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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합적인것과 섞음

2017년 7월

천아1234 2017. 7. 22. 13:30

전 세계 민주주의는 11년째 후퇴중

2016년 외신들은 한국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변화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이는 기본적으로 세계 11위의 경제대국이자, 미국의 핵심 동맹국 중 하나이며, 중국·일본과 밀접한 관계고, 전 세계가 당면한 지정학적 리스크의 한 축을 차지하는 북한 문제의 최대 변수 중 하나가 한국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었다.

만약 한국이 지정학적으로 별로 중요하지 않고, 주변에 중요 강대국도 없었다면, 1인당 GDP는 3만 달러가 아니라 1,500 달러고, 인구는 500만 명에 불과했다면 탄핵이든 혁명이든 이는 소수의 전략분석가들이 짤막한 페이퍼 하나만 쓰고 말 이슈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아프리카 문제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 아니라면 작년 서아프리카를 뜨겁게 달군 비아의 정치적 격변과 주변국의 개입에 대해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러나 격동의 광화문과 3월 박근혜 탄핵심판을 외신이 주목한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민주주의와 관련한 정치적 변화 중에 최근 드물게 긍정적인 의의를 가진 변화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드물게'라는 말이 중요하다.

만약 민주주의에 관한 신념이 세계적으로 공고하고, 각국에 민주주의가 확실하게 착근하며, 각국 정부가 제대로 기능하고, 시민의 자발적 참여가 활발했다면, 남한 사례가 이토록 주목 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대한민국이 관심을 끈 이유는 세계 각국의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와중에 홀로 큰 진전을 이루어냈기 때문일 것이다.

전 세계적인 '민주주의의 후퇴' 

2010년대, 외국 소식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이런 흐름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2012년 에티오피아의 타락한 선거 

최근 동아프리카의 가장 활기찬 경제성장을 보여주는 에티오피아는 1990년대부터 20년 간 장기집권한 멜레스 제나위 총리가 2012년에 죽고, 민주적 변화를 기대할만 했다. 그러나 집권당인 인민혁명민주전선은 멜레스 제나위 사후 치러진 첫 총선에서, 야당 후보의 등록을 방해하고 돈으로 지지자를 매수하고 반대파를 폭력으로 위협하여 압승을 거뒀다. 2012년에 권력을 얻은 하일레마리암 데살렌 총리는 다음 5년도 권력독점을 마음껏 즐길 수 있게 되었다.

2012년 시리아, 현재까지 이어지는 내전 

시리아는 더 절망적이다. 이 나라에서는 민주적 변화를 향한 요구가 내전으로 비화되어 40만명이 죽고 700만 명이 나라를 떠났는데 아사드 정권은 여전히 견고한 것으로 보인다.

2013년 이집트

2013년, 이집트에서는 전횡적 권력을 휘두르려던 무슬림 형제단의 무르시를 몰아내고, 군부의 엘 시시가 권력을 잡았고, 지금까지 독재를 자행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1,000명이 넘는 사람이 죽었다.

이집트판 '전두환', 압델 파타 엘 시시

2013년 터키 

이슬람 민주주의의 최선두라고 자부하던 터키는 그 민주적 변화를 이끌어낸 에르도안 총리가 2013년부터 급속도로 권위주의로 나라를 다시 이끌었고, 본인의 권력을 추가로 연장하는 대통령제 개헌에 성공했다.

터키판 '유신헌법',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2017)

2014년 태국

태국에서는 친 탁신 세력의 레드 셔츠와 반 탁신 세력의 옐로우 셔츠가 '셔츠 전쟁'을 벌이다 못해 2014년에 군부가 개입하여 모든 정치적 갈등을 힘으로 찍어눌렀다.

2014년 우크라이나 혁명과 러시아 침공 

2004년 오렌지 혁명은 우크라이나의 민주적 변화를 이끌어냈으나 얼마 안 가 러시아가 지지하는 권위주의적 지도자인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귀환했다. 2014년에는 유로마이단 운동이 야누코비치를 몰아내는 데 성공했으나 러시아의 침공으로 국가는 심각하게 분열됐고, 전망은 밝지 않다.

2016년 브라질, 호세프 대통령 탄핵소추 가결 

한편 라틴아메리카의 지도적 국가로 민주적 변화를 선도해온 브라질은 호세프 대통령 탄핵으로 몸살을 앓았고, 이후 대통령직을 승계한 테메르 역시 국정 지지율이 7%('17년 6월 기준)로 추락한 상태다.

2016년 8월 탄핵된 지우마 호세프 전 브라질 대통령

2016년 필리핀과 홍콩

필리핀에서는 2016년 6월 20일까지 다바오 시장이었던 로드리고 두테르테가 같은 달 30일 필리틴의 제16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마약 전쟁을 빌미로 극도로 폭력적인 철권 통치를 실시하고 있다. 그는 사형제 폐지(2006년)를 유명무실하게 만들고 있는 중이다.

로드리고 두테르테 (2016)

2014년 홍콩, '우산혁명'

"경찰 최루탄을 우산으로 막아내 우산 운동(雨傘運動) 또는 우산 혁명(雨傘革命)"으로 불리는 2014년 홍콩 시위. '우산 혁명'은 이름은 혁명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이미 질식되어가는 홍콩 민주주의의 장송곡이 아닐까 의심받고 있다.

홍콩의 우산 혁명 (2014)

이런 사례는 정말 끝도 없다. 시리아, 이집트, 태국, 에티오피아, 우크라이나, 브라질, 필리핀, 터키는 그저 일부일 수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와 인권, 시민자유 등의 상황을 감시하고 지표로 만들어내는 프리덤하우스 2017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무려 11년째 자유와 민주주의가 후퇴한 나라가 진보한 나라보다 더 많다.

이런 상황에서 시민사회를 찍어누르고 비선실세에 휘둘리며 앞장서 비리를 저지르고 전횡적으로 권력을 휘두르던 정부를 시민들이 평화적으로 몰아내고, 선거를 통해 빠르게 정국을 안정시켰으니 한국 상황은 확실히 이례적이라 할만한 것이다. 이는 프리덤 하우스에서도 인정한다.

다만, 한국은 전체 자유 지수(Freedom Status)로는 "자유국(FREE)"으로 분류되지만, '언론'(Press) 자유 지수와 '온라인'(Net) 자유 지수를 기준으로 보면 여전히 7년째 부분적 자유국(Partly Free)로 분류된다. 당연히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영향으로 보인다.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그렇다면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앞서 언급한 오렌지 혁명이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나고, 그루지야와 키르기스스탄에서 각각 장미 혁명 (2003)과 튤립 혁명 (2005)이 일어나던 2000년대 초반까지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2011년 튀니지와 이집트, 리비아 등에서 연쇄적으로 대중적 저항이 촉발되었던 '아랍의 봄' 때에도 이런 확신은 어느 정도 존재했다. 그러나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전 세계 각지에서 민주주의가 후퇴하기 시작한 걸까?

미국외교협회의 연구원이자 동남아시아 전문가인 조슈아 컬랜칙의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원제: Democracy in Retreat, 후퇴하는 민주주의)는 이런 문제의 원인과 대책에 관해 탐구하는 책이다. 이 책은 2011년에 저술되어 2013년에 출간되었는데, 사실 이 시점에만 해도 내가 위에 언급한 사례들은 아직 일어나기 전이었다(단적으로 에르도안의 터키와 정의개발당은 아직도 민주적 이슬람주의의 모델이었다). 그 점에서 저자가 분석한 내용은, 불행하게도, 상당수 들어맞은 셈이다.

저자는 우선 민주화의 '물결 이론'에 대한 소개로 책을 시작한다. 이는 미국 정치학계의 거물인 새뮤얼 헌팅턴이 개념화한 것인데, 민주주의가 연쇄적으로 마치 물결처럼 확산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한 나라에서 이루어진 민주적 변화는 다른 나라의 변화를 자극한다. 즉, 타국 활동가들은 이전 사례를 참고하여 자국에서도 효과적인 전략을 수립할 수 있고, 권위주의 정부를 위협할 수 있다.

19세기 후반까지 앵글로색슨계열의 국가와 프랑스와 저지대, 북유럽 국가들이 민주주의로 전환했는데, 이것이 민주화의 첫 번째 물결이었다. 이 첫 번째 물결은 제1차세계대전이 끝난 뒤 중부유럽의 제국들이 해체되고 새로 만들어진 민족국가들이 민주주의를 채택하며 절정에 이른다.

하지만 여기에는 역풍이 찾아왔다. 중부유럽의 민주국가들은 경제위기와 대내외적 민족갈등 속에서 취약함을 보여주었고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나치 독일을 필두로 헝가리와 루마니아, 폴란드 등이 연달아 권위주의로 전환했다. 이는 제1의 역물결이었다.

이후 이들 국가들이 전쟁에서 패전하고 민주주의로 다시 전환되고, 구 제국의 식민지 또한 민주주의 국가들로 독립하면서 민주주의는 지역적이 아닌 지구적으로 확산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민주화 제2의 물결이었다.

그러나 이 신생독립국들은 역시 경제적 취약함, 약한 시민사회의 기반, 강한 군부와 냉전 논리에 따른 외세의 권위주의 인정 등의 요소로 연달아 독재자의 손에 떨어지게 된다. 이는 제2의 역물결이었다. 그리고 제2의 역물결을 뒤집는 것은 바로 1974년 포르투갈의 카네이션 혁명에서 시작되어 남유럽과 터키, 라틴아메리카, 동남아시아, 한국과 대만으로 퍼져나가 끝내는 공산권의 붕괴로까지 이어지는 제3의 물결이었다.

제3의 물결과 함께, 당시 진행되던 경제 시스템의 변화와 국가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논의와 맞물려 미국 당국자들은 하나의 정책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바로 '워싱턴 컨센서스'였다. 민주적 선거에 더하여 방만한 국영 부문을 약화시켜 권위주의 기반을 약화시키고, 시장경제 속에서 개인들의 재산권과 정치적 권리를 보장해주는 일련의 개혁 패키지가 채택되었다.

이후 구소련의 위성 국가들에서 일어난 '색깔 혁명'을 중심으로 또 새로운 민주적 변화의 물결이 관찰되는 것으로 보였는데 몇몇 학자는 이를 '제4의 물결'이라고 부르면서 환호했다.

제4의 물결인가, 제3의 역물결인가 

문제는 이것이 제4의 물결이 아니라 오히려 제3의 역물결이 아닌가 의심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내가 생각하기에) 세 가지 관점에서 보여준다. 각각 새로이 등장한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일어난 변화, 권위주의 강대국들의 역습, 적절한 지원을 제공해줄 외부 행위자들의 무능이다.

위싱턴 컨센서스의 실패 

하나씩 살펴보자. 책의 4장, '문제는 경제야, 워싱턴 컨센서스의 실패'에서 저자는 말라위의 사례를 들며 워싱턴 컨센서스가 실질적으로 개도국들에 적절한 성장 전략을 제시해주는 데 실패했으며 오히려 사회갈등과 불평등만 확대되는 역효과를 낳았다고 지적한다.

이는 민주주의의 정착에 굉장히 안 좋은 영향을 끼쳤다. 민주화와 함께 경제 성장과 번영, 평등한 사회가 찾아올 거라고 기대에 부푼 해당 국가 국민이 오히려 민주주의를 불신하고 권위주의 시대에 향수를 품게 되었기 때문이다.

'선출된 권력'을 거부하는 중산층... '군부 소환' 

이런 취약한 상황에 맞물려서 신생 민주국가들에선 이전의 민주화 물결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웠던 상황이 등장한다. 바로 민주화의 기수라고 여겨지는 중산층이 오히려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거부하는 현상이다.

저자는 5장에서 이를 논한다. 경제적 불안과 만연한 부패, 불평등한 사회에 대한 빈곤 계층 대중의 분노는 대체로 포퓰리즘 성향을 가진 "선출된 독재자"를 당선시키는 경향이 있다.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나 태국의 탁신과 같은 이들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민주적으로 선출되기는 하였으나, 권위주의 시절의 정치문법에 굉장히 익숙하며 반대파를 아주 적극적으로 탄압한다. 또한, 자신의 지지층인 빈곤층의 지지를 항구적으로 이끌어내기 위하여 민족주의적 수사를 동원하고, 중산층의 경제적 이권을 희생시켜 강력한 경제적 보조와 재분배를 단행한다.

이런 취약한 경제를 가진 신생 민주국가의 중산층은 수적으로 소수이기 때문에, 이러한 흐름에 강한 불만과 공포를 품는다. 그들의 선택은 그래서 민주적 수단을 우회해서 선출된 독재자를 교체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태국에서 성공하고, 베네수엘라에서 실패한 방법은 바로 군부를 소환하는 것이었다.

부패를 확산하는 민주주의의 '파생효과' 

신생 민주국가에서 정치가 취약해지고, 포퓰리스트의 발호를 불러오는 것은 민주화된 직후 부패가 실제로 늘어나거나 그런 인상을 강하게 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6장에서 이 내용을 다룬다. 기존 권위주의 정부는 중앙의 독재자 혹은 당이나 군부에 집중된 권력이 통제하는 촘촘한 후원 네트워크를 통해서 운영되었다.

이는 분명 몹시 부패한 상황이지만, 어느 정도 예측가능성과 나름의 규범이 존재하는 상황이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강력히 통제되는 언론을 통해 사회 일반에 드러나지가 않았다. 민주주의는 분명 이런 부패를 건전한 감시를 통해 막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준다.

그러나 시민사회가 취약하고 후원 네트워크가 사회와 경제를 관리하는 데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곳이라면, 초기 국면에서 민주주의는 부패를 확산하는 파생효과를 낳을 수가 있다. 기존의 권력중심이 사라지니 관료와 이익집단들이 평소 활용하던 후원 네트워크가 통제되지 않고, 이곳저곳에 손을 뻗치게 되는 것이다.

한편, 실제로 부패가 늘지는 않았어도 자유 언론의 등장은 부패에 관한 폭로기사로 이어져 체감상 부패가 늘어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이런 것들은 민주주의가 제대로 정착하지 않은 상황에서 정치에 대한 효능감과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를 흔든다. 가령, 우리 정치사에 대입하면, '박정희는 청렴했지'라든지.

떠오르는 중국

외부적 요인은 이 위기를 더 부채질했다. 90년대에 워싱턴 컨센서스와 그 집행자인 IMF가 해당 국가 국민의 삶을 파괴하는 것처럼 보여도,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소련이라는 강력한 반대자의 죽음으로 다른 대안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7장에서 중국이 부상하면서 사태가 달라졌다고 주장한다. 분명 중국의 경제는 위태로우며, 민주적으로 변화하지 않는 한 중국이 중진국 함정에서 벗어나는 것은 여전히 의문스러운 상태가 될 것이고, 장기적으로 개도국들에게 긍정적인 모델이 될 수 없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그러나 중국의 부상과 그 영향력이 민주주의에 대한 매력을 약화시키고 있는 건 어쨌든 실재하는 현상이라는 게 중요하다. 특히 인접한 동남아시아 국가의 많은 관료가 번영하는 상해의 시가지를 보면서, 또 중국 정부가 주도하는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은연 중에 중국의 논리를 내면화한다.

즉, 시민 사회를 억압하면서도 경제 발전을 충분히 달성할 수 있고, 이를 정권의 정당성으로 삼으면 된다는 발전주의 논리 말이다. 또한, 중국은 미국과 달리 민주적 개혁이나 인권 상황에 참견하지 않고 엄청난 현금을 풀어서 지렛대로 사용하고 있다. 이런 자금원은 민주주의로 체제를 바꿔야 하는 유인을 감소시킨다(유사하게 사우디아라비아가 이집트에서 비슷한 일을 하고 있다).

러시아의 피포위 의식  

8장의 주요 플레이어는 러시아다. 푸틴 정부는 자국의 불안한 민족 구성과 인구학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응집력 있는 권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권위주의로 러시아를 끌고 갔다.

특히 나토의 지속적인 동진과 색깔 혁명의 확산은 러시아의 전통적인 피포위 의식을 자극했다. 서방이 러시아를 약화시키고, 끝내 최종적으로 또 다시 해체하려고 한다는 공포를 일깨운 것이다. 중국도 유사한 문제 의식을 공유하여 두 나라는 적극적으로 민주주의의 확산을 방해하기 위한 노력을 펼쳐왔다.

푸틴의 러시아는 관제 청년 조직을 인접한 구소련 위성 국가로 확대하였고, 우크라이나와 같은 곳에서는 선거에 공공연하게 개입하기도 했으며, 그루지야와는 아예 전쟁까지 불사했다.

러시아와 중국은 또 서구 민주주의가 내부의 정치적 사안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타국의 주권을 주제넘게 침해하지 말라는 논리를 선전한다. 미국의 연방정부 셧다운 사태나 유로존의 위기는 이 두 국가에 매우 좋은 소재거리다.

또한, 다수의 신생 민주국은 멀리는 식민지 경험, 가까이는 워싱턴 컨센서스에 휘둘린 트라우마가 있기에 '내정 간섭'이라는 테마에 잘 이끌리는 경향이 있다(물론 지금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내정 간섭을 하고 있는 나라는 러시아다).

'민주화' 신흥 강국들의 실패 

7장과 8장에서의 외부적 요인이 '도전자'의 발흥이라면, 9장과 10장에서는 '수성자'의 약화를 다루고 있다. 9장은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미국과 유럽의 해당 권역에서 민주화의 기수로 활약할 것으로 기대한 신흥 강국들의 실패를 다룬다.

남아시아에서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여겨지는 인도와 라틴아메리카의 브라질, 아프리카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동남아시아에서 인도네시아와 같은 국가들이 이들이다. 이 국가들은 분명 지역에서 민주주의와 인권 등의 가치를 내세우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주변국에 영향력을 발휘할만큼 충분히 적극적이지 않다.

첫째, 이들 국가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주권과 내정간섭 논의에 상당히 민감한 편이다. 그 때문에 미국과 유럽에 고분고분 협력하려고 하지 않는다. 룰라의 브라질은 그런 이유로 베네수엘라의 차베스를 결코 비판하지 않았다.

둘째, 이들에게 주변국의 정치 체제 전환을 꾀하는 건 너무 큰 지정학적 리스크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남아공에게 무가베의 짐바브웨는 분명 국경지대의 불안정으로 작용하고 있으나, 무가베가 사라지고 대규모 난민이 발생한 짐바브웨는 더 감당하기 힘든 것이다.

셋째, 중국과 러시아와의 지정학적 경쟁에서 밀릴 수 있기 떄문이다. 이는 주로 남아시아에서 인도가 직면한 위협이다. 중국은 미얀마의 군부정권에 어떤 참견도 하지 않고 막대한 이권을 챙기고 항구 개발 계약까지 따낼 수 있었다.

만약 인도가 미얀마의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해 따진다면, 미얀마는 인도와의 어떤 협력도 흔쾌히 수락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뉴델리의 정책 결정자들로서는 감당하고 싶지 않은 시나리오다.

미국와 유럽의 무능 

10장에서는 민주주의 전파에서 그동안 가장 중요할을 담당했던 미국과 유럽의 무능을 다룬다. 당연히 주로 미국에 관해 서술한 분량이 많다. 요약하면, 미국은 "선거주의의 오류"에 빠졌다는 것이다. 민주적 선거만 충족되면 민주화는 끝난 것이라고 여기는 오류는 민주적 선거는 첫단추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했다.

아프리카와 캄보디아 등지에서는 오히려 선거가 유권자 매수 혹은 반대파에 대한 린치 등으로 이어져 정치적 폭력을 늘렸다. 감시와 견제 기능이 부족해 권력이 모든 자원 분배를 사적으로 집행하면, 선거는 모 아니면 도로 진행되기 마련이다.

이는 특히 부족적, 지역적 전통이 강한 곳에서 더욱 그렇다. 케냐에서는 키쿠유족과 루오족과 칼렌진족 사이에 선거의 향방을 놓고 유혈사태가 일어났다. 만약 키쿠유족이 집권한다면 다른 두 부족은 자원 분배와 투자에서 소외될 것이 뻔하고, 이는 키쿠유족의 장기 집권을 위한 토대가 되어 영원히 뒤쳐질 것이라는 공포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튼튼한 시민사회가 권력에 대한 견제와 감시를 잘 행해야하는데 신생 민주국가들에서는 찾기 힘든 토양이다.

하지만 미국은 이런 제반 사항을 신경쓰지 않고, 선거만 치르면 민주화가 끝났다는 단순한 접근법으로 이후 관리를 사실상 방기했다. 또한, 미국은 자국과 친한 거물에 과도하게 의존하여, 다양한 정치세력이 민주주의 규범을 익히고 대안적 비전을 제시하는 것을 때로 질식시키기까지 했다.

이는 결국 미국이 원하는 건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국 입맛에 맞는 괴뢰 정권에 불과하다는, 러시아 측의 선전 재료로 활용되기까지 했다(어느정도 사실인 측면도 있다). 그리고 각국의 다양한 역사적 맥락과 정치적, 경제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일괄적 패키지를 제공함으로써 발칸에서 적용된 모델이 아프가니스탄과 캄보디아에 동시에 적용되는 황당한 일들을 자초했다. 그리고 그들 자신이 모범이 되주지 못했다.

미국, 유럽, 일본이 하나같이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들은 민주주의 이후 마치 낙원이 찾아올 것처럼 선전을 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민주주의 오래 한 너희는 왜 예산안도 제대로 못 통과시키는데?"하면 대답이 궁색해지는 것이다.

상황이 이럴진대, 많은 당국자들은 기술결정론과 낙관론에 빠져들었다. 인터넷이 새로이 시민들을 연결시켜 민주적 변화를 자동적으로 이끌어낼 것이라는 생각이 그것이었다. 2011년에 SNS로 튀니지와 이집트의 독재자들이 무너지며 이는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인터넷은 양날의 칼이다. 권위주의 정부는 인터넷을 통해 친정부적 선전을 유통시키기도 쉽고, 민주화 활동가의 프라이버시를 추적해 탄압하는 데도 유용한 도구가 되어준다. 인터넷은 특정 상황에서 도움이 될 수는 있으나 다른 상황에서는 독이 될 수도 있는 것인데 당시에 서구 정책결정자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민주주의 후퇴 방지할 처방 

마지막인 11장에서는, 앞서 논의한 내용을 종합하며 민주주의의 후퇴를 방지할 처방들을 제시한다. 결과를 보면 그다지 성공적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한 것 같지만 말이다.

우선 저자는 왜 민주주의가 여전히 중요하며, 미국 입장에서도 민주국가를 정착하는 게 이익인지 이야기한다. 민주주의는 경제 성장에서 권위주의와 본질적인 차이를 빚어내지는 않는다. 하지만 훨씬 안정적이며, 경제위기 극복에도 마찬가지의 장점을 보여준다.

또한, 민주 국가에서 사는 사람은 대체로 비슷한 소득대의 사람보다 기대수명도 더 높다. 정부가 시민의 압력에 반응하며 여러 완충 장치를 마련해놓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은 미국이 추진하는 바에 완전히 협조를 하지는 않을지라도 권위주의 정부들보다 더 잘 협조해주는 편이며, 국가 간 갈등이라는 리스크를 최소화하려는 편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들에서 여전히 민주주의의 후퇴는 우려해야할 현상이며 미국에도, 해당 국가에도 위험한 일이라는 것이다.

처방들은 이렇다. 하지만 일단 민주주의가 찾아온다고 유토피아는 오지 않는다. 권위주의 정부가 이미 실정을 저지른 상황이라 그 실정을 바로잡는 데도 한 세월이다. 오히려 초기에 늘어난 것처럼 보이는 부패와 정치적 불안정이 빚어내는 경제적 불안정은 힘든 시기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따라서 해당 국가의 민주주의 지도자들은, 넬슨 만델라가 그러했던 것처럼, 국민의 기대치를 현실적으로 조정할 필요가 있고, 실현 가능한 범위에서 약속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미국에는 자신의 민주주의에도 문제가 있고, 스스로 이를 인지하고 있음을 솔직하게 드러내어 신뢰를 줘야하며, 선거 = 만병통치약이라는 생각을 버려야한다고 조언한다.

신생 민주국에게 미국이 조언할 때, "선거는 첫 단추이며 이거 한다고 뭐 세상 천지개벽하진 않습니다"라고 명백히 인지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부패 감시를 위한 국제적 협력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 좋고, 행정부 권력을 제한하기 위한 여러 제동장치을 많이 마련해놓을 수록 선출된 지도자가 선출된 독재자로 변신하는 사태를 막을 수 있다.

또한 미국은 각국의 상황에 따라 맞춤형 처방을 만들어낼 필요가 있고, 이를 어느 정도 지수화 해서 원조의 우선 순위를 결정하는 지표로 활용하여 효율적인 자원 투여를 해야한다고 지적한다.

책 내용은 좋다. 한국에서 별로 관심을 못 끄는 지역인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라틴아메리카, 유라시아의 정치 상황을 상세히 예시로 들어주기에 시야를 넓히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저자가 말한 처방들은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아마 실현 가능성이 급전직하했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럴수록 세계의 변화상을 쫓아가기 위해서 이 책을 읽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조금 더 찾아보니 저자는 2016년에 [국가자본주의: 국가통제주의의 귀환이 어떻게 세계를 바꾸는가]라는 책을 냈다. 이는 정치적 민주화에 이어 같은 문제의식 하에 시야를 경제로 확장해서 보여주는 책 같다. 이 책도 나중에 읽어볼 가치가 있겠다 싶다.

"민주주의는 자신의 투표를 현명하게 준비한 사람들이 행동하지 않는 한 성공할 수 없다.

민주주의의 진정한 보루는, 그러므로, 교육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1982~1945)

도시는 군체생물로 진화하고 있는가?

오늘날 인류의 절반 이상은 도시라는 이름의 벌집같은 거주지에서 살고 있습니다. 인간이 벌이니 개미같은 군체 생물로 바뀌는 중일까요?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우리는 과학자들에게 도시인이 초유기체로 진화중인지를 물어보았습니다.

개인이란 무엇일까요?

인간이 집단적 마음(hive minds)이나 군체 사회(colony societies)를 만들 수 있을지를 생각하기 앞서, 우리는 개인이란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정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개별 유기체”라는 개념은 생각보다 간단하게 정의되지 않습니다. 이와 관련한 주제로 논문을 쓴 바 있는 워싱턴 대학의 생물학자 조앤 스트라스만과 그녀의 동료 데이비그 퀠러는 독립된 생명체를 정의하는 것이 극히 어렵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나무는 어떨 때 독립된 하나의 생명체로 간주할 수 있을까요? “오크 나무나 떡갈 나무는 하나의 유기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스트라스만의 말입니다. “하지만 버드나무는 그렇지 않습니다. 숲 속의 모든 버드나무는 하나의 뿌리로 연결된 클론 들입니다. 혹은 그런 연결이 그저 끊어진 경우거나요.” 그녀는 다른 많은 식물들과 점균류 처럼 버드나무도 하나의 뿌리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뿌리로 연결된 버드나무는 각각이 하나의 생명체일까요? 아니면 각각의 나무가 전체 생명체의 일부인 것일까요? 사실 이 문제는 생명의 형태를 정의하는 복잡한 문제에 비하면 시작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우리가 개인이라고 생각하는 각각의 사람들도 실은 서로 협력하는 단순한 유기체가 진화된 결과입니다. 인간의 신체는 사람을 걷게하고, 피를 거르고, 음식을 소화하는 다양한 기능의 세포가 사회를 이룬 결과입니다. 심지어 세포 또한 세포기관, 혹은 에너지를 생산하는 미토콘드리아와 같은 소기관들의 집합입니다. 과학자들은 미토콘드리아가 한 때는 독립된 세포였지만 더 큰 세포에 흡수된 후 지방막 속에 핵, 세포기관, 세포질과 함께 오늘날 우리가 잘 아는 동물 세포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스트라스만과 퀠러는 독립된 유기체가 되는 과정을 “진화”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독립성 조차도 한 때 따로 존재했던 수많은 유기체가 “사회적 과정”을 통해 다세포적 자아를 가지게 된 결과라고 강조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는 인간은 이미 집단적 마음입니다. 우리 몸은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 군체를 위해 살고 죽는 수백만 개의 세포와 미생물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부모를 떠나지 않는 자식

인간이 군체 생물의 결과라면, 최초의 단세포 생물은 어떻게 다세포 생물이 된 것일까요?

미네소타 대학의 생물학자 마이크 트라비사노와 윌 래트클리프는 이 질문의 답을 얻을 수 있는 실험을 수행했습니다. 그들은 단세포인 효모를 응집 방식으로 두어 달 만에 다세포 유기체로 바꾸었습니다. 처음 그들은 보통의 효모를 서로 응집할 경우 더 빨리 바닥으로 가라앉을 수 있는 액체 안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응집된 효모들을 서로 교배시켰습니다. 60일, 곧 400여 세대이후 이들은 간단한 다세포 유기체가 되었습니다.

“첫 단계는 뭉치는 것입니다.” 래트클리프의 말입니다. 그럼 어떻게 단세포 생물이 갑자기 뭉치게 된 것일까요? 그것은 자식이 둥지를 떠나기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효모는 모세포 옆에 딸세포가 만들어지는 출아법(budding)이라는 방식으로 번식합니다. “보통 딸세포가 성숙하면 스스로를 분리하는 효소가 분비됩니다. 하지만 이들의 겨우, 그 효소가 분비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즉, 모세포와 딸세포가 붙어 있습니다. 이때문에 군체 전체는 유전적 동일성을 유지합니다.” 다세포 생물은 일반적으로 유전적으로 동일한 세포들의 집합으로 인간 역시 여기에 속하며 인간의 모든 세포는 정확히 동일한 DNA를 가지고 있습니다.

래트클리프와 트라비사노는 군체 내 몇몇 세포가 세포자살을 행하는 등 이 군체가 독립적 유기체처럼 행동하기 시작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세포자살은 다세포 유기체가 자신의 상태를 유지하기위해 사용하는 방법으로 어찌보면 무시무시한 일입니다. 곧,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노화한 세포가 어린 세포들이 계속 분열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죽이는 것입니다. 군체의 자살 명령을 세포가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이들이 자기자신보다 전체 유기체의 생존을 더 우위에 두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마치 독립된 개체처럼 행동하는 군체 유기체가 탄생한 것입니다.

래트클리프와 트라비사노는 자신들의 다세포 효모 개체를 그 형태를 따 “눈송이”라고 불렀습니다. 눈송이가 충분히 커지면, 이들은 분리되었습니다. 연구자들은 이들이 단세포 생물이 아니라 눈송이로 진화했다고 결론내렸습니다.

단세포 생물들의 결합으로 새로운 유기체가 만들어졌습니다. 래트클리프와 트라비사노는 눈송이가 세포자살 외의 다른 개별 유기체로의 특성을 가지는지를 실험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또한 다세포 녹조류를 만드는 실험 역시 진행하고 있습니다.

집단 지성으로의 초대

이제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무엇이 개미나 인간과 같은 다세포 생물을 초유기체를 만드는 것일까요? 생물학자 베르트 휠도블러와 E.O. 윌슨은 이 과정이 유전자의 진화와 환경의 압력을 포함한 복잡한 과정이라고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벌과 같은 곤충은 꿀이나 꽃가루처럼 다양한 종류의 먹이를 저장하기위해 군체를 이루게 됩니다. 그 시점에서 군체는 개인보다 더 높은 생존 확률을 가지게 됩니다.

하지만 효모가 눈송이가 되는 것처럼, 개인이 군체가 되는 더 큰 전환점은 바로 두 벌이 서로의 노동을 분업할 때 입니다. 휠도블러는 최초의 노동 분업으로 벌 한 마리가 자식을 낳고, 다른 벌이 이를 돌보게 되는 시점을 꼽습니다. 곧, 군체의 생존을 위해 개체가 자신이 직접 자식을 낳는 능력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번식 계급과 일꾼 계급이 나뉘게 됩니다. 전형적인 벌 사회에는 어린 벌을 돌보는 벌이 있고, 꿀을 만드는 벌이 있으며, 음식을 구해오는 벌이 있습니다. 이는 시작일 뿐입니다. 고도로 발달한 개미 사회에는 농부 개미, 쓰레기 청소부 개미, 그리고 특별한 음식을 먹어 더 크게 성장하는 싸움꾼 개미 등 수많은 계급이 있습니다.

이 곤충 사회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비록 우리가 여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는 하지만, 실제 여왕이나 어떤 지배계급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여왕은 그저 군체 전체가 유전적 동일성을 가지도록 (다세포 효모의 경우처럼) 번식 계급의 역할을 맡아 자식을 계속 생산할 뿐입니다. 오히려 각각의 일꾼은 휠도블러가 “알고리듬”이라 명한, 다른 곤충들과의 의사소통 내용과 자신의 계급에 따라 (예를 들어 벌은 나이를 먹어가며 다양한 계급을 경험하게 됩니다) 자신의 일에 필요한 판단을 스스로 내리게 됩니다. 군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조종하는 개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군체 사회, 혹은 초유기체는 개체가 자신의 번식 능력을 포기하고 노동을 분업하게 될 때 만들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은 종종 다양한 종류의 먹이를 저장해야 하거나, 많은 포식자가 존재하는 환경의 압력에 의한 반응으로 일어나기도 합니다. 군체는 그런 환경에서 개체보다 더 적합하기 때문에 살아남는 것이며, 환경이 바뀔 때 군체가 다시 개체로 돌아간 여러 예가 있습니다.

인간 초유기체

이제 인간이 군체 생물로 진화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여러 과학소설에서 이런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 소설 안에서 인간은 마치 벌이나 개미처럼 조직을 위해 충성하는 어떤 집단을 만납니다. 그 집단에 속한 개인은 자신의 생명을 포함해, 집단의 생존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합니다. 스타트렉에 나오는 보그 족은 우리가 상상한 그런 사회의 한 예입니다. 그럼 인간이 과연 그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을까요?

비록 우리의 도시는 군체와 매우 비슷하지만, 스트라스만은 여기에 매우 회의적입니다. “인간 집단이 하나의 유기체가 되기위해서는 분쟁이 없어야하고 협력이 많아야합니다. 이는 유전적 근친도가 매우 높을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많은 분쟁이 일어나고 있지요.” 그녀는 하나의 유기체처럼 행동하는 협력 집단을 만들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복제이며, 인간은 유전적 복제와는 거리가 멀다고 지적합니다. 그녀는 또한, “인간을 한 번 보세요. 얼마나 많이 싸우는지. 나는 사람들이 더 유기체 같았으면 좋겠어요.”

몇 백 세대만에 다세포 효모가 출현하는 것을 지켜본 트라비사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 일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와 래트클리프는, 적어도 실험실에서는, “보다 작은 유기체”가 개인에서 군체로의 변화가 쉽게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어떤 면에서는, 곧 우리 내장 속에 존재하며 우리의 생존을 도와주는 미생물 생태계를 생각하면 인간은 이미 군체 생물이라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스트라스만의 의견과 같은 결론을 내립니다. 곧, 유기체가 단세포에서 다세포로, 그리고 다세포에서 군체로 진화하기 위해서는 유전적으로 동일하거나 매우 유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을 군체 생물로 만들기 위해서는 복제들로 이루어진 사회가 필요할지 모릅니다. 혹은, 2007년 휠도블러가 와이어드의 브랜든 카임에게 말한 것처럼, 매우 정교한 노동의 분업으로 충분할 수도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들 사회 체계에서 가장 일반적인 것은 노동의 분업입니다. 한 번 이 과정이 진화적으로 일어나면, 이들의 성공률은 크게 올라갑니다. 거의 모든 사회에서 이는 진실입니다. 고도의 노동 분업이 일어나면, 바로 이 노동의 분업으로 인한 크나큰 성공을 누리게 됩니다. 두번째는, 일단 사회가 유기체처럼 바뀌고 나면, 이들이 매우 긴밀하게 서로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휠도블러조차도 인간은 군체를 만들기에는 너무 다툼에 익숙하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를 부적응적이라고 부릅니다.

만오천 년 전, 우리는 수렵채집 생활을 했습니다. 우리는 내집단 충성과 외집단에 대한 차별을 익혔습니다. 이는 적응입니다. 우리가 같은 집단 사람들을 알아보고, 또 외부인을 구별하게 진화한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나는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외국인 혐오에 이런 배경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이 본능은 이제 극히 부적응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이런 우리의 외국인 혐오가 우리를 개체로 계속 묶어두게 될까요? 어쩌면 그럴 수 있겠지요. 혹은, 우리는 이미 군체 생물이 되기 위한 충분한 조건을 갖추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고도로 복잡한 노동의 분업을 이루었고, 다양한 종류의 음식을 저장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인간의 근친교배를 지적한 한 집단 생물학자의 말처럼, 유전적으로 서로 매우 가깝습니다.

그럼 무엇이 인간이 초유기체가 되는 것을 막고 있을까요? 어쪄면 우리는 아직 원시적인, 집단 의식을 충분이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혹은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적어도 지금 이 시점에서는, 집단 의식에의 투항과 반항 사이의 갈등이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경우이든, 가까운 시일 내에는 인간이 군체 생물로 진화하지는 않을 듯 합니다.

테니스계의 성차별, 앤디 머레이의 페미니즘

남자 테니스 세계 랭킹 1위인 앤디 머레이는 여러가지 면에서 유명인사입니다. 코트를 넘나드는 슬라이스 백핸드, 잔디 코트에서의 유려한 플레이로 잘 알려져있고, 경기장에서의 태도가 논란이 되는 경우도 종종 있죠. 그는 또한 최정상급 남자 테니스계에서 찾아보기 힘든 하드코어 페미니스트입니다. 최근에는 윔블던 8강에서 자신을 물리친 샘 퀘리에 대해 한 기자가 2009년 이후 주요 대회 4강에 오른 첫 미국 선수라고 말하자, 재빨리 “최초의 남자 선수”라고 고쳐주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습니다. 미국에는 2009년 이후 14개의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세리나 윌리엄스가 있으니까요. 머레이의 지적에 기자회견장에서는 한바탕 웃음이 터져나왔지만, 정작 본인은 조금도 웃지 않았습니다.

이런 일은 머레이에게 일상적인 일입니다. 어릴 때 어머니 주디 머레이로부터 테니스 교육을 받은 머레이는 언제나 동료 여성 테니스 선수들의 위업에 대해 찬사를 보내곤 합니다. 그 태도가 과시적이지 않고 자연스럽죠. 머레이의 페미니스트적 면모가 엿보이는 발언 몇 가지를 정리해봤습니다.

2013년 6월 27월, 머레이가 최강의 여자 선수인 세리나 윌리엄스와 경기를 해볼 생각이 있다고 밝혀, 상당히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는 “남성과 여성이 붙으면 플레이스타일이 어떤 식으로 펼쳐질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고 말했죠. 남자 선수가 상대 여성을 당연히 가볍게 꺾을 것이라는 뉘앙스없이 이런 제안을 하는 일은 매우 드문 사건입니다. 세리나도 이 제안에 화답했지만 경기는 아직 성사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2013년 9월 2일,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늘 여성 경기들을 챙겨본다며 특히 폴란드 출신의 드롭샷 장인 아그니에쉬카 라드반스카 선수를 존경한다고 밝혔습니다. “테니스가 좋으니까 그냥 보는 것 뿐이에요.”

2014년 6월 22일, 윔블던을 앞두고 머레이가 여성 코치 아멜리 모레스모를 기용한 것에 대한 비판이 일자, 그는 다음과 같이 단언했습니다. “(내가 여성 코치를 쓰는 것이) 남성 스포츠계에, 또 여성 스포츠계에 더 많은 여성 코치들이 진출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좋은 일 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레스모 같은 사람이 나에게 도움이 안 될리 없다.”

2014년 11월 29일, 한 인터뷰어가 “모레스모가 코치로서 도움이 되나”라고 묻자, 머레이는 “그녀가 비판받아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2015년 1월 29일, 호주 오픈에서 머레이는 다시 한 번 코치를 치켜세웁니다. “여성도 훌륭한 코치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줄 수 있는 한 주 였다.”

2015년 6월 4일, 프랑스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머레이는 공개적으로 페미니스트 선언을 합니다. 모레스모 코치에 대한 한결같은 태도, 그리고 가정 환경이 여성에 대한 태도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말하는 과정에서였죠. 그는 “제가 페미니스트가 되었냐구요?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이 여성도 남성과 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라면, 네, 저는 페미니스트가 되었다고 할 수 있겠네요.”

2016년 3월 23일,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머레이는 성별 간 급여 격차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여성은 남성과 똑같이 급여를 받아야 합니다. 논란이 된다는 것 자체가 매우 실망스럽네요.”

2016년 8월 15일, BBC 진행자가 머레이를 “올림픽에서 두 개의 금메달을 딴 최초의 테니스 선수”라고 소개하자, 머레이는 바로 진행자의 멘트를 정정했습니다. “단식 금메달 2회 연속은 제가 최초지만, 윌리엄스 자매가 있죠. 올림픽에서 각자 금메달 4개씩은 딴 걸로 알고 있어요.”  (슬레이트)

미국은 지금 단어 전쟁 중

 

미국 사회의 분열 양상이 심상치 않습니다. 정치적인 견해는 물론이고, 최근 들어서는 팩트를 놓고도 서로 동의하지 못하는 모습이죠. 이제 단어의 뜻마저도 논쟁 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수년 간 메리엄-웹스터의 사전 편집진은 인터넷 인기 검색어를 선정해 우리 웹사이트에 올려왔습니다. 올 초, 백악관 대변인 숀 스파이서가 기자들에게 “’배신(betrayal)’의 정의를 내리지 않겠다”고 말하자 많은 이들이 “배신”의 뜻을 검색하기 시작했고, 우리는 언제나처럼 이 단어를 우리 웹사이트에 올렸습니다.

하지만 트럼프와 관련된 단어를 올리기 시작하면서부터 분노 어린 반응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대안적 사실(alternative fact)”, “스벵갈리(Svengali)”, “도청(wiretapping)” 모두 실제로 온라인 상에서 화제가 되니 올렸을 뿐인데도 우리는 사전 편찬자로서의 의무를 져버리고 특정 정치인을 깎아 내리며 트롤링을 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전에 적힌 단어의 정의를 말 그대로 ‘복붙’해서 트위터에 올리기만 해도 정치적인 행위라는 손가락질을 당하게 된 것이죠.

사실 이런 뜨거운 반응이 놀라운 일이라고만은 할 수 없습니다. 인류가 단어와 그 의미를 두고 논쟁을 벌여온 것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사전 편찬은 언제나 정치적인 작업이었기 때문엡니다. 우선 메리엄-웹스터 사전의 창시자인 노아 웹스터의 공이 큽니다. 많은 이들이 사전 편찬인으로만 기억하지만 사실 노아 웹스터는 건국의 아버지 가운데 한 사람이었죠. 그리고 그가 했던 모든 일에는 하나의 중요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바로 미 합중국을 강하고 통합된 나라로 만드는 것이었죠. 그는 관습과 언어, 정부 구성 등 모든 면에서 미국이 다른 나라와 차별화되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가 펴낸 스펠링 책과 사전 역시 이 같은 미국 예외주의의 산물이었습니다. 그에게 사전은 그 뒤에 올 수 세대의 미국인들에게 국가 정체성을 길러주기 위한 도구였죠. 1828년에 나온 웹스터의 대표작 미국영어사전(American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에는 학자는 물론 의원들이 쓴 추천사가 따랐습니다. 물론 정치인들에게 이러한 역할을 맡기는 것에 모든 이들이 동의한 것은 아니었지만요. 웹스터의 수제자인 조세프 워세스터(Joseph Worcester)도 그의 비전에 의문을 표한 사람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웹스터는 워세스터가 “국가를 위해 값을 매길 수 없는 봉사를 한 사람”을 깎아내린다며 분노했죠.

이렇게 사전 편찬이란 애국의 실천이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수십년 간 사전 편찬은 점차 성스러운 과업의 영역에서 학문의 영역으로 넘어오게 되었습니다. 원맨쇼가 아니라 여러 학자들이 팀을 이루어 하는 작업이 되기 시작했고, 미국 사회의 분열 역시 반영하게 되었습니다. 1864년 웹스터 사전의 개정을 담당한 수석 편집자였던 노아 포터(Noah Porter)는 편집진에게 남북전쟁 당시 북군의 공식 발표를 통해 나왔던 말을 제외하고는 노예제 반대 측의 발언을 사전에 인용하지 말라는 지침을 내렸습니다. 신학자이기도 했던 포터는 “혁명가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고, 개정판에서 논란이 될만한 요소들을 삭제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정판은 비난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남부와 노예제 폐지 반대론자들은 개정판의 “의회(congress)” 항목을 예로 들며, 사전이 정치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개정판은 “의회”를 “국가의 민중을 대표하는 상원과 하원의 모임”으로 정의하고 “법을 제정하고 국익의 문제를 다루는 것”을 의회의 역할이라고 적었는데, 이것이 각 주(state)의 이익보다 국가(nation)을 앞세운 북부의 프로파간다라고 비난한 것입니다.

남북전쟁이 끝나고 100년이 지난 후에도 이런 류의 논쟁은 잦아들지 않았습니다. 1961년에 웹스터에서 펴낸 제 3 신(新) 국제사전(Thir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역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역사학자 자크 바준(Jacques Barzun)은 이 사전을 두고 “한 정당이 엮은 가장 긴 정치 팜플렛”이라고 혹평했고, 웹스터-메리엄 좌파 히피들에게 맞서기 위한 사전(American Heritage Dictionary)이 출간되기도 했죠.

역사가 이렇다보니 지금 우리가 받고 있는 “비애국적이고 남자답지 못하다”는 비난은 낯설지 않습니다. 단어의 뜻이 그 어느 때보다도 논란거리가 되고 있는 시대입니다. 그리고 사전은 언어 사용자들을 따라가야하죠. 언론사들은 트럼프 대통령과 트럼프 정부를 어떻게 보도해야할지를 두고 긴 토론을 벌였습니다. “거짓말”, “백인 민족주의자”와 같은 단어의 사용도 논쟁의 주제가 되었죠. 법원이 난민 관련 첫 대통령령의 효력을 정지한 근거 가운데 하나는 대통령 본인이 이 조치를 계속해서 “무슬림 금지”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사전 편찬이란 본질적으로 속도가 느린 작업입니다. 사전 편찬자들은 단어의 사용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살펴야 하고, 다양한 출처와 언어 사용자들의 단어 사용을 검토해야 합니다. 하나의 시대나 출처를 편애해서는 안되며, 넓은 역사적 맥락 속에서 단어의 의미를 파악해야 합니다. 언어는 사전 편찬자들보다 훨씬 더 빨리 움직이지만, 사전 편찬자들의 세부 사항에 대한 근시안적 집착이야말로 사전을 조지 오웰 소설 속의 정부 기관과 차별화하는 원동력입니다.

영어라는 언어는 직접 민주주의입니다. 영어를 사용하는 개개인에 의해 유지되며, 사전은 이를 지속적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우리는 사전을 거울삼아 우리가 과거에 어떤 존재였고, 지금 어떤 존재인지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스벵갈리들이 뭐라해도 이것만은 진실입니다. (뉴욕타임스)

교도소 내 ‘폭력의 문화’ 근절해야

지난 월요일 공개된 미국 법무부의 조사 보고서는 뉴욕 주 라이커스 교도소의 미성년 제소자들이 교도관에 의한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고발했습니다. 이 곳에서 교도관들은 징계에 대한 두려움없이 미성년자들의 사소한 위반 사항에 대해서도 폭력을 휘두르는 등 “뿌리깊은 폭력의 문화”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이 보고서는 2011년부터 2013년 사이의 상황을 주로 다루고 있는데 그 기간에도 미성년 제소자에 대한 폭력 건수는 급증했다고 합니다. 2012년 10월 기준 남성 미성년 제소자의 44%가 교도관에 의한 폭력을 경험했다고 답했습니다. 게다가 교도관들은 질서 유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부상을 입히고 고통을 가하기 위해 폭력을 행사했다고 보고서는 전합니다. 제소자가 교도관 또는 다른 제소자들의 안전에 위협을 가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단순 명령 거부나 언어 사용 문제에도 체벌 또는 복수 형태의 폭력을 가했다는 것이죠. 제압된 후에도 계속해서 폭력을 쓰고는 이후 제소자가 반항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보고하는 경우도 드러났습니다. 감시 카메라가 없는 구역을 찾아가서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죠.

법무부의 침묵이 이 야만적인 체제의 유지에 도움을 준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보고 규정도 무시되기 일쑤였죠. 2012년에는 구타 사건에 대한 보고서 하나를 작성하는데 3개월이 걸리기도 했습니다. 이 보고서로 구타는 정당화되었고, 보고서가 규정보다 늦어진 점에 대해서는 어떠한 조치도 없었습니다.

뉴욕 당국은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연방 법원에서 소송을 당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보고서가 지시하고 있는 개선 사항은 라이커스에 있는 미성년 제소자를 전원 이감하고 교도관 교육을 실시하며 보고 규정을 준수하라는, 아주 당연한 해결책들입니다. 그러나 보고서도 지적하고 있듯이 가장 중요한 것은 뿌리깊은 폭력의 문화를 근절하는 일입니다. 그 날이 올 때까지 법무부 장관이 책임감을 가지고 직접 이 문제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New York Times)

북한 관광, 포용정책이 아니라 고문 포르노인 이유
  • 평양과학기술대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친 경험으로 “평양의 영어 선생님(Without You, There Is No Us: Undercover Among the Sons of North Korea’s Elite)”을 펴낸 한국계 미국 작가 수키 김이 워싱턴포스트에 기고한 글입니다.
  • 의식불명 상태로 북한에서 풀려난 미국인 대학생 오토 웜비어가 집으로 돌아온 지 엿새 만에 사망한 사건은 여러모로 비극입니다. 평양 관광 중 체제 선전 포스터를 훔친 혐의로 구속되어 15년 노동교화형을 선고받았던 웜비어는 1년 전부터 의식불명 상태였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북한에서 웜비어는 무슨 일을 겪었던 것일까요? 당국은 식중독에 걸린 웜비어가 수면제를 복용한 후 깨어나지 못했다고 공식 발표했지만, 많은 이들이 고문으로 인한 사망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진실은 아마 영영 알 수 없을 가능성이 큽니다. 확실히 말할 수 있는 사실은 북한에 의약품이 극도로 부족하다는 점, 그리고 외국인이나 상류층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입니다. 제가 평양에 있는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쳤던 2011년, 한 미국인 강사가 하이킹을 갔다가 다친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외국인 전용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마취제도 없이 수술을 받았고 항생제도 처방받지 못했죠. 미국으로 돌아온 뒤 상처 부위에 염증이 생겨 긴급 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북한은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이며, 동시에 가장 잔혹한 정권이 통치하는 나라 가운데 하나입니다. 북한의 특출난 반인권적 행태가 UN의 지속적인 지적을 받아온 상황에서 미국인들이 새삼스럽게 웜비어 사건의 잔혹성에 충격을 받는 것은 조금 이상한 일입니다. 그런 상황이 관광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믿을 만큼 미국인들 사이에서 인식이 부족한 것이겠지요. 웜비어 사건은 북한 정권이 얼마나 인명을 경시하는지 극명하게 보여준 경우입니다.

    매년 5천 명가량의 서구 여행객이 북한을 방문하며, 그중 약 5분의 1이 미국인입니다. 현재 미국 정부는 북한 여행 금지령을 고려 중이며, 웜비어가 사용했던 여행사는 미국인 고객을 더 이상 받지 않고 있습니다.

    사실 “북한 관광”이라는 것은 매우 불편한 개념입니다. 외국인들이 북한을 방문하면 소외된 북한 주민들에게도 문이 열리는 셈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평범한 북한 주민이 외국 관광객에게 노출될 가능성은 크지 않습니다. 평양 관광 자체가 선전용으로 정해진 관광지 몇 군데를 둘러보는 것이고, 안내원 외의 북한 주민과 접촉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여행이 대체로 안전하다고 알려졌지만, 모든 것이 통제되는 경찰국가에서의 위험은 감추어져 있고, 예측할 수 없기 마련입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정치적 상황에 따라서 관광객의 운명이 달라질 수도 있고요.

    무엇보다 북한 관광은 윤리에 관한 문제입니다. 관광은 개인의 즐거움을 위한 것이고, 일반적으로는 제1세계 부유한 시민들의 취미입니다. 2,500만 명의 주민이 포로처럼 갇혀있는 거대 수용소 같은 나라에서 누릴 수 있는 “관광의 즐거움”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가벼운 마음으로 북한을 관광하는 것은 나치 치하의 아우슈비츠를 산책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웜비어가 훔치려 했다는 선전 포스터는 정치적인 맥락에 관심이 없는 사람에겐 기념품처럼 보일지 몰라도, 나치의 스와스티카와 마찬가지로 북한의 “위대한 지도자”가 주민들을 노예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상징입니다. 수십 년간 고통받아온 북한 주민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죠. 북한 관광에는 또 다른 어두운 이면이 있습니다. 외국인 관광은 매년 북한 정권에 4,300만 달러 이상의 외화를 안겨주며, 이 돈은 주민을 탄압하고 군사력을 키우는 데 쓰일 가능성이 크죠.

    이런 것이 “고문 포르노”가 아니라면 무엇이겠습니까?

    웜비어 사건이 끔찍한 이유는 북한 정권이 미국 시민을 비인간적으로 대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 과정에서 연관된 모든 국가의 정치적인 가식이 드러나기 때문이죠. 트럼프 대통령은 즉시 “적어도 우리는 그를 집으로 데려왔다”는 자화자찬을 늘어놓으며 오바마 정부를 비난하기에 바빴죠. 사실 현 미국 정부가 웜비어를 데려왔다는 말에는 어폐가 있습니다. 북한이 활용하기에 적절한 시기를 재며 미국 시민을 포로로 잡고 있다가 국경에서 사망하는 외교적인 재앙을 피하려고 죽기 직전에 돌려보낸 것뿐이죠. 웜비어의 죽음은 워싱턴 방문을 앞둔 문재인 대통령이 올해가 가기 전에 김정은을 만나길 희망한다고 발표하는 계기로 이어졌습니다.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죠. 그러면서도 문 대통령은 현재 북한에 억류된 최소 6명의 한국 시민, 한국전쟁 이후 납북된 것으로 추정되는 어민 500명에 대한 언급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웜비어의 죽음은 대북 외교의 처절한 실패를 상기시키는 사건이자, 미국 시민을 억류하는 것이 북한에게 이득이라는 점을 일깨워주는 사건입니다. 대학생에 불과한 웜비어는 북한 관광을 떠나면서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곳으로 향하는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앞으로 제2, 제3의 웜비어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은 국가의 책임입니다. (워싱턴포스트)

     

    미성년 범죄자는 성인 범죄자와 다르다

    청소년 범죄자는 어른 범죄자와 다를까요? 미국 대법원의 답은 “그렇다”입니다. 미국 대법원은 지난 10년 간 미성년 범죄자에 대한 중형 선고를 제한하거나 금지하는 방향으로 판결을 내려왔습니다. 2005년에는 미성년자에 대한 사형 선고를 금지했고, 2010년에는 살인 이외의 범죄를 저지른 미성년자에게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선고할 수 없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2012년에는 모든 경우 미성년자에게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선고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리기에 이르렀습니다.

    잔혹하고 통상적이지 않은 처벌을 금지하는 헌법 수정조항 8조에 의거한 대법원 판결은 결국  미성년자는 성인과 헌법 상 다른 존재임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문제의 2012년 판결에서 대법원은 미성년자에게 성인과 같은 수준의 도덕 의식을 요구할 수 없으며, 나이가 어린 사람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달라질 가능성도 크기 때문에 이러한 요인을 고려해서 판결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만일 가석방 없는 종신형 금지의 원칙이 소급적으로도 적용된다면, 미국 내에는 재심리를 받을 수 있는 미성년 수감자가 2천 명 이상에 달합니다. 소급 적용에 대해서는 주마다 입장이 조금씩 다릅니다. 미시건, 아이오와, 미시시피, 그리고 미국 법무부는 소급 적용을 인정하는 입장이지만, 미네소타 대법원과 연방 항소법원에서는 소급 적용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소급 적용을 인정해 중형 선고 금지 원칙을 널리 적용하면 폭력 범죄가 증가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는 각 법원이 세심한 기준을 정해 신중하게 결정하면 될 문제입니다. 앨러배마 대법원은 피고의 나이, 정신적 성숙도, 가족관계, 교화 잠재력 등 재심리 시에 활용할 14개의 가이드라인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대법원의 판결대로 아이들은 어른과 다른 존재입니다. 미성년자에 대한 가석방 없는 종신형 선고는 금지되어야 하고, 소급 적용도 허용되어야 합니다. (NYT)

    대량살상 범죄 예방, 정보 공유가 중요하다

    지난 금요일 캘리포니아 이슬라 비스타에서 6명의 사망자와 13명의 부상자를 내고 자살한 엘리엇 로저는 조용한 외톨이였습니다. 룸메이트들을 싫어했고,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죠. 하지만 그가 어느날 갑자기 맥락도 없이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것은 아닙니다. 정신과 치료를 받기도 했고, 술집에서 싸움에 휘말린 적도 있었으며, 인터넷에 폭력적인 내용의 영상을 올리고, 경찰의 방문을 받은 적도 있었죠. 엘리엇 로저는 다른 모든 대량 살상범들과 함께 법과 제도가 위험한 인물을 적발해 끔찍한 범죄를 예방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런 범죄가 일어날 때마다 총기 규제나 위험 인물에 대한 강제 입원 제도 등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나오지만, 전문가들은 위험한 행동을 할 수도 있는 인물에 대한 정보를 교육기관과 사법 당국 등이 함께 공유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지적합니다. 범죄가 일어나기까지 이상 신호를 감지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주변에서 나오게 되는데, 이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어디에 어떻게 전해야 할지 모르다는 것이죠. 때로는 정신건강 전문가들 스스로가 정보 공유의 과정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환자의 개인 정보와 사생활을 보호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혀 “자신이나 타인에게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다고 믿을만한 합리적인 근거가 있다면 해당 환자의 동의없이 정보를 공유할 의무”를 소홀히 하기 때문입니다. 엘리엇 로저의 심리치료사도 그에게서 나타나는 위험 신호들을 당국에 알라지 않았죠. 경찰의 잘못된 판단이 정보 공유의 흐름을 막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번은 엘리엇 로저의 어머니가 아들이 페이스북에 올린 동영상들을 보고 이를 신고해, 경찰이 직접 엘리엇 로저의 집을 방문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경찰은 그가 위험 인물이 아니라고 판단해, 집안 수색이나 강제 입원은 이루어지지 않았죠. 경찰들 앞에서는 멀쩡한 모습을 연기했기 때문이죠. 권위를 지닌 인물 앞에서 겉으로는 멀쩡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실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의 전형적인 특성입니다. 전문가들은 경찰이 접수된 누적 자료들을 무시하고 일회성으로 사람을 한 번 만나 스스로 내린 판단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엘리엇 로저는 학교에 잘 나가지 않았지만 그래도 소속이 있었던만큼 학교가 학생을 좀 더 체계적으로 관리하지 못했던 점도 아쉽습니다. 요즘은 학생들의 심리 상담과 정신 건강 관리 등을 담당하는 기구가 학교 안에 설치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기관에서 잠재적으로 위험한 학생을 파악하고 캠퍼스 경찰이나 지역 경찰과 정보를 공유한다면 좋겠지만 현실에서 그런 일은 거의 없습니다. (NYT)

    전과자 투표권 제한, 정치적 함의는 무엇일까요?

    올해 미국 버지니아 주에서는 26만 명이 새로 투표자 명부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민주당 소속의 테리 맥컬리프 주지사가 형기를 마친 사람에 한해 범죄자도 투표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에 서명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법에 따라 형기와 집행 유예 기간, 가석방 기간을 마친 사람들은 투표권은 물론이고, 선거에 출마하고 배심원단으로 봉사할 권리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2010년 기준, 버지니아 주는 범죄 기록 때문에 투표권이 없는 사람의 비율(7.3%)이 가장 높은 주였습니다. 그러나 2013년 공화당 소속의 당시 주지사가 강력범을 제외한 전과자가 투표권을 보다 손쉽게 되찾을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이러한 움직임이 이번 조치까지 이어졌습니다.

    범죄자의 투표권에 관한 법은 미국에서도 주마다 다릅니다. 수감자를 포함한 모든 범죄자가 투표를 할 수 있는 주는 메인 주와 버몬트 주, 둘 뿐입니다. 반면, 아이오와, 켄터키, 플로리다 주에서는 범죄 기록이 있는 사람은 예외없이 투표권을 박탈당합니다. 미국 전체로 보면 범죄를 저질러 투표권을 박탈당한 사람은 전체 인구의 2.5%입니다. 문제는 그 중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는 것입니다. 같은 통계에 따르면,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7.7%가 범죄로 인해 투표권을 잃었습니다.

    이렇게 미국에서 범죄자에게 투표권을 주는 문제에는 복잡한 정치적 함의가 담겨 있습니다. 공화당원들은 맥컬리프 주지사의 이번 조치가 올해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 후보에게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정치적 포석이라며 비난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2000년에는 전과자의 투표권을 박탈하는 법이 조지 부시 대통령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는 지적이 있었죠. 실제로 전과자들이 민주당원으로 투표인 명부에 이름을 올리는 경우가 더 많다는 조사 결과가 있었지만, 이 조사는 3개 주에서만 이루어졌고 훨씬 더 많은 수의 전과자들이 전혀 투표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과한 조사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공화당원은 불법 이민자들에게 투표권을 주는 것도 민주당에게 유리하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상황입니다. (NPR)

    미국의 이민 문제, 해결이 어려운 까닭은?

    현재 미국에는 1100만에서 1200만에 달하는 불법 이민자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 중 다수가 라티노로, 미국에서 가정을 꾸리고 일을 하며 재산을 소유한 채 살아온지 오래라 떠나온 모국보다 미국을 훨씬 가깝게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죠. 부시 대통령 당시에도 이들의 지위를 합법화하기 위한 법 제정이 시도되었으나 무산되었고, 오바마 정부 들어와서도 좀처럼 입법은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대통령이 화를 내며, 대통령권을 사용해서라도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미국에서 불법 이민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2012년 미트 롬니가 라틴계 공략에 실패해 대선에서 패배한 후, 공화당은 인구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집단을 통째로 포기하는 것이 실패하는 전략임을 깨달았습니다. 2013년 이민법 개정안이 상원을 통과하면서 상황이 정말 달라지는 듯 했죠. 그러나 하원에서는 이야기가 달랐습니다. 지난달 공화당 원내대표 에릭 캔터(Eric Canter)가 이민법 개혁에 반대하는 강경파와 맞선 경선에서 패배한 사건은 관에 못질을 한 셈이었죠.

    캔터의 패배에서 드러나듯, 우선 전통적인 공화당 지지자들에게 불법 이민자들을 “사면”한다는 개념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그러나 그게 이유의 전부는 아닙니다. 우선 선거구 게리맨더링 때문에 당의 이익과 의원 개인의 이해관계가 엇갈리죠. 불법 이민자에게 강경한 입장을 취하면서 이 문제를 물고 늘어지는 것이 어떤 공화당 예비 후보에게는 경선에서 이길 수 있는 전략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강경론자들은 당내에서 큰 목소리를 냅니다. 오바마가 과거 어떤 대통령보다도 많은 수의 불법 이민자들을 강제 송환시켰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대통령을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도 공화당의 요즘 전략입니다. 중앙 아메리카의 어린이들이 텍사스 주의 국경을 넘어 미국으로 들어오는 사례가 늘어나자, 국내에 있는 이민자들을 합법화하는 일보다 국경 수비를 강화해 새로운 불법 이민자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게 우선순위라는 주장도 있고요.

    11월 중간 선거에서는 공화당이 상하원을 모두 장악할 가능성이 높아보입니다. 상원에서 통과된 법안은 내년 1월에 만료되는데, 공화당이 장악한 의회에서 새로운 법안이 다시 나오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듯 합니다. 텍사스 국경 문제와 캔터 의원의 패배로 인해 정치적 저울은 이미 기울었다고 봐야 합니다. 이민법 개혁에 우호적인 공화당 의원들조차 경선의 유불리를 따지느라 목소리를 높이지 못할 겁니다. 그러다 대통령 선거에서 또 라틴계 유권자들의 표를 얻지 못해 민주당에게 패하고 나면, 이민법 개혁에 대한 논의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겠죠. 현 시점에서 이민법 개혁 찬성론자들이 기대할 수 있는 최상의 시나리오는 이렇게 2년을 기다리다가 아예 처음부터 다시 논의를 시작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Economist)

    트럼프 시대, 새롭게 부상한 민주당 성향 풀뿌리 시민운동

    수요일 정오, 피츠버그 북부 교회 공화당 소속 의원 키스 로스퍼스의 사무실 밖에는 지역구 주민 40여 명이 모여 있습니다. 부슬비가 내리고 있지만 트럼프 정부와 로스퍼스 의원을 비판하는 내용의 손팻말과 성조기를 들고 있는 사람들은 에너지가 넘칩니다. “러시아 게이트를 수사하라”, “진짜 뉴스, 가짜 대통령”과 같은 문구가 눈에 들어옵니다. 딸의 할로윈 의상을 입고 엉클 샘으로 분장한 55세의 애널리스트 캐롤린 깁스 씨는 “시위가 즐거우면서도 애국심을 잘 표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로스퍼스는 어딨나 수요집회”는 여성행진 때 버스에서 만난 여성들의 의기투합으로 지난 2월 시작되었습니다. 깁스 씨는 평생 이런 활동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았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정치인을 후원한 것도 지난 7월의 일입니다. 트럼프가 무슬림 참전 용사의 부모를 모욕하는 것을 보고 분노해 클린턴에게 100달러를 후원했죠. 이후 그녀는 지역구에서 열리는 수요집회에 참여하면서 “인내심의 포트럭 파티”도 주최하고 있습니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중도와 진보주의자들”이 모여 시사 이슈를 논하고 공화당 의원들에게 항의 편지를 쓰는 모임입니다.

    이는 현재 미국 내 435개의 지역구 내 어디에서든 볼 수 있는 풍경입니다. 미국 사상 최대 규모의 정치 집회였던 여성행진의 에너지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입니다. 로스퍼스 의원이 여유있는 승리를 거뒀던 피츠버그 북부 교외에서조차 중도좌파, 진보 단체들의 성장세가 두드러집니다. 800만 회원을 자랑하는 온라인 단체 무브온(MoveOn)의 정기 후원자는 트럼프 취임 후 3배 늘었습니다.

    신생 시민 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가운데, 전직 민주당 당직자 두 사람이 시작한 단체 “인디비저블(Indivisible)”은 단연 돋보이는 존재입니다. 현재 미국 전역에 6000개의 소모임이 있고, 로스퍼스 의원의 지역구에도 15개의 모임이 있습니다. 이들은 공화당 의원 사무실로 편지를 쓰고, 전화선이 마비될 때까지 항의 전화를 넣고, 공개된 행사를 찾아가 직접 만나고, 집회를 조직합니다. ”로스퍼스는 어딨나 수요집회“의 자매 집회인 ”투미와 함께 하는 화요일“은 펜실베니아 주 공화당 상원의원인 팻 투미의 사무실 앞에서 매주 화요일 열리는 집회입니다.

    “미국은 대의 민주주의 국가이고 의원이라면 누구나 목표는 재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역구 유권자들의 힘이 대단한 것이죠,” “인디비저블” 창립자인 에즈라 레빈의 말입니다. “인디비저블”은 기존 공화당 강세 지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해 의외의 결과를 이끌어내기도 했습니다. 의원이 트럼프 내각에 발탁되어 공석이 된 조지아의 한 지역구에서도 민주당 소속이 당선되었죠.

    내년 중간 선거에서 민주당이 하원을 빼앗아올 수 있다는 희망적인 전망도 나오고 있습니다. 현실이 된다면 공화당에게는 큰 충격일 것이고, 대통령 탄핵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습니다. 더불어 현재의 “신 진보 시민운동”은 공화당 뿐 아니라 양 당에, 나아가 정당의 본질 자체에 변화를 가져올 가능성도 큽니다.

    오바마 당선과 오바마 정부의 경제 정책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겨났던 보수주의 풀뿌리 운동 티파티와 비교해보면 그런 가능성이 좀 더 분명해집니다. 티파티가 개척한 다양한 전술들을 “인디비저블”도 적극 활용하고 있습니다. “티파티에서 인종주의와 부정적인 가치관들을 제거해보면, 운동 자체로는 상당히 스마트한 전략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레빈의 평가입니다. 하지만 티파티 운동은 절정에 달했을 때도 650개 정도의 소모임이 전부였고, 구성원은 대부분 중산층 백인 중년 남성들이었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죠. 또 풀뿌리 운동이라고는 하지만 리버테리언 계열 단체나 부호들에게 재정적으로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활동은 트럼프의 부상에 필요한 밑그림이 되었을 뿐 아니라, 공화당 지도부의 골칫거리로 자리잡은 40여 명 티파티 정치인들의 하원 당선으로 이어졌습니다.

    “인디비저블”의 잠재력은 더 커보입니다. 민주당이 그 어느 때보다 약화되어 있는 시점에서, 이 단체는 티파티가 공화당에 행사했던 영향력을 초월해, 아예 민주당을 능가하는 존재로 성장할 가능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한 야망을 숨기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최근 선거 담당 조직을 출범시키고, 후보 발굴에 직접 나섰죠. 민주당 경선에서 후보지지 선언도 하고, 충분히 진보적이지 않거나, 트럼프 정부에 제대로 대항하지 않는 후보에게는 압력도 넣을 계획입니다.

    트럼프 덕분에 빼앗긴 땅을 되찾을 절호의 기회를 얻은 민주당에게 이러한 상황은 양날의 검과도 같습니다. “인디비저블” 같은 단체의 압박 하에서 좌파 진정성 증명 경쟁에만 몰두하다보면 중도 유권자들을 잃을 수 밖에 없으니까요. 실제로 공화당 텃밭인 네브레스카 주의 한 시장 선거에서 선전하던 강력한 민주당 후보가 낙태권 반대를 주장하다가 민주당 내부의 공격으로 낙마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민주당이 희망을 가질 이유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성행진 이후 탄력을 받은 시민운동의 공동 분모는 무엇보다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반감입니다. 진정성 넘치는 힙스터 진보주의자들만 참여하는 운동이 아니라는 것이죠. “로스퍼스는 어딨나 수요집회”를 조직한 린다 비숍은 얼마전까지만 해도 공화당원이었던 전직 금융계 종사자였으니까요. 또 다른 시민 단체를 이끌면서 집회를 공동 주최하고 있는 스테이시 버날리스도 스스로를 재정적 보수주의자로 소개하는 은퇴한 변호사입니다.

    새롭게 부상한 세력에게 어필하려는 민주당 정치인들은 우선 이데올로기보다 톤에 신경을 쓰는 것이 좋겠습니다. 지금 사람들이 민주당에 원하는 것은 의회에서 조용히 던지는 한 표가 아니라,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큰 목소리를 내는 인물이니까요. (이코노미스트)

    지지 정당도 대를 이어 물려주려는 미국사회

    사람들에게 종종 “도대체 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그 사람들”이란 트럼프를 찍은 사람들, 또는 클린턴을 찍은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트럼프 지지자를 한마디로 설명하면?”이라는 질문도 받습니다. 제가 “공화당원”이라고 답하면 대부분 실망하죠. “클린턴의 지지자를 한마디로 표현하면?”이라는 질문에 대한 답도 비슷합니다. 그들은 민주당원이죠.

    실망스러운 답이긴 하지만, 지난 60년간 표의 향방을 결정한 것은 정당 일체감(party identification)입니다. 정치학자들은 지지 정당이라는 것이 단순히 정책과 이슈에 대한 한 사람의 시각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정체성의 표현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개인이 지닌 다른 모든 특성과 마찬가지로 가정과 어릴 때 속해 있던 공동체에 의해 형성됩니다.

    또한, 사람들은 이러한 정체성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기를 원합니다. 자녀의 결혼 상대에 대한 선호도를 조사해보면 당에 대한 일체감이라는 것이 얼마나 강해졌는지를 알 수 있죠.

    전미선거연구소(American National Election Study)는 1952년부터 대선 때마다 사람들에게 지지 정당과 투표한 후보를 물었습니다. 1952년과 1956년에는 자신을 공화당 지지자로 여기는 사람의 대부분(96%)이 아이젠하워에게 표를 던진 반면, 자칭 민주당 지지자는 75%가 상대 민주당 후보에게 투표했죠. 리처드 닉슨 시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960, 68, 72년에 공화당 지지자의 90%가 닉슨에게 표를 몰아주었고, 64년 민주당 지지자들도 린든 존슨에게 비슷한 수준의 충성심을 보였습니다. 중간중간 편차가 있기는 했지만, 1980년대 말에 이르자 유권자 대부분이 대선에서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의 후보에게 표를 주었습니다. 확실한 지지 정당 없이, 한쪽 정당을 약간 선호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이 경향은 지난 20여 년간 유지되었습니다. 많은 면에서 예상과 달랐던 2016년 대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교차 투표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죠.

    두 가지 설명이 가능합니다. 두 정당 모두 좋은 후보를 내고 있거나, 정당 지지자들이 비슷비슷한 사람들로 구성되고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또 하나의 요인이 있습니다. 바로 결혼입니다.

    1958년 갤럽은 무작위로 선정한 미국인을 대상으로 다른 모든 조건이 같다면 딸이 민주당 지지자와 결혼하기를 원하는지, 공화당 지지자와 결혼하기를 원하는지를 물었습니다. 당시 공화당이라고 답한 사람은 10%, 민주당이라고 답한 사람은 18%였고, 72%는 답하지 않거나 상관없다고 답했습니다. 저는 2016년 대선을 앞두고 주변 사람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더욱 깊어진 지지 정당에 대한 충성도를 확인할 수 있었죠. 미래의 사위, 며느리가 민주당 또는 공화당 지지자였으면 좋겠다고 답한 사람들이 28%, 27%로 팽팽한 접전을 보였고, 상관없다고 하는 사람은 45%에 그쳤습니다. 답변자의 지지 정당을 살펴보아도 경향성이 뚜렷했습니다. 1958년에는 민주당 지지자도 딸이 민주당 지지자와 결혼했으면 좋겠다고 하는 사람이 33%, 공화당의 경우에도 25%에 그쳤지만, 2016년에는 각 정당 지지자의 60% 이상이 사위, 며느리의 지지 정당에 대해 뚜렷한 선호를 보였습니다.

    미국에서 각 정당 지지자들은 현재 그 어느 때보다도 동질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특정 사안에 대해 시각이 같을 뿐 아니라, 인종, 민족 등 모든 면에서 비슷하죠. 그리고 점점 더 주변을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로 채우고 싶어 하며, 그 같은 환경이 자손 대대로 이어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뉴욕타임스)

    낙태 문제에 집착하는 공화당, 그 속사정은?
    낙태에 반대하는 미국 공화당은 요즘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하원에서 임신 20주차 이후의 낙태를 금지하는 법안이 통과됐고, 상원에서도 공화당 의원 34명이 같은 내용의 법안을 올려놓았습니다. 올 상반기 18개 주가 낙태에 다양한 형태로 제한을 두는 법을 도입했습니다. 민주당은 낙태 제한에 열을 올리면서도 남녀 급여 차별 철폐나 가정폭력에 관한 법안을 두고 미적대는 공화당에게 “여성과의 전쟁”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비난하고 있습니다. 강간으로 임신하는 경우는 “매우 적으니” 강간으로 인한 낙태도 인정할 수 없다거나, 20주 된 태아도 (단, 남자아기만) 자위행위를 한다는 이야기는 실제로 공화당 의원들의 입에서 나온 말로, 민주당의 공격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실제로 투표자의 53%가 여성인 미국에서는 이런 식의 발언이 선거 패배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여성들의 확고한 지지를 받고 있는 이유도 비슷한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2008년 이래 남성들 사이에서 오바마 지지율이 4%p 빠진데 비해, 여성들의 지지율은 1%p 내려갔을 뿐입니다. 민주당이 공화당을 성차별주의 정당이라 공격하면, 진보 성향이 강한 젊은 미혼 여성들 사이에서 투표율이 높아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화당은 끊임없이 낙태와 관련된 입법을 추진합니다. 의회에서 통과될 가능성도 낮고, 만에 하나 통과되더라도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거나 법원에서 무효 판결이 나게 될텐데도 말이죠. 보수단체의  한 전문가는 기독교인들이 여전히 가장 열성적인 공화당 지지세력인데다 실제로 투표장에 나타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집단이기 때문에 공화당으로서도 이들을 무시하는 전략을 택할 수는 없다고 설명합니다. 공화당은 “여성과의 전쟁”이란 비난이 어불성설이라고 말합니다. 남녀 간 임금 차별을 옹호한다는 비난에는 고용주에게 소송을 거는 것이 지나치게 쉬워질까봐 신중하게 접근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낙태 합법화에 찬성하는 여론이 높기는 하지만 임신 후기로 갈 수록 낙태에 반대하는 사람이 많아진다며, 민주당의 무조건적인 낙태 제한 반대도 역풍을 맞게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낙태라는 사안은 유권자들에게 그다지 중요한 고려 대상이 아닙니다. 최근 이코노미스트와 YouGov가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선거에서 낙태가 가장 중요한 사안이라고 생각하는 유권자는 4%에 불과했습니다. 31%가 중시하는 문제는 바로 경제였죠. 여론 조사원으로 참여한 한 공화당원은 민주당이 실망스런 경제 상황으로부터 유권자들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여성과의 전쟁”을 물고 늘어진다고 주장하면서, 이런 점을 제대로 부각시키면 민주당의 공격을 물리칠 수 있을거라고 말했습니다. (Economist)
    대량멸종 이후 작은 척추동물들만 살아남았다

    Headline: 대량멸종 이후 작은 척추동물만 살아남았다

    Summary:  3억 5천9백만 년 전 대량멸종 이후 척추동물의 몸집은 크게 작아졌고, 3천6백만 년 가량 이런 상태가 지속됐다.

    Body text:

    상어에서 기린까지, 지구에서 가장 크고 가장 장엄한 종들 중 많은 수가 멸종 위기에 놓여 있다. 화석 기록에 대한 새로운 연구에서 대형 척추동물이 일단 사라지고 나면 진화를 통해 이들이 복원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보였다. 수천만 년 동안 대부분의 동물은 작아진 몸집을 유지했다.

    지난 목요일 사이언스 지에 출판된 이번 논문은 펜실베니아대 고생물학자 로렌 살란이 수행한 연구의 결과물이다.

    3억5천9백만 년에서 3억2천3백만 년 전의 기간인 미시시피기에 살았던 어류를 연구하던 살란 박사는 이들이 조상에 비해 현저히 작다는 것을 알아냈다.

    “호기심이 동했습니다.” 살란 박사가 인터뷰를 통해 밝혔다. “이 물고기들은 왜 작은 걸까?” (동료 고생물학자들은 살란에게 정어리 여왕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동물 그룹들의 몸크기가 작아지는 것은 다른 고생물학자들도 예전부터 알고 있는 현상이었다. 이런 현상은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에 등장하는 아주 작은 인간들이 사는 가상의 섬 이름을 따서 릴리퍼트 효과라고 불린다.

    연구자들은 릴리퍼트 효과가 갑작스러운 대규모 멸종 이후에 나타난다는 것을 발견했다. 살란 박사의 어류도 이 패턴에 맞아들어가는 것으로 보인다. 이 어류들은 데본기 말, 3억5천9백만 년 전에 있었던 대량멸종 이후 몸크기가 작아졌다.

    과학자들은 이 대량멸종이 빙하가 열대지방까지 내려오게 만든 전지구적인 기후 냉각으로 인해 발생했다고 보고 있다. 엄청난 추위로 인해 어류 및 발가락이 있는 발로 막 땅 위를 기어다니기 시작한 초기 육상 척추동물(네발동물이라고 한다) 모두에게 혹독한 환경이 닥쳤다. 추정에 따르면 미시시피기가 시작되면서 모든 척추동물의 96 퍼센트가 멸종했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이 릴리퍼트 효과가 얼마나 중요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지 못했다. 그동안 고생물학자들이 연구해 온 사례는 적은 수의 종 그룹들에 한정됐고, 대개는 대량멸종 직전과 직후의 그리 길지 않은 시기에 걸친 화석들만 집중해서 연구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학자들은 이러한 엄청난 축소현상이 착시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작은 몸집의 화석이 큰 몸집을 가진 화석들보다 더 쉽게 보존될 수 있을리라는 점을 지적했다. 살란 박사는 릴리퍼트 효과가 실재하는 것인지 더 철저하게 검증해보기로 했다.

    살란 박사는 칼라마주 칼리지의 학부생이었던 앤드류 K. 갈림버티와 함께 데본기와 미시시피기에 살았던 모든 알려진 척추동물 종들을 살펴보았다. 온라인 데이터베이스와 디지털화된 화석 스캔 자료를 이용해 살란 박사와 갈림버티는 화석 척추동물 1천 1백 2십 마리의 몸길이를 측정*했다.

    (*원문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자면 ‘추정’ 이어야겠지만, 독자들 이해에는 ‘측정’ 이 편할 것 같습니다. 칼 짐머가 추정이라고 쓴 이유는 몸길이 측정 과정에서 실제로 측정한 표본도 있지만 전체 몸 길이를 측정할 수 없는 일부 경우에는 측정 가능한 부분을 측정하고, 외삽을 통해 전체 몸길이를 ‘추정’ 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https://nopeoplestime.wordpress.com/2015/11/13/small-fish/ 여기를 보면 “이들은 출판된 논문, 박물관의 표본, 사진 및 부분적으로 남아있는 화석에서 해당 종에 대해 알려져 있는 특징들을 기반으로 전체 몸크기를 외삽하는 방식 등으로 몸크기에 대한 정보를 모았다” 라고 합니다.)

    이들은 3억5천9백만 년 전의 대량멸종 이후 척추동물이 이전보다 평균적으로 더 작아졌으며 그 상태가 3천6백만 년 동안 지속됐다는 것을 발견했다.

    스미소니언 연구소 고생물학 큐레이터 피터 J. 와그너는 이번 연구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해당 연구의 강점 중 하나는 이 연구가 긴 기간을 다루고 있다는 것이라고 한다.

    기존 연구들은 “(멸종) 이전과 이후에 생물들이 어땠는지를 보여주는 스냅샷에 가까웠습니다”라는게 와그너의 말이다. “이 연구는 그보다 훨씬 긴 기간을 다룹니다.” 와그너 박사는 새 연구와 함께 사이언스 지에 실린 논평을 썼는데, 서로 다른 여러 그룹에서 경향성을 조사해 릴리퍼트 효과를 샅샅히 해부하고 있는 연구이기 때문에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어떤 그룹들은 미시시피기 동안 작아진 몸크기를 그대로 유지했으며 다른 그룹들에서는 지속적으로 몸크기가 작아졌다. 예를 들어, 상어의 경우 1미터가 넘는 몸길이가 10센티미터 정도로 줄어들었다. 우리와 더 가까운 관계인 네발동물의 경우 개 정도의 몸크기에서 고양이나 그보다 더 작은 크기로 줄어들었다.

    모든 척추동물이 작아졌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몇몇 척추동물은 더 커지기도 했다. 예를 들어 리조돈티드라고 불리는 괴물처럼 커다란 물고기 그룹 중에는 거의 범고래만큼이나 커진 종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 거대한 척추동물 그룹에서는 새로운 종들이 많이 생겨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은 다양성이 감소하여 결국 멸종하고 말았다. “리조돈티드 주(Rhizodontid Week )” 대신 “상어 주(Shark Week)” 가 있는 이유다.

    살란 박사는 이런 패턴이 릴리퍼트 효과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데본기 말에는 작은 척추동물이 진화적인 이점을 가지고 있어 멸종당할 위험이 더 적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작은 척추동물들은 아마도 빨리 성장하고 어릴 때 번식을 하여 생태적 교란에 덜 취약했을 것이다.

    하지만 엄청난 추위가 끝난 후에도 대형 척추동물의 다양성은 오랫동안 회복되지 못했다. 살란 박사는 이것이 지구의 생태계가 훼손된 채로 수백만 년 동안 지속되어 척추동물의 생존에 계속되는 어려움을 초래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다. “부족한 자원으로 더 많은 활동을 해야했을 겁니다.” 살란 박사의 말이다.

    작은 척추동물은 대량멸종으로 인해 생긴 생태계의 빈 틈에 적응해가면서 지구를 장악했다. 그런 생태계의 빈 틈을 채우는 데는 상상도 못할 만큼 긴 시간이 걸렸을 것이라고 살란 박사는 주장한다. 척추동물은 상대적으로 수월한 생태계의 빈틈을 모두 채우는 것을 끝내고 나서야 다른 생태적의 빈틈을 비집고 들어가는 새로운 성장패턴을 진화시키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몸이 커지게 되었다.

    살란 박사는 3억5천9백만 년 전 있었던 대형 척추동물의 멸종과 오늘날 대형 척추동물이 천천히 사라져가는 모습이 걱정스러울 정도로 닮은꼴이라고 보고 있다.

    만일 대형 척추동물의 다수가 멸종하게 된다면 진화를 통해 이들 대형 종들이 빠른 시일 내에 돌아오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전지구적 생태계가 와르르 무너져 지금과 다른 상태로 변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즉, 작은 척추동물이 생태계를 지배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살란 박사의 말이다. “그리고는 수백만 년 동안 그 상태로 머무르는 데 만족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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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ption:

    최소 3억 년 전, 미시시피기의 소형 상어와 어류들 모습. 연구자들이 대량멸종 이후 일부 종 그룹에서는 몸크기가 줄어들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사진 제공: 밥 니콜스

     

    미시시피기의 소형 해양 조기어류 프로케라말라(Proceramala)의 화석.

    사진 제공: 로렌 살란

     

    Byline:

    칼 짐머는 매주 <뉴욕타임스>에 “Matter”라는 제목의 과학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갑작스런 추위: 기후 냉각과 해수면 변화로 인한 악어류의 쇠퇴

    해수면의 오르내림과 전 세계적으로 추워진 기후 탓에 지난 수백만 년 동안 악어류의 종 수가 크게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악어류는 오늘날 볼 수 있는 크로커다일, 앨리게이터, 케이먼, 그리고 가비알 및 이들의 멸종한 조상들을 포함합니다. 현재의 악어류는 백악기 말, 약 8,500만 년 전에 처음 나타났으며 악어류의 멸종한 친척들은 2억 5천만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풍부한 진화의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멸종한 악어류 및 그 친척들은 사르코수쿠스처럼 몸길이 12미터, 몸무게 8톤에 달하는 거대한 육지악어를 포함하여 다양한 형태와 크기를 보여줍니다. 악어류는 바다에도 서식했는데, 예를 들어 탈라토수쿠스류는 지느러미를 비롯해 상어와 비슷한 형태의 꼬리를 지니고 바다에서도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6,600만 년 전 공룡의 대부분을 멸종시킨 대량멸종 사건에서 다수의 악어들이 살아남았지만 오늘날에는 23종만이 남아 있으며 그 중 여섯 종은 국제자연보호연맹(International Union for Conservation of Nature and Natural Resources, IUCN)의 멸종위기종 목록에서 위급(critically endangered) 상태로, 네 종은 위기(endangered) 혹은 취약(vulnerable) 상태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네이처 커뮤니케이션(Nature Communications)> 에 출판된 새로운 연구에서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 옥스포드대학, 스미소니언 연구소 및 버밍엄대학의 연구자들이 알려진 모든 악어류 및 화석 기록에 대한 데이타를 종합하고 과거 지구의 기후에 대한 자료를 분석했습니다. 이들은 파충류들이 미래의 기후 변화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이해하기 위해 악어류가 과거의 기후 변화에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알아보려고 했습니다.

    악어류는 외온성 동물입니다. 외부 환경의 열원, 즉 태양에 의존해 열을 얻습니다. 연구자들은 유럽과 미국과 같은 고위도 지역에서는 기온이 떨어진 것이 악어류 및 그 친척들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고 결론내렸습니다.

    저위도 지역에서 악어류의 쇠퇴는 여러 대륙에 걸쳐 저위도 지역의 기후가 건조해지면서 일어났습니다. 예를 들어 1,000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는 악어류들이 번성했던 광활하고 식물이 우거진 습지가 사라지고 사하라 사막이 생겨나고 있었습니다. 남아메리카에서는 안데스산맥이 융기하면서 500만 년 전 악어류들이 살고 있었던 원시 아마존의 거대한 습지 서식지가 사라졌습니다.

    해양 악어류들은 한때 바다 전체에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연구팀은 해수면 변화가 이들 해양 악어류의 다양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예를 들어 해수면이 높을 때는 대륙붕이 넓어져서 해안선을 따라 악어들은 물론 악어들의 먹이가 되는 동물들이 살기에 좋은 조건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다양한 해양 악어류가 번성했습니다.

    흥미롭게도 백악기-팔레오기 대량멸종 사건은 6,600만 년 전 대부분의 공룡을 포함하여 지구 상의 수많은 동물들을 멸종시켰지만, 악어류 및 그 멸종한 친척들에게는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연구팀은 이 당시 악어류 중 몇몇 그룹은 멸종했으나 살아남은 그룹들은 원래 살던 서식지에서 벗어나 빠르게 퍼져 빈 자리를 차지하는 이점을 누렸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연구팀은 향후 전 세계적 기후변화에 의해 만들어지는 따뜻한 세상이 악어류의 다양성 증가를 이끌 수 있을 것이라고 보고 있지만 인류의 활동이 악어류의 서식지에 계속해서 안 좋은 영향을 크게 끼칠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 지구과학 및 공학과에 근무하는 공동 주저자 필립 매니언 박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악어류는 공룡시대 때부터 존재했기 때문에 살아있는 화석이라고 불리곤 합니다. 수백만 년 전에 악어류와 그 멸종한 친척들은 열대에서부터 고위도 지방, 깊은 바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환경에서 번성했습니다. 하지만 기후가 변화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으며 악어류들은 따뜻한 지방으로 후퇴했습니다. 악어류는 무섭기로 유명하지만 이들은 사실 생태적으로 취약한 상태입니다. 과거의 상태를 돌아보면서 어떤 환경적 요인들이 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는지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악어류들이 미래의 변화에 어떻게 대응할지도 알아내는 것에 도움이 될 겁니다.”

    연구팀은 추가 연구를 통해 악어류와 유사한 패턴을 포유류나 조류 등 긴 역사를 가진 다른 화석 그룹에서도 찾을 수 있는지 살펴보고 과거의 기후가 이들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조사할 계획입니다. (사이언스 데일리)

    ‘기후 변화(Climate Change)’ 보다 ‘지구 온난화(Global Warming)’가 더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미국인들

    일상적으로 기후 변화와 지구 온난화는 동등한 현상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과학자들은 지구 온난화보다 기후 변화라는 용어 사용을 선호하죠. 지구의 평균 온도가 상승하는 현상만을 가리키는 지구 온난화와는 달리, 기후 변화라는 용어는 지구 온난화로 인해 발생하는 심각한 폭풍, 가뭄과 같은 이상 현상까지 포괄하는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용어 선택에 신중해야 할 집단은 비단 과학자들 뿐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예일대학 연구팀은 얼마전 같은 대상을 가리키지만 이를 지시하는 용어의 선택에 따라 사람들의 반응에도 차이가 나타나는 현상을 확인했습니다. 기후 변화와 지구 온난화라는 실질적으로 같은 현상을 묘사하는 두 개의 용어를 제시한 후 각 현상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를 묻는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놀랍게도 응답 결과에서 유의미한 차이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기후 변화를 나쁘게 본다는 응답률은 63%인데 비해, 지구온난화를 나쁘게 본다는 응답률은 이보다 13%P 높은 76%에 이르렀습니다.

    지구 온난화 혹은 기후 변화가 개인의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인지 묻는 설문에도 기후 변화보다 지구 온난화에 대한 부정적 반응이 더 크게 나타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히스패닉의 경우, 전체 응답자의 60% 가량이 지구 온난화가 개인의 삶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라 응답한 반면, 기후 변화 역시 그럴 것이라는 의견은 30%에 불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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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ource: Yale Project on Climate Change Communication and George Mason University Center for Climate Change Communication

    여러 실험군들 중 지구 온난화와 기후 변화의 용어 선택에 가장 둔감한 반응을 보인 집단은 공화당 지지자들이었습니다. 용어 선택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다른 집단과는 달리 이들 집단이 가장 둔감한 반응을 보인 이유는 지구 온난화 혹은 기후 변화라는 문제에 별다른 관심이 없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공화당 소속 정치인들은 용어의 선택이 유권자들의 반응에 큰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2002년 공화당의 선거 전략가로 활약한 프랑크 룬츠(Frank Luntz)는 선거 유세에서 지구 온난화란 말 대신 기후 변화라는 용어를 사용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지구 온난화라는 표현은 상황의 비극성, 재앙적 성격을 다소 감정적인 경로로 전달하여 문제에 대한 대중의 부정적 인식을 강화시키는 경향이 있는 반면, 기후 변화라는 용어는 좀더 통제 가능한 상황을 암시함으로써, 대중들이 상황에 덜 감정적으로 반응하도록 합니다.”

    결국, 2002년 선거 당시, 지구 온난화 혹은 기후 변화라는 쟁점에서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입장을 취했던 공화당이 당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최소화하기 위해 기후 변화라는 용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했다는 것이죠.

    여론 기관들은 이처럼 용어의 선택이 응답률에 미치는 영향력을 최소화하기 위해 ‘기술적으로 정확한 표현을 사용할 것’, ‘정치적으로 중립적일 것’, ‘일반인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을 사용할 것’ 등 몇 가지 원칙들을 상정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원칙들 역시 개인의 관점에 따라 그 의미가 충분히 달라질 수 있어, 용어가 인식에 미치는 영향을 완벽하게 배제하기는 힘듭니다. (NYT)

    녹색정책은 실패했습니다

    7년전, 영국 보수당의 당수 데이비드 캐머런은 개 썰매를 타고 노르웨이의 빙하를 방문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보수당에 투표하고, 청정에너지를 개발하자는 “Vote Blue, Go Green” 구호와 함께 지지를 호소했습니다. 기후변화 지지자들은 그의 승리를 유럽이 재생에너지에 모든 자원을 투자하겠다는 전환점으로 해석했습니다.  1년 뒤 호주의 총리가 된 케빈 러드는 기후변화를 “인류가 당면한 가장 큰 위기”로 정의했습니다. 그리고, 2008년 바락 오바마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사악한 부시를 대신해 지구온난화를 멈추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한동안 오바마는 그의 약속을 지킬 것처럼 보였습니다. 당시의 그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없었습니다. 1년뒤 그는 노벨상을 받았고, 전 세계를 통털어 가장 높은 인기와 권력을 누렸으며, 지구상의 모든 지도자들은 그의 옆에서 사진 한 장 찍기만을 바랬습니다.

    2009년 코펜하겐 기후변화회의는 오바마가 자신의 힘으로 지구를 구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와 민주당은 워싱턴을 장악하고 있었고 그에게는 두려운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코펜하겐 회의는 최근의 여느 기후회의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결과를 내놓지 못했습니다. 그는 온실가스를 줄이자는 협약에 인도, 중국, 브라질을 설득하지 못했고, 자신이 속한 민주당조차도 설득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기후변화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더욱 도덕적으로 무장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표를 위해 어떤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댓가도 치룰것처럼 보였습니다. 나와 같은 회의주의자들은 항상 무시되었고, 녹색정책을 지지하던 정치인들 역시 계속해서 자신들의 주장을 고수했습니다.

    지난 주, 재생에너지를 가장 지지하던 한 정치인은 자신의 실패를 인정했습니다. 호주의 총리 케빈 러드는 탄소세를 폐지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런 정책을 지지하던 다른 정치인들도 비슷한 실패를 겪고 있습니다. 셰일가스를 제외한 어떤 재생에너지도 현실적인 미래 에너지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독일과 스페인처럼, 가장 앞장서서 재생에너지에 투자했던 나라들도 이에 대한 예산을 삭감하고 있습니다. 블레이비의 로손 경은 재생에너지 분야의 평균주식은 지난 5년간 1/5로 떨어졌다고 주장합니다.

    “한 회사가 파산하면, 곧 그 다음 회사가 파산하고 있습니다.”

    재생에너지에는 커다란 투자가 이루어졌지만, 아직 이를 정당화할만한 결과는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교토협약 이후 온실가스 배출은 계속해서 증가했고, 1990년 이후 그 증가량은 50%에 이릅니다. 중국의 온실가스배출 증가량은 유럽의 핵심국가들이 감소시킨 량의 25배에 달합니다. 유럽이 온실가스를 감축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들이 사용할 물품들을 직접 만들지 않고 수입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수입품에 소모된 탄소발자국(carbon footprint)을 모두 계산한다면, 유럽 역시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뵨 롬버그는 유럽의 노력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이야기합니다. 그의 계산에 따르면, 독일은 기후변화를 막기위해 100조원에 달하는 재생에너지 투자와 값비싼 전기요금을 물고 있지만, 이로 인해 지구온난화는 37시간 늦춰질 뿐입니다.

    녹색주의자들이 만약 기후변화정책의 실패를 세계적 경제위기 탓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스스로를 속이는 짓일 것입니다. 그들은 항상 시장의 힘을 무시해 왔습니다. 지구상의 어떤 개발국가의 지도자라도 그가 조금이라도 정신이 제대로 박혀 있다면, 값비싼 에너지원을 사용하기 위해 국가의 경제발전을 미루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정책이 인도의 병원에서 약을 보관하기 위한 냉장고를 금지하거나, 중국의 학생이 밤늦게 책을 읽지 못하도록 만든다면, 그 정책은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나는 기후변화가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나는 기후변화가 사실이며 이것이 인간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는 과학자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만한 자격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기후변화정책에 대한 나의 반대는 이 정책이 과연 현실적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정책은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는데 실패했습니다. 앞으로도 재생에너지의 가격이 기존 에너지의 가격과 비슷해지지 않는다면, 이 정책은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때 까지는, 부유한 환경주의자들의 요구를 경제성장과 사회정의를 바라는 가난한 수십억 명의 요구보다 우선시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지난 20년간의 녹색정책은 지구온난화를 멈추는데 실패했을 뿐 아니라 영국의 연금수령자와 다른 개발국가들에게 강제로 값비싼 전기요금을 내도록 만들었습니다. 기존 에너지 산업이 가난한 나라로 옮겨가면서 본국의 노동자들은 직장을 잃었습니다. 아름다운 경관은 새들을 썰어버리는 바람개비로 뒤덮였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잃어버린 기회비용이 있습니다. 지난 25년간 지구온난화를 막기 위해 투자된 비용을 가지고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요? 흥미로운 책인 “75조원으로 지구를 살만하게 만드는 방법”에는 지구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정치인들이 택할 수 있는 현실적인 정책들, 예를 들어 에이즈의 예방,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영양공급, 말라리아 방제, 깨끗한 물의 공급, 자유로운 교역 등의 방법들이 정리되어 있습니다.

    많은 영국의 정치인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주 통과된 영국의 법령에는 작년과 마찬가지로 재생에너지에 대한 투자를 멈추지 않을 것임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 법령들이 영국의 산업과 소비자들에 의해 배척당하기 전까지는 우리는 아무런 현실적 효과가 없는 일에 커다란 비용을 지불하고 있는 것입니다. (Times)

    “지구온난화 현상을 막기 위해서는 육식을 반드시 줄여야 합니다.”

    인류가 육류와 유제품 소비를 줄이지 않는 이상 지구 온난화 현상을 막기는 어려울 것이란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습니다. 주요 온실가스 배출원들 중의 하나인 농업 영역에서 육류와 유제품 소비를 줄이지 못하면, UN이 상정하고 있는 ‘2도 제한’ 목표를 도달 할 수 없다는 결론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UN은 기후 변화로 인한 대재앙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산업혁명 이전 시기를 기준으로 지구 평균 온도가 섭씨 2도이상 상승하지 않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 경고해왔습니다. 이 2도 제한 기준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온실가스 배출 감량이 필수적 과제로 인식되었죠. 현재 에너지 분야에서 탄소세 도입이나 재생에너지 자원 개발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이유도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에너지 분야와 마찬가지로, 농업분야 역시 온실가스 배출 감량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습니다. 업계는 그동안 선진화된 경작 및 사육 기법을 도입해 생산 효율을 높이고 공급망과 재고 관리를 통해 낭비되는 작물과 육류의 양을 줄여왔습니다. 하지만, 연구진들은 이러한 기술적 노력만으로 지구 온난화 현상을 막는데는 분명 한계가 있다는 의견을 보였습니다.

    연구팀은 가축과 경작지에서 배출되는 아산화질소 및 메탄가스 배출량이 2070년경에는 현 수준의 2배가 될 것이라 전망했습니다. 연구를 주도한 프레드릭 헤데누스(Fredrik Hedenus) 박사는 이 예측을 바탕으로 2070년까지의 온실가스 누적 배출량을 계산해봤을 때, 농업 분야에서의 가스 배출만으로도 지구의 평균 온도는 섭씨 2도이상 올라가게 될 것이라 예측했습니다. 이는 농업 분야의 도움 없이는 UN의 ‘2도 제한’ 목표를 달성하는 일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헤데누스는 지구 온난화의 위기로부터 인류를 구하기 위해서는 육류와 유제품 소비를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생태 피라미드 위치상, 작물보다 훨씬 더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육류와 유제품 소비를 줄이는 것이 온실 가스 배출량을 줄이는데 더 효과적인 방법이라 설명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러한 노력이 인류의 선택이 아닌 의무가 될 것이라 전망했습니다. 그는 생산 공정의 효율을 높이고 혁신적인 영농기법을 고안한다 할지라도 소비량 자체를 줄이지 못한다면 지구 온난화 진행을 막지 못할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영국의 가디언지는 헤데누스의 주장에 동감하면서도 육류 소비에 대한 인류의 무한한 사랑을 고려할 때 자발적으로 육류 소비가 줄어드는 일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입장을 보였습니다. 가디언지는, 필요하다면, 육류나 유제품에 높은 탄소세를 매겨 소비 패턴을 유도하는 것도 좋은 방안이 될 수 있다 주장했습니다. (the Atlantic)

    하트랜드 인스티튜트, “기후변화는 거짓말” 억지 주장

    매년 유엔(UN)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가 기후변화에 관한 심각성을 경고하는 보고서를 발간할 즈음에 맞춰 언론의 주목을 받으려 안간힘을 쓰는 단체가 하나 있습니다. 하트랜드 인스티튜트(Heartland Institute). 과학자들이 모여 연구를 하는 연구소라고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이 기관이 말하는 과학은 사이비 과학이라고 폄하합니다. 하트랜드 인스티튜트를 운영하는 자금을 대는 이들은 억만장자 코크(Koch) 형제를 비롯해 티파티, 공화당 강경파 의원, 보수주의자들을 지원하는 이들로 알려졌습니다. 얼마 전 온난화와 기후변화의 정도가 더욱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경고한 유엔의 보고서가 발간되자, 하트랜드 인스티튜트는 예외없이 이를 반박하는 의견을 제기했습니다. 이들의 주장이 사이비 과학인지, 아니면 진지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는 내용인지 독자 여러분들이 한 번 판단해보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연구소 내 과학자들의 의견은 크게 두 가지로 갈린다고 합니다. 하나는 기후변화는 실재하지 않는 완전한 허구라는 주장, 다른 하나는 지구가 조금 따뜻해지는 건 실제로 인류에게 재앙이 아니라 축복이 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최근 하트랜드 인스티튜트가 내놓은 주장의 핵심은 기후변화가 지구에 꼭 나쁘지만은 않다는 겁니다. 유엔의 기후변화 보고서를 반박하는 논문의 대표저자인 이드소(Craig Idso)는 대표적 온실가스인 이산화탄소 농도가 조금만 높아져도 콩이 훨씬 빨리 싹을 틔우고 잘 자란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당신이 사람이 아니라 콩이라고 가정해보세요. 기후변화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지 않을까요?”라고 말했습니다.

    과학적 사실과 실험에 기반한 연구 논문이라면 관련된 참고문헌이 있겠죠. 하트랜드 인스티튜트의 보고서에도 참고문헌들이 있습니다. 최근의 연구가 반드시 옳다고 볼 수는 없지만, 하트랜드 인스티튜트 보고서의 참고문헌 대부분은 1970년대에 발표된 논문들입니다. 21세기에 발표된 논문은 단 하나. 1904년과 1918년 논문도 당당히 이름을 올렸습니다. 기후변화는 전부 거짓말이라는 주장은 대담하지만, 과학적인 반박이라고 보기엔 다소 무리가 있는 부분입니다.

    하트랜드 인스티튜트는 미국의 석유, 석탄 등 화석에너지 관련 기업, 이익단체들의 집중적인 지원을 받으며 환경보호국(EPA)과 대립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과거 집 지붕에 태양전지판을 설치하는 이들에게 세금을 부과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관계자들의 어록 몇 가지를 더 소개합니다.

    은퇴한 물리학자 싱어(Fred Singer): (지구의) 기온이 올랐다는 데는 (과학자들의) 합의가 이뤄졌습니다. 다만 그게 이산화탄소 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어요.

    하트랜드 인스티튜트 배스트(Joseph Bast) 소장: 인간의 활동이 기후변화에 영향을 안 미쳤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그 정도는 정말 미미해요. 이산화탄소의 (자연적인) 증가가 더 큰 이유라고 볼 수 있겠죠. (Guardian)

    UN, “개도국에서 뿜는 온실가스, 선진국도 당연히 책임 있다”

    UN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 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가 오는 4월 발표할 예정인 보고서 초안 내용을 영국 일간지 가디언(Guardian)이 입수해 보도했습니다. IPCC는 세 번째로 발간하는 보고서에서 선진국 소비자들의 상품에 대한 수요가 중국을 비롯해 세계의 공장으로 떠오른 개발도상국에서의 생산을 지속적으로 부추기면서 이산화탄소와 같은 온실가스 배출을 위탁한 셈이 됐다는 내용을 데이터와 함께 지적했습니다.

    21세기 첫 10년 동안 지난 20세기의 마지막 30년보다 온실가스 배출량이 두 배나 빠르게 늘어났습니다. 가장 큰 요인은 중국과 개발도상국들이 공장을 가동할 때 떼는 석탄에서 나오는 온실가스들인데, 연간 온실가스 배출량 14기가톤 가운데 2기가톤 이상이 선진국들에 수출할 제품들을 만드는 과정에서 배출되는 가스인 것으로 집계됐습니다. 개발도상국 가운데 공산품 수출을 많지 하지 않는 나라들의 온실가스 배출량은 훨씬 완만한 증가세를 나타냈고, 빈곤국가들의 온실가스 배출량은 1990년과 거의 같은 수준이었습니다.

    중국, 인도를 비롯한 개발도상국의 공장들이 미국, 유럽의 공장들보다 더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하고, 개도국 내에서 늘어난 중산층들이 차를 갖게 되고 비행기로 여행을 더 많이 다니면서 더 많은 온실가스 배출에 기여하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 됐습니다. 하지만 인구 1인당 온실가스 배출량을 따져보면 여전히 중국, 인도는 미국이나 유럽 선진국들보다 낮습니다. 온실가스 관련 논의가 있을 때마다 중국과 인도가 선진국들의 위선을 비난하며 차용하는 논거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만드는 제품이 결국 다 당신들 선진국들이 소비할 물건이기도 한데다, (1인당 배출량을 따져보면) 절대적인 배출량이 많은 것도 아닌데 선진국들이 모든 책임을 개발도상국에 전가하려 한다”는 거죠.

    각국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문제라 쉽사리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기후변화 자체도 더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됐습니다. 이미 산업화 이후 지구의 평균온도는 0.8℃ 상승했고, 빠른 시일 내에 협의를 통해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지 않으면 기후변화가 재앙이 되어 돌아올 거라는 경고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Guardian)

    환경운동가 “더 많은 원자력발전소를 지어야 한다고?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마!”

    지난 주 월요일, 뉴스페퍼민트는 지구온난화 현상이 더 진행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재생에너지보다 원자력 에너지에 더 의존할 필요가 있다는 기후과학자들의 의견을 소개한 바 있습니다. 이러한 기후과학자들의 의견에 환경운동가들이 대대적으로 반발하고 나섰습니다.

    미국 천연자원보호협회(Natural Resource Defense Council)는 원자력 발전이 지구온난화 현상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원자력발전소를 짓기 위해 필요한 풍부한 자본력, 아주 높은 수준의 기술력, 원전을 둘러싼 안전성에 대한 높은 의구심으로 인하여 원자력 발전이 화석연료를 대신할 현실적인 수단이 되기는 힘들다는 것이죠. 대신에, 협회는 에너지 효율을 높여 탄소배출량을 줄이는 것이 가장 빠르고 저렴한 해법이 될 것이라 얘기합니다.

    시에라 클럽(Sierra Club)의 최고 책임자 마이클 브룬(Michael Brune)은 일본의 후쿠시마와 러시아의 체르노빌, 미국의 스리마일 아일랜드 원전 사고를 통해서 우리가 얻어야할 교훈은 원자력발전이 아주 위험하다는 사실에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이어서, 독일과 같은 경제 강대국이 원자력 발전소를 폐쇄하고 재생에너지 체제로 나아가게 된 이유도 원전의 위험성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미국의 그린피스(Greenpeace)는 기후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빠르고, 안전하며, 적당한 가격의 해결책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원자력발전소는 이 중 어느 요소도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의견을 보였습니다.

    클라이메이트프로그레스(ClimateProgress)의 조 롬(Joe Romm)은 다른 환경운동가들과 마찬가지로 원자력 발전이 너무 비쌀 뿐만 아니라 안전성에도 문제가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특히, 태양광과 풍력 발전은 기술이 상용화된 이후로 지속적으로 비용이 감소하여 태양광의 경우 1977년 이후로 99%나 하락했지만 원자력 발전의 비용은 오히려 상승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런 경향이 지속되는 한 원자력 발전의 가격적인 매력 또한 점점 더 퇴색될 것이라 예상합니다. (Grist)

    지구온난화 현상의 기정사실화?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 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에서 5~6년마다 주기적으로 발행되는 보고서에서 최근 몇 십년 동안의 지구의 가파른 온도 상승이 주로 인간 활동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며, 계속 이와같은 속도로 지구 온도가 상승한다면 21세기 말에는 3피트(약 1미터)이상 해수면이 상승할 것이란 거의 확정적인(nearly certain) 전망이 나왔습니다.

    미 전 부통령 알고어와 함께 2007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수백명의 과학자들에 의해 직접 편찬되고 있는 이 보고서는 세계적으로 기후 변화와 관련된 위험을 평가하는데 확정적인 근거로 간주되고 있어 많은 정부 관계자들의 환경 정책 입안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합니다.

    1988년을 처음으로 올해로 다섯번 째 보고서를 출간하게 되는 IPCC는 이번 호에서 좀더 확정적인 톤으로 인간의 활동을 기후변화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고, 기온•해수면 상승과 같은 환경위험의 심각성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일례로, 이 보고서는 현재 대기 중 이산화탄소의 농도가 산업혁명 이전 시기와 비교하여 41%이상 증가했고, 지금의 상승률이 미래에도 지속된다면 십수년안에 2배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일뿐이다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대기중 이산화탄소 농도가 2배가 되면, 지구의 평균 온도는 화씨5도(약 섭씨 2.8도) 이상 상승할 것으로 보이며 극지방에서는 화씨 10도(약 섭씨 5.5도) 이상 상승할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지구의 온도 상승은 극지방의 얼음을 녹이고, 극도의 폭염을 발생시키며, 식생과 동물의 생태계에 큰 교란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예상됩니다. 더욱이, 극지방의 해빙작용으로 인하여 21세기 말에는 적게는 10인치(약 25cm)에서 많게는 3피트(약 1m) 이상의 해수면 상승이 일어날 것으로 예측되고 있어, 해수면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는 뉴욕, 런던, 샹하이, 베니스, 시드니, 오스트레일리아, 마이애미, 뉴올린스와 같은 도시들이 일부 수몰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하지만 IPCC의 이러한 견해에 이견을 표명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지구온난화 현상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있고, 또 다른 이들은 지구 온난화 현상의 실체는 인정하지만, 그 원인이 인간의 활동에 있지는 않다고 주장합니다. 인간의 행동이 지구온난화를 부추겼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지구온난화로 인한 영향은 극히 제한적일것이라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어찌되었건, 주류 과학계에서는 지구온난화를 심각한 문제로 인정하는 분위기 입니다. (NYT)

    세계 인구에 관한 11가지 주요 사실

    매년 세계 인구는 8천3백만 명씩 늘어납니다. 현재 지구상에는 76억 명이 살고 있죠. 2050년이면 지구에 사는 인구는 100억 명에 육박할 전망입니다.

    하지만 인구가 변하는 추이는 제각각입니다. 어떤 나라의 인구는 빠르게 증가하는가 하면, 어떤 나라는 인구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각국 정부에 안정적인 인구 성장률 관리는 쉽지 않은 과제입니다. 인구 성장이 정체되거나 인구가 줄어드는 나라에서는 젊은 노동인구가 부족해 고령층을 부양하는 데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특히 젊은 층 인구가 빠르게 늘어나는 나라는 젊은이들에게 의식주를 비롯해 적절한 교육과 의료 혜택을 제공하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인구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출산율이고, 이어 사망률과 이민도 인구에 영향을 미칩니다.

    최신 UN 세계인구전망을 바탕으로 정리한 세계 인구에 관한 몇 가지 주요 사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2024년이 되면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는 중국이 아니라 인도가 됩니다.

    현재 중국 인구는 14억 명, 인도 인구는 13억 명입니다. 두 나라 인구를 더 하면 전 세계 인구의 37%입니다.

    2.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빠르게 증가하는 나라는 나이지리아입니다.

    현재 나이지리아는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입니다. (지금 추세대로라면) 2050년에는 미국을 제치고 세계에서 세 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가 됩니다.

    3. 출산율은 전 세계적으로 낮아졌습니다.

    1960년 이후 전 세계 평균 출산율은 여성 한 명당 2.5로 낮아졌습니다. 평균은 낮아졌지만, 지역별로는 여전히 큰 차이가 나는데, 아프리카의 출산율은 여성 한 명당 4.7, 유럽은 1.6입니다.

    4. 인구가 빠르게 늘어나는 나라 아홉 곳의 인구 성장이 전 세계 인구 성장의 절반을 차지합니다.

    2017~2050 사이 전 세계 인구 성장을 주도할 9개국은 인도, 나이지리아, 콩고민주공화국, 파키스탄, 에티오피아, 탄자니아공화국, 미국, 우간다, 인도네시아입니다.

    현재 추세대로라면, 2050년 아프리카 인구는 지금의 두 배에 육박할 것입니다.

    5. 유럽 인구는 줄어들 것입니다.

    보통 현재 인구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출산율 2.1을 대체출산율이라 부릅니다. 유럽의 출산율은 2.1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산술적으로 자라나는 세대가 부모 세대를 인구에서 대체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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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절반에 가까운 인구가 저출산 국가에 살고 있습니다.

    2010~2015년 통계를 보면, 평균 출산율이 2.1에 미치지 못하는 저출산 국가 83개국에 전 세계 인구의 46%가 살고 있습니다.

    7. 나이 든 사람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늙을 때까지 사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1950년만 해도 인구 숫자에서 젊은이가 늙은이를 압도했습니다. 2017년 통계를 보면 젊은 사람이 차지하는 비중은 줄어든 반면, 나이 든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2050년이 되면 이는 비슷해질 전망입니다.

    8. 우리의 수명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기대수명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2000년과 2015년을 비교해보면, 전 세계적으로 출생 당시 기대수명이 15년 사이에 67세에서 71세로 4년이나 증가했습니다.

    9. 지역별 기대수명 차이는 점점 줄어들 것으로 보입니다.

    2010~2015년 아프리카 사람들의 기대수명은 60세였습니다. 북아메리카 사람들의 79세보다 크게 낮았죠. 하지만 아프리카의 기대수명은 유럽보다도 빠르게 늘어날 전망으로, 2050년이 되면 대륙별, 지역별 기대수명 차이는 지금보다 훨씬 작을 것으로 보입니다.

    10. 전체 인구에서 젊은이가 차지하는 비중으로 보면 아프리카는 여전히 젊은 대륙입니다. 유럽은 그렇지 않습니다.

    2017년 기준 아프리카 인구의 60%가 25세 이하입니다. 60세 이상 인구는 5%밖에 되지 않습니다. 유럽에서는 25세보다 젊은 인구가 25%에 불과합니다. 60세 이상 인구도 25%를 차지합니다.

    11. 이민은 줄어들고 있습니다.

    1950~2015년, 유럽, 북아메리카, 오세아니아에는 이민을 떠난 사람들보다 이민 온 사람이 더 많았습니다. 반면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해 지역에서는 다른 나라로 떠난 사람이 그 나라로 온 사람보다 많았습니다.

    2005~2010년 이민 규모는 정점을 찍었습니다. 매년 450만 명이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주했습니다. 이 숫자는 2010~2015년에는 320만 명으로 줄었습니다.

    출산율이 낮은 나라에서는 이민을 받아들이는 것이 인구 감소를 막을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방법입니다.

    UN 경제사회분야 인구정책국장인 존 윌모스는 UN이 정한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룩하려면 각국의 인구 구조를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지속 가능한 발전에는 빈곤과 기아를 퇴치하고 지구적인 불평등을 줄이는 계획이 포함돼 있습니다.

    인구 변화 추이를 분석해 각국 정부는 당면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세우고 실행에 옮길 수 있습니다. (세계경제포럼)

    일본, 고령화 사회 대책으로 이민 문 열까?

    2012년 총리 자리로 돌아온 아베 신조의 취임 일성은 오랜 경기 침체에서 벗어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과감한 경기부양책이 집행됐고, 일부는 효과를 보기도 했지만 아베 정권은 아직까지 일본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저출산, 고령화 사회가 안게 되는 문제는 여전히 일본 사회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현재 추세가 계속된다면, 50년 후 일본의 인구는 현재 1억 2천 7백만 명의 2/3 수준으로 줄어들 것입니다. 인구가 줄어든다면 아무리 경기를 살려도 경제가 제대로 굴러갈 수 없습니다. 현재의 인구 수준을 유지하려면 출산율을 현재의 1.41에서 2.07로 끌어올려야 하는데, 아무리 국가가 아이를 키우는 비용을 지원해준다고 해도 여성이 경제 활동을 하기 어려운 문화가 바뀌지 않는 한 출산율을 올리는 건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출산율을 높이는 것 외에 (인구가) 줄어드는 추세를 되돌릴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외국인을 받아들여 일본인을 늘리는 것이죠. 이민의 문을 여는 겁니다. 비슷한 규모의 선진국들 사이에서 일본은 특히나 이민자가 많지 않은 나라입니다. 일본 인구 가운데 외국에서 태어났거나 이민자로 분류할 수 있는 이들은 2%에 불과합니다. 이마저도 대부분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한국이나 중국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이들이 많죠. 최근 들어 절박한 필요에 따라 조금씩 이민자들이 늘어나고 있기는 합니다. 젊은 중국인들은 일본에 유학을 오기도 하고, 많은 수가 일본 대도시의 크고 작은 슈퍼마켓 점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1990년대 자동차 공장의 노동자가 부족해지자, 브라질 이민자들을 제한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민자들이 일본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정착하는 데 필요한 지원은 사실상 전무했습니다. 이웃과 어울리기 힘들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건 더욱 어려운 환경 탓에 브라질에서 온 노동자들은 일본에 남고 싶어도 하나 둘 브라질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베 정권은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우익 내지 극우 성향입니다. 기본적으로 외국인을 배척하고 혐오하는 이들로부터 지지를 받기 때문에 그런 정치 구호를 내세워 왔죠. 그런 아베 정권 산하 부처에서 2015년부터 최소한 이민자 20만 명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냈습니다. 아베 정권이 이 보고서가 정부의 공식 입장이라고 말하지는 않을 겁니다. 자신의 가장 큰 지지기반을 흔들 수 있는 사안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주류 언론이라고 할 수 있는 우익 언론들도 이민자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는 인식을 갖게 된 것처럼 보입니다. 이민자를 배척하거나 이들을 범죄자처럼 묘사하는 구도의 기사들은 예전보다 눈에 띄게 줄었습니다. (Economist)

    아베 총리와 극우 성향 자민당 정권에 아시아 전역 긴장
    지난달 일본 총선에서 유권자들은 압도적인 표차로 자민당을 당선시켰고, 아베 신임 총리를 중심으로 한 ‘어제의 용사들’이 다시 뭉친 일본의 등장은 지역 안보에 평화와 안정보다는 분쟁과 마찰을 불러올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대외관계에 있어 자민당의 극우 강경노선은 장기 침체 속에 신음하는 일본 유권자들의 마음을 샀던 부분이기도 하지만, 주변국과의 관계는 더욱 악화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자민당 소속 의원의 절반 가량이 소위 유력 가문 출신의 파벌 정치인들입니다. 그리고 이들 가문들 가운데 2차대전을 일으킨 군국주의와 일본 제국주의를 철저히 신봉하고 지지했지만 전후 미 군정에 협조하는 대가로 숙청을 면한 집안들이 많습니다. 2차대전 A급 전범들이 잠들어 있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 근현대사 교과서 문제, 나아가 평화헌법 개헌 문제에 있어서까지 한 목소리로 극우 성향의 목소리를 내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아베 총리의 할아버지도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킨 뒤 세운 만주국 총독을 지냈던 인물입니다. 전쟁에서 패한 대가로 각종 살육과 만행의 책임을 온통 떠안았을 뿐, 일본도 피해자라는 이들의 논리는 극우 성향이 짙어진 자민당 내와 일본 사회에서는 설득력을 얻을지 몰라도 당장 중국과 한국, 북한 등 주변 국가들을 크게 자극할 게 뻔합니다. 평화헌법 개정을 호시탐탐 노리면서도 안보 전반에 있어서 미국에 크게 기대고 있는 일본으로서는 미국의 적극적인 지지를 부담스럽게 만드는 동북아시아 역사 분쟁, 영토 분쟁을 더 격화시키는 게 과연 효과적인 전략인지 돌이켜봐야 합니다. (Economist)
    고령의 기준 65세, 조정이 필요합니다

    대부분 선진국에서 노년의 시작은 65세입니다. 일에서 은퇴하고, 대중교통 보조금 혜택을 받기 시작하며, 국가 경제 차원에서는 재정적인 부담으로 여겨지기 시작하는 나이가 바로 65세입니다. 65세 이상 집단이 노동 인구 집단보다 커지기 시작하면 정책입안자들은 의료보험과 연금에 가중되는 부담에 대해 걱정하기 시작하죠. 21세기가 끝날 무렵이면 고령 인구와 노동 인구 간의 관계를 나타내는 “고령자 부양 비율“은 세 배에 달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실버 쓰나미“로 모두가 파산할 거라고 예측하는 비관주의자들도 있죠. 하지만 고령의 시작이 65세라는 전제가 여전히 유효할까요?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단어 “old”를 ”오래 산(having lived for a long time)”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늙은 남자가 쿠션에 기대어 누워있다(the old man lay propped up on cushions)”라는 예문이 함께 실려있죠. 1880년대 프러시아에서 연금 제도가 처음 등장했을 때, 65세 이상에게 이 제도를 적용했던 것은 합당한 조치로 보입니다. 65세를 넘겨 장수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오늘날 건강을 유지하며 활기차게 살아가는 65세 “노인”들은 아주 많습니다. 미국 대통령인 도널드 트럼프는 71세로, 여러 가지 특징을 가진 인물이지만 “늙었다”는 단어가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죠. 올 가을이면 고령에 진입하는 블라디미르 푸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정부와 기업들은 65세를 고령의 기준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첫째, “늙었다”는 것은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평균 수명이 비스마르크가 프러시아식 복지 국가를 건설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길어졌죠. 오늘날 평균적인 65세 독일인은 20년 정도를 더 살게 되며, 다른 선진국의 사정도 비슷하죠. 둘째, “고령”의 정의는 건강, 또는 몸상태에 대한 함의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평균 수명이 늘어나면서 “노인”들의 건강 상태도 크게 개선되었습니다. 셋째, 오늘날 많은 65세 이상 노인들은 여전히 공동체와 경제에 기여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65세에 직장과 공동체에서 “은퇴”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죠.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는 아니지만 근무 시간을 줄이거나 하는 방식으로 계속해서 사회에 참여하고 싶어 합니다.

    인생의 단계란 사회적인 산물입니다. “노인”, “은퇴자” 같은 개념은 정책을 만드는 이들에게도 의미를 갖지만, 노인 당사자들에게도 일종의 시그널로 작용합니다. 노인의 역할에 대한 사회의 기대치를 스스로도 내면화하게 되는 것이죠. 3단계로 나누어진 인생 모델에서 어린이는 배우고, 성인은 일을 하며, 노인은 쉽니다. 그 결과 65세는 사회, 경제적 쓸모를 다하는 나이로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노화는 점진적인 과정이며 사람마다 달리 겪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65세에 스스로를 노인으로 여기기도 하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풀타임으로 일하는 시기와 “고령” 사이에 새로운 단계가 놓여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모두가 길어진 수명을 더욱 알차게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코노미스트)

    애플식 자본주의 vs 구글식 자본주의

    세상을 뒤바꿀 다음번 대단한 스타트업의 주인공이 누가 될지를 향한 관심은 언제나 뜨겁습니다. 그런 가운데 지난 10년 사이 테크 업계를 관통하는 가장 결정적인 이야기를 꼽으라면 아마도 단연 애플과 구글의 등장과 가파른 성장이 꼽힐 겁니다. 부의 창출 측면에서 보면 애플과 구글을 따라올 기업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8년 전만 해도 두 회사 모두 세계에서 가장 가치 있는 회사 열 손가락에 들지 못했습니다. 두 회사의 시장 가치를 합해도 3천억 달러가 채 되지 않았죠. 현재 애플과 (구글의 모회사인) 알파벳은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회사 부동의 투톱입니다. 두 회사의 시장 가치를 합하면 1조 3천억 달러가 넘습니다. 또한, 두 회사는 스마트폰과 홈오디오는 물론이고 아마도 (자율주행) 자동차 분야에서까지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애플과 구글 사이에서 벌어지는 훨씬 더 근본적인 경쟁은 그 중요성에 비해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두 회사가 주주를 대하는 방식과 미래를 대비하는 기조는 말 그대로 완전히 다릅니다. 한쪽이 투자자의 요구를 충실히 들어주는 반면, 다른 쪽은 여전히 기본적으로 창업자와 최고경영진의 결정에 따라 움직이는 구조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두 기업의 경영 방식 차이에서 끝나는 문제가 아닙니다. 두 기업의 경영 철학은 전혀 다른 자본주의 기업 모델을 대표하는 상황이 됐고, 이 경쟁에서 승리하는 쪽의 방식이 앞으로 기업과 경제를 운용하는 기본 공식으로 자리 잡을 것입니다.

    유명한 자산분석 전문가 토니 사코나기는 2012년 봄 발표한 보고서에서 애플에 급진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했습니다. 사코나기와 여러 전문가는 애플의 CEO 팀 쿡에게 예전부터 애플이 쌓아놓은 현금 일부를 주주들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압박해 왔습니다. 2011년 말 기준 애플의 유보금은 1천억 달러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팀 쿡의 태도는 앞서 스티브 잡스가 그랬던 것처럼 완강했습니다. 애플은 잡스의 말을 빌리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향후 전략적 기회를 제때 포착해 투자할 수 있도록” 돈을 계속 쌓아놓았는데, 팀 쿡도 주주에게 수익을 배당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애플이 이렇게 돈을 잘 쓰지 않고 쌓아두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돈 대부분이 1980년에 아일랜드에 우연히 세우게 된 자회사 “애플 오퍼레이션 인터내셔널”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애플이 미국 밖에서 거두는 수익은 대부분 그 나라에 두었습니다. 해당 영업이익을 미국 본토로 옮겨 사업에 보태려는 순간 미국에서 추가로 많은 세금을 내게 됐습니다. 사코나기는 꽤 대담한 아이디어를 내놓았습니다. 애플이 미국 금융권에서 1천억 달러를 빌려서 주주들에게 배당금과 주식 환매 형식으로 이를 나눠줘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상당히 독특한 제안에 금융권 곳곳에서 관심을 나타냈고, 사코나기가 노렸던 대로 조금씩 팀 쿡을 향한 압박의 수위도 높아졌습니다. 일주일 뒤 애플은 마침내 배당금 형식으로 현금을 일부 풀겠다는 계획을 발표하기에 이릅니다.

    사코나기 보고서의 여파는 실리콘밸리 곳곳에 미쳤습니다. 3주 뒤 이번에는 구글이 결단을 내립니다. 당시 구글의 지분 구조는 2004년 기업공개 당시 정한 형태를 갈수록 유지하기 어려워지던 상태였습니다. 처음에는 구글의 창업자들이 신주 발행으로 지분이 줄어들더라도 회사 전체의 주요 의사결정을 내리는 데 문제가 없는 구조였습니다. 아예 “단기적인 이익에 기반을 둔 외부의 압력과 요구에 휘둘려 장기적인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구글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라는 명백한 설명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애플이 배당을 발표한 2012년 3월쯤이 되면 구글의 창업주들이 계속해서 지분을 조금씩 팔았고, 구글 직원들에게도 꾸준히 주식이 보상으로 지급됐기 때문에 외부의 압력으로부터 회사의 장기적인 비전을 지키기 위해 마련한 장치들은 점점 쓸모없어졌습니다. 애플의 발표가 있고 몇 주 뒤, 구글은 비슷한 외부의 압력으로부터 회사를 방어할 새로운 지분 구조를 발표합니다. 창업주의 주식에는 일반주보다 10배 더 큰 의결권이 주어졌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수십 년간 구글이 지속적으로 번성할 수 있는 기틀을 닦기 위해” 창업주들이 회사의 장기적인 전략을 짤 수 있게 하기 위함이라는 설명이 뒤따랐습니다.

    구글과 애플이 겪은 비슷하지만 다른 이 이야기는 21세기 초반 자본주의의 향배를 가를 대단히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애플 주주들에게 2012년 배당금을 지급하기로 한 애플의 결정은 성에 차지 않았습니다. 곳곳에서 반대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고, 몇몇 헤지펀드는 배당금을 줄 거면 액수를 훨씬 더 늘려야 한다고 직접적으로 요구했습니다. 애플에 소송을 제기한 투자회사들도 있었고, 세금은 많이 내지 않아도 되면서 높은 배당금을 받을 수 있는 우선주를 새로 발행하라고 직접 압박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2013년과 2014년 애플은 잇따라 배당금 액수를 늘리겠다고 발표합니다. 2013년부터 올 3월까지 애플이 배당금과 주식 환매 형식으로 주주에게 돌려준 돈은 총 2천억 달러로, 이 기간 회사 영업현금흐름(operating cash flow)의 72% 정도에 해당하는 액수입니다. 현금을 마련하기 위해 애플은 990억 달러가량 빚을 냈습니다. 상당 부분 사코나기의 주장대로 된 셈입니다.

    같은 기간 구글은 어떻게 했을까요? 구글에도 기본 영업만으로 애플처럼 엄청난 현금이 쌓입니다. 2013년부터 올 3월까지 구글의 영업현금흐름은 약 1,140억 달러. 구글은 이 가운데 얼마를 주주에게 다시 돌려줬을까요? 고작 6%뿐입니다. 애플의 72%와는 상당히 대조됩니다.

    공개 기업이 기업활동을 통해 번 돈을 어떻게 써야 할까요? 이는 오늘날 자본주의가 당면한 중요한 질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애플과 구글은 이 질문에 상당히 다른 답을 내놓은 셈입니다. 성공한 기업은 많은 이윤을 창출하지만, 계속해서 돈이 되는 사업을 찾아내 제때 투자하고 성공을 이어가기란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런 이유로 기업이 쉽게 투자할 곳을 찾지 못하면서 기업 재무제표상에는 총 2조 달러에 달하는 현금이 쌓이게 된 겁니다. 회사들이 기존 사업을 굴리고도 남을 만한 이윤을 기록해 돈이 쌓이기 시작하면, 그 이윤을 어디에 어떻게 쓸지 경영진과 투자자 가운데 누가 결정해야 하는지에 관한 문제가 대두됩니다. 구글은 지배구조상 창업주와 경영진의 영향력이 여전히 막강합니다. 그러므로, 이윤으로 쌓인 현금을 어디에 쓸지 결정하는 것도 창업주와 경영진의 몫입니다. 반면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대주주도, 창업주도 없는 애플의 의결권은 주요 투자자들이 나누어 가진 형태에 가깝습니다. (앞서 애플이 투자자들의 요구에 따라 많은 돈을 배당금으로 지급했지만, 그 때문에 연구개발에 투자할 여력이 줄어들지는 않았습니다)

    구글과 애플이 다른 선택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근본적으로 현대 자본주의에 대두되는 소유와 경영의 분리라는 문제에 대한 전략적 판단이 달랐기 때문일 겁니다. 기업이 초기에는 대부분 창업주가 온전히 기업을 소유하며 경영도 하기 마련이지만, 어느 순간을 지나면 소유주가 꼭 경영 주체여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소유주가 회사 경영을 전문 경영인 등 다른 사람에게 맡겨야 할 때 경제학에서 말하는 주인-대리인 문제(principal-agent problem)가 발생하게 됩니다. 주인-대리인 문제는 주인과 대리인 사이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을 때를 일컫는 말로, 회사를 소유한 사람들이 임명, 추대, 선출한 경영인 혹은 경영진이 소유주와 다른 인센티브에 따라 다른 선택을 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겁니다.

    애플이 한 것처럼 투자자들이 의사결정을 주도할 수 있게 함으로써 주인-대리인 문제를 어느 정도 예방할 수 있습니다. 경영진이 소유주의 이해를 거스르지 못하도록 견제 장치를 둔 셈이기 때문입니다. 주요 투자자들의 지지를 받지 못한 프로젝트에는 돈을 쓸 수 없기 때문에 (구글 플러스처럼) 실패한 제품에 투자하거나 소위 경영진이 꽂힌 프로젝트에 엉뚱한 돈을 쓰는 일이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소액 주주들은 의견을 모으거나 경영진에 의사를 전달하기 쉽지 않은 반면, 주요 투자자들은 경영진이 자기 자신에게만 유리한 의사결정을 하려 할 때 이를 신속히 제지할 수 있습니다. 효과가 불투명한 인수 합병이나 경영진에게 지급되는 과도한 보상, 비용을 잡아먹는 지나친 각종 혜택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또한, 결국에는 이론적으로 회사가 내는 이윤은 회사에 투자한 사람들의 몫입니다. 그렇다면 회삿돈을 어떻게 써야 할지 투자자들이 결정하는 게 전혀 문제 될 게 없죠.

    구글처럼 경영진이 열쇠를 쥐고 가는 방식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걱정하는 주인-대리인 문제는 조금 다릅니다. 경영진이 투자자의 이해를 거스르는 결정을 내리는 일은 거의 일어날 리가 없지만, 반대로 투자자들이 (주로 단기적인 이익에 급급해) 회사가 성공했을 때 더 많은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장기적인 혜택을 희생하려 할지 모른다는 겁니다. 주요 투자자들은 경영진에 권한을 위임한 주인이지만, 동시에 수많은 소액 주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대리인이기도 하다는 겁니다. 애플을 압박하던 헤지펀드들이 대표적으로 단기적인 이윤에만 몰두하는 자본이죠. 이른 시일 내에 돈을 뽑고 돈을 남기면 그만인 이들은 연기금처럼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수익을 보고 투자하는 이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헤지펀드가 단기 이윤에만 몰두하고 참을성 없이 회사를 압박하며 경영에 간섭하기 때문에 전체 경제에도 해가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구 말이 옳을까요? 상당히 다른 주인-대리인 문제 가운데 우리가 더 중점을 두고 풀어야 할 문제는 어떤 것일까요? 완벽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시장이 내린 평가이기 때문에 주가를 토대로 답을 찾아볼 수 있을 겁니다. 두 회사가 다른 결정을 내린 뒤의 주가를 보면 구글의 성적표가 애플보다 훨씬 낫습니다. 하지만 지난해 1년만 놓고 보면 반대로 애플이 구글을 압도했습니다. 결국, 구글과 애플의 전략 가운데 어떤 것이 ‘돈이 되는’ 선택이었는지는 좀 더 시간이 흘러야 판단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과연 구글과 애플의 전혀 다른 선택이 경제 전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어떤 함의를 갖는지가 어쩌면 더 중요한 문제일 겁니다. 자본주의라는 체제는 궁극적으로 가장 효율적인 자원의 배분을 목표로 한 것입니다. 경제 전체로 보더라도 훨씬 생산적인 곳에 투자가 일어나고 돈이 돌아야 노동자들의 중위 소득이 오릅니다. 때문에 이윤을 어디에, 어떻게, 얼마나 투자하는지가 모두의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윤의 재분배를 경영진이 결정할 경우, 회사가 오랫동안 쌓아온 역량과 지식을 바탕으로 결정을 내려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경영진이 내리는 결정이 더 많은 회사 관계자의 이익에 부합하는 결정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반면 투자자들이 이윤의 재분배를 결정할 경우, 이론적으로는 더 폭넓은 고려가 가능해 더 많은 혁신이 일어나게 됩니다. 투자자들은 (회사를 운영하는 경영진에 비하면) 조직적인 역량이 부족하고, 단기적인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단점입니다.

    이윤의 분배가 갈수록 노동보다 자본에 편중되는 상황을 문제로 지적하는 이들도 있고, 이를 해결하는 데 초점을 맞춘 전략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배의 문제는 차치하고, 일단 자본과 자원을 배분하는 의사결정 권한을 경영자와 투자자 사이에 적절히 나누는 것이 지속적인 성장에 핵심적인 전제 조건이라는 데는 큰 이견이 없습니다. 구글식 전략에 심각한 불안 요소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이 점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많은 주식을 환매하거나 애플식 전략에 치우치는 것도 위험합니다. 특히 애플식 전략의 위험성은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어떤 방식의 자본주의가 우위를 점하게 될까요? 지난 10년간 대부분 기업은 투자를 유치하고 기업을 경영하며 이윤을 배분하는 데 애플식 전략을 택했습니다. 주식을 되사들여 주주들에게 이윤을 나눴고, 빚을 져가며 배당을 늘리는 일도 비일비재했습니다. 디어, IBM, 앰젠, 3M 등 미국의 주요 기업들은 투자자들이 장악했습니다. 기업 담보 차입매수(leveraged buyouts)는 천천히, 하지만 분명한 속도로 늘어났습니다.

    머지않아 구글의 방식과 애플의 방식 가운데 어떤 선택을 내릴지가 무척 중요해질 수 있습니다. 특히 정부가 세제를 개편해 기업들이 해외에 쌓아둔 자금을 보고하고 거기에 세금을 물리면, 기업들은 어떤 식으로든 해당 자금을 회사 운영에 활용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그 돈을 어떻게 어디에 쓰며 그 결정을 누가 내릴지가 경제적으로 아주 중요한 문제가 될 것입니다. (애틀란틱)

    CEO와 일반 노동자들의 연봉 비율 공개가 미칠 파장

    많은 회사들이 감추고픈 비밀 가운데 하나가 최고경영자(와 경영진)의 연봉 내역입니다. 연봉 내역에는 절대적인 액수가 있을 것이고, 회사의 일반 노동자, 보통 사원들에 비해 얼마나 많이 받는지를 따지는 상대적인 비율이 있겠죠.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urities and Exchange Commission, 우리나라의 금융감독원에 해당)가 12일 CEO와 일반 노동자들 사이의 연봉 비율을 공개하라는 규정을 발의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미국 기업들에게 전혀 새로운 규제이자 난관일 수 있습니다.

    지난 33년 동안 일반 노동자들의 급여는 조금씩 올랐습니다. 반면, CEO와 경영진의 급여는 말그대로 수직 상승했습니다. 50년 전에 CEO와 평사원의 연봉 차이가 보통 20배 정도였다면, 오늘날 연봉은 대개 300배 이상 차이가 납니다. 이 격차는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증권거래위원회의 규제가 효력을 발휘하면, 이제 노동자와 주주들은 회사의 CEO가 돈을 얼마나 많이 받는지를 피부에 와닿는 수준에서 알 수 있게 됩니다. 걷잡을 수 없이 올라버린 CEO의 연봉을 상식적인 수준으로 내리려는 기업이나 주주들에게는 효과적인 규제가 될 것이고, 노동자들이 상대적으로 공정한 보상을 받고 일하는 기업이 만든 제품을 사주고픈 소비자들에게 준거를 제시해줄 것으로 기대됩니다.

    연봉 비율 공개 기준은 최고경영자의 연봉과 중위(median) 급여를 받는 노동자의 연봉의 비율입니다. 노동자들은 회사 내에서 자신이 받는 급여가 어느 정도인지, 동종 업계에 있는 다른 회사의 연봉 상황이 어느 정도인지도 알 수 있게 됩니다. 회사들은 이미 CEO의 연봉이 얼마인지 절대적인 액수는 비교적 상세히 공개해 왔습니다. 하지만 미국 사람들은 여전히 CEO들이 엄청 높은 연봉을 받는다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잇따른 설문 조사를 보면 CEO들이 비숙련 노동자들에 비해 연봉을 대략 30배 정도 더 많이 받을 거라는 답이 나오곤 하는데, 실제 이 수치는 30배가 아니라 300배입니다.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노튼(Michael Norton) 교수는 사람들이 실상을 잘 모르기 때문에 부조리를 인식하지 못하고 고치려 하지도 않는다고 꼬집었습니다.

    연봉 비율 공개에 반대하는 쪽도 만만치 않습니다. 이들이 우려하는 건 우선 이 비율을 계산해내는 데 들지 모를 적잖은 비용입니다. 소득 불평등이 중요한 문제인 건 맞지만 이런 식으로 규제를 만들어 기업에 불필요한 부담을 주는 건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안 된다는 겁니다. 전국 제조업 협회는 증권거래위원회에 “500여 가지 급여 지급 방식을 적용받는 노동자 13만 명의 급여를 계산하려면 총 200억 원 가량의 비용이 들 것”이라고 우려를 표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증권거래위원회는 이 규정을 준수하기 위해 급여 비율을 계산하는 데 한 회사가 19,000 달러(약 2천만 원) 이상을 쓰지 말아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연봉 비율 공개는 2010년 통과된 금융개혁법 “도드 프랭크(Dodd-Frank)” 법안의 세부 조항으로 포함됐습니다. 특히 금융위기 때 혈세를 들여 구제 금융을 받은 기업들의 CEO가 터무니없이 높은 연봉에 퇴직금까지 두둑히 챙겨나가는 모습에 여론이 들끓자 부랴부랴 추가됐습니다. 법안의 세부 내용을 조율하고 결정하는 증권거래위원회에는 꾸준히 연봉 비율 공개가 꼭 포함돼야 한다는 국회의원들과 시민사회의 의견이 전해졌습니다. 민주당 대선 후보 힐러리 클린턴도 지난달 의견을 보탰습니다.

    “이 일을 처리하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 겁니다. 노동자들은 자기가 일하는 회사가 혹 지나치게 많은 돈을 경영진에 주고 있는 건 아닌지 알 권리가 있습니다. 이는 주주들도, 그리고 대중들도 주장할 수 있는 권리입니다.”

    중소기업과 미국 밖에 본사를 둔 기업을 제외한 3,800여 개 대기업이 먼저 연봉 비율을 공개해야 합니다. 법안이 발효된지 1년 이내에 온라인으로 열람할 수 있는 공개 정보에 이 항목을 추가해 넣어야 합니다. 증권거래위원회는 직원들의 급여를 일일이 계산하는 데서 올 번거로움을 덜기 위해 합리적으로 표본을 추출한 뒤 중위 급여를 계산해 CEO와 비교해도 좋다고 허락했습니다.

    규제는 처음 생겼지만, 이와 관련된 논의는 전혀 새로운 게 아닙니다. 1977년,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는 “최고위 경영진에게 지나치게 집중된 보상 체계는 팀워크를 해치고 상호 신뢰를 떨어뜨려 회사의 잠재력을 갉아먹는다”고 지적했습니다. 당시 그가 제안한 마지노선은 CEO의 급여가 일반 노동자의 20배를 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미국 금융 당국은 (절대적인 액수로써) CEO의 연봉과 비금전적 혜택을 상세히 공개하도록 의무화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공개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즉, 돈을 더 주는 회사로 CEO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CEO의 급여가 계속해서 오르게 된 겁니다. 평사원, 일반 노동자들보다 훨씬 돈을 더 많이 받을 때 쏟아질 거라 예상됐던 비난은 별로 크지 않았고, 일부 CEO들은 몸값 올리기에 치중했습니다.

    홀푸즈(Whole Foods Market), 노블 에너지(Noble Energy) 등 몇몇 기업들은 이미 자발적으로 연봉 비율을 공개해 왔습니다. 사우스다코다 주 시우 폴스(Sioux Falls)에 본사를 둔 노스웨스턴 에너지(NorthWestern Energy) 사도 지난 2010년부터 CEO와 일반 노동자의 연봉 비율을 공개해 왔는데, 현재 이 비율은 24:1입니다. 세 개 주에 걸쳐 1,600명을 고용하고 있는 회사인지라 비율을 산출해내는 데 드는 시간과 비용은 매우 적습니다.

    “담당 직원 한 명이 4시간 정도 걸려서 하면 계산이 끝납니다.”

    연봉 비율은 지리, 시장 상황, 기업 지배구조 등 여러 가지 요인에 영향을 받는 숫자인데, 이 숫자가 마치 기업의 윤리 지표처럼 떠받들여지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이 숫자 하나가 큰 영향력을 갖게 될 경우 이를 적절히 마케팅에 적절히 활용할 수 있을 거라는 전망도 나옵니다. 노튼 교수는 소비자들에게 가상의 두 가지 마트 가운데 한 군데를 골라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하나는 월마트처럼 CEO와 일반 노동자들의 연봉 차이가 1,000배 정도 나는 마트였고, 다른 하나는 이보다 연봉 차이가 덜한 곳이었습니다. 소비자들은 상대적으로 평등한 마트를 선호했을 뿐 아니라 그 곳에서 물건을 더 많이 구매할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응답자의 1/3은 똑같은 제품을 더 평등한 마트에서 조금 더 비싼 값에 팔더라도 거기서 물건을 사겠다고 답하기도 했습니다.

    소비자 단체인 퍼블릭 시티즌(Public Citizen)의 네일러(Bartlett Naylor)는 말합니다.

    “터무니 없이 많은 돈을 챙겨가는 CEO, 경영진은 회사 경영에 부담이 되는 걸 넘어서 공적으로도 부끄러운 일입니다. 다른 실적이 안 좋을 때 주주들에게 면목 없어하는 것과 비슷한 일이죠. 수익은 정체돼 있는데, 경영진에게 가는 보상은 계속 치솟는다? 이것처럼 무책임하고 부끄러운 일이 또 없을 겁니다. 자본주의가 그런 거죠.” (Washington Post)

    JC 페니의 진짜 문제는 중산층의 몰락이다

    미국 3대 백화점 업체 중 하나인 JC페니가 경영실적 부진을 이유로 CEO 론 존슨을 해임한 이후 아직도 업계가 떠들썩합니다. 론존슨 전 CEO가 애플에서 일하던 관습으로 소비자 조사 없이 신규 아이디어를 실행하는 등 근거없는 자신감이 넘쳤다, 전통적인 유통 업체에는 실리콘밸리식 경영이 통하지 않는다는 비판 모두 일리가 있긴 합니다. “당신은 더 멋지게 보일 자격이 있어요” 캠페인은 전에 입던 브랜드가 별로라는 이미지를 낳았고, 입점 사업자들에 상세 정보를 공개하지 않아 개별 사업자가 제대로 된 전략을 세울 수 없었습니다. 론 존슨과 그를 둘러싼 경영진은 캘리포니아에서 텍사스까지 비행기로 출퇴근하며 전통적인 유통업체 사업방식을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비판은 부수적인 사안에 불과합니다. JC페니의 가장 근본적인 패인은 ‘서민들의 블루밍데일(Bloomingdale: 중상류층을 겨냥한 고급백화점 브랜드)’에서 표방하는 JC페니의 ‘서민,’ 즉 중산층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겁니다. 소득양극화(hourglass economy) 현상이 심화되면서 소비자들은 최고급품 아니면 저가 상품을 찾습니다. 블루밍데일이나 메이시스가 고가군을, Kohls, Target, Walmart가 저가군을 차지하는 가운데 JC페니가 설 자리는 점점 작아집니다.

    JC페니는 전통적인 고객군이 없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새로운 고객군을 찾아야합니다. 전단지 배포를 인터넷 판매로 전환시킨 2009년의 성공적인 캠페인 등이 그 예가 될 것 입니다. 굉장히 바쁜 엄마들을 위한 집안용품 원스톱 쇼핑 등도 고려해볼 만 합니다. (Harvard Business Review)

    미국 중산층을 붕괴시킨 레이건의 부자 감세

    옮긴이: 이 글을 쓴 하트만(Thom Hartmann)은 기업가이자, 심리치료사, 진보 성향의 정치평론가이자 라디오쇼 진행자입니다.

    자본주의는 원래 평등과는 거리가 먼 경제 체제입니다. 한 사회의 부가 소수에게 쏠리지 않고 비교적 평등하게 나누어질 때 등장할 수 있는 중산층도 자본주의 원래 개념과는 썩 어울리지 않습니다. 규제받지 않은 자본주의의 모습은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여왕 시대를 떠올리면 가장 정확할 겁니다. 경제 체제의 정점에 극소수의 부자들이 군림하고 있고, 그 바로 아래 전문직, 혹은 중상주의자(mercantilist)라 불리는 역시 아주 적은 수의 중산층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전체 인구의 90%가 넘는 나머지 계층은 빈곤 노동자에 속하는 이들로 공식적으로는 노예 신분은 면했지만 대부분 사실상 평생 갚지 못할 빚 때문에 운신의 폭이 매우 제약된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이들이었습니다. ‘제대로 된’ 자본주의 사회라면 부가 보통 사람들의 손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한 사회가 창출해내는 이윤과 이를 통해 축적되는 부는 극소수 부자, 권력층에게 집중되기 마련이고, 불평등은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내재된 개념입니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의 첨단을 달린다는 미국에서 상당히 탄탄한 중산층이 존재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대공황 이후 세계 2차대전을 거쳐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미국 사회와 정부가 시장을 규제하고 소수의 자본가, 대기업에 집중됐던 부에 높은 세금을 매겨 이를 적극적으로 재분배했던 시기가 바로 그 시절입니다. 당시 미국에서 가장 많은 노동자를 고용하던 기업은 GM이었습니다.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당시 노동자들의 임금은 시간당 50달러를 상회했습니다. 1981년 레이건 대통령이 취임한 뒤 레이거노믹스라는 혁명적인 정책을 들고 나왔는데, 이를 단순히 요약하면 규제를 풀고 부자들의 세금 부담을 줄여주는 “공급자 중심의 경제학(supply side economics)”에 기반을 둔 방침이었습니다. 레이거노믹스 이후 35년이 흐른 지금, 미국에서 가장 많은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는 기업은 월마트입니다. 노동자들의 평균 임금은 시급 10달러입니다.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두 시기 가운데 자본주의 경제질서의 이단아에 해당되는 건 중산층이 두텁게 형성됐던 20세기 중반 미국 사회입니다. 원래 자본주의 사회에서 중산층의 등장은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 있어야만 가능했던 대격변에 해당되는데, (중세시대 유럽을 자본주의 사회라고 칭할 수 있다면) 14세기 흑사병으로 노동인구가 급감했을 때나 가능했고, 산업혁명 이후 현대 자본주의에서는 부사들에게 높은 세금을 물리지 않는 한 중산층이 발을 붙일 곳은 없었습니다. 피케티(Thomas Piketty)가 그의 저서 “21세기 자본”에서 밝혔듯이, 세계 2차대전 이후 미국과 유럽에서 중산층이 등장할 수 있었던 건 개인의 소유 아래 세습되던 부가 전쟁으로 철저히 파괴됐기 때문이고, 새로 창출되는 이윤과 부에는 정부가 전쟁 상황이라는 명목 하에 높은 세금을 물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부가 자본주의와 시장의 순수한 논리를 무시하고 개입과 규제를 일삼던 시절 경제적 불평등은 가장 낮았습니다.

    피케티는 특히 부가 소수에게 독점되는 걸 막기 위한 제도로 누진세(progressive taxation)를 언급했는데 이는 정확한 지적입니다. 자본가, 고용주가 이미 버는 소득 외에 추가로 벌어들이는 돈에 막대한 세금을 내야 한다면 그만큼 노동자를 착취할 이유가 사라지는 것이죠. 2차대전 직후 미국에서 최고 소득 과표구간의 소득세율은 91%였습니다. 당시 기업 CEO의 연봉은 가장 기본 업무를 수행하는 노동자들에 비해 평균 30배 정도 높았습니다. 레이건 정부는 최고 소득 과표구간의 소득세율을 28%로 떨어뜨렸습니다. 중산층, 서민에게 흘러내리던 부는 빠른 속도로 소수의 부자들에게 다시 집중되기 시작했습니다. 레이거노믹스 이후 소득 불평등은 빠른 속도로 심화되기 시작했고, 현재 CEO들의 평균 연봉이 일반 노동자들에 비해 평균 수백 배 높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상대적으로 많은 계층이 부를 나눠갖기 시작하면, 다시 말해 중산층이 탄탄해지면 이들은 정치적인 권리를 포함해 더 많은 권리를 요구하기 시작합니다. 다양한 목소리가 등장해 사회적인 토론에 불이 붙죠. 1960, 1970년대 미국이 정확히 그랬습니다. 인권 운동, 여성 운동, 반전 운동, 반 권위주의 문화, 환경 운동, 소비자 권익에 대한 성찰에 이르기까지 새로 등장한 중산층은 사회적인 이슈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새로운 이슈를 찾아내 공론화했습니다. 보수주의자들에겐 끔찍한 대혼란이나 다름없었죠. 레이건의 당선으로 정권을 잡은 보수주의자들은 어떻게 해서든 이 혼란을 타개하려 했습니다. 부자 감세를 통해 중산층의 기반을 무너뜨린 건 보수주의자들에게는 말그대로 신의 한 수였죠. 중산층은 빠른 속도로 빈곤 노동계층으로 편입됐습니다.

    레이거노믹스는 그 이후 민주당 정권에서도 명맥을 유지했습니다. 적어도 부자감세만 놓고 보면 그렇습니다. 부시 정권에서 추가로 진행한 부자 감세 때문이기도 하지만, 클린턴 정부도, 오바마 정부도 최고 소득 과표구간의 소득세율, 상속세율을 되돌리지 못했습니다. 물론 중산층이 탄탄해야 하는 게 반드시 옳은 목표인 건 절대 아닙니다. 이는 사회적인 토론과 합의가 필요한 문제죠. 독과점 자본주의를 이대로 유지하느냐 중산층을 되살려 보다 다원주의적인 사회를 만들어가느냐, 우리는 지금 기로에 섰습니다. 만약 우리가 중산층을 되살리는 쪽을 택한다면, 그 첫 번째 정책은 레이건의 부자 감세를 철회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AlterNet)

    공유경제는 이윤의 부스러기를 나눠먹는 가혹한 노동 형태

    옮긴이: 로버트 라이쉬(Robert Reich)는 클린턴 행정부에서 노동부장관을 지낸 경제학자로 현재 UC버클리 공공정책 대학원장으로 일하며 연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특히 미국 사회에서) 소득, 재산 불평등이 심화되면 일자리가 줄어들고 중산층이 무너져 모두가 경제적으로 힘들어지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는 라이쉬 교수의 주장은 다큐멘터리 영화 “모두의 불평등(Inequality for all)”을 보시면 잘 집약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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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일을 컴퓨터가 미리 예측한 뒤 잘 짜놓은 각본대로 필요한 노동은 로봇이 대체하는 세상에서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면 컴퓨터와 로봇을 소유한 자본가가 사실상 모든 이윤을 가져간다는 점일 겁니다.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우리는 상당히 빠른 속도로 그런 세상의 문턱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시대의 흐름에 발맞추어 나타난 인간의 노동은 그 가운데 단기 예측이 쉽지 않은 일들 또는 지엽적인 노동 – 특이하고 규칙적이지 않은 업무, 배달, 운송 등 -으로 쏠리고 있습니다. 우버 기사들이 그렇고, 에어비엔비에 방을 내주는 집주인들이 그렇습니다. (인터넷으로 식료품 등을 주문하면 이를 대신 구매해 배달해주는) 인스타카트(Instacart) 구매대행업자들도 마찬가지이며, 옛날식으로 말하면 심부름 대행센터의 온라인 앱 형태라고도 할 수 있는 태스크래빗(Taskrabbit)에 자신의 이력을 등록해놓고 콜을 기다리는 이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법조계(예를 들어 Upcouncil), 의료계(예를 들어 Healthtap)에도 주문형 매칭 업체들이 성업 중입니다.

    새로운 노동 형태, 새로운 업종을 일컫는 말로 ‘공유 경제(“share” economy)’가 화두가 된지도 벌써 여러 해가 흘렀습니다. 제가 보기에 공유 경제보다 더 적확한 이름은 “부스러기를 나눠갖는 경제(share-the-scraps economy)” 정도가 될 겁니다. 기술의 발전 덕분에 이 땅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서비스업이 이제는 개별적인 업무로 쪼개져 노동자들에게 (소비자가) 필요할 때 할당되고 있습니다. 노동자가 일의 대가로 받는 보수는 그때 그때 수요의 변화에 따라 정해집니다. 여기서 소비자들이 서비스와 재화를 이용하고 지불하는 요금 가운데 가장 큰 몫은 앱 또는 온라인 상에서 수요와 공급을 이어주는 소트프웨어 플랫폼 업체가 가져갑니다. 노동자들은 나머지 자잘한 부분을 나눠 받습니다.

    아마존(Amazon)이 내놓은 온라인 매칭 서비스 매케니컬 터크(Mechanical Turks)를 예로 들어볼까요? 홈페이지 상에는 “사람의 지적 노동을 사고 파는 장터(a marketplace for work that requires human intelligence)”라는 설명이 붙어있습니다. 실상은 지루할 정도로 별 생각없이 처리할 수 있는 잡일을 푼돈 받고 처리해주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이와 그런 이들을 찾는 소비자가 만나는 곳입니다. 3,000원에 상품 설명서 대신 써주기, 300원에 사진들 중에 잘 나온 사진 골라주기, 500원에 잘 못 알아보는 글씨 판독해주기 등 아주 최소한이지만 인간의 주관적인 판단이 개입해야 처리할 수 있는 일이긴 해서 컴퓨터로 하기엔 쓸데없이 복잡하고 비용이 더 듭니다. 매번 소비자와 노동자의 수요, 공급이 맞아떨어질 때마다 아마존은 적잖은 수수료를 챙깁니다.

    이런 흐름은 30여 년 전 기업들이 노동자들에게 안정적인 정규직 일자리를 제공하는 대신 비정규직, 임시계약직, 프리랜서와 같은 이름 아래 노동을 파편화시켰던 흐름의 정점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노동이 파편화되고 노동자들의 단결이 느슨해지면 급여 인상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협상력도 약해집니다. 또한 파편화된 노동 시장에서 기업들은 최저임금이나 노동 환경 개선 등 각종 규제를 더 쉽게 피해갈 수 있습니다. 여기에 노동자들은 자기가 하는 일에 온전히 책임을 지게 됩니다. 추가 근무, 업무 스트레스를 완화해줄 장치가 사라진 시장에서 소비자와 직접 단기 계약을 맺는 셈이니까요. 더 멀리 보면 노동조합이라는 개념이 없던 19세기, 개별 노동자가 책임질 수 없는 위험을 감수하고도 아주 낮은 급여를 위해 파편화된 노동을 감수해야 했던 때로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우버에게 운전자들의 안전과 보험 등을 책임지라고 요구했을 때 우버가 내놓은 답변은 간단했습니다. “우리는 고용주가 아니다. 운전자들은 일종의 개인사업자이기 때문에 궁극적인 사고의 책임도 개인이 진다. 우리는 플랫폼을 제공할 뿐이다.” 아마존의 매케니컬 터크에서 일을 했을 때 받을 수 있는 돈이 최저임금 기준에 한참 못미친다는 비판에 아마존도 비슷한 답을 내놓습니다. “우리는 그저 수요, 공급을 이어줄 뿐이다. (우리는 고용주가 아니므로) 최저임금이 적용되는 사업체가 아니다.”

    공유 경제에 찬성하는 주장이 굉장히 많다는 사실을 물론 알고 있습니다. 이런 주장들 가운데 두드러지는 것이 “노동자가 자기 필요에 따라 원하는 만큼 ‘남는 시간’에 일해서 부수입을 버는 것 아니냐”는 겁니다. 이 주장의 문제는 바로 저 ‘남는 시간’에 있습니다. 공유 경제 하에서 노동을 제공하는 적잖은 이들이 본업으로 충분한 돈을 벌면서 용돈벌이 삼아 일을 하는 게 아닙니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휴식을 취하고 가족과 시간을 보내야 할 시간에 많지도 않은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도록 내몰리는 추세를 사회적으로 장려해야 하는 걸까요?

    우버 운전자들 대부분이 새로운 기회에 만족하며 행복해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운전자들이 정해진 시간 동안 일하고 노동의 가치에 걸맞는 임금을 제대로 받을 수 있다면 훨씬 더 행복해하지 않을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지난 30여 년간 상위 1% 또는 10%의 부는 꾸준히 축적되었지만, 중위소득 노동자들의 실질 임금이 거의 정체돼있던 시장에서 조금이라도 더 돈을 벌 수 있는 부수입의 기회가 매력적인 대안으로 여겨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새로운 대안이 얼마나 매력적인지가 아니라 기존의 노동과 급여 체계, 소득 분배 시스템이 얼마나 제 기능을 못했는지에 주목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공유 경제 시장이 지금처럼 빠르게 성장하면, 파편화된 노동자들이 모여 일종의 조합 형태의 이익 단체를 만들어 임금이나 노동 조건에 관한 협상력을 높일 거라고 예측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조합은 사실상 노조나 다름없을 텐데 우버나 아마존 등 플랫폼을 제공하며 고용주이기를 거부하는 기업들이 이를 받아들일 거라고 믿는 건 너무 순진한 발상입니다.

    공유 경제가 묻혀져 있던 소비자들의 수요를 효과적으로 끄집어내고 인간의 노동을 더욱 효율적으로 이끌어줬다며 높이 평가하는 학자들이 많지만, 지금 우리 앞에 놓인 과제는 노동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과 노동의 대가로 나오는 소득, 부를 제대로 분배하는 일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부스러기를 나눠갖는 경제 체제는 시대적 사명에 역행하는 흐름입니다. (AlterNet)

    상위 0.1% 부자들은 국가를 필요로 하지 않을까?

    *옮긴이: 대니 로드릭(Dani Rodik)은 고등연구원(The Institute for Advanced Study) 사회과학 교수입니다.

    위대한 개츠비의 작가 스콧 피츠제럴드는 이렇게 쓴 적이 있습니다. “엄청난 부자들은 당신이나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가진 부는 그들로 하여금 우리가 신뢰하는 것들을 냉소적으로 바라보게 하고 다른 사람들보다 그들이 낫다고 믿도록 만듭니다.” 만약 이 문장이 오늘날에도 사실이라고 느껴진다면 그 이유는 바로 이 피츠제럴드가 이 문장을 썼던 1926년은 미국 사회의 소득 불평등 수준이 오늘날과 비슷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980년대까지 선진국에서 소득 불평등 수준은 그리 심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때도 부자들은 당연히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더 많은 돈을 벌고 있었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속해 있는 사회와 국가의 한 구성원으로 여겨졌습니다. 미시건대학의 마크 미즈루시(Mark Mizruchi) 교수가 최근 펴낸 책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그 당시 미국 기업을 운영하던 엘리트들은 “시민적 책임감과 계몽적 자기 이해 추구라는 윤리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노동조합과 협력했고, 규제와 시장 안정화에 있어서 강력한 정부의 개입을 선호했습니다. 또 그들은 고속도로와 같이 중요한 공공재를 위해서 세금이 필요하다는 것도 이해했습니다.

    반면, 오늘날의 부자들은 “앓는 소리를 내는 거물(moaning moguls)”입니다. 이러한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람은 사모 펀드 기업인 블랙스톤 그룹의 CEO인 스테판 스와즈맨(Stephen Schwarzman)입니다. 오늘날의 부자들에 대해서 글을 쓴 뉴요커의 제임스 수로위치(James Surowiechi)에 따르면 스와즈맨은 “마치 자신이 참견하기 좋아하고 세금 매기는 것을 좋아하는 정부와 징징대고 자신을 부러워하는 대중들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스와즈맨은 “가난한 사람들이 돈을 버는 것에 실제로 관심을 가지도록 이들에게 부과되는 소득세를 올리는 데 찬성”하며, 사모 펀드들에게 유리하게 작동하는 세금 제도를 개혁하고자 하는 제안을 독일의 폴란드 침공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수로위치는 다른 부자들의 예도 들고 있습니다. “벤처캐피탈리스트인 톰 퍼킨스(Tom Perkins)와 홈디포의 창립자인 케네스 랑곤(Kenneth Langone)은 부자들에 대한 대중들의 공격을 나치가 유대인들을 공격한 것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수로위치에 따르면 부자들의 태도가 변한 것은 세계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대규모 미국 기업과 은행은 세계 시장을 무대로 활동하고 있으며 이제는 미국 소비자들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미국 중산층 경제의 상황은 이들에게 큰 관심사가 아닙니다.

    하지만 부자들이 더는 자신들은 국가가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면 이들은 큰 실수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부를 가져다준 시장의 안정과 개방성을 유지하는 데 정부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기 때문입니다. 경기에 부침이 별로 없는 시기에 정부의 역할은 미미해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경제가 불안정해지고 불확실성이 커질 때 모든 사람은 자국 정부가 제공하는 대피처를 찾습니다. 대규모 기업들이 자국 정부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가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는 시기가 바로 이때입니다. 2008~2009 금융 위기 당시 미국 정부가 금융과 경제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어떻게 시장에 개입했는지를 생각해보세요. 만약 정부가 AIG에 구제 금융을 하지 않았다면 혹은 연준이 유동성을 늘리지 않았다면 상위 0.1% 부자들의 부는 크게 타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경제 위기가 발생하지 않은 평소에도 부유한 사람들의 부는 정부의 정책에 크게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정보 기술 혁명을 이끈 근본적인 연구를 지원하는 것도 대부분이 정부이며 애플이나 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이 이러한 기술을 획득한 기업이 번창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지적 재산권을 보호하는 저작권이나 특허 관련 법과 규제를 집행하는 것도 정부이며 정부는 이를 통해서 혁신가가 혜택을 볼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습니다. 숙련 노동자들을 훈련하는 고등 교육 기관들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도 정부이고 국내 기업들이 국외 시장에 진출할 수 있도록 다른 국가와 무역 협상을 하는 주체도 정부입니다.

    만약 부자들이 자신들은 더는 한 사회의 구성원이 아니며 정부의 도움이 거의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객관적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부자들은 시장이 자력으로 굴러가고 운영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들이 제대로 된 믿음을 가지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건강한 사회와 훌륭한 정부 역할 없이 시장이 오랫동안 번영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Project Syndicate)

    상속 재산은 어떻게 경제 성장을 돕고 있나?
     역자 주: 그레고리 맨큐(N. Gregory Mankiw)는 하버드대학 경제학과 교수로 2003~2005년에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경제 자문위원회 위원장을 지냈습니다.

    상속 재산(inherited wealth)이 다시 주목 받고 있습니다. 토마 피케티 교수는 베스트셀러가 된 “21세기 자본론”에서 상속 재산의 중요성이 점점 증가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경제성장 속도는 느려지고 자본 수익률은 증가하는 미래를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로 그는 자본가들이 소득의 많은 부분을 저축할 수 있고 자본이 축적되며 이들이 축적된 부를 자손들에게 상속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피케티 교수는 개인의 생활 수준이 개인의 기술이나 노력보다는 재산을 얼마나 상속 받았는지에 따라서 결정될 것이라고 결론 짓고 있습니다.

    우리는 피케티 교수의 주장에서 쉽게 허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21세기 자본론”이 출간된 이후 많은 경제학자들이 북리뷰, 블로그 포스팅, 그리고 학문적 분석을 통해서 그의 주장이 가진 문제점들을 지적해 왔습니다. 거기에 더해, 경제학자들이 지금까지 미래를 예측하는 데 형편없는 성적을 보여준 것을 감안하면 그의 이러한 예언은 의심을 가지고 받아 들여야 합니다. 피케티 교수가 제안한 시나리오는 확고한 예측이 아니라 도발적인 추측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쩌라는 것이죠? (So What?) 상속 재산이 뭐가 문제인가요? 우선 우리는 부모가 왜 자녀들에게 재산을 상속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다음 세 가지 이유에서 부모들이 재산을 상속한다고 생각합니다.

    1. 세대간 이타주의(intergenerational altruism): 세대간 이타주의를 경제학자들은 효용(utility)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효용은 인생의 만족도, 혹은 행복감을 통해서 측정되는데, 이 명제에 따르면 부모 세대의 효용은 자녀 세대가 어떤 만족감을 느끼는지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리고 이 명제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자녀 세대의 효용은 이들의 자녀, 즉 3세대의 삶의 질에 따라 결정이 되고 3세대의 효용은 4세대의 삶의 질에 따라 결정됩니다. 따라서 한 사람의 효용은 단순히 본인의 인생이 어떠했는가에만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이어질 자손들의 삶의 질에도 영향을 받습니다.

    2. 소비 평탄화(consumption smoothing): 사람들은 물건이나 서비스를 소비함으로써 효용을 얻습니다. 하지만 소비에는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diminishing marginal utility)이라는 것이 따릅니다. 방이 1개인 집에서 2개인 집으로 이사를 할 때 증가하는 효용에 비해서 방이 4개인 집에서 5개인 집으로 이사할 때 증가하는 효용이 적은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소비의 정도가 크게 변화하는 것보다 평탄화하는 것을 선호합니다. 두 해 연속으로 5만 달러를 소비하는 것이 한 해에는 8만 달러를 소비하고 이듬해 2만 달러를 쓰는 것보다 일반적으로는 더 높은 효용을 가져옵니다.

    3. 평균으로의 회귀(regression toward the mean): 이는 오랜 시간을 두고 봤을 때 많은 변수들이 보통의 수준으로 돌아오는 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키를 예로 들어봅시다. 당신의 키가 일반 사람들보다 매우 매우 크다면, 당신의 자녀 역시 평균보다 키가 클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자녀의 키는 당신보다 작을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소득에도 이는 적용됩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만약 당신이 소득 분포에서 98%를 차지한다면 (즉, 당신이 전체 인구의 98% 사람들보다 더 많은 돈을 벌고 있다는 것) 당신의 자녀가 성인이 되었을 때 이들이 소득 분포에서 차지할 확률이 가장 높은 구간은 바로 65%입니다. 당신의 자녀는 평균보다는 높은 소득을 보이겠지만 당신보다는 높지 않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분포의 가장 극단에 위치한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존 록펠러나 스티브 잡스와 같은 사람들은 각자의 시대에 세계에서 가장 가치가 있는 기업 중 하나를 만들었고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자녀들이 부모가 성취한 것만큼 성취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앞서 열거한 세 가지 이유를 합쳐서 생각해보면 왜 부유한 사람들이 상당한 재산을 자녀들에게 상속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세대간 이타주의 때문에 부유한 부모들은 자신들의 소비와 저축에 관련된 결정을 자신들의 현재 필요 뿐만 아니라 후손들의 효용을 생각해서 내립니다. 평균으로의 회귀 현상 때문에 이들은 자신의 후손들이 자신들보다는 경제적으로 덜 번영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세대를 아울러서 소비를 평탄하게 만들기 위해서 부유한 부모 세대는 자신의 소득 중 일부를 저축해서 미래 세대에 물려주고 싶어 합니다. 동시에 이 논리는 왜 어떤 사람들은 재산을 물려주기 위해서 지금의 소비를 줄이려고 하지 않는지를 설명하기도 합니다. 소득 분포에서 평균 이하에 있는 사람들에게 평균으로의 회귀는 아주 좋은 소식입니다. 이들의 경우 자신의 후손들이 자신들보다는 높은 소득을 가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평균 정도의 소득을 벌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도 기술 발전으로 생산성이 높아지면서 자신들의 후손들이 자신들 세대보다 높은 소득을 벌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오직 고소득자들만이 상속 재산을 남기는 데 있어서 강한 동기를 가지게 됩니다.

    정책 결정의 입장에서 볼 때, 우리는 상속 재산이 가족의 재산과 효용에 미치는 직접적인 영향 뿐만 아니라 경제 전반에 미치는 간접적인 영향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 몇십 년간 증가한 소득 불평등은 소득 하위에 있는 사람들의 생활 수준이 거의 향상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며 누군가는 상속 재산이 이런 불평등을 악화시키고 있다고 걱정할 지 모릅니다. 하지만 경제학의 분석은 다른 측면을 제시합니다. 한 가족이 미래 세대를 위해서 저축을 하면 이는 다음 세대가 새로운 비즈니스를 시작하기 위한 투자금이나 기존 사업을 확장할 수 있는 자금을 제공해줍니다. 자본이 투자되는 것은 자본과 노동자의 소득에 영향을 미칩니다. 자본 역시 수확 체감(diminishing returns)의 법칙을 따르기 때문에 자본 공급이 증가하는 것은 각 자본에 돌아오는 이윤이 줄어드는 효과를 가져옵니다. 반면 자본이 증가한 것이 노동 생산성을 높이게 되고 따라서 노동자들은 더 높은 임금을 받게 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미래 세대에 물려주기 위해서 현재 소비를 하지 않고 저축을 한, 상속 재산을 물려준 사람들은 자본가들로부터 노동자들로 소득을 재분배하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핵심은 상속 재산이 경제적 위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엄청난 부를 얻은 사람들은 자연스레 자신의 후손들에게 재산의 일정 부분을 물려주고 싶어 합니다. 그런 집에서 자녀로 태어날 정도로 엄청난 행운이 없었던 우리들 역시 그들이 후손에게 물려주는 상속 재산으로부터 혜택을 받고 있습니다. 왜냐면 그들이 상속한 자본의 축적이 우리의 생산성과 임금, 그리고 삶의 질을 높여주니까요. (NYT)

    불평등 문제가 어디에 있나요?
    역자 주: 케네스 로고프(Kenneth Rogoff)는 하버드 대학 경제학과 교수로 2001년부터 2003년까지 IMF 수석 경제학자를 역임했습니다.

    토마스 피케티의 영향력 있는 책 “21세기 자본론”을 읽고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가 현재 목격하고 있는 불평등이 중세의 노상 강도 귀족(Robber barons)이나 왕정 시대 이후에 처음 경험하는 수준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결론은 어찌보면 이상한데 왜냐면 최근에 나온 다른 훌륭한 책인 앵거스 디튼(Angus Deaton)의 “위대한 탈출(The Great Escape)”을 읽고 난 뒤에는 세계가 그 어느때보다 평등해졌다고 결론지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견해가 맞을까요? 정답은 바로 당신이 각 국가를 하나씩 살펴보느냐 아니면 세계 전체를 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디튼의 책을 관통하고 있는 사실은 바로 지난 몇 십년간 개발도상국에 있는 수십억명-주로 아시아지역-이 극심한 수준의 빈곤으로부터 탈출했다는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불평등을 증가시킨 요인이 다른 국가에서는 수십억명에게 더 공평한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피케티의 훌륭한 책은 국가 내의 불평등, 특히 부유한 국가들 내에서의 불평등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의 책을 지지하는 열풍의 대부분은 자신이 살고 있는 국가내에서 중산층 지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나오는데 실제 이들은 전 세계를 대상으로 본다면 중상위층이거나 부유한 사람들입니다. 지난 15년간 피케티 교수가 엠마뉴엘 사에즈(Emmanuel Saez) 교수와 함께 출판한 불평등에 관한 사실들을 둘러싸고 논쟁이 있긴 하지만 저는 기본적으로 이들이 제시하는 결과들이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완전히 다른 방법론을 통해서 피케티와 사에즈 교수가 도달한 결론과 비슷한 결론을 도출하는 연구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피케티와 사에즈 교수는 논문에서 어떤 모델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피케티의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델이 없다는 점과 전 세계의 잘 사는 국가들에만 초점을 맞춘 피케티의 연구는 우리가 필요한 정책을 모색할 때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중산층 이상인 국가 내에서의 국민들간의 불평등이 아니라 선진국과 개발 도상국간의 불평등 문제를 줄이려고 할 때 피케티가 제시하고 있는 전 세계적 부유세를 과연 피케티의 지지자들은 얼마나 지지할 수 있을까요?

    피케티는 자본주의가 불공평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식민주의도 부당하지 않았나요? 어떠한 경우에도 전 세계적 부유세는 정치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 외에 실행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어려움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자본을 통한 이윤 축적의 속도가 지난 몇 십년간 크게 증가했다는 피케티의 주장은 옳지만 왜 이러한 일이 발생했는지에 대한 경제학자들 사이의 논쟁을 그는 크게 고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행히도 부유한 국가 내부에서의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면서도 여전히 개발 도상국의 장기적 경제 성장을 유지할 수 있는 더 나은 정책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소비세를 재조정하는 것이 과거의 재산 축적 과정에 부유세를 적용하는 것보다 훨씬 간단하고 더 효율적일 것입니다. 성장 친화적이면서도 불평등을 줄일 수 있는 대안들이 있는데도 왜 실현 불가능한 전 세계적 부유세를 제안하고 있는 것일까요?

    전 세계적 부유세 외에 피케티는 미국에서 80%의 한계 소득 세율(marginal tax rate on income)을 부과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저는 미국이 지금보다 강화된 누진 과세 제도를 특히 상위 0.1%에 실행할 필요가 있다고 믿지만 저는 피케티가 제안하는 80% 한계 소득 세율 적용이 심각한 인센티브 왜곡등을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불평등을 줄일 수 있는 좀 더 현실적인 정책들이 있습니다. 미국을 예로 들어보면 하버드의 제프리 프랭켈(Jeffrey Frankel) 교수는 저소득층에게 급여세를 없애고 고소득층에게 소득 공제의 범위를 좁히고 상속세를 늘리는 것이 불평등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한 적이 있습니다. 또 보편적 유아 교육 확대와 같은 정책은 장기적 경제 성장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경제 성장보다 불평등이 더 중요하다는 피케티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개발 도상국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전히 선진국의 경제 성장에 기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21세기가 해결해야 할 첫번째 문제는 여전히 아프리카와 다른 개발 도상국에서 빈곤으로 고통받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입니다. 상위 0.1%의 사람들이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전 세계적 불평등을 줄이는데 있어서 자본주의가 지난 30년간 놀라운 성과를 이뤘다는 것을 잊지는 맙시다. (Project Syndicate)

    국가 간 소득 불평등과 국가 내 소득 불평등, 어떤 것이 더 중요한가?

    옮긴이: 이 글은 조지 메이슨 대학(George Mason University)의 타일러 코웬(Tylor Cowen) 교수가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입니다.

    소득 불평등은 우리 시대의 정치적, 경제적 화두로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봤을 때 소득 불평등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는 확실한 통계는 없습니다. 사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지난 20년간 전 지구적 소득 불평등은 감소했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종종 간과하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세계은행(The World Bank)의 컨설턴트인 크리스토프 라크너(Christoph Lakner)와 룩셈부르크 소득 연구 센터(Luxembourg Income Study Center)에서 근무하는 블랑코 밀라노비치(Branko milanovic)가 최근 발표한 연구는 중국이나 인도의 경제 성장과 더불어 전 세계적으로 사람들 간의 불평등 수치는 줄어들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소득 분포를 10단계로 나눴을 때 (맨 아래가 1, 맨 위가 10) 미국의 하위 두 번째 그룹과 중국의 상위 8번째 그룹간의 실질 소득 비교, 1988-2011.

    소득 분포를 10단계로 나눴을 때 (맨 아래가 1, 맨 위가 10) 미국의 두 번째 그룹(미국 내에서 상대적으로 빈곤)과 중국의 8번째 그룹(중국 내에서 상대적으로 부유) 간의 실질 소득 비교, 1988-2011.

    물론 이러한 연구 결과가 가난한 사람들을 더는 돕지 않는 행동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사용되면 안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은 국가 내의 소득 불평등이 높다는 것이 항상 가장 중요한 이슈는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예를 들어 이민이나 자유무역에 관한 정책은 때때로 한 나라 안에서는 불평등을 증가시킬 수도 있지만 나라 간의 불평등을 감소시켜 전 세계를 좀 더 평등한 곳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국제 무역은 개발도상국 내에서 빈곤을 크게 줄였습니다. 수출 주도형 성장을 해온 중국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죠. 하지만 중국의 수출이 증가한 것은 중국 수입품과 경쟁을 하는 분야에서 종사하는 미국 중산층 일부의 소득 하락을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동시에 중국의 경제 성장은 미국 소득 상위 1%의 부를 증가시키기도 했습니다. 부유한 미국인들이 중국 기업의 주식을 보유한 경우 수출을 통해서 이러한 중국 기업들의 가치가 증가했으니까요. 따라서 중국의 경제 성장은 미국 내에서의 소득 불평등은 증가시켰지만 전 지구적으로는 번영과 소득 평등을 증가시켰습니다.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저숙련 노동자들이 미국에 이민을 온 것 역시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않은 미국인 노동자들의 소득에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지만, 이들을 가정부나 육아 담당으로 낮은 임금에 고용할 수 있는 부유한 미국인들에게는 많은 혜택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또 미국에 이민을 온 노동자들의 경우 이민 오기 전보다 소득이 크게 늘었고, 만약 이들이 미국에서 번 돈을 모국으로 보내는 경우 전 지구적 관점에서 보면 소득 불평등이 줄어드는 효과가 나타납니다. 미국만 놓고 보면 이러한 변화는 그리 달갑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요 문제는 바로 이렇게 좁은 시각입니다. 소득 불평등을 논의할 때 우리는 한 국가의 입장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소득 불평등이 감소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할 것입니다.

    “월가를 점령하라”와 같은 단체들은 소득 불평등이 증가하고 있고 자본주의가 우리를 실패로 내몰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현실을 더 정확히 반영한 메시지는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심각한 경제 문제들이 여전히 있지만, 전 세계는 점점 더 평등한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 진실이라 것입니다. 평등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한 국가 내에서 소득을 재분배할 수 있는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이 정책들에 대해 고려해봐야 하겠지만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재분배 정책은 분배할 부가 더 많을 때 전 세계적으로 더 많은 혜택을 가져옵니다. 미국의 경우 미국 사회 전체의 부가 늘어날 때 미국인들의 해외 투자가 늘어나고 해외 제품을 더 많이 살 것입니다. 또 이민자들을 흡수하는 것도 늘어나고 혁신도 증가할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전 세계적 소득과 평등에 큰 혜택을 가져올 것입니다. 즉, 진정한 평등주의자는 부를 극대화하는 정책을 옹호하는 경제학자의 주장을 지지해야 합니다. 이는 한 국가 내에서의 소득 불평등에 대한 우려를 덜 해도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소득 불평등 논의를 재조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 지구적 관점을 가진 평등주의자라면 자본주의와 경제 성장이 전 지구를 좀 더 평등하게 만들어 온 최근의 역사를 좀 더 긍정적으로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NYT)

    미국의 중산층은 더 이상 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지 않습니다

    미국의 중산층은 이제 더 이상 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지 않습니다. 소득 분포 최상위에 있는 미국인들의 부 축적은 다른 나라의 부자들을 크게 앞서고 있지만 중산층과 저소득층의 소득 상승폭은 오히려 다른 나라들에서 지난 30년간 더 빨리 증가했습니다. 캐나다의 경우 중산층의 세후 소득은 2000년만 해도 미국 중산층보다 훨씬 낮았지만 지금은 더 높습니다. 유럽의 저소득층 역시 미국의 저소득층보다 더 높은 소득 수준을 보이고 있습니다. 지난 35년간 여러 나라에서의 소득을 기록해 온 룩셈부르크 소득 연구(Luxembourg Income Study: LIS)에 따르면 미국의 중산층과 저소득층이 늘어난 소득 불평등의 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습니다. 미국의 경제 성장률은 다른 국가들과 비교해 같거나 조금 더 높은 수준이지만 문제는 경제 성장의 혜택을 소수의 미국인들만 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캐나다의 중위 소득(median income)은 2010년에 미국을 따라 잡았고 현재는 미국을 앞질러 있습니다. 서유럽 국가들에서의 중위 소득은 여전히 미국에 뒤쳐져 있지만 영국이나 네덜란드, 혹은 스웨덴과 같은 국가들은 10년 전에 비해 미국과의 격차를 상당히 좁혔습니다.

    미국과 다른 유럽 국가들 사이의 세후 중위 소득 비교, 1980-2010.

    미국과 다른 유럽 국가들 사이의 세후 중위 소득 비교, 1980-2010.

    미국의 저소득층이 겪는 어려움은 중산층보다 더 심각합니다. 소득 하위 20%에 분포하는 미국인들의 소득 수준은 같은 소득 분포 구간에 위치하는 캐나다,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혹은 네덜란드 사람들의 소득보다 낮습니다. 35년 전만 해도 상황은 반대였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놀라운데 왜냐면 가장 흔하게 인용되는 경제 지표들, 즉 1인당 GDP와 같은 지표에서는 여전히 미국이 (인구 규모가 일정 이상인 국가들 사이에서는) 1위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1인당 GDP와 같은 숫자들은 평균치만 보여줄 뿐 소득 분포에 대해서는 보여주지 못합니다. 미국에서 발생한 소득이 소득 분포 최상위에 위치한 고소득층들에게 집중됨으로써 미국의 중산층과 저소득층의 소득 성장 속도는 다른 나라 중산층의 소득 성장 속도보다 뒤쳐져 있습니다. 하버드대학 경제학과의 로렌스 카츠(Lawrence Katz) 교수는 말합니다. “미국 중산층이 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다는 것은 더 이상 사실이 아닙니다. 1960년대에 미국 중산층은 그 어떤 나라의 중산층보다 훨씬 부유했습니다. 1980년대에도 여전히 부유했고 1990년대에도 마찬가지였죠.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2010년 기준으로 미국인의 1인당 중위 소득은 18,700달러였습니다 (4인 가족 기준 세후 소득 75,000달러). 이는 1980년보다 20% 상승한 것인데 문제는 물가 상승률을 감안하면 2000년 이후로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경우 1인당 중위소득은 2000년과 2010년 사이에만 20%가 상승했고, 네덜란드에서는 같은 기간 14%가 상승했습니다. 미국 중산층과 저소득층의 소득 상승폭이 둔화된 이유로는 다음 세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첫째, 지난 30년간 미국인들의 교육 수준은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훨씬 증가폭이 느렸습니다. 그 결과 미국 경제에서 고숙련, 고소득 직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줄었습니다. OECD 자료에 따르면 55~65세 사이의 미국인들의 경우 글을 읽고 쓰는 능력, 산술 능력, 그리고 기술 습득의 측면에서 선진국 평균보다 모두 높습니다. 하지만 젊은 미국 세대들의 경우 이는 더 이상 사실이 아닙니다. 16~24세 미국인들의 경우 같은 항목에서 선진국 평균에 훨씬 미치지 못하며 거의 가장 낮은 수준을 보이고 있습니다. 둘째, 미국 기업들은 다른 선진국에 있는 기업들에 비해서 중산층과 저소득층에 소득을 덜 배분하고 있습니다. 다른 선진국들보다 미국 기업의 CEO들이 훨씬 더 많은 연봉을 받고 있지만 미국의 최저 임금은 다른 나라들보다 낮습니다. 노동 조합도 약합니다. 마지막으로, 캐나다나 서유럽 국가 정부들은 저소득층과 중산층의 실질 소득을 높이기 위해 미국 정부보다 적극적으로 재분배 정책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LIS의 디렉터인 자넷 고닉(Janet Gornick)은 세금이나 정부 복지 정책 등이 적용되기 전 시장 소득(market income)으로만 본다면 미국과 선진국의 차이는 실질 소득의 차이보다는 적은 편이라고 지적합니다. 하지만 미국 고소득자들은 유럽보다 더 적은 세금을 내며 미국 정부 역시 재분배 정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 결과 실질 소득의 불평등은 미국에서 훨씬 더 커지는 것입니다.

    물론 다른 나라의 중산층들이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유럽의 많은 국가에서는 미국과 마찬가지로 어린 학생들을 둔 부모들은 자식의 대학 등록금을 어떻게 내야 할지 우려하고 있고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부모 세대가 자신들 세대보다 더 많은 기회와 혜택을 누렸다고 믿습니다. 실업은 거의 모든 국가에서 걱정거리입니다. 하지만 설문 조사에 따르면 캐나다와 서유럽 사람들이 느끼는 현실에 대한 불만은 미국인들만큼 부정적이지는 않습니다. 37세의 스웨덴 소방관은 요나스 프로예린(Jonas Frojelin)은 말합니다. “경제 위기가 우리 삶에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어요.” 간호사인 아내와 함께 살고 있는 요나스 씨는 자신과 아내 모두 1년에 5주씩 휴가를 쓸 수 있으며 국가가 제공하는 포괄적인 의료 보험의 혜택을 받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최대 3년까지 유급 출산 휴가를 쓸 수 있고 세 살과 여섯 살 된 아이들은 국가가 대부분을 지원하는 육아 시설에 보내고 있습니다. 육아 시설에 요나스씨가 쓰는 돈은 소득의 3% 정도 입니다. 복지 예산이 미국보다 훨씬 큰 스웨덴에서 1인당 GDP 성장은 지난 30년간 미국보다 빨랐습니다. 스웨덴에서 대학 졸업생이 크게 증가하고 따라서 고숙련 직업의 성장이 가능해지면서 경제 성장 속도도 빨라진 것입니다. (NYT)

    국가별 2000년 이후 중산층의 소득 성장율.

    국가별 2000년 이후 중산층의 소득 성장율.

    불평등의 시대, 저소득층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 미래에 대한 희망

    시카고 남쪽의 매우 낙후된 지역에서 고등학생들의 멘토링을 담당하고 있는 팀 잭슨(Tim Jackson) 씨의 임무는 학생들로 하여금 미래에 희망에 있다고 확신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가 멘토링을 담당하고 있는 하퍼 고등학교(Harper High School)에 다니는 남학생들은 모두 어려운 유년기를 겪었고 저소득층입니다. 하퍼 고등학교에 등록한 학생들 가운데 절반이 5년 안에 학교를 그만두는데, 이는 시카고에서 가장 높은 수준입니다. 이 동네는 훔친 자전거를 두고 일어난 논쟁이나 한 남학생들을 두고 두 여학생이 페이스북에서 벌인 설전이 실제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는 곳입니다. 잭슨 씨의 임무는 이러한 비극을 막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잭슨씨는 학생들에게 인생에 목적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해줘야 합니다. 하지만 이 청소년들에게 미래의 삶이 지금의 삶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설득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왜냐면 이들 주변에 좋은 예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소득 불평등은 지난 몇십 년간 급속히 증가했고 이제 경제적 기회는 부유하고 능력 있는 사람들만 누리고 있으며, 이것이 불평등을 영속화시키고 있다고 사람들은 믿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실제로 이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는지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오늘날의 불평등이 다음 세대들의 사회 계층 이동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일까요? 최근 두 경제학자인 멜리사 커니(Melissa Kearney)와 필립 레빈(Phillip Levine)의 연구는 소득 불평등이 저소득층 청소년들의 의사 결정을 어떻게 방해하는지, 또 그 결과로 어떻게 소득 불평등이 가속화되는지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커니 교수와 레빈 교수의 논문은 최하위 가구의 소득과 중산층 가구의 소득 격차가 큰 지역일수록 저소득층 남학생들이 고등학교를 중퇴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최상위 부자들과 나머지 가계들의 소득 격차가 아니라 중간 소득 가계와 저소득 가계의 격차가 저소득층 학생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큰 원인이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저자들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만약 저소득층 출신 아이가 자신의 현재 상태에서 중산층으로 도약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면 열심히 노력할 인센티브가 없어집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중퇴하는 것보다 평균 38%의 소득을 더 벌 수 있다거나 대학을 졸업하면 그 위에 19%를 더 벌수 있다는 간단한 통계만으로는 이들을 설득하기에 역부족입니다. 자신들과는 너무 동떨어진 이야기로 들리기 때문이죠.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는지 없는지는 특히 저소득층 청소년들의 행동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필라델피아와 애리조나 주 소년원에 수감되었던 청소년들을 7년간 추적한 연구에 따르면 자신이 일찍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청소년일수록 더 많은 범죄, 더 심각한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다른 두 명의 경제학자인 가란스 게니콧(Garance Genicot)과 드브라쉬 레이(Debraj Ray)가 발전시킨 모델에 따르면 한 개인의 현재에서 도달 가능해 보이는 미래에 대한 희망은 개인으로 하여금 교육에 더 투자하도록 만들지만, 만약 개인이 도달하고 싶어하는 수준이 현재 상황과 너무 동떨어져 있으면 이는 오히려 개인에게 절망감을 가져다주고 교육에 관한 투자를 감소시키는 경향을 보이게 됩니다.

    커니와 레빈 교수의 연구는 불평등이 미국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가치있는 새로운 통찰을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이는 최근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과 중퇴한 사람 사이의 소득 격차가 계속 증가해 왔음에도 저소득층 학생들의 고등학교 졸업률이 전혀 오르지 않은 이유를 설명해줍니다. 소득 격차가 증가하면 고등학교를 마치려는 인센티브가 증가해야 하는데 이들에게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고 고등학교를 마치는 것 자체가 이룰 수 없는 꿈처럼 보였기 때문에 고등학교 졸업률에 전혀 변화가 없었던 것이죠. 커니와 레빈 교수의 연구는 미국의 “기회의 땅”이라는 인식에 큰 타격을 주고 있습니다. 저소득층 학생들에게 기회는 단순히 얻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상상하기도 어려운 것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예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커니 교수는 말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해결책은 저소득층 청소년들에게 희망이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일련의 정책들입니다.” (NYT)

    자격 없는 부자들 (The Undeserving Rich)

    미국 사회에서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소득 불평등의 현실은 냉엄합니다. 1970년대 이후 소득 분포 하위 50%의 노동자들의 물가 상승률을 감안한 실질 임금은 제자리거나 하락한 반면, 소득 분포 상위 1%의 실질 소득은 4배 이상 증가했고 상위 0.1%의 소득은 그 보다 훨씬 많이 증가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어떠한 정책이 해결책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우리는 논쟁을 벌일 수는 있지만 분명한 사실(Facts)은 논쟁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엄연한 사실을 두고서 사람들은 논쟁을 벌입니다. 아예 사실을 잘 못 주장하거나 사실을 통계적 모호성으로 포장해서 오늘날 부유한 사람들은 그런 지위를 누릴만한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를 이용합니다.

    아예 사실을 잘 못 주장하는 경우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최근 월스트리트저널의 브렛 스테픈스(Bret Stephens)는 칼럼을 통해서 오바마 대통령의 정책에 대해서 사실 관계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비판한 뒤에 오늘날의 소득 불평등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주장의 근거는 바로 과거에 비해서 모든 사람들이 잘 살게 되었다는 것인데 그 근거로 미국 소득 분포의 하위 20%의 소득도 1979년에 비해 186%나 올랐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이 의견이 뭔가 잘못된 것 처럼 들리나요? 네 맞습니다. 그가 말한 186%는 명목 소득을 기준으로 한 것일 뿐 물가 상승률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입니다. 미 인구 조사국이 물가 상승률을 감안 한 뒤 계산한 소득 상승폭을 보면 실제로 하위 20%의 실질 소득은 감소했습니다 (오, 한 가지 더 보태자면 지금 제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에서도 월스트리트저널은 이 오류를 수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렇게 뻔한 실수 말고 부자들을 옹호하는 좀 더 복잡한 주장은 무엇일까요? 저는 이미 예전에 칼럼을 통해서보수주의자들은 빈곤을 가난한 사람들이 가진 특징의 문제로 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개인적 특성이 가난을 결정한 시대도 있었겠지만 지난 30년간을 돌아보면 가난의 가장 큰 원인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적정 수준의 임금을 제공하는 일자리가 턱 없이 부족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가난한 사람은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가난하게 산다는 편견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보수주의자들은 말합니다. 부유한 사람이 부유한 이유는 바로 그들이 인생에서 제대로 된 선택을 했기 때문이라고. 그들은 좋은 교육을 받았고 결혼을 한 뒤 이혼 하지 않고 안정적인 결혼 생활을 유지했다고. 이 주장의 잘못된 점은 무엇일까요? 바로 가난한 사람에게는 주어지지 않은 기회가 마치 공정하게 있었던 것처럼 이야기 합니다.  예를 들어 가난한 집 아이가 주립 대학의 등록금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지원은 줄어드는 상황에서 어떻게 대학 교육을 받을 수가 있을까요? 심지어 가계 안정성 (family stability) 역시 경제적 상황에 의해서 결정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대로 된 고용 기회가 없는 경우에 가정의 평화는 쉽게 깨어지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을 하는 보수주의자들도 불평등이 증가하는 사회의 승리자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소득 상위 20%, 혹은 5%가 아무런 문제 없이 잘 살고 있다고 말하지만 화이트칼라 직종의 전문직들은 그냥 저냥 잘 지내는 정도입니다. 불평등한 사회의 진짜 승자들은 이 보다 훨씬 적은 수의 사람들, 즉 상위 1% 혹은 상위 0.1%의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보수주의자들은 부자들이 대접받을만 하다라는 편견을 유지 시키기 위해서 훨씬 많은 사람들을 부자의 범주에 넣어서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지적하는 이러한 현실이 어떤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우리 사회의 증가하는 불평등에 대해서 다르게 해석하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을 왜곡해서는 안됩니다. (NY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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