 소유였다. 2003년에는 한국일보사, 중앙일보사 그리고 매일경제신문가 공동소유했다. 그 당시 이름은 일간스포츠였다. 중앙일보사는 2007년 최대주주로 부상했다. 1년 뒤인 2008년 회사이름이 아이에스플러스코프 개명했다. 그뒤 중앙일보가 사실상의 지주회사인 중앙미디어네트워크로 지정하면서 다시 이름을 제이콘텐트리로 바꿨다.

 
▲ 표5) 제이콘텐트리 대주주 변동 현황

‘표6’에서 보듯, 중앙일보는 최대주주로 확정된 2005년 이후 영상과 영화 그리고 공연관련 사업으로 투자를 늘리고 있다. 대주주 변동이 있었던 2000년 초반 이 기업은 미디어 기업을 확대하지 않았다. 피혁회사가 소유할 당시에는 미디어 투자 기업이 아예 없다. 한국일보와 중앙일보 그리고 매일경제신문이 공동으로 이 기업을 소유할 당시에는 아예 투자를 하지 않고 있다. 이는 상장된 중소기업이 미디어 투기 자본의 돈놀이터임을 암시한다.

 
▲ 표6) 제이콘텐트리 타 미디어법인 출자

중앙일보는 제이콘텐트리를 영화 상영관 사업 확장 통로로 활용했다. 이 회사는 2007년 중소형 독립 영화 상영관들이 공동으로 설립한 씨너스를 인수한 다음 영화 상영관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했다. 2010년 씨너스는 한국 3대 영화 상영관인 매가박스 지분을 인수하기 시작해 2012년 완결했다.

 
▲ 홍석현 전 중앙일보·JTBC 회장. 사진=중앙일보 제공

또한 홍석현의 중앙일보는 한국에 진출한 외국기업들과 협력해 미디어 사업을 확장했다. 휘닉스커뮤니케이션과 터너브로드캐스팅 그리고 팍스스포츠 채널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전자는 직접적으로 외국 기업들과 지분을 공동투자하고 이사회 의사를 공유하지만 후자는 느슨한 협력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는 중앙일보의 선택적 사항이기 보단 외국 자본의 속성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한국 미디어 시장에 진출해 있는 외국인들은 광고시장을 제외하곤 한국 시장에 자본을 투자하기보다 국내 파트너와 사업적 협력만을 유지하고 있다.
‘표7’에서 보듯, 휘닉스커뮤니케이션은 한국 광고시장이 완전 개방된 1996년 설립된 이후 2003년 증권시장에 상장했다. 그 뒤 지속적으로 다국적 기업들과 합작회사를 설립했다. 휘닉스가 협력하고 있는 다국적 기업들은 광고를 대행보단 광고 제작에 더 치중해 있다. 오프라인 매체보다는 온라인과 모바일 광고에 집중하고 있다.

 
▲ 표7) 휘닉스커뮤니케이션즈 연혁

‘표8’에서 보듯, 다국적 기업과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휘닉스커뮤니케이션은 2014년 소유지분을 다른 기업에게 매각했다. 회사를 설립할 당시부터 유지하고 있던 동일 지분 비율이 2013년부터 줄어들기 시작했다. 홍석규가 2014년까지 지분을 보유했다. 그 이후 그의 지분은 보이지 않는다.

 
▲ 표8) 대주주 변동 현황

중앙일보는 삼성과 무관한가?
지금까지 중앙일보의 미디어 사업 확장 현황과 주요기업의 소유구조를 분석했다. 그 결과 중앙일보는 2005년부터 2010년까지 홍석현이 소유지분과 경영권한 행사에서 주도권을 갖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하지만 2012년 이후 중앙일보 그룹의 사실상의 지주회사인 중앙미디어네트워크가 등장하면서 홍의 권한에 대한 의구심이 생긴다. 왜냐하면 이 지주회사에 대한 정보가 베일에 쌓여있기 때문이다. 2016년 중앙일보 그룹의 소유권을 분석해 보면 신문과 잡지 등 인쇄 매체를 총괄하는 중앙일보(32.86%), 영화 제작과 영화관사업을 통제하는 제이콘텐트리(21.39%), 방송사업을 총괄하는 JTBC(21.39%), 온라인 미디어 선두기업인 조인스(100.0%), 미디어 서비스를 책임지는 중앙판교개발(72.82%)가 최대주주이다. 즉 홍석현이 중앙일보 최대주주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사실상의 지주회사인 중앙일보미디어네트워크에 대한 지분 정보는 공개돼 있지 않다.

 
▲ 2016년 중앙일보 통제 라인. 그래픽=안혜나 기자

사실 중앙일보미디어네트워크는 2008년 중앙일보가 영어신문과 정기간행물을 발행하기 위해 중앙일보가 설립한 자회사다. 그런데 2010년 중앙일보사가 자산 약 6547억 원과 부채 5583억 원을 중앙일보미디어네트워크에 넘긴다. 그리고 2011년 유상증자를 실시했다. 이때 중앙일보와 CJ의 지분이 일부 줄어들었는데 그 뒤 2012년 중앙일보미디어네트워크가 최대주주로 등극한다. 1995년 삼성에버랜드에서 벌어졌던 일들이 2011년 중앙일보에서도 일어났다.
그렇다면 중요한 질문이 하나 떠오른다. 중앙일보는 홍씨 가문의 것인가라는 점이다. 서류상으로는 홍석현과 CJ그룹이 공동소유하고 있다. CJ그룹은 이재현이 통제한다. 그러므로 중앙일보는 홍석현과 이재현이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다고 설명할 수 있다. 물론 최대주주는 중앙일보미디어네트워크다. 홍석현과 이재현의 공조관계는 케이블 방송 회사인 ‘오리온시네마네트워크’와 ‘에이스토리’에서도 발견된다. 홍석현은 오리온시네마네크워크 지분을 2012년 매각했다. 이로인해 CJ와 사업적 협력관계가 단절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2013년 에이스토리 감사보고서를 살펴보면 양쪽 집안의 협력 관계가 유지되고 있음을 알수 있다. 2013년 지분 비율을 보면 중앙일보(8.32%)와 제이콘텐트리(8.32%) 그리고 CJ E&M(16.64%)이다. 2015년에는 2013년 지분에 보광 18호 콘텐츠조합(3.4%)과 보광 20호 청년창업투자조합(3.4%) 등이 더해진다. 즉 중앙일보와 CJ는 여전히 미디어 사업 협력자이다.

 
▲ 호암 이병철 선대 회장이 중앙일보 윤전기를 시찰하고 있다. 이병철 선대 회장(사진 오른쪽), 홍진기 전 중앙일보 회장(사진 왼쪽), 이건희 회장(이병철 회장 뒤), 이재용 사장(사진 가운데). 사진=삼성그룹

마지막으로 중앙일보가 삼성그룹과 무관하다고 확언하기 어려운 점이 중앙일보 중핵기업 이사진 명단에서 발견된다. CJ도 2000년대 삼성 비서실이나 구조본부 출신들이 CJ 미디어 계열사 경영 총괄을 맡고 있었다. 하지만 그 비중은 2010년이 넘어가면서 줄어들었다. 이와 달리 중앙일보는 그 비중이 줄어들지 않았다. 대표적인 사람이 이건희 삼성 회장의 고등학교 동창생이자 삼성그룹 비서실 출신이 홍석현 회장 측근에 배치돼 있다. 또한 재정을 감사하는 이사도 중앙일보 전반에 관여하고 있다. 특히 삼성그룹에서 분리할 당시 중앙일보에 배속됐다가 보광그룹으로 분할해 나간 휘닉스커뮤니케이션 등기 이사들이 삼성의 중핵기업 이사들이다. 이처럼 삼성맨들이 2010년 이후까지 중앙일보 주요기업 이사로 등재돼 있는 것으로 추정해 볼 때 중앙일보는 온전히 홍씨 가문의 것으로 확인할 수 없다.
즉 중앙일보는 1965년 이병철-홍진기가 협력해서 창간하고 기반을 구축했다면 2018년 이 회사는 이건희-홍석현이 복합 미디어 기업으로 공동 소유 운영하고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사카린 밀수 사건과 X-파일 보도로 본 삼성

한국 언론은 정파적이다. 정당의 정치적 입장을 지지하거나 언론사주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언론을 정파주의라 한다. 미국과 서유럽도 정파주의 언론역사를 갖고 있다. 이들은 20세기 초기부터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누군가의 이익만을 위하는 정파주의를 벗어 던지고 대중적 상업주의 언론으로 변모했다. 그 과정에서 객관주의, 전문가주의 그리고 공정성이라는 메이크업을 통해 대중지로서 거듭났다. 하지만, 21세기 한국 언론 수준은 세계 저널리즘 역사 속에선 100년 정도 뒤처진 모습이다. 그래서 한국 기자들은‘기레기’라고 불린다. 민주 공화정의 주인인 시민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고 특정 권력만의 입장을 보도하기 때문이다. 정치권력이 우위에 있을 땐 그들의 입장에서 곡학아세했다. 경제 권력이 언론을 지배할 때는 그들의 시각으로 뉴스 프레임을 만들었다.
권력에 능동적으로 순치되는 한국 언론의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선 한국 미디어의 역사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한국 신문은 1960년대 기업화 과정을 거쳤고, 1970년대는 대기업화 되기 시작했으며, 1980년대는 독과점화 시기였다. 이때까진, 언론에 대한 정치적인 영향력이 경제적 지배력을 압도했다. 이는 언론이 정치권력의 대변인이었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정치와 경제 권력의 우위는 1990년대부터 바뀌기 시작했다. 언론들은 1990년대부터 시장이란 허위의식 속에서 경쟁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1997년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한국 언론은 급속도로 자본 통제 영역으로 예속됐다. 한국 언론은 한국의 독점 자본인 재벌에 포획됐다. 사회현상이 소수의 기득권의 시각으로만 해석됐다. 이 과정에서 민주 공화국 시민들은 소외됐다. 그 결과, 한국 언론은 시민들에게 외면당하고 있다. 언론이 존재의 이유를 상실하고 있다는 뜻이다.
언론의 곡학아세 때문이다. 왜 이런 일들이 생겨났을까? 정치권력과 경제 권력의 힘의 우위는 지면과 화면에 어떻게 나타나는가? 1966년 발생한 삼성 사카린 밀수사건과 2005년 삼성 X-파일 사건 보도 분석을 통해 한국 언론의 정파주의 변천사를 살펴보자.
1964년 삼분폭리 사건과 삼성의 언론계 진출
박정희와 이병철은 서로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을까? 이맹희(1993년)가 이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그 대목만 읽어보자.
“박 대통령은 아버지(이병철)를 호사스럽게 자라서 사치스럽게 사는 사람 혹은 소비재 장사나 하는 사람으로 치부하고 있었고, 아버지는 박 대통령에 대해서 일본인이 새운 만주 사관학교를 나온 천박한 군인, 좌익으로 잡혔을 때 동지들을 배신한 ‘신의 없는 사람’으로 치부하고 있다. 여순 반란 사건 때 동료들을 배신했고 남로당에 가입했었으며 사상이 불온한 사람이라는 표현은 여러 번 들었던 항간의 이야기였다 (이맹희, 1933년 167쪽).

 
▲ 사진은 국내 공업단지 시찰을 하고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앞줄 왼쪽 두번째)과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앞줄 왼쪽 세번째).

하지만 박정희와 이병철은 속내를 한 번도 드러낸 적이 없다.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경제개발 집행자이자 그의 정치적 후원자로서 이병철이 필요했다. 이와 동시에 이병철은 그의 부를 지킬 정치적 후견인으로서 박정희 그늘이 필요했다. 이들은 서로 생존을 위해 공존하는 악어와 악어새 관계였다. 하지만 상하 구분은 분명했다. 금융과 자원의 배분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박정희가 이병철을 지배하는 관계였다.
이병철은 1960년대 초반이 악몽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 신문들은 삼성을‘소비재기업’, ‘반민족기업’, ‘밀수꾼’, ‘매판자본’으로 지칭했다. 이 호칭이 전혀 근거없는 것은 아니었다. 1960년 4월19일 혁명과 1961년 5월16일 군사 쿠데타를 거치면서 그는 대한민국 부정축재 처벌 1순위였다. 부정 축재자라는 오명과 함께 박정희 군사정권에서 가장 많은 벌금을 내야했고 그의 사금고나 마찬가지였던 3개의 시중 은행도 몰수당했다 (김주환, 2004년 428쪽). 이런 와중에 3분 (밀가루·설탕·시멘트) 폭리 사건이 터졌다. 이 사건은 미국이 원조물자 공급을 줄여 국민들이 식량난에 허덕이고 있을 때 삼성이 시장 가격 담합을 유도해 폭리를 취했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실체적 진실은 반만 진실이었다. 나머지 반은 박정희와 연관된 것이다. 공화당이 정치자금 상납을 조건으로 이병철 등 소수의 기업인들에게 설탕과 밀가루, 시멘트 산업에서 막대한 이윤을 축적할 수 있도록 특혜를 주었기 때문이다(문명자, 1999년 213쪽). 실제로, 그 당시 밀가루와 설탕, 시멘트 등 분말제품의 시중가격이 200~300%까지 폭등했다. 하지만 삼분폭리 사건에선 박정희 이름은 거명도 되지 않았다.
1964년 터진 이른바 삼분폭리사건을 겪으면서 이병철은 중앙 매스컴 설립을 서둘렀다. 그렇게 탄생한 언론사가 동양방송국과 중앙일보이다(서현진, 2003년). 이들 삼성 언론사들의 역할은 모기업 보호가 최우선 과제였다. 그들은 삼성 그룹에 관련된 비방 기사를 보호하는 방패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삼성 계열사의 각종 부정과 문의 사항을 해결했다. 또한 언론견제 및 재계 경쟁자 견제(예 삼양사-동아일보)역할 그리고 계열사의 민원을 해결하고 신규 사업을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김주환, 2004년/이시가와, 1988년). 한마디로 삼성의 언론사들은 민주 공화국 시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보다는 사주와 모기업 이익에 충실한 정파주의 언론사였다.
박정희와 이병철의 조직적 결탁 : 삼성 사카린 밀수사건
1966년 9월15일 경향신문은 ‘또 재벌 밀수’ 제목으로 삼성의 사카린 밀수사건을 보도했다. 이 보도는 경향신문이 처음 보도한 것이 아니었다. ‘표1’에서 보듯, 당시 부산에 있는 경남일보가 첫 보도를 했다. 하지만 삼성의 로비로 인해 전국적인 이슈가 되지 못했다. 이를 경향신문이 4개월 뒤에 보도하면서 사회적인 이슈가 됐다. 또한 사건 축소 의혹이 불거지면서 박정희가 재수사를 지시했다. 이로 인해 관련 공무원들이 구속됐고, 삼성오너 일가인 이병철의 아들 이창희씨도 구속됐다. 더욱이 이 사건으로 이병철은 삼성그룹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 표1) 사카린 밀수사건 보도 일지

 
▲ 1966년 9월15일 경향신문은 ‘또 재벌 밀수’ 제목으로 삼성의 사카린 밀수 사건을 보도했다. 사진=필자 제공

특히 삼성 사카린 밀수 보도는 재벌이 방송국을 소유할 경우 나타날 수 있는 폐해를 여실히 드러냈다. 삼성 계열사였던 동양방송이 편파적인 의견을 제시하고 불법행위를 비호하는 방송을 내보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TBC-TV는 1966년 9월18일 오전 9시30분 방영된 ‘일요 응접실’에서 “한 회사의 직원이 저지른 비행을 회사전체에까지 확대하여 생각하는 것은 옮지 않다. 일종의 라이벌 의식에서 신문이 과장 보도하지 않았나 한다. 이러한 현상이 지나치면 특정 재벌에 대한 증오감을 조장시키며 나아가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혐오감을 조성하지 않을까 염려된다”(강현두·이창현, 1987년 17쪽). 같은날 TBC 라디오 오후 10시30분에 방송된 ‘주간특집’에선“삼성재벌 전체가 마치 죄인인 것 같이 취급하는데 물론 범죄행위는 가증스러운 것입니다만 또 이것을 지나치게 확대하고 과장해서 전전하는 것도 안 좋지 않으냐? 오천만 달러를 투자해서 공사를 진행하고 있는 회사에서 불과 2만 달러의 밀수를 해가지고 법에 걸리고…불명예를 뒤집어 쓰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강현두·이창현, 1987년 18쪽). 또한 중앙일보도 삼성 사카린 사건을 축소 보도하기에 급급했다. 또한 삼성 사카린 밀수사건을 회사의 직원의 개인적 일탈로 규정하면서 사건을 축소 은폐하는데 앞장섰다. 1966년 9월22일 중앙일보는 이병철의 사퇴 주장을 1면에 실은 뒤 한 번도 한비사건을 1면 머릿기사에 배치하지 않았다(서현진, 2003년).

 
▲ 1966년 9월16일 중앙일보는 삼성의 사카린 밀수 사건을 보도했다. 사진=필자 제공

삼성은 또한 사카린 밀수 사건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인 국회의원 낙선운동도 전개했다. 이맹희(1993년)의 회고록을 살펴보자. “모두 5명을 대상으로 낙선 운동을 했는데 그 중 4명은 원했던 대로 국회의원 선거에서 떨어지고 한 명은 당선되었다 …중략… 당시 대구에서 출마한 이만섭 의원을 낙선시키기 위해서 나는 제일모직 임원들에게 특별 지시를 하고 대구로 파견한 중앙일보 기자들에게는 취재비를 1백만 원 더 주는 등 갖가지 조치를 다 취했다. 대구에는 삼성의 큰 공장들이 있었고, 또 삼성이 처음 기업을 만든 고향 같은 곳이어서 대구에서만은 우리가 반대했던 국회의원은 절대 당선시키지 말자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180~181쪽).
이처럼 삼성 오너 일가는 신문과 방송을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홍보지로 적극 활용했다. 여기에 보도를 통해 국회의원 선거에까지 개입할 정도로 언론을 사유화했다. 사회적 여론이 들끓었다. 심지어 박정희가 재벌 언론 소유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할 정도였다. 그 내용은 “삼성 재벌의 사카린 원료 밀수사건의 경우 밀수 행위가 분명하고 방법이 확실한데도 불구하고 산한 언론기관을 동원하여 불법과 부정을 비호하는데 급급한 인상을 준다. 사회 공기인 언론의 기본 사명을 저버리고 이에 역행하는 행위라고 볼 수 밖에 없고 어느 특정인이 언론을 독점 사물(私物)시 하는데서 오는 폐단을 막기 위해 제도상의 규제가 필요하지 않은가하는 문제를 생각하게 된다. …중략… 이러한 폐단을 막기 위해 법 테두리 안에서 재벌과 언론기관을 완전 분리할 수 있도록 규제할 수 없는가, 특정인이 여러 개의 언론을 독점, 소유, 경영할 수 없는가를 법무부 장관, 공보부 장관, 법제처장에게 연구하도록 지시했다”고 1966년 9월21일 발표했다.
이는 마치 박정희가 이병철을 비난하면서 자신은 도덕적 우위에 위치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체적 진실은 그렇지 않다. 이 밀수 사건은 박정희와 이병철 그리고 대한민국 관료들이 공모한 전형적인 정경유착 사건이었다. 사건 내면을 들여다보면 박정희의 위선과 이병철의 탐욕이 한꺼번에 드러난다.

 
▲ 1975년 5월22일 청와대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오른쪽)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가운데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 사진=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자세한 내용은 조갑제(2000년) 글을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당시 삼성이 한비 건설을 위해 일본 미쓰이 그룹으로부터 빌리기로 한 4200만 달러의 차관을 빌리기로 했다. 그 차관은 현금이 아닌 기계와 설비를 한비 측이 구매하는 형식이었다. 이에 따라 일본재벌 미쓰이는 관례대로 삼성 측에 100만 달러의 리베이트를 제공했다. 하지만 그 현금을 들여오기가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이병철은 박정희와 상의한 다음 리베이트 100만 달러어치 물품을 밀수하기로 했다. 정치자금 문제, 한비 건설 자금의 부족분 보충, 그리고 울산공단 건설용 기계류를 들여오는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삼성이 박정희 정권 측과의 합의하에 리베이트 100만 달러어치의 물건을 밀수하여 암시장에 내다 팔고 그중 일부를 정치자금으로, 나머지는 한비 건설에 내자로 쓰기로 했다는 것이다 (조갑제, 2000년 150쪽). 정부와 협의한 밀수 물품은 양변기·냉장고·에어컨·소화기·스테인리스판 등이었다. 외국에선 한화로 3만 원 정도면 구입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이를 한국 암시장에 내다팔면 10만 원 정도였다. 정부와 협의하지 않은 밀수품은 삼성 계열 공장 건설에 필요한 건설용 기계류, 정밀저울 그리고 두꺼운 강판을 굽힐 수 있는 기계류 등 이었다 (조갑제, 2000년 153~154쪽).
다시 말하면, 삼성 사카린 밀수 사건은 박정희와 이병철 그리고 대한민국 관료들이 결탁해서 벌인 범죄행위였다. 이에 대해 삼성 소유 언론사들은 사주의 이익을 대변하기에 급급했다. 이에 대해 박정희는 중앙일보와 TBC의 보도행태를 비난하면서 언론 길들이기에 나서는 계기로 활용했다. 이는 한국 언론이 정치와 경제 권력에 순치되면서 상업화의 길을 걸었음을 의미한다.
관례화된 정경유착 : 2005년 ‘삼성 X-파일’
1988년 5월 월간지 ‘신동아’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인터뷰 내용을 ‘이병철 삼성의 이미지 바꾸겠다’란 제목으로 보도했다. 이를 그대로 인용해 보겠다.
기자 = 요즘 화제가 되는 새마을성금이나 일해재단 등에의 출연으로 고통을 받은 일은 없습니까.
이건희 = 그것도 사회발전을 위한 하나의 과정이었다고 생각하면 안 될까요. 공공단체나 기업이 자진해서, 그러니까 기업의 경우 사회 환원이라는 차원에서 먼저 그런 활동을 지원하고 나섰더라면 문제가 안됐을 수 있지요.
기자 = 혹시 선친의 유언 가운데 한비와 동양방송(TBC) 복귀 문제가 없었습니까.
이건희 = 유언까지는 아니더라도 제 입장에서 언젠가 삼성에 다시 돌아와야 하는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당시 경제력으로 세계 굴지의 비료공장을, 그것도 얻기 어려운 차관을 끌어다 지어놓고 정치적 소용돌이에 말렸다는 게 애석하지요.
기자 = TBC는 어떻습니까?
이건희 = KBS에 통폐합된 것은 당시 정부 시책이었고 삼성은 거기에 협력했을 뿐입니다. 물론 이것도 선친의 심혈이 맺힌 결정체였고 또 단장의 심정으로 내놓아야 했던 만큼 어찌 미련이 없겠습니까. (민병문, 1988년 428쪽).
인터뷰 답변을 통해 두가지를 읽어 낼 수 있다. 하나는 삼성 이씨 일가는 정치권력과의 유착 관계에 대해 느슨한 입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 환원이란 용어를 통해 추론해 볼 수 있다. 또한 한국비료와 TBC에 대한 강한 애착을 읽을 수 있다. 이 회장의 바람은 실제로 모두 이뤄졌다. 1994년 한국비료는 민영화돼 삼성정밀화학으로 개명했다. 하지만 2015년 롯데그룹에 이를 매각하면서 애증의 한국비료는 삼성의 역사에서 사라졌다. 또한 삼성은 2010년 지상파 방송국처럼 보도와 예능 그리고 드라마까지 방영할 수 있는 방송국 허가를 받았다. 그 이름이 JTBC다. 추론컨대 이 이름은 TBC와 중앙일보의 J 영어 첫 자를 합친 글자로 보인다. 이는 삼성과 중앙일보가 역사적으로 연결돼 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또한 JTBC란 브랜드명은 한편으론 중앙일보와 삼성이 형식적으로 분리돼 있지만 실제론 하나의 재벌일 수 있다는 추론을 하게 한다. 실제 김용철(2010년)은 홍석현 회장의 중앙일보 지분은 이건희 회장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주주 명의자는 홍석현이지만 의결권은 이건희 회장이 행사한다는 비밀 계약서를 써줬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 계약서는 삼성만 갖고 있다고 서술했다(192쪽). 또한 김용철 변호사는 “중앙일보가 삼성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193쪽)고 단언한다. 왜냐하면 중앙일보는 삼성에 돈으로 종속돼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 김용철 변호사가 2007년 11월26일 서울 제기동 성당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삼성 비자금 관련 문건을 공개하며 관련 내용을 폭로하고 있다. 사진=미디어오늘

김용철의 주장은 2005년 삼성 X-파일이 보도 되면서 거짓이 아님을 증명했다. ‘표2’에서 보듯, 삼성 제국의 통제실인 구조본부를 책임지고 있는 이학수 삼성 부회장과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은 1997년 대통령 선거 관련 모임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논의된 내용은 △삼성, 100억 원대 대선 자금 전달 △삼성, 정기적으로 검찰 간부 뇌물 제공 △삼성, 국회에 자신들의 프락치 보냄 △삼성, 기아차 은행 대출금 수천억 일시 상환토록 정치권 로비 정황 등의 내용이 포함돼 있다(이상호, 2010년 10쪽). 하지만 이같은 삼성 X-파일의 내용은 보도 되지 못했다. 1966년 삼성 사카린 사건은 간헐적으로 실체적 진실을 그해에 보도했지만, 2005년 삼성 정경유착 보도는 진실에 다가가지 못하고 진실을 밝힌 기자와 국회의원만 처벌을 받았다. 삼성 돈이 사회정의를 처벌한 것이다.

 
▲ 표2) 삼성 X-파일 주요 일지
 
▲ 2005년 7월21일 조선일보는 ‘안기부, YS정부 때 비밀조직 운용 政·財·言 인사들 대화 不法도청’ 제목으로 삼성 X-파일 관련 첫 보도를 했다. 사진=필자 제공

심지어 이상호 기자는 삼성의 정경유착 비리를 취재한 뒤에도 약 10개월 정도 보도를 할 수 없었다. 그가 속했던 문화방송(MBC)의 내부 구성원들의 방해와 회사의 경영상의 이유 때문이었다. 삼성이 문화방송의 최대 광고주였기 때문이었다. 삼성의 돈이 신속성과 정확성이 생명인 언론 보도를 10개월이나 붙잡고 있었다.
실제로 삼성 돈의 영향력은 언론사의 뉴스 프레임에 그대로 반영됐는데 ‘표3’에서 보듯, 언론 지배구조에 따라 보도 프레임을 다르게 보도했다.

 
▲ 표3) 삼성 X-파일 언론사별 보도 프레임

김광원(2008년)이 2005년 7월21일부터 8월20일까지 보도된 스트레이트와 기획기사, 해설기사와 분석기사, 사설 컬럼을 분석한 결과 중 일부만 살펴보자. 1966년 삼성 사카린 밀수를 특종 보도했던 경향신문은 그동안 소유구조가 종교단체→재벌→사원지주제로 변했다. 삼성 X-파일을 보도할 당시 소유구조는 사원지주제였다. 이 신문이 선호한 뉴스 프레임은 제도 정비에 주안점을 뒀다. 보도 프레임도 조선일보에 비해 적었고 정경유착 보도 프레임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삼성과 적대적 관계를 맺었던 동아일보는 특이하게 2005년 정경유착 보도 프레임이 하나도 없다. 이는 동아일보 사주와 삼성가의 이건희 가문이 사돈관계를 맺은 것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오너의 특수관계자에 대한 직접적인 비난 프레임을 사용하지 않고 정치권력의 무능을 부각하는 불법도청 프레임을 가장 많이 사용했다. 특히, 삼성 X-파일의 직접적인 관계자가 연루된 중앙일보는 동아일보처럼 불법 도청 프레임을 가장 많이 사용했다.

 
▲ 2005년년 7월22일 중앙일보의 삼성 X-파일 첫 보도. 사진=필자 제공

즉 2005년 삼성 X-파일 사건은 한국 언론이 자본의 정파주의 수준에 머물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삼성이 돈으로 한국 사회를 유린하는 2000년판‘정경유착’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쫒기보단, 언론사의 생존적 현실에 매몰돼 있기 때문이다.

한국 미디어 시장 검열자 ‘삼성家’

삼성은 한국 상업 미디어 절대군주다. 삼성은 미디어 생산자이자 유통업자이며 상영자다. 동시에 삼성은 한국 미디어 돈줄이다. 삼성은 한국 여론시장에서 최대 광고주이고 투자자이다. 더욱이 삼성은 거의 모든 미디어 분야에 진출해 있다. 이들 기업은 각각의 영역에서 시장 점유율 1~2위를 차지한다. 이들 기업의 최대주주는 모두 삼성 창업자 이병철의 후손들이다. 삼성 이씨 일가가 한국인의 여론과 소비문화를 만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장의 게이트 키퍼이자 시장 검열자이다.
시장 검열자는 영국 미디어정치경제학자인 Murdock(1990) 회장과 미국 미디어 정치경제학자인 Schiller(1993)가 만든 개념이다. 미디어 시장화와 대형화가 추진되면서 문화재벌이 등장했다. 시장 검열자들이다. 이들은 강한 자금력을 기반으로 중소형 미디어 기업을 사들여 몸집을 키웠다. 이들은 지속적인 인수합병을 통해 시장 점유율을 높여 가면서 콘텐츠 제작과 유통 그리고 상영시장을 장악했다. 시장에서 소수의 기업만 살아남고 다수의 중소형 기업들은 시장 밖으로 쫓겨났다. 문화재벌들이 시장의 흐름을 장악한 것이다.
그 결과 미디어는 거대한 돈놀이 투기판이 됐다. 그리고 미디어 작품들은 대형화됐다. 동네의 독립 극장들은 사라지고 멀티플렉스가 관객을 독식했다. 이 같은 승자독식 현상은 신문과 유료방송 그리고 온라인 미디어 시장에도 그대로 재현됐다. 여론 시장은 보수 색깔로 변해갔는데 소비주의 화면만 가득했다. 사람들은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했는데 문화 재벌이 접근 벽을 설치했기 때문이다.
미디어의 중점이 수익에만 맞춰짐으로써 기업 내부 노동환경과 시장의 콘텐츠 흐름에도 영향을 미쳤다. 스프를(Schiffrin, 2006)이 연구한 출판재벌을 예를 들어 설명해 보면 문화 재벌들은 출판 제작 책임자들의 인사평가를 수익 비율과 일치시켰다. 이 결과 제작 책임자는 해고 당하지 않기 위해 그의 부하 직원들에게 돈이 될 수 있는 아이디어만 요구했다. 그리고 수익률이 낮은 책은 기획단계에서부터 제외했는데 가장 단기간에 수익을 낼 수 있는 아이디어만 상품으로 만들어 유통시켰다. 그래야만 다음해 재계약이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문화재벌은 시장의 흐름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그들은 출판시장에 직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통제하는 기업을 통해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정리하면 미디어 기업 내부의 인사통제권을 통해 시장의 표현의 자유를 통제한 것이다.
삼성미디어 제국의 완성
이 같은 시장 검열자 개념을 삼성에 적용해 보면 어떨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한 가지 의심을 제거해야 한다. 삼성미디어 제국이 실제적으로 존재하는가이다.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그렇다’이다. 실제 삼성은 2000년대 미디어 제국을 완성했다. 이병철 삼성 창업자는 1960년대 모기업 이익 확대와 사업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신문과 방송 사업에 뛰어 들었다. 그는 1970년대 삼성 제품의 이미지 향상과 소비자들의 수요관리를 위해 광고 대행사를 설립했다. 삼성 창업자는 1980년대 비디오 프로덕션과 컴퓨터통합시스템(당시 전산시스템)에도 진출했다. 창업자가 세상을 떠난 이후 그의 자손들은 1990년대부터 영화와 케이블 시장에 투자를 늘렸는데 다시 말하면 삼성은 신문 등의 인쇄매체, 광고·케이블·영화 등 영상매체, 온라인 게임을 포함하는 디지털 매체 등 우리나라 전 미디어 영역에 진출해 있다.

 
▲ 1965년 9월22일 이병철 삼성그룹 창립자가 중앙일보 창간호를 보고 있다. 사진=이병철 자서전 호암자전

삼성 창업자의 직계가족이 운영하는 미디어 회사는 디지털 미디어 기업 ‘삼성SDS’, 광고대행사 ‘제일기획(the Cheil)’, 유료방송사 ‘CJ E&M’, 영화 상영관 ‘CJ CGV’등이다. 그리고 창업자의 자녀들과 결혼함으로써 가족이 된 창업자 방계 가족이 운영하는 미디어 회사는 ‘중앙일보’다. 이들 미디어의 최대주주는 모두 삼성가(家)의 일원들이다. 삼성 일가가 직접 기업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출자순환구조라는 방식으로 수십 개의 미디어 계열사를 지배하고 있다. 삼성 계열 미디어 기업의 최대주주는 이씨 일가가 아닌 삼성 그룹의 중핵회사들이다. CJ그룹의 미디어 기업들도 지주회사인 CJ가 최대주주이고 이재현 회장이 일부 지분을 갖고 있다. 중앙일보 그룹은 홍석현 회장과 CJ 계열사가 공동으로 소유지분을 나눠 갖고 있다. 즉 명시적으로 보면 삼성그룹의 이씨 일가는 사촌인 CJ그룹이나 외사촌인 중앙일보 그룹 어디에도 지분을 투자하지 않고 있다. 대신 CJ와 중앙일보 그룹만 소유 지분을 공유하고 있다. 또한 이들 범 삼성가 미디어 기업 이사회는 모두 모기업 총수에게 발탁된 삼성맨이나 CJ맨들이 관여하고 있다. 이재현과 그의 가족들은 CJ 중핵기업의 이사회 임원으로 의사 결정 과정에 관여하고 있다. 홍석현과 그의 가족들은 중앙일보 계열사 이사회 임원으로 등록돼 있다. 중앙일보는 특히 삼성그룹 출신의 경영전문가들이 홍석현 회장과 이사회를 공유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삼성은 ‘미디어제국’을 건설했다. 삼성과 CJ 그리고 중앙일보가 연합한 형태다. 이들 3개의 기업들은 사업 영역이 겹치지 않는다. 삼성 그룹은 디지털 미디어와 광고사업에 관여하고 있다. 중앙일보는 여론형성과 유료방송과 영화 상영관 사업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CJ는 유료방송, 영화, 대중음악 그리고 온라인 게임 사업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들 각각 기업들의 시장점유율은 중앙일보 신문시장 점유율만 제외하곤 모두 1등이다. 한마디로, 삼성가(家)는 한국 미디어 시장 검열자다.
삼성의 미디어 검열 방식
삼성이 미디어를 검열하는 방식은 시장을 통해 크게 4가지이다. 첫 번째는 광고를 통한 방법이다. 두 번째는 언론인의 인맥 활용이다. 세 번째는 기자들에 대한 법적 소송이다. 마지막으로 미디어 기업을 통해 시장의 흐름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방식이다. 삼성이 활용하는 이 방법은 개별적으로 사용하는 경우만 있는 것은 아니다. 동시에 여러 개를 사용하기도 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2005년 삼성 X-파일 사건과 2006년 시사저널 사건 그리고 유료방송 간의 재송신 분쟁으로 인한 블랙아웃 사태 등의 사례들을 들어 설명하겠다.

 
▲ 2007년 1월24일 안철흥 당시 시사저널 노조 위원장이 시사저널이 입주해 있는 서울 충정로 청양빌딩 앞에서 열린 직장폐쇄 규탄 기자회견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먼저 광고를 통한 미디어 통제방식에 대해 논해보자. 사실 삼성 가문은 우리나라 최고 부잣집이다. 표1에서 보듯, 국내 200대 대기업 중 삼성 가문이 차지하는 자산 비중은 1987년 5.30%에서 2012년 19.10%로 증가했다. 이 수치는 중앙일보를 제외한 범 삼성가의 자산 규모이다. 1987년 약 5% 정도에 그치던 삼성의 자산 비중이 1997년 금융위기 이후 급속도로 증가했다. 삼성의 자산이 늘어난 만큼 다른 재벌들의 자산을 줄어들었다는 의미이다. 즉 재벌들 간의 생산력 불평등이 심화됐다.

 
▲ 표1) 200대기업 중 삼성 가문의 자산 비중

범 삼성가의 자산이 늘어났다는 의미는 미디어 산업에서 삼성가의 영향력이 증가했다고 풀이할 수 있다. 한국 광고시장의 최대 고객은 중소기업이 아닌 재벌인데 특히 재벌 중에서 소비재를 주로 제작 판매했던 삼성은 1970년대 초반부터 광고비를 지속적으로 지불해왔다. 그리고 삼성광고 영향력은 미디어 기반이 박정희의 정치권력 통제 방식에서 시장중심으로 바뀌면서 더 확대됐다.
언론사는 수익의 최소 80%를 광고에 의존하고 있는데 이로인해 언론사들이 자발적으로 광고주에 부정적인 기사를 억제하고, 우호적인 기사를 양산하는 내적통제가 심각한 실정이다. 신문사의 내적통제는 기자들의 자기검열로 이어져 신문의 기업 감시 기능이 크게 악화됐다. 이는 기자들이 광고주인 재벌에 부정적인 기사를 쓰기보다는 홍보성 기사에만 더 매달린다는 의미이다(배정근, 2010). 이 같은 언론의 광고 종속화 경향을 일컬어 프로모셔날 저널리즘(promotional journalism)이라 부르는데 광고주에 호의적인 기사를 더 많이 보도하고 부정적인 뉴스를 보도하지 않는 언론계의 행태를 일컫는 말이다. 이는 협찬언론 또는 광고언론으로 번역할 수 있다.
김상조·이승희(2015)가 발표한 표2와 표3의 자료는 4대 재벌의 광고비 지출 분석 자료는 시청률조사업체인 닐슨코리아의 광고비 데이터를 이용해 전체 광고시장에서 4대재벌이 차지하는 비중과 추이, 주요 언론사별로 광고매출에서 4대 매출이 차지하는 비중, 4대 재벌의 언론 광고비 집행 특성 등을 분석한 것이다.
표2에서 보듯, 재벌그룹의 상층부에 속하는 삼성과 현대차, SK 그리고 롯데는 한국 상업 미디어 시장을 지탱하는 최대 광고주들인데 이들은 이성적인 특성을 갖고 있는 인쇄매체보다 감성적이고 즉각적인 반응을 유도하는 영상매체에 더 많은 예산을 지원하고 있다.

 
▲ 표2) 2014년 4대 재벌의 매체별 시장 점유율

표3에서 보듯, 이들 4대 재벌 중 삼성이 여론 형성 영향력이 큰 지상파 TV와 신문 시장에 더 많은 비용을 지출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삼성은 보수성향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그리고 중앙일보 등에 전체 신문 광고비중 약 33.06%를 지원하고 있다. 이들 3개의 신문사의 시장 점유율은 2003년 70%에 육박했다. 정부가 그 이후의 신문 시장 점유율을 발표하지 않고 있어 정확한 통계를 알 순 없지만 삼성이 조중동에 지속적으로 많은 광고비를 집행하는 것으로 추론해 봤을 때 이들의 시장 점유율은 줄어들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 된다.

 
▲ 표3) 삼성그룹의 매체별 광고시장 점유율

두 번째 삼성이 미디어를 통제하는 방식은 인맥 활용이다. 한국의 파워 엘리트들을 범 삼성계의 사외이사로 초빙하는 방식이다. 전형적인 방법이다. 중앙일보와 CJ 그리고 삼성의 미디어 관련 회사에는 우리나라 검찰청과 공정거래위원회 그리고 청와대 출신들이 사외이사로 임명된다. 삼성은 이사회를 권력층과 인맥 쌓기 장소로 활용하고 있다.
이와 반대되는 경우도 있다. 삼성맨을 정부 고위직에 진출시키는 방법이다. 1999년 이후 도입된 개방형 직위제를 활용하는 방식이다. 삼성SDS를 예를 들어 설명하겠다. 이 기업의 시스템 통합(SI)으로 수익을 내는 기업이다. 고객 기업이 필요로 하는 정보 시스템에 관한 기획에서부터 개발과 구축, 운영까지 모든 서비스를 제공한다. 삼성SDS의 주요 고객은 정부 기관이다. 예를 들면 국세청 전산망을 구축하는 것이다. 국세청 전상망은 우리나라에서 정보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시스템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개인과 법인이 수행하는 경제활동 정보가 모두 여기로 모인다. 국세청 대표적 개방직인 전산정보관리관으로 처음 채용된 사람은 이○○다. 삼성전자반도체 총괄팀장을 지내다 국세청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삼성SDS 컨설팅사업부를 시작으로 삼성그룹 Y2K 지원팀, 정보 전략팀 등에서 일했다. 그는 공직이 끝난 이후 다시 삼성으로 돌아갔다(한상진, 2013).
삼성맨은 또한 정계에도 진출해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고흥길 전 한나라당 의원이다. 중앙일보 편집국장이자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의 비서실장 출신 고흥길은 지난 1997년 당시 여권후보인 이회창의 특보 자격으로 언론 홍보 업무를 담당했다 (안기석, 1999, 128p). 그 이후 그는 한나라당 성남시 분당구 갑을 선거구로 갖고 3선 국회의원이 됐다. 특히 2008년 신문과 방송 겸업을 허용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미디어법을 개정할 때 그는 관련 법안을 다루는 상임위원회의 책임자였다. 중앙일보 출신의 국회의원이 중앙일보 종합편성방송국을 허용하는 법안을 처리하는 국회 상임위 책임자였다는 의미이다.
언론계에도 삼성맨들이 있다. 대표적인 사람이 금창태 전 시사저널 사장이다. 중앙일보 공채 1기 출신인 그는 2003년부터 시사저널 사장으로 부임했다. 그는 2006년 시사저널 사태를 일으킨 장본인이다. 이 사태는 금 사장이 시사저널 870호에 실릴 ‘2인자 이학수의 힘 너무 세졌다’라는 삼성 관련 기사를 인쇄과정에서 직권으로 삭제하면서 시작됐다. 금창태 사장은 당시 기사를 쓴 이○○ 기자를 불러 “이학수 부회장은 내개 대학(고려대) 후배다. 서로 도움을 많이 주고받았다. 기사 좀 빼자”고 말했다고 한다 (최을영, 2007, 58P). 이에 반발하는 시사저널 편집국 구성들에 대해 그는 해고와 징계를 남발했다. 기자들이 파업을 이어가자 금창태는 2006년 8월9일 중앙엔터테인먼트&스포츠(JES) 등과 업무협약을 했다. 이 회사는 연예계와 스포츠 뉴스를 생산하는 중앙일보 계열사이다. 또한 그는 시사저널 사태를 비판적으로 보도한 언론사들과 언론인들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 시사저널이 ‘삼성 기사 삭제’ 사건으로 촉발된 편집권 문제로 노조가 파업에 돌입하고 사측이 직장 폐쇄로 맞서는 등 분란을 겪자 2007년 2월6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금창태 시사저널 사장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연합뉴스

삼성이 자사 출신 언론인들을 통해 영향력을 확대하는 방법만 쓰는 것은 아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는데 현재 삼성그룹 언론 담당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전 문화방송 앵커출신이자 부국장이었던 이인용씨가 그 예이다. 그는 2005년 문화방송에서 삼성 구조본부로 자리를 옮겼는데 당시 삼성 X-파일이 사회적 파장을 낳고 있을 때였다. 이때는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과 이학수 삼성그룹 부회장이 1997년 대통령 선거에 자금을 불법적으로 지원하고 검찰들에게 명절 선물을 지급하는 것에 대한 대화 내용이 ‘삼성 X-파일’로 불리며 보도가 한창일 때였다. 이인용은 이상호 기자의 취재 보고라인 선상에 있었다(이상호, 2012).
더 최악의 경우도 있다. 삼성 직원이 문화방송 보도국의 인트라넷을 들여다 본 사건이다. 뉴스시스템을 관리해온 A씨가 2007년 회사를 떠나 삼성으로 자리를 옮긴 전직 기자 B씨(삼성경제연구소 근무)에게 정보를 유출한 사건이다. 문화방송 기자 출신의 B씨는 삼성경제연구소에서 문화방송 기자 등을 상대로 삼성그룹 전반과 관련한 홍보·언론대응 활동을 했다 (조혜정·김보협, 2010).
삼성이 미디어를 통제하는 세 번째 방법은 전략적 봉쇄소송 (Strategic lawsuit Against Public Particiation: SLAPP). 삼성에 비판적인 기사를 작성하는 언론인이나 언론사들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함으로써 사건 당사자와 주변인을 위축시킨다. 이 소송은 몇 가지 효과를 가져 올 수 있다. 첫 번째는 비판자를 위축시키는 효과다. 두 번째는 비판에 대한 관심을 재판으로 전환시킴으로써 비판 기사 불끄기 효과가 있다. 또한 논쟁의 장소가 여론이라는 공적 장소에서 사법부로 옮겨짐으로써 비판 여론 확산을 저지할 수 있다(김명수, 2010). 삼성은 삼성 X-파일을 보도했던 이상호에게 소송을 제기했다. 2005년 7월21일 삼성그룹의 이학수 본부장과 홍석현 당시 주미대사는 문화방송을 상대로 보도금지가처분신청을 냈다. 이로 인해 테이프의 내용은 직접 방송에서 보도되지 못했다. 유사하게 금창태 사장은 시사저널 사태를 보도했던 비판적 언론사들에게 전략적 소송을 제기했다.
마지막으로 삼성이 미디어를 통제하는 방식은 계열사를 활용하는 방법이다. 이는 고전적인 방법이다. 중앙일보를 통해 1965년 삼성 사카린 밀수사건이나 2005년 삼성 X-파일 사건에 대응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중앙일보는 사카린 밀수 사건을 이씨 일가와 박정희의 결탁에 의한 밀수사건이라는 본질을 보도하지 않고 삼성 직원의 개인적인 일탈로 몰아갔다. 중앙일보는 40년 뒤에도 삼성의 이익에 더 치중했다. 심지어 보도 초기부터 삼성그룹의 불법적인 행위에 대한 비판은 하지 않고 제도 미비를 강하게 비판했다. 또한 이씨 일가는 광고 계열사를 여권 후보 이미지 작업에 활용했다. 1997년 삼성그룹 소속이었던 피닉스커뮤니케이션은 당시 이회창 여권 후보에 대한 이미지 만들기에 관여했다. 여기에 들어간 비용은 모두 삼성측이 지급했다(이상호, 2012).

 
▲ 표4) 2013년~2016년 극장별 매출액 기준 시장점유율

영상매체 분야에서 삼성미디어가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법은 시장구조 장악을 통한 가격통제이다. 표4에서 보듯, CJ와 중앙일보 자회사인 메가박스의 시장 점유율은 약 66%가 넘는다. 관객 한 사람이 영화비 1만 원을 지불하면 6700원이 이씨 일가 주머니로 들어간다.

 
▲ 표5) 평균 관람 요금

표5에서 보듯, 멀티플렉스가 도입된 1998년 이후 영화 관람료는 꾸준히 인상돼 왔다. CJ가 멀티플렉스를 우리나라 최초로 도입했다. 2005년이후 단성사 등 독립적인 영화관들은 새로운 영화 배급을 받을 수 없어 재벌의 위탁회사로 들어갔다. 재벌 3사에 의한 영화시장 독과점을 방치한 결과다.
마지막으로 유료방송의 블랙아웃 사태다. CJ는 유료방송의 케이블-위성방성-IPTV의 피라미드 시장구조에서 최상층부인 케이블 최강자이다. 또한 지상파의 컨텐츠 공급 없이도 케이블 채널을 운영할 수 있는 컨텐츠계의 제왕이다. 이같은 막강한 시장 장악력을 바탕으로 유료 서비스의 가격을 통제하고, 다른 유료방송 시장에 컨텐츠를 공급하지 않아 채널이 블랙으로 방송되는 블랙아웃 사태를 야기해 사회적 물의를 빚기도 했다.

시장이 미디어를 자유케 하리라, 단 삼성 안에서

한국 미디어는 군사정부와 재벌의 후원 아래 성장했다. 여론형성에 중대한 역할을 담당하는 신문과 방송기업들은 독재자와 재벌 사주의 대변인 노릇을 하면서 미디어 기업으로 성장했다. 여론시장을 재정적으로 후원하는 역할을 하는 광고기업은 재벌의 사업 다각화와 연관돼 있다. 재벌들이 1970년대 중화학 공업과 전기전자 영역까지 사업 영역을 확대하면서 제품 홍보 필요성이 대두됐기 때문이다. 광고주인 재벌이 더 많은 제품을 팔기 위해 광고 산업에 진출했다는 의미이다. 대중문화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영화산업은 시장주의가 도래한 1980년 이전까지 정부의 지원 아래 성장했다. 중소기업 보호 업종으로서 정부의 보이지 않는 지원을 받았다. 그 당시 재벌들은 영화시장에 진출하지 않았다.
신문과 방송 그리고 광고, 영화산업은 1980년 후반부터 시장주의란 낯선 체제를 만났다. 자유로운 경쟁이 기업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신자유주의가 냉전체제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이념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신문 산업이 시장 경쟁체제에 가장 먼저 노출됐다. 시장 진입 장벽이 완화되면서 다양한 소유구조 형태의 신생 신문사들이 생겨났다. 독재정권 지원 아래 독점 자본으로 성장한 소수의 대형 신문사와 신규 사업자 간의 생존경쟁이 시작됐다. 영화와 광고 산업의 시장화는 외부에서 불어왔다. 미국이 한국 시장 개방을 요구하면서 이 두 시장의 개방화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때 미국 할리우드가 직접 한국영화 시장에 작품을 배급하기 시작했는데 영화 개방화 흐름과 동시에 외국 광고회사들도 한국 시장에 진출했다. 서서히 자유화 바람이 한국 경제와 미디어 산업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이 개방화 추세는 1990년 한국 미디어 시장을 완전 경쟁체제로 바꿔 놨다. 시장의 자유가 미디어를 자유롭게 한다는 시장주의 신화가 시작됐다.

 
▲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사옥. ⓒ 연합뉴스

정부 주도 미디어 시장화
1980년 중반부터 미국과 영국 등 신자유주의 주도국들이 아시아 국가들에게 공통적으로 시장 개방을 요구했다. 이들은 보험과 은행 등 금융 시장 개방과 함께 미디어 기업 소유규제 완화 그리고 방송과 통신의 민영화를 요구했다. 시장 개방이 각국의 경제 효율성을 향상 시킬 것이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냉전체제가 사라지고 시장주의가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 정부도 이 같은 세계 개방화 흐름 속에서 부응했다. 한국통신 민영화 정책을 1980년 후반부터 시작했다. 동시에 군사기술로 사용됐던 디지털 기술들을 시장에 개방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온 최초의 상용 서비스가 PC 통신이다. 1993년 케이블 TV를 도입했고 영화 산업 수익성에 대한 국가 프로젝트도 진행됐다. 하지만 정부가 본격적으로 미디어 규제 완화를 실시한 것은 아니었다.
결정적인 계기는 1997년 한국 금융위기였다. 한국은 위기 극복을 위해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IBRD)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그 돈은 조건을 달고 왔다. 금융 시장 자유화 조치 확대와 기업 소유규제 완화였다. 새로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국가부도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이 조건들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로 인해 도입된 제도들이 기업 간 인수 합병 허용, 신주인수권부사채(BW) 발행 허용, 외국인 등 대자본의 지분 한도 확대, 노동시장 유연화 등의 내용이었다. 이 같은 경제자유화 조치들은 미디어 기업들에도 적용됐다.
한국 미디어 시장주의는 국가가 주도했다. 정부는‘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라는 원칙을 갖고 미디어를 차세대 국가 산업으로 육성했다. 미디어 지원 법을 통해 인력과 자금을 공급하고 새로운 미디어를 지속적으로 공급했다. 이를 위해 미디어 산업 헌법이라 할 수 있는 문화산업기본법을 제정했다. 이 법은 정부가 국가 예산의 최소 1%를 미디어 문화산업에 투자하도록 허용했다. 또한 미디어 기업을 벤처기업으로 지정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그리고 정부는 미디어 분야로 자금이 투자 될 수 있도록 미디어 벤처 자금 조합을 활성화했다. 여기에 미디어 인력 육성 정책에도 많은 예산을 투여했다. 즉 정부는 미디어 제작 산업 육성의 기획자이자 후원자였다. 이는 박정희 군사정부가 경제 개발 정책을 통해 한국 제조업을 육성시켰듯이 정부가 시장주의 이념을 미디어 제작 산업에 응용 적용한 것이다. 미디어 작품을 시장에 공급하기 위해 제작 자금과 인력에 대한 부분을 정부가 육성한 것이다.
정부의 지원 정책은 예술적 재능과 열정을 갖고 있는 젊은 창작자들을 미디어 산업으로 유인하는 효과를 낳았다. 열정있고 재능있는 젊은이들과 기존 충무로 영화인들이 결합하면서 한국영화 르네상스 시대를 맞았다. 이들은 진출한 분야는 영화 제작과 배급 시장이다. 대표적인 기업이 ‘명필름’과 ‘시네마서비스’ 등이다. 이들은 점차 시장 점유율을 넓혀갔다. 케이블 프로그램 공급자들도 영화 제작 시장 상황과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이렇게 영화와 케이블 등 영상 제작 시장은 젊은 영상인들의 열정으로 생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정부는 미디어 산업 유통과 상영시장 육성을 위해 대자본을 끌어들였다. 정부의 지원 아래 한국 독점 자본으로 성장한 재벌은 미디어를 새로운 수익모델로 인식하면서 시장에 진출했다. 삼성과 LG 그리고 현대그룹 등 상위 재벌들은 영상 제작 사업과 케이블 TV 사업에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상위 재벌들은 1997년 금융위기 이후 시장에서 물러났다. 상위 재벌들이 물러난 영상 산업 시장에 중급 재벌들이 진출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재벌기업이 CJ와 동양그룹이었다. 이들 기업들은 외국자본과 함께 시장에 진출했다. 일정 지분을 투자받으면서 동시에 미디어 경영 노하우를 배웠다.
특히 정부는 새로운 미디어 도입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2000년 통합 방송법을 제정한 뒤 디지털 위성방송을 도입했다. 2005년 방송통신 융합 매체는 위성이동방송(DMB)을 도입했고 2008년에 인터넷방송(IPTV)을 허용했다.
다시 말하면 한국 정부는 미디어를 차세대 국가 산업으로서 육성하면서 동시에 시장 경쟁 개념을 미디어 산업에 도입했다. 시장의 흐름에 직접적으로 개입하기보단 산업을 지원하고 육성하는 후원자적 입장을 취한 것이다. 시장의 자유로운 경쟁이 효율성을 보장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시장은 미디어를 자유롭게 했는가?
신자유주의 미디어 법과 정책은 시장 집중화를 심화시켰다. 소수 기업의 시장 지배력이 강화되면서 건실한 중소형 기업들이 몰락했다. 한국 사회 여론 형성을 담당하고 있는 일간 신문시장 중에서 조중동으로 일컬어지는 조선일보, 중앙일보 그리고 동아일보 등의 시장 점유율은 2009년 중반에 70%에 육박했다. 표1에서 보듯, 이때 일간지 기업 숫자가 2001년 123개에서 2015년까지 383개까지 증가했지만, 한국 여론은 3개의 신문사에 의해 장악되고 있다.

 
▲ 표1) 일간지 등록변동 현황

조중동은 수구 보수적인 담론을 주로 보도하는데 이들로 신문 시장이 개편된 것은 광고주들이 이 3개 신문사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 신문시장의 보수화를 광고주들이 지원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신문시장 지배자와 광고주와의 유착관계는 커런과 시튼(Curran & Seaton, 2003)의 연구에서도 나온다. 영국신문 시장이 경쟁체제에 돌입하자 광고주들이 매체 노출 빈도가 낮다는 이유로 진보적이고 급진적인 신문매체에 광고지원을 중단함으로써 신문 여론 시장의 급진성을 위축시켰는데 이와 비슷한 현상이 한국 신문시장에서도 나타난 것이다.
광고주의 위력은 한국 미디어 시장이 상업주의로 완전히 전환됐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신문과 유료방송을 포함하는 방송사들의 수익구조가 구독료나 청취료보다는 광고 수익에 더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표2에서 보듯, 한국 미디어 시장의 광고비는 꾸준히 증가해 왔다. 1999년 1조 원에 못 미치던 광고 매출액수가 20년이 지난 후에는 10조 원을 넘어섰다. 광고비는 주로 올드(Old) 미디어라 불리는 신문과 지상파 TV보다는 뉴(Nes) 미디어인 케이블 방송과 IPTV 그리고 온라인 등 디지털 영상 매체에 집중됐다. 기존 미디어 최대 강자인 신문의 광고 매출액은 지난 20년 동안 변화하지 않고 있다. 신문시장이 조중동 쏠려있는 상황을 고려한다면 신문 광고의 대부분도 조중동에 집중했다고 추론할 수 있다.

 
▲ 표2) 주요 매체 광고 매출액 변화 추이

상업 미디어를 지배하는 광고시장은 10개 기업이 장악하고 있다. 표3에서 보듯, 이들 10대 광고대행사의 시장 점유율은 1999년 69.3%에서 2014년 94.9%까지 증가했다. 이들 광고대행사들은 대부분 한국 상위재벌 계열사들이다. 광고시장 업계 1위인 제일기획은 삼성그룹 소속이고, LG애드와 이노션은 LG그룹과 현대그룹 소유다. 대홍기획은 롯데그룹에 속해있고 휘닉스커뮤니케이션은 2013년까지 중앙일보와 일본 덴츠그룹이 공동으로 소유했다.

 
▲ 표4) 1999년~2014년 10대 광고대행사 시장 점유율 변화 추이

시장의 독과점 상황은 피라미드 유료방송 구조에서 최상층에 위치한 케이블 시장도 유사한 양상이다. 프로그램을 공급하는 제작자들은 경쟁상황을 유지하고 있는 것과 달리 소비자들이 직접적으로 유료방송을 소비하기 위해 가입해야하는 유선방송 망사업자의 경우 과점 현상이 심각하다. 소수의 재벌과 외국인들이 장악하고 있는 케이블 시장은 이미 독과점 상태이다. 표4에서 보듯, 케이블 프로그램 공급자중 5개 기업의 시장 점유율이 약 60%에 육박한다. 그 이후 시장 상황에 대한 자료가 공개되지 않아 변화추이를 알 순 없지만, 케이블 콘텐츠 시장의 절대 강자는 CJ다.

 
▲ 표4) 2008년~2009년 MPP 현황

표5에서 보듯, 8개의 케이블 망 사업자가 약 83% 전체 시장 점유율을 보이고 있다. 즉 소수의 기업들이 케이블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케이블 독과점 망 사업자들은 재벌 소속(티브로드(T-broad), CJ, 현대HCN, GS)이거나 외국계자본 사모펀드(C&M (현재 딜라이브)) 소유다.

 
▲ 표5) 2008~2009년 주요 MSO 현황

영화 시장의 흐름을 좌우하는 유통과 상영시장은 케이블망 사업자보다 독과점 상황이 더 심각하다. 표6에서 보듯, 2001년 영화 유통기업 1위는 영화인들이 주축이 된 ‘시네마 서비스’였다. 하지만 이 기업은 2005년 CJ에 인수합병 되면서 회사 브랜드인 ‘시네마 서비스’ 이름만 남았다. 오리온 ‘쇼박스’와 롯데 ‘롯데엔터테인먼트’는 모두 한국 재벌 기업들이다.

 
▲ 표6) 상위 5위 영화 배급 업체 시장 점유율 (2001년~2010년)

표7에서 보듯, 한국 상영관은 모두 재벌 소유다. CJ는 CGV를 롯데는 롯데시네마를 그리고 중앙일보는 메가박스를 지배하고 있다. CJ가 우리나라 최초로 복합상영관인 멀티플렉스를 1999년 도입한 이래 20년만에 이들 3개 재벌의 시장 점유율이 97%에 육박한다.

 
▲ 2016년 4월11일(현지시간) CJ CGV가 나흘간 미국 라스베이거스 시저스 팰리스 호텔에서 개막된 ‘2016 시네마콘’(CINEMACON)에 처음으로 회사 브랜드를 내걸고 참석했다. ⓒ 연합뉴스
 
▲ 표7) 2013년~2016년 극장별 매출액 기준 시장 점유율

다시 말하면 한국 상업 미디어 시장은 소수의 기업에 의해 지배되는 과점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시장이 자유로운 경쟁을 촉진하기보단 소수의 기업이 시장 구조를 장악하고 있다. 신문시장은 조중동이, 광고회사는 상위 재벌 소속의 광고대행사가, 케이블 방송시장은 CJ와 태광그룹이, 영화시장은 CJ와 롯데 그리고 중앙일보가 통제하고 있다. 특히 한국 미디어 시스템이 상업 미디어 체제로 바뀌면서 광고주들의 영향력이 확대됐다. 이는 한국 미디어 시장을 재벌이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미디어 인쇄와 영상 시장에서 기업을 운영하면서 동시에 광고주이기 때문이다.

 
▲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사옥. ⓒ 연합뉴스

삼성, 가족 독과점 미디어
삼성은 재벌 그룹 중 가장 오랫동안 그리고 지속적으로 미디어 사업을 소유 경영해 왔다. 군사 독재 정권 시절에도 신문과 방송 그리고 광고회사를 운영해 왔다. 이 시절 삼성미디어는 모기업에 대한 방파제 역할을 담당했다. 그룹 내 각종 부정과 민원을 해결하는 창구 역할을 담당했고 각 언론 기관을 비롯한 재계의 경쟁자를 견제하는 역할을 맡았다(이시가와 요이찌, 1988년 81쪽).
정치권력이 군부에서 선출권력으로 넘어간 이후에도 삼성은 미디어 사업을 확장했다. 시대의 요구를 견인하기보다는 삼성 오너 일가는 국가 정책 흐름에 맞춰 미디어 사업을 확장했다. 김영삼 정부가 케이블 유료방송을 도입할 때 케이블 시장에 삼성과 당시 삼성 계열사였던 CJ가 함께 진출했다. 광고시장을 개방하기 시작할 때 삼성그룹 소속 제일기획은 미국계 광고회사와 함께 제일-보젤을 1989년 설립했다. 광고 시장을 완전 개방한 1990년 중반 당시 삼성그룹 소속이었던 중앙일보는 일본 덴츠사와 함께 휘닉스커뮤니케이션을 설립했다. 1990년 중반 CJ는 또한 미국 할리우드 스튜디오와 아시아 독점 계약을 맺었고 호주 영화 회사와 함께 멀티플렉스를 함께 건립했다. 이는 삼성 미디어 사업 확장기는 이병철의 삼성그룹이 이건희의 범 삼성그룹으로 분화하는 과정과 맞물려 일어났다. 이건희는 1990년대 금융 자유화 바람을 타고 이병철의 삼성 그룹을 6개의 그룹으로 나눴다.
이중 삼성과 CJ 그리고 중앙일보가 미디어 사업을 지속했다. 이들 3개 그룹이 소유 경영하고 있는 미디어 영역은 디지털 기획 및 장비 설치, 신문, 잡지, 광고, 케이블, 온라인 게임, 영화, 대중음악 등이다. 이들 기업들은 서로간의 사업 영역을 존중하면서 각자의 영역을 지키고 있다. 다만 영화시장에서 CJ와 중앙일보가 시장 점유율을 나눠갖고 있다. 즉 삼성은 한국 미디어 산업의 투자자, 제작자, 유통업자, 상영자, 그리고 건설자이다.
삼성은 한국 디지털 사업을 기획하고 정보통합 장치를 한국 공공기관과 금융기관에 설치했다. 한국 사이버 산업 설계자이자 건설자이다. 한국 최대 광고주인 삼성은 또한 제일기획을 통해 여론과 대중문화 시장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삼성 SDS와 제일기획이 대표적인 기업이다. 이들 기업들은 모두 이씨 일가가 지배하는 피라미드 구조의 그룹의 출자 순환 소유 구조와 연결돼 있다.
CJ는 케이블과 영화시장에 집중하고 있다. 영화와 만화, 게임, 대중음악 그리고 여성·생활 관련 케이블 채널을 운영하고 있는 CJ는 유료방송업계의 콘텐츠 제왕이다. 이 기업은 또한 한국 영화산업의 가장 큰 제작 자금원이며, 유통업자이자 상영기업이다. 한국 영상시장의 입출입을 통제할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 CJ E&M과 CGV 그리고 CJ헬로(인터넷) 등이 대표적인 기업들이다. 이들 기업들은 CJ그룹의 출자순환구조와 연관 돼 있다. 이병철 삼성 창업자의 손자인 이재현이 CJ그룹의 최대주주이다.

 
▲ 왼쪽에서부터 쇼박스, CJ, 롯데, 메가박스 로고. 그래픽=안혜나 기자

CJ는 중앙일보 그룹의 대주주다. 삼성 2대 총수인 이건희의 처남인 홍석현이 대주주인 중앙일보는 일간지 등 인쇄매체와 종합편성케이블방송, 영화 제작과 상영관 사업을 하고 있다. 2013년까진 휘닉스커뮤니케이션이란 브랜드로 광고 대행업도 홍씨 형제들이 소유 경영했다. 중앙일보의 소유구조는 홍석현, 중앙미디어네트워크 그리고 CJ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 중앙미디어네트워크는 중앙일보 그룹의 지주회사로서 미디어 사업은 관여하지 않고 있다.
즉 삼성미디어 제국은 혈연과 결혼 그리고 경제적 소유구조로 얽힌 가족 독과점 미디어 기업이다. 삼성-CJ-중앙일보라는 삼각 동맹을 통해 한국 미디어 시장 구조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으로부터 자유로운 미디어를 꿈꾸며

삼성미디어는 가족독점미디어다. 혈연과 결혼으로 연결된 이병철의 후손들이 한국 여론과 오락 시장 구조를 장악하고 있다. 삼성 오너일가는 한국 상업 미디어 시장의 가장 큰 광고주이다. 이들은 또한 시장 장악력이 높은 미디어 기업의 오너들이다. 이들이 관여하는 분야는 미디어 투자·제작·유통·상영 그리고 미디어 시티 건설 분야까지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삼성처럼 이처럼 폭넓게 미디어 사업을 경영하면서 시장 지배력을 갖고 있는 기업은 없다. 삼성 오너일가의 관문을 통과하지 못한 미디어 상품은 시장에 나올 수 없다. 21세기 한국인은 삼성이 씌운 여론과 대중문화 필터들을 통해서만 한국 사회를 만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성미디어를 가족독점미디어라 규정하는 가장 큰 이유는 가족끼리만 소유지분을 공유하는 폐쇄적인 구조 때문이다. 서구의 미디어독점 기업들은 소수가 시장을 장악하더라도 경쟁사끼리 소유구조와 이사회를 공유한다. 그리고 모기업과 독립적인 소유구조를 갖고 있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삼성미디어는 철저하게 모기업에 종속적이다. 30개가 넘는 기업들이 모두 모기업의 출자순환구조에 포함돼 있다. 또한 다른 재벌 가문이나 경쟁사의 기업의 자금이 들어와 있는 경우는 없다. 철저하게 집안사람 위주다. 삼성의 미디어기업에는 CJ와 중앙일보 지분이 투자돼 있지 않다. CJ와 중앙일보만 경제적 지분을 공유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도 CJ가 중앙일보 지분을 갖고 있는 방식이다. 그 반대는 아니다.

 
▲ 1978년 서울 태평로 삼성 본사 회의실에서 해외사업추진회의를 주재하고 있는 고(故) 이병철 전 회장. 바로 앞에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이병철 전 회장을 보면서 경청하고 있다. 사진=삼성

경제적 지분 관계뿐만 아니라 각 기업의 이사회 임원들의 구성도 폐쇄적이다. 이사회 내부에 국세청과 공정거래위원회, 검찰, 청와대 등 한국 파워엘리트들이 참여하는 사외이사직을 제외하곤 외부인을 찾아볼 수 없다. 현대와 LG그룹 출신 임원이 삼성복합미디어기업의 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경우는 없다. 모기업의 계열사에 입사해 과장-부장-이사로 승진한 삼성맨과 CJ맨만 이사로 등재돼 있다. 상대적으로 독립 역사가 짧은 중앙일보 이사회는 중앙일보 출신이 다수가 아닌 소수가 참여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삼성미디어는 가족독점미디어다. 혈연과 결혼 그리고 자본이 결합된 복합미디어기업이란 뜻이다. 시장에서 자유로운 경쟁을 통해 미디어 제국을 건설한 것이 아니라 가족 연합을 통해 시장 검열자가 된 것이다.
시장 검열자, 복합 미디어기업
복합 미디어기업은 시장의 흐름을 통제하는 시장 검열자이다. 이들 기업들은 높은 시장 점유율을 확보하고 있다. 미디어 오너들은 미디어 시장에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들은 기업 자원 배분 권한과 인사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복합 미디어 오너들은 기업 내부 통제를 통해 미디어 시장의 흐름을 통제할 수 있다. 어떤 콘텐츠를 생산하고 유통하고 상영할지를 결정할 수 있는 ‘시장 장악력’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미국 매체정치경제학의 토대를 마련한 달라스 스마이스(Smythe, 1981)는 미디어 대기업들을 ‘시장의 검열자’라고 명명했다. 그는 자본주의 발달과 함께 사기업에 의한 의식 검열을 우려했다. 마치 전체주의 국가가 검열을 통해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한 것처럼 기업국가 사회에서 미디어 대기업이 그 사회 구성원의 의식을 통제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사기업이 그 사회의 소통 수단을 장악하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스마이스의 우려는 1990년 후반부터 미국과 유럽 등 서구 선진국에서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사실 복합미디어기업들은 모기업의 자본 성격에 따라 3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Murdock, 1990). 첫 번째 유형은 제조업에서 미디어 분야로 사업 다각화를 한 기업이다. 미국의 GE(General Electric)와 프랑스의 비방디(Vivendi)가 전형적인 예이다. 이들 기업들의 사업 분야는 에너지, 항공, 교통, 중공업, 소비재, 의료, 부동산, 신용카드, 담보대출 등 금융 및 보안 분야 등이다. 즉 제조업 분야에서 독점적 지위를 확보한 대기업이란 뜻이다. 이들 기업들이 1980년 규제완화 바람을 타고 텔레비전 제작과 유통, 케이블, 영화제작과 유통, 통신, 출판 등의 분야에 진출했다. 두 번째 복합 미디어 기업 종류는 서비스 분야에서 미디어 분야로 확장한 기업들이다. 이태리의 베를루스코니(Berlusconi) 그룹과 독일의 베텔스맨(Bertelsmann) 그룹이다. 이들 기업들은 부동산과 금융 그리고 소비재 유통업을 통해 자본을 축적했다. 그 뒤 전국 일간지 신문시장과 영화 상영관미디어 그리고 공영방송 민영화 바람을 타고 지상파 시장에서 미디어 제국을 건설했다. 마지막 복합미디어 기업은 미디어 분야에서 성장한 기업들이다. 예를 들면 영국의 출판 전문 맥스웰 커뮤니케이션(Maxwell Communication Corporation), 호주 국적의 뉴스 코퍼레이션(News Corporation) 그리고 미국의 월트 디즈니(The Walt Disney Company)이다. 이들 기업들은 신문과 방송 그리고 영화 등 미디어 분야에서 자본을 축적한 뒤 기업 외형을 키운 순수 미디어 기업이다. 다시 말하면 복합 미디어 재벌들은 제조업, 서비스업 그리고 미디어업 분야에서 모기업의 뿌리를 두고 있다.
또한 복합미디어기업은 파워엘리트들의 집합소이다. 영국과 미국의 사례를 살펴보자. 영국 매체 정치경제학자 그래헴 머독이 1976년과 1977년 영국 신문시장의 10대기업 이사회를 분석한 결과, 같은 고등학교와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한 동문들이 이들 10대 신문기업의 이사회 의장과 부의장을 2/3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연구됐다. 또한 이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은 금융업과 제조업에서 의사결정권을 갖고 있는 엘리트인 것으로 분석됐다. 즉 특정학교 출신이 여론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신문사의 의사결정권을 갖고 있으며 또한 같은 동문이 광고주이자 금융 지원자라는 의미이다. 물론 이들은 같은 사교클럽(예: 왕실 요트 클럽)에서 친목을 다지고 있다. 이같은 상황은 20년의 시차를 두고 미국에서 유사하게 나타난다. 미국 매체정치경제학자인 마쪼코(Mazzocco, 1994)는 1990년대 초반 CBS와 Disney-ABC 방송국의 이사회 임원들, 미통신연방위원회(FCC) 고위 공무원, 그리고 금융권 이사회 임원들도 영국 신문기업과 유사한 특징을 보인다고 발표했다. 이는 미디어 기업이사회가 그 사회의 파워엘리트들의 권력 다지기 장소로 이용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 Disney-ABC

에드워드 허먼(Herman, 1999)은 뉴욕타임즈의 최대주주인 슐츠버거 가문은 이사회 의석을 IBM, 기관 투자은행인 First Boston 그리고 캔사스 시터의 상업은행 등과 공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광고주이자 투자자인 이들 기업이 이사회 임원으로 참석함으로써 뉴욕타임즈는 정치적인 기사보다는 레스토랑 소개와 여행지 소개 등 생활 소비형 기사들이 증가했다고 밝혔다. 맥체스니(McChesney, 2000)도 유사한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미국 지상파 NBC의 모기업인 GE는 각 분야 미국 상위 10위권 미디어 기업에 17명의 이사진들을 포진시켰다고 밝혔다. 심지어 새로운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경쟁사와 조인트 벤처기업을 설립하기도 했다. 타임워너(TimeWarner)는 유럽 케이블 망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독일의 베르텔스만(Bertelsmann)과 뉴스 코페레이션(News Corporation) 소유구조와 이사회 의석을 공유했다. 즉 미국의 복합미디어 기업들은 열린 이사회 운영을 하고 있다. 광고주와 금융권 투자가가 이사회 임원으로 미국 미디어 산업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고 있다. 동시에 경쟁사인 기업에도 임원으로 참여하는 한편, 수익을 낼 수 있는 시장이 발견될 경우 조인트 벤처 기업에 설립한다는 특징이 있다.
미국의 미디어 독점 vs 한국의 가족미디어 독점
미국 버클리대학의 매체정치경제학자인 배지키언(Bagdikian)은 신자유주의 미디어 법과 정책으로 시장에서 기업들 간의 건전한 경쟁이 사라지고 인수합병만 횡횡해 미디어 시장 다양성이 사라졌다고 개탄했다. 승자독식의 시장 황폐화 현상으로 탄생한 것이 미디어독점 기업이란 뜻이다. 즉 소수의 기업에 의해 시장의 흐름이 통제되는 상황은 건실한 중소형 미디어 기업의 진입을 막고 소수의 기업 이익에 부합한 콘텐츠만 시장에 제작 유통됨으로써 여론 다양성이 침해 받는다는 의미이다.
이 같은 현상은 시간차이를 두고 미국과 한국 미디어 시장에서 유사하게 나타났다. 하지만 두 나라의 자본주의 발달 과정이 다르듯이 미디어독점 기업의 형태도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미국은 소수의 기업이 결합하는 독과점적 특징을 보이지만, 한국은 철저하게 오너일가가 시장을 지배하는 가족미디어독점의 형태를 보인다.
구체적으로 삼성과 GE, CJ와 타임워너, 중앙일보와 뉴스 코퍼레이션, 내셔널 어뮤즈먼트(National Amusements)를 함께 비교 분석해 보겠다.
한국의 삼성과 미국의 GE는 각 나라의 자본주의 발달역사에 견주에 보면 유사한 점이 발견된다. 이들 기업들은 국가의 지원 아래 부를 축적한 다음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미국도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이전에 기업 독과점 문제가 21세기 한국처럼 심각했다는 의미이다. GE는 20세기 초반부터 미국의 전기전자 그리고 중화학 공업 발전을 이끈 1등 기업이다. 이후 사업 영역을 서비스업, 금융, 부동산 그리고 소비재 분야까지 넓혔다. 이 과정에서 GE는 1차 세계 대전 이후부터 미국 지상파 방송국인 NBC를 운영했다. 미국 정부가 1980년대 초반부터 매체 간 소유 규제를 완화 한 이후 GE는 영화제작과 유통업에도 뛰어들었다. GE의 미디어 사업 분야는 지상파 네트워크(NBC), 방송제작 스튜디오, 스포츠, 케이블 프로그램(CNBC) 제작, 영화 제작(유니버셜 픽쳐스 Universal Pictures), 독립영화, 가족영화 전문 배급, 그리고 DVD 등 영상물 관련 2차 미디어 사업 등이다. GE는 지난 2006년 프랑스의 비방디가 소유한 유니버셜 스튜디오를 매입했다. 1853년에 설립된 프랑스 비방디(Vivendi) 1980년 이후 테마파크, 케이블, 위성방송, 영화제작과 유통, 광고, 통신, 디지털 소프트웨어, 포도밭, 증류사업, 음료사업 그리고 여행업까지 진출한 다국적 기업이다. GE가 비방디(Vivendi)의 영화사업 부문을 인수하고 비방디는 GE의 미디어 소유구조를 공유하고 있다.
미국 GE의 미디어 소유구조는 NBC-U가 사실상의 미디어 지주회사다. 미국 지상파인 NBC를 지배하고 있는 NBC-U는 GE가 80%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나머지 20%는 프랑스 다국적 미디어 재벌인 비방디(Vivendi)가 보유하고 있다. GE는 또한 미국 케이블 복합기업인 캠캐스트(Comcast Corporation)와 49:51 비율로 벤처기업을 공유하고 있다. 즉 NBC-U는 소유지분을 프랑스의 복합 미디어기업과 공유하고 있고 자국의 경쟁기업과도 유럽 시장에선 협력관계를 통해 수익 극대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 NBC-U

GE의 이 같은 열린 소유구조는 한국의 삼성과 상반된다. 삼성의 미디어 계열사들은 철저하게 모기업의 출자순환구조와 연관돼 있다. 미디어 기업으로서 경제적 독립성을 갖고 있지 않다. 또한 삼성의 미디어 기업들은 다른 경쟁 기업들과 소유지분이나 이사회 의석을 공유하지 않는다. 재벌의 자금과 조직 운영에서의 폐쇄성이 삼성의 미디어 기업에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GE와 삼성의 눈에 띄는 또 다른 차이점은 미디어 사업 분야다. GE는 신문과 광고 분야에는 애초부터 진출하지 않았다. 미국의 GE가 광고주로서 여론시장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점은 삼성과 유사하지만 광고대행사를 운영하고 있지 않다. 미국사회가 매체를 소유한 기업이 광고주이면서 동시에 광고대행 사업을 하는 것을 역사적으로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록 삼성이 중앙일보사 독립시켜서 매체를 소유하고 있지 않지만, 삼성은 여전히 광고주이면서 동시에 광고대행업을 동시에 영위하고 있다. 또한 미디어 진출 역사도 상이하다. 삼성은 제조업과 금융 그리고 서비스 분야에서 부를 축적하고 난 뒤 방송-신문-광고-대중음악 제작-비디오 영상제작-케이블-디지털미디어 순서로 사업 분야를 넓혔다. 1990년대 금융 자유화 바람을 이용해 삼성그룹을 재조정하면서 광고와 디지털 미디어 분야만 집중하고 있다.
삼성과 혈연으로 연결돼 있는 CJ의 사업 영역은 미국의 타임워너와 비슷하다. 영화 제작, 유통, 영화 상영관 사업, 케이블 프로그램 제작, 케이블망 사업 그리고 게임사업을 한다는 점은 유사하다. 타임워너의 기본 케이블 채널은 보도전문 채널 CNN을 설립한 테드 터너(Ted Turner)의 6개 케이블 채널을 인수하면서부터다. 인수 채널에는 카툰 네트워크(Cartoon Network)도 포함돼 있다. 특히 타임워너는 프리미엄급 채널인 HBO 등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타임워너는 영화상영관 사업은 하지 않고 있다.
CJ는 타임워너가 출판업에서 오랫동안 명성을 쌓아왔던 것과 달리 잡지와 출판 등 인쇄매체에는 관여하고 있지 않다. 또한 소유구조에서 두 기업은 차이를 보인다. CJ의 소유구조는 모기업의 지주회사가 CJ 미디어 제국의 최대 주주이다. 즉 CJ 미디어 계열사들은 삼성처럼 모기업의 출자순환구조와 얽혀있다는 의미다. 경제적 자주성이 부족한 대목이다. CJ와 달리 타임워너의 최대주주는 뱅가드 그룹(Vanguar Group) 등 기관투자가들이 80% 이상의 소유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기관투자가들은 또한 타임워너의 이사회에 등기이사회로 참여하고 있다. 이점도 CJ와 다른 점이다. CJ의 등기이사는 사외이사를 제외하곤 모두 CJ 출신이거나 삼성그룹 출신들이다. 특히 이재현 등 오너일가가 미디어 계열사들의 이사직함을 여러 개 갖고 있다. 여기에 CJ는 케이블사업 진출 초기부터 외국 자본과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즉 CJ는 이씨 일가와 외국 기관투자자들이 그룹을 지배하고 있다.

 
▲ CJ 사옥. ⓒ 연합뉴스

이처럼 오너일가가 최대주주로서 기업을 지배하고 있는 점은 중앙일보도 CJ와 비슷하다. 삼성 오너일가와 결혼관계로 연결되는 중앙일보는 CJ와 경제적 소유지분을 나눠갖고 있다. 중앙일보의 미디어 지배구조는 미국의 뉴스코퍼레이션과 내셔널 어뮤즈먼트사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루퍼트 머독(Rupert Murdoch)의 뉴스코퍼레이션과 유사한 점은 가족 오너쉽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중앙일보는 뉴스 코페레이션처럼 일간신문 시장에서 명성을 쌓은 다음, 적극적 기업사냥을 통해 케이블과 영화시장에 진출했다. 기업을 키우기보다 성장한 기업을 인수한 다음, 시장 지배력을 높였다는 점도 유사하다. 루퍼트 머독과 홍석현은 모두 기업의 경영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다는 점도 유사하다. 하지만 레드스톤(Redstone) 가문이 지배하고 있는 내셔널 어뮤즈먼트사와는 다르다. 레드스톤 가문은 소유지분을 80% 이상 갖고 있지만 중앙일보의 홍씨일가와 달리 경영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또한 사업 발달사에서도 차이점을 보인다. 미국 지상파 CBS와 비아컴(Viacom)을 지배하고 있는 내셔널 어뮤즈먼트사는 오랜 영화 상영관 사업을 통해 미디어 자본을 축적했다. 중앙일보처럼 호텔과 편의점 등 서비스 사업을 하면서 미디어 사업을 하지는 않는다.
독점가족미디어 없는 세상 가능한가
한국의 복합미디어의 가장 큰 특징은 폐쇄성이다. 서구와 일본 미디어 기업과 달리 자국 내 다른 미디어기업과 소유구조와 이사회 의석을 공유하지 않는다. 국내 기업 간 교류는 국내 재벌보다는 외국 기업과의 합종연횡을 더 선호하는 편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건전한 중소형 미디어 기업이 시장점유율을 높이면 그들과 공정한 경쟁을 하는 대신 기업사냥에 나선다. 그로 인해 1990년 후반과 2000년 초반 한국 영화와 영상 제작 시장에 넘쳐났던 시장에 생기가 사라졌다.
시장 점유율에 안주한 복합미디어기업들은 다양한 미디어 상품을 제작 유통하기 보단 단기적인 수익 올리기에만 급급하고 있다. 시장에서 들리는 소리는 어떤 작품이 좋다는 품평보다 어떤 기업이 얼마에 합병될 것이라는 도박판 내기만 횡횡하다. 명백한 시장의 실패 사례다. 시장은 공정한 자원 배분을 하지 못하고 있고, 기업 간의 경쟁을 촉진하지 못하고 있다. 사람의 창의력이 원료인 미디어 시장에서 미디어 창작자들은 사라지고 재벌 오너 일가들은 미디어 기업 사냥에만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 미디어오늘 자료사진

이는 우리사회가 1990년대부터 차세대 국가 산업으로써 함께 키워온 미디어를 삼성 재벌가에 갖다 바치는 결과를 가져왔다. 왜냐하면 삼성 오너 일가가 신문, 방송, 영화, 광고, 출판, 게임, 대중음악, 연극분야에서 가장 높은 시장 지배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범 삼성가 그룹의 취약한 소유구조에 미디어 계열사가 종속됨으로서 자본 건전성도 부실한 실정이다. 재벌개혁의 실패가 미디어 개혁의 사유화로 이어졌다.
이를 어찌해야 하나. 우선 시장의 자율성에 맡겨두었던 정부의 미디어 정책이 수정돼야 한다. 시장의 과점 체제 고착화를 막기 위해서다. 좀 더 창의적인 미디어 기업이 시장에 진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를 위해 정부가 미디어 시장 조사를 정기적으로 실시하고 공표해야 한다. 시장상황에 대한 객관적 분석을 위해서다. 두번째 제안은 미디어 시장 점유율 상한제 도입이다. 특정 미디어 시장에서 한 기업의 독주는 막아야 한다. 예를 들면 현재 유료방송 시장에서 33%까지 한 기업이 시장을 통제할 수 있도록 하고 있는데 너무 높다. 대폭 줄여야 한다. 조금 더 경쟁력 있는 기업들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다.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래도 가야한다. 좀 더 열린 미디어를 갖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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